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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1)
고전 10:1-13
1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3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4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5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6 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 한 것 같이 즐겨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7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8 그들 중의 어떤 사람들이 음행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음행하지 말자
9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자
10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11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고전 10:1-13 / [우상숭배에 대한 경고]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옛날 우리 조상들이 광야에서 겪은 일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구름을 보내어 모든 사람이 안전하게 바다를 건너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셨습니다. 2) 이것을 그들의 `침례'라고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 그들은 지도자인 모세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바다와 구름 가운데서 침례를 받은 것입니다. 3-4)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적을 나타내셔서 광야에서 먹을 음식과 마실 물을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들이 마신 물은 그리스도께서 주신 물이었습니다. 그리스도는 능력 있는 바위로서 그들과 함께 계셨는데, 그들은 바로 그 바위에서 흘러 나오는 물을 마시고 새로운 힘을 얻었습니다. 5) 그러나 그들 대부분이 ㄱ)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았으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광야에서 모조리 쓸어 버리셨습니다. (ㄱ. 70인역 민14:16) 6-7) 이 일을 통하여 우리는 그들처럼 악한 일을 하거나 우상을 숭배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를 받습니다. 성경에도 ㄱ) `이튿날 그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 번제물과 화목제물을 바치고 먹고 마시며 일어나 신나게 놀았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ㄱ. 출32:6) 8) 우리에게 주는 또 하나의 교훈은 음행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음행을 일삼다가 하루에 2만 3천 명이나 죽어 넘어졌습니다. 9) 또 주께서 얼마나 참아 주시는가를 시험해서도 안 됩니다. 그런 자들은 다 뱀에 물려 죽었습니다. 10) 또 하나님을 향해 불평을 하거나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대하시는 일에 불만을 늘어놓아서도 안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보낸 천사들에게 멸망당하였습니다. 11) 그들에게 일어났던 이러한 일들은 모든 사람에게 경고의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이 기록됨으로써 이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훌륭한 교훈이 되고 있습니다. 12) 그러므로 조심하십시오. 누가 언제 같은 죄를 범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13) 여러분에게 파고드는 악한 욕망은 새로운 것도 별다른 것도 아니라는 점을 기억하십시오. 많은 사람들도 여러분보다 앞서 같은 문제에 부딪쳐 싸워 왔기 때문입니다. 도저히 대항할 수 없는 유혹이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물리칠 수 없을 만큼 강한 유혹을 당하도록 내버려 두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약속해 주셨고 또 그분은 말씀하신 대로 실행하십니다. 유혹을 피할 수 있는 길을 보여주실 하나님을 믿고 여러분은 인내로써 그 유혹을 극복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상의 제물을 사용하여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자유의 의미를 설명합니다.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1-5) 이스라엘은 출애굽 이후에 엄청난 특권을 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며 함께 계시고 보호하신다는 것을 확실히 체험하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하나님께 터무니없는 불평을 하였습니다. 결국 그들 중 다수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고 소수만이 들어갔습니다(민 26:65). 바울은 고린도의 성도들에게 세례를 받고, 성만찬에 참여한 것만으로 구원받았다고 생각하여 절제하지 못하고 교만하여 믿음의 길을 걷지 않으면, 결국 옛 이스라엘의 조상들과 같이 버림받을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우상 숭배자가 되지 말라(6-7) 유대인의 조상들이 광야에서 멸망 하게 된 첫 번째 죄악은 우상 숭배였습니다(출 32:1-6).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시내 산에 올라간 사이에도 이스라엘은 금 송아지 신상을 만들어 우상을 섬길 정도였습니다. 바울이 사건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고린도의 성도들에게 매우 적절한 예가 됩니다. 당시 고린도에도 우상 숭배가 만연했고, 고린도의 성도 중에서 여전히 우상을 예배하는 신전 의식에 참여하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음행하다가 죽었나니(8) 두 번째 죄악은 간음이었습니다(민 25:1-9). 이스라앨 백성들이 모압 땅에 거주할 때에 모압 여인들의 유혹을 받아 바알브올 숭배에 참가하였던 것을 예로 듭니다. 이 때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이만 사천 명이 염병으로 죽었습니다. 바알브올은 모압의 여사제들과 벌이는 매춘행위를 숭배 의식으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고린도의 사람들은 비너스 여신을 섬겼는데 이들도 신전의 여사제와 간음하는 의식이 있었습니다.
주를 시험하다가 멸망하였나니(9-13) 세 번째 죄악이 하나님을 시험한 것이며(민 21:4-9), 네 번째 죄악은 하나님을 원망한 것입니다. 그들은 험한 광야 여정과 만나에 대해 하나님을 원망하여 하나님을 시험하는 죄를 범했습니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불뱀에 물려 죽었습니다. 고린도의 성도들 중에는 우상의 종교 의식에 참여하면서 하나님의 보호하심, 용서와 자비를 시험하는 사람이 있었으며, 바울의 사도권을 불신하는 사람이 있었던 것입니다.
적용: 조상들의 죄와 결과는 단순한 과거의 역사가 아니라 현시대에도 경계와 교훈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확실히 체험하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광야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순종하는 죄를 범하였습니다. 또한 그들은 금송아지 우상을 섬기고, 바알브올 우상을 섬기며 여인들과 음란한 교제를 나누고, 죄에 대한 하나님의 관용과 구원의 능력을 시험하고,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다가 치명적인 염병 등으로 멸망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을 통하여 고린도 교인들도 끊임없는 경건과 영적인 각성 없이는 멸망당한 이스라엘 조상들과 같은 전철을 밟게 될 것이라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 설 교 >
역사와 현실
고전 10장 / 이동원목사
오늘 고린도전서 10장을 함께 같이 묵상하시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입니다. 특별히 1절부터 13절까지의 말씀을 본문으로 우리가 역사와 현실이라는 제목으로 이 말씀을 함께 묵상하겠습니다. H. G 웰스라는 유명한 역사가가 있었습니다. 그가 남긴 역사에 관한 명언 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역사를 통해 배우는 가장 현저한 사실은 우리가 역사를 통해서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역사는 되풀이된다. 그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과거의 역사에서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하기 때문에 Lesson을 배우지 못하기 때문에 과거의 실패 과거의 오류 과거의 비극이 오늘이라는 역사의 장에서, 또 내일이라는 역사의 장에서 그대로 반복된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학생이 성적이 불량해서 그 아버지와 함께 학교에 불려 왔습니다.. 아버지가 그 담임 선생님과 성적에 관한 여러 가지 카운슬링과 얘기를 나누다가 갑자기 그 학생이 학생의 담임 선생님이 역사과목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선생님, 우리 아들이 선생님이 가르치는 역사과목의 성적은 어떻습니까?' 그랬더니 이 선생님이 그 아버지에게 반문을 하시더래요. '아버님은 옛날 학교 다니실 때 성적이 어떠셨는데요' 그래서 그 아버지가 머리를 긁으면서 '저야 뭐 형편이 없었지요.' 역사 선생님 가라사대 '역사는 반복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를 바울 사도가 회고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역사를 또 한번 공부하거나 역사를 알리기 위해서 역사를 회상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역사에 대해서 매우 인상깊은 단어를 두 개의 단어를 사용합니다. 6절에 보시면 역사는 거울이다. 역사는 거울이다. 자 고린도전서 10장 6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거울이라는 낱말이 나옵니다. 역사는 거울이다. 우리를 돌아볼 수 있는 우리의 현주소를 파악해 볼 수 있는 거울입니다. 역사는 거울입니다. 11절에 보시면 거울일 뿐만 아니라 역사는 경계다. 역사는 경계 경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역사는 거울일 뿐만 아니라 역사는 경고입니다. 역사는 경고인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의 역사를 통해서 경고를 받아야 합니다. 오늘의 삶을 위해서 내일의 삶을 위해서 우리는 역사를 통한 경고를 경계를 받아야 합니다. 역사는 경계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과거의 역사 특별히 구약 시대의 역사를 통해서 지금 1세기의 고린도 사회, 바울이 편지를 띄우고 있었던 고린도 사회, 특별히 그 사회 안에 존재하고 있었던 고린도 교회의 현실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적 실패의 경험이 오늘을 사는 교회의 성도들의 실패가 되지 않도록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11절의 말씀처럼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그렇다면 이 말씀은 종말의 시간이 더 가까워진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을 위한 여전히 변함없는 거울의 Lesson이고 경계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자, 우리는 먼저 본문을 통해서 역사 속에서 누렸던 특권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과거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들이 누릴 수 있었던 특권들, 1절부터 4절까지의 내용이예요. 우리 1절부터 4절까지 한번 같이 읽겠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여기서 바울 사도는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나간 과거의 역사 특별히 구약시대의 역사 속에서 그들이 누릴 수 있었던 영적인 특권들, 혹은 영적인 축복들을 회고합니다. 왜 회고하냐면 그들이 이런 놀라운 특권들을 경험했고, 축복들을 참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얼마나 빨리 그들이 이런 축복들을 떠나갔고, 또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가서 그들이 범죄할 수 있었는가를 보여주고자 한 것입니다. 축복은 축복입니다. 귀한 것입니다.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러나 어제의 축복이 반드시 오늘의 삶의 승리를 보장하지는 못합니다. 어제의 은혜의 체험이 오늘의 삶의 장에서 우리의 승리를 guarantee 하지는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그걸 말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과거에 누릴 수 있었던 축복 몇 가지 특별히 다섯 가지 축복을 회상합니다.
첫째는 그들이 구름 아래 있었다. 구름 아래 있었다. 1절에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그랬어요. 구름 아래 있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행진할 때, 구름 아래 기둥이 하나님이 준비하시고 보내신 구름 기둥이 그들을 인도했습니다. 인도만 한 것이 아니예요. 더 중요한 것은 구름이 그들을 보호했습니다. 뜨거운 열사의 사막, 광야에서 행진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만약 이 구름의 보호가 없었더라면 그들은 무서운 고통을 당해야만 했었을 것입니다. 구름의 역할에 관해서 우리가 한번 시편의 말씀을 찾아볼까요? 시편 105편, 시편 105편 39절의 말씀입니다. 시작 '여호와께서 구름을 펴사 덮개를 삼으시고 밤에 불로 밝히셨으며' 구름이 어떤 역할을 했다구요. 덮개 covering, 덮는 역학, 지붕과 같은 역할, 태양을 가리우고 그래서 그들이 안전하게 보호될 수 있는, 그들을 Tent처럼 천막처럼 그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던 이 구름,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이예요. 여러분 지금도 하나님의 그런 축복이 있다고 믿습니까? 우리가 광야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를 날마다 보호해 주시는 구름과 같은 하나님의 보호가 있어서 열사의 사막 못지 않은 거친 광야의 삶을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의 축복, 또는 인도하심의 축복을 경험하는 줄로 믿습니다. 구름 아래 있고,
둘째 축복은 '바다 가운데로 지나갔고…' 두 번째 축복이예요. '바다 가운데로 지나가며…' 아마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체험 광야를 향해서 나아가는 체험에 있어서 최대의 난관은 바로 홍해 바다였을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불가능하죠. 바다를 지나간다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기적을 베푸시고 그 바다를 열어주심으로 그들은 그 바다 가운데로 지나갈 수가 있었습니다. 불가능을 돌파하게 하신 하나님, 기적으로 우리 앞의 홍해 바다를 마치 마른땅을 건너듯 건너가게 하시는 하나님, 사랑하시는 여러분 지금도 인생의 행진에서 이따금씩 우리의 힘으로 도저히 돌파할 수 없는 넘실대는 홍해 바다 앞에 서게 될 때, 지금도 이 바다를 지나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기적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바다 가운데로 지나가며…' 그랬어요. 이런 경험 바다 가운데로 지나가는 경험을 시편 기자가 어떻게 반추하고 있는가를 다시 한번 시편에서 읽어볼까요. 시편 136편 찾아보세요. 시편 136편입니다. 시편 136편입니다. 한번 쭉 보시면서 무슨 단어가 제일 많이 나오는 것 같아요. '감사하라.' 또, '영원함이로다.' 또 '인자하심이' 네 '인자하심이…' 계속 반복됩니다. 13절부터도 보시면 자 시편 136편에 13절부터 보시면 '홍해를 가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이스라엘로 그 가운데로 통과케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다음에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그 다음 '바로와 그 군대를 홍해에 엎드러 뜨리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뭐예요.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그 다음에 16절 '그 백성을 인도하여 광야로 통과케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왜 하나님이 그런 일을 하셨어요. 홍해 바다를 건너게 하시고, 추격하던 바로의 군대를 물 속에 장사지내시고,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무엇 때문에…, 인자하심 때문에…, 인자, 인자라는 것은 독특한 하나님의 사랑을 설명하기 위한 구약적인 단어예요. 신약에서는 '아가페'라는 독특한 단어가 나타납니다마는 구약에는 '헤세드'라는 단어가 나타납니다. 사람들의 세속적인 사랑과 구별하기 위한 하나님의 성실하신 사랑 하나님의 인자하심 왜 홍해바다를 지나게 하셨는가?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 신실하신 사랑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도 인생의 장에서 말할 수 없는 장애물을 만났을 때, 그러나 그것을 통과하면서 변함없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을 경험하는 줄로 믿습니다. 바다 가운데로 지나게 하셨다.
그 다음에 세 번째는 '모세에게 속하여 세례를 침례를 받고…' 모세에게 속하여 2절에 구름과 바다에서 침례를 받고 세례를 받고 그랬습니다. 이 침례 Baptism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어디에 있습니까? 이것은 연합이예요. 연합. Baptism의 가장 중요한 뜻은 의미는 연합입니다. 우리가 로마서 6장 3절 이하 같은데 보면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합하여 세례를 침례를 받은 우리는' 그랬어요. 합했다. 연합 'Union' 이 Baptism의 가장 중요한 것은 연합한다. 근데 여기 보면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침례를 받았다.' 모세에게 연합했다. 모세에게 속하게 되었다. 모세에게 연합했다. 다시 말하면 모세라는 사람을 지도자로 삼고 그와 연합된 삶을 살게 되었다. 이것은 마치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예수를 믿는 순간 우리는 누구에게 속합니까? 예수에게 속하여 예수와 연합한 자가 됩니다. 그래서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다시 산 자, 그것을 상징하는 것이 Baptism 침례의 사건이란 말이예요. 물속에 들어갈 때 예수와 함께 죽었고, 나올 때 뭐예요, 그리스도와 함께 예수와 다시 살아났다. 죽음과 부활을 상징하는 의식이죠. 근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경험을 구름과 바다에서 했다. 모세에게 속하여,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서 죽었다가 산 것처럼 모세를 통해서 모세란 지도자를 통해서 그들은 이런 새로운 경험을 할 수가 있었다. 여러분 인생을 살면서 위대한 교사, 스승, 혹은 위대한 지도자를 만난다는 것은 가장 커다란 축복중의 하나입니다. 자녀를 위해서 기도하실 때, 내 자녀들이 자라나면서 좋은 스승을 만나게 해 주시옵소서. 그런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좋은 스승, 지도자, 리더를 만난다는 것. 우리가 예수님을 지도자로 삼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삼고 인생을 살아가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약 시대에 모세를 만나 모세를 지도자로 광야의 행진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축복이었습니다.
그 다음 네 번째로 '신령한 식물은 먹으며…' 그랬어요.'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자, 거친 광야에서 달리는 먹을 것이 없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얼 주셨습니까? 만나, 만나, 만나는 본래 '만후'라고 불려졌는데, 원래는 하얀 색깔 아마 눈송이처럼 하늘에서 광야로 내려왔을 것입니다. 너무 신기해 갖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 '만후! 만후!' 그 뜻이 무엇이냐면, '만후!'가 '저게 뭐냐!' '저게 뭐냐!' 그러다가 그 이름을 '저게 뭐냐'로 결정했습니다. 그게 만나예요. 또 메추라기도 주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셨어요. 하나님이 직접 만드신 음식, 직접 만드신 음식,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고, 한국에서 만든 것이 아니고, 미국에서 만든 것 Made in USA도 아니고, 'Made in Heaven' 하늘에서 하나님이 직접 만드신 음식, 그 음식을 먹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특권이예요. 지금도 그런 음식 먹습니까? 여러분? 먹잖아요. 지금 먹고 있잖아요. 뭐예요? 우리 신약 시대 성도들은 하늘의 음식,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산다는 거예요. 특권인줄 믿으십니까? 밤낮 먹으니까 좋은 줄도 모르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단 말이죠. 그래서 나중에 뭐라고 그랬어요. 왜 메뉴가 바뀌지 않습니까? 컬컬해 갖고 또 다른 데 가서 헤매고 말이죠.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만나를 먹을 수 있었다는 그 자체가 특권이예요.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섯 번째,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또 하나의 특권은 뭡니까? 식물을 먹을 뿐만 아니라 '신령한 음료를 마셨다.' Drink까지 마셨다. 먹었으면 마셔야죠.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며…' 어떤 음료를 마셨습니까? 어디에서 나오는 음료, 반석에서 나오는 음료, 다 같이 4절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다' 마실 것이 없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반석을 깨뜨리시고, 반석에서 뭐가 나왔어요? 반석에서 샘물이… 깨어진 반석, 거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목을 축일 수 있는 생명의 샘물이 쏟아져 나왔어요. 자, 바울은 여기 고린도전서 10장 4절에서 이 반석이 누구를 가르친다고 그랬어요? 그리스도다. 깨어진 반석에서 구원의 생수가 쏟아져 나온 것처럼 깨어지신 예수님.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예수님에게서 우리는 구원의 생수를 마시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모세 보고 어떻게 했어요. 호렙산으로 가라, 지금 막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하고 불평하고 있는데, 호렙산으로 가라, 지팡이를 들어라, 때려라, 그 지팡이를 가지고 뭘 때려야 마땅해요? 이스라엘 백성들을 두들겨야 마땅해요. 지금 원망하고 불평하는…. 근데 백성들을 때리지 말고 지금 뭘 때리라고 그랬어요. 반석을 때려라. 반석은 괜히 가만 있다가 얻어 맞은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을 대신해서 맞은 거예요. 그 반석이 깨졌어요. 거기서 생수가 쏟아져 나왔어요. 하나님의 공의의 지팡이, 정의의 지팡이는 지금도 누구를 때려야 마땅합니까? 죄인들을 때려야 마땅하지요. 죄인들을…. 당신을 때려야 마땅해요. 그런데 누가 대신 맞으셨어요. 예수님이, 반석되신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맞으셨어요. 그 예수 그리스도의 깨어지심, 죽으심을 통해서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진 줄로 믿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축복이예요. 이 역사에서의 특권, 역사에서의 축복들을 회상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5절의 말씀, 5절에 어떤 말씀으로 시작합니까? '그러나…' 이게 문제예요. 그러나, 그러나 'But!' '그러나' 이 이러한 특권을 누릴 수 있었다는 것, 이러한 축복을 경험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그들의 계속적인 승리를 보장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예요. 어제의 경험, 어제의 QT를 가지고 오늘을 견딜 수는 없어요. 나도 옛날에는 은혜 많이 받았다고, 그래 오늘은 어때요? 오늘은 어때요? 오늘은? 자, 그래서 역사에서의 범죄, 범죄를 다루고 있습니다. 5절 이하에서 역사에서의 범죄.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런 역사 속에서 이런 축복과 특권을 누렸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범죄를 했느냐? 범죄의 결과, 5절이예요. 5절 다 같이 읽습니다.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 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광야에서 대다수가 멸망했다.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다. 가나안의 약속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그 약속을 누릴 수가 없었다. 저는 그런 의미에서 가나안을 자꾸만 구원하고 연결시키는 것은 안좋다고 생각해요. 그러면 뭐 구원 못받았다는 결론이 되니까? 그게 아니고 여기서 가나안은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축복의 상징으로 보면 돼요. 축복의 상징. 우리가 놀라운 축복이 약속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 축복을 다 누리지 못해요. 축복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요. 왜? 범죄 때문에…. 우리가 우리의 범죄 때문에 그 하나님의 풍성하신 축복,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예비하신 그 놀라운 축복들을 누리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하고 축복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이 시대에도 얼마나 많이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6절에는 그 범죄의 교훈, 이러한 범죄의 사실이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하고 있는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6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역사는 거울입니다. 이 역사를 통해서 배워야 합니다. 무엇을 배워야 할 것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악을 더 정확하게 말하면 복수입니다. 악들, 죄악들을 즐겨하지 말자. 왜 사람들이 죄악을 범합니까? 죄를 범하는 이유? 즐거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즐거움이 있기 때문에. 왜 죄를 범하냐하면 즐거움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죄를 범하는 거예요. 사람들이. 죄가 아름다워 보이고 즐거워 보이거든요. Enjoy합니다. 죄를…. 그러나 이 즐거움은 죄악의 미끼입니다. 그 죄악의 건너편에 그들은 죄악의 대가를 지불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그 결과를 보지 못하고 미끼 바로 눈앞에 있는 미끼만 바라보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죄악 속으로 들어갑니까? 심지어 하나님의 백성들도, 하나님의 백성들도. 은혜 받은 백성들도 과거에 하나님의 축복을 누렸던 백성들조차도 이 죄악들 속에 빠져 들어갑니다. 어떤 죄악들일까요? 죄악의 내용, 대표적인 죄 네 가지 열거됩니다. 대표적인 죄. 이 죄들은 오늘의 현실에서도 반복되고 있는 범죄들입니다. 대표적인 네 가지 범죄, 어떤 범죄가 나와요.
첫째, 우상숭배. 같이 읽겠습니다 7절 '저희 중에 어떤 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첫째는 우상숭배예요. 우상숭배하지 말자. 아마도 이 우상숭배의 범죄는 출애굽기 32장을 배경으로 한 사건을 지금 바울 사도가 회상하고 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모세와 아론 사건, 생각나시죠?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있는 동안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뭐 했어요? 금송아지를 만들었어요. 왜 만들었어요? 이 금송아지가 우리를 인도했다. 애굽에서 나오게 한 것도 금송아지다. 앞으로도 금송아지가 인도할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대신에 눈에 보이는 화려한 매력을 가진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그 금송아지를 따르고자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 이 우상숭배의 유혹은 오늘도 아직도 존재합니다. 사람들이 현대인들이 실제로 금송아지를 안 만들지 모르지만 그러나 다른 금송아지가 있어요. 신약에서 제일 많이 강조하는 우상숭배는 어떤 우상숭배입니까? 골로새서 3장 5절에 보면 무엇은 곧 우상숭배라? 탐심은 다 같이 탐심은 곧 우상숭배라. 우리의 모든 욕심, 욕심이 바로 우상숭배예요. 욕심이란 하나님과 나 사이에 오는 모든 것,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그것 때문에 하나님 섬기고 사랑하는 일에 방해가 되는 일체의 모든 것. 그게 우상숭배예요. 탐심, 탐심. 욕심. 누가 간음을 했어요. 모압의 여인들과 간음을 했어요. 바알의 신들을 따라 다니고 우상 신을 향해서 추파를 던지고, 또 이런 의식의 한 사건 속에서 그들은 모압 여인들과 집단 행음을 하게 되었어요. 언제 우리가 범죄합니까? 영적인 만족이 없을 때, 혹은 영적인 긴장이 이완될 때, 우리도 언제든지 범죄할 수가 있어요. 그때 사람들은 다른 재미는 뭐 없을까? 다른 재미는? 그래서 쾌락 세속적인 쾌락을 추구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영적인 만족이 사라지게 되면, 또 영적인 긴장이 이완되게 되면, 사람들은 세속적인 쾌락을 추구할 수가 있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죄를 많이 범해요. 죄를 많이 범해요. 역사적으로 그랬어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간음죄를 그때 범하게 되었습니다. 뭐 한 두 사람 범한 거면 하나님이 이렇게 까지 심각하게 다루실 필요가 없었는데, 뭐 간음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어느 때나, 어느 시대에나 있습니다. 그러나 집단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집단적으로 도덕적으로 해이해졌어요. 한 사회가 집단적으로 해이해 지면 그리고 집단적으로 온 사회가 부도덕 속에 빠지게 되면 하나님의 이런 집단적인 징계가 심판이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2만명 이상이 죽어버리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간음의 범죄. 단순히 과거를 회고하자는 의미가 아니예요. 저들이 간음함으로 범죄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던 것을 기억하라. 그리고 너희들은 저들과 같이 뭐예요. 간음하지 말라. 이 말이예요. 간음하지 말라.
또 세 번째 범죄는 뭡니까? 주를 시험함. 9절, 9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 민수기 21장이 배경이라고 생각됩니다. 자, 만나가 싫어졌어요. 박한 식물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리가 이 박한 식물. 이 메뉴도 바뀌지 않는 이 박한 식물에 우리가 지쳤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안 먹겠습니다. 이쯤 해 놓으면 주님이 어쩔거야! 안 먹겠다고 해 놓으면 주님이 우리를 어쩔 것인가? 일종의 뭐예요. 주님을 시험하는 것이예요. 주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시험의 마음이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있었던 그 증거를 시편에서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시편 78편, 시편 78편 17절 18절입니다. 17절에 '저희는 계속하여 하나님께 범죄하여 황야에서 지존자를 배반하였도다' 18절 다 같이 읽어요. '저희가 저희 탐욕대로 식물을 구하여 그 심중에 하나님을 시험하였으며' 그랬잖아요. 식물을 가지고 하나님을 시험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가 그러한 태도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네 번째 범죄는 어떤 범죄예요. 원망, 원망의 범죄입니다. 10절 다같이 읽어요.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의 역사, 광야의 생활의 역사, 광야의 여정의 역사는 일종의 원망의 역사라고 할 수가 있어요. 원망의 역사. 민수기 11장에 보면 원망합니다. '하나님 음식이 이런 음식 밖에 없습니까? 만나 밖에 없습니까?' 원망하죠? 민수기 12장에 가면 지도자를 원망합니다. 지도자를. 특별히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원망합니다. 모세가 구스 여인을 취했다. 그래서 원망합니다. 민수기 14장에 가면 아예 다 포기하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이렇게 데모를 합니다. 이 끊임없는 원망의 역사. 원망의 역사.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것이 원망이예요. 원망의 반대는 뭘까요? 감사입니다. 감사. 하나님의 행하심을 인정하는 것. 우리에게 베푸신 그의 긍휼과 자비를 끊임없이 인정하며, 주님 앞에 찬양을 올려 드리는 삶. 찬양하는 사람에겐 원망이 없어요. 원망의 마음이 일어나시거든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입술로도 찬양하고, 기도로도 찬양하고, 멜로디로만 찬양하는게 아니예요. 말로도 찬양할 수 있어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찬양을 올립니다.' 그게 찬양이예요. 주님은 인자하시고 주님은 자비하시고 주님은 나에게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계속 찬양하시고 감사하면 돼요. 범사에 감사하라. 그러나 사람들은 쉽게, 쉽게 원망의 범죄 속에 빠질 수가 있어요. '어쩌자고, 하나님 왜 나에게…' 그러나 그때마다 우리는 내 인생의 밝은 side를 바라보며 이 고통 속에서도 내게 여전히 베풀어주시는 은혜. 만나가 아직도 계속되고 있었어요. 만나가 계속되고 있는데 그걸 가지고 감사하지 않고, 그걸 가지고 원망하고 있단 말이죠. 더 좋은 거 없나? 더 좋은 거 없나? 우상숭배의 역사, 간음의 역사, 주를 시험함의 역사, 원망의 역사, 그것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과 같이 너희는 범죄하지 말라. 자, 결론적으로 이 현실이라는 역사 속에서 우리가 받아야 할 교훈. 과거의 역사를 돌아보며, 우리의 현실에서 우리가 받아야 할 Lesson 두 가지입니다. 두 가지 교훈을 주시고 있어요. 첫째 교훈 12절 말씀 다 같이 읽겠습니다. 12절 다 같이 시작,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시험을 조심하라. 항상 나도 시험받을 수가 있다. 미국에서 한 유명한 목사님 한 분이 도덕적인 시험에 실패하셨어요. 나중에 한 1년 지나서 인터뷰를 했는데, '왜 시험에 빠지셨습니까?'하고 물어봤더니 '나는 절대로 나 같은 사람은 시험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을 했다는 거예요. 그것이 위험해요.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합니까? '나도 시험받을 수가 있다.' 언제든지 나도 시험받을 수가 있다. 다른 사람이 시험받는 것을 보고 뭐예요. 나도 저 사람처럼 시험받을 수가 있다. 항상 그걸 생각해야 해요. 섰다 하지 말아라. 넘어질 수 있다. 언제든지 넘어질 수가 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특별히 여호수아를 앞세워서 여리고성의 전투에서 승리했습니다. 여리고는 대단한 성이었어요. 거기에서 승리했으니까, 뭐 여리고성 전투할 때는 기도도 많이 하고, 마음의 준비도 하고 열심히 하나님을 의뢰하고 여리고성을 격파했습니다. 여리고성 다음의 전투가 뭐예요. 아이성이예요. 뭐 여리고 성도 이겼는데, 아이성은 정말 아이처럼 조끄만 성이예요. 그 여리고 성에 이겼으니까 아이 같은 아이성쯤이야 '아이∼' 그러고 진격했어요. 그런데 어떻게 됐어요. 실패했습니다. 섰다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850대 1의 결전, 바알의 선지자 아세라의 선지자들과 850대 1의 결전에서 승리한 후에 그 다음에 로뎀나무 밑에서 쓰러지고 엎드러집니다. 그리고 자살하고 싶다고 하나님 앞에 넘어집니다. 승리 다음을 조심해야 합니다. 축복 다음을 부흥 다음을 하나님의 위대한 축복이 있는 바로 다음에 나에게 함정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라요. 그러므로 시험을 조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시험을 조심하라!
그 다음에 두 번째는 시험에서의 승리를 믿으라! 시험에서의 승리를 믿으라! 시험을 받을 수가 있는데 승리할 수 있다 이렇게 믿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아주 질 것을 믿고 사는 사람이 있어요. 인생을 살면서 어차피 이런 시험은 다 받는다. 나도 패배할 것이다. 패배를 확신하고 패배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있어요. 이럼 패배 의식에 젖은 사람이 많습니다. 패배 의식에 실제로 젖어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있어요. 이거 뭐 다 인생이 그렇게 기면서 사는 거지 뭐. 패배를 믿어요. 제가 어느 날 히브리서11장을 묵상하다가 이런 생각이 문득 떠올랐던 적이 있어요. 한번 찾아보세요. 재미있는데요. 히브리서 11장 29절. 히브리서 11장 이 믿음의 장이죠. 유명한 믿음의 장. 히브리서 11장 29절 다 같이 읽겠습니다. '믿음으로 저희가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자, 믿음으로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다. 애굽을 빠져 나와서 홍해를 건넌 것. 홍해를 건넌 거. 무엇으로 건널 수 있었다. 믿음으로…. 홍해를 건널 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한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만 믿습니다. 주님만 믿습니다. 주님이 홍해 바다가 넘실거리는데 앞으로 나가라! 어떻게 나가요. 앞에 물이 있는데…, 그러나 믿음으로 들어가니까 갈라졌어요. 믿음으로…. 그 다음에 30절. 30절 다같이 읽습니다. 다 같이 시작. '믿음으로 칠 일 동안 여리고를 두루 다니매 성이 무너졌으며' 여러분 홍해 바다에서부터 여리고까지 그 사이에 몇 년이 있어요. 40년이예요. 40년. 그런데 믿음으로 홍해 바다를 건넜고, 믿음으로 여리고를 무너뜨렸습니다. 여리고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자마자 첫 번째 성이 여리고 거든요. 근데 그 사이에 40년이 있는 거예요. 그 40년 동안은 무슨 말이 없습니까? '믿음으로…'하는 말이 없어요. 믿음으로. 그러니까 애굽 땅 나오고 홍해 바다 건널 때까지는 하나님을 어떻게 해요. 하나님을 신뢰를 잘했어요. 또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여리고성의 전투에서 다시 하나님을 신뢰했어요. 그러나 그 사이에 40년의 방황은 무슨 방황이예요. 한마디로 말하면 불신앙의 방황이예요. 믿지 못하고 방황한 거예요. 계속.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했을 때, 그들이 통과해야만 했었던 기나긴 방황의 40년. 여러분, 날마다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오늘도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역사의 교훈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어제의 교훈, 어제의 축복, 어제의 승리, 어제 받은 은혜 가지고 오늘을 승리할 수가 없어요. 오늘은 오늘의 은혜가 필요하고, 오늘은 오늘의 교훈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날마다 주님 바라보고, 날마다 주님 의지하고, 승리할 수 있도록 통성으로 기도하십시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자비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우리를 도우시고 함께 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님 바라보고, 주님 의지하고 오늘도 승리로운 걸음을 걸어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험악한 인생, 광야 같은 인생, 주님 도우심 없이는 오늘도 승리할 수가 없사오니, 그 주님 바라보고 날마다 걸어가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하나님, 때로는 내가 과거에 받은 은혜, 과거에 들었던 주의 음성을 가지고 오늘을 살려고 발버둥칩니다. 그러나 어이없이 실패할 때마다, 내가 오늘 아침 오늘의 만나를 먹지 못했고, 오늘 아침 주님을 바라보지 못했던 것을 돌이켜 보게 됩니다. 날마다 주님 앞에 나오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날마다 주님 의뢰하게 도와 주시옵소서. 날마다 승리하는 자들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아버지 하나님 참 한번 밖에 지나갈 수 없는 인생 이 짤막한 세상, 광야 같은 세상에서 내가 인생의 길을 걷다가 어쩌다가 예수 만나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 축복을 무엇으로 감사할 수가 있사오리까? 주님이 내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천국의 소망이 없었더라면, 인생이란 것은 얼마나 헛되고 헛되고 또 헛된 것인지요? 죄짓고 살다가 결국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허무한 인생, 주님 만나 영원을 바라보며, 이 땅에서 아름다운 복음의 향기 발자취를 남기며 살아갈 수 있는 특권을 주셨사오니 감사합니다. 오늘도 주신 말씀을 받고 사랑의 헌금을 드리고, 우리의 삶의 터전으로 다시 나아갑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성령의 함께 하심이 오늘 오후에도 또 2시에 있는 추모 모임 가운데도, 또 오늘 사랑하는 귀한 남편을 잃어버린 귀한 자매와 또 그 가정 가운데도 주의 은혜와 평강을 내리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거울로 보는 역사
고린도전서 10:1~11 / 이필재목사
오늘 성경말씀 6절과 11절에 ‘본보기’라는 단어가 2번 나옵니다. 이 단어는 개역한글 성경에는 ‘거울’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과거 출애굽 과정에서 겪었던 여러 가지 사건들을 거울삼아 하나님을 섬기자는 영적 교훈입니다. 사람이 영원히 보지 못하는 것이 자기 얼굴입니다. 영원히 보지 못하면서도 가장 예쁘게 꾸미려고 노력을 합니다. 자기 얼굴을 볼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뿐입니다. 반사작용을 하는 다른 물체에 자기 얼굴을 투영시켜서 되돌아오는 모습을 볼 때 자기 얼굴을 볼 수 있습니다. 거울이란 무엇인가? 자기 얼굴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기구가 됩니다. 현대인들은 누구나 매일 거울을 보아야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거울을 쳐다보게 됩니다. 얼굴 화장을 오래하는 습관이 있는 사람은 거울 앞에서 하루 시간의 십일조를 바치고 살아갑니다. 지금 예배드리고 있는 여신도들의 가방 속에는 거의 다 거울이 들어있을 것입니다.
오늘 봉독한 성경말씀은 고린도전서인데 본래 이 말씀은 구약에 있었던 실제 사건을 기억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민수기 25장, 출애굽기 17장의 있는 말씀을 반복한 것입니다. 내용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함으로 받았던 심판 역사를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그런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 같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역사의 거울을 보라는 영적 교훈입니다. 지금 우리들의 삶 가운데 거울로 나타나는 교훈은 365일 매일 일어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경우가 나의 거울이 되는 일들입니다. 어떤 사람이 음주운전을 하다가 교통사고가 나서 생명을 잃어버렸습니다. 그 사람은 나에게 거울입니다. ‘아! 나는 절대 음주 운전은 하지 말자.’라고 사람들이 마음을 먹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도박을 즐기다가 가정 파탄이 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나에게 거울이 되어서 ‘절대로 도박은 하지 말아야지.’ 이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국제적인 거울도 아주 많이 있습니다. 세계 6대 강국이던 아르헨티나가 빈민국이 되었습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집회에 갔을 때 그곳 지도자들이 해준 말이 있습니다. “이 나라는 강성노조와 힘에 겨운 복지정책이 이 국민을 게으름뱅이로 만들어서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이 꼴이 되었습니다.” 이런 것이 모두 거울의 역사입니다. 공산당 사회주의 국가는 다 망했습니다. 대부 역할을 하던 소련은 없어져 버렸습니다. 러시아로 재탄생을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런 이데올로기는 하지 말아야지.’ 거울이 됩니다. 원전이라고 하는 과학이 그렇게 유익한 문명이지만 후쿠시마 원전이 터지니까 지상 낙원이 폐허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원전과 일을 잘해야지.’ 이런 거울이 됩니다. 반대의 거울도 많습니다.
어떤 사람이 미국의 유명도시 리오에서 큰 호텔 뒷마당에 리어카 하나를 갖다놓고 호떡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그가 얼마나 열심히 일을 했는지 몇 십 년 후에 그 호텔 주인이 되었습니다. 저는 부흥회를 가서 그 호텔에서 잠을 잤는데 로비에 가보면 그 사람의 그러한 역사가 사진과 설명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보고 ‘아! 나도 열심히 해서 이 사람과 같이 되어야지.’ 생각하게 됩니다. 거울의 교훈을 주는 것입니다. 제가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에는 우리나라 교과서에 덴마크를 모델로 가르쳤습니다. 지상 천국이라고 가르쳤습니다. 달가스의 녹화운동과 그룬두비 목사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고 흙을 사랑하자는 덴마크의 삶의 원칙이 천국으로 만들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제가 덴마크에 갔을 때 그룬두비 목사의 흔적을 찾아보고 돌아온 적이 있습니다. 지금 세상은 누구나, 어느 나라나 거울을 찾아 헤맵니다. 요즘에 우리나라에 ‘멘토’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그 말은 내가 닮고 싶은 거울의 인물을 정하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는 다른 나라에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우리나라에도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곤란한 문제이면 다른 나라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는지 멘토를 잡지 않습니까? 그래서 일본에서는 이렇게 했고 영국에서는 이렇게 했다고 항상 방송하는 것입니다. 거울을 찾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말씀에 과거 불행의 사건을 계속 이야기하면서 거울을 제시합니다. 여기 보면 2만3천명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죽었다고 했는데 그것은 민수기 25장의 역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한지라. 그 여자들이 자기의 신들에게 제사할 때 이스라엘 백성을 청하매 백성이 먹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므로 이스라엘 바알브올에게 가담한지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니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모압 여자들이 누군가를 밝혀야 설교가 되겠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가나안 땅을 향해서 갈 때 외로워서 조카 롯을 아들 삼아 데리고 갔습니다. 롯이 성장을 했을 때 아브라함과 롯은 생업의 재산권 때문에 다툼이 생겨져서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그 때 롯은 아브라함을 배반하는 분위기로 헤어집니다. 성경에서 아브라함이 롯에게 말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선택의 우선권을 네게 주리라.” 말했습니다. 그들은 피차 유목민이기 때문에 양떼를 기르는데 절대 필요한 풀밭과 물 근원이 필요합니다. “네가 좋은 땅을 선택하라.” 그러면 롯도 말해야 합니다. “삼촌은 나의 아버지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이렇게 성장한 것은 삼촌의 은혜입니다. 좋은 땅과 물 조건은 삼촌이 차지하십시오. 나는 젊었으니까 사막으로 가도 견딜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해야 하는데 롯은 자기가 좋은 땅을 차지하고 늙은 삼촌 아브라함을 사막으로 내쫓았습니다. 결과가 어떻게 나타났느냐? 그가 선택한 소돔과 고모라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지금까지도 사람이 살 수 없는 영원한 심판의 대명사같이 되었고 거기에 가서 부를 장식했던 롯의 처는 소금 기둥이 되었다고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롯은 두 딸과 자식을 번식시켜서 큰 딸 후손이 모압이고 작은 딸 후손이 암몬 족속이 되었는데 이 두 족속은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바알 종교의 핵심 세력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해서 몰려온다는 소문을 듣고 모압 여자들이 계획했습니다.
“이스라엘을 무너뜨리는 방법이 뭐냐? 바알에게 제사하도록 하자.” 모압 종교인 바알을 섬기도록 온갖 방법을 다 동원했습니다. 바알 예배의 마지막은 남녀가 성을 교환하는 것입니다. 교리적으로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에 이 종교는 절대 없어지지 아니하고 힘을 가지고 많은 유대인들의 영적 유혹에 힘을 썼습니다. 40년 광야 생활에 지칠 대로 지치고 생활의 윤택함이란 아무것도 없던 이스라엘의 건강한 남자들이 모압 여인들이 예쁘게 하고 와서 제공하는 바알 제사에 다 빠져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우상 숭배의 죄를 저질렀던 과거 역사의 거울을 잊어버렸느냐?” 그리고 지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7절 말씀에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이렇게 과거 역사 교훈을 참고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9절 말씀에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물려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자.” 출애굽해서 광야를 지나갈 때 백성들이 하나님을 향해서 원망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광야에서 불러내서 광야에서 죽게 만드는 것이 아니냐?” 그 원망이 극에 달했을 때 하나님은 불뱀을 보내서 원망하는 자들을 물어 죽게 하신 그 사건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판단력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려운 고난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오늘의 갈 길을 정하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을 보는 지혜가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모든 사건이 나에게 거울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보면 대한민국 민족의 갈 길의 거울이 되고 야곱의 생애를 보면 나의 생의 거울이 되고 모든 역사가 우리 앞에 보이는 거울 본보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추수감사절 때마다 ‘청교도’라는 말을 쓰는데 왜 말하는 것입니까? 그들을 거울삼으라는 뜻입니다. 어느 때 하나님이 복을 내려주셨으며 어느 때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까? 성경과 역사는 세밀하게 우리들을 가르치고 있는 거울입니다. 그것을 잘 받아들인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아니한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이 성경은 두 가지 갈래의 길을 언제나 우리 앞에 제시합니다. 대표적인 의식화 작업이 신명기 11장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심산과 에발산 사건입니다. 애굽에서 민족 이동을 한 유대 민족은 그들이 목적을 하는 땅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우리 민족의 삶의 방향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영적 의미의 의식화 작업 하나를 그들에게 하도록 하셨습니다. 유대 나라에 가면 그리심산이 있고 에발산이 있는데 마주 보고 있습니다. 열두 지파에서 대표자들을 선출했습니다. “절반으로 나누어서 여섯 지파는 그리심산에, 여섯 지파는 에발산꼭대기에 올라가라. 그리고 그리심산 사람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선언하라. 에발산 사람들은 하나님의 저주를 선언하라. 가운데 있는 군중들은 아멘으로 화답하라.” 이런 영적 의식화 작업 부흥회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심산과 에발산은 같은 지역이면서도 서로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심산은 아침 해가 떠오를 때 먼저 햇살을 받는 동편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신선해 보이고 비교적 초목이 우거져 있고 물줄기가 연결되어 있어서 사랑받는 산입니다. 반면에 에발산은 해가 지는 서쪽으로 되어 있어서 아침 햇살을 받지 못하고 나무가 없는 황폐한 그늘 산입니다. 그리심산에 있는 대표들이 소리를 쳤습니다. 축복 선언입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고 여호와를 사랑하고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면 이 그리심산과 같이 아침 해가 떠오르는 축복을 받을 것이요 그래서 초목이 무성하고 물줄기가 생길 것이며 풍족하게 되리라.” 이렇게 선언하면 골짜기에 있는 모든 백성은 “아멘”하고 화답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에발산에서 하나님의 저주를 선포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고 우상을 섬기거나 다른 신을 섬기면 이 에발산과 같이 해가 질 것이요 이 땅과 같이 물이 없는 황폐한 땅이 되리니” 이렇게 선언하면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그 말을 듣고 “아멘”하는 일종의 부흥회를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수가성 우물가에서 물 길러온 여인과 대화를 길게 하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여자가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하더이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리심산은 사마리아에 있습니다. 그 산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제일 먼저 들어와서 예배드린 성지로 취급을 받습니다. 남쪽 유대 사람들은 이 사마리아 사람과 관계하지 않았다고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사마리아 땅은 밟지도 말라.” 그런 분위기 속에서 살았고 사마리아 사람과는 말조차도 안하는 그런 관계로 지내고 있는데 사마리아 사람들은 지역적 자부심 하나를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가나안 땅에서 최초로 예배드린 성지가 그리심산이라는 것입니다. “당신들이 와서 이 가나안 땅에 들어왔을 때 최초의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리지 않았느냐? 그리고 거기서 영적 부흥회를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그 그리심산이 여기 사마리아에 있다.” 그러니까 이 여인은 예수님을 보고 “그리심산이 성지인데 왜 당신들은 하나님께 예배할 장소를 예루살렘으로 고집합니까?” 지역 우월성을 예수님께 설명하는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그리심산과 에발산 양쪽에서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가 번갈아 선포되고 백성들은 화답하게 하신 이 영적 의미의 예식은 간단합니다. “너희 앞에는 항상 두 갈래의 길이 있다.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이다. 선택의 자유와 기회는 너희들 자신이다.”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의 복과 저주는 내게 임한다고 하는 영적 교육을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드라마식으로 엮어서 자신들의 연출과 주연 배우 역할로 의식화 작업을 하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복이라는 것과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은 내가 만드는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행하는 대로 나는 복과 저주를 내릴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하나님의 백성은 분명해 졌습니다. “나의 인생을 빛나게 만들 사람은 나 자신이며 그늘지게 만들 사람도 나 자신입니다. 갈보리교회를 훌륭한 교회로 빛나게 할 사람들이 갈보리 교인들이며 대한민국을 위대한 나라로 만들 사람들이 대한민국 사람들이다. 일본이나 필리핀 사람이 대한민국을 빛나게 하겠느냐? 너 자신에게 달렸다. 네 책임이다.” 그런 뜻입니다.
한 지혜자가 살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당하는 어려운 문제를 그 지혜자에게 가서 상담 받았습니다. “이번에 내가 이런 어려움을 당했는데 이러한 어려운 문제 해결을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러면 그 지혜자는 아주 심각하게 질문하는 그 내용을 듣고 지혜의 문을 열어서 갈 길을 그에게 정해주어서 온 마을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지혜자는 시각장애인이라서 만물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 시각장애인 지혜자를 싫어하는 장난꾸러기 청년들이 “저 사람은 날마다 우리 청년들을 꾸짖고 세상을 보지도 못하는 사람인데 무슨 지혜가 있다고 사람들이 존경하는가?” 그래서 그 지혜자를 골탕을 먹이려고 청년들은 시각장애인에게 계획적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카나리아’라고 하는 새 한 마리를 손에 들고 갔습니다. “지혜자시여! 우리 손에 들고 있는 이 카나리아가 죽겠습니까, 살겠습니까?” 그렇게 물었습니다. 청년들은 그가 “죽을 것이다.”라고 대답하면 날려 보내서 “당신은 지혜자가 아닙니다.” 무색하게 만들어 골탕먹여주기로 계획했고, 만약 “살 것이다.” 대답하면 들고 있는 새의 목을 꽉 눌러 그 자리에서 죽여 “당신은 지혜자가 아닙니다.” 그렇게 골탕을 먹이려고 찾아온 것입니다. 시각장애인은 심각한 얼굴을 하더니 말했습니다. “얘들아, 그 새의 생명은 너희 손에 달려있느니라.” 얼마나 지혜로운 대답입니까?
내일은 또 6·25 기념일이 되었습니다. 이제 6·25를 기억하는 사람은 얼마 안 됩니다. 70세 이상 된 사람만이 현장을 보고 느낀 것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6·25를 기념하는 것은 어두운 과거의 역사를 거울로 다시 한 번 보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요즘에 우리나라는 이념적으로 과거로 되돌아가는 느낌마저 듭니다. 이데올로기 전쟁은 한반도에서 1940년대 다 끝났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이념 갈등이 과거로 돌아가서 진보와 보수라고 하는 이름으로 계속되고 있습니다. 6·25 세대들은 생명을 걸고 보수를 택합니다. 그러한 사회에서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습니다. 순교당해 죽는 것이 훨씬 편안합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경험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어제 날짜로 대한민국은 2050이 되었다고 자랑하는 뉴스가 나왔습니다. 국민 소득 2만 달러에 인구 5천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나라는 세계에서 일곱 나라 밖에 없다고 합니다. 이 말은 사실 대한민국도 강대국이 되었다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인구 5천만이 되었고 국민 소득이 2만 달러가 되었으며 모두 거기에서부터 강대국이 시작되었다. 이런 나라는 세계에서 일곱 개국 밖에 없다.” 이렇게 선전하지 않습니까? 우리나라가 사실상 강대국이 되었는데 한 가지 조건이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강대국들은 모두 핵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아직 핵이 없습니다. 그런데 앞으로는 일본이나 한국도 어쩔 수 없이 핵을 만들어야 될 것입니다. 일본이 핵을 만들려하면 몇 년 안에 몇 천 개를 만들어낼 수 있는 실력을 다 갖추고 있고 한국도 핵을 만들려고 결정하면 북한보다 10배나 더 만들 수 있습니다. 안 만들고 있을 뿐입니다. 인구 5천만에 2만 달러 이상의 강대국이 되었음을 선포하지만 인구가 1억이 넘어도 GNP가 모자라기 때문에 절대 강대국이 안 되는 나라들이 세상에 수두룩합니다. 또, GNP는 좀 올라갔지만 인구가 너무 적어서 강대국이 안 되는 나라도 세상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가 그 조건에 부합했기 때문에 자랑스럽게 선전하는 것입니다. 북한은 국민소득이 대한민국의 20분의 1밖에 안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절대로 따라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6·25 전쟁은 어떻게 시작이 되었습니까? 1949년 3월 모스크바에서는 공산당 최고인민회의가 열렸습니다. 그 회의에 스탈린이 김일성과 박헌영을 손님으로 초대했습니다. 거기에 참석했다가 스탈린과 회담을 통해서 허락을 받고 돌아와서 9개월 후에 일으킨 전쟁이 6·25입니다. 6월 25일 일으킨 전쟁으로 서울이 무방비 상태에 있다가 3일 만에 함락이 되었고 수백만 명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1천만의 이산가족이 생겼고 10만 명 이상의 장애인이 생겼습니다. 본래는 8월 15일까지 완전 정복을 하려고 계획한 것인데 우리 국군들의 피나는 저지와 유엔군이 들어와 주어서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요즘 저 같은 6·25 세대들은 ‘이 나라 국가관의 방향성까지 잃어가나 보다.’ 생각합니다. 애국가를 부르느냐 마느냐 하는 것이 신문에 논란으로 일고 있습니다. 애국가 문제는 1945년 이후 지금까지 한 번도 안 나오던 문제인데 요즘에 나오고 있습니다. 이러면 대한민국의 국가관은 뿌리째 뒤흔들리는 것입니다. 저는 대학의 이사장으로 지금 일하고 있는데 22년 동안 대학 이사회를 할 때 회의 할 때마다 첫 번째 순서가 애국가입니다. 애국가를 안 부르고 이사회를 시작한 적 한 번도 없습니다. 제가 사회를 보면서 22년 동안 “애국가를 부름으로 이사회를 시작하겠습니다.” 그게 시작이었습니다. 국가관의 방향을 잃어버리면 혼란 국가가 됩니다. 여러분! 전 세계 사회주의 공산당 국가가 다 변했는데 북한만 변하지 않았습니다. 세계에서 지금 기독교 핍박 국가가 20개국 이상인데 극심 핍박 국가가 10개국이고 절반 핍박 국가가 10개국입니다. 그런데 최고의 핍박 국가가 북한입니다. 왜 그러느냐? 핍박 국가일지라도 교회가 다 있습니다. 저는 그런 나라 모두 다니면서 세미나를 하고 부흥회도 했습니다. 핍박하지만 교회들은 다 있습니다. 많지는 않아도 교회가 모두 있습니다. 그런데 북한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핍박 1위 국가가 북한이 된 것입니다. 봉수 교회 하나 선전용으로 만들어 놨지만 그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6·25 전쟁 때에는 남한보다 북한이 교회가 더 많았습니다. 평양을 동양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렀습니다. 압록강을 넘어 복음이 들어왔고, 대동강을 통해서 복음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교회가 하나도 없습니다. 왜 없습니까? 공산당이 없애버렸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하나도 없다는 그 한 가지만 봐도 평가는 분명하게 나지 않았습니까? 6·25는 우리 대한민국의 영원한 거울이 된 사건입니다. 6·25만 들여다보면 내 얼굴이 어떤 모습인지 나타나고 6·25 거울만 보면 우리 민족의 갈 방향이 분명해 집니다. 갈 길은 우리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6·25년 전의 방향 결정이 분명하게 정해지지 않았습니까? 대한민국은 자유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의 길을 갔고 북한은 칼 마르크스 철학에 근거한 사회주의 정치 이념에 따라가지 않았습니까? 그것이 오늘입니다. 그러면 판가름은 이미 났지 않습니까? “네 인생은 너의 선택에 달려 있다. 너의 나라는 너의 민족에게 달려있다. 선택하라. 과거 거울을 보면서 갈 길을 정하라.” 그렇게 된 것이 오늘 말씀입니다.
아주 옛날에 시골 농부 하나가 장가 간지 일 년이 되었다고 합니다. 나무를 해다 팔아서 그 당시 세상에 처음 등장하는 거울을 하나 사서 자기 색시에게 선물을 했다고 합니다. 색시가 거울을 들여다보더니 화가 나서 바가지를 긁기 시작합니다. “장가 간지 1년 밖에 안 된 사람이 웬 여자를 데리고 왔어요?” 부부 싸움을 하니까 시어머니가 “왜들 이렇게 싸우느냐?” 며느리가 “이걸 보세요. 또 여자를 데리고 왔어요.” 그래서 시어머니 할머니가 보더니 아들을 불러서 야단을 치는 겁니다. “야, 이놈아! 색시를 데리고 오려면 젊고 예쁜 사람을 데리고 와야지, 웬 할망구를 또 데리고 왔느냐?” 집안이 난리가 나니까 시아버지가 “왜 집안이 이렇게 시끄럽소?” 할머니가 “이것 때문에 그래요.” 그러면서 시아버지를 주니까 시아버지가 이렇게 들여다보더니 “아니다. 그래도 이 영감이 우리 아들을 많이 닮았다.” 그러더랍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역사의 거울은 넉넉합니다. 5천년 동안 겪어온 거울이 있습니다. 6·25 그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어떻게 해야 자유 민주주의 대한민국이 영원할 것인가, 어떻게 해야 세계 제1의 교회 성장이 계속될 것인가? 오늘 말씀이 우리 민족의 갈 길의 거울을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영원하기를 축원합니다.
넘어질까 조심하라
고린도전서 10:1-13 / 이수영목사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 바로 앞에서 말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운동경기에서 실격을 당하는 사람처럼 자기 자신도 주님의 사도로서의 사역에 있어서 실격자가 되지 않기 위하여 자신의 몸을 쳐 복종시켰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어지는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모세와 함께 이집트에서 나온 옛 이스라엘 백성을 운동경기에서 실격 처리되는 선수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먼저 본문 1-5절을 봅니다: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이집트에서 나와 약속의 땅을 향해 행진을 시작한 이스라엘 백성이 목적지까지 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다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집트에서 나와 약속의 땅을 향하여 가던 이스라엘 백성이 “다 구름 아래에 있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신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출13:21-22). 그들이 “바다 가운데로 지났다”는 것은 두말 할 것 없이 바로의 군대가 추격해왔을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앞에 가로 막힌 홍해의 물을 가르셔서 그 가운데로 안전하게 지나가게 하시고 다시 물을 흐르게 하셔서 이집트의 병사들은 모두 수장시켜 멸하신 사실을 가리킵니다(출14:5-30).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이 구름기둥의 인도를 받고 홍해의 물 가운데로 지나며 구원을 얻은 사건을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이 일종의 세례를 받은 것으로 해석합니다. 그래서 그는 본문 2절에서 쓰기를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모세에게 속하여”라 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 왕 바로의 지배 아래 있다가 그들을 이집트로부터 이끌어낸 “모세의 지도력 아래로” 들어갔다는 뜻일 것입니다. 옛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에서의 노예생활로부터 해방되어 모세와 함께 구름기둥의 인도와 보호를 받고 홍해 가운데로 지나가게 된 것은 오늘날 우리가 세례를 받음으로써 죄의 노예상태에서 해방되어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이 되는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니는 사건이었다는 말입니다. 세례란 것이 물속에 들어갔다 나옴으로써 우리가 주 안에서 죽고 새 사람으로 다시 사는 것을 의미하며 죄의 씻음을 상징하는 의식이듯이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 가운데를 지나감으로써 죽음의 위기로부터 살아나온 것은 오늘날 우리가 세례를 받는 것과 같은 사건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집트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이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다”는 것은 그들이 광야를 지나며 양식과 물이 떨어졌을 때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내려주신 메추라기와 만나를 먹고 반석을 쳐서 흘러나온 물을 마심으로써 굶어 죽지 않았던 놀라운 은혜의 체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들이 “신령한” 양식과 물을 먹고 마셨다는 것은 그 양식과 물이 하나님께서 특별한 은혜와 권능으로 베푸신 것임을 뜻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본문 4절에서 말하기를 이스라엘 백성이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반석은 종종 하나님을 가리켜 하는 말입니다.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이라 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목마를 때는 언제 어디서든지 물을 마실 수 있도록 그들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의미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항상 함께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뜻에서 옛 이스라엘 백성도 이미 그리스도의 은혜 아래 있었다는 것입니다. 즉 그들 자신의 능력이나 자격이나 공로 덕분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로 사는 백성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4)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택하신 백성에게 그들을 따라다니는 신령한 반석으로 예수님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토록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이스라엘 백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거의 모두 버리셨다고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본문 5절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실제로 이집트를 나온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만 빼고는 모두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뒤따르는 6절에서 인지를 그 이유를 밝힘과 동시에 그 역사적 사실이 고린도 교회 신자들에게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말합니다. “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 한 것 같이 즐겨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토록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도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기를 즐겼기 때문에 멸망당하고 말았다는 것이며, 고린도 교회의 신자들은 그 역사를 거울삼아 하나님께 즐겨 악을 행함으로 구원에서 떨어져나가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경고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집트에서 나온 옛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악을 행하였다는 것입니까? 사도 바울은 본문 7-10절에서 네 가지 예를 듭니다. 먼저 7절을 봅니다: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이것은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시내산에 올라가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을 받느라고 다시 내려오는 것이 늦어지자 그것을 참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의 형 아론을 압박하여 금송아지를 만들어 세우고는 그것이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인도해낸 신이라 하며 그 앞에 제사를 드리고 먹고 마시며 뛰놀았던 사건을 가리켜 한 말입니다(출32:1-6). 그 때문에 멸망한 이스라엘 백성의 전철을 고린도교회 신자들은 밟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예는 본문 8절에서 봅니다: “그들 중의 어떤 사람들이 음행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음행하지 말자.”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싯딤이란 곳에 머물러 있을 때 모압 여자들과 어울리며 그들의 초청을 받고 그들의 우상신들에게 제사하는 자리에 가서 그 백성과 함께 먹으며 그들의 우상에게 절하는 일에 가담하기까지 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산 사건을 가리킵니다(민25:1-3). 옛 이방 족속들이 우상을 섬기는 신전에는 신전창녀들이 있었고, 제사가 끝나면 제물을 나누어 먹는 잔치가 벌어지곤 했으며, 식사 후에는 우상신을 즐겁게 하기 위해 성전창녀들과 함께 밤을 새우며 성행위를 벌이곤 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그렇게 모압 여자들과 놀아난 자들이 생겼던 것입니다. 진노하신 하나님께서는 모세로 하여금 백성의 수령들을 잡아 목매어 달게 하셨으며(민25:4) 염병으로 이만 명 이상의 이스라엘 백성을 죽게 하신 사건이었습니다(민25:9). 고린도 교회의 신자들 중에도 우상에게 바쳐졌던 제물의 고기를 먹기 위하여 그런 자리에 드나들다 보면 그런 음행에 빠져들 수 있으니 삼가라고 한 것입니다.
세 번째 예는 본문 9절에서 봅니다: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자.”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호르 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려 하였다가 길로 말미암아 마음이 상하자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며 말하기를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 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했을 때 하나님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셔서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죽은 사건을 언급한 것입니다(민21:4-6). 당신의 백성을 가장 좋고 안전한 길로 인도하신다는 신뢰 없이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와 권능을 시험하는 악을 행했던 옛 이스라엘 백성처럼 고린도 교회 신자들도 하나님을 시험하다가 멸망의 길을 가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경고였던 것입니다.
네 번째 예는 본문 10절에서 봅니다: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이것은 가나안 땅에 곧바로 들어가기를 원하지 않은 이스라엘 백성 때문에 모세의 보냄을 받아 먼저 그 땅을 정탐을 갔던 자들이 돌아와 보고하며 그 땅을 악평하여 말하기를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민13:32-33) 했던 일을 가리킬 것입니다. 그 보고를 받은 이스라엘 온 회중은 소리를 높여 울부짖고 밤새도록 통곡하며 원망을 쏟아내기를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민14:1-3) 하며 서로 말하기를 “우리가 한 지휘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민14:4)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때문에 정탐에서 돌아와 긍정적인 보고를 했던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사십 년 동안을 광야에서 방황하다가 다 죽게 하셨던 것입니다(민14:11-12, 22-24, 29-38). 고린도 교회 신자들 가운데도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그런 일을 당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을 일러준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가진 것을 보지 않고 가지지 못한 것을 보는 순간부터 불만과 불평과 원망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자유를 주시고 한 나라를 이루게 하시며 그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고 계시다는 큰 사실을 잊어버리고 먹을 것 마실 것이 떨어졌다는 작은 사실 때문에 곧바로 하나님을 원망하곤 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오늘까지 우리에게 베푸시고 행하신 일들은 생각하지 않고 나에게 베푸시지 않고 행하지 않으신 일들만 생각하면 금방 불만과 불평과 원망을 일삼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원망은 곧 멸망의 길이라고 사도 바울은 경고하고 있습니다.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며 순종할 줄 아는 것이 우리가 사는 길이고 복된 길임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이 행한 죄와 실패의 역사를 상기시킨 후 본문 6절에서처럼 다시 한 번 그 역사가 기록된 것은 고린도 교회 신자들이 그것을 거울삼아 깨달음을 얻게 하기 위한 것임을 강조합니다. 본문 11절입니다: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사도 바울은 여기서 옛 이스라엘 백성의 경험이 그들만의 지나간 역사가 아니라 바로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위해서 살아있는 역사임을 말합니다. 이 사실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말입니다. 여기서 옛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사건이 그 옛날 그들만의 역사가 아니라 오늘 우리에 관한, 우리를 위한 역사임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말씀은 남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의 이야기로 다가오고 들려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의 이야기를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성경의 이야기는 오늘 우리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본문 12절은 오늘 본문 전체의 결론입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옛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서 열 가지 재앙으로 이집트 땅을 치시며 바로를 굴복시키셔서 이집트에서 나오게 되었고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았으며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내리시는 양식을 먹고 반석에서 내시는 물을 마셨지만 그들이 하나님께 절대적인 감사와 신뢰와 순종을 드리지 못함으로써 광야에서 거의 다 죽고 만 사실을 통해 하나님이 백성이 깨달아야 할 교훈을 사도 바울이 압축한 말입니다. 그렇게 놀라운 은혜를 받았다고 해서 구원이 확정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다 선 줄로 생각하다가 넘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세례 받고 성찬식에 참석하면 하나님의 백성으로 완전히 섰다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세례와 성찬을 통해 그 믿음을 고백하며 공포할 수 있어야 하지만 세례와 성찬에 참여하는 사람이라고 모두가 구원 받을 사람이라는 보장은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옛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가 고린도 교회 신자들에게 주는 교훈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경고로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고린도 교회 신자들에게 유효한 교훈이고 경고라면 또한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교훈이며 경고임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마지막으로 다 섰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넘어지게 만드는 시험은 누구에게나 오는 것임을 말합니다. 본문 13절입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다” 한 말의 뜻은 “너희” 즉 고린도 교회 신자들이 당한 시험은 이미 이스라엘 신자들이 당한 시험이라는 것입니다. 누구나 당할 수 있는 시험이 아닌 시험을 고린도 교회 신자들이 당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또 그런 시험은 고린도 교회 신자들에게는 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누구나 당할 수 있고 고린도 교회 신자들에게도 마찬가지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시험을 이긴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고린도 교회 신자들도 그 시험을 능히 감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미쁘셔서 사람이 어떤 시험을 당하든 피할 길을 보여주시며 감당할 수 있는 힘도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대로 시험을 피할 길을 따르고 하나님께서 능력 주시기를 간구하며 시험을 이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승리의 길이고 복된 삶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실패를 당하고 멸망의 길을 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사도 바울이 의도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고린도 교회 신자들이 다 선 줄로 생각하다가 넘어지지 말 것을 권면하며 경고하고자 한 것입니다. 옛 이스라엘 백성이 다 선 줄로 생각하다가 넘어졌다는 것입니다. 이집트에서 나와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심을 받고 홍해가 갈라져 죽음의 위기를 면하며 안전하게 물을 건너는가 하면 하늘로부터 내리는 양식을 먹고 반석에서 나오는 물을 마시는 놀라운 은혜를 입었지만 교만하여져서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우상을 만들어 섬기며 우상 주변에서 먹고 마시며 뛰어놀았고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시험하다가 광야에서 죽고 만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고린도 교회 신자들도 물로 세례를 받고 성찬에서 신령한 떡과 음료를 마시지만 다른 한편으로 옛 우상숭배에 다시 빠지고 우상 섬기는 이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기를 즐기다가는 옛 이스라엘 백성처럼 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상에게 바쳐졌던 제물의 고기를 먹는 자유를 알았다고 다 선 줄로 생각했다가는 우상 섬기는 자들의 음행에 빠져 넘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시험을 피할 수 있고 능히 감당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신 길을 가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자신의 몸을 쳐 복종하게 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야 참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서 궁극적이고 영원한 상을 잃지 않으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옛 고린도교회 신자들뿐 아니라 오늘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권면과 경고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 말씀에 귀 기울여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하신 영원히 복된 하나님나라의 상을 받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거울을 보면서 삽시다
이기복목사 / 고전 10:1-12
신록의 계절 6월을 맞이하였습니다. 6월은 온 대지가 신록으로 물들고 어느 계절보다 생명이 약동함을 실감나게 느껴지는 계절입니다. 6월이 오면 우리는 사랑하는 조국에 대한 애절한 마음을 감추지 못합니다. 오는 6일은 현충일(顯忠日: The Memorial Day,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킨 이들의 충성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우리 모두는 “호국보훈의 달, 애국애족의 달” 6월을 맞이하여 나라와 민족의 안정과 영적 파수꾼의 사명을 새롭게 다짐해야 할 때입니다. 또한 교회 절기적으로 성령강림절인 6월은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하고 은혜 충만하게 하는 계절입니다. 그리스도의 푸른 계절이 이 땅위에 임하기를 기원하며 6월을 맞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과 가정위에 하나님의 축복이 충만하길 축원합니다.
오늘은 “거울을 보면서 삽시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거울이란 빛의 반사를 통하여 얼굴이나 여러 가지 모습을 비추어 보는 기구입니다. 더 나아가 역사적 사건이나 교훈이 될 만한 사건을 교훈 삼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에는 본보기(Example)라고 표현을 하였습니다.
요즈음은 어디를 가보아도 거울이 있고, 휴대할 작은 손거울이 있어서 수시로 거울을 보면서 자신의 모습을 단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짜 보아야 할 거울은 소홀히 하는 것 같습니다. 역사적으로 크게 교훈 삼아야 할 6월을 맞아 외모만 단장하는 거울만 아니라 그보다 더 중요한 거울을 보는 성도가 됩시다. 그렇다면 어떤 거울을 보면서 살아야 할까요?
1. 역사적 교훈의 거울을 봅시다.
역사는 하나의 거울입니다.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중요한 역사적 거울은 출애굽 하여 광야를 거쳐 가나안 땅에 들어간 사건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물론 예수님께서도 언제나 출애굽과 광야의 생활을 거울삼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말로 본보기를 삼으라는 것입니다. 특히 우상숭배 하다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받은 사건을 거울삼으라는 말씀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시험하다가 뱀에게 물리고 재앙을 당한 것을 거울삼고, 원망하고 불평하다가 멸망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적 사건들을 거울삼아 삼가 조심하라는 말씀입니다.
역사는 우리에게 아주 소중한 거울이요 본보기입니다. 우리도 지난 날 일본에게 강점을 당하고 모든 것을 빼앗기고 식민지 노릇을 하였던 역사적 사건을 뼈저리게 교훈삼아야 합니다. 우리는 6월 현충일과 한국전쟁 일어났던 6.25를 상기하면서 교훈삼아야 합니다. 역사를 왜곡하고 무시하는 민족이나 개인은 더 큰 것을 잃어버리고 어리석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난날의 역사를 소중히 여기고 교훈 삼는 나라나 민족을 복을 받습니다.
2. 말씀의 거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가장 유익하고 좋은 거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을 비추어 보는 사람은 큰 복을 받습니다. 말씀의 거울 앞에 서면 육신의 눈으로 보이지 않는 우리의 마음과 영혼의 깊은 곳까지 다 볼 수 있습니다. 시 19:7-8에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라고 말씀했습니다. 말씀의 장인 시편 119편은 내용 전체가 ‘말씀의 거울’에 대한 말씀입니다. 105절에 보면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말씀했고, 130절에는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나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좋은 거울 중의 거울입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이 말씀의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 보면 큰 은혜와 교훈과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말씀의 거울에 비치어 보면 우리의 마음과 영혼의 상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그래서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말씀의 거울을 보면서 삽니다. 그리고 모든 말씀을 중요한 교훈으로 삼고 은혜를 받습니다. 약 1:23-24에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제 자신을 보고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는 자”와 같다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거울을 항상 보아야 합니다.
3. 양심의 거울입니다.
각 사람에게 주어진 양심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조물주 하나님이 각자에게 주신 거울입니다. 영혼이 맑은 사람일수록 양심의 거울도 맑고 투명합니다. 양심(Conscience)이란 “도덕적인 가치를 판단하여 정선을 명령하고 사악을 물리치는 통일적인 의식”,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바른 말과 행동을 하려는 마음”, “의식”입니다.
양심을 ‘인간 내면의 법정’이라고도 하고, ‘인간 내면에 가지고 있는 도덕적 안테나’라고도 말합니다. 또 양심은 ‘하나님의 법과 일치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 가운데 양심을 주셔서 선악을 분별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양심의 소리를 들어야 하고 양심의 종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제임스 메트카프(JamesJ. Metcalfe)는 “양심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기 위해 만드신 휴대용 무선전화기”라고 하였고, 쟌 자크 루소(Jean Jacques Rousseau)는 말하길 “양심은 영혼의 소리임 정욕은 육체의 소리”라고 하였습니다. 신앙인이 양심에 어긋나는 행위를 하는 것은 하나님을 속이는 것과 같습니다. 양심의 거울이 녹슬지 않도록 항상 주의 합시다.
4. 자연이나 다른 피조물이 거울입니다.
하나님은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에게 위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잘 다스리고 보존하라고 하셨습니다. 결코 하나님이 주신 피조물을 악용하라고 주시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살아가면서 하나님이 주신 자연이나 다른 피조물을 거울로 삼아야 합니다. 때문에 자연도 우주도 모두가 하나의 거울입니다. 윤동주 시인은 그의 서시에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 했다.”고 하늘이라는 거울 앞에 자신을 비추어 보았습니다. 성경 시편의 시인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와 자연 앞에서 감탄을 하면서 자신을 비추어 노래하였습니다. 모든 피조물이 하나의 거울이 되는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훌륭한 인물이나 책,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들도 아주 좋은 거울입니다. 거울을 볼 줄 아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날마다 외모를 가꾸는 거울만 아니라 인간의 내면과 양심을 바르게 하는 각종 거울을 보면서 자신을 새롭게 하는 지혜를 얻읍시다.
성경은 과거의 역사적인 기록이 아니라 “…본보기가 되고…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11절)”기록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역사적인 사건이나 자연을 통하여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셨습니다. 12절에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거울을 제대로 보는 사람은 교만하지 않고 늘 조심합니다.
애국애족의 달이요, 호국보훈의 달 6월을 맞아 지난 날의 역사를 거울삼아 다시는 과거와 같은 비극이 없기를 바라고 이 시대를 지키는 영적 파수꾼이 되길 원합니다.
멸망한 대다수
고린도전서 10:1-13 / 이영기목사
설교학 교수가 그랬습니다. 될 수 있으면, 부정적인 제목을 사용하지 말라고. 그러나 저는 오늘 부정적인 제목을 사용합니다. “구원받은 대다수”라는 제목보다, “멸망한 대다수”라는 제목이 본문에 훨씬 알맞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듣는 여러분이 멸망하기를 원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멸망하지 않기를 원해서입니다. 이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서입니다.
사실, 민주주의는 다수결 원칙입니다. 어느 쪽보다 어느 쪽아 더 많으면, 그 많은 쪽의 선택을 따르는 겁니다. 그렇기에 어떻게 해서든지 내 편을 많이 만들려고 합니다. 어느 당이든 그들에게 속해 있는 국회의원 수가 전체의 과반수가 넘으면 어떤 법도 통과시킬 수 있으니 말입니다. 서초동이나 광화문에서 아우성치는 것도 그렇습니다. 사람이 많이 모인 곳, 사람이 적게 모인 곳, 그들의 주장이 다릅니다. 그렇다면 누구의 주장이 옳다고 봐야 하겠습니까? 당연히 많이 모인 곳이 옳다고 여기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정말 다수가 선일까요? 어떤 의견에 다수가 모였다고 해서 반드시 그 의견이 선일까요? 그렇다면, 소수가 모였다고 해서 그 사람들의 의견이 선일까요? 아닙니다. 사람이 얼마나 모였느냐에 따라 선과 악이 구별되는 건 아닙니다. 백만 명이 아니라 수억의 사람이 모여서 소리쳐도 악은 악이고 선은 선입니다. 단 서너 사람이 모여도 소리쳐도 악은 악이고 선이 선입니다. 99명의 충치를 앓고 있는 가운데 단 한 사람, 충치를 앓고 있지 않는 사람이 건강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선악의 구분은 다수에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소수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참 많은 거짓말이 오고 갑니다. 물론 어디나 거짓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거짓말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라야 합니다. 거짓말 한 사람이나, 그 거짓말을 퍼서 옮긴 사람이나 거기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문제는 대부분 거짓말 한 사람들은 그 말에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아니면 그만이라는 생각들입니다. 심지어 복음에도 거짓이 있었습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다른 복음이 없다고 선언합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교회에는 다른 복음을 전한 사람이 있었고, 갈라디아 교인들은 그들에게 넘어갔습니다. 예, 다른 복음은 거짓말입니다. 그런데 그 거짓말에 넘어간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서 1:6에서, “여러분을 그리스도의 은혜 안으로 불러 주신 분에게서, 여러분이 그렇게도 빨리 떠나 다른 복음으로 넘어가는 데는,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복음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갈라디아서 1:4,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우리를 이 악한 세대에서 건져 주시려고,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바치셨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죄 가운데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아무도 스스로는 도무지 구원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외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가 죽어야 하는데, 대신 죽으신 겁니다.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으신 겁니다. 그럼으로 해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죄 용서함 받고, 구원을 얻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예수 믿어도 율법을 지켜야 하고, 할례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말을, 이 거짓을 갈라디아 사람들이 받아들인 겁니다. 갈라디아 사람들 대부분은 이방 사람들입니다. 유대의 율법과 할례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율법을 지켜야 하고 할례를 해야 한다는 말을, 복음으로 받아들인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그들이 복음을 버리고 다른 복음, 곧 거짓말을 받아들였겠습니까? 갈라디아서 1:10, “내가 지금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려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려고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사람의 환심을 사려고 하고 있습니까? 내가 아직도 사람의 환심을 사려고 하고 있다면,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바울 대적하는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는 꼬임이라는 겁니다. ‘예수 믿고 구원을 얻는다’라는 정도로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 있겠느냐는 겁니다. 예수 믿어도 인간으로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율법을 지키며, 할례를 하는 거랍니다. 유대 사람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율법을 지켰고 할례를 했다는 겁니다.
그러나 바울은,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해서 사람을 내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오로지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전했습니다. 갈라디아서 2:16, “사람이, 율법을 행하는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임을 알고,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율법을 행하는 행위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자 했던 것입니다. 율법을 행하는 행위로는, 아무도 의롭게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누구보다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강조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구원이 되셨다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3:13-14,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사람이 되심으로써,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셨습니다.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는 모두 저주를 받은 자이다’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내리신 복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방 사람에게 미치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약속하신 성령을 받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4:6-7, “그런데 여러분은 자녀이므로 하나님께서 그 아들의 영을 우리의 마음에 보내주셔서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각 사람은 이제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자녀이면, 하나님께서 세워 주신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아직도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 겁니다. 할례를 행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5:10-12, “나는 여러분이 다른 생각을 조금도 품지 않으리라는 것을 주님 안에서 확신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을 교란시키는 사람은, 누구든지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아직도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아직도 박해를 받겠습니까? 그렇다면, 십자가의 거리낌은 없어졌을 것입니다. 할례를 가지고 여러분을 선동하는 사람들은, 차라리 자기의 지체를 잘라 버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만약 사도 바울께서, 율법을 지켜야 하고 할례를 행해야 한다고 말했다면, 적어도 유대 사람에 의한 박해는 없었을 겁니다. 유대 사람들이 시비를 걸 이유도 없었을 겁니다. 그렇기에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행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당하는 박해를 피하는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6:12, “육체의 겉모양을 꾸미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여러분에게 할례를 받으라고 강요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에 받는 박해를 면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할례를 받는 사람들 스스로도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서 여러분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는 것은, 여러분의 육체를 이용하여 자랑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유때문에 당하는 박해를 면하려고 할례를 받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정말 그들이야말로, 그럼으로 해서 사람들을 자기편으로 만들고, 그럼으로 해서 자기를 자랑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갈라디아서 6:14, “그런데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죽었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죽었습니다.”
그랬는데, 갈라디아 교인들이 바울의 적대자들이 하는 말에 쉽게 넘어갔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아무래도 부담이었으니까요. 로마 당국도 그렇고, 곳곳마다 퍼져 있는 유대 사람들과의 관계도 그렇고, 아무래도 껄끄러운 관계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들이 이때까지 가져온 이방 신앙에서도 행함과 정성을 강조하기도 해서, 그런 것이 몸에 익기도 했으니까요. 그러나 구원은, 우리의 생각이 어떠냐에 있는 것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에 있는 것입니다. “내 생각은 이래”라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자기 복음입니다. 거기엔 구원이 없습니다.
그러고 보면, 이것은 참으로 어려운 문제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수없이 들었습니다. 사실, 성경에서 직접 듣기보다는 설교자들, 심지어 가까운 사람들에게서 들었습니다. 그나마 설교자들에게서 들은 거라면, 그래도 나을 겁니다. 자신 역시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들어온 것으로 아는 것이 전부인 사람에게서 들으면, 그것 역시 아무것도 모르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이것이 무서운 겁니다. 그러나 누가 그 말씀을 전해주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가 전하는 말이, 복음이냐 아니냐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서 1:8-9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이나, 또는 하늘에서 온 천사일지라도, 우리가 전한 것과 다른 복음을 여러분에게 전한다면, 마땅히 저주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전에도 말하였지만, 이제 다시 말합니다. 여러분이 이미 받은 것과 다른 복음을 여러분에게 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누구이든지, 저주를 받아야 마땅합니다.” 하늘에서 온 천사, 심지어 바울 자신이 전하는 말이라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이 아니면 그것은 다른 복음입니다. 그것은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멸망하게 합니다. 그렇기에 그것을 전하는 사람은 저주를 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 역시 저주를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사람은 오직 복을 전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누가복음 13:22 이하에 보면, 어느 날 예수님께서 여러 성읍과 마을에 들르셔서, 가르치시면서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예수께 물었습니다.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그래서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습니다. 24절,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들어가려고 해도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니까, 구원을 받을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까? 적다는 것입니까? 예, 적다는 말씀입니다.
뒤따라 25-30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집주인이 일어나서, 문을 닫아 버리면,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면서 ‘주인님, 문을 열어주십시오’ 하고 졸라도, 주인은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나는 모른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때에 너희가 말하기를 ‘우리는 주인님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인님은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할 터이나, 주인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나는 너희가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모두 내게서 물러가거라’ 할 것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예언자는 하나님 나라 안에 있는데, 너희는 바깥으로 쫓겨난 것을 너희가 보게 될 때에, 거기에서 슬피 울면서 이를 갈 것이다. 사람들이 동과 서에서, 또 남과 북에서 와서, 하나님 나라 잔치 자리에 앉을 것이다. 보아라, 꼴찌가 첫째가 될 사람이 있고, 첫째가 꼴찌가 될 사람이 있다.” 어떤 사람은 스스로 자기는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나 같은 사람이 구원을 못 받으면 누가 구원을 받겠는가?’ 그렇게 자신합니다. 그래서 당당히 주인에게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문을 열어주지 않는 겁니다. 오히려 주인은 그들을 모른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들이 말합니다. “우리는 주인님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인님은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이 말은 둘 중의 하나입니다. 다른 사람하고 그랬는데, 그것을 주인님과 그랬다고 착각하는 겁니다. 아니면, 그러지도 않았는데 그랬다고 거짓말하는 겁니다. 그러나 주인의 말은 단호합니다. “나는 너희가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모두 내게서 물러가거라.” 쉽게 말하자면, 그것은 너의 생각이라는 겁니다. 내 생각은 너의 생각과 다르다는 겁니다.
아! 이런 겁니다. 누가복음 17:17-20, “일흔두 사람이 기쁨에 차서, 돌아와 보고하였다. ‘주님, 주님의 이름을 대면, 귀신들까지도 우리에게 복종합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이 하늘에서 번갯불처럼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다. 보아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세력을 누를 권세를 주었으니, 아무것도 너희를 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굴복한다고 해서 기뻐하지 말고,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마태복음 7:21-23,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말하기를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할 것이다.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분명히 말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물러가라.’” 그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들까지도 복종시켰습니다. 분명히 주님 또한 그들로 말미암아 “사탄이 하늘에서 번갯불처럼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모두가 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것보다도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였습니다. 그러니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주님께서 그들을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물러가라.” 분명히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불법을 행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도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나왔습니다. 그들은 구름 기둥이 인도하는 대로 길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홍해라고 하는 바다를 하나님께서 가르셔서, 육지같이 걸어서 건넜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만나를 먹었고, 반석을 쳐서 흘러내리게 하신 물을 마셨습니다. 그것을 본문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바닷속을 걸었다는 것은 세례입니다. 물속으로 들어갔다가 물속에서 나왔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1-2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여러분이 이 사실을 알기를 바랍니다. 우리 조상들은 모두 구름의 보호 아래 있었고, 바다 가운데를 지나갔습니다. 이렇게 그들은 모두 구름과 바다 속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를 먹고, 반석을 쳐서 흘러나온 물을 마셨습니다. 그렇기에 그 만나는 신령한 음식이고, 그 물은 신령한 음료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이집트에서 나온 이스라엘 자손은 모두가 다 세례를 받았습니다. 모두가 다 그 신령한 음식을 먹고 그 신령한 음료를 마셨습니다. 그러나 5절, “그러나 그들의 대다수를 하나님께서는 좋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대다수를 좋아하지 않으셔서, 대다수를 일부러 멸망시키신 것은 아닙니다. 그들 가운데 얼마는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그들 가운데 얼마는 간음하다가 죽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얼마는 그리스도를 시험하다가 뱀에 물려 죽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얼마는 불평하다가 그들을 파멸시키는 이에게 멸망을 당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죄로 인해서 죽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일들을 기록하게 된 이유를 이렇게 말씀합니다. 11-12절, “이런 일들이 그들에게 일어난 것은 본보기가 되게 하려는 것이며, 그것들이 기록된 것은 말세를 만난 우리에게 경고가 되게 하려는 겁니다. 그러므로 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우리가 분명히 기억할 것은, 죄를 지으면 반드시 죽는다는 겁니다. 사랑의 하나님이시라고 해서 무조건, 아무나 다 살려주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죽이셨습니다. 비록 그들이 이집트에서 함께 나오긴 했지만, 그래서 모두 다 함께 세례를 받고, 신령한 음식과 신령한 음료를 마셨지만, 그러나 그렇더라도 죄를 지으면 죽는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물며 우리이겠습니까? 우리가 유대 사람들도 더 나은 것이 무엇입니까? 그래도 유대 사람들은 일찍이 하나님의 택함을 받았고, 말씀을 받았고, 그 말씀대로 살았습니다. 그러니 쉽게 우리와 비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셨습니다. “너희는 내 백성이요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율법을 주셔서, 그들은 율법대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습니다. 대다수 사람이 예수님을 거역하였습니다. 끝내 예수님을 십자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방 사람들에게 구원의 길,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이방 사람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구원, 곧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구원이 이방 사람들에게 넘어갔습니다. 그것을, 바울은 로마서 11:17-21에서, 참 올리브나무와 돌 올리브나무로 비유한 것입니다. 로마서 11:17-21, “그런데 참 올리브나무 가지들 가운데서 얼마를 잘라 내시고서, 그 자리에다 돌 올리브나무인 그대를 접붙여 주셨기 때문에, 그대가 참 올리브나무의 뿌리에서 올라오는 양분을 함께 받게 된 것이면, 그대는 본래의 가지를 향하여 우쭐대지 말아야 합니다. 비록 그대가 우쭐댈지라도, 그대가 뿌리를 지탱하는 것이 아니라, 뿌리가 그대를 지탱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본래의 가지가 잘려나간 것은, 그 자리에 내가 접붙임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하고 그대는 말해야 할 것입니다. 옳습니다. 그 가지들이 잘린 것은 믿지 않은 탓이고, 그대가 그 자리에 붙어 있는 것은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십시오.”
그러니까, 우리 이방 사람은 돌 올리브나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참 올리브나무인 유대 사람들로부터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뿌리가 되는 참 올리브나무에서 양분을 함께 받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이방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교회의 구성원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이방 사람 중에 예수 믿는 사람이 더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주도권을 이방 사람들이 쥐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방 사람들이 우쭐거렸습니다. 심지어 바울 사도와 같이 율법으로도 아니고 할례를 행함으로도 아니라는 가르침이 있고 보니, 더더욱 이방 사람들이 힘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방 사람에게 경고합니다. 당신들은 원래의 가지가 아니라는 겁니다. 유대 사람이 떨어져 나간 그 자리에 대신 접붙임을 받은 거랍니다. 그렇기에 본래의 가지도 아낌없이 잘라 버리신 하나님께서는 이방 사람은 더욱 잘라버리신다는 겁니다. 그렇기에 이방 사람들은 유대 사람들보다 더욱 신앙생활을 잘하라는 겁니다. 이방 사람이 구원을 받게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된 것이기에,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만 믿으라는 겁니다. 그래서 12절, “그러므로 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예수 믿고 구원받는 백 명과 예수 믿지 않아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 천명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어느 쪽을 기뻐하시겠습니까? 예, 당연히 구원받은 백 명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의인을 구하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구하러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께서 죄인을 더 좋아하시는 줄 압니다. 죄인에게만 관심을 가지신 줄 압니다. 그러나 주님의 목적은 의인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 지신 것도,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의인이 되기 위함입니다. 왜냐하면, 의인이 구원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내가 의인인가?” 고민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열왕기상 6장에서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합니다. 그런데 생뚱맞게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2절, “드디어 네가 성전을 짓기 시작하였구나. 네가 내 법도와 율례를 따르고, 또 나의 계명에 순종하여, 그대로 그것을 지키면, 내가 네 아버지 다윗에게 약속한 바를 네게서 이루겠다.” 지금 성전을 짓고 있는 사람에게 주신 말씀치고는 상황에 맞는 말씀 같지 않습니다. 그래서 생뚱맞다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성전을 건축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 봅니다. 왜 하나님께서 대다수의 사람을 싫어하셨습니까? 예,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일찍이 말씀하셨습니다. 출애굽기 20:3-5,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들을 섬기지 못한다. 너희는 너희가 섬기려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떠서 우상을 만들지 못한다. 나, 주 너희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그 죄값으로, 본인뿐만 아니라 삼사 대 자손에게까지 벌을 내린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우상을 만들고 숭배하였습니다.
민수기 25장, 이스라엘 백성들이 싯딤에 머무는 동안에, 모압 사람들의 딸들이 자기 신들에게 바치는 제사에 이스라엘 백성을 초청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기에 가서 먹고, 그 신들에게 머리를 숙였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압 사람의 딸들과 음행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바알부올과 결합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크게 화를 내셨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백성의 우두머리들을 모두 잡아다가 해가 환히 지치는 대낮에, 주 앞에서 그들을 목을 매달아 죽였습니다. 바알부올과 결합한 남자들은 모두 죽였습니다.
민수기 21장,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 땅을 향해 가다가 에돔 땅을 돌아서 가려고, 호르 산에서부터 홍해 길을 따라 나아갔습니다. 그러자 백성의 마음이 조급해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먹을 것도 없고 마실 것도 없다고 불평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불뱀을 보내서, 많은 사람이 불뱀에 물려 죽었습니다. 예,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마태복음 13:13-14,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거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그 길이 널찍하여서,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너무나도 좁고, 그 길이 비좁아서, 그것을 찾는 사람이 적다.” 왜 좁은 문입니까? 고난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찾지 않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그 길이 생명의 길입니다. 그런데 이 길을 찾는 사람이 적다는 겁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간다고 해서 생명의 길이 아닙니다. 적은 사람이 간다고 해서 생명의 길인 것도 아닙니다. 그 길이 생명의 길이기에 많든 적든 그 길을 가는 사람이 생명을 얻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들을 택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을 구원하십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요한복음 3:16,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시오. 그러면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잊지 마십시오. 내가 구원을 받았는지 못 받았는지, 구원에 대한 증거가 내게 있느냐 하는 겁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구원받은 증거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5:13-15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부르셔서,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자유를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구실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 모든 율법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하신 한 마디 말씀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서로 물어뜯고 잡아먹으려고 하면, 피차 멸망하고 말 터이니, 조심하십시오.”
그래서 멸망하는 그룹에 속했다가 멸망 당하는 일이 없게 하십시오. 끝내 구원을 얻는 반열에 속하여 영원한 구원을 얻으십시오.
나는 나를 아는가?
고전10장 01절 ~ 11절 / 김영헌목사
이런 민담을 들어보셨습니까? 거울에 얽힌 얘기입니다. 시골에 사는 선비 하나가 한양에 과거를 보러갔습니다. 과거시험을 치른 후에 한양 장터를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광물점에 들어가서 이것저것 구경하다가 참 신기한 것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손거울입니다. 값이 비쌌지만 시골 촌구석에서 고생하는 아내에게는 안성맞춤의 선물이 될 것 같았습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아내를 찾았으나 김을 매러 갔는지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내가 잘 볼 수 있는 벽에 못을 박고 거울을 걸어 놓았습니다. 아내가 얼른 보고 기뻐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선비가 외출을 한 사이에 아내가 집에 돌아와 보니 짐 보따리는 있는데 남편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방을 둘러보니 벽에 이상하게 반짝 거리는 것이 걸려 있었습니다. 일어나서 들여다보다가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그 안에 예쁜 색시 하나가 들어있었습니다. 한양에 과거를 보러갔던 남편이 과거에는 관심이 없었고 예쁜 색시 하나를 데려온 것이 분명했습니다. 가슴이 떨렸습니다. 분하고 억울했습니다. 남편 뒷바라지 하느라 온갖 고생 다했는데 남편은 자기를 배신하고 다른 색시를 데려왔으니 지난 세월이 너무 억울했습니다. 방바닥에 주저앉아 통곡을 합니다.
그때 시어머니가 들어와 울고 있는 며느리의 얘기를 듣고 놀랐습니다. 어떤 색시를 데려왔나 싶어 거울 안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거기에는 예쁜 색시는커녕 바짝 늙은 할멈이 있었습니다. 아니 이 녀석이 할망구하고 바람이 났다니! 아들이 한심했습니다. 첩을 데려오려면 젊고 예쁜 색시를 데려와야지 다 늙은 여자를 데려다 어디에 쓰려고 하나? 한심한 아들을 둔 시어머니가 속이 상해 퍼질러 앉아 웁니다. 집안에서 통곡소리가 난다는 얘기를 듣고 들에 있던 시아버지가 헐레벌떡 들어왔습니다. 자초지종을 들은 시아버지가 확인도 할 겸 거울을 들여다봤습니다. 거울 안을 들여다본 시아버지가 갑자기 넙죽이 절을 하더니 “아버님, 안녕하셨습니까?” 인사를 여쭙더랍니다. 거울 속의 자기 모습이 돌아가신 자기 아버지와 꼭 닮았던 모양입니다. 거울이 없던 시대에 회자된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만일 한 번도 자기 얼굴을 보지 못했던 사람이 처음으로 거울을 통해서 자기 얼굴을 보았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물론 처음에는 모두 놀랄 것입니다. 자기가 상상했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어떤 이는 “야,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잘 생겼구나”라고 흡족해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요, “아니, 이게 나야? 실망이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80이 다된 할아버지가 ‘귀소본능’이 일어나 고향을 찾아갔습니다. 오래 전에 뛰놀던 냇가나 산을 바라보며 감회가 컸습니다. 방학 때라 다니던 초등학교 교실에 가서 의자에 앉아볼 수 있었습니다. 70여 년 전의 일들이 새록새록 생각났습니다. 학교를 나와 논둑길을 걷는데 앞에서 할머니 하나가 손주를 데리고 오고 있었습니다. 이가 다 빠지고 주름으로 가득 찬 얼굴이지만 초등학교 동창생이 틀림없었습니다. “할머니, 70년 전에 이 학교에 다니지 않으셨어요?” “네. 이 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때 이동철이라는 학생을 기억하세요?” “글쎄요, 이름은 기억이 안 나지만 당신처럼 대머리 벗어진 할아범은 없었수다.”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토라진 음성을 내뱉고는 가더랍니다. 늙은 할아범만 보였지 자신의 늙은 모습은 보지 못하는 할머니였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자신을 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과거의 나는 누구였나? 나의 뿌리는 어디서 시작되었나? 현재의 나는 누구인가? 앞으로의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 내가 나를 알아야 사람답게 살 수 있습니다. 내가 나를 모르면 조롱거리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Know yourself)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나를 볼 수가 없습니다. 내 눈으로 내 얼굴이 안보입니다. 나를 내 능력이나 내 경험이나 내 지식으로는 알 수가 없습니다. 거울이 있어야 내가 내 얼굴을 볼 수 있듯이 나 아닌 다른 것을 이용해야만 나를 볼 수도 있고, 알 수도 있습니다. 인간이 처음 창조될 때는 자신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죄로 말미암아 자기를 볼 수 있는 눈이 망가졌습니다. 판단능력이 사라졌습니다. 죄로 타락한 인간에게 맨 먼저 찾아온 재앙이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나를 모르니 나는 더욱 깊은 죄의 수렁에 빠지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추함을 알지 못합니다. 느끼지 못합니다. 이것이 인간 타락의 가장 큰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자신을 볼 수 있는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은 나 자신을 보게 합니다. 성경은 나 자신을 알고 깨닫게 하는 인생거울입니다. 성경을 펼쳐 읽으면 내가 보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됩니다.
오늘 봉독한 고전 10:1-11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게 하는 말씀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눈도 열어 자신의 모습을 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한 해의 마지막 주일, 송년주일 예배를 드리며 이 말씀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의 말씀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누구인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고전 10:1)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을 향하여 “너희가 누구인지 너희들의 조상 때부터 내가 알고 있다”고 말함으로 모세오경에 기록된 말씀을 통해 너희들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자신을 알려면 첫째로 뿌리를 알아야 합니다. 어디서 태어났는지 그 뿌리를 모르면 오늘의 내가 누구인지를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누구입니까?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3] 모두가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4] 모두가 같은 신령한 음료를 뒤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니 …』(고전 10:1b-4a)
애굽에서 430년 동안이나 종살이하던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종 모세에 의해 탈출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되었습니다. 광야를 지날 때, 낮에는 구름기둥이, 밤에는 불기둥이 인도했습니다. 홍해가 가로 막을 때는 바다를 갈라서 육지처럼 지나가게 했습니다. 하늘에서는 만나를 내려주시고 목이 마를 때는 반석에서 샘물이 솟게 하셨습니다. 출애굽기 13장과 17장에 이 역사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으로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서 풍성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는 하나님의 백성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을 배신하고 타락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제 갈 길로 달려감으로 하나님을 슬프게 했습니다. 바울은 5절에서 이렇게 지적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고전 10:5)
어떻게 그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슬프게 했느냐?
① 악을 즐겨 행했습니다(6절)
② 우상을 숭배했습니다(7절)
③ 음행을 저질렀습니다(8절)
④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물려 죽었습니다(9절)
⑤ 원망을 했습니다(10절)
이렇게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광야에서 멸망한 자들을 성경에 기록한 까닭은 모든 사람들에게 본보기가 되어 깨우치게 하는데 있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의 이 말씀을 읽노라면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같이 성경은 우리의 뿌리를 알게 하여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합니다.
둘째로 다른 사람을 통해서 나를 알게 됩니다. 탈무드에 보면 굴뚝청소를 함께 한 두 소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두 소년이 굴뚝청소를 하고 나왔습니다. 누가 먼저 얼굴을 씻겠느냐는 질문입니다. 상대방의 얼굴에 그을음이 묻어 있는 것을 먼저 본 사람이 먼저 씻게 마련입니다. 내 얼굴도 저렇게 더러워졌을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제 얼굴은 보지 못한 채 상대방의 얼굴에 꺼멍이 묻어 있다고 흉보는 사람이 있다면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갈 6:1)
다른 사람의 잘못이나 단점을 발견했을 때 비난하거나 정죄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자칫 남의 실수를 보면서 책망하고 정죄하고 비방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 7:3)
다른 사람을 통해서 나를 볼 줄 아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셋째로 오늘 2008년을 마지막으로 떠나보내면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지난 한 해를 뒤돌아보면서 세월과 함께 떠나보내야 할 것들을 떼어내는 일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내가 누구인지를 보았으면 단장을 해야 합니다. 잘 한 것이 무엇이고, 잘못한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해서 잘못한 것이 있다면 털어버려야 합니다. 성경에 비춰보면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깨닫게 됩니다. 깨달았으면 버려야 합니다. 수정해야 합니다.
악을 즐겨 행했습니까?
우상을 숭배했습니까?
음행을 저질렀습니까?
주님을 시험했습니까?
원망을 일삼았습니까?
한 해를 떠나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즈음에 영적 새옷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하는 행위를 버려야 합니다. 버릴 때는 용단이 필요합니다. 성공하는 사람은 버릴 때 용감한 사람입니다. 우물쭈물하면 다시 오염되고 맙니다.
성경을 통해서 내가 누구인지를 깨달으면 맨 먼저 찾아드는 마음이 있습니다. “감사”입니다. 광야를 건너는 이스라엘이 구름아래 있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났으며 신령한 음식과 음료를 먹었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돌보시지 않으셨다면 하루도 살 수 없었음을 깨닫게 하는 말씀입니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받았기에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홍해의 위기 앞에서 바다를 육지같이 건너게 하시는 하나님의 기적의 은총이 있었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릴 때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셨습니다. 목이 마를 때 바위를 쳐서 생수를 솟아나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받은 은혜는 말로 형언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이 일을 누가 행하였느냐 누가 이루었느냐 누가 처음부터 만대를 불러내었느냐 나 여호와라 처음에도 나요 나중 있을 자에게도 내가 곧 그니라』(사 41:4)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섰을 때 “나는 죄인 중의 괴수”였는데도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의 ‘나’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으면 오늘의 내가 있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깨닫고 이렇게 감격하였습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of whom I am the worst) (딤전 1:15)
그러므로 “오늘의 나”된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이제 한 해를 넘어가면서 오늘의 내가 여기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달았으니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을 갖고 새해를 맞이해야 합니다. 그래야 새해에는 더욱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따라 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깨우치게 하시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제 하나 더 정리하고 가야 할 일이 있습니다. 지난 한 해 우리를 사로잡았던 실패감, 열등감, 섭섭함, 분노, 등을 떨쳐버리고 가는 일입니다.
오랫동안 영국의 지배를 받던 인도는 독립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종교의 갈등으로 내홍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회교도에게 아들을 잃은 한 힌두교도가 마하트마 간디를 찾아갔습니다. “어떻게 하면 회교도를 용서할 수 있습니까?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죽인 자들에 대한 미움과 증오가 마음속에 가득한데 어떻게 하면 평화를 내안에 찾을 수 있습니까?” 간디는 그에게 고아가 된 적군의 아들을 입양해서 자식처럼 키우라고 제언을 해주었답니다. 내가 행복해지기를 원한다면 용서가 필요합니다. 용서는 마음의 상처를 치료해주고 미움과 증오와 불안으로 가득한 내 안에 평안을 줍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도 용서가 있어야만 원만히 맺을 수 있습니다.
사노라면 상처를 받기도 하고 상처를 입히기도 합니다. 때로는 억울하게 상처를 받고 피해를 입습니다. 그때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나를 모함한 자, 섭섭하게 한 자에 대한 분노를 삭일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못된 짓을 한 자를 용서하면 그들이 저지른 못된 행동을 인정하는 것이 되어 용서가 안 됩니다. 용서는 그것이 아닙니다. 못된 짓은 못된 짓입니다. 다만 못된 짓을 한 그 사람이 불쌍한 것뿐입니다. 못된 짓을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일을 저지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를 용서하지 않을 때 오히려 그 상처와 분노의 감정에 내가 노예가 되어, 앞으로 살아야 할 날들을 불행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을 보면 그동안 살면서 느껴보지 못했던 평안을 되찾는 것을 종종 봅니다. 죽음이 모든 것을 내려놓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실패나 상처는 미래 앞에서 죽은 시체와 다를 바 없습니다. 왜냐면 우리는 그 과거를 다시 살지 않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미래를 살 뿐입니다. 과거는 다시는 우리 앞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때문에 결심만 하면 과거의 아픔을 모두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새해는 새 마음으로 맞이합시다. 새 감정으로 맞이합시다. 새 희망으로 맞이합시다. 새 기쁨으로 맞이합시다. 새해를 출발하는데 짐이 될만한 모든 것들을 다 내려놓고 가벼운 차림으로 시작합시다.
신앙적인 교만을 조심하라
고전10장 01절 ~ 12절 / 최영기목사
성도들이 가장 조심해야할 것이 신앙적인 교만입니다. 주위 교회를 보아도 교회 생활을 오래 했거나, 성경 공부를 많이 했거나, 성령 체험을 했다는 분들이 주위 분들에게 상처를 주고 교회를 파괴하는 것을 봅니다. 신앙적인 교만이 파괴력이 큰 이유는 자신은 하나님의 뜻을 남보다 더 잘 알고 자신은 하나님의 은혜를 남보다 더 받았다는 자부심이 있기 때문에 불도저 식으로 밀고 나가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 중의 하나가 잘못된 신앙적인 확신입니다.
고린도 교회에서 생기고 있는 문제들도 결국 문제는 영적인 교만 때문이었습니다(12절). 고린도 교인들은 영적인 체험이 많았고 복음에 대한 확실한 지식을 갖고 있다는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문제가 많이 생기고 있었습니다.
Ⅰ. 신앙적 교만은 죄를 불러온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증명해 보이려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고린도 교인들과 비슷한 경험을 했지만 죄를 짓고 멸망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의 출애굽 때에 홍해를 건넌 것을 침례에 비유하고 광야에서 하늘에서 만나가 내려서 먹은 것을 성찬에 비교합니다(1-4상). 그러나 이들은 멸망하였습니다. 이를 통하여 고린도 교인들에게도 멸망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5-6절). 신앙적인 교만으로 인하여 빠질 수 있는 죄를 바울은 세 가지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첫째가 우상 숭배입니다(7절). 모세가 율법을 하나님으로부터 받기 위하여 시내산에 들어갔을 때에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 돌아오기를 기다리지 못하고 금으로 소를 만들어 경배했던 사건을 말하고 있습니다(출 32:1-6).
우상 숭배는 예수를 갓 믿는 사람들의 문제이지 신앙 연륜이 높은 사람이 빠질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우상을 너무 좁게 해석한 결과입니다. 나무나 금속으로 만든 상만이 우상이 아닙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우상입니다(골 3:5). 신앙의 연륜이 깊어질 때에 사역이나 신학이나 전통이 우상이 될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우상이 된 것은 어떻게 알 수가 있습니까? 많은 교회에서 사역 문제를 놓고 신학적인 문제를 놓고 혹은 전통의 문제를 놓고 다투고 싸웁니다. 저는 이것이 그러한 것들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증거라고 봅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크고 중요한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마 22:37-39). 또 예수님도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절대 절명의 계명을 무시하고 사랑을 깬다는 것은 하나님보다 사역이니 신학이나 전통이 이 더 중요해졌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신앙 연륜이 깊어지면서 사랑이 점점 중요해져야합니다. 옳고 그른 것을 따지는 것은 덜하고 무엇이 사랑이냐를 더 생각해야합니다. 우상 숭배를 피하셔서 넘어지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에게 쓰임받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가 간음입니다(8절). 여기에서 바울은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 여인들과 동침하고 그들의 신에게 절하다가 멸망한 사건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민 25:1-9). 신앙적인 교만이 간음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저는 주위에서 훌륭한 목회자들이 간음죄로 인하여 자신과 가정을 파괴하고 목회를 그만두어야하는 경우를 종종 보면서 마음 아파합니다. 그런데 시작은 보통 교만입니다. 나는 간음죄 같은 것에는 빠질 수가 없다는 자신감이 여성과의 만남을 쉽게 만듭니다. 더구나 상담을 위하여 만나다보면 남에게 해본 적이 없는 마음 깊숙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고 그러다 보면 서로 끌리게 되어서 마침내는 간음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간음죄에 관해서는 어느 누구도 자신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거리를 두는 것이 최선입니다. 목자들은 여성 목장 식구들 사역은 목녀에게 맡기고 전화도 걸지 않고 상담도 피하는데 잘하는 것입니다. 간음죄에는 누구도 자신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배우자 아닌 이성과 단 둘이 만난다던가 전화로 마음 깊숙한 대화를 나누는 것을 피하고 공개적으로 모임에서 하든지 동성의 배우자에게 위임하여서 넘어지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께 쓰임받는 성도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째가 불평입니다(10절).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한 후에 하도 불평을 많이 하여서 어떤 사건을 바울이 염두에 두고 있는지 꼬집기가 힘이 듭니다. 홍해를 건는 후에는 왜 우리를 애굽에서 데리고 나와서 고생을 시키느냐고 불평을 하였고, 만나를 먹고 살 때에는 고기 안 먹여 준다고 불평을 하였고, 가나안 문턱에서 스파이가 가나안 정복은 불가능하다는 보고를 했을 때에는 우리를 여기에 데리고 와서 죽이려느냐고 불평을 하였습니다.모세를 향한 불평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향한 불평입니다. 그래서 그 세대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멸망하였습니다.
목장에서도 순종 잘 하던 목장 식구가 삶 공부라도 몇 개 듣고 나면 불평을 시작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도자에게 이견을 제시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얼마든지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고 제안을 할 수가 있습니다. 불평과 이견과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이견은 본인에게 직접 제시합니다. 불평은 제 3자에게 말합니다. 이견은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합니다. 불평은 대안이 없이 비판만 합니다. 이견은 지도자가 안 받아들이면 지도자의 결정을 받아들입니다. 불평은 지도자가 안 받아들이면 더 목소리를 높입니다.
우리는 신앙 연륜이 깊어지면서 말을 아껴야합니다. 입을 열면 긍정적인 말을 하여야합니다. 저는 다른 교회 평신도가 교회에 문제가 생겨서 충고를 청하면 담임 목사님이 죄를 짓지 않은 한 무조건 여당이 되라고 조언을 합니다. 우리는 불평을 조심하여서 하나님께 끝까지 쓰임받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Ⅱ. 악령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사도 바울은 또한 오늘 본문에서 영적인 실체를 무시하지 말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말씀에 근거한 신앙을 가졌고 확신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신전에 모셔놓은 아프로디테 여신이 우상에 지나지 않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어떤 음식을 먹느냐가 자신들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고 더럽게 만드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들은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자유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전에 가서 제사상에 놓인 음식을 먹는 데에도 자유롭게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영적인 교만 가운데에서 그렇게 하고 있는 자신들이 귀신과 사귀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이 사실을 바울은 지적하고 있습니다(16-18절). 이들은 아프로디테 신상에게 경배를 하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신을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손으로 만든 조각물에 경배하는 것은 알았지만 그러나 신상 뒤에는 신을 흉내내는 귀신이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19-20절). 고린도 교인들은 영적인 교만 가운데에 악한 영을 너무 가볍게 생각했고 결과적으로는 악한 영과 사귐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신앙적인 자신이 있는 분들 가운데에서 영적인 실체를 너무 무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악령의 실체를 알고 악령이 틈탈 기회를 주지 말아야합니다. 점치는 것, 사주 보는 것, 운세를 보는 것 등을 가볍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을 계기로 악한 영이 삶에 역사할 수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제가 휴스턴에 오기 전에 섬기던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어머니가 40대 초반의 딸을 데리고 왔습니다. 악한 영이 든 것 같다는 것입니다. 보니까 딸의 눈의 초점이 이상한 것이 심상치 않게 느껴졌습니다. 어머니와 내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 의미없는 웃음을 띄우고 나를 노려보듯이 쳐다보는데 그러면서 종이컵을 입으로 돌려가며 잘근잘근 씹어서 잘라내고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얘기가 끝나고 본인의 얘기를 들어본즉슨 이분은 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스트레스 가운데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에 길을 가다가 집시가 점을 쳐주는 집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답답한 마음에 호기심이 동해서 집에를 들어가서 점을 쳤는데 그때부터 마음이 안정이 안 되고 불안하고 잠을 못 잔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믿음이 있는 분이지만 본인은 형식적인 크리스천이라는 것을 알고 우선 진리의 말씀 위에 서야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생명의 삶을 듣도록 권했습니다. 결국 이 자매님은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게 되었고 마침내는 악한 영으로부터 자유스러워질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들 악한 영에 대해 가볍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떤 분은 하나님의 자녀 안에는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에 악한 영이 역사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이 바로 영적인 교만입니다. 악한 영은 초청하면 들어옵니다. 토정 비결을 본다든지 점쟁이를 찾아간다든지 신수를 떼어 본다든지 관상쟁이를 찾아가는 것이 다 악한 영을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집안에 우상을 드려놓는다든지 부적을 차고 다닌다든지 하는 것이 다 악한 영이 자신의 삶에 틈입할 수 있는 게기를 마련해 줍니다.
그러므로 타종교를 믿으시다가 예수를 믿으시는 분은 타종교의 잔재를 다 없이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런 것이 있는 한 악한 영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자유스러워질 수가 없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했다가 악한 영의 공격을 받지 않을까 두려워하는데 두려워할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섬기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아야합니다. 막 5:1-13을 보면 예수님이 귀신 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는 사건이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을 사로잡고 있는 귀신은 한두 마리가 아니라 한 사단이었습니다. 사단이면 6,000명에 해당합니다. 이러한 귀신들이 예수님의 명령 하나에 다 쫓겨나서 근처에 있는 돼지에게 들어가 돼지들이 광란하다가 물에 빠져 죽는 사건이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확실히 믿으면 악령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악령은 타락한 천사입니다. 천사이니까 초자연적인 힘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아니고 천사이기 때문에 피조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즉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악령이 예수님에게 감히 대항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도 아니고 안 믿는 것도 아닌 엉거주춤한 상태에 있을 때에 악령의 공격을 받지 확실히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면 악령의 공격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인생의 주인 되신 예수님께서 보호하고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Ⅲ. 죄냐 아니냐 차원을 넘어서야한다
영적으로 교만해지지 않으려면 새로운 기독교 윤리에 의하여 살아야합니다. 그러므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윤리는 죄냐 아니냐가 아니라 하나님에게 영광이 되느냐 안 되느냐가 되어야합니다(31-32절). 담배 피우는 것이 죄냐 아니냐, 노래방 가는 것, 당구장 가는 것, R 등급 영화를 보는 것이 죄냐 아니냐? 이렇게 물으면 저는 다 죄가 아니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쓰임받는 삶을 살려면 우리는 적극적인 신앙 생활을 해야합니다. 죄를 짓지 않겠다고 하며 사는 삶은 소극적인 삶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기독교 윤리가 짐만 되고 부담만 됩니다. 죄니 뭐니 따지지 않고 사는 세상 사람들을 마음속으로 부러워하면서 살게 됩니다. 신앙 생활이 재미있고 활기가 있으려면 이러한 소극적인 자세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렇게 하기 위하여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에 보내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주신 목적을 위하여 살아야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 중의 하나는 빛과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마태 5:13-16). 세상이 불의와 부정과 부조리로 차있는 것은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다 인정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체념하고 이러한 세상에 동화되어 삽니다. 어떤 사람은 이 세상을 피하여 탈속의 삶을 삽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그 두 가지밖에 해결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 받아서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세 번째 선택이 있습니다. 세상을 개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개조는 운동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개인 개인이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때에 이것이 자연스럽게 합쳐지면서 사회 개조를 가져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냐 아니냐 차원을 넘어서 세상을 개조한다는 비전을 갖고 살아야합니다. 우리는 이혼율이 증가하고 가정이 깨져 가는 현실을 개탄합니다. 그러나 크리스천들은 개탄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아무리 성격이 다르고 안 맞는 사단이라도 할지라도 하나님에게 의지하면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사업하는 사람들의 거짓과 부패 부정을 개탄합니다. 우리는 개탄만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사업을 하고 성공하여서 하나님의 뜻대로 해도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야합니다. 이렇게 할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주변의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관심을 갖게 되고 믿게 되고 이러한 사람들이 많아질 때에 사회에서 부패가 물러가고 부정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명감을 갖고 사는 사람은 이미 죄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은 유치합니다. 한 차원 넘어서 죄가 아니라 할지라도 사명에 어긋나면 삼가는 새로운 윤리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또 하나의 사명은 영혼 구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윤리관에 관한 결론은 영혼 구원을 위하여서라고 결론 짓고 있습니다(33절). 우리 교회 목자들이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것은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목자라는 책임감 때문에만 그랬다면 지쳐서 다 나가 자빠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안 믿던 분이 전도받아 구원 받았을 때에 맛보는 하나님의 기쁨을 맛보고 영원히 멸망 받을 사람이 자신의 사역으로 인하여 영생을 누릴 사람으로 운명이 바뀌었다는 보람이 헌신과 희생을 힘들지 않게 만드는 것입니다. 신앙 연륜이 깊어지면서 죄냐 아니냐를 따지는 초보적인 단계에서 벗어나서 영혼 구원을 위하여 할 것을 하고 하지 않는 적극적인 신앙 윤리를 갖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경고
고린도전서 10:1~13 / 옥한흠목사
이 시간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우리의 마음을 만지시고 귀를 열어 주셔서, 오늘 말씀을 단순히 어떤 한 사람의 설교로 듣지 않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게 되는 놀라운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아주 싫어하시는 2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미 구원 받은 자기 자녀가 도중에 잘못되고 나중에 망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망한다는 말은 세상에서 잘못된다는 의미이거나, 나중에 구원도 받지 못하는 불행한 사람이 될 수 있음을 전제하는 말입니다. 또 한가지는 복음을 듣지 못해서 아까운 사람들이 영원히 멸망 당하도록 내버려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싫어하시기 때문에 특별히 자기 자녀들에게 "깨어 있으라"는 말씀을 자주 하십니다. 마가복음 13장 33절 같은 말씀이 아주 대표적입니다.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니라." 데살로니가전서 5장 6절도 같은 의미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지니라." 잘못되지 않으려면 깨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잠 들거나 혼몽한 상태에 빠지면 자신도 모르게 실수하고, 잘못된 길로 발을 들여놓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로 하여금 잘못되지 않도록, 깨어있도록 하기 위해 2가지 경보시스템을 마련하셨습니다. 하나는 역사적인 경고이고 또 하나는 현실적인 경고입니다. 역사적인 경고가 무엇인지 묻는다면, 아마 오늘 읽은 고린도전서 10장 말씀이 가장 선명하고 핵심적으로 정리해 놓았다고 생각합니다. 이 말씀 한절 한절을 여러분에게 다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어떻게 이 말씀이 우리를 깨우기 위해 기록해 놓은 역사적인 경고인지를 깨달으면 됩니다.
10장에 나오는 말씀은 출애굽기와 민수기에 나오는 사건들을 통합해서 요약해놓은 말씀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은 430년 동안 애굽에서 종살이를 했습니다. 얼마나 긴 세월입니까? 우리가 38년을 다른 나라 식민지로 있어도 국민의 정체성이 흔들리는 위기를 만났는데, 430년 동안 종살이를 한 민족이 독립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미 동화될 때로 동화된 민족입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모세라는 위대한 지도자를 세워 오랫동안 종살이하면서 고통 당한 자기 백성을 불러냈습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하기에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인 방법을 사용하셔서 그들을 애굽에서 끌어냈습니다. 어린 양의 피로 그들을 애굽 사람과 구별하여 그들의 죄를 씻으시고, 모세를 앞장세워 200만 명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것입니다. 애굽을 떠나자마자 하나님께서는 혹독한 더위와 햇살을 피할 수 있도록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름기둥으로 덮었습니다. 그리고는 홍해에 이르자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시고 길을 내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다가운데로 통과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홍해를 지나자마자 영원히 애굽과 결별하는 큰 축복을 주셨습니다. 다시는 애굽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애굽 사람을 다시 만날 필요도 없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소위 우리가 말하는 출애굽사건입니다.
이 사건을 일컬어서 1절 이하에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세례를 받고." 애굽에서 나와 이제는 구름 기둥아래에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바다를 건너갑니다. 지도자 모세에게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속하여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구름 기둥의 인도를 받고, 바다를 통과하는 것이 세례가 됩니까? 세례는 누구에게 속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우리가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면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하였다. 나는 예수님의 백성이다'라는 것을 전세계에 공포하는 하나의 의식이 됩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모세의 인도대로 바다를 통과하여 모세와 완전히 하나가 된것을 세례로 표현한 것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람이 살 수 없는 황량한 땅, 시내산 광야로 들어갔습니다. 거기에는 먹을 것, 마실 것도 없습니다. 더욱이 200만 명이 넘는 숱한 사람들과 수백 마리나 되는 가축들을 먹여 살린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죽음의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아침마다 만나라는 귀한 음식을 제공해서 40년 동안 먹게 하셨습니다. 또 큰 바위를 지팡이로 쳐서 갈라놓으시고 그 틈에서 솟아나는 생수를 40년 동안 마시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것들은 사람들이 노력해서 얻은 음식도 아니고, 땅을 파서 마시는 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래서 신령한 식물, 신령한 물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출애굽 사건은 앞으로 예수 믿고 구원받을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이 되는 사건을 미리 예고한 것입니다. 모세는 예수 그리스도를, 어린 양의 피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르키는 예표입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내린 만나와 바위에서 터진 생수를 마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이요, 생명의 생수가 되신 예수님을 먹고 마시면서 우리가 구원 받는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에 일어난 모든 사건들은 오늘날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데 필요한 정보를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과 사건으로 미리 가르쳐준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생활을 합니다. 그런데 단 2사람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사람들이 다 광야에서 죽어 모랫바닥에 장사되고 맙니다. 이제 그 문제를 놓고 하나님께서 중요한 경고를 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하나님으로부터 큰 은혜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우상숭배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님이 무엇이냐? 하나님은 없다. 바로 우리가 만든 금송아지가 하나님이니라.'고 하면서 그 앞에서 뛰고 잔치하면서 하나님을 대적했습니다. 출애굽기 32장에 보면 우상숭배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다가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죽었습니다. 그래서 7장에서 '너희는 우상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민수기 25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간음죄를 범했습니다. 미디안 사람들은 자신들이 불리해지자 미인계를 썼습니다. 아름다운 처녀들을 이스라엘 사람들 틈에 끼어 넣어, 여기에 미혹받은 이스라엘의 건장한 젊은이들이 전부 다 성적 타락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보시고 참다 못해 그들을 징계함으로 하루에 23,000명이 목숨을 잃는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민수기 25장에는 24,000명이라고 나와있습니다. 그런데 왜 여기는 23,000명으로 나와 있습니까? 지금 바울은 자기가 읽고 기억한 것을 그대로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당시는 참고할 만한 책이나 성구사전이 없으므로 기억력에 의존할 뿐이었습니다. 큰 양피지 두루마리에 민수기서를 써놓았는데, 그것을 다시 바울이 들춰 가면서 23,000명이 있는 곳을 찾아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장, 절로 구별되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기억을 더듬어 적다 보니 어느 정도 오차가 있기 마련입니다. 하여튼 그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벌을 받고 죽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저들과 같이 간음하지 말자'고 합니다.
또 민수기 14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정탐꾼을 보내셨습니다. 그 정탐꾼이 돌아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나쁜 정보만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하자 금새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원히 하나님의 축복을 놓치는 비극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저들처럼 주를 시험하지 말자고 합니다.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때 물과 양식이 없어 원망하다가 불뱀에게 물림으로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당했습니다. 그 사건을 보면서 우리도 저들처럼 원망하지 말자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런 사건들을 구약에 기록해 놓으셨을까요? 그것은 '역사를 놓고 배우라.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경고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역사를 통해 경고를 받으므로 우리가 잘못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6절을 보면, 구약에 기록된 이런 일은 우리에게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의 악을 즐겨한 것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11-12절을 보십시오.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우리가 스스로 선 줄로 생각하다가 넘어지는 불행을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역사적인 사건을 성경에 기록해놓으시고, 시시때때로 그 말씀을 통해서 경고를 받게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말세가 가까이 오지 않습니까? 우리도 잘못하면 영적으로 깊은 잠에 빠지기 쉽습니다. 저나 여러분에게는 우상이 없습니까? 하나님만을 섬긴다고 입으로는 대단히 요란하게 신앙을 고백하고 찬송하지만, 마음속에는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어떤 우상들이 자리잡을 수 있는 것입니다. 돈입니까? 쾌락입니까? 야망입니까? 아니면 이 인간세상에서 자신이 추구하는 어떤 목적입니까? 무엇인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우상이 우리에게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우상이 우리의 눈을 어둡게 하면 나도 모르게 잘못되고, 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적 타락에 빠질 수 있는 위험은 없습니까? 오늘날 얼마나 음란한 세상입니까? 웬만한 것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세상입니다. 옛날에는 처녀가 아이를 낳으면 웃음거리가 됐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만큼 음란한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육적인 쾌락의 종이 될 수 있는 위험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럴 때마다 우리가 이 말씀을 펴놓고 역사적으로 교훈을 받는 것입니다. '나도 음란하다가, 간음하다가 망한다'는 하나님의 경고를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원망하진 않습니까? 하나님께 불평하진 않습니까? 하나님을 시험하진 않습니까? 혹시 마음 속으로 '세상에 성경 말씀대로 되는 일이 어디 있어? 그 말씀대로 벌받거나 복 받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다 성경이 하는 이야기지, 사실은 달라.' 하면서 은근히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시험하는, 어떤 면에서는 하나님을 테스트하는 교만한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 없습니까? 이런 사람을 놓고 하나님께서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에 이러한 역사적인 사건을 빠짐없이 기록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경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깨어 자신도 모르게 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경고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두 번째 경고 시스템이 있습니다. 그것은 현실적인 경고입니다. 곧 당장 눈앞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통해 경고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본문이 누가복음 13장 1절 이하에 나옵니다. 누가복음 13장을 보면 적지 않은 수의 갈릴리 사람들이 멀리 예루살렘 성전에 와서 제사를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갈릴리, 유대나라를 다스리던 로마 총독 빌라도가 군사를 보내 이유없이 제사 지내는 사람을 살육해버렸습니다. 그래서 제사 지내다가 전부 칼에 맞아 피를 토하니까 그 피가 전부 제단에 올려놓은 제사에 튀고 난리법석이 났습니다.
이 끔찍한 사건을 보고 온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달려가 물었습니다. "예수님. 갈릴리 몇 사람들이 지금 제사를 지내다가 죽임을 당했고, 제물에 피가 섞여 부정한 제물이 되어버렸는데, 그들에게 무슨 죄가 있어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한 마디로 희생당하는 사람의 죄값이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이 죄가 있어서 그런 일을 당한 줄 아느냐? 아니야. 너희들도 그들처럼 회개하지 않으면 똑같이 망하리라." 하나님께서 그 사건을 놓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누구의 죄냐?' 그런 것은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건을 놓고 지금 살아있는 사람들을 경고한다는 말입니다. 너희들도 정신차리지 아니하면 망할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이 실로암 망대, 요즘 말로 높은 망대로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공사가 부실했는지 그만 망대가 붕괴되어 여러 명이 함께 추락해서 희생을 당했습니다. 그 사건을 보고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물었습니다. "예수님. 망대에 올라간 사람들이 다 죽었습니다. 누구의 죄 값으로 저렇게 되었습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누구 죄 값으로 된 것이 아니다. 그들이 너희들보다 죄가 많아서 죽은 줄 아느냐? 그렇지 않다. 너희들도 회개하지 않으면 망하느니라." 눈앞에 벌어지는 사건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경고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현실적인 경고 시스템입니다.
이런 경고성을 가진 사건들은 말세가 되면 많이 나타날 것이라고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마태복음 24장 6, 7절에 보면 난리와 난리가 일어날 것이라고 합니다. 말세가 될수록 민족이 민족을 대적하고, 나라가 나라를 대적해서 일어난다고 합니다.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끔찍한 사건들은 진짜 사건의 시작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진짜 사건들이 일어나면 엄청난 비극들이 우리 역사의 현장에 나타날 것이라고 성경은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현장의 경고입니다.
지난 100년 동안에서 엄청난 사건들이 많이 일어났지만, 앞으로는 더 무서운 사건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 사건 하나하나가 모두 우리를 경고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로 망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교회를 깨우기 위해서, 불신자들을 각성시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징조의 성격도 있습니다. 이 세상 마지막이 가까이 왔다는 사인입니다. 주님이 재림하신다는 사인입니다. 이런 사인으로 하나님께서 현실적인 경고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지난 9월 11일, 우리는 전대미문의 사건을 지켜보았습니다. 미국의 부와 번영의 상징이자 미국 문명의 첨단을 상징하는 세계무역회관 쌍둥이 빌딩이 여객기와 충돌하여 불과 1~2시간 만에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지는 끔찍한 사건이었습니다. 수천 명의 생명이 소리없이 사라져버린 끔찍한 사건을 지켜보았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그 사건을 자주 반복해서 보았습니까?
어떻게 세상에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잠을 자지 못하면서 고민했을 정도입니다. 그 사건을 한마디로 말하면 20세기 고층문명의 첨단인 쌍둥이 빌딩과 20세기 고속문명의 첨단인 제트 여객기가 충돌로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이 자랑하는 이 두 가지가 함께 파괴되고 붕괴되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아마 비행기 1대가 중간에 추락하지 않았다면 백악관도 엄청난 피해를 입었을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백악관만은 지켜주셨습니다. 이 사건은 절대로 우연한 사건이 아닙니다. 많은 것을 시사하는 하나님의 현실적인 경보입니다. 이것을 단순히 보아 넘길 수는 없습니다. 무엇을 보고 알 수 있습니까? 백악관으로 향하던 비행기가 중간에 추락했습니다. 그런데 그 비행기안에는 믿음이 좋은 32세의 청년과 그의 친구들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휘튼 대학 출신으로 건장한 청년들입니다. 미국의 휘튼 대학은 기독교대학 가운데 가장 우수한 대학입니다. 많은 인재들이 나왔습니다. 빌리 그래함을 비롯하여 많은 인재들을 배출함으로 엄청난 영향력을 끼친 대학입니다. 이 토드 비머라는 청년은 컴퓨터 기사입니다. 그리고 어느 교회에서 충실하게 봉사하는 평신도로서, 앞으로 선교사로 나가고자 준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믿음 좋은 사람과 똑 같은 믿음을 가진 친구들이 그 비행기를 탔습니다.
만일 이 엄청난 테러사건이 일어나는 와중에, 백악관마저 습격을 받고 무너졌다고 하면 3차 대전이 일어날 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막으셨습니다. 이 믿음 좋은 비머와 그의 친구들이 휴대폰으로 가족들에게 기내 상황을 전한 후, 자신들은 주기도문을 같이 외우는 것을 신호로 테러범에게 돌진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테러범들이 의도한 대로 워싱턴에 진입하지 못하고 중간에 추락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들을 희생시키면서까지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지 않도록 미국을 지키신 것을 봅니다. 이 비머의 아내는 내년 1월에 셋째 아이를 얻을 예정이었는데, 남편의 뜻을 이어서 세 자녀를 선교사로 키우겠다고 이야기하는 신문보도를 보았습니다.
여러분, 이런 사건이 어떻게 우연한 사건입니까? 우리는 이런 현실적인 사건을 놓고 하나님 앞에 진지하게 머리를 속이면서 '하나님, 주께서 무엇을 우리에게 경고하시는 것입니까?'하고 기도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번 테러사건을 놓고 어떤 목사님이 신문 지면에 다음과 같이 해석해 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세계무역회관이 붕괴되고 펜타곤이 파괴된 것은 클링턴 대통령이 재임시절에 여자들과 스캔들을 많이 일으켰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것을 벌하기 위한 징계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 식으로 속 좁은 해석을 하면 안됩니다. 클링턴 대통령이 잘못했으면 그를 벌할 것이지, 왜 수많은 영혼들이 죽임을 당해야 합니까? 마치 망대가 무너져 사람들이 희생당하는 것을 보고 "저들에게 무슨 죄가 있어 저런 일이 일어납니까?"라고 묻는 사람들과 똑같지 않습니까?
이것은 먼저 미국을 향한 하나님의 경고입니다. 오만불손하고, 방종하고, 물질을 우상으로 섬기는 미국을 향한 하나님의 엄한 경종입니다. 뿐만 아니라 미국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경종입니다. 미국 교회는 갈수록 세속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너무 오랫동안 잘살아서 자신도 모르게 영적으로 잠이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에 있는 40만개 가까운 교회 중 교역자가 없는 교회가 지금도 많습니다. 왜냐하면 목회자가 되면 박봉에 시달리며 고생을 해야 하는 탓에 똑똑한 젊은이들이 이제는 신학교를 안 들어 갑니다. 그래서 교회마다 비어있습니다. 이와 같이 점점 힘을 잃어가는 미국 교회를 향해서 하나님께서 경고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미국을 보세요. 국민소득 35,000불로 우리나라보다 5배나 잘사는 나라입니다. 최강의 나라입니다. 세계 에너지의 50%이상을 북미가 사용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세계를 오염시키는 주범이 바로 북미입니다. 그 나라는 자원이 풍부하여 이런 말까지 할 정도입니다. "미국 사람들은 200년 동안 놀고 먹어도 절대로 망하지 않을 것이다." 그 정도로 복을 받은 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국익을 위해서 라면 그 어떤 일도 거침없이 행했습니다. 귀찮게 여겨지면 이웃나라 국가 원수도 자기 법정에 출두 시키는 나라입니다. 파나마의 국가 원수를 자기 나라에 끌고 와 재판한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소수민족에 대한 인종차별은 지금도 여전합니다. 그들은 흑인 및 동양인을 차별합니다. 지나친 자국민 우월의식에 젖어있습니다. 그리고 구약적인 잘못된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주변에 있는 팔레스타인들을 무차별 살상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옆에 끼고 돌면서 전세계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나라가 미국입니다.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우산 아래서 온갖 범죄를 키워 세계 도처에 퍼뜨리는 죄악의 병원체가 바로 미국입니다. 미국은 죄악의 소굴이요, 물질주의와 개인주의의 대명사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지금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지 보아야 합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망합니다. 원숭이가 나무에서 떨어져 죽는 일이 가끔 있습니다. 미국이 자랑하는 것 때문에 망합니다. 미국이 세계에서 가장 강하다고 생각하는 것 때문에 망합니다. 이번 테러범들이 사용한 것들을 보십시오. 미국의 첨단 기술의 상징인 여객기, 초현대식 고층빌딩, 크레디트 카드, 렌터카 시스템, 인터넷... 미국이 자랑하는 모든 과학, 그들이 우상으로 여기는 최첨단의 과학을 전부 이용해서 이번 테러가 저질러졌습니다. 미국이 자랑하는 민주주의, 개방성, 자유, 이모든 좋은 것들을 악한 세력들이 이용해서 미국을 파괴하고 있었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쓰러뜨릴 수 있다는 신화를 다시 한번 입증한 것입니다. 작은 손가락 하나만 들고도 MD(Missile Defense: 미사일 방어)로 상징되는 미국의 철통 같은 방어망을 뚫을 수 있음을 입증한 것입니다.
미국은 흥분해서 보복만 앞세우려 하지 말고, 하나님의 준엄한 경고가 무엇인가를 깊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12절의 '선 줄로 생각하면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말씀은 개인은 물론 국가, 교회에도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미국 교회가 정신차려야 합니다. 지금과 같은 준엄한 경고를 받는데도 영적으로 깨어나지 못한다면 미국과 미국교회는 희망이 없습니다.
11일 사건이 터지자마자 그 다음 주일날, 사람들이 교회로 많이 몰렸다고 합니다. 미국에서 제일 크다고 하는 윌로우 크릭 교회의 통계를 봤습니다. 그 교회는 지금 저희 교회 규모정도입니다. 주일에 약 18,000명 모이는 교회입니다. 그런데 그 사건이 터지자마자 그 다음 주일에 5,000명이 더 몰려와서 23,000명이 모였습니다. 교회마다 사람들이 몰려갔습니다. 그러나 일회성으로 끝나리라 생각됩니다. 충격과 흥분이 점점 가라앉으면 또다시 교회를 멀리할 것입니다. 미국 교회가 회개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이것이 어떻게 미국과 미국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경고로서 끝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한국교회에 대한 경고는 아닐까요? 대한민국에 대한 경고는 아닐까요?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경고는 아닐까요? 우리는 곰곰히 생각해봐야 합니다. 오늘 우리도 미국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의식구조가 점점 미국 사람을 닮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생활 패턴이 점점 미국 사람을 흉내내고 있지 않습니까?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영적으로 깊이 잠들어간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우리마음 속에 있는 우상을 한번 보십시오. 오늘날 교회가 하나님보다도 더 크게 생각하고 있는 우상이 뭔지를 보십시오. 돈은 아닙니가? 좋은 건물은 아닙니까? 명예가 아닙니까? 목사들은 자기의 야심이 아닙니까? 이와 같은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경고하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사람들은 경고를 잘 듣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역사적인 경고를 듣고도 사람들은 경고를 잘 듣지 않습니다. '옛날 고대 시대에 있었던 사건인데, 지금 나하고 지금 무슨 상관이야. 신앙생활 잘 안 해도 잘 사는 사람이 허다한데 뭘 그렇게 사람겁주는 말만 자꾸 할까?' 쌍둥이 빌딩 같은 것이 10개가 무너져도 꿈쩍도 안 할 사람이 우리 주변에는 많습니다. 여전히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건이 일어나도 기도하지 않습니다. 나 즐기는 데만 아주 바쁩니다. 교회 안에도 얼마든지 잠자는 사람이 있습니다. 흔들어도, 흔들어도 깨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담배 때문에 1년에 8~900만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담배갑에 담배의 해악성에 대한 경고문을 표기한들 소용없습니다. 앞으로 20년 후에는 세계적으로 1,000만 명이 담배 때문에 희생당한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서 700만 명은 개발도상국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런 끔찍한 경고를 받으면서도 유유히 담배를 피우면서 그 연기 속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으려고 합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이와 같은 현실적인 경고를 듣고도 듣지 않는다는 것은 실로 비참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경고를 놓고 한가지 꼭 생각합시다. 도대체 왜 하나님은 자꾸 이렇게 경고를 하실까? 왜 끔찍한 사건으로 우리를 흔들어 깨우려고 하실까?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우리를 끔찍히 사랑하시기 때문에 잘못하지 말라고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잘못하면 구원도 못 받는 불행한 자가 되지 않도록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자녀를 사랑하지 않는 부모가 어디에 있습니까? 자녀가 잘못되는 것이 뻔한데 경고하지 않는 부모가 어디에 있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잠을 자면 깨우기 위해 경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위험한 벼랑에 서게 되면 어떤 방법,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우리를 깨우고 우리를 그 위험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심령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의 경고를 받고 있는 것이 없습니까? 개인적으로 잘 살펴보십시오. 이렇게 국가적으로, 세계적으로 거창한 사건을 가지고 이야기 하지않더라도 우리 개개인을 한번 돌아보십시오. 하나님의 경고의 메시지가 지금 없습니까? 여러분의 자녀에게 어떤 문제가 일어납니까? 하나님께서 무엇을 경고하는지를 귀담아 들어야합니다. 여러분에게 어떤 예고하지 아니한 사건이 일어납니까? 거기에 메시지가 담겨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왜 하나님이 나에게 이런 일들을 경험하게 하시는지 거기에 해답이 있습니다. 나에게 우상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내가 잘못된 더러운 생활에 지금 발목이 잡혀있는지도 모릅니다. 내가 실제로 죄를 범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중생활을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입으로는 '주여, 주여' 하면서 마음으로는 하나님보다도 월등히 사랑하는 돈과 명예가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경고 시스템이 어떻게 발동하고 있는지 점검해 보십시오. 그래서 '아, 이것은 어떤 의미가 있구나! 하나님께서 나를 깨우기 위해, 그리고 나로 하여금 돌아서도록 신호를 주시는구나' 하고 무언가 느껴지면 반드시 순종해야 됩니다. 그것을 무시하고 스쳐 지나가면 그 다음에는 소망이 없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절대로 여러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여러분, 신앙적으로 조금이라도 교만이 있고, '나는 괜찮다'고 스스로 선 것처럼 생각되면 넘어질까 조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항상 두려운 마음으로 내 주변을 살피면서 하나님께서 크고 작은 일들을 통해 경고를 할 때마다 나를 돌아보는 깨어있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아무리 경고를 해도 꿈쩍도 하지 않고 자기 갈 길을 걸어가는, 자기 갈 길을 달려가는 불쌍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꼐서는 그들도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들로 하여금 정신차리도록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지진, 기근, 테러, 전쟁을 통해 사람들을 경고합니다. 그런데도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깨닫지 못하는 불쌍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을 구원하라고 우리를 먼저 구원해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찾아가서 하나님의 경고를 전해야 합니다.
쌍둥이 빌딩이 붕괴되기 직전, TV에 방영된 한 장면을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이 빌딩 위쪽에서 창문을 열고 하얀 보자기를 계속해서 흔드는 장면이었습니다. 그는 빌딩 아래에서부터 솟구쳐 오르는 화염과 연기 속에서 구조의 손길을 절박하게 기다리며 있는 힘을 다해 보자기를 흔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탈출할 수도, 구조될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3~40분 후 빌딩이 무너지면서 그 사람도 무서운 폭음과 함께 우리 눈에서 사라졌습니다.
보자기를 흔드는 그 사람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습니까? 오늘날 우리 주변에 예수 안 믿는 사람의 모습과 같지 않습니까? 그들이 지금처럼 살면 마지막 날 아무리 보자기를 흔들어도 건져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어두움의 권세에 사로잡혀 있는 불쌍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서 보자기를 흔들며 살려달라고 아우성 칠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영의 눈으로 그들을 보아야 합니다. 아직도 구원의 문이 열려있는 지금, 그들을 찾아가서 하나님의 경고를 전하고 그들이 구원받도록 해야 합니다. 세상은 얼마남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 앞에는 유토피아가 없습니다. 주님이 재림하시는 것만이 이 땅의 소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을 전해야 됩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마지막 보자기를 흔들면서 살려달라고 하는 비참한 꼴을 보여주기 전에 그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해야 합니다.
오늘 메시지 잘 정리하십시오. 우리 눈 앞에 일어나는 사건을 통해 내 자신이 경고를 받아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주변에 아직도 주를 모르는 사람들, 하나님께서 아무리 경고해도 꿈쩍도 하지 아니하는 사람들을 복음으로 구원해야 합니다. 내 사랑하는 남편, 자녀, 친구, 그리고 이웃이 그런 비참한 꼴을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들을 구원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번에 주신 이 모든 경고를 통해서 우리 모두가 다시 한번 영적으로 깨어나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광야 40년, 광복 40년
고전10장 01절 ~ 13절 / 박조준목사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시고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애굽에서 노예 생활하며 고생할 때 모세를 불러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 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려 하노라 고 말씀하셨습니 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 왕 바로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종살이하던 땅 애굽을 떠나 하나님의 약속하신 땅 가나안을 향하여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모세가 애굽왕 바로에게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을 위해서 여러 가지로 말했으나 듣지 않았습니 다.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려고 여러 가지 재앙을 내렸으나 당할 때는 그 마음이 달라지는 것 같다가도 그 재앙만 지나고 나면 제자리에 돌아오곤 해서 열 번째 재앙인 애굽인의 장자와 짐승 중에 맏짐승을 다 죽이는 재앙이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로를 비롯해서 애굽 인의 가정은 모두 맏아들이 죽는 재앙 앞에 통곡의 수라장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이 거하는 땅에는 이미 모세를 통해 지시를 받고 양을 잡아 집집마다 문설주에 양 의 피를 바라서 그 피를 보고 하나님의 사자가 넘어가는 놀라운 경험을 했습니다. 그것이 이스 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영원히 잊을 수 없고 정중히 지켜야 할 유월절(Passover)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애굽에서 해방을 받아 약속의 땅을 향해 가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얼마나 감격 스러움이 있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뜨거운 햇빛을 가려 주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사막의 한기를 막아 주셨습니다. 홍해가 가로막히고 뒤에는 애굽 왕의 기병대가 쫓 아오는 다급한 상황 가운데 있었지만 너희는 가만히 있어 하나님의 도우심을 보라 는 모세의 지 도를 받아 홍해가 육지같이 되는 기적을 체험하고 뒤쫓아오던 애굽 왕의 기병대가 몰사하는 광 경도 보았습니다. 저희는 모두가 감격스러운 것뿐이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라 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같은 생활을 반복하다 보니까 애굽에서 고생하고 천대받던, 억울하던 생각은 다 잊어 버리고 광야의 생활에 권태를 느끼게 되고 지루하고 짜증스러운 생각마저 들어 무슨 변화를 추 구하기까지 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애굽에서 해방되던 때의 이스라엘 민족으로서는 도저 히 상상도 못할 일들을 저지르게 된 것입니다. 그때의 감격과 감사는 다 잊어버렸습니다. 이것 이 사람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5절에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 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했습니다. 처음의 감격과 감사를 잊어버릴 때 뜻하지 않은 일이 벌 어지게 되고, 결국 유감스러운 일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얼마나 사랑하셨습니까? 저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기 위해서 얼마나 애쓰셨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민족은 광야 40년을 지내는 동안에 미래 지 향적이 아니라 과거 지향적인 생활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아 무리 지루하고 어려운 생활이라고 하더라도 인내하는 중에 소망을 가지고 한 걸음 한 걸음 전진 했어야 하는데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심지어 애굽의 고기 가마 생각을 다시 하는 사람들까지 있 었습니다. 이쯤 되니 하나님의 마음과 모세의 마음을 섭섭하게 하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 희는 악을 즐겨 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습니다. 하나님 은 이스라엘 민족은 사랑하시지만 저희의 범하는 죄는 사랑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6절 말씀에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 한 것같이 즐겨하 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했습니다. 11절에도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 40년 동안에 무슨 악을 행했습니까? 그들이 행한 악 중에 몇 가지를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 중에 열 거했습니다. 그것을 거울로 삼으라는 말입니다. 7절에 저희 중에 어떤 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하였습니다. 이 말씀의 역사적인 배경을 출애굽기 32장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기도하며 돌판에 십계명을 받는 데 여러 날이 걸렸습니다. 사람들은 모세가 보이지 않자 아론에게 찾아가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모세는 지금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으니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고 했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인심입니다. 아론은 그들에게 바른 지도를 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서 금고리를 모아서 송아지 형상을 만들어 놓고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 라고 선포 했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 앞에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 뛰놀았습니다. 이 광경 을 하늘에서 보신 하나님께서 화를 발했습니다. 모세야, 너는 어서 이 산에서 내려가라 네가 애 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 그들이 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그것을 숭배하며 그것에게 희생을 드려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는구나. 모세야,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 그러나 나대로 하게 해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해서 그들을 진멸하고 말겠다 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모세는 깜짝 놀랐습니다. 하나님, 그 크신 찬송과 강하신 손으로 인도하여 내 신 주의 백성에게 어떻게 진노하실 수 있습니까? 그렇게 하시면 애굽 사람이 말하기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들에서 멸망시키려고 애굽에서 끌어냈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 시고 뜻을 돌이키시고 주의 백성에게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하고 기도했습니다. 모세가 십계명 이 새겨진 돌판 둘을 들고 내려오다가 금송아지 앞에서 떠드는 백성을 보고 손에 들었던 돌판을 산아래 던져 깨뜨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레위 자손을 시켜서 금송아지 우상을 숭배하던 사람 을 3천명 가량 죽여 버렸습니다. 8절에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간음하지 말자 했습니다. 구약 민수기 25장에 보면 이 말씀의 배경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스라 엘 민족이 싯딤이란 곳에 머물러 있을 때인데 이스라엘 백성이 그곳 모압 여인들과 음란한 생활 을 했습니다. 이방 여인들과 이런 생활에 빠지게 되니까 자연히 그들이 하는 대로 따라가게 되 었습니다.그 여자들이 이방인에게 제사할 때 같이 가서 먹고 그들의 신에게 절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해서 염병이 퍼지게 되었고 하루에 2만여 명이 죽어 갔습니다. 성경 출애굽기 20장 14절과 신명기 5장 18절에 간음하지 말라 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여기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이 말씀은 여자에 대한 남자의 경우만이 아니고 남자에 대한 여자의 경우도 해당되는 것입니다. 본래 가정은 하나님이 세우신 것입니다. 사람을 지으실 때 한 남자와 한 여자로 창조하시고 가정을 이루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 람이 모여 사는 곳에는 그 배후에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함께 하십니다. 가정은 신성한 것입니다. 사람이 사는 사회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표현이 가정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부부의 관계를 그리스도와 그의 몸 된 교회로 비유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정은 이처럼 깨끗 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아름답고 깨끗한 가정을 지켜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따라서 가정이 깨끗할 때에야만 그 가정을 통해서 참된 행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행복한 가정의 모습은 필설로 다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정은 사회와 국가의 기본 단위입니다. 사회질서의 기초입니다. 가정이 문란하 게 되고 파괴되면 그 사회는 결국 혼란에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왕성하던 로마가 성의 타락으 로 인해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세계 문화를 주름잡던 헬라의 영화도 간음 때문에 망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찬란하던 폼페이 도성이 간음 때문에 폐허가 되고 말았습니다. 인간의 도덕이란 자연에 기초를 두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행위가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그 행위가 옳은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짐승의 윤리는 본능에 기초를 둡니다. 그러나 하나 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우리 인간의 행동은 자연법에 기초를 두지 않고 하나님의 법에 기초 를 둡니다. 한 남자가 하나 이상의 여자를 원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자연 스러운 것이 도덕으로 옳을 수는 없습니다. 더구나 인간의 도덕이란 개인의 욕구나 쾌락에 기초 를 두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이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정당하거나 선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9∼10절에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저희 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 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했습니다. 구약 민수기 21장에서 이 두 구절의 배경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호르산에서 진행하여 홍해 길로 좇아 에돔땅을 지나려고 하였는 데, 길이 하도 험하니까 백성들의 마음이 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여 말하기를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 곳에는 식물 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 40년 동안 만나를 매일 같이 주시고 메추라기를 주셨지만 그 단조로운 음식에 권태를 느꼈습니다.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 했습니다. 이때 하나님이 불뱀을 하늘에서 보내서 백성을 물게 하시니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는 사람이 많이 생기게 되었 습니다. 그제야 백성들이 모세에게 와서 말하기를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하는 죄 를 범했습니다.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하였습니다. 민수기 14장에 보면 약속의 땅 가나안에 거의 이르러 모세는 가나안 땅을 탐지하려고 이스라 엘 12지파에서 족장 된 사람 한 사람씩을 40일의 기한을 주어 보냈습니다. 그들이 40일 동안 탐 지하기를 마치고 돌아와 그 땅에 대한 보고를 하는데 열두 사람 중에 열 사람은 부정적인 보고 를 했습니다. 이때 온 회중은 소리 높여 부르짖으며 밤새도록 통곡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말하기를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 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 고 하였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의 마음에 공통되는 것은 무슨 일이 잘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원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무 화가 나서 모세를 향하여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 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모든 이적을 행한 것은 생각하지 아니하고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 느냐 내가 전염병으로 그들을 쳐서 멸하고 너로 그들보다 크고 강한 나라를 이루게 하리라 했습 니다. 40 이란 숫자는 성경적으로 이 세상에서의 만수(滿數) 같습니다. 4는 동서남북 사방을 가리키 고, 4계절을 가리킵니다. 10은 일정한 많은 수를 말합니다. 그래서 모세도 시내산에서 40일 있 었고, 가나안 땅 정탐도 40일 기한을 주었고, 모세의 생애도 궁에서 40년, 미디안 광야에서 40 년, 광야에서 40년을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도 40일 동안 금식하였고, 부활 후 40일 동 안 제자들에게 나타나시다가 승천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해방되어 40년 동안 광 야 생활을 한 것은 시련의 기간이었습니다. 금보다 귀한 믿음을 가지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광복 40주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애굽의 바로 왕보다도 더 간악 한 일본 사람들의 손아귀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기적적으로 광복의 기쁨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처음 광복을 맞을 때의 기쁨과 감격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40년이란 세월이 흘러가는 어 간에 이젠 그 기쁨과 감격은 거의 찾아볼 수 없이 되었습니다. 애굽을 떠나 약속의 땅을 향해 가며 광야 40년의 생활을 한 이스라엘 민족과 너무 비슷한 점이 많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향해 주신 말씀이 바로 오늘 우리 대한민국을 향해 우리 동포들을 향해 주신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문자 그 대로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보호해 주셨습니다. 바다를 육지같 이 건너는 체험도 했습니다. 6·25동란의 와중에서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해 주셨습니다. 이 남한 땅마저도 몽땅 삼켜 버림을 당할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지켜 주 셨습니다. 그런데도 이 겨레가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말았으니 어찌하면 좋습니까? 이스 라엘 민족이 악을 즐겨하다가 광야에서 멸망하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이 많았던 것 처럼 우리 민족이 왜 이렇게 악을 행합니까? 사도 바울이 로마서 3장 10절 이하에 인용한 말씀을 듣습니까?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 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 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했습 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개인이나 정부나 국민은 악을 즐겨 행합니다. 우상을 숭배하고, 성도덕이 타락하고, 하나님을 시험하고 원망합니다. 그래서 결국 망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광복 40년이 된 지금 우리 겨레는 약속의 땅에 가까이 와 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악을 행하지 맙시다. 누구를 원망하고 시비하는 것을 그치고 우리 스스로 깨끗하게 삽 시다. 그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말씀에 순종하고 의의 편, 진리의 편에 서기만 하면 약속 의 땅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실 줄을 믿습니다. 산이 높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성이 견고하지 않다는 것도 아닙니다. 거기 거하는 사람의 키가 작다는 말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 땅을 점령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 이 되시면, 아니 우리가 하나님 편이 되면 약속의 땅은 우리에게 주어지게 될 것을 믿습니다. 오, 내 조국 대한민국의 앞날이 빛나기를 축원합니다.
역사라는 거울
고전10장 01절 ~ 13절 / 김태복목사
오늘 본문의 내용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겪었던 일들을 오늘 우리 성도들이 거울로 삼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속박에서 해방되어 광야를 거쳐서 가나안 땅에 이르기까지의 그 모든 역사적 노정은 천국을 향해 가는 우리 성도들에는 신앙의 거울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역사로부터 많은 것을 배웁니다. 우리나라가 해방된 지 61년이 되는 짧은 역사 동안 얼마나 많은 파란을 겪었습니까? 가장 아쉬운 것은 그 많은 대통령들과 지도자들이 있었으나 광화문 네거리에 동상을 세워놓을 정도로 온 국민들이 존경할 만한 국부(國父)같은 분이 없다는 점입니다. 하나같이 역사적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분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지금 노무현 대통령도 말만 많았지, 이룩해 놓은 것이 별로 없는 무능한 대통령으로 평가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노 대통령에게 주어진 역사적인 사명은, 서민들이 살기 좋은 사회 이룩하는 것과 남북 관계의 활로를 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서민들은 너나없이 더 못 살게 되었다고 원성이 자자하고 남북문제는 거의 진척이 없는 채 답보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과연, 역사가들은 지금의 정권을 어떻게 평가할지 궁금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언제나 이 나라는 하나님이 친히 다스리고 계심으로 계속 발전하고 있는 과정에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정권이 나름대로 공로가 있다면, 한국 정치의 가장 큰 병폐였던 군사정권 30년과 양 김 씨의 권위와 가신 정치를 벗겨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차기 대통령을 바로 선출한다면 한국 사회가 보다 더 발전할 수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하튼 우리 인간은 역사라는 거울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무엇을 배울 수가 있습니까?
1.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특별한 은혜를 베푸신다는 배울 수 있습니다.
1절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 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가운데로 지나며”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곧 하나님께서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풀어 주신 풍성한 은혜가 무엇인지 우리가 꼭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베풀어 주셨던 풍성한 은혜를 오늘 우리 성도들에게도 베풀어 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가 무엇인지를 알 때 오늘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풍성한 은혜가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1절에서 ‘구름 가운데 있었다’는 것은 곧 구름 기둥으로 보호하시며 인도해 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바다 가운데로 지났다는 것은 가로막힌 홍해를 가르시고 마른 땅같이 건너게 해 주신 것을 의미합니다. 바로 그러한 은혜가 우리들에게도 베풀어지고 있습니다. 구름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들을 성령으로 인도해 주시고, 홍해를 건너게 하신 하나님께서 때로 우리들이 당하는 어려운 문제의 강을 열어주시고 건너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또 2절에서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곧 400년 동안 애굽에 속하여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세를 통하여 따로 불러내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해 주신 것을 의미합니다. 바로 그 은혜를 우리에게도 베풀어 주셨는데, 세상에 속했던 우리들을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로 성별해 주셨습니다.
3-4절에서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매일매일 하늘로부터 맛있는 만나를 내려서 먹게 해 주셨고, 물이 없어 목마를 때 반석에서 샘물을 내서 마시게 해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바로 그와 같은 은혜를 주고 계십니다.
매일매일 신령한 말씀을 주시고, 목마른 우리의 심령을 만족케 해 주십니다. 특히 4절에서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 했습니다. 광야에는 나그네 한 두 사람이 먹을 물마저 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약 250만 명의 식수를 갈하지 않도록 해결해 주셨던 것입니다.
이 말씀은 곧 오늘 우리들에게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러한 은혜와 축복이 주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광야 같은 이 세상을 살고 있지만, 하나님은 자기 백성인 우리 성도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눈 여겨 보시면서 특별하신 보호와 베푸시는 은혜의 양식으로 살게 하시는 줄 믿어야 합니다. 저의 가정은 그러한 특별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시골목회 시에 장인께서 미군부대 군속으로 근무하시다가 퇴직하시고 사업을 벌이시다가 실패하심으로 처갓집이 가난에 시달리게 되셨습니다. 그 당시 처남 둘과 처제가 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학비 문제가 큰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집사람이 중학교 교사하면서 대부부의 봉급은 물론이고 시골교회 작은 사례금에서 일부를 처갓집에 보내야 했습니다.
그 때문에 사례금을 탄지 10일도 안 되어 생활비를 떨어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목회자가 교인들에게 손을 벌일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교인들은 사모님이 교사 봉급을 받음으로 풍족하게 산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큰 딸 아이가 백일이 되었을 때 집사람의 성격으로 보아서는 큰 잔칫상을 차리고 교인들을 대접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그 날 아침에는 김치마저 떨어져서 너무나 가슴이 아프던 기억이 납니다. 시골교회 그 때가 우리에게는 광야의 연단기간이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기간 동안 한 번도 양식이 떨어진 적이 없도록 역사하셨다는 점입니다. 생활비가 다 떨어진 때는 이상하게 누구의 손길을 통해서라도 채워주시고는 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윤종삼 장로님 가정입니다.
그 때에 윤 장로님은 처음 수의사가 되셔서 망우리에서 구리로 넘어가는 고개 부근에 적은 가게를 세를 얻어서 병원 겸 사택으로 사용하시던 때에 도서비조로 저의 가정에 매월 얼마를 보내주셨는데 그 돈이 생활비로 요긴하게 쓰게 되었던 것을 지금도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광야에서 연단을 시키는 기간에라도 반드시 특별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줄 믿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금한 죄가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5절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 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들의 다수를 기뻐하지 않으셨다는 말은 그렇게 은혜를 입은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하나님의 뜻을 거역함으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왜 백성들 중의 많은 사람들이 멸망을 당했습니까?
7-10절에 보면 멸망 받게 된 네 가지 죄악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1)우상숭배의 죄를 범하였습니다.
7절 “저희 중에 어떤 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이 일은 백성의 공갈 협박에 의해서 아론이 주도하여 행해졌습니다. 그리고 애굽에서 우상 앞에서 행하던 예식을 그대로 하나님 앞에서 재현한 것이다.
백성이 먹고 마시고 뛰논다는 것은 바로 애굽에서 우상 앞에서 행했던 예식을 의미합니다. 광란과 음란으로 뒤엉킨 최대 쾌락의 예식이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보다는 이와 같은 쾌락을 즐기기 원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음식을 원했을 때도 고기를 먹고 싶다고 했고, 정력이 쇠하여 간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애굽 땅의 우상 앞에서 고기를 삶아 먹고 진탕 놀며 음란을 행했던 것을 추억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우상과 쾌락에 길들여진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을 섬기는 율례는 참으로 따르기 힘든 고행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모세가 산위에 올라가 40주야 소식이 없자, 하나님을 섬긴다는 명목 하에 쾌락을 즐길 기회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멸망을 받았던 것입니다. 아무리 인자한 부모라도 자기 자식이 다른 사람에게 가서 ‘아버지, 어머니’라고 부르면 견딜 수 있습니까? 너무나 화가 나서 ‘애비, 에미가 여기 멀쩡히 살았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보고 부모라고 부르느냐?’고 심하게 매질할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가장 조심할 것은 우상숭배 죄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2)그들은 간음죄를 저질렀습니다.
8절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저희와 같이 간음하지 말자”고 했습니다. 그들은 모압 지방을 지날 때 그 곳 아름다운 여자들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간음죄를 저지르다가 하루에 23,000명이 죽는 끔찍한 일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로서 있을 수 없는 죄를 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건을 우리의 거울로 삼아야 합니다.
(3)그들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죄를 지었습니다.
9절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거니와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고 했습니다. 민21:5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차라리 애굽에서 죽었으면 좋았겠다.’고 하며 ‘어찌하여 이 광야에서 우리를 죽게 하는고?’하며 하나님을 시험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물이 없고, 만나가 박한 식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스라엘 백성은 목이 말라 견디기 힘들었던 적은 없었고 만나 역시 아주 훌륭한 음식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험한 광야에서 그렇게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손길을 체험하고도 잠잠히 믿고 감사하는 신앙을 배우지 못하고 오히려 인격적인 하나님을 자신의 소욕을 위한 시험거리로 삼은 것입니다.
이는 불행한 일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그 보호의 손길을 잠시 떼시니 광야에 늘 도사리고 있는 불뱀이 나와서 백성을 마구 물었습니다. 광야를 능력의 손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시험한 결과입니다. 우리도 때로는 하나님을 향하여 시험의 의미가 담긴 언사와 행동을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조심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할 것은 오직 감사입니다.
(4)그들은 원망하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10절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은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민14장에 보면 이제 이스라엘백성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다 와서 12정탐을 보내어 정탐케 했습니다. 정탐 후 그 땅에 있는 네피림족속과 거대한 아낙자손을 크게 보고하여 온 백성을 격동하여 낙망케 하였습니다.
또한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게 하여 또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선동하여 그 인도하심을 악한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죄 때문에 이스라엘은 40년간을 광야를 방황하며 그 당시 원망했던 20세 이상의 성년은 다 광야에서 죽게 되었습니다. 원망의 파괴력은 이와 같이 놀랍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원망해선 안 됩니다.
아무리 상황이 험해져도 절박해 보여도 결코 원망해선 안 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백성의 할 일은 하나님만을 바라봄으로서 믿음과 감사로 일관해야 합니다. 감사할 수 없는 환경 가운데서 감사할 때 하나님은 말할 수 없이 기뻐하사 강하게 인도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제가 맹지혜 선교사님 입관예배 때에 말씀 드렸던 예화입니다.
100년 전 윌리엄 제임즈 홀 부부가 의료선교사로 와서 병원을 개업했습니다. 그러나 청일전쟁 이후 심한 전염병이 돌아서 서울의 영국 영사관에서 철수를 권고했으나, 두 분은 의사로서의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서 계속 일하다가 남편 윌리엄 제임즈 홀은 어린 아이를 남기고 결국 병에 걸리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때 그 부인 로제타 홀은 얼마나 낙심이 되고 더 나가서는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음이 생기겠습니까?
“하나님, 아니 우리가 주를 위해 이렇게 헌신하는데 남편을 젊은 나이에 데려가시다니요? 하나님, 너무나 원망스럽습니다.”라는 말을 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보십시오. 부인 의사는 계속 의료 선교사로 활동했습니다. 더 나가서는 지금 ‘이대부속 병원’ 전신인 ‘동대문 부인 병원’을 경영하면서 고대 의과대학의 전신인 ‘경성여자의학 전문학교’를 설립했습니다. 말할 수 없는 절망가운데 하나님을 원망하지 고 더 충성했습니다.
이런 모습에 아들 부부도 감동을 받았는지 나중에는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에 자기도 의료선교사로 한국에 와서 헌신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우리가 광야 같은 세상 가운데 살면서 반드시 명심할 것은, 우상숭배와 간음 죄, 하나님을 시험하고 원망하는 죄를 짓지 맙시다. 어떠한 환경 가운데서라도 감사하는 자들이 되심으로 하나님이 강하게 붙들어 주시는 자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교만하다가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11-12 “저희에게 당한 이러한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광야 생활 중에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 그리고 20세 이하의 사람들만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고 20세 이상은 다 죽은 이유는 우상숭배, 간음, 주를 시험, 원망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이러한 사실을 거울로 삼아서 우리들은 선 줄로 생각하지 말고 늘 넘어질까 조심하여야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넘어질까 봐 조심해야 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1)사람은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완전하지를 못합니다. 누구든지 각각 약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것은 다 강한데 이런 면에서 약하고 어떤 분은 저런 면에 약점이 있습니다. 삼손은 힘이 있고 믿음도 있고 능력이 있는 그런 사람이었지만 여자에게는 약했습니다.
그 결과로 드릴라 라는 여인의 유혹에 빠져서 결국 그는 머리가 깎이고 눈은 뽑혀지고 맷돌을 돌리는 아주 처량한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나 가룟 유다 등은 다 훌륭했으나 돈에 약했습니다. 그 결과 넘어지는 자가 되었습니다. 누구나 다 부족하고 약하고 허점과 실수가 있기 마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큰소리를 쳐서는 안 됩니다. 늘 자신을 살피며 조심을 하여야 합니다.
(2)원수마귀가 성도를 넘어뜨리려 시험하기 때문입니다.
원수 마귀는 우리의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의 약점을 잘 알고 우리를 유혹을 합니다. 어떤 때는 광명한 천사처럼 나타나서 달콤한 말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또 어떤 때는 우는 사자처럼 나타나 성도를 위협하고 겁을 주어서 넘어뜨리려 합니다. 그러므로 늘 깨어서 기도하고 대장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더 가까이 따라야 합니다.
그래야 시험하는 원수마귀를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때로 우리 인간들은 시험에 들 때가 많습니다. 그 때라도 예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 그만을 붙드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피할 길을 주시는 것입니다. 13절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시험당하여 쓰러지고 넘어지는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감당치 못할 시험을 주시지 않을 뿐 아니라, 혹 시험당할 때라도 피할 길을 반드시 마련해 놓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간 광야를 지나는 동안 수없이 많은 시험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기도하는 모세를 통하여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앞으로 나아가게 해 주셨습니다.
홍해 앞에서 백성들은 원망하고 불평했지만,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밤새워서 기도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홍해를 가르시고 육지같이 건너게 해 주셨습니다. 마실 물이 없어서 목말라할 때,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릴 때, 고기가 먹고 싶어서 아우성칠 때, 기도하는 모세를 통하여서 반석에서 생수를, 하늘에서 만나를, 동풍으로 메추라기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여리고성의 웅장한 모습을 인하여 백성들이 이제는 다 틀렸다고 땅을 치며 통곡했습니다. 그 때 기도하는 여호수아를 통하여 여리고성을 무너뜨릴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고, 정복할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기도는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요, 시험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이었습니다. 오늘 여러분들께서 어떤 시험을 당하고 있습니까? 어떤 이들에게는 물질의 시험이 있고, 어떤 이는 육체의 질병의 시험을 당합니다.
어떤 이는 신앙 문제로 인하여서 불같은 핍박을 당하고, 어떤 이는 영적인 시험을 당한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 시험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시험당할 때 기도하지 않고 불평하거나 원망하면 마귀가 틈을 타고 역사하여서 넘어지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부르짖고 기도하면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주시고 피할 길을 열어 주십니다.
이런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선교회에서 선교사를 뽑기 위해 채용시험을 보게 되었습니다. 선교회에서 예비 모집을 하고 “내일 새벽 4시 정각까지 여기에 나오라”고 하였습니다. 상당히 추운 날임에도 선교 지망생들이 시험을 치르려고 몰려들었습니다. 그러나 문이 잠겨 있었습니다. 여러 시간을 기다려도 문이 열리지 않습니다. 지망생들은 불평이 나오고 화를 내고, 가버리는 사람들도 생겼습니다.
그리고 오전 8시가 되어서야 문이 조금 열리는 것이었습니다. 안내원은 문을 조금 열고서는 들어오라는 말도 없이 고개만 내밀고 “여러분, 하나 더하기 하나는 얼마죠?” “해는 어느 편에서 뜨나요?”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이런 단순한 질문만 하더니 “예, 이제 시험이 끝났습니다. 집에 돌아가셔도 좋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선교사를 뽑기 위한 시험의 전부였습니다.
모두가 불만으로 가득한 채 무성의하게 답변하였을 것입니다. 며칠 후 한 사람에게 합격 통지서가 날아들었습니다. “당신은 선교사 시험에 합격하셨습니다. 4시 정각에 온 것을 보고 있었습니다. 인내의 시험에도 합격하셨습니다. 4시부터 8시까지 잘 기다리는 모습을 보고 있었습니다. 또 혈기가 있나 없나 보는 시험에도 합격하셨습니다. 어린이 시험문제로 시험을 보는데도 기분 나쁜 표정이나 화내지 않고 온유하게 대답하셨습니다.
시간 지키기, 인내, 온유는 선교사의 3대 필수 조건입니다.”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아마 선교사로 합격된 그 지망생도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선교회 처사에 화가 났을 것이요, 이런 무성의한 선교회를 통해서 사역하는 것을 포기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워낙 선교에 대한 열정이 강하기 때문에 기다리면서 기도하고 또 기도함으로 시험을 이기고 결국 선교사가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났던 광야생활을 거울삼아,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특별히 보호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했던 우상숭배나 간음 죄, 하나님을 시험하는 죄나 원망 죄를 저지르지 않고 승리하심으로 축복의 땅에 들어가는 자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이티 재난을 통하여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것
고전10장 01절 ~ 13절 / 김영준목사
아이티에서 일어난 지진은 온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십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고 또 살아남은 사람도 굶주림과 목마름과 슬픔 속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돕기 위하여 무슨 일을 해야 되는가? 또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결국은 같은 맥락일수도 있습니다. 그동안 온 세계의 시선은 테러 ․ 문명의 충돌 ․ 전쟁에 집중돼 있었는데 아이티의 지진으로 말미암아 모처럼 이웃을 돕는 일에 집중되게 되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 같은 나라는 이제 우리의 관심에서 좀 멀어졌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 중의 하나는 싸우는데 힘을 쏟지 말고 사랑하는데 힘을 쏟으라는 것입니다. 베트남전쟁 반전 구호에 ‘make love, not war - 사랑을 하고 전쟁을 하지 말자’는 구호가 있었던 것처럼 이번 재난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싸움과 갈등에 힘을 쏟을 게 아니고 사랑하는데 힘을 쏟을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아주 단순한 메시지입니다만 이보다 강력한 메시지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차이점, 이질적인 면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같은 면과 동질성에 초점을 맞추라는 것입니다. 아이티 사람들은 우리와 인종도 다르고 피부색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고 종교도 다르고 지구 반대편에 사는 사람들이지만 그들이 지진으로 이렇게 고통당하는 것을 볼 때 다른 점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고 다른 점은 사라지고 우리와 같은 면이 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들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요 형제요 우리의 이웃입니다. 그들이 고통당하는 것을 볼 때 우리도 마음이 아픈 것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만 안타까운 것이 있다면 우리는 평소에는 이런 것을 생각하지 않다가 누가 재앙을 당할 때만 그런 진리를 깨닫는다는 사실이에요. 평소 우리의 마음은 돌처럼 꽁꽁 닫혀 있다가 누가 이런 큰 환란을 겪는 것을 봐야 비로소 마음이 열리고 긍휼히 여기는 법을 배우게 되니 이런 사건을 통해서 우리가 깨닫는 것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이러한 사건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심각한 빈부의 격차의 문제를 보여줍니다. 심각한 빈부의 격차. 이것은 세계적인 차원에서의 빈부의 격차입니다. global, 지구촌 차원에서의 빈부의 격차입니다. 아이티 국민의 60가 하루 2달러로 생활하고 또 인구의 반이 문맹이고 그리고 진흙과 버터를 섞어서 만든 쿠키를 먹으면서 배고픔을 달랜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빈부의 격차를 이 시대에 더 이상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우리가 직시하고 여기에 대하여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고 해야 되는가를 생각하게 만든다면 그 자체가 큰 소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누구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서는 그저 간절한 마음, 도와야 되겠다는 그런 간절한 심정만으로는 불충분하고 스마트한 방법을 강구해야 됩니다. 아이티가 당면한 문제는 아무리 사람들이 도움을 주려고 해도 도움을 받기가 어렵다는 사실입니다. 구호품을 전달해주려고 해도 비행기 활주로가 모자라서 비행기가 내릴 수가 없어요. 비행기가 내려도 구호품을 옮길만한 트럭이 없어요. 트럭에 싣고 옮기려고 해도 휘발유가 없습니다. 휘발유가 있더라도 그것을 펌프할 수 있는 전기가 없어요. 어디에서부터 시작할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도움을 주려고 해도 그들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준비가 돼 있지 않아요. 그렇기 때문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서는 그저 돈을 주고 잊어버리는 것으로는 해결되지 않고 체계적이고 구조적이고 스마트한 방법을 강구해야 됩니다. 요즘 스마트폰이 인기를 끄는 것처럼 구호활동도 스마트해져야 됩니다. 모든 것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이 시대에 복음을 전하는 것도, 하나님을 섬기는 일도, 이웃을 돕는 모든 것도 스마트하지 않으면 우리의 사랑이 사랑으로 다 전달되지 못하고 또 우리의 순수함을 사람들이 순수함으로 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사회기반 시설, 인프라, 이런 것부터 갖춰 나가면서 기본적인 제도와 시설을 마련해 주어야 고질적인 가난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이 스스로 도울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이티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고 많은 가난한 나라들이 동일한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아프리카도 그렇습니다. 아프리카 사람들이 먼저 그 사실을 인정합니다. 국제 구호를 받는 것으로 그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어요. 근본적인 차원에서 가뭄의 문제 ․ 물 부족의 문제 ․ 에너지 ․ 교육 ․ 부패 ․ 폭력 ․ 혼동 ․ 질병, 이런 문제를 해결해 나가기 전에는 고질적인 가난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현재 아이티의 상황을 북한의 상황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언젠가는 휴전선이 열리고 남북이 통일되는 날이 올 텐데 통일 이후에 우리의 과제를 해결하는 법을 배우려면 아이티 재난 복구하는 법을 지켜봐야 됩니다. 왜냐하면 아이티와 북한은 여러 가지 면에서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아이티는 국가 자체가 존립을 위협받을 수 있는, 국가 자체가 무너진 상태이지요. 북한과 비슷한 것입니다.
아이티가 이런 재난을 당했지만 중요한 것은 그들이 혼자 방치돼 있는 것이 아니고 많은 나라와 많은 사람들이 그들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염려하고 또 도우려고 모여든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서 가진 것을 다 빼앗기고 그리고 죽도록 방치돼 있었는데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서 그를 도와준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무슨 기적을 일으켜서 그 사람을 도와준 게 아니고 선한 사마리아 사람을 보내서 그 사람을 도와주었습니다. 선한 이웃이 있었다는 사실이 하나님이 그 강도 만난 사람을 잊지 않았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제사장과 레위인처럼 지나가는 사람도 있었지만 불쌍히 여기고 다가가서 도와주는 선한 이웃이 있었어요. 이것은 사람이 사람을 도우면서 살라는 그런 인본주의적인 가르침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선한 이웃이 돕고 싶은 마음을 갖고 불쌍한 마음을 갖고 또 도와줄 수 있는 입장에 있고 도와줄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은 그건 하나님의 섭리로 말미암는 것이고 그 사람 마음속에 돕고자 하는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그것이 곧 하나님의 마음인 것이고 여기에서 하나님이 그 사람을 잊지 않으시고 도와주시는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게 아니고 강도를 만나 쓰러져 있는데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도 않고 아무도 찾아와주지 않고 아무도 돕지도 않고 도울 수도 없다면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없든지 하나님이 무력하다는 얘기가 되겠지만 누군가가 찾아오고 도와줄 수 있는 입장에 있다는 것은 거기에 벌써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를 보는 것입니다. 열왕기상을 보면 바알의 선지자들이 하루 종일 뛰놀면서 바알의 이름을 불렀는데 아무도 듣지도 않고 아무도 돌아보지도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바알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바알은 도와줄 수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돕고 도울 수 있는 능력이 있고 도울 수 있는 마음이 있다는 것, 거기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우리가 볼 수 있어야 됩니다.
만약에 어느 부모에게 자식이 많이 있는데 그중의 한 자식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형편을 만났다고 하더라도 그에게 형편이 넉넉한 형님 ․ 누님 또 동생, 이런 형제들이 많이 있다면 그 부모님은 별로 염려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형제들이 도와주기만 해도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게 아니고 형제도 없고 누이도 없고 도와줄 수 있는 형제는 아무도 없고 자식 하나뿐이라면 그렇다면 부모가 염려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아이티가 큰 고난을 당했지만 아이티가 홀로 있는 게 아니고 그 많은 나라와 많은 사람들이 돕고자 하는 것 우리는 사람이 사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그런 생각을 하기 쉽지만 원래 사람은 사람을 도우려는 마음을 갖지 않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도우려고 하는 것이 예외적인 것입니다. 돕지 않고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 그게 그래서 선한사마리아 사람 비유에도 관심이 없는 사람이 관심을 가진 사람보다 더 많았어요. 제사장과 레위인은 지나갔어요. 두 명이 지나가고 한 명이 관심을 가졌어요. 거기에서 인간의 선한 면 그리고 그 선한 면은 결국은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비극이나 재난을 접할 때 ‘아, 이런 일을 보니 하나님이 없다는 얘기다.’ 이런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세상의 선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생기는 것을 보면 하나님이 없다는 얘기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요. 저는 그런 사람들에게 이렇게 대답하고 싶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자유지만 정작 고난을 당한 당사자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유지하는데 당신은 무슨 자격으로 구경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하나님이 있다 없다, 이렇다 저렇다 말하느냐.’ 정말로 그렇습니다. 욥기를 보면 고난을 당한 욥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요 취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라고 믿음을 지키려고 하는데 정작 아무 고난이 없는 세 친구가 찾아와서 하나님이 있으면 왜 이런 일이 있느냐는 둥, 당신이 뭘 잘못한 게 있으니까 이런 일이 있다는 둥, 이런 식으로 떠벌리지 않습니까. 이것이야말로 교만이요 지적인 허영인 것입니다. 이번 아이티 재난도 정작 아이티 사람들은 이런 일을 당하니까 하나님께 기도하고 부르짖고 개중에는 우리가 회개해야 됩니다 라고 믿음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멀찌감치 서서 자기는 아무런 고난을 겪지 않은 팔자 좋은 사람들 중에 아,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느냐, 너무하지 않느냐, 이런 식의 논리를 펴는 사람이야말로 그럴 자격이 없는 것이고 교만한 것입니다.
이차 세계대전 중에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 중에는 프랑클 박사처럼 오히려 그 고난을 통해서 신앙이 깊어지고 신앙의 힘으로 절망을 이긴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걸 당해보기 전에는 함부로 이렇다 저렇다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반드시 자기의 소원을 이루고 자기의 환경이 좋아야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슬픔을 겪고 고통을 겪는다고 해서 반드시 하나님이 없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이렇게 단순하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팔자 좋은 사람들은 왜 교회 안 나가고 왜 하나님 없이도 살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그 사람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은총을 많이 받았을 텐데 왜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고, 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 논리가 옳지 않은 것입니다. 원래부터 예수님도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말씀하시고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 나라가 저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난이든 질병이든 아픔이 하나님이 없다는 주장을 낳는 게 아니고 오히려 성경적으로 봤을 때는 그런 것을 통하여 하나님께 돌아오고 하나님의 섭리를 의지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습니다. 인간의 연약함을 인간의 연약함으로 방치한다면 그건 하나님이 없다는 얘기가 되겠지만 인간의 연약함을 통하여 자기보다 더 크신 분을 의지하고 알게 된다면 그것은 숨겨진 축복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민주주의와 인권과 경제가 발전하고 삶의 질이 높아지면서 그것이 인류에게 큰 혜택을 준 것은 사실인데 동시에 어떤 결과를 낳았느냐면 고통을 용납할 수 있는 분량이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옛날에는 굶어죽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사람들은 그걸 그냥 정상적인 것으로 여기고 받아들였어요. 요즘에는 한두 명만 굶어죽어도 사람들이 아우성을 칩니다. 옛날에는 전쟁이 일어나면 많은 사람들이 전쟁에서 죽었어요. 요즘에는 한두 명만 죽어도 여론이 떠듭니다. 오죽하면 무인항공기 ․ 무인정찰기 ․ 무인로봇 ․ 무기를 가지고 사람을 대신해서 전쟁을 수행하는 방법을 연구하겠습니까. 왜냐하면 이제는 인명피해라는 것이 큰 정치적인 부담으로 작용하는 시대가 됐기 때문입니다. 조그만 어떤 불편함, 작은 희생이 있어도 여론이 그걸 참지 못하고 들끓어요. 그러다보니까 사람들이 정부에 대하여 또 나라에 대해서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서 요구하는 것은 극대화되는데 본인들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은 극소화되는 그런 시대가 되고 있습니다.
이천년 전에 사도바울은 오늘의 본문과 같은 말씀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5절 말씀에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 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8절에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간음하지 말자’ 9절에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 10절에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그리고 11절에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 말세를 당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이 주장을 펴는 사람이 다름이 아닌 사도바울이에요.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에게 보여준 사도바울도 이런 말을 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십일 세기에 사람들의 눈치를 보는 목회자들이 과연 몇 명이나 이런 말을 담대히 할 수 있을지. 우리는 움츠려들고 말하기를 주저하고 잘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고 거부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너무하시는 게 아니고 우리의 간이 부은 것입니다. 우리의 간이 부었어요. 우리는 너무 편한 것, 쉬운 것, 비위에 맞는 것에 익숙해졌어요. 과거에는 하루에 이만 삼천 명씩이나 벌을 받아 죽을 때가 있었고 바울은 거기에 대해서 거침없이 말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거기에서 모순을 보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래야 됩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어찌 이런 일을…, 이런 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실 때도 있습니다. 다만 13절의 말씀을 유념해야 됩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랍비 쿠시노가 말하기를 ‘하나님의 뜻은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 아니고 고통을 극복하게 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미쁘십니다. 우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넉넉히 감당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구름과 바다와 반석
고전10장 01절 ~ 4절 / 지용수목사
어제 저녁, 텔레비전에서 방영되는 제 설교를 들었습니다. 기도하면서 듣는 가운데, 은혜를 받고 하나님께 감사의 박수를 올려 드렸습니다. 제가 전했지만, 제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기 때문에 은혜를 받은 줄로 믿습니다.
성도의 지혜는 강단에서 증거되는 말씀을 사람의 말로 받지 않고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것입니다. 오늘 받는 말씀도 사람의 말로 받으면 손해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의 사자를 통해 나에게 말씀을 주시는구나.’하는 믿음으로 말씀을 받을 때 큰 은혜와 기적을 체험하게 될 것을 분명히 믿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일반 계시이고, 또 하나는 특별 계시입니다.
일반 계시는 천지만물, 피조물, 우주 만물에 나타납니다. 훌륭한 작품에는 저작자의 능력과 기술이 나타나기 때문에 그 작품을 보면 저작자의 능력과 기술을 알게 됩니다.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보면 그가 얼마나 천재적인 미술가이며 조각가인가를 알게 되듯이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우주를 보면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알게 되어 있습니다.
태양을 보아도 그렇고 바다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산과 마을, 길에 있는 더러운 오물이 빗물에 씻겨 바다로 흘러갑니다. 바다는 그 모든 더러운 것이 모여 들어도 썩지 않고 오히려 그 더러움을 정화시키며 여전히 출렁거립니다. 또 강물에는 염분이 없는데 바다에는 염분이 계속 나와서 저 엄청난 바닷물이 소금물이 되는 것도 참 신비롭습니다.
그리고 이 우주는 1초의 오차도 없이 척척 돌아갑니다.
별은 항성과 행성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항성은 제자리를 지키며 움직이지 않고, 행성은 궤도를 따라 움직입니다. 엄밀히 따지면 항성도 조금씩 움직입니다. 그런데 그 수많은 별들이 서로 부딪치지 않고 그렇게 움직이는 것도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나타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 20절에 말씀하십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정신 이상자가 아니라면 이 우주, 이 자연, 이 피조물을 보기만 해도 ‘하나님께서는 살아 계시는구나.’하는 것을 깨닫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신비로운 계시는 특별 계시 바로 성경입니다. 할렐루야!
우주 만물보다 성경 한 권이 더 귀하고 신비로운 계시입니다. 사실, 피조물인 우주 만물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솜씨와 능력은 안개 속에서 보는 것처럼 희미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구나. 천국과 지옥이 있구나.’하는 것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그런데 특별 계시는 구원받은 사람만 받아 누리는 것입니다. 일반 계시는 지옥 갈 사람도 다 보고 즐기는 것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그들이 비록 깨닫지는 못해도 저 하늘의 별들을 보고 벌과 나비를 보고 벌과 나비가 만든 꿀을 먹으면서 즐깁니다. 하지만 그들은 성경의 신비를 알지 못합니다.
태양이 얼마나 신비롭습니까? 누가 주기적으로 기름을 공급해 주는 것도 아닌데 늘 같은 크기로 늘 같은 열, 늘 같은 빛을 발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신비로운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구약 성경은 1500년 동안 씌어진 것이고, 신약 성경은 약 100년 동안 씌어졌습니다. 신구약 성경 기자가 약 40여 명인데, 그들이 살았던 시대가 다르고 그들의 학력이 다르고 배경이 다 다릅니다. 그렇게 다 다른 사람들이 썼는데, 자가당착에 빠지는 것이 하나도 없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구슬이 이어지듯이 이어져 있고, 다 짝이 있습니다. 놀랍습니다. 성경은 열 번 읽으면 그만큼 깊이 빨려 들어가고, 백 번 읽으면 그만큼 더 깊이 빨려 들어갑니다. 읽으면 읽을수록 더 깊이 빨려 들어가서 성경 안에 흠뻑 취해 그 신비로움을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놀랍습니다.
제가 이 본문을 얼마나 많이 읽었는지 모릅니다. 읽을수록 신비로움이 더했습니다. 구약의 사건과 신약의 말씀이 연결되어서 우리에게 쉬 깨닫게 해 주십니다. 이 시간, 성령님께서 이 말씀을 잘 해석해 주시어 이 말씀 위에 굳게 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바울이 이렇게 말씀한 것은 모두가 알기를 원한다는 뜻입니다.
저도 여러분이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다 아시기를 원합니다. 세상의 지식은 조금 몰라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특별 계시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특별 계시, 지식은 알수록 우리에게 복이 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바울은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라고 말씀했는데, 이는 출애굽기 3장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출발할 때 하늘에 신비로운 구름 기둥이 나타나서 그들의 길을 인도했습니다. 사막에는 길이 없습니다. 요즘은 아스팔트 길이 나 있지만, 그 당시에는 길이 없었습니다. 지도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신비로운 구름 기둥으로 인도해 주셔서 그 구름만 보고 가면 되게 하셨습니다. 때로는 밤에도 움직여야 했는데, 그때는 불 기둥이 나타나서 인도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낮에도, 밤에도 그들을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갈 때까지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이 그들을 떠나지 않고 인도해 주었기 때문에 그들은 걱정이 없었습니다.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은 오늘의 성령을 상징합니다. 성령님께서는 낮에는 낮대로 밤에는 밤대로 인도해 주십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에는 실수가 없으십니다. 실수가 없으신 우리 하나님의 인도이십니다.
눈보라치는 날, 미국 대륙을 횡단하는 열차가 시골길을 달리고 있는데 그 열차 안의 한 아주머니가 옆에 앉은 신사에게 말했습니다.
“저는 초행길이라 역을 잘 모릅니다. 제가 ○○○역에서 내려야 되는데 언제 내려야 되나요?”
“아주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이 지역을 잘 압니다. 다음 역에서 내리시면 됩니다.”
기차가 멈추었습니다. 아주머니가 기차에서 내렸습니다. 기차가 곧 출발하더니 얼마 가지 않아서 또 멈추었습니다. 신사가 밖을 내다보니 그 역이 바로 아주머니가 내려야 하는 역이었습니다. 깜짝 놀란 신사가 승무원에게 달려가서 물었습니다.
“아니, 조금 전에 정차한 역은 어느 역이었지요?”
“바로 조금 전에는 제동 장치를 점검하기 위해 잠깐 정차했었습니다. 지금 눈이 많이 내려 길이 아주 미끄럽거든요.”
집도 없는 허허벌판에 내린 부인이 그날 밤에 아기와 함께 죽었습니다.
그 신사가 길을 잘못 안내해서, 실수해서 부인과 아기가 죽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실수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하나님의 안내에는 실수함이 없으십니다.
그리고 우리 하나님께서는 그저 30년간 인도하시고 31년째에는 “네가 알아서 살아라.”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끝까지 인도해 주십니다.
『이 하나님은 영영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시편 48:14)
죽은 후에는 하나님의 인도가 필요 없습니다. 죽은 후에는 우리가 천성에 가기 때문입니다.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주님께서 여러분과 저를 인도해 주십니다. 그 인도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강한 태풍이 불어오면 다른 구름은 날아가지만 하나님의 인도의 구름 기둥은 아무리 세찬 바람이 불어도 꼼짝하지 않는 신비로운 구름입니다. 억수 같은 소낙비가 내려도 하나님의 불 기둥은 꺼지지 않는 신비로운 불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신비롭습니다. 그 인도하심이 저와 여러분에게, 우리 교회에, 우리 민족에게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원래 교인이 아니었습니다. 17세까지 공자와 맹자를 공부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했고, 예수님을 좋아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공부하고 싶은 마음에 돈 십 원을 가지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하지만 어디에 가서 돈을 벌어 공부해야 할지 너무나 막막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공부하고 싶은 사람은 ○○로 오시오. 공짜로 먹고 자며 공부할 수 있소.’라고 씌어진 팻말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곳으로 가보니 기독교 학교인 언더우드 학교였습니다. 기독교를 오랑캐 종교라 생각하고 아주 싫어하는 그였지만, 공부하려면 그 길밖에 없으니 예수님을 믿는 척하고 그 학교에 들어갔습니다. 마음속으로는 계속 유교를 따르고 학교에서는 공부나 하자는 마음으로 들어갔는데 공부하다보니 기독교 진리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송 모 장로님의 전도를 받고 예수님을 영접한 후 기독교의 큰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인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오늘 여기까지 온 것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입니다.
오늘 낮 예배를 마친 후 한 분이 기도를 받으러 오셨습니다. 일생 교회를 모르고 사시던 분이 몸에 암이 생겨 어렵게 되자 마지막으로 교회에 나오신 것입니다. 제가 그분을 위해 기도해 드린 후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모든 부귀 영화를 다 누리며 건강하게 살아도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는 사람은 너무나 불쌍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비록 부족한 것이 많고 병든 몸으로 어렵게 산 사람이라도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은 정말 복 있는 사람, 행복한 사람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이틀 후에 이 세상을 떠나도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복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시다.
계속해서 본문을 보면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라고 말씀합니다.
구름도 물이고 바다도 물입니다. 이것은 세례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바닷길은 기적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하늘에는 구름 기둥이 있고 그 아래에는 홍해가 있는데, 홍해가 갈라지니 이스라엘 백성이 그 바닷길로 지나갔습니다. 그들이 바닷길을 지나갈 때 얼마나 놀라웠겠습니까?
우리 성도는 때로 바닷길을 갑니다.
여호수아 3장에 보면, 모맥을 거두는 시기에 요단강은 물이 항상 넘쳤습니다. 수백만 명이나 되는 이스라엘 백성이 그 강을 건너려면 큰 배가 얼마나 많이 필요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요단강을 갈라주셔서 그 강을 지나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인도하시되 필요하면 기적을 베풀어주십니다.
홍해 바다를 지났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풀어주셨다는 것입니다.
뒤에서는 애굽 군대가 추격해 오고 있고, 양옆에는 험산 준령이 있고, 앞에는 홍해가 있어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 되니 하나님께서 홍해를 좍 가르셔서 건너게 하셨습니다.
우리도 살아가다 보면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사방으로 길이 없고 문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도 우리 주님께서 “내가 그 문이고, 그 길이다(I am the gate, I am the way)."라고 말씀하십니다. 할렐루야!
문이 없는 곳에 하나님께서 문을 열어 주십니다. 저 지용수도 문이 없었던 사람이었는데 불쌍한 저에게 예수님께서 문이 되어 주셔서 오늘의 제가 있는 것입니다. 길이 없었던 제게 하나님께서 길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여러분의 길이 없을 때 하나님께서는 길을 만들어 주십니다. 문이 없을 때는 문이 되어 주십니다.
황광은 목사님은 어릴 때 죽었다가 살아난 분입니다. 그분의 아버지는 3대 독자였는데 아들을 여덟이나 낳았습니다. 그러나 그 아들 중 네 아들이 죽었는데 광은이가 홍역에 걸려 또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광은이 할아버지는 광은이를 등에 업고 이틀이나 밤을 지새우며 “하나님, 우리 광은이를 살려 주세요. 우리 광은이가 죽어가고 있습니다. 제발 우리 광은이를 살려 주세요.”하고 울며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광은이는 죽고 말았습니다. 아이가 죽자 어른들이 아이를 홑이불로 덮어서 윗목으로 옮겼습니다. 그것을 보고, 나중에 장로님이 된 그의 형 태은이가 “하나님, 내 동생을 살려 주세요.”하며 막 울었습니다.
저도 제 동생을 위해 그렇게 기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마을에 지프차가 한 대 오면 얼마나 신기한 구경거리였는지 모릅니다. 어른이나 아이나 할 것 없이 동네 사람들이 다 나와서 살펴보고 차가 달리면 휘발유 냄새를 맡으려고 차를 따라 막 뛰어갔습니다. 차에 매달리기도 했는데, 먼지로 뽀얗게 뒤덮여도 그저 좋기만 했습니다. 차에 한 번 매달리면 한 달 동안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런 시절, 마을에 들어온 차를 구경하고 있는 제 동생을 한 짓궂은 아이가 밀어서 제 동생이 차 밑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운전 기사가 그것을 모르고 차를 후진하는 바람에 동생이 차 밑에 깔리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이 차 밑에 아이가 있다고 소리를 지르니 운전 기사가 차를 멈추어서 동생이 죽지는 않았지만 얼마나 놀랐던지 얼굴이 파랗게 질리더니 자꾸 까무러쳤습니다. 동생을 거꾸로 들고 엉덩이를 치기도 하고 뺨도 때리기도 하면 깨어났다가 또 까무러치고, 몇 번이나 파랗게 죽었다가 살아나고 죽었다가 살아나곤 했습니다. 그때 일을 생각하면 제 동생이 지금 살아 있는 것이 기적입니다.
그때 제가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 제 동생을 살려 주세요. 하나님, 제 동생을 살려 주세요. 제 동생, 제 동생….”하며 울었습니다.
제 동생이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습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제 동생은 죽으려다가 살았지만, 황광은은 완전히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형 태은이가 밤새도록 예수님의 이름으로 막 소리쳤습니다.
“광은아, 살아나라! 광은아, 살아나라!”
그러나 광은이는 살아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소리치다 태은이가 지쳐서 잠이 들었는데 잠결에 이상한 느낌이 들어 눈을 떠보니 홑이불이 움직였습니다. 홑이불을 열어보니 광은이가 살아났습니다. 광은이가 일어나면서 “하나님이 조금 더 있다가 오래.”라고 말했습니다.
그 광은이가 목사님이 되었습니다. 그 길은 기적의 길이었습니다.
요즘 우리나라도 백 쌍이 결혼하면 사십여 쌍이 이혼을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신비롭게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 중에서는 이혼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중에 이혼하는 사람은 극히 적습니다. 백 가정, 아니 천 가정에 한 가정이 있을까 말까 합니다. 백 가정 중 사십여 가정이 이혼을 하는데, 예수님을 믿는 가정 중에서는 이혼하는 가정이 이렇게 적은 것이 기적입니다. 하나님의 인도로 우리는 지금도 바닷길을 걷고 있고 강길을 걷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어려운 일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 신비로운 은혜로, 초자연적인 역사로 우리 길을 인도해 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 내 길 예비하시니 나 기뻐합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인도를 받으며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바다를 지나간 것은 기적을 가리키는 동시에 세례를 가리킨다고 앞서도 말씀드렸습니다.
본문에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라고 말씀하십니다.
구름도 물이요 바다도 물인데,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았다’는 말씀은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구름을 바라보며 바닷길을 지나가면서 “하나님께서는 정말 살아 계시는구나. 하나님께서 우리 백성을 특별히 택하셔서 보호하시는구나.”하고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렇게 믿게 된 다음에 모세에게 착 달라붙었습니다. 그 전까지는 모세를 따라가면서도 긴가민가했는데, 그 때부터는 모세가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겠다고 결단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의 세례입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였던 모세는 예수님의 예표였습니다. 물론 모세는 하나님 나라의 하인으로 일했고 예수님께서는 주인으로 일하셨지만 말입니다.
이 시대의 하나님 백성은 예수님께서 인도하십니다.
세례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계심을 믿습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께 속한 사람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바울이 말씀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세례를 받은 사람은 자기는 주님과 함께 죽고 자기 안에 주님께서 사시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내 안에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27절에도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을 입었습니다. 우리가 옷을 입으면 우리의 살은 보이지 않고 옷만 보이듯이, 세례를 받으면 그 사람은 나타나지 않고 예수님께서 나타나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속한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가는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례입니다.
우리는 신비로운 성령의 바닷길에서, 성령의 구름 아래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것이 기적입니다.
눈으로 보지 못한 예수님, 2000년 전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을 믿고 그 피로 죄사함 받는 다는 것을 믿는 것은 이상한 기적을 체험한 것입니다. 바닷길을 통과하는 기적을 체험한 것입니다. 처녀 몸에 아기가 잉태되는 것도 기적이지만, 정신이 말짱한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것은 그보다 더 큰 기적인 것입니다. 보지도 못한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것, 보지도 못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을 믿고 그분만 섬기는 것은 이미 우리에게 기적이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 모두 세례 받게 됨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구름 아래 바다에서 세례를 받았다.’ 이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리고 본문 3절과 4절에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신령한 음식이 무엇입니까?
출애굽기 16장에 나옵니다.
애굽에서 가지고 나온 양식이 다 떨어져 이스라엘 백성이 굶어 죽게 되었습니다. 아무런 씨앗도 가지고 나오지 않았고 더구나 사막에서는 농사를 지을 수도 없으니 당연히 굶어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하늘에서 떡가루가 내려왔습니다. 하나님께서 떡가루를 비처럼 내려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신령한 양식(spiritual food), 초자연적인 신령한 양식을 40년간 먹었습니다.
그 양식은 지금의 무엇을 뜻합니까?
생명의 양식,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양식입니다.
그리고 성찬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6장 55절 이하에 말씀하십니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우리 주님께서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라고 크게 외치셨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는 말씀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예수님의 살, 성찬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할렐루야!
바울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찬을 구약의 만나에 비유하는 것입니다. 그 구약 시대에 사막에서 만나를 먹지 않으면 죽었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지 않고 성찬을 먹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신령한 음식은 하나님의 신비로운 양식인 것입니다.
그리고 음료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출애굽기 17장 1절에서 6절에 나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르비딤에 도착했을 때 물이 없어 목이 말라 타 죽게 되니 모세에게 마구 불평을 하면서 모세를 돌로 치려 했습니다.
그때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조금 지나면 저들이 저를 돌로 치겠어요. 이 사막에 물은 없고 어떻게 해요?”
“모세야, 그 장로들을 데리고 가서 저 반석을 지팡이로 치라.”
모세가 지팡이로 반석을 치니 물이 솟아났습니다. 그들이 그것을 먹고 마셨습니다.
그것이 신령한 물이라는 것입니다. 반석을 지팡이로 쳤을 때 터져 나온 물은 초자연적인 물입니다.
또한 그 물은 성령의 생수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요한복음 7장 37절에서 38절에 보면, 우리 주님께서 명절 큰 날에 외쳐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이는 믿을 자가 받을 성령을 말하는 것입니다.
만나는 말씀과 성찬입니다. 음료는 성령의 생수, 또 예수님의 피를 말합니다.
“이는 내 참된 음료라.”
광야에서 반석의 샘물을 마시고 산 것처럼, 우리는 성령의 생수를 마시고 그리고 예수님의 피를 마시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비로운 것은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를 따르는 반석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원어에 보면, ‘동반자 반석’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바위는 다리가 없어서 움직이지 못하는데 바위가 따라다녔다고 말씀하십니다. 외경에 보면, 그 르비딤의 반석이 항상 따라 다니면서 필요할 때마다 물을 주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유대 랍비들은 그 반석이 40년간 따라다니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물을 주어서 그들이 그것을 마셨다고 해석하는데, 그것은 지나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반석이 따라다니지 않고 르비딤에만 있어도, 하나님께서 언제나 함께 하시기 때문에 물이 없는 곳에서는 하나님께서 그 자리에서 물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동반자는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동반하시는 것입니다.
본문에 『그 따르는 신령한 반석(the spiritual rock)은 곧 그리스도시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반석이십니다. 우리 인생의 기초도 되시지만 우리에게 생수를 주시는 반석이십니다. 신비롭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의 동반자로 우리와 동행하시면서 목마를 때 우리에게 시원한 물을 주시고 굶주릴 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말씀도 주시고 성찬도 주시고 우리가 죄지을 때마다 주님의 피로 깨끗하게 씻어 주시고, 모든 것을 다 해 주십니다.
사과나무 한 그루가 있었습니다.
한 소년이 사과나무 아래에 앉아 놀기도 하고 피리를 불기도 하고 책을 읽기도 했습니다.
집을 떠나 살던 소년은 청년이 되어 예쁜 여자와 사귀었습니다. 결혼하고 싶은데 돈이 없자 사과나무를 찾아와서 말했습니다.
“사과나무야, 결혼해야 되는데 돈이 없다.”
사과나무가 말했습니다.
“내 사과를 따다가 팔아서 결혼해라.”
그는 사과를 따다 팔아서 결혼했습니다.
결혼 후 사업을 하다 어려워진 그는 또 사과나무를 찾아왔습니다.
“사과나무야, 사업이 어려워서 찾아왔다.”
“내 가지를 잘라 팔아라.”
그는 가지를 내다 팔았습니다.
그 다음에 사업이 또 어려워지자 청년이 또 사과나무를 찾아왔습니다.
“사과나무야, 또 어렵게 되었다.”
“그러면 내 둥치 째로 잘라서 팔아라.”
세월이 지나 노인이 되어서 사과나무를 찾아온 그에게 사과나무가 말했습니다.
“이제는 내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서 쉬어라.”
사과나무가 그 소년에게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는 여러분과 저를 위해 바보처럼 모든 것을 다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자신이 죽는 것이 낫지, 죽는 자리에 아들을 내놓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게 하셨습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가시관을 쓰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발가벗긴 채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부끄러움을 참으셨습니다. 여러분과 저를 위해서 살도 주시고 피도 주시고 아낌없이 모든 것을 다 주셔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 주님께서 지금도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보호하십니다. 먹이십니다. 마시게 하십니다. 그리고 지금도 하늘 나라에 우리 집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한복음 14:1-3) 할렐루야!
우리 주님의 모든 삶, 우리 주님 삶의 100%가 저와 여러분을 위한 것입니다.
늘 감사하며 우리도 우리의 남은 생애를 주님을 위해 종을 울리는 의리 있는 그리스도인, 의리를 지키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거울보는 사람들
고전10장 06절 ~ 11절 / 박종순목사
모 일간지 사설 가운데 월드컵 4강 진출과 히딩크 지도력을 거울로 삼자라는 대목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히딩크의 용병술과 지도력을 교훈으로 삼자는 뜻입니다.
11절을 보면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숭배 하다가 하나님의 진노로 멸망당한 사건이 있었는데 그 사건을 거울삼아 너희는 그런 죄를 범치 말라는 것이 본문의 골자이며 교훈인 것입니다.
사빈 멜쉬오르 보네(Sabine Melchior Bonnet)가 쓴 「거울의 역사」(Historicau Miroir)라는 책을 보면 이미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은 자신의 모습을 보기위해 고여있는 물을 들여다보거나 돌을 갈아서 자기 얼굴을 비춰보았다는 것입니다. 2천년전 가야시대 사람들은 청동으로 거울을 만들어 썼고, 13세기 후반 유럽사람들은 평판유리 뒷면에 금속판을 대어 거울을 만들었습니다.
오늘에 이르러 거울은 남녀노소의 필수품입니다. 여자들 핸드백 속에 반드시 들어있는 필수품이 있습니다. 그것은 거울, 컴팩트, 루즈, 티슈 등입니다.
선사시대 사람들이 고인물을 들여다보기 시작한 이래 최신 거울에 이르기까지 거울의 용도는 자기 모습을 보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망원경이나 안경은 남을 보고 다른 것을 보기 위해 필요하지만 거울은 자기 모습을 보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다른 것들을 보고 다른 사람을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기 자신을 보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3:5에서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 했습니다. 너를 보고 너를 시험하고 너를 확증하라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했습니다.
학교에 입학하면 역사를 공부하게 됩니다. 세계역사도 공부하고 한국역사도 공부합니다. 왜 역사를 공부합니까? 그것은 지나간 역사를 되풀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나간 역사를 거울삼아 보다 나은 역사를 만들기 위해서 인 것입니다.
우린 오늘 본문을 거울삼아 드려다 보면서 두 가지를 경계로 삼아야 합니다.
1. 우상숭배를 하지 않아야 합니다.
7절을 보면 "저희 중에 어떤 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8절을 보면 우상숭배를 간음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한 분을 창조주로 믿는 유일신 신앙을 저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는 것은 한 남편 한 아내로 만족하지 않고, 이 남자 저 남자, 이 여자 저 여자를 편력하는 간음과 같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결과입니다. 8절을 보면 하루 동안 2만 3천명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2:1-6을 보면 모세가 십계명을 받기 위해 시내산에 올라가 40일간 머물러 있는 동안 산 아래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세우고 "이것이 우리의 신이다. 하나님은 더 이상 우리의 신이 아니다."라면서 떠들고 춤추며 황금송아지를 신으로 섬기는 죄를 범했습니다.
주목할 것은 황금으로 우상을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옛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황금은 물량가치를 대표합니다. 그래서 금을 많이 보유한 나라는 부자나라였고, 금 보유량이 적으면 가난한 나라 였습니다. 종이로 만든 화폐는 물에 젖고 불에 타지만 황금은 그럴 일이 없기 때문에 부의 척도로서 그 가치가 높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도 그 당시 황금을 모아 송아지 우상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송아지 우상을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애굽사람들에게 소는 풍년을 상징하는 짐승으로 그들이 섬기는 우상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애굽사람들이 섬기는 송아지 우상을 만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황금으로 풍요를 상징하는 송아지를 만들고 이것이 우리의 신이라며 숭배했던 것입니다. 즉 돈과 풍요를 우상으로 섬긴 것입니다.
현대인의 우상이 무엇입니까? 돈입니다.
돈이라면 의리도 버리고, 우정도 버리고, 부모도 죽이고, 신앙도 내팽개치고, 예수도 버립니다. 돈 생기는 일이라면 주일도 상관없습니다. 돈버는 일이라면 양심도 신앙도 버립니다. 바로 그것이 우상인 것입니다.
월드컵 기간동안 한국이 세계에 내놓은 자랑거리가 많았습니다. 선수들의 강인한 투지와 기량, 시민들의 협동, 차질 없는 진행, 철저한 보안 등 많았습니다. 그러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응원입니다.
거리로 나온 사람만 800만, 안방에서 식당에서, 해외에서, 교회에서 치밀하고 조직적이고 열정적 응원에 전 세계가 놀랐습니다.
그런데 신문마다 TV나 방송마다 4천만을 붉은악마라느니 붉은전사라느니 떠들어댔습니다.
저도 운동장에도 갔었고, 길거리에도 나가 응원을 했습니다. 한국선수가 공을 몰고 독일 문전으로 갈 때면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휘젓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이라며 소리치고 박수를 쳤습니다.
대한민국 국민 4천만 모두가 감독이고, 트레이너였고, 심판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대한민국 국민이지 붉은악마가 아닙니다. 왜 내가 붉은악마 입니까? 한국기독교인 1,200만 명은 하나님의 백성이지 붉은악마가 아닙니다. 이점 분명히 해야 합니다.
대한민국 국민 4천만이 악마가 되기를 바라는 것은 진짜 악마대장일 것입니다. 대한민국 4천만 국민이 붉은사상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북한의 김정일일 것입니다. 우리는 응원과 신앙, 응원과 주체성을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붉은색 유니폼은 어떻게 생각하는냐"라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건 상관없습니다. 본래 기독교에서 붉은 색깔은 보혈, 구속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흰 옷 입었다고 속도 흰 것은 아닙니다. 검은색 입었다고 속도 검은 것은 아닙니다. 붉은 티셔츠를 입었다고 속도 붉게 되는 건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는 악마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악마라는 이름을 걸면 악마와 친하고 악마를 섬길 수밖에 없습니다.
돈이든, 권력이든, 명예든, 사람이든, 그것들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섬기면 우상숭배가 되는 것입니다.
2. 주를 시험하지 않아야 합니다.
9절을 보면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라고 했습니다.
민수기 21:4-9을 보면 모세의 인도로 광야길에 들어선 이스라엘 백성이 에돔평원을 통과하게 되었습니다. 날씨는 뜨겁고 먹고 마실 것은 없는데다 몸은 지쳐 쓰러지기 직전이었습니다.
자연히 불평이 터지기 시작했습니다. "왜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냈느냐?" "먹을 것이 없다. 마실 물이 없다."라며 모세를 향해 원망과 불평을 터트렸습니다.
그런데 민수기 14:27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고 했습니다. 모세를 향해 터뜨렸던 원망을 하나님을 향한 원망으로 동일시하였다는 점을 주목해야합니다.
출애굽기 17:2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마실 물이 없다는 이유로 모세에게 대들고 다툰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모세와 다툰 사건을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다툰 그곳을 「맛사」라고 불렀습니다. 그 뜻은 `시험하다`라는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과 약속하셨습니다. "애굽에 살고 있는 너희를 내가 인도하여 가나안땅으로 인도하겠다."고, 그리고 "나는 스스로 있는자 하나님이다. 나는 내 이름을 걸고 이 약속을 지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그 약속을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시험했습니다.
`하나님은 계신가 안 계신가?`, `우리와 함께 계시는가 안 계시는가?`, `능력이 있는가 없는가?` 따지고 저울질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주경가 「호지」는 "하나님은 그의 백성의 믿음과 인내를 훈련시키고 강하게 하기 위해 시험하신다. 그러나 사단은 범죄에 빠뜨리기 위해 시험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시험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은 않됩니다. 마태복음 4:7을 보면 "주 너희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고 했습니다.
왜 하나님을 시험합니까?
첫째, 의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계신가, 계신다면 어디 계신가, 꼭 예수 믿어야 구원받는가, 종교는 다 같은 것이 아닌가? 하나님은 기도를 들으시는가? 50억 인구를 하나님은 다 기억하시는가?" 등 하나님을 의심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믿고 기도한다면서 "이건 안될꺼야, 이건 어려울거야, 하나님도 이것만은 어려울거야"라는 생각이 곧 시험하는 것입니다.
둘째,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시험치는 사람들을 유혹하는 것이 컨닝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답안지를 몰래 훔쳐보거나 노트를 펴놓고 보는 것 등을 컨닝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공부를 제대로 한 사람은 남의 답안지를 훔쳐보거나 넘겨다 볼 필요가 없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시험에 빠지지도 않고 하나님을 시험하지도 않습니다. 이런저런 문제로 시험에 빠지는 것은 내 믿음이 적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믿음이 적을수록 하나님을 시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9:14-29을 보면 귀신들린 아들을 주님께 데려온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
주님은 그에게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그가 소리쳤습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그리고 29절을 보면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없을 때는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생기면 "내가 믿나이다"라고 소리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시험도 이기고, 고통도 이기고, 유혹도 이길 수 있습니다.
본문 11절을 보면 "이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며 경계가 된다"고 했고, 12절에서는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그 뜻은 교만하지 말라, 겸손하라는 것입니다.
우린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남긴 거울을 들여다봤습니다. 하나님 대신 우상숭배 하다가 멸망당한 거울, 하나님을 시험하다가 뱀에 물려 죽은 거울, 그리고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이런 것들을 거울삼아 교만하지 말라고 주었던 거울들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거울 앞에서 우리 자신을 고치는 일입니다.
하나님만을 유일하신 하나님으로 섬깁시다.
돈이든, 권력이든, 오락이든, 취미든, 사업이든, 직장이든, 남편이든, 아내든, 부모든, 자녀든,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거나 중요시하지 맙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되 시험하거나 원망하지 맙시다.
돈은 많이 벌고 회사가 잘되고 지위가 높아지고 만사가 형통하더라도 그러기 떄문에 더 겸허하게 자신을 낮춥시다.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는 야고보서 4:6 말씀을 가슴에 새깁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