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 섬유 비날론]
비날론은 원래 1939년 일본 교토제국대학 다카쓰키(高槻) 화학연구소에서 개발된 세계 두 번째 인조섬유다. 한국인 유학생 이승기(리승기) 박사와 사쿠라다 이치로, 가와카미 히로시 등이 폴리비닐 알코올(PVA)을 기반으로 합성한 섬유였으며, 1938년 미국 듀폰사가 개발한 나일론에 자극받아 개발된 제품이었다.비날론은 가볍고 질기며 화학약품에 강하고, 천연 섬유에 가까운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원래 이름은 ‘비닐론(Vinylon)’이었지만, 이승기가 월북하여 북한에서 이를 보급하자, 김일성이 이름을 ‘비날론(Vinalon)’으로 바꾸었다. 그 이유에 대해 김일성은 “옛 조상들이 무명을 짤 때 ‘날실, 들실’이라 했는데, 우리 식으로 부르자”며 ‘비날론’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오늘날 ‘비날론’이라는 명칭은 북한에서만 쓰이고, 일본이나 다른 나라에서는 여전히 ‘비닐론’이라 부른다.
북한은 석유는 없지만 석탄, 석회석, 물은 풍부했다. 김일성은 이를 기반으로 “남의 기술에 의존하지 않고 우리 손으로 만든 섬유로 인민의 옷을 짓자”는 구호를 내걸었다. 1961년 함흥에 세워진 ‘2·8비날론연합기업소’는 그 상징이었다. 그는 이 공장을 시찰하며 “비날론은 주체사상의 화학적 구현”이라며 자립경제의 상징으로 선포했다.‘2·8’이라는 이름은 북한군 창건일에서 따왔고, 이 공장은 국가총동원 체제 하에서 가동되었다. 비날론으로 만들어진 교복과 군복, 침구류와 작업복은 북한 주민들의 일상을 지배했다. 입는 것 자체가 체제 충성을 상징했고, 그 생산과 착용이 ‘사상적 올바름’으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주민들의 기억은 전혀 다르다. 탈북자들에 따르면, “비날론 내복은 너무 뻣뻣해서 땀이 나면 그대로 얼어붙었다”거나 “치마가 통풍이 안 되어 불쾌했고, 바지나 속옷이 마찰음까지 냈다”고 한다. “입으면 벗기도 힘든 가시옷”이라는 표현은 농담 같지만 실제 체험에서 비롯된 말이다.염색도 어려워 대부분 회색이나 백색 계열이었고, 세탁을 거듭하면 빠르게 색이 바랬다. 그럼에도 주민들은 배급 체계에 따라 비날론 옷을 입을 수밖에 없었고, 공장 노동자들은 ‘비날론 전사’라 불리며 하루 목표량을 채우기 위해 새벽부터 밤까지 일해야 했다.2009년 아시아프레스 리포터 김동철이 순천 비날론 공장을 촬영한 영상에는 녹슨 파이프, 방치된 설비, 잡초가 무성한 작업장, 그리고 주민의 회한 섞인 증언이 담겼다. “여긴 기적이 아니라 유령 공장이었어요.” 이는 선전과 현실 사이의 깊은 간극을 보여주는 증언이었다.
1970년대 후반부터 비날론 산업은 경제성과 수요 면에서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섬유는 불편했고, 공정은 비효율적이었으며, 에너지 소비는 심각했다. 1990년대 들어 소련 붕괴와 ‘고난의 행군’으로 인해 연료와 전기가 끊기면서 공장은 사실상 가동을 멈췄다. 수천 명의 노동자가 있던 곳은 유령처럼 텅 비었고, 일부 설비는 농지로 전환되거나 철거되었다.
2010년, 김정일은 공장의 재가동을 지시하며 ‘비날론의 부활’을 선포했다. 그러나 주민들의 반응은 냉소적이었다. “중국산 티셔츠가 더 부드럽고 싸다”, “이제 와서 비날론을 왜 입나”는 실용적 시선이 이미 생활을 지배하고 있었다.
비날론에 대한 국제적 평가는 냉정했다. 초기에는 소련과 중국도 관심을 가졌으나, 곧 포기했다. 복잡한 공정, 높은 에너지 소비, 낮은 경제성 때문이었다. 두 나라는 석유화학 기반 섬유로 방향을 틀었고, 비날론은 ‘정치적으로 유용하되, 산업적으로 무의미한 모델’로 분류됐다.
로이터는 “비날론은 이념을 위한 기술의 전형적인 사례”라고 분석하며, 북한이 실패를 인정하지 않고 상징을 유지하기 위해 재가동을 강행한 것이라 평가했다. 기술보다 구호가 앞섰고, 과학보다 정치가 앞섰던 결과였다.
2020년대 현재, 비날론은 북한 선전물과 교과서 속에서만 살아 있다. 실생활에서는 중국산 면직물이나 한국산 중고 의류가 대세이며, 주민들은 비날론을 입지 않는다. 하지만 김일성·김정일·김정은 3대를 거쳐 여전히 ‘주체섬유’라는 타이틀은 체제의 상징처럼 유지되고 있다.
비날론은 더 이상 옷을 짓지 않지만, 체제의 구호를 짓는 데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그 구호의 이면에는 불편함을 감내했던 주민들, 녹슨 설비 속에 사라져간 노동자들의 기억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