1.
<등단 시인방>에 '게국지 하면 생각나는 분'이란 글이 떴다.
무봉 김도성 님의 글에서 나는 사라져가는 농산어촌의 옛모습을 떠올렸다.
그리고는 아래처럼 댓글 달았다.
나한테는 많은 글감이 떠오르기에.
"거듭 읽었습니다. '게국지'라는 낱말도 어학사전에서 검색했지요.
돌게, 능쟁이(참게), 꽃게 등으로 담은 게장의 일종이군요.
충남 서해안 갯바다 근처에서 사는 주민들이라야 이런 '게국지'를 만들고, 요리해서 먹겠군요.
저는 보령 무창포 갯바다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살았지요. 남포면 용머리 갯바다가 출신인 어머니는 무챙이갯바다에서 게를 잡고, 또 함지박을 이고는 게를 팔러온 갯마을 아낙네한테도 게를 사서 젓 담았지요.
이런 게로 국을 얼큰하게 끓이면 정말로 맛이 있었지요.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보령 고향 가는 길에 에둘러서 서산IC 또는 홍성IC 쪽으로 빠져서 갯바다에 들러야겠습니다.
<게국지> 사서 먹으려고요.
갯내음새 물씬 나는 글,
아름다운 우리말이 잔뜩 들어 있기에 정말로 반갑고, 고마워서 눈물이 살짝 납니다.
저한테도 갯것을 좋아하는 어머니가 있었기에..
지금은 많이도 사라졌지만 옛 풍속이 아련한 그리움으로 남았기에.
글 정말로 고맙습니다. 또 기다립니다.
갯바다를 막아서 간척지를 만들었던 것들이 저한테는 때로는 화가 납니다.
갯벌문화, 생태문화가 많이 사라졌기에..
아름다운 우리말, 사라져가는 옛말이 많이도 들었기에 여기에 옮겨봅니다.
장판, 아랫목, 윗목, 검정 무명이불, 석유등잔, 굴뚝, 사기요강, 새우등, 이부자리, 까치, 생솔가지, 장독 뚜껑, 소 여물, 외양간, 누렁이, 구수(구유통), 안마당, 장작 팼다, 머슴, 백석지기 농사, 골방, 가마솥, 안채, 대청마루, 노적가리, 갈치구이, 게국지, 황석어젓, 배추 겉대, 박하지(게), 아궁이, 군둥내(군내), 숟갈, 똬리 틀다 등.
1950년대, 60년대의 농촌(산촌, 어촌 등)의 실상을 조금은 기억하는 저한테는 위 낱말이 정말로 구수하고 정겹게 들리는군요.
사라져가는 토종문화, 옛말을 조금이라도 되살려 쓰는 문학이었으면 합니다.
<우리의 것은 소중한 거여>
문학의 글이 이래야겠지요.
어떤 이들은 왜그리 어려운 한자말을 많이 쓰는지, 심지어는 서양외래어도 글 쓰고, 괴상하게 서양식 단어를 만들대요.
삶이 있는 글이기에
저한테는 무척이나 많은 글감이 떠오릅니다."
1.
1949년 1월생인 나.
2021년 1월인 지금에서 과거를 되돌아 본다.
아래는 인터넷에서 발췌했다.
이 글은 배운 사람이 쓴 글이다.
사실은 배우지 못한 사람이 훨씬 많다.
서해안 산골마을, 갯바다 근처에서 살았던 고향 친구들은 대부분 초등학교(6학년) 출신이다.
아래 내용 가운데 일부는 공감이 간다.
내가(70-80세대들이) 살아온 세월
1. 나는 '전깃불'이 없고 '호롱불'도 아닌 등잔불을 켜놓고 공부했다
2. 나는'실내화장실'이 없어 엄동설한 한겨울에도 바같 뒷간에서 봤다.
3. 동네 공동우물에서 양동이로 물을 길어다 먹어야 했다.
4. 목욕탕이 없어 가마솥에 물을 끓여 부엌에서 목욕을 했다.
5. 세탁기가 없어 한 겨울에도 개울가에 나가 빨래를 했다.
6. 나는 6km를 걸어나가 통학열차를 타고 학교에 다녔다.
7. 구두도 운동화도 없어 검정고무신을 신고 초등학교에 다녔다.
8. 대부분이 이발비가 적게 드는 까까중 머리로 중학교까지 다녔다.
9. 책가방이 없어 보자기에 책을 싸서 허리에 매고 초등학교에 다녔다.
10. 여자애는 고무줄넘기하고 사내는 새총을 만들어 새를 잡으며 놀았다.
11. 초등학교에서 주는 강냉이 가루로 빵이나 꿀꿀이 죽을 만들어 끼니를 때워야만 했다.
12. 낮에는 가사일(농사일 돕기, 풀베기, 나무하기, 소먹이기, 동생돌보기)을 하고 밤에 공부를 했다
13. 고등학교 때까지 다섯 알 짜리 주판을 굴리면서 셈을 했다. 급수를 따야 은행 등 좋은 직장에 취직했다.
14.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일제히 시험을 치르고 등수를 매겨 등수 경쟁을했다.
15.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본고사 입학시험을 치러 합격해야 상급학교에 진학을 했다
16. 가난하여 진학하지 못하면 식모살이 아니면 구로공단 같은 공장에서 공돌이 공순이 버스차장을 하면서
땀흘려 일을 하고 야간에 교복 입고 야간학교에 다니는 청소년도 많았다.
17. 대부분 신혼초에는 살림집을 구할 돈이 없어 거의 모두가 사글세 단칸방부터 시작하여 전세로 옮겨
다니다가 살집을 마련했다. 나는 결혼 후 10년에 내 집을 마련했다.
18. 우리는 '월남전' 세대였다. 목숨걸고 전쟁터에서 돈을 벌어 재산을 마련했다.
19. 우리는 '광부와 간호사' 세대였다. 독일에 가서 석탄 광부와 시체 닦는 일로 돈을 벌어 와야 했다.
20. 우리는 '중동 노동자' 였다. 열사의 나라 중동지역에서 가족과 자식을 위해 돈을 벌었다.
일전 '꼰대'에 관한 글이 떴다.
나는 글감이 떠오르기에 나도 '꼰대'라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나이가 자꾸만 많아지는 나는 곧 만나이 72살이 된다.
<한국 국보문학 카페>에서 남의 글을 읽고, 또 나도 잡글을 올리면서 내 소소한 경험에 비춰서 꼰대질을 할 게다.
더러는 남한테 미움이나 받을 게다.
나를 반성하려고 인터넷에서 조금 퍼 온다.
꼰대의 6H 원칙
"Who: 내가 누군줄 알아?
When: 우리 때는 말야~~~
Where: 어디서 감히~~~
What: 네 놈이 뭔데~~~
Why: 내가 그걸 왜~~~
How: 어떻게 나한데~~~
이 모든 문장의 기본 원칙은 '완성된 나'와 '미완성의 너'를 기준으로 정의가 되는 것이다.
첫댓글 저도 가난한 1960년대에 태어나서 고생을 했기에
충분한 학용품이 없었던 세대입니다
지금은 모든 것을 풍족하지요
조 선생님은 고생하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방앗간집 딸이면 부자인데... 더우기 객지인 서울로 올라와 학교 다녔으면...
서해안 시골마을...마을이장은 제 초등학교 친구.
초등학교 학력이 전부인 친구는 객지에서 돌일(석공)하다가 귀향... 이장직을 20여 년 째 하지요.
지나간 60, 70년대를 살았던 분들이 열심히 일해서 일궈낸 조국근대화이군요.
저는 농촌에서 새마을운동을 조금 지켜봤지요. 마을도로를 더 넓히고, 산림녹화 현장에도 참가하고.
저는 공부 더 한다고 객지인 대전으로 다시 떠났고요.
그 당시를 살았던 이들이 지금은 꼰대세대일까요?
70~80대의 삶이 그랬습니다
호롱불 밑에 공부 했지요
고운글 즐감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댓글 고맙습니다.
저는 호롱불이 아니라 등잔불에서 책 읽었지요.
왕솔밭에 나가서 괭이로 땅 파고, 솔나무 뿌리를 톱으로 잘라서..
그거 자귀로 뽀개서 불 붙이면 끄으름이 나오면서 어둠을 몰아냈지요.
서해안 산골마을에는 1972년 여름에서야 처음으로 전기불이 들어왔지요.
마을사람이 '만세' 부르면서 좋아했지요.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었기에...
우물 파고, 함석으로 만든 트레박으로 물을 길어서 퍼 올리고, 나중에는 펌프가 등장했고, 더 나중에는 자동모터가 등장했고, 3년 전에서야 마을에 상수도가 공급되었지요.
아직도 농산촌에는... 문명의 이기가 더디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