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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적으로 일반 대중들은
민주당 혹은 진보 정당 의원들만이
과거 민주화/반독재 혹은 운동권,
더 나아가 주사파로 알고 있기에,
적지않은 보수/극우 진영 인사들 역시도
과거 운동권/주사파 출신이었다는
잘 알려지지 않는 그 과거 팩트들을
끄집어 내어 봅니다.
이념? 웃기지도 않죠...이들의 행동을
보면...
민주화/반독재 노동운동이 같은 이념인데..?
우파,좌파,..여당,야당..으로 나뉘어서
골고루 분포 되어 있는데...이게 이념을
신념을 가지고 운동을 한것 인가요??
그나물에
그밥이죠(오십보백보)
운동권 꼰데들이
정치권에서 사라져야 합니다.
그나마..6월항쟁 86년도 386은
정신이 조금은 제대로 박혀 있지만..
언제 변질 될지 모르죠....
소설이 아니고..사실을 원칙으로
객관적인 글 입니다.
글내용의 자료출처 입니다.
..................................................................................
내용 출처: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
나무위키 https://namu.wiki
뉴스 라이브러리 http://newslibrary.naver.com
각각 정당인의 공식 홈페이지 및 페이스북/블로그 페이지
각 언론 매체 기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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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혹은 청년 시절 당시
주사파 운동권 출신. 현 정치인 목록
극과 극으로 결국 통한다는 것처럼...
과거 독재 타도를 외치던 민주화 운동권 혹은,
민족해방통일을 외치던 주체사상파 출신에서...
군사독재정권, 심지어 과거 친일파 세력까지
포옹하는 수구 세력과 권력을 탐하는 현실정치
계열로 전향한 우파(극우)정당 출신들을
나열해보았습니다.
아래의 명단에 있는 사람들이..
과거 민주화 운동 노동운동..반미운동..
등 주사파 출신의 이름 입니다.
안병직,이인호,김동길,김진홍,조갑제
한광옥,이재오,김문수,손학규,김덕룡
이명박,이인제,인명진 목사,정진석,홍준표
김영환,이동호,신지호,김성태,정병국
장석춘,현기환,임이자,이종철,문진국
문진국
386세대
최홍재, 홍진표,허현준,하태경
심재철,원희룡, 이성헌,정태근,박종운
이장우,고진화,김지룡,오경훈,강길모
강영진,
유신 정권과 5공 시절,
대통령 선거조차 없어서 체육관에서
정해진 인원이 모여 이미 정해진 단독
후보만을 두고 100% 만장일치 득표율로
대통령으로 추앙하였고,
대통령 직선제 선거를 주장하면
“빨갱이” 로 몰려서 알 수 없는 곳으로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하거나,
심지어 어느날 의문사 사체로
발견되기도 하였다..
노동조합도 만들수 없었던 노동자들이
저임금에 착취당하는 것은 물론,
심지어 공장에서 머리까지 스포츠로 깎고,
복장 두발규정 어기면 해고당하던
어이없던 시절이다.
80년대 말 이전까지
당시 북한의 실제 사정을
잘 몰랐던 가난하고 독재에 짓눌린 대한민국
사회에 대항하여 '호헌 철폐' , '직선제 쟁취'을
외치고 또한 식민지 종주국이나 다름 없는
미국의 군사적, 경제적 지배에 반대하며
민족 통일론과 함께 주체사상을 또 다른
대안처럼 바라봤던 NLPDR,
즉 민족해방 민중민주주의 혁명론
(National Liberation People's Democracy
Revolution)
그리고 그 안에 주사파와 비(非)주사파가 존재했고,
자유민주주의를 유린한 군사 독재 정권에 대항한
것은 사실이지만,
90년대에 들어서며 주체사상과는
전혀 관계도 없고, 왜곡되어 선전된
사회주의에, 강압적으로 고립된 현실
그 자체가 실제 북한 사회의 이면이라는
것이 전세계적으로 공개되면서
대다수의 주사파 혹은 NL 진영은 깔끔하게
축소되어버리고,
또 다른 대상을 숭배하는 뉴라이트
같은 완전히 변질된 전향이나
좀 더 다른 방향으로 진보 혹은
좀 더 타협적인 방향을 가고 있다.
특히 이인영을 비롯한 오영식, 송갑석, 임종석과
같은 과거 전대협 의장들은 석방된 후
학생시절의 NL노선에서 이탈하여 현실정치에
뛰어들며
사회적으로는 인권친화적이지만,
경제적으로는 리버럴 자유주의 노선을
보이고 있기도 하다.
현재의 북한 정권은 절대 좌파계열의
사회주의/공산주의가 아닌 김씨왕조국가,
즉 세습국가로 북한 내에서도 좌파라는 단어는
부정적인 언어로 사용되는 것이 사실이다.
2009년에 새로 헌법을 개정하며 헌법에
명시한 공산주의, 마르크스-레닌주의라는
구절을 아예 삭제한 전체주의 국가일 뿐이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대한민국 우파 세력인
국민의힘당(구 자유한국당)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우파 세력인
조선노동당의 서로 적대시함으로써
공생관계를 계속 유지할 뿐인 것이다.
'종북좌파' 라는 공포스러운 단어 역시도
결국 지금 와선 과거 쿠데타 반란군 독재
정권를 합리화 시키고 숭배하며,
자신들을 보수라고 자칭하면서 반대하는
자들에게 뒤집어 씌우는 폭력적인 의미로,
그러한 무식한 색깔론 프로파간다를
일반 국민들에게 아직까지도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김일성x김정일x김정은 왕조인 ..
가짜 공산/사회주의 주체사상과 ..
그것을 아직까지도 좌파라고 선동하며..
유신 독재 반란군 수장을 섬기는
가짜 자유민주주의..
그 둘의 연대를 타파하는 의미를 되새기며...
위의 명단에 있는 자들이 어떤 과거와
행보를 보였는지는 아래 자세히 나열되어
있습니다.
제1탄. 과거 유신 시대 당시
민주화/운동권/노동운동 출신 인사 모음
1 안병직
경남 함안군 출신으로 부산공고와
서울대 경제학과를 거쳤고,
1960년에 터진 4.19 혁명 이후
마르크스 경제학에 심취해 마오쩌둥의
이론을 참고하여 한국사회 성격을
'식민지 반봉건사회'로 인식하고
'식민지 반봉건사회론'를 저술해
한국경제를 미국과 일본의 식민지와
다를 바 없다는 주장을 설파하며
훗날 민족해방(NL) 운동권에 많은 영향을
주었던 인물이다.
하지만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의 사망 이후
1980년대 한국경제의 몰락은커녕 한국경제의
발전을 보면서 기존 이념과 이론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하였고,
이후 자본주의 성립과 각 나라의 경제발전에
관한 이론에 관한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러면서 과거 일제 식민지 시대를 새롭게
해석하며
기존 국사학계의 저항과 침략의 이분법적
시각으로는 그 시대의 변화상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으며 자본주의와 시장경제,
근대적인 제도와 요소들이 해방 이후
갑자기 떨어진 것이 아니라
일제 시기 형성된 것들이 있다며
이를 외면하는 것은 식민지라는 아픔 때문에
우리 역사가 창조한 것을 외면하는 것이라고
비판하며 극우적인 입장으로 전향하였다.
진짜 건국은 1948년의 것이다이라는 망언을
쏟아내며 극우를 넘어서 친일·매국적인 발언들로
연신 논란으로 결국 대북인식과 대미인식에
구체적인 차별성을 발견하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2006년 뉴라이트 진영의 사상이론지로
재창간 된 <계간 시대정신>의 발행인으로
취임되었고 2008년에는 '사단법인 시대정신'
이라는 이름으로 자유주의연대와
뉴라이트 재단이 통합되며 이사장을
맡게 되었다.
이후로도 북한정권에 대한 비판은 물론,
대한민국 극우화의 온 힘을 쏟게 되는데,
기존의 역사 교과서가 좌편향 되었다고 주장하며,
친일·독재정권을 미화하며 왜곡한 역사와 오류
투성인 뉴라이트 교과서를 국정화해야한다면서
그의 제자이자 뉴라이트 학자인 이영훈
등이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집필에
참여하였다.
2 이인호
일제 강점기 시절 경성부(서울)출신으로
1955년 서울대 사학과에 입학하였고,
재학 중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웰즐리 대학교
학사 과정을 수료하였고, 레드클리프 대학교에서
소련지역연구, 1967년 하버드대 서양사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1972년 귀국하였다.
1979년부터 서울대 인문대학 서양사학과
교수를 맡게 되는데, 상당히 좌파적인 성향으로
당시 한국에서는 생소하면서 금지시되었던
러시아 역사연구 분야를 개척하고,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혁명에 관한
이론을 학내에서 크게 전파하며
훗날 서울대 및 학생 운동권의 기본 발판을
가꾸어 주었다.
80년대 학생 운동이 굉장히 치열할 시기,
러시아 혁명과 인텔리겐차의 역할에 대해 강의를
하면서 학생들의 인기를 끌었고,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계열 역사학자이자
에릭 홉스봄을 초청해 강연회를 열기도 하였다.
1986년 박원순 변호사가 초대 이사장을 맡으며
역사인식의 심화와 대중화를 통해 한국사회의
민주화에 기여한다는 취지하에 설립된
'역사문제연구소'에 강만길, 김진균, 이만열 등
대표적인 진보 학자들과 함께 자문위원으로
참여했다.
1989년에는 서울대 러시아연구소를 창립하여,
초대 소장을 역임하며 수많은 후학들을
육성하기도 하였다.
민주화가 다가오고 90년대 중반에 들어서며,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대사로서 주 핀란드
대사 및 주 러시아 대사에 봉직하였고
2005년 그의 할아버지
이명세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면서
점점 다른 행보를 보이기 시작한다.
2006년 뉴라이트 계열 단체 교과서포럼에
이름을 올렸고,
그 다음 해 건국절을 제정하여 기념하자는
'건국60주년 기념사업준비위원회'의
공동준비위원장을 지냈고,
백범 김구 선생에 대해 '대한민국 체제에
반대한 사람'이라고 발언하였다.
박근혜 정권이 들어서며 극우적인 행보는
더욱 극심해지는데, 친일미화 역사왜곡으로
논란이 컸던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를 지지하고
국무총리 후보로 지명되었던 문창극의 친일극우적
교회 강연에 대해 감동받았다고 말하면서
이를 두고 반민족이라고 하면 제정신이
아닌 마녀사냥이라고 발언하였다.
이인호의 이런 행보 때문에 2014년 8월에
이인호가 KBS 이사장 후보에 내정된 것에 대해
전국언론노조, 민주언론시민연합,
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등의
시민단체들을 포함하여 KBS 노동조합에서도
적극적으로 반대의사를 표했지만,
2014년부터 KBS 이사장에 역임되어 박근혜가
국정농단으로 탄핵됬음에도 굴하지 않고
편파·불공정 방송을 주도하였다.
3 김동길
일제 강점기 시절 평안남도 맹산 출신으로
1951년 연희대(연세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한 후 미국 으로 유학을 떠나
보스턴 대학에서 링컨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귀국하여 1961년부터
연세대 교수를 지냈다.
교수 시절 그는 사회를 풍자하는 식의 강연으로
부패정치를 비판하다 조사를 받고,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고,
박정희가 집권하며 유신정권을 펼치자
함석헌 신부가 발행하던 『씨알의 소리』라는
잡지에 《내가 만약 대통령이 된다면》이라는
수필을 발표, 대통령이 된다면 부모도 섬기지도
않던 놈들이 청와대에 가서 아부하며
각하 각하 하는 것들을 모두 잡아다가
서해의 무인도에 보내 아첨도라 하겠다고
비판하면서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어
고문을 받기도 하였다.
1974년 불온세력의 조종을 받아 국가를
전복시켜 공산정권 수립을 추진했다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민청학련)에
연루되며 내란선동 혐의로 구속되었고,
유죄판결을 받아 중형에 쳐해졌으나
1975년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1975년 독립운동가이자 일명 재야대통령이라
불렸던 장준하 선생 장례식을 주관하며
추도사를 낭독하였고,
1980년 신군부가 또다시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자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는 등 소위 '정치교수'로
불리며 학원 자유화에 앞장섰다.
현실 정치를 비판하던 그는
1991년 새한당을 창당한 뒤, 정주영이
대선에 참여하기 위하여 만든 보수 성향의
야당 통일국민당에 합류했고 1992년
총재에 선출되었다.
이후 제14대 총선에서 당선되고,
1995년 당이 자유민주연합에 흡수되면서
자유민주연합 소속이 되는데,
현실 정치계에 들어서며 과거 군사독재정권을
신랄하게 비판하던 이력과는 정반대로 강경한
우파 성향을 나타내었고,
국민행동본부, 반핵반김국민협의회 등의
수구반공·반북 시민단체 원로로 활동하면서
김정일의 북한 정권과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동일시하여 극우적 행보를 보였다.
또한 과거 시절 그렇게나
이승만·박정희 독재 정권에
의해 수차례 고문당하고,
여러번 수감생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승만과 박정희를 민족중흥의 영웅으로
치켜세우는 행보를 보이게 되었다.
2009년 4월 노무현의 뇌물 수수설이
터지면서, 김동길은 대국민 사과 차원에서
자살하라고 진지한 드립을 쳤고,
실제로 5월 노무현 전 대통령이 투신 자살하자,
국민장이 아닌 가족장을 했어야 한다면서
이명박 정부를 비판, 방송 3사가 그를 순교자로
만든다고 비판하면서 독재를 비판하며 민주화를
위해 싸웠던 과거 이력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대한민국 극우계의 원로로만 남아있다.
4 김진홍
경북 청송군 출신으로
1960년 계명대 철학과 재학 후 1971년
서울특별시 청계천에 활빈교회를 설립하고,
빈민선교와 사회사업을 펼치며 목회 활동과
민중들을 위한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고,
1974년 당시 박정희의 유신 체제에 반대하는
시위를 주도했다가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이후 당시 청계천 빈민·거주민들과 함께
경기도 남양만으로 집단 이주하여,
1979년 두레공동체를 설립하는 등
재야계의 사회 운동가로 이름을
알리게 되지만..
90년대에 들어서며 그의 정치적·사회적
성향은 바뀌게 되면서 2000년대 이후로는
뉴라이트 운동에 가담하면서 뉴라이트
전국연합을 창설한 후 상임의장으로서
기독교 우파 계열과 연대하여 극우-보수
운동을 주도하였다.
이명박 대통령을 지지하다가 이후
박근혜 대통령을 지지하면서 보수 정치목사로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젔다.
한편 두레교회 운영을 두고 성도들과 갈등을
빚어 한 장로에게 폭행 당하기도 했고,
각종 횡령건으로 고발을 당하기도 하면서
두레교회에 손을 뗀 것으로 보인다.
5 조갑제
일본 사이타마 현에서 태어나 해방 후 가족들과 함께 귀국하였다. 1971년부터 부산 국제신보(국제신문)에 입사하여 기자 생활을 시작하였고, 당시 박정희를 비판하는 글을 자신만큼 많이 쓴 사람이 없다며, 사회부 기자로서 권력에 쓰러져가는 사람들, 고문 받는 사람들, 억울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쫓아다니면서 기사를 썼다. 이 과정에서 박정희 정부를 비판하다 두 차례 강제해직 당했고 또한,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취재를 자청했던 것이 주요 동기로 신군부에 의해 해직되었다. 특히 이 광주민주화운동 취재는 1985년 양대 월간지에 보도를 내놓기 시작하면서 이 보도는 큰 반향을 불러일으켜 노태우 정부가 들어선 다음인 1988년, 국회에서 광주특위와 5공특위가 열리게 한 기초자료가 되었다. 1987년 6월에는 민주화 운동의 선봉에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1991년부터 월간조선의 편집장을 역임하면서 북한과 화해 정책을 폈던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비판하면서 더욱더 보수적 성향 논객으로 활동하게 되었고, 과거 젊은 시절 비판했었던 박정희 군사독재정권과 신군부정권에 대해 재평가를 하면서 2001년부터는 월간조선의 대표이사로 재임되기도 하였다. 2000년대에 들어서며 개인 홈페이지 겸 출판사인 조갑제닷컴을 운영하면서 좌익 인사들과 얼치기(?) 우파 세력을 비판하는 글과 독재정권 찬양 및 친일미화적인 글들을 주로 쓰며 친일극우 재단 뉴라이트의 원로 언론인으로서 자리잡고 있으나, 일부 수구보수계열의 '5.18 광주 민주화운동 북한군 투입설'이나 '4.19혁명부터 6월 항쟁까지의 모든 반정권 시위를 국가반란좌빨시위설'이라는 주장들을 모두 부정하고 잘못된 사실이라고 주장하면서, 같은 뉴라이트 재단의 언론인 지만원과는 좀 더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6 한광옥
전북 전주 출신으로 서울 중동고를 졸업 후 서울대 문리과대학 영어영문학과에 재학 중 학생 운동권에 속해 6.3 항쟁에 참여하면서 제적당하였다. 이후 신민당에 입당하여 박정희의 3선 개헌 반대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며 반유신 성향을 뚜렷히 보였고, 1978년 신도환 최고위원의 보좌역으로 활동하였다. 1981년 제11대 총선에서 민주한국당 후보로 당선되었고, 비록 민정당의 2중대로 불리던 구색정당 민주한국당 소속이었지만, 1982년 국회에서 정치보복 중단 및 김대중 석방, 광주사태 진상 규명을 외치면서 야당 정치인으로 유명세를 탔다. 1985년에는 고려대학교 앞 시위 선동 사건으로 기소되어 유치장 신세를 지기도 하였고 그 다음 해에는 민주화추진협의회 대변인을 역임하여 신군부 독재정권에 대항하며 민주화를 외치게 되었고, 6월 항쟁 이후 1988년 평화민주당 후보로 제13대 총선에서 재선하였다.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며 김대중 대통령의 대통령비서실장을 역임하고 새천년민주당의 대표최고위원이 되는 등 동교동계 민주당의 주요 인사로 지내다가, 2012년 뜬금없이 제18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새누리당에 입당하여 같은 DJ의 동교동계 인사였던 김경재와 한화갑과 함께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를 지지하였다. 박근혜 정부 시절 국민대통합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되었고, 2016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자 대통령비서실장으로 발탁되었다. 그리고 역시나 뜬금없이 박정희 100주년 기념사업 고문을 맡으며 친박다운 친박으로, 보수우파다운 보수우파로 과거 이력과는 정반대의 길을 걷게 되었고, 과거 동교동계 김대중 대통령의 최측근이었던 인사였기에 더욱 더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게 되었디.
7 이재오
강원 강릉 출신으로 이후 경북에서 성장하다, 1964년 농촌운동가를 꿈꾸며 중앙대 농촌사회개발학과에 입학하게 되는데, 박정희의 굴욕적인 한일협정을 반대하는 6.3 항쟁을 주도한 혐의로 구속되어 제적당하였다. 이후 다시 중앙대 경제학과에 복학하였고, 졸업 후 국어교사를 재직하면서, 재야계 인사들과 함께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결성하며 재야청년단체의 효시인 민주수호청년협의회의 2대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김수환 추기경으로부터 경북가톨릭농민회 기도회에서 인권 문제를 강연해달라고 요청을 받아 특강을 했는데, 긴급조치 9반 위반으로 구속되었고 이후에도 민주주의와 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그의 노력은 독재정권 아래서 잦은 구형 생활로 이어졌다.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민족통일위원장으로 활동했고, 6월 항쟁 당시에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상임 집행위원으로 항쟁을 주도했으며, 군정종식 후보단일화 쟁취 국민협의회(국협)을 결성하고 후보단일화 운동에 나섰다. 그는 이후 1989년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조국통일위원장을 거친 후 진보정당을 창당하기 위해 민주연합추진위원회(민연추)를 결성하나 이부영을 지지하는 세력과 분열하며 1990년 김문수, 장기표 등과 함께 민중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하지만 14대 총선에서 낙선하고 보안사로부터 사찰 대상으로 감시당하면서 현실정치의 벽을 넘지 못했다.
1994년 당시 김대중의 동교동계는 민족해방계 학생운동가들을 '젊은피 수혈'이라는 명목으로 영입하기 시작했고 이에 자극을 받은 김영삼은 민주계 재야인사들을 대거 민주자유당에 영입시켰다. 이재오 역시 민자당에 영입되면서 15대 총선에서 처음으로 국회에 입성하고 이후 5선을 역임하게 되는 보수정당의 기둥같은 역할이 되어버린다. 전향 이후 민주자유당, 신한국당, 한나라당으로 이어지는 정치역정에 대한 비판과 논란이 계속되자 그는 2003년 인터뷰를 통해 자신은 여전히 진보주의자라고 말하며 16대 국회때 보수나 진보를 떠나서 권력의 부패와 맞서는 야당으로서 한나라당의 입지를 굳히는데 기여했고, 국가경영에서 건전한 진보주의자가 건전한 보수와 함께 나가야만 우리 시대의 과제인 분단을 극복할 수 있다라고 해명하였다. 친이명박계의 좌장으로서 이명박의 당선을 앞장서서 도왔지만, 18대 총선에서 낙선 후 미국 연수를 떠나 객원 교수로 활동하였다. 이후에도 총선 출마 선언을 하지만 친이계 시절 친박계와 다툼을 자주 벌인 까닭에 공천조차 받지 못하고, 결국 새누리당 복당 역시도 진행하지 않고 '늘푸른한국당'이라는 중도신당을 창당하였다. 2017년 대선후보로 출마하였지만, 진보계에서나 나올 법한 통일관들로 발표하면서 극우인사들에게 종북빨갱이라는 취급을 당하면서 당연히 낙선하였다.
8 김문수
경북 영천군 출신으로 서울대 경영학과에 입학하며, 당시 극좌파 계열의 운동권에 투신하게 된다. 당시에는 아직 사회구성체 논쟁이 나오기도 전이었는데, 그는 대학 내 모임인 후진국 사회연구원에 가입하여 활동하였고, 김근태와 함께 구로 공단 노동자로 위장취업하여 한국 노동계의 현실을 직접적으로 체험하였다. 1971년 10월 15일에 부정부패척결 전국학생시위 관련해 제적되었고, 1971년부터 72년까지 고향 경북 영천에서 4H운동, 야학 등 농민운동을 했으며, 1974년에는 불온세력의 조종을 받아 국가를 전복시키고 공산정권 수립을 추진했다는 혐의로 구속·기소된 민청학련 사건과 관련하여 또다시 제적되었다. 제적 후 청계천 피복공장에서 근무하며 여러 국가기술자격을 취득하기도 하였으며 1978년 전국금속노동조합 한일도루코 노조위원장을 맡게 되었지만,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의 여파로 회사는 노조해산 정책을 추진하면서 그는 노동조합 위원장직을 그만두게 되고, 회사에서도 해고당하였다. 이후 구로동맹파업에도 참여하여, 경찰에게 체포되었고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가 고문을 받은 후 구속되어 서대문구치소로 이감되었다. 수감 중 기소유예로 석방되어 한일도루코에 다시 복직하였고, 1984년 방용석과 함께 '한국노동자복지회'를 조직 그 다음 해에는 전태일 기념 사업회 사무국장을 지내며, 전태일의 모친 이소선과도 교류하였다.
1985년 서울지역노동운동연합(서노련)이 출범하자, 현재 정의당 소속의 심상정과 함께 지도위원 등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고 그 다음 해 1986년 인천에서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요구했던 민주화 투쟁 '인천 5.3운동'으로 체포되어 또다시 혹독한 고문 끝에 2년 6개월형을 선고받고는 1988년 특별사면을 받고 풀려났다. 복역 후 그는 공산주의권 국가들의 몰락을 지켜보면서 성장에 자원을 집중하되 복지도 함께 따라가야 한다는 견해를 피력하며 '좌파적 노동관'을 버리고 온건론으로 노선을 선회하였고, 1990년 민중당 창당에 참여하여 구로갑지구당 위원장을 지내며 정계에 입문하게 되었다.
1992년에는 노동인권회관의 소장으로 추천되고, 한국노동연구원 현대자동차 노사관계진단팀장에 임명되기도 하였는데, 별안간 1994년 "혁명의 시대는 갔다"라는 말을 남기고 과거 유신세력과 5공 신군부세력, 그리고 통합을 주장하는 민주화인사들로 뭉친 우파정당 '민주자유당'에 입당하게 되었다. 입당 이후 현실주의를 내세운 노동자 권익 향상을 추진하기도 하였지만, 신한국당을 거쳐 한나라당 등 우파정당의 주요 일원으로 국회의원과 경기도지사를 연이어 맡았다. 경기도지사 시절 무상급식에 대해 포퓰리즘이고 학교는 무료급식소가 아니라는 발언과 함께 경기도 교육위원회에서 무료급식 예산 650억 삭감한 사실을 두둔하였고, 우리나라가 일제 식민지가 안되고 전쟁이 없었고 통일이 되었더라면 오늘의 대한민국이 없었을 거라는 발언들을 내뱉으면서 큰 논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또한 119에 전화하여 자신이 도지사라면서 관등성명 안 대냐는 큰 이슈 및 과거 자신을 그렇게도 억압했던 박정희 정권의 독재 통치를 업적이라고 치켜 세우기도 하였다. 2016년 제20대 총선에서 낙선 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사태가 터지자 처음에는 비박계 의원들과 함께 탄핵을 주장하였지만, 2017년이 되자 그나마 멀쩡했고 일 잘하던 경기도지사 김문수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자유한국당에 잔류하면서 뜬금없는 탄핵 반대 집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박근혜가 억울하게 탄핵당했다는 발언과 함께 태극기를 들고 극우 간신배로 타락해버렸다.
과거 노동·민주화 운동을 함께 했던 동지들 유시민이나 이해찬, 심상정은 그의 타락한 행보에 대해 실망 그 이상으로 정신적인 문제가 있을 것이라는 농담 아닌 농담식으로 해석하기도 하였다.
9 손학규
경기 시흥 출신으로 1962년 경기고에 입학한 손학규는 3학년 무렵 대학생들과 함께 시청 앞 국회의사당에서 한일협정 반대투쟁에 참가하였고 1965년 서울대 정치학과에 입학한 후 한일협정 반대투쟁에 참여하는 등 시인 김지하, 김정남, 김도현, 이현배, 허현 등의 선배들과 활동하며 당시 반정권 학생운동의 중심에 섰다. 대학 2학년 무렵 삼성그룹의 사카린 밀수 사건 규탄 시위에 참여했다가 무기 정학을 받게 되면서 강원도 함백탄광에서 광부 노동자들과 함께 일하였고, 나중에 복학한 그는 전태일 평전을 쓴 조영래 변호사, 김근태 전 민주통합당 상임고문과 더불어 서울대 삼총사로 불리며 학생운동과 또다시 주도하였다. 졸업 이후 노동운동에 참여하다 박정희 정권의 탄압을 받으며 수차례 옥고를 치렀고, 1979년 부마민주항쟁 진상 조사를 위해 활동하다가 다시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해 죽기 직전까지 갔으나, 박정희가 저격당하면서 가까스러 풀려날 수 있었다. 1980년 그의 노동운동을 후원하던 NCCK의 도움을 받아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로 유학을 떠나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고, 1987년 귀국하여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소 원장이 되어 시민사회운동가로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1988년 인하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1990년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민주화운동, 노동운동 등 경험을 토대로 한 진보적 학자로 자리잡게 되었다.
1993년 김영삼의 제안으로 민주자유당에 입당하였고, 같은 해 상반기 재보궐선거에서 광명시 국회의원에 당선되며 국회에 입성하였다. 이후 경기도지사까지 지내며 이명박, 박근혜와 함께 한나라당의 유력 대선 후보로 떠올랐다. 하지만 당내 개혁파로 불리우던 손학규는 입지가 줄어들면서 제17대 대선을 앞두고 한나라당을 탈당한 후, 김대중의 지지를 받으며 대통합민주신당 창당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막상 대통합민주신당에서는 당내 경쟁자들로부터 출신을 이유로 공격받았고, 대권 후보 경선에서는 낮은 지지율로 정동영에게 패배하였고 이후 통합민주당 초대 당대표가 되었고 2011년 재보궐선거를 통해 다시 국회에 입성하였으나, 2014년 재보궐선거에서 새정치민주연합 후보로 낙선되며 정계 은퇴를 선언하였다.
그러나 칩거하면서도 꾸준히 정치판을 기웃거렸고, 국민의당의 끈질긴 구애에 2016년 나라를 구하는데 자신의 목숨을 던지겠다며 정계 복귀성 발언과 만덕산이 내려가라 한다라고 발언하며 공식적인 정계 복귀와 함께 더불어민주당 탈당을 선언했다. 하지만 정계 복귀한지 일주일도 안지난 24일에 최순실의 태블릿 보도가 터지고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본격화되면서 손학규의 정계 복귀는 대중의 관심에서 묻혀버리고 이후 국민의당에 입당하여 대권에 도전하게 되고, 결국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는 안철수에 밀려 또다시 참패하였다.
10 김덕룡
전북 익산군 출신으로 경복고를 졸업 후 서울대 문리과대학 사회학과에 입학하여 재학 중 총학생회장으로 1965년 3월 당시 재야계 및 야당과 사회, 종교, 문화 단체들이 모두 연대하여 대일굴욕반대 범국민 투쟁위원회를 결성하였는데 김덕룡은 '대일굴욕외교반대 서울대투쟁위원장을 맡았다. 5월 30일 김덕룡은 "오늘의 단식투쟁은 내일의 피의 투쟁이 될 지도 모른다"라는 선언문을 낭독하고, 서울대 학생들과 교정에서 자유쟁취궐기대회를 열어 한일회담 성토와 박정희 정권 성토식을 한 다음 단식 농성에 들어갔다. 시간이 흐를수록 단식농성에 참여하는 학생들 수가 점점 늘어갔고, 무저항적인 학생들의 농성 현장에는 교수들과 시민들이 줄을 이어 찾아와 그들을 격려하고 먹을 것을 놓고 갔으며, 당시 야당과 재야계를 대표하는 윤보선과 함석헌은 함께 농성현장을 찾아가기도 하였다. 6월 3일 이에 반대하는 대대적인 시위였던 일명 6.3 항쟁에 참여하였지만, 박정희는 계엄령을 선포하여 결국 모두 주요 간부들이 대거 검거되면서 김덕룡 역시도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투옥되었다.
이후 1970년 신민당 국회의원 김영삼의 비서로 발탁되어 정계에 입문하였지만, 1972년 10월 유신 체제가 구축되면서 유신 정권하에서 여러 차례 투옥되었고 5공 정권이 들어와서는 정치활동이 금지당하는 등 독재 정권으로부터 김영삼의 측근으로 꾸준히 정치탄압을 받았다. 그리고 1987년 6월 항쟁 이후로 정치활동 규제에서 해제되면서 1988년 13대 총선에서 통일민주당 후보로 서울 서초구 선거구에 당선되었고 그 뒤 연이은 5선 의원으로 명성으로 떨치게 되었다. 1990년 과거 유신 정권 세력과 전두환 및 노태우 신군부 세력, 그리고 김영삼이 대통합이라는 명목으로 3당합당을 하면서 민주자유당을 창당하는데 가담하였고, 국회 입성 후에도 김영삼의 측근으로 계속적으로 활동하였다. 2000년에 들어 한나라당의 원내대표로 선출되는 등 보수정당의 핵심 의원으로 자리잡으며 대학시절 6.3항쟁을 함께 주도했었던 이명박을 지지하였고 대통령 국민통합특별보좌관이라는 직책에도 앉게 되었다. 그러나 2017년 19대 대선에서 여러 상도동계 인사들과 함께 문재인 후보를 지지하였고, 문재인 정권이 들어서면서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으로 내정되는 또다른 행보를 걷게 되었다.
11 이명박(조차도 학생 운동권 이었음..)
일본 오사카 출생으로 해방 후, 가족들과 함께 한국으로 귀국하여 경북 포항에서 살게 되었고, 낮에는 일당노동자로 일하고 밤에는 합숙소에서 공부를 하면서 1961년 고려대 경영학과에 입학하였다. 대학 입학 후에도 새벽에 일어나 일당직 일을 하며 지내다, 3학년 때 복학 후 상과대 학생회장에 선출되었고, 졸업을 앞둔 1964년에는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장 직무대행으로 학생운동을 주도하였다. 당시 최대 화두였던 박정희 정권의 굴욕적인 한일 국교 정상화에 반대하며, 6.3 항쟁 시위를 주도하였고 계엄령 하에 수배령이 뜨면서 자수하여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서울교도소에 수감되었지만 6개월 뒤 풀려났고 이후에는 현대건설에 취직하여 승승장구를 달렸고 입사 13년차인 1977년 35세의 나이로 현대건설의 사장이 되었으며, 1988년에는 회장에 올랐다. 40대에 대기업 회장이 된 이명박의 성공 스토리는 1989년 KBS 2TV에서《야망의 세월》이란 제목으로 드라마화 되었고 이명박 역을 맡은 유인촌은 훗날 이명박 정권 아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에 역임되어 "찍지마 씨발, 승질 뻗쳐서 증말"이라는 명대사와 논란거리를 대거 생산해내기도 하였다.
1992년 민주자유당에 전국구의원으로 당선되며 정계에 입문하였고 이후 1997년 선거법 위반으로 고소되어 그 다음해 항소심에서 벌금 400만원 형이 선고되며 피선거권이 박탈당했으나, 2000년 광복절 특사로 사면복권되면서 2002년에는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어 청계천을 복원하였다. 그 이후 BBK 주각 조작 사건에 연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7대 대선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4대강 사업을 강행하면서 결과적으로 치우기 힘든 거대한 똥을 생산하는 일을 초래해버렸다. 퇴임 후 새누리당 권리당원으로 월 2000원 당비를 매달 납부해야 하는데, 2014년 연이어 납부가 되지 않아 일반당원으로 강등당하여 전당대회에서 투표권을 박탈당했고,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면서 2017년 새누리당을 탈당하였다.
12 이인제
충남 논산 출신으로 서울대학교 행정학과를 졸업 이후 유신 반대운동에 뛰어들었다가 수사기관에 불려가 모진 고초를 겪고 군에 징집되어 육군 병장으로 만기 전역했다. 이후 1979년 제21회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1981년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임용되어 1983년까지 약3년간 재직하였고 1983년에는 변호사로 활동하며 노동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다가 김영삼의 소개로 1987년 정계에 입문하였다. 1988년 통일민주당 소속으로 13대 총선에서 국회의원이 되면서 현재까지 총 7선 의원을 기록하였고, 민주당에서 새누리당(자유한국당)까지 여야를 넘나드는 엄청난 당적변경으로 한국 현대사의 기록을 갱신하며 철세 따위를 넘어선 '피닉제'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민주인사들을 통하며 정계에 입문하고 정치를 해왔지만, 현재는 뜬금없이 탄핵소추안을 반대했던 친박계에 속해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진 상황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을 반대하는 혁신과 통합 보수연합의 공동대표를 역임하고 국정 교과서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지 않는 입장을 밝혔고, 심지어 박근혜 대통령 탄핵 반대 집회(자칭 태극기 집회)에도 참가하였다.
19대 대선 자유한국당 경선에 참여하였지만 총 3위(14.85%)로 총 4번에 대권 도전에서 낙오된 이후 탈당은 안하고 잔류하여 자유한국당 공동 중앙선대위원장으로 선출되어 후보로 추대된 홍준표의 선거운동을 돕게 되었다. 경선 탈락에 승복하여 자신을 경선에서 이긴 후보자의 선거 운동을 돕는 경우는 이인제의 30여년 정치 인생에서는 처음이다.
13 인명진 목사
충남 당진에서 태어나, 재야 활동가들의 무대였던 해방신학에 기초한 도시산업선교회에서 활동하고 1972년부터는선교회의 총무로 활동하였다. 독재 정권 아래 노동운동, 민주화운동 등의 이유로 4차례 투옥되었고, 한 차례는 국외 추방된 경력을 갖게 되기도 하였다. 장로회신학대의 석사 과정을 거쳐 샌프란시스코신학교 신학대학원 박사 과정을 수료하면서 1986년 갈릴리교회 목사를 맡아 목회자로서의 길을 걷지만, 계속해서 유신독재에 반대하며 민주화·노동 운동에 더 집중하였다. 1987년 반독재 연합전선인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의 대변인을 맡아 6월 항쟁을 성공적으로 이끄는데 역할을 하였고, 1989년에는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창립 멤버로 참여하였다.
1987년 제13대 대선을 앞두고 김영삼과 김대중과의 단일화 논쟁에서, 김영삼으로의 단일화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가졌고, 훗날 인터뷰에서 "YS가 먼저 하고 그 다음 DJ가 하는 패키지를 만들었다. 뒤에 할 사람은 70% 지분을 갖고 당을 장악하도록 했다. 그렇게 해서 민주화세력의 10년 집권 플랜을 만들었다"며 당시 상황을 언급했다. 그러나 2006년 한나라당 윤리위원장을 지낸 이후 정치권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으나, 2016년 12월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임명되면서 과거 민주화를 위해 투쟁했던 이미지보다 새누리당 내 주요 인사로 사람들에게 각인되기 시작하였다. 새누리당 내에서 비박계 핵심인사로 자리잡으며, 박근혜 정권이 국정교과서 추진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비판하고 최순실과의 게이트가 터지자 친박계 좌장 의원이던 서청원과 극렬한 대립관계를 가졌지만, 경실련에서는 창립 멤버였던 인명진을 윤리행동강령 위반의 이유로 영구제명 조치를 내렸다. 그는 2017년 3월까지 자유한국당 비상대책위원장을 맡고 사퇴하였다.
14 정진석
충남 공주 출신으로 성동고등학교 학생회장 시절, 미국 지미 카터 행정부의 정보기관이 청와대를 도청한 사실로 인해 온 국민이 궐기에 나서자 재학생들을 이끌고 신당동 로터리까지 진출하는 '고교 반미 시위'를 주도했다고 한다. 그 이후 한국일보에 입사하여 기자생활을 하다, 민주공화당에서 민주정의당, 민주자유당, 자유민주연합에 연이어 소속 의원이었던 부친 정석모의 지역구 충남 공주시-연기군을 물려받아 제16대 총선에서 자유민주연합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며 정계에 입문하였다. 이후 한나라당으로 당적을 바꾸며 총 4선 의원을 역임하고, 현재는 자유한국당의 중진의원으로 자신들을 비난하는 국민들에게 '홍위병','좌파좀비'라는 막말을 선보이며 논란을 일으켰다.
15 홍준표..?
그의 자서전 <변방>을 본다면 그도 사실 유신정권 당시 박정희 독재와 강압적이고 불균형한 사회에 부당하다고 말하는 학생 운동권이었다. 글재주가 있어 여러차례 총학생회 지하유인물을 작성해주다,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심각한 구타를 당하게 되었고, 자신만 바라보는 어머니 때문에 성북경찰서에서 풀려나자마자 고시공부를 하러 절에 들어가 그 사회의 꼭대기로 올라가려고 그 열망을 노력으로 그리고 커다란 욕심으로 키워낸 것이 그의 청년 시절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알다시피 현재의 아내와 24살부터 동거하게 되었고, 체중미달로 17개월 방위병을 수료한 후, 5년 뒤 1982년 사법시험에 합격하며 마침내 결혼하였다. 그 후 그는 검사계의 스타로 떠올랐고 정계로 들어와 승승장구하여 현재의 홍준표가되었다.
제2탄. 386 세대 5공 시절 당시
민주화/주사파/운동권/노동운동가 출신 인사 모음
16 김영환
1985년 겨울에 '미제 간첩 박헌영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라는 팸플릿 하나로 관념적 논쟁에 지쳐 있었던 학생운동권을 강타한 <강철서신>의 저자로, 국내에 주체사상 이론을 처음으로 소개한 인물이다. 당시 '강철'이란 필명을 사용하였으며, 북의 대남방송과 일본 등을 통해서 얻은 주체사상 서적을 탐독한 자생적인 주체사상파(주사파)로 주사파 지하조직 운동을 계속하였다. 1991년 북에서 내려온 공작원과 접선하여, 반잠수정을 타고 밀입북하여 김일성을 만나고 조선로동당에 입당한 후에 공작금 20만 달러를 받아 돌아왔다. 이 공작금으로 서울대 82학번 동기인 하영옥과 박아무개와 함께 민주민족혁명당(민혁당)을 조직하여 학생운동과 통일운동을 이끌었다. ※80년대 인혁당 사건과는 전혀 다르다. 인혁당 사건은 당시 안기부(국정원)의 무고한 대학생들을 고문을 통해 강제적으로 간첩으로 조작하여 모두 사형으로 막을 내린 사법살인 사건으로 2013년이 되어서야 1,2차 인혁당 사건 모두 무죄로 확정되었다.
1991년 김일성을 만났을 때부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김일성을 두번 만났는데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된 주체사상도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라는 주장과 함께 북한 체제에 대한 의구심과 1994년 이후 북한 경제의 최악의 파탄 그 자체였던 일명 '고난의 행군'을 보면서 주체사상에 회의감을 가지게 되었고,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서도 주체사상에 대한 회의감을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으며, 결국 1997년이 되어서는 지도부 투표를 거쳐 민혁당을 해체하고 주사파 활동을 공식적으로 중단을 선언하였다. 그리하여 1998년 진보 월간지였던 <말> 5월호에 <북한 수령론은 완전한 허구이자 사기극>이라는 글을 기고하고, 훗날 뉴라이트 운동의 토대가 되는 잡지 <시대정신>을 창간하였다.그러나 북한 공작원과 접촉한 하영옥은 조직을 재건하며 계속 활동하면서 1999년 국가정보원에 검거되면서 김영환 역시도 구속되었지만, 주체사상을 포기한다는 선언과 함께 '준법서약서'를 쓰고 공소보류로 풀려났다. 이후로는 극단적인 '반북극우' 성향으로 전향하여 북한전문 인터넷 신문인 <데일리NK>를 창립하고 주요 필진으로 활동하며 북한민주화운동에 전념하게 되었다.
17 이동호(李東湖)
미래한국 편집위원·前 전대협 연대사업국장
전북 정읍 출신으로 연세대 신학과에 입학하여 운동권에 투신하며 1981년 특전사를 만기 제대한 후 1988년부터 서울지역총학생회연합(서총련) 및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연대사업국장을 역임하며 NL 주사파 계열로서 군부정권타도·반미제국주의·민족통일운동이라는 좌파 아닌 좌파의 선봉에 서게 되었다.
하지만 졸업 후 주체사상과 전혀 다른 북한의 실상을 알게 되면서 정치적 성향을 극단적으로 반대로 가게 되었고 2003년 북한민주화포럼 사무총장을 역임하고 뉴라이트의 전국 연합 조직 위원장을 역임하며 과거 운동권 출신 민주당 인사들에 대해 종북좌파 색깔론을 이용한 발언들과 함께 박정희와 이승만을 대한민국의 선구자와 같은 인물로 받들어야 한다는 식의 과거와는 전혀 상반대(혹은 김일성주의를 박정희주의로 바꾼 것 마냥)되는 행보를 걷게 되었다. 2012년 새누리당 지방선거대책위 실무기획단 팀장을 맡으며 박근혜 후보를 적극적으로 지지하였고, 2013년부터는 연세대 이승만연구원 객원연구원을 지내기도 하였다. 2014년 네이버 편집자문위원회 자문위원을 거쳐 2015년 『미래한국』편집위원을 맡고 있다.
18 신지호
서울 출생으로 경기고 졸업 후 1981년 연세대 경제학과에 입학하였고, 대학시절 NL계열 사회주의에 심취하게 되면서, 반독재·미제국주의 운동 및 노동운동 활동을 시작하였다. 인천지역 민주 노동자 연맹, 한국 사회주의 노동당 창당 준비위원회 울산지역 책임자, 진보정당 추진위 등에서 노회찬 등과 함께 활동을 하였는데 1991년 소련이 붕괴되고, 북한의 주체사상이 가짜 좌익사상이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그 다음 해 <당신은 아직도 혁명을 꿈꾸는가>, <고백> 등의 글을 통해 정치적 성향을 완전하게 전환하게 되었다. 일본 게이오기주쿠 대학으로 유학하여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2000년대 들어서며 '자유주의연대' 대표를 맡으며 극우적 성향의 뉴라이트 운동을 주도하게 된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며 2008년 제18대 총선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당선되면서 현실 정치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고, 당시 촛불집회에 대해 맹비난을 퍼붓으며 집회 시위에서 가면이나 마스크 등 복면 착용을 금지하는 법안을 국회에 제출하기도 하였다. 또한 군의문사위 폐지 법안 발의, 용산참사 당시 철거민연합을 '범죄집단','고의적 방화','테러행위'등으로 맹비난하는 등 의원 시절에도 종북몰이 색깔론들로 무장하였고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앞두고, 한나라당 후보로 나선 나경원 후보의 대변인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차기 서울시장에 관한 주제로 토론을 하던 100분 토론 방송에서 음주방송을 해서 구설수에 올랐고 대변인직을 사퇴했고, 잦은 실책들로 인해 이후 새누리당 공천에서 탈락하게 되면서 현실 정치계와는 멀어지게 되며 TBC 대구방송에서 활동하고 있다.
19 최홍재 386세대
전남 나주 출생으로 고려대 신문방송학과 87학번으로 고려대 총학생회장과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조국통일위원회 위원장 대행으로 활동하는 등 민족해방계열(NL) 학생운동 및 북한식 통일혁명을 추구하면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여러번 감옥생활을 하였다. 이후 북한의 현실을 알게 되었고 북한의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해 싸울 것이라고 선언하며 이후 뉴라이트로 전향하여 극우적 사상을 가지고 활동하다가 이명박 정부에서 MBC재단 방송문화진흥회 이사가 된 후 2012년 새누리당 서울특별시당 은평갑 당원협의회 위원장을 맡으며 정계에 입문했다. '세월호 점령군'이라는 발언이나 MBC 민영화 발언같은 극단적인 헤이트 스피치로 큰 논란이 되었고, 20대 총선에 새누리당 후보로 출마하였지만 참패당하고 만다.
20 홍진표 386세대
광주 출신으로 1996년까지 서울대학교 총학생회 사무국장을 역임하였고 이후 전민련조국통일위원회 부장, 범민련 간사, 자주평화통일민족회의 조직국장, 민족민주혁명당 당원 등 주사파 운동권에 핵심으로 활동하였다. 1983년 학내시위로 강제징집 된 이후 국가보안법, 집시법위반 등으로 세 차례 투옥되면서 1997년 이후 북한민주화운동으로 노선을 전환하여 1998년《시대정신》창간, 1999년 북한민주화네트워크 창립을 주도하였으며, 2004년 뉴라이트운동의 출발이 되었던 자유주의연대의 사무총장을 역임하였다. 2008년 말부터 사단법인 시대정신의 상근이사로 일하였고, 2010년부터 계간 시대정신의 편집인을 맡다가 2011년부터 2014년일까지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을 지내며 현재까지도 분명한 우익인사로 활동하고 있다.
21 허현준
1988년 전북대에 입학하여, 재학 중 총학생회장을 맡으며 학생운동에 투신하게 되는데 1990년대 들어서 한국대학생총학생회연합(한총련) 간부로 NL 주사파와 반미운동의 중심에 섰다. 극심한 반미주의자였기에, 커피와 콜라도 마시지 않았다고 전해지고 (사실 극우의 큰 축이기도 한 '민족주의'를 받아들이는 '좌파'라는 것은 애초부터 모순된 사상이자, 위험하기 짝이 없는 개념이기도 하다. 극과 극은 한 끝 차이라는 이를 두고 하는 말 같다.) 전북지역학생협의회 의장을 맡아 한총련을 이끌면서 시국관련 수배 명단에 오르기까지 하였다. 범청학련 사건과 서울대 범민족대회 사건에 연루되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두 차례 구속되었다.
그러나 민족자주통일·반미제국주의을 주장하며 직접적인 행동으로 옮겼던 그 역시도, 시간이 흘러 2004년 출범한 뉴라이트 계열 시민단체 자유주의연대에서 활동하였고, 2006년 친일미화·군부독재찬양을 내세우는 수구단체 뉴라이트 재단에서 일하게 되고, 그와 마찬가지로 과거 NL 주사파 수장들이 반북우파로 전향하며 제작한 단체이자 잡지인《시대정신》에서 사무국장을 맡게 되었다. 박근혜 정권이 들어서며 그는 소리소문없이 청와대 국민소통비서관실(선임 행정관)에 내정되었는데, 2016년 4월 언론을 통해서 어버이연합을 동원하여 세월호 유가족 단식농성 규탄 집회 등 관제 데모를 열게 했다는 의혹이 보도되었다. 또한 관제 데모를 연 대가로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로부터 지원금 5억여원을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는데, 이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및 김기춘 블랙리스트 등의 국정농단 사건과 맞물리면서 검찰 수사는 현재진행형 중이다.
22 하태경 386세대
1986년 서울대학교 자연과학대학 물리학과에 입학하고 전두환 집권기를 맞이하여 학생운동에 투신하였다. NLPDR 계열에서 적극으로 활동하였으며 범청학련(범민족청년학생연합) 결성을 주도하며 이끌었고 1991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강제징집 대신 징역 2년여의 실형을 살았다. 출소 후에는 목사 문익환이 범민련을 떠나서 새로 만든 통일운동단체인 <통일맞이>에 들어가 정책연구원으로 활동하였고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에서 북한을 탈출한 사람들을 돕다가 우익으로 전향하여 북한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2011년 한나라당에 입당했고 그 다음해 치뤄진 제19대 총선에서 새누리당 소속으로 국회에 입성하였다. 당에 입당 후 그는 대북 강경파를 대표할 정도로 전형이 될 만하거나 특징이 있는 사람으로 분류되고 있으며 북한 인권 문제를 두고 적극으로 발언하고 활동하였다. 그런 강경파 입장은 본인의 정치에 관계된 처지이지만 이게 지나쳐서 다른 정치인을 비난할 때 걸핏하면 종북 좌익이나 김정일에게 충성이니 북한에 아부한다고 비난하는 하는 특징이 있다. 주로 야당 인사들을 종북이라고 욕하는데 문재인이 북한을 상국으로 섬긴다고 비난하고 김제동 이재명 등을 종북/좌익이라면서 주로 비난하였다. 심지어 제18대 대통령 박근혜 탄핵에 앞장서면서는 박근혜가 김정일에게 보낸 편지가 공개되자 박근혜도 종북이라고 주장하는 등맞는 말 아님? 자기 편이 아니면 무조건 종북으로 몰아붙이는 식이다. 본인은 자신을 권위주의 시대의 보수 정치인과 다른 신세대 보수 정치인이라고 주장하지만 자신과 의견이 다른 정치인들을 주로 종북이니 좌익이라고 인신공격성 매도와 종북 몰이를 주무기로 쓰는 등 1950년대 좌익 사냥에 앞장섰던 아메리카합중국 조지프 매카시나 김창룡같은 구시대의, 중용을 잃고 한쪽으로 크게 치우친 친일파 기회주의자 출신의 반공주의자의 구태의연한 정치 행태를 그대로 노정한다. 당내에서 가장 강경한 보수 경향이 있는 처지에 있다고 스스로 밝혔고 자기보다 보수 경향이 있는 국회의원은 김진태 의원 뿐이라고 인정했다.
2016년 20대 총선에서 재선하였고, 5월 홍대 일베조형물 설치 사건 당시 조형물을 철거한 사람을 비난하며 "일베가 아닌 민주주의를 파괴한 것”이라는 처지를 밝히기도 하였고 세월호 유족들의 시위를 두고 대통령(박근혜)를 능욕하는, 헌법에 반대되는 행위라고 규정하는 등 박근혜의 세월호 책임을 부인하는 내용을 주장하였다. 또한 일베를 "청년 우파"로 부르면서 방법이 세련되지 못하기는 하지만 국민이 많이 지지할 만한 집단으로 찬양하는 등 '일베지킴이'라고 불릴 정도로 일베를 적극으로 옹호했다. 2016년 10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본격적으로 터지면서 본연의 친박골수보수 입장과는 달리 국정조사 청문회에서 강하게 추궁하며, 황교안 총리와는 국회에서 설전을 벌이기도 하였고, 촛불 집회 배후 세력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로동신문> 가짜 주작 자료들을 밝혀내기도 하였다. 청문회 후일담에서 자신이 왜 운동권 학생이었는데도 새누리당으로 가게 됐는지 설명했는데 자신이 학생운동을 하고 난 후 1990년대로 접어들면서 대한민국에는 민주화가 정착이 되었다고 판단하고 민주화 이후의 가치인 복지, 평등, 인권에 관심하기 시작해 프레임이 잘 맞을 듯한 새누리당으로 가게 됐다고 해명하였다. 그러면서 친박 중심의 패권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새누리당은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비박계 의원들과 함께 바른정당에 합류하였다. 이러한 활동들로 박사모 등 친박 극우 단체들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가 되었다.
23 심재철
전남 광주 출신으로 서울대 영어교육과에 진학한 후 1980년 박정희가 죽고나서 민주화를 열망하며 유신철폐와 유신헌법 폐지 및 민주적 선거를 요구하며 반대하며 일어난 대대적인 '서울의 봄'에서 당시 서울대 총학생회장으로 대학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다. 당시 대학 운동권 선봉에 섰던 인사들의 명단은 지금으로썬 화려하다. 특히 같은 서울대 인물들로는 복학생 대표였던 이해찬과 복학생 김부겸 그리고 총학생회 대의원회 의장 유시민 등이 있었다. 하지만 당시 5월 15일 심재철 서울대 총학생회장은, 잘하면 민주화에 성공할 지도 모르는 기회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공수부대가 왔다는 소문에 겁을 먹은 그는 연설대(버스) 위에서 8시 30분에 해산 결정을 내리게 된다. 유시민 서울대 대의원회 의장 등 반발하는 학생들도 있었으나, 8시 50분부터 대다수는 썰물처럼 귀가하여 9시 40분경에 해산을 반대하며 마지막까지 남았던 고려대학교가 해산하며 서울의 봄은 일단락 지어졌다. 김대중-김영삼 두 야당 주요인사가 '계엄해제', '정부 주도의 개헌 포기' 등 6개의 개헌안을 제시했지만 학생이건 양김 둘 다 신군부의 음모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결국 5월 17일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신군부 세력은 국회를 해산시키고, 언론을 통제하는 등, 야당 인사들 및 시위 주모자들 역시도 기습적으로 모두 체포하는 쿠데타를 벌이며 다시 독재 정권이 군림하게 되었다. 당시 '서울역 회군'을 주도했던 심재철에 대해서 큰 비판이 있었지만, 그 다음 날 18일부터 일어난 광주 유혈사태를 본다면, 해산하지 않았다면 서울에서도 대규모 유혈사태가 났을 거라는 가정은 사실에 가까웠다.
계엄사령부로 끌려간 심재철은 혹독한 고문 끝에 김대중에게 20만원을 받아 시위에 참여했다고 내란음모를 꾸몄다고 거짓 진술을 하고, 학생운동 총책인 이해찬의 조종을 받아 전국의 학생운동을 진두지휘했다고 거짓 자백을 하면서 고문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음을 훗날 5공 청문회 때 고백하게 되었다. 어쨌든 김대중은 여러 시위 주동자들의 고문을 통한 거짓 자백들로 사형 선거 판결을 받게 되었다. 또한 심재철은 군사정권 당시 독재와 싸운다는 미명 하에 민간인을 고문하게 되었는데, 이 사건 때문에 유시민이 폭행을 뒤에서 조종했다는 주장으로 유시민 혼자서 결국 수감생활을 하게 되었다. 일명 서울대 프락치 사건이라 불리우는 이 사건에 전기동이라는 서울대생이 프락치로 몰려 심재철에게 폭행을 당했다고 증언하면서 논란이 되었다.
이후 영어교사를 지내다 MBC에 입사하였고 1988년 방송사 최초 MBC노조를 만들어 초대 전임자를 맡게 되었지만, 1992년 방송 민주화 투쟁을 하다 업무방해·노동쟁의조정법, 징역8월·집유2년을 선고받게 되고 말았다. 출소 후 신한국당에 입당하며 정계에 입문하게 되었고, 2000년 16대 총선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당선되며 현재까지 5선을 역임하며, 새누리당에서 자유한국당으로 극우보수적인 성향으로 전향하여 당내 핵심적인 역할로 자리잡고 있다.
24 원희룡
제주 출신으로 가난한 유년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서울대 법과대학에 수석으로 진학하면서 언론에서도 이슈화되기도 했지만, 1982년 대학 진학 이후 신군부 독재의 폭압적 정치현실과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상을 깨닫게 되면서, 대학 1학년 때 서울대 문과대학이 중심이 된 지하서클 '사회복지연구회'에 가입해 체계적으로 사회과학을 공부하면서 사회의식에 더 눈을 뜨게 되었다. 그러다 서울대 구내에서 전경들의 여학생 추행사건이 일어나자 이에 분노하여 항의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가하게 되었고, 호주머니에서 시위 관련 유인물이 발견되어 몇일 구금되었다가 훈방 조치가 되긴 했지만 학교로부터 유기정학을 받게 된다. 당시 서울대 수석 입학생의 유기정학 조치는 대학가에서도 매우 충격적인 소식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사건 이후 본격적인 운동권 생활에 투신하며 여러 차례 옥중을 드나들며 수배 대상이 되었고, 구로공단의 한 교회에서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야학과 노동운동, 그리고 인천의 금속공장 등지에서 노동자로 위장취업하여 노동계의 현실을 깨달으며 살아갔다.
그러나 1989년 동구권 공산주의 국가들의 몰락을 보며 사상적 전환을 하게 되었고, 학교를 졸업할 시기에 이러 사법시험을 수석으로 패스하며 사법연수원 24기를 졸업하였다. 그리고 1995년 서울지방검찰청 검사로 임관하여 재개발조합사기사건, 딱지어음사건, 다단계 피라미드 범죄 등 주로 경제사범 소탕에 열중하였으며 부산지검 강력부에 있을 때는 무술합계만 도합 40단이 넘는 검찰 수사관 18명을 데리고 지역 내 조직폭력 및 마약사범과 매일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사투를 벌여야 했다. 그러다 1998년 8월 검사직을 그만두고 변호사 개업을 하였는데, 일년 후 합리적이고 개혁적인 보수를 이루겠다고 천명하며 한나라당에 입당하여 보수 정치인으로서의 길을 가게 되었다. 남경필, 정병국과 함께 한나라당의 개혁을 주도하는 소장개혁파 운동을 이끌며, 당 지도부와 부딪히면서 정치이력을 이었고 3선 의원을 역임하고 2014년부터 새누리당 후보로 제주도지사를 역임하고 있다.
25 이성헌
전남 영광에서 태어나 서울로 상경하여 명지고를 졸업 후 연세대에 입학하였고, 1983-4년 연세대 총학생회장을 역임하며 학생 운동에 뛰어들었다. 신군부 독재 정권에 반대하며, 1985년 총선반대시위에 관련되어 연행되기도 하였고, 같은 해 학교를 졸업 후 민주화추진협의회 기획위원을 맡으며 민주화 운동을 이어 나아갔다. 이후 중앙청년위원회 사무국장에 이어, 1987년 통일민주당에 입당하며 중앙사무위원을 맡으며 정계에 입문하였고, 6월 항쟁 전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통일민주당 간사를 맡으며 신군부 독재 타도를 외쳤다.
1990년 민주화 세력인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신군부 세력인 노태우의 민주정의당, 과거 유신세력인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이 3당 합당하면서 자연스레 민주자유당 소속이 되었고, 1994년부터 1996년까지 문민정부의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정무비서관으로 활동하였다. 한나라당 소속으로 16대 총선과 18대 총선에 당선되며 2선 의원을 하였고, 이후 총선에서는 연이어 낙선하였다. 박근혜 정권 아래 과거 독재정권타도를 외치던 민주화 투사였던 모습은 완벽하게 사라지고, 친박중의 친박으로 박정희와 박근혜를 찬양하며 칭송하는 정치인으로 자리잡았다. 2017년 자유한국당 최고위원 전당대회에 출마하였지만 참패하였다.
26 정태근 386세대
서울 출신으로 1982년 홍대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연세대 경제학과에 입학하여 “호헌철폐, 독재정권 타도”를 목놓아 외치며 1985~6년 연세대 총학생회장으로서 학생 운동을 주도하였다. 시위 주도로 1986년 홍성교도소에 수감되는데, 당시 구치소에서 박종철 열사를 대면하기도 하였다. 이후 정태근은 안양교도소로 이감되는데, 1987년 1월 박종철은 당국의 고문으로 결국 숨지며 6월 항쟁의 불씨를 지피게 되었다. 출소 후 학교를 졸업한 뒤 한나라당에 입당한 뒤 이명박이 서울시장이던 시절 서울시 정무부시장을 맡으며 이명박의 최측근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2008년 18대 총선에 당선되지만, 2011년 재보선 선거 과정중 일어난 디도스 사건으로 인해 민심이 돌아서자 한나라당을 탈당하였고, 정치 낭인 생활을 하다 20대 총선에 재도전하기 위해 새누리당으로 복당하여 출마하지만 역시 참패를 맛보게 되었다. 2017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면서 친박을 비판하며 정두언 전 의원 등 몇몇 원외 인사들과 함께 전격적으로 새누리당을 탈당하여 바른정당 창당에 합류하였다.
27 박종운
충북 청주 출신으로 1980년대 중후반 서울대생이던 박종운은 학생운동조직 '대학문화연구회'와 ‘민주화추진위원회’의 지도위원으로 1년 반이 넘도록 경찰의 추적을 피하고 있었다. 결국 그의 후배였던 박종철 군이 연행되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박종운의 소재를 물으며 잔혹한 폭행과 전기고문, 물고문 등이 가해졌고 결국 순순히 대답하지 않던 그는 1987년 1월 14일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사망하였다. 당시 치안본부장 강민창은 심문하던 중 책상을 '탁'치니 '억'하면서 쓰러져 죽었다고 궤변을 내놓으며 결국 진실이 밝혀지며 6월 항쟁이 발생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자신 때문에 고문을 받다 민주화를 이룩하며 죽어버린 후배를 등지고 2000년, 한나라당에 입당하여 경기 부천시 오정구 지구당위원당이 되어 정계에 큰 충격을 주게 되었다. 이후 2008년 한나라당 경기도당 서부지역 총괄본부장을 맡으며, 자신이 대학운동권 시절 박종철 및 민주화를 부르짖은 수많은 사람들을 고문했던 공안검사 정형근과 같은 당의 동지로 그리고 유신독재의 퍼스트 레이디 뒷편에 서는 행보를 보였다. 결국 16~18대 총선에서 내리 3연패를 하였고 비난과 야유와 함께 정계를 떠나 극우언론사 '미디어펜'의 논설위원을 맡고 있는 불행한 현실을 스스로 떠안게되었다.
28 이장우 386세대
충남 청양군 출신으로 대전대에 입학하여 재학 중 총학생회장을 맡으며 군사정부에 항거하며 학생 운동을 주도하며 1987년 대전지역 6월 항쟁을 이끌기도 하였다. 이후 2003년 대전대 행정학과 겸임교수로 지내다 2005년부터 한나라당 대전시당 대변인을 맡으며 우파정치인으로 정계에 입문하고 이후 대전 동구청장 재임 당시 업무추진비를 전용하며 공문서를 위조한 혐의로 2011년 11월 16일 대전지방법원에서 공문서위조죄로 벌금 150만원을 선고받았고, 본인이 항고를 포기함으로써 유죄가 확정되기도 하였다. 이후 새누리당 의원으로 당내 강인한 친박계로 자리잡아 종북 얘기를 할 때 반론하는 사람은 종북세력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라는 발언과 함께 색깔론을 마구잡이로 사용하면서 2017년 문재인 정권이 들어서 김상곤 교육부 총리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그를 사회주의자라고 비판어조로 말하고 이에 대해 사상검증이라며 반박하는 여당 측 박경미 의원에게도 고성을 지르며 헤이트 스피치 기질을 끝까지 내려놓지 않으며 논란을 일으켰다.
29 고진화 386세대
강원도 영월 출신으로 1984년 성균관대 사회학과에 입학하여 재학 중 총학생회장을 맡아 학생운동에 투신하였고, 1986년 ‘민족통일민주쟁취민중해방투쟁위원회’(삼민투쟁위윈회) 사건으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어 징역 5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6월 항쟁 이후 대통령 직선제가 수용되면서 1988년 사면 복권되었지만, 노태우 정권 아래에서 안기부의 감시를 받으며 독재 정권의 그늘 속에 숨어야 했다. 재야 출신인 이부영 의원의 보좌관을 맡으며 현실 정치에 발을 들이고, 1996년 제15대 총선에서 김대중의 새정치국민회의에 합류하지 않은 민주당 세력과 개혁신당과의 합당정당인 통합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였지만 낙선하였다. 2000년 대한민국의 수구보수에서 개혁 세력이 있어야 한다는 진부한 이유로 한나라당에 입당하였고, 이후 17대 총선에서 서울 영등포구 갑 선거구에 초선을 역임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2008년 17대 대선에서 창조한국당의 문국현 후보를 지지하거나 보수정당의 유물이기도 한 국가보안법에 대해 늙은 망령이라 비유하여 폐지를 주장하며 당내와 당지지자들로부터 '왕따'로 불리우며 크나큰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30 김지룡
(86년 서울대 총학생회장)
1983년 서울대 국제경제학과에 입학하여 1986년 총학생회장을 역임하며 거센 학생 운동으로 뛰어들었다. 같은 해 4월 서울대생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반미자주화반파쇼민주화투쟁위원회'(자민투) 겸 '전방입소훈련거부및 한반도 미핵기지화 결사저지를 위한 특별위원회'를 결성하여 위원장을 맡으며 반미농성과 함께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주장하였다. 이 때문에 꾸준히 연행을 당하다, 구속 수감되었고 1987년 6월 항쟁 이후 특별 사면받으며 풀려났다. 이후 시대가 바뀌면서 그의 성향도 조금씩 바뀌게 되었고 남자들이 차별받는 사회로 모든 정책이 여성 위주로 흘러간다는 발언과 함께 남성들의 놀이 커뮤니티이자 애국우파를 표방한다고 하는, 또한 일베를 넘어서겠다는 남성마초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 '수컷닷컴'의 대표를 맡으며, 변희재 미디어워치 대표와 함께 운영하고 있다.
31 오경훈
(86년 서울대 총학생회장/22 외교학과 4년)
1983년 서울대 외교학과 전공으로 1986년 서울대 전 총학생회장들이 검거되어 구속되면서 총학생회장을 맡게 되었고, 「아시아」경기대회 반대 핵기지 철수를 주장하며 경찰의 수배를 받으면서 전국학생총연맹 건국준비위원회 구성을 주도하였다. 하지만 그 해 12월 그 역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검거 구속되기도 하였다. 졸업 후 내일신문에서 정치부 기자로 근무하다 1996년 최형우 신한국당 상임고문의 수행비서로 활동하며 정치계로 뛰어들었고, 2000년 제16대 총선에서 한나라당 공천을 받아 출마하였지만 낙선한 후 3년 뒤 재보궐선거에서 당선되었다. 이후 제17대 총선과 재보궐선거에서도 한나라당 소속으로 출마하였지만 연이어 낙선하였고 2014년에 새누리당 후보로 양청구청장 선거에도 출마하였지만 또다시 낙선하였다. 현재는 LG디스플레이 상임고문, 명지대학교 연구교수를 지내고 있다.
32 강길모
1980년대 대학 재학 시절 NL 주사파 계열의 '반미청년회' 소속으로 급진적인 북한중심통일 운동을 펼친 일명 '거물 빨갱이'로 불리우며 1988년 미 문화원 점거 사태의 주동 배후 인물이며, 후배들을 주체사상으로 무장시키던 세뇌총책이었고, 북한의 대남선전매체인 '한국민족민주전선'(한민전)의 지령에 충실한 북쪽 독재자의 충견이라고 밝히기도 하였다. 갑작스럽게 극단적인 수구우파로 전향하며 2005년 프리존뉴스라는 인터넷 극우언론의 대표를 맡게 되었고, 자신이 과거 주사파 최고지도부로 현실정치에 머물고 있던 몇몇 의원들에게 주사파 교육을 시켰고, 위대한 수령 김일성을 찬양하라고 했다는 발언을 하면서, 현실 정치인으로 나선 과거 자신의 후배들에게는 아직까지도 종북좌파 프레임을 남발하고 있다. 본인이 극우수꼴로 전향해서 과거 김일성 주체사상(짭퉁 사회주의) 세뇌교육을 했다는 것에 대해 스스로 정당화하는 태도는 많은 사람들에게 의구심되는 부분이었지만, 90년대 들어 뉴라이트를 비롯하여 대다수 극우세력단체의 윗선들이 과거 주사파 세력에서 파생되었다는 것이 현실이다. 2011년 '거짓말 하지 않는 뉴스라이브'라는 슬로건을 내걸었지만, 2012년 이후로는 운영되고 있지 않다.
33 강영진 386세대
제주 출신으로 연세대 사학과에 입학하여 재학 시절 1986년 일명 애국학생투쟁연합결성사건인 건국대 점거농성 시위에 연루되어 구속되었다. 이후 1992년 제주일보에 취직하여 1999년 제주일보 사회부 차장을 맡게 되었고 2012년 정치부국장에 이어 2015년 편집국장으로 승진하였고 2016년 20대 총선에서 새누리당 예비 후보로 서귀포시 선거구에 출사표를 던졌지만 컷오프되었다.
제3탄. 과거 노동운동 및
그 밖의 운동권 출신 인사 모음
(노동 운동가가 보수에...? 어떤 이념인지?)
34 김성태
경남 진주 출신으로 가난한 유년시절을 보낸 후 강남대학교 법학 학사 및 한양대학교 사회복지학 석사 과정을 수료하였으며 군 복무를 마친 후 사우디아라비아 파견 건설 노동자로 일하면서 본격적인 사회생활을 시작하였다. 귀국하여 KT에 입사하여 노동조합 간부를 역임하고 연이어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의 사무총장을 지내게 되었다. 1998년 제2회 지방선거에서 김대중계의 새정치국민회의 소속으로 비례대표로 서울시의원에 당선되었고, 4년 뒤 다시 한국노총 사무총장으로 복귀하며 2003년에는 노사정위원회 노동계 대표로 나서며 주5일 근무제 시행 관련 협상을 진행하기도 하였다.
2008년 한나라당에 입당하여 18대 총선에서 강서구에 출마하여 국회입성에 성공하였고 연이어 19대, 20대 총선에서도 당선되며 3선 의원이 되었다. 보수정당 의원치고는 서민친화적인 정책과 진보적인 성향의 정책들을 활발하게 폈고, 2016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의한 대통령 탄핵에 찬성한 유일한 여당 의원인 비박계로 새누리당을 탈당하여 바른정당을 창당하며 국정농단 청문회 특위위원장을 맡는 등 여론의 인기를 끌게 되었지만, 대선 일주일 전 뜬금없이 홍준표 지지를 선언하며 다른 비유승민계 의원들과 바른정당을 탈당하고 자유한국당 복당을 신청하며 철새 소리를 들으며 추락의 길로 떨어지게 되었다.
35 정병국
1978년 성균관대 사회학과에 입학하여, 입학 직후부터 학생운동을 하다 경찰의 수배명단에 오르기도 하였다. 이를 피해 포항에서 도피생활을 하던 중 1979년 10.26 사건를 접하고, 곧바로 상경하여 다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전국 총학생회 부활 준비위원회 상임위원장을 맡아 활동하였는데, 그의 의지대로 총학생회는 부활하고 있었지만 1980년 5·17 군사정변 직후 신군부에 검거되었다. 신군부에서는 군 입대 또는 투옥 중에 선택할 것을 강요하였고, 그는 해병대 입대를 선택하여 헌병으로 사병복무를 하였다. 전역 후 복학하고 1984년 졸업하였고, 졸업 후 본격적인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수배를 받으면서도 많은 활동을 하는데 '세인출판사'를 운영하면서 서울 지역 대학교 총학생회에서 필요로 하는 거의 모든 인쇄물을 공급하였고, 군사 정권과 투쟁하는 학생들을 꾸준히 지원하였다. 1987년 6월에 국가안전기획부에 의해 검거되어 징역 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고 고문을 받기도 하였는데 그러던 중 6·29 선언이 일어났고 집행유예로 풀려날 수 있었다. 당시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소속 변호사들이 변론을 자청하며 도움을 받은 바 있다.
민추협과의 인연을 계기로 정병국은 같은 해 13대 대선에서 통일민주당 김영삼 후보를 도우며 정계에 입문하게 되었고 이후 청와대 제2부속실장에 역임하면서 당시 36세로 비서관 중 가장 젊은 나이였다. 이후 2000년 한나라당 후보로 16대 국회의원에 당선되며 연이어 새누리당 소속으로 5선을 역임하게 되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며 비박계 의원들과 함께 탈당하여 바른정당의 창당추진위원장에 이어 초대 당대표를 맡았고 2017년 3월 10일 박근혜 대통령 파면이 결정되며 소임을 다했다며 바른정당 당대표직을 사퇴하였다.
36 장석춘
경북 예천군 출신으로 문경청암고를 졸업 후 1981년 금성사(현 LG전자) 구미공장에 입사하였다. 이후 1992년 노동조합 지부장을 역임하여, 1999년 LG전자 노동조합 위원장을 지내며 노동운동에 참여하였다. 2006년에는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산하 전국금속노동조합연맹 위원장이 되었고, 2008년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위원장이 되어 2011년까지 역임하였다. 2009년 당시 한나라당이 복수 노동조합 전임자의 무임금 등을 골자로 한 노동조합법 개정을 추진할 때, 대정부 투쟁에서 선봉에 나서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 말기 2012년 청와대 고용노동특별보좌관을 맡으며 2016년 20대 총선 경북 구미로 선거구로 공천을 받아 새누리당 소속으로 당선되었고, 친박 의원이 되면서 구미에 박정희 탄신제에도 참여하였다. 2016년 10월 6일, 총선 전 모 방송사와 전화 인터뷰에서 당선을 목적으로 "민주노동당에 입당한 사실이 없다"며 허위사실을 공표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되었지만, 2006년 5월 민주노동당에 입당한 사실이 확인되면서 검찰은 벌금 120만원을 구형하였으나 재판부는 의원직 유지가 가능한 벌금 80만원을 선고하면서 겨우 살아났다. 홍준표 전 대선후보와 같은 당이면서, 아이러니하게도 대선 전 타파해야 한다고 그렇게 외치던 강성노조 일원의 선봉자였던 분이기도 하다.
37 현기환
부산 출신으로 연세대 행정학 석사 과정을 졸업 후 한국주택은행에서 근무하면서 노동조합위원장에 이어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 대외협력본부장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2004년 허남식 부산시장의 경제노동 특별보좌관에 임명되면서 정치를 시작하였고 이후 친박계에 속하며 2008년 18대 총선에 한나라당 공천을 받아 당선되었다. 이후 한나라당 부대변인 및 여의도연구소 부소장에 역임하였고 2015년 7월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정무수석비서관을 역임하였다.
20대 총선 공천개입이 논란되었고, 이후 엘시티 게이트 연루되며 검찰에 소환되어 여러 혐의로 결국 구속영장이 청구되었다. 당시 커터칼로 손목을 긋는 자해를 시도하여 병원에 이송되기도 하였지만, 생명에 큰 지장이 없어 다시 구속되었고, 모 건축 시행업자에게 자신의 내연녀의 오피스텔 전세금을 대납시켰다는 의혹 기사가 나오며 논란은 가중화되었다.
결국 수많은 논란들로 새누리당에서 제명되었고, 최순실-박근혜 게이트가 확대되면서 2017년 1월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의혹과 관련되어 참고인 조사를 받기위해 특검에 소환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엘시티 비리로 결국 6월 징역 6년에 벌금 5000만원, 추징금 4억 2000여만원을 구형받았다.
38 임이자
경북 예천 출신으로 고려대학교 노동대학원 석사 과정을 졸업하였고, 이후 대림수산에 근무하면서 노동운동에 몸담았다. 대림수산이 사조그룹과 합병하여 계열사인 사조대림으로 사명이 변경될 당시 회사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노동조합을 설득해 임단협을 동결한 바 있고 한국노동조합총연맹에서 경기본부 상임부의장, 경기본부 여성위원회 위원장, 여성위원회 위원장을 거쳐 부위원장을 역임하였다.
2004년 17대 총선에서 녹색사민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고 2009년부터 2015년까지는 경기도 지방노동위원회 근로자위원, 2015년부터 2016년까지 중앙노동위원회 근로자위원도 겸임하며 노동계의 거목으로 성장하였다. 2016년 2월 24일 정기대의원대회에서 한국노총은 당시 정부가 양대지침 발표를 강행하자 노사정 대타협 파기를 선언하며 노정 간 '전면전'에 돌입하겠다고 정부 및 여당인 새누리당에 대한 선전포고하게 되었는데 3주 뒤 임이자 부위원장은 갑작스럽게 20대 총선에 새누리당 비례대표 공천을 신청하면서 당선되었다. 고등학생 당시 은사였던 이철우 의원과 같은 당이 되었고, 이후 정우택 원내대표에 의해 원내부대표로 임명되었다.
39 이종철
1996년 4월 연대생 한 명이 '대선자금 공개 및 교육재정 확보'를 요구하는 시위 도중 경찰에게 구타당해 숨지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당시 범민족대회를 진행하던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 운동권 세력이 모여 8월 연세대를 점거한 대규모 농성 사태를 가지면서 경찰과 엄청난 충돌이 생겼다. 경찰은 헬기까지 출동시키며 최루탄을 난사하는 토끼몰이식 강경진압에 나섰고, 시위대 역시도 화염병과 돌, 의자 등을 던지면서 격렬히 저항하였지만 약 일주일만에 진압되었고 무려 3,499명이 연행되었다.
당시 대대적인 언론의 비판속에서 대다수 국민들의 반응은 NL계열의 전유물이었던 한총련에 대해 싸늘했고, 시위가 정당하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결국 한총련은 물론, 학생운동이 몰락하는 데에 결정적인 사건이 되었다. 당시 이종철은 NL 주사파 계열의 1995~6년 고려대 총학생회장이자 연세대 사태를 주도한 혐의로 결국 구속되어 1998년까지 복역하게 되었다. 복역 후 그는 북한 정권과 북한 일반 주민들의 현실과 실상을 탈북자들로부터 듣게 되면서, 탈(脫) 주사파 및 극우인사로 전향하여 웹진 <Story K> 발행인, 새누리당 대한민국대통합위원회 위원을 지냈고 제20대 총선에서 서울 강서갑 예비후보로 등록하기도 하였고 현재는 바른정당 대변인을 맡고 있다.
40 이화수
안양공업고등학교 졸업 후 대한민국 해병대를 전역하여 화학 관련 회사에서 근무하였다. 그러면서 노동운동에 참여하였고, 한국노동조합총연맹 경기지역본부 의장, 전국화학노동조합연맹 경기남부본부 본부장 등을 지냈다. 그는 온건파 노조 간부로서 정부에 협조적이며, 친기업적인 행보와 함께, 해외 여러 기업 관계자들과도 관계를 갖고 활동하였고 결국 2008년 18대 총선에서 한나라당 소속으로 안산시 상록구 선거구에 당선되며 한나라당 원내부대표를 역임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2012년 19대 총선에서 새누리당 공천에서 탈락하였고, 2016년 20대 총선에서 출마하였으나 낙선된 후, 바른정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41 문진국
전국택시노조 위원장과 한국노총 상임부위원장을 거쳐 한국노총 위원장을 역임했으며, 2013년 위원장 시절 서울광장에서 열린 총파업 결의대회를 주도하며 정권의 노동탄압에 맞서는데 있어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은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으며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역대 어느 정권에서도 노동운동의 심장부인 총연맹에 공권력을 투입한 사례는 없었다고 발언하며 강력한 연대투쟁을 다짐했지만 2016년 뜬금없이 20대 총선에서 새누리당에 비례대표 공천을 신청하며 당선되었다. 2017년 3월에는 서울 강서구 갑 당협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42 강성천
함경북도 성진 출신으로 자동차연맹 노동조합 위원장으로 운수 노동자들과 40년을 지냈다. 오랜 조수 생활 끝에 버스 운전대를 잡았다던 그는 한국노총 부위원장 출신을 역임한 후,2008년 한나라당 제18대 총선에서 비례대표 4번으로 당선되며 국회 의정활동에 참여하였다.
https://www.youtube.com/watch?v=kINRoUzGkg4&ab_channel=%E5%AE%AE%E5%AE%B6Entertainment
내용 출처: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
나무위키 https://namu.wi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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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언론 매체 기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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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정성어린글ᆢ몇번에 걸처 잘 읽고 갑니다^^ (한번은 힘들어요 ㅠㅎ)
좋은글 자주 좀 올려주시길요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