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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전에 이런글을 썻습니다.
보궐선거 패하고....
6월 항쟁...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뜨겁죠..
판단력이 없어졌을 때는 초심을 읽은것
입니다..
개혁과민생.....?
요즘..한국도 숫가락이 아니고 젓가락으로
밥을 쳐먹는것들이 많다던데....
밥은 숫가락으로 먹자.
https://cafe.daum.net/gegukbonwin/q1zC/34448
이걸 암기나 외워서 알려면...?
머리 깨짐니다...
그냥 눈감으면 주마등 처럼 지나가는
기억일 뿐이죠....
6월 항쟁에 참여했던 당시 대학 운동권
1987년(본인도 여기에 해당함..)
이인영,우상호,김태년,윤재영,김승남,
이남주,임미애,송형관,이현종,정지환,
김형호,방효창,양종곤,백해영,김종삼,
서영철,김병식,강석우,정현태,김연정,
최진섭,이종모,김상돈,김현,홍익표,김종기,
윤준호,박철민,우현,안내상..
이인영 초대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전대협) 의장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의장/
87년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장/
충북 충주시 출신으로 1984년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국문학과에 입학하였다.
1986년 상반기부터 당시 한국의
군사독재정권은 사실상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지배를 관철시키는 미국의
식민지 종주국이나 다름없는 상황으로
당시 대학가 분위기는 민주화투쟁과 동시에
미제국주의을 직접적으로 반대하며,
평화통일을 소망하는 NLPDR 이념이
확산되었던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면서
'자주민족투쟁위원회'가 학생운동의 주류로
나서며 직선제 개헌투쟁을 시작하였고,
일부 성격이 다른 운동권 노선(CA계열)에서는
이를 소부르주아 정세에 입각한 기회주의이며
개량주의 노선이라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NLPDR계열 안에서는 민족주의적 공산주의의
NL과 노동중심 계급투쟁을 중시하는 PD계열로
나누어지고, NL 안에서도 주체사상을 동의하는
주사파와 비주사파로 나누어진다.
진보신당에 이어 정의당이 PD계열로 탄생한
정당이며, 민중연합당이 NL계열이다)
1987년 5월, 고려대 총학생회장으로서
연세대학교에서 전국 대학의 총학생회장들과
모여 전국적인 대학생 대중조직을 건설하기로
결의하였고, 충남대에서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서대협)을
조직하며
1기 의장을 맡게 되며 대통령선거 직선제 쟁취를
위한 학생운동을 이끌게 되었다.
반면 당시 CA 계열(반독재민주화 투쟁에서
제헌의회 소집을 주장했던 운동권,
이후 와해되면서
각각의 정당들로 흡수되며 정파로서 사실상
의미가 없어졌다)에게서 '개량주의적 본질의
현상화'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지만,
독재정권 타도와 함께 직선제 쟁취야말로
'민중승리의 전과물'이 될 것이라 강조하였다.
그 후 서대협은 '호헌 철폐' '직선제 쟁취'를
구호로 내세웠고
이인영이 이끄는 고대 학생들은
1987년 5월 말부터 종로로 나와 비폭력
시위를 시작하였다.
박종철 고문치사 은폐 소식이 알려지면서
6월 10일 전국 22개 도시에서 약 150만명의
대학생들과 시민들이 시내로 나와 조직적인
시위를 벌였고,
결국 군사정권은 노태우의 6.29 항복 선언을
하면서 직선제를 쟁취하며 학생들과 시민들이
감격적인 승리를 거둔 셈이 되었다.
이후 7월 5일 최루탄에 맞아 숨진 이한열의
장례 절차를 논의하기 위해 전국의 학생회장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인영은 통일된 학생운동단체를
만들자고 제안하면서 8월 19일 충남대학교에서
전국 95개 대학 4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1기 '전국대학생연합'(전대협)의 발족식이
거행되었고,
1기 의장으로 이인영이 선출되었다.
국민투표에 의해 직선제 개헌안이 통과되고
구체적인 대통령 선거 일정이 다가오면서,
당시 대다수의 NL학생운동권들은
'김대중 비판적 지지론'과 '후보단일화론
(김대중,김영삼 야권화합)'로 분열되었고,
이인영과 고대생들 대다수는 김영삼에게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며 김대중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그러나 1988년 제13대 대통령에 노태우가
당선되면서 결과적으로는 실패하고 만다.
전대협 의장으로서의 임기를 마친 후,
1990년 제1기 전대협 부의장이자
연세대 총학생회장이었던 우상호 등과
학생 운동의 진정성을 훼손하지 않기
위한다는 결의로 10년간 정계에 진출하지
않고 '숙성기간'을 갖기로 약속하며 대학을
졸업한 뒤,
전대협동우회와 전민련 전국연합 등에서
9년 동안 재야활동만을 하였다.
그리고 2000년 우상호와 같이
김대중 대통령의 '젊은피 수혈론'에 따라
새천년민주당에 입당하게 되었고
2002년 노무현 대통령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중앙선거대책위원회 소속으로 참여하였다.
이후 2004년 제17대 총선에 열린우리당
소속으로 서울 구로구 갑에 이어 ,
2012년 제19대 총선의 민주통합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국회의원을 역임하였고,
민주통합당 최고위원을 맡으며
제18대 대선의 문재인 후보 선대위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았다.
대선에서 패하였지만 국회와 당 내에서
남북관계발전을 위한 통일위원회 위원장을
맡으며 남북관계에 개선을 위해 노력을 하였고,
경제정의 노동민주화 특별위원회
워원장을 맡기도 하였다.
현 통일부 장관.
우상호 (87년 연세대 총학생회장)
강원 철원 출신으로 1981년 연세대 문과대학
국어국문학과를 입학하며,
1987년 연세대 총학생회장을 역임하며
독재정권 타도와 민주화 열망의 선봉에
나서게 되었다.
같은 학교 후배이기도 한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에 맞아 사망하면서,
6월 항쟁으로 더욱 크게 번져 나아갔고
6.29 선언 이후 직선제를 쟁취하게 되면서
마무리 되었고,
7월 9일 이한열 열사의 민주국민장 장례식에
열사의 영정을 들고 선봉에 서며 100만명이
되는 인파 속에 연세대 본관에서
서울시청 앞까지 행진하였다.
이때의 인연으로 이한열 군의 어머니인
배은심 씨는 우상호를 친아들처럼
여겨 왔다고 한다.
같은 해 5월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서대협)의 의장 이인영을 의장으로 하여
1기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을
결성하는데 동참하며 부의장에 역임하였고,
학교 졸업 후 1990년 그와 함께 학생 운동의
진정성을 훼손하지 않기 위한다는 결의로
10년간 정계에 진출하지 않고 '숙성기간'을
갖기로 약속하며
전대협동우회와 전민련 전국연합 등에서
9년 동안 재야활동만을 하였다.
출판사 '두리출판사'경영을 잠시하였고
2000년 이인영과 같이 김대중 대통령의
'젊은피 수혈론'에 따라 새천년민주당에
입당하게 되며 16대 총선에 출마하였지만
낙선하였다.
이후 2004년 제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
후보로 서울 서대문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된 후,
2012년 민주통합당으로 제19대 총선과
2016년 제20대 더불어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연이어 당선하며 3선을 역임하고 있다.
그리고 이어 당 내 경선을 통해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로 선출되었고
여러 문제가 되는 사건과 발언들로 논란을
일으키기도 하였지만,
당대표인 추미애와 함께 최순실 게이트 정국-
탄핵정국-19대 대선이라는 역사적 사건 속에서
더불어민주당을 별 잡음 없이 안정적으로
이끌었으며, 19대 대선 승리와 함께,
명예롭게 임기를 마쳤다.
김태년 (87년 경희대 총학생회장)
전남 순천 출신으로 경희대 행정학과에
입학하였고,
1987년 총학생회장을 맡으며 경기 성남에서
청년학생조직과 민주시민단체들가 연합하여
6월 항쟁에 나섰다.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1기에 소속되어 활동하면서 지속적으로
사회 문제에 선봉에 서게 되었고,
경찰에 쫒기며 숨어 지내는 수배자 신세가
되기도 하였다.
이후 성남에 뿌리를 내리며 그곳에서 결혼을
하고 자식들 기르며 성남청년단체협의회 의장,
민주주의민족통일 성남연합 공동의장,
성남시 고도제한해결 공동집행위원장 등에
연이어 역임되었고,
시민 운동만으로 부족하다는 판단에
현실 정치에 뛰어들기로 결심하게 된다.
2002년 개혁국민정당의 전국운영위원장으로
정계에 입문하여,
그 다음 해 열린우리당의 창당 과정에서
개혁국민정당이 흡수되며 열린우리당에
가담하게 되었다.
그리고 2004년 제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
후보로 성남 수정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며 국회에 입성하게 되었다.
이후 2012년 19대 총선,
2016년 20대 총선,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연이어 당선되어 3선 고지에 올랐고,
더불어민주당의 정책위원회 의장을 맡았었다.
윤재영 - 87 충남대 총학생회장
충남 공주군 출생으로 1984년 충남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하여, 1987년 총학생회장을
맡으며 민주화 열망으로 독재 정권 타도를
위한 변혁 운동에 뛰어들게 되었다.
같은 해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에
결성을 주도하며 전대협 1기 부의장으로
활동하였고 충청지역대학생 대표자협의회
의장으로도 활동하면서 충청지역의 학생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당시 민주헌법쟁취, 직선제 개헌투쟁에 충남대생
1만인 대전역 진출 시위를 주도하면서
6월 항쟁의 전국적 기폭제 역할을 한 충청지역
민주화 학생운동권의 상징이기도 하였다.
12월, 12·12 군사 쿠데타 규탄 시위를 주도하며
체포되어 구속되었고
그 다음 해에 출소한 후에도 통일 전선에
다수 민중의 단결된 힘이 절실하다고 판단하며
후배들의 활동을 지도하였다.
그리고 대전 충남 민족민주운동연합
상근실무 간사를 역임하였고,
1989년 5월 노태우 정권의 탄압술책인
강제입영을 거부하면서 다시 수배령이
떨어졌지만, 민족민주운동의 활성화를 위한
청년들의 모임 ‘대전새길청년회’ 창립을
주도했고,
지역청년운동의 통일단결을 위해
‘충남민청’과의 조직통합에 앞장서는 등
왕성한 활동을 하였다.
1990년 12월 노태우 정권의 신공안정국 조성의
신변상의 위협으로 서울로 거쳐를 옮겨 막노동을
하면서 생활하였지만,
수배 중 얻은 천식으로 1992년 10월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이후 그는 공주군 반포면 대전공원묘역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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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남 (87년 전남대 총학생회장)
전남 고흥 출신으로 1984년 전남대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하여,
1987년 총학생회장에 선출되며
6월 항쟁 선봉에 섰다.
학생들은 물론 수많은 시민들까지
약 50만명의 인파가, 제2의 5.18에 대한
두려움을 무릎쓰고 거리로 나오게 되어,
대통령 직선제를 얻어내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고 같은 해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에 결성에
참여하며 부의장을 맡으며 학생운동에
적극적으로 뛰어 들었고,
1993년 민주당 이기택 총재의 비서로
정치에 입문하게 되었다.
1996년 제15대 총선에서 낙선한 후
15대 대선을 앞두고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하여 박상천 의원의 보좌관으로 일하면서
구 민주계 계열로 전향하였고,
이후 제19대 총선에 민주통합당 후보로
전남 고흥·보성 선거구로 국회에
입성하게 되었다.
2016년이 1월, 더불어민주당을 탈당하여
국민의당에 입당하는데, 20대 총선 공천에서
떨어지자 불공정 경선이라며
3달 만에 국민의당을 탈당하고,
다시 더민주당으로 재입당하였다.
이남주 성공회대 교수(87년 서울대 총학생회장)
서울 출신으로 1984년 서울대 경제학과에 입학하여,
1987년 서울대 총학생회장으로 6월 항쟁에서
수만명의 학생들 시민들과 함께 하였다.
경제학과 졸업 후, 다른 대다수 총학생회장들과는
달리 정계로 바로 진출하지 않고,
서울대 정치학과에 석사 과정을 수료한 후
베이징대학교 대학원 정치학을 전공하며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6년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의 싱크탱크인
'한반도재단' 산하의동북아전략연구소에
참여해 정책자문을 제공하였고,
2008년부터 성공회대 중어중국학과 교수
겸 세교연구소 소장을 맡으며 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 소장으로서 남북관계를 평화적
대화와 협력으로 풀어가자는 입장이기에
대북강경정책을 펴는 이명박 정권과는 상반된
입장을 견지하였다.
이후 2011년 성공회대 교무처 차장에 이어
2012년 민주통합당 공천심사위원회 위원을
맡기도 하였다.
2017년 성공회대 교수로 재직 중이며
더불어민주당 당외적인 소속으로 정치
시평을 하고 있다.
임미애 (87년 이화여대 총학생회장 )
경북 출신으로 1984년 이화여대 경제학과에
입학하여, 1987년 총학생회장으로 선출되었고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서대협)의
일원으로 6월 항쟁에 선봉에 섰다.
이후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1기의 주축 일원으로 활동하였고 경북대
정책정보대학원 도시 및 지역개발을 전공하였다.
2000년 의성군 학교급식비 심의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임명되었고
2005년에는 민주평화통일 자문회의 자문위원을
거치면서 2006년부터 2014년까지는
제5대, 제6대 의성군의회 의원을
두번 역임하게 되었다.
이후 그녀는 서울대 운동권 출신의 남편 김현권과
고향인 의성으로 내려가 농부로 변신하였다.
2015년 새정치민주연합 혁신위원회 공동대변인을
맡았고 그의 남편 김현권도 지난 총선에서
두번의 낙선 끝에 2016년 더불어민주당 후보로
제20대 국회의원의 비례대표로 당선되었다.
송형관 (87 제주대)
제주 서귀포 출신으로 1987년 6월 제주대
총학생회장을 역임하는데,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은폐조작의 진상과
연세대 이한열 열사가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사경을 헤맨다는 소식은 제주에도
전해지게 되며, 6월 10일 그를 비롯한 제주대
총학생회 일원들은 시국대토론회 후 교문앞
투석전을 벌이고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그러나 무조건적인 단식으로 4일만에 쓰러져
병원에 실려갔고 육지부에서 강렬한 투쟁이 있을 시
제주에서는 큰 움직임이 없었지만,
수 백명의 학생들과 함께 6월 21일, 제주대
학생회관 앞 광장에서 비상학생총회 및 '호헌철폐
및 민주헌법 쟁취를 위한 민주화투쟁 출정식'
을 가진 후 '독재정권 타도하자'
'4.13호헌조치 철회하라'
'직선제 개헌 쟁취' 등의 구호를 외치며
중앙로터리와 광양로터리 시내의 도로를 점거하였다.
그러나 이날 시위는 학생들이 비폭력을 내세웠고
경찰도 강제진압을 억제하는 등 서로의 자제로
인하여 최루탄 투척이나 투석전없이
평화적으로 끝났다.
그리고 계속해서 평화적 가두시위와 몇 번의
투석전을 거쳤고, 마침내 군사정권은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한다는 6.29 선언을 하면서
시민들과 학생들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이후 1992년 제주일보에 입사하여
사회부 기자로 활동하다,
1995년 제주CBS를 거쳐 CBS 본사로
발령나 기자로
활동하게 되었고 2014년 문화체육부
부장에 이어,
2015년 제주CBS 보도제작국장으로
발령나게 되었다.
이현종 문화일보 논설위원
(87년 서강대 총학생회장)
대구 출신으로 1984년 서강대 신문방송학과에
입학하여,
1987년 서강대 총학생회장으로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5월 말 그는 수배된 상태로 6월 항쟁 당시
시위 선봉에 서지 못한 채 도망다니다
6.29 선언 이후 수배가 풀리게 되었는데,
이후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에 결성에
동참하며 의장대행을 맡고 있던 10월,
전대협 주도 혐의로 다시 수배되어 결국 구속되었고,
징역형을 받으며 그 다음 해에 출소하게 되었다.
6월 항쟁에 의해 대통령 직선제를 얻어 놓고도
노태우 정권이 이어가며 이에 크게 실망을
했다고 하지만,
이후 보수성향 일간지인 문화일보에 기자로
입사하여, 정치부장과 국제부장을 거쳐 현재는
논설위원으로 TV 조선, MBN, YTN 등
여러 종편 방송들에 고정으로 출연하고 있다.
정지환 (87년 서울시립대 총학생회장)
1987년 시립대 영문학과 전공의
총학생회장으로
전국 18개 대학들의 총학생회장들의
조직이었던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서대협)
결성에 참여하였고, 정권으로부터 수배를 받으며
6월 항쟁에서 또한 서울 동부지역대학대표으로
시청 앞 광장의 현장지도부로 활동하였다.
이후 전대협 의장 권한대행을 거치며
전대협 3기까지 활동하였지만,
1988년에 집시법 위반으로 결국 구속되었다.
1993년 경실련 기관지『시민의 신문』창간
멤버를 거쳐, 진보적 성격의 월간지인『말』의
기자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참여정부 기간에는 입법전문주간지
『여의도통신』의 대표 기자로 활동하였다.
김형호 (87 국민대 총학생회장)
국민대 정보관리학과에 입학하여 1987년
국민대 총학생회장으로 전국 18개 대학들의
총학생회장들의 조직이었던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서대협)
결성에 참여하였고 곧바로 정권으로부터
수배를 받으며 6월 항쟁에 섰다.
대학 졸업 후 직장 생활을 시작해 ING생명
재정상담사에 재직하며 ‘젊은 진보’
라는 모임에서 활동하였다.
방효창 (87 항공대 총학생회장)
전국 18개 대학들의 총학생회장들의
조직이었던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서대협)
결성에 참여하였고, 정권으로부터 수배를
받으며 6월 항쟁에 섰다.
졸업 후 같은 학교 전파공학 대학원에서 석사,
박사 과정을 수료하였고,
석사 논문으로 당시로서는 비주류 분야였던
CDMA 관련 기술을 연구,
이동통신 업계의 기여를 하기도 하였다.
양종곤 (87 단국대/경영학과 84학번)
1984년 단국대 경영학과 입학 후 반독재 및
학내문제로 학생운동에 참여하게 되며,
87년 총학생회장과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서대협)
일원을 맡게 되었다.
6월 항쟁 한복판에서 투쟁을 지휘하였지만
그는 형사들에게 붙잡혀 집시·폭력이라는
죄목으로 구속 수감되어 그해 11월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석방되었다.
이후 미국 서던오리건주립대학대학원으로
유학을 떠나며 학업에 매달리며 석사
과정을 수료했고, 1997년 네브래스카대학
링컨캠퍼스
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다시 한국으로 귀국하였다.
귀국 후 1998년 한국표준협회 6시그마 아카데미
경영컨설턴트를 거쳐 컨설턴트로 재직하다
2010년 자신의 모교였던 단국대 경상대학
경영학부의 조교수로 시작하여 교수를
맡게 되었고, 이후 정책경영대학원장 겸
경상대학장을 역임하게 되었다.
백해영 (87 서울여대/영문과 4년 22)
서울여대 영문과에 입학하여
1987년 총학생회장을 역임하며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서대협)
일원으로 6월 항쟁에 앞장 섰다.
이후 90년대에 들어서며 지역운동단체인
'구로시민센터를 창립하고 '구로녹색가게'의
회장을 역임하며 맡아오다,
2002년 구로구의회 의원으로 진출한 이후
구로의 교육과 보육 전문가로 중진 의원
못지않은 활동을 펼쳤다고 평가된다.
김종삼 (87 부산대/ 22)
부산대 공과대 조선기계학과에 입학하여,
1987년 4학년 당시 부산대 총학생회장으로
학생회 간부 6명과 함께 학내민주화를
위해 노천 단식농성에 돌입하였고,
6월 항쟁 거리투쟁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게 되었다.
이후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1기 부의장을 맡고 꾸준히 사회 운동에 참여하며
1990년에 보안사령부에 사찰 대상 인사
명단에 오르기도 하였고,
1995년 새로운 길을 선택하며
동의대 한의대에 입학하여 졸업 후
한의원을 운영하고 있다.
서영철 (87 연세대원주캠퍼스)
연세대 원주캠퍼스에 입학하여 1987년
총학생회장을 역임한 그는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서대협)
결성에 참여하여 6월 항쟁 그 한가운데에 섰다.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1기 일원으로 꾸준한 사회 운동에 참여하였고,
이후 전대협 동우회 멤버이자 평범한
직장인으로 지내고 있다.
김병식 (87 한양대/사회학과)
한양대 사회학과에 입학하여 1987년
총학생회장을 역임하며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서대협) 결성에
참여하여 동부권의 의장을 맡고 6월 항쟁에
앞장 섰다.
90년대에 들어서 인테리어 소품을 취급하는
(주)니치가족을 경영하며 사업가로
변신하였고 1999년에는 신보수주의를
내걸며 '파워비전 21'이라는 정치그룹을
조직하는데 참여하여 '개혁을 외치는 정치인들
자체가 개혁대상'이라는 모토로 달라진
노선으로 현실정치 참여를 선언하기도 하였다.
강석우 (87 건국대/정외과)
건국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하여
사회 현실에 눈을 뜨게 된 그는 학생
운동에 뛰어들었다.
1986년 10월 건대 사건으로 연행되었지만
굽히지 않고 1987년 총학생회장을 역임하며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서대협)
결성에 참여하였고 6월 항쟁 그 한가운데에 섰다.
이후 그해 8월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1기 일원으로 결성에 동참하며 계속해서
민주주의의 대한 열망을 굽히지 않았고
1989년 10월 21일 상지대 여학생이었던
김지영과 결혼식을 갖게 되었는데,
결혼식 도중 전경 4~50명이 임종석 전대협 의장을
잡으러 왔다는 명목으로 몰려와 결혼식장과
식당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이를 저지하는 그의 가족,
손님들을 구타하며 연행하는 추태를 범하게 되었다.
결국 얼마 뒤 경찰서장은 막중한 수배자의 검거작전을
수행하다 보니 무리했다고 사과한 뒤 피해보상금
1백 90만원을 지급하였다고 한다.
이후 그는 평범한 직장생활을 하게 되었다.
1987년 전국 18개 대학들의 총학생회장들의
조직이었던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서대협)
결성에 참여하였고 곧바로 정권으로부터
수배를 받게 되었다.
지명 수배자...
정현태
(87 경기공업개방대(현 서울과학기술대)
총학생회장)
김연정 (87 덕성여대/불문과 4년)
최진섭 (87 숭실대/국문과 4년 )
이종모 (87 명지대/국문과 4년)
김상돈 (87 광운대/행정과 4년 )
.....................................................................
김현(87년 한양대 총학생회 학술부장)
1984년 한양대학교 사학과에 입학하여,
1987년 한양대 총학생회 학술부장을 맡으며
6월 항쟁에 참여하였고
이후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에서도
활동하며 군부독재 타도와 민주화 투쟁을
위해 걸어 나아갔다.
1988년 재야인사 98인이 정당정치의 필요성에
평화민주당에 입당하면서 학생대표로
참가하였으며, 이후 평화민주통일연구회
총무간사로 활동하였다.
1992년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통합조직
민주개혁정치모임 총무로 조직을 담당하였고
대선 승리 후 민주개혁정치모임 청년위원회의
부위원장을 역임하였다.
2000년 새천년민주당 대변인실 부장에 이어
2002년 서울시장 선거대책위원회 부대변인을 맡았고,
2003년 노무현 정권이 들어서며 인수위 행정관·
청와대 춘추관 행정관에 이어 2005년 1월 대한민국
최초로 여성 춘추관장을 맡게 되었다.
2008년에는 통합민주당 부대변인을 맡게 되었고
2012년 민주통합당 수석 부대변인을 맡았다.
같은 해 민주통합당 제19대 국회에 비례대표로
입성하게 되었고, 민주통합당 대변인을 맡게 되었는데
2014년 세월호 침몰 사고 이후 유가족들과
대리기사 폭행 사건에 연루되며 여론에서
큰 비판을 받게 되며 결국 다음 총선 때 컷오프되었다.
그러나 서울남부지법은 1심과 항소에서
무죄를 선고하였고,
이후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이 터지면서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이 이 사건 수사에
개입한 정황이 드러나며 더러운 내막이
드러나게 되었다.
홍익표 (87년 한양대 정치외교학과 학생회장)
서울 출신으로 1985년 한양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하여 1987년에 정치외교학과 학생회장으로
6월 항쟁에 참여하였다.
이후 한양대 정치학 박사를 수료하며 1996년
대외경제정책연구원에서 통일 문제에 관한
전문연구원으로 근무하였고
참여정부 시절 이재정 통일부 장관의 정책보좌관을
맡게 되며 정치권에 들어오게 되었다.
2012년 제19대 총선에서 민주통합당의 후보로
당선되며 국회에 진입하게 되었고 2013년 7월 민주당
원내대변인으로서 고위정책회의 브리핑에서
"일본 제국주의가 세운 만주국의 귀태
(태어나지 않아야 할 사람) 박정희와 기시
노부스케가 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귀태의
후손들이 한국과 일본의 정상으로 있다.
바로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총리다"라고 말했고
이에 새누리당이 홍익표의 발언을 이유로
국정원의 대선 개입 의혹 국정조사와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열람 등 국회 일정을
전면 중단하자 홍익표는 다음 날
원내대변인직에서 사퇴를 하였다.
19대 국회 상반기에는 외교통일위원회
소속 위원으로 NLL 문제, 간첩 조작 사건,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의 해결을 촉구하였고
글로벌녹색성장연구소의 부실 경영을 파헤쳐
감사원 감사를 이끌어 내었고, 2016년 3월
테러방지법 반대 필리버스터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5월 제20대 총선에서
재선하며 의정활동을 연이었다.
김종기 (87년 부산대 부총학생회장)
부산 출신으로 1981년 부산대 철학과에
입학하였고, 1987년 부산대 부총학생회장
겸 부산가톨릭센터 농성단 대표를 맡게 되었다.
6월 15일 서울에서 지도부의 잘못된 판단으로
명동성당 점거 농성을 해제한 반면
부산은 같은 날, 주말인데도 집회 참가
인원이 1만 명을 넘기면서 다음 날인 16일부터
가톨릭센터 점거 농성을 시작해 항쟁의
불씨를 이어가며 6월 민주항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후 독일 홈볼트대학 철학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부산 민주주의사회연구소
부소장을 맡고 있다.
윤준호(87 동아대 부총학생회장)
동아대 정치외교학과 85학번으로 1987년
동아대 부총학생회장을 맡으며 학생운동권으로
6월 항쟁에 참여하였다. 대학 졸업 후
교수협의회 사무국에서 일하던 그는 1995년
대학 후배였던 부인과 함께 외국어 학원을
설립하여 사업을 시작하였다.
부산에만 7개의 분원을 둘 정도로 성공하였고
2002년 대선을 앞두고 노무현을 지지하며
현실 정치에 뛰어들게 되었다.
노사모로 활동하다 개혁당의 창당 멤버로 참여하여
부산 사하 갑 지구당위원장을 맡았고
2004년 총선 출마를 노렸으나 여의치 않자,
정치를 접고 중국으로 건너갔다.
2012년 김두관 민주당 대통령 경선 후보 사무실에
합류할 때까지 거의 10년 가까운 세월을
중국에서 보냈고, 2014년 해운대·기장갑
지역위원장을 맡으며 6·4지방선거에서
해운대구청장으로 출마하였지만 낙선하였다.
이후 더불어민주당 부산광역시당
해운대기장갑 지역위원장을 맡았다.
박철민 (87년 중앙대 경영학과 총학생회장 직무대행)
당시 386세대와 전라도 광주 출신이 대체로 그랬듯이
그도 열혈 운동권이었다. 1985년 중앙대 경영학과에
입학한 후, 1987년 사회대 학생회장이었던 그는
어용 총학생회장을 몰아내고 불명예퇴진한
이를 대신해 총학생회장 직무대행을 하며 6월 항쟁에 섰고,
대학에서 연극 동아리로 활동하면서도
노동운동이나 학생운동같은 재야단체의 집회의
명사회자로 이름을 날렸다.
노동자들의 삶과 투쟁을 그린 연극을 무대에
올리면서, 학생과 노동자들이 모인 곳을 찾아다녔는데
대체로 재야집회는 무겁고 침울한 분위기가
흐르는데 반해, 박철민이 진행하는 집회는 웃음과
해학이 넘치는 재미있는 분위기였다고 전해진다.
1988년 연극계에 데뷔한 후 노동 연극과 노래극
등에 50여편 이상 출연하면서 배우의 길을
선택하였지만, 90년대 중반까지는 연기로 생활이
잘 되지 않아, 한동안 과일장사를 하다 다시
연극계로 복귀하였다.
2004년 영화《목포는 항구다》에서 연기했던 '가오리'역할이
"이거슨 입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여, 쉭쉭~"이라는
대사와 함께 작품의 흥행과는 별개로 주목을 받았고
이후 찰진 애드립과 함께 극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 감초 역할로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 작품에
출연하며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우현 84학번 연세대 신학과
전남 광주 출신으로 연세대 신학과에 입학하여
재학 중 학생운동에 뛰어들면서 옥살이만
두 번을 해서 소집제외되어 군면제가 되었고,
학번상 6월 항쟁의 선봉에 섰는데 6월 항쟁의
시발점이 된 이한열 열사 최루탄 사망사건 항의
집회에서 당시 연세대 국문과 81학번으로
총학생회장이었던 영정을 든 우상호 위원과 나란히 서
미국 시사잡지의 1면 메인을 장식하기도 했다.
90년대에 들어서 졸업 후 신촌에 주점을 운영하였는데
, 당시 병맥주 전국 최저가로 알려져 있을 만큼
저렴한 값의 주점이라 학생들,
특히 동문인 연대 운동권 학생들의 아지트이기도
하였다고 전해진다.
1988년 연극 제작자로 첫 데뷔 후 사업과는
별개로 제작이나 기획하는 데에만 참여했지만
정작 본인이 연기를 한 것은 그로부터 10년 후
신학과 동기이자 학생운동을 함께한 절친
배우 안내상과의 인연으로 연극 <라이어>로
데뷔하였다. 이때 나이가 서른 다섯으로 배우치곤
상당히 늦은 나이다.
이후 각종 영화들에 단역으로 데뷔하며
주목을 받게 되며,
현재까지도 수많은 영화를 비롯한 드라마에서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있다.
안내상 연세대 신학과
대구 출신으로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서울로
상경하여 청계천 판자촌에 생활하며, 어렵고 거칠고
불우한 유년 시절을 보냈고, 교회를 다니게
되면서 목사라는 꿈을 꾸며 악행을 멈추었다고
회고하였다.
연세대 신학과에 입학하였고, 사회 문제에 눈을
뜨게 되고 운동권 길로 들어가게 되었다.
1988년 광주의 미국 문화원에 시한폭탄을
설치했지만 터지지 않고, 자수하여 8개월 간
교도소 생활을 하였다.
물론 훗날 고백하길 저 당시, 모든 것을 끝낼
오로 준비했고, 지금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반성한다고 밝혔다.
출소 이후 운동권 활동을 접고 연극계로 뛰어들어
배우 생활을 시작하는데, .
운동권 시절에 '한양 레퍼토리' 극단을 만든
한양대 연극과 최형인 교수를 알게 되었고,
이후 그곳에 들어가 설경구나 이문식, 권해효 등 후에
유명해지는 한양대 연극영화과 출신 배우들과
함께 생활을 하면서 배우 생활을 시작한 것이었다.
오랜 무명 연극 배우 끝에 1997년 장선우 감독의 영화
[나쁜 남자]를 시작으로 [공공의 적],
[오아시스] 등 조연을 맡다가 드라마로도 진출하며
그만의 찰진 연기로 배우로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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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항쟁에 참여했던 당시 대학 운동권1988년
정청래,백원우,최재성,오영식,
정명수,이은희,유송화,한병도,여택수,
진성준,박일남,정재교,박동철,김영종,정승원,이희영
정청래 (건국대 공과대학 산업공학과
84학번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2기 결사대.)
충남 금산군 출신으로 1984년 건국대 공과대학
산업공학과에 입학하며 학생운동에
투신하게 되었다.
1988년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2기
결사대로 안기부 요원들에게 끌려가
무차별 폭행을 당하기도 했으며,
1989년에 서울지역총학생회연합(서총련) 소속으로
'그레그 처단과 민족 자주권 쟁취를 위한 반미
구국 결사대'를 조직하여 미국 대사관저에 침입하여
미리 준비했던 사제폭탄과 화염병을 투척하였고
바로 구속되면서 집회및시위에관한법률 위반,
국가보안법위반으로 징역 4년형을 선고받았으며,
집회및시위에관한법률위반, 총포·
도검·화약류등단속법위반,
폭력행위등처벌에관한법률위반, 특수공무집행방해,
현주건조물방화미수 혐의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아
총 6년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자신의 팟캐스트를 통해 당시 자신은 사형을
선고받을 것이라 생각했다고 소회를 밝히기도 하였고
1995년 김영삼 정부의 광복 50주념 기념
8.15 대거 특별 사면 때 복권되었다.
이후 2002년 노사모에 가입하여 활동하였고
참여정부가 들어서며 열린우리당에 입당하며
2004년 17대 총선에서 서울 마포구 을 선거구에서
한나라당 강용석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18대 총선에서는 낙선하였지만,
2012년 19대 총선에서 민주통합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재선되었고,
당시 막말 논란도 있었지만 무려 170건의 법안을
발의하였고, 이 중에서 45건이 본회의에서 가결되는
우수한 의정활동으로도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2015년 김종인이 더불어민주당의 선대위원장 겸
비대위원장으로 영입되면서 선대위와 비대위의
원활한 활동을 위해 문재인 대표와 최고위원들이
함께 2선으로 물러나기로 결정하자
그 역시도 최고위원들 중 가장 먼저 사퇴 의사를
밝히며 2선으로 물러났고 비노계열로 인해
다음 총선에서는 컷오프되었다.
공천 컷오프로 인해 당 안밖의 그의 지지자들이
크게 반발하였지만, 공천 탈락 결정에 승복하고
백의종군을 선언했고, 마포구 을의 새롭게 공천된
손혜원 더민주 홍보위원장의 당선을 위해 적극적으로
도우며 협조하였다.
박근혜 정권 당시 종편 출연을 완강히 거부하였지만,
최순실-박근혜 사태가 터지면서 여러 종편들과
팟캐스트에 출연하며 더불어민주당의 개그 담당이라는
말도 들으며 대중들의 인기를 마실수 있게 되었다.
백원우 고려대 신문방송학과 85학번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연대사업국장)
서울 출신으로 1985년 고려대 신문방송학과
전공으로 입학하여 학생 운동에 뛰어들었다.
다음 해 10월 전국 26개 대학의 2000여명의
학생들이 건국대에서
'전국반외세반독재애국학생투쟁연합'(애학투련)
결성식에 그 역시도 참여하였고
경찰의 진압으로 4일 동안 대치하다
연행되어 구속되기도 하였다.
이후 6월 항쟁이 지나고 대통령 직선제가
수용됨과 함께 사면 복권되었고
그 다음 해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의
연대사업국장에 임명되었다.
1989년 평화민주통일연구회 기획실 간사를
맡게 되었지만, 구속되어 1993년에 사면되어
풀려나고 졸업할 수 있게 되었다.
1994년 재야 출신이었던 제정구 의원의 비서로
정치에 입문하게 되고 1997년부터는
노무현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의 보좌역을 맡게
되면서 참여정부가 들어서면서도 비서실 민정수석실
공지기강 행정관을 맡으며 인연을 꾸준히 유지하였다.
2004년 제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 후보로
당선되고 그 다음 2008년 제18대 총선까지
재선되었고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자 4대강 사업저지
특별위원회 위원을 맡게 되었다.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하면서
국민장 영결식 때 헌화하는
이명박 대통령을 향해
"사죄하라"라고 고함을 질러 제지당하며
검찰 고발당하였지만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후 총선에서 연이어 낙선하였지만,
문재인 정권이 들어서며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실 민정비서관에 임명되었다.
최재성 (88년 동국대 총학생회장)
경기 가평 출신으로 1984년 동국대
불교학과에 입학하여 87년 6월 항쟁에
동참하였고, 그 다음 해 1988년 총학생회장으로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에 결성에
참여하며 이로 인해 수감되기도 하였다.
2004년 참여정부가 들어서며 17대 총선에
열린우리당 후보로 남양주시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이후 열린우리당 대변인,
대통합민주신당 원내대변인 등을 역임하였다.
2008년 18대 총선에서 재선하였고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자 강부자(강남 부동산 부자)내각,
고소영(고려대 소망교회 영남)내각이라는
신조어를 만들며 비판하여 이슈가 되었다.
2012년 19대 총선에서 민주통합당 후보로
3선을 역임하였고,
같은 해 10월 회의 도중 스마트폰으로 애니팡하다
걸려 사죄하기도 하였으며,
2015년 6월 문재인 대표최고위원에 의해 다가오는
총선에서 사무총장으로 임명되어 당직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새정치민주연합의 혁신위원회가 당 사무총장제를
폐지하는 혁신안을 발표하여 한 달여 만에
당 사무총장직을 상실하였고 비주류 측의 사퇴 요구가
강해지자 20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며
김종인 신임 대표 체제가 들어사자 모든
당직에서 사퇴하였다.
당시 소위 비노계와 문재인 당시 대표 측의 대립과
갈등이 극에 치달았던 때였는데,
최재성 의원은 비노계의 '문재인 흔들기'에 앞장
서서 맞서 싸우곤 하였고, 컷오프 된 정청래 의원의
재심을 요청하는 등 당 내부 갈등을 중재하는
역할을 주로 하였다.
2017년 19대 대선에서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며,
최재성 전 의원이 국정으로 들어오거나 다시
정계로 복귀한다는 설이 있었지만,
본인의 페이스북을 통해 "인재가 넘치니 비켜 있어도
무리가 없다."며 백의종군을 선언하고
문재인정부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소신을 밝혔다.
오영식 (88년 고려대 총학생회장)
서울 출신으로 1985년 고려대 법과대학에
입학하였고, 학생 운동권으로 뛰어들며
그 다음 해 6월 항쟁에 참여하였다.
1988년 고려대 총학생회장과 제2기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의장을
맡게되면서 학생운동을 이끌었다.
그의 제2기 전대협 의장 취임식 때에는
무려 2만 명의 인파가 몰렸을 정도로 운동권 내의
그의 위세는 대단하였다.
전대협 의장에 취임한 이후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의 주역인 문부식과 '한미문제연구소
'를 설립하려 했다는 이유로 3년간 감옥
생활을 하게 되었고, 출소 후 대학을
졸업하게 되었다.
김대중 대통령에게 발탁되면서 새천년민주당에
입당하여 2003년 비례대표 의원직을 승계하여
국회에 입성하게 되었지만,
민주당을 탈당하고 열린우리당에 입당함으로써
비례대표 의원직을 상실하였다.
하지만 그 다음 해 2004년 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2012년 19대 총선에서도 의원직을 얻게 되었다.
2013년부터 새정치민주연합 서울특별시당
위원장을 역임하며 박원순 시장의 재선에
기여를 하였지만
2014년 재보선 공천 문제로 당내 작은 불화가
시작되어 2016년 20대 총선에서는 컷오프되었다.
정명수 (88년 연세대 총학생회장)
서울 마포 출신으로 연세대 천문기상학과에 입학하여 학생 운동에 뛰어들었고, 1986년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구속되기도 하였으며, 1988년에는 연세대 총학생회장 겸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2기 부의장/의장 권한대행에 역임되어 민간차원의 통일운동을 본격적으로 선도하며 적십자를 통해 합법적으로 북측의 '평양학생축전 초대장'을 받아 전대협 3기 의장인 임종석에게 넘겨주기도 하였지만, 나중 지령수수죄로 추가기소되기도 하였다. 또한 전두환 5공 비리 및 만행에 대한 구속처벌과 군사정권의 퇴진을 밀어부치는데 일조하며 양심수들의 석방을 외쳤고, 1990년에는 포항에서 현장 노동자로 취업하려 할 당시 대학생 위장취업이 드러나 또다시 구속 수감되기도 하였다. 졸업 후 연대 총여학생회장이었던 이은희와 결혼 후 IT분야의 중소소프트웨어 사업을 시작하였고 2000년 국민의 정부 시절 6.15 남북정상회담으로 각계각층의 민간교류가 시작되면서, 그 역시 전대협동우회장으로 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을 설립하여 서로간의 발전을 위한 남북교류와 이해협력관계를 유지하였지만,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며 막을 내렸다. 민주통합당 정책위 부위원장을 통해 정치계로 입문하였고, 이후 18대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의 부대변인, 박원순 서울시장 후보 정책특보, 더불어 민주당 정책위 부의장 및 언론홍보대책특위 기획단장으로 활동하였다. 2016년 제20대 총선에서 자신의 고향이기도 한 서울 마포 을 선거구로 더민주당의 공천에서 탈락하며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지만 더민주의 손혜원이 당선되면서 낙선하였다.
이은희 (88년 연세대 총여학생회장)
경북 문경 출신으로 유년 시절이 일가족이 서울로 올라와, 가족의 부양을 위해 서울여자상업고에 진학하여 졸업 전 회사에 입사하였지만 사내에 만연한 학력차별 실태에 실망하고 회사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노력한 끝에 1985년 연세대 철학과에 입학하였고 대학 진학 후 사회 현실의 심각성을 깨닫고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1987년에는 김대중, 김영삼 후보단일화와 민주정부 수립을 위해 삭발투쟁을 전개하였고, 그 다음 해 1988년에 연세대학교 초대 총여학생회장으로 선출되며 대동제 기간 중 북한바로알기운동 차원에서 진행한 북한여성사진전을 개최했다는 이유로 구속되었다. 졸업 후 재학 시절 연대 총학생회장을 지낸 정명수와 결혼하며 평범한 가정 생활을 꾸리다, 지방자치 연구를 위해 1997년 연세대 행정대학원에 진학하여 생활정치의 길을 밟게 되었고 마포구청의 명예시민감사관이 되어 구청 현황과 재정, 보건위생 실태조사를 통해 풀뿌리 민주주의를 현장에서 실천하였다. 2001년 개혁연대 운영위원으로 일하던 중 노무현 대선 후보와 결합하여 여성특보로 첫발을 내디뎠고 참여정부가 들어서며 대통령당선자 비서실 정무팀 비서와 대통령 제2부속실 행정관을 거쳐 대통령비서실 제2부속실장을 지냈다. 노무현 대통령 내외를 최일선에서 보좌하며, 2부속실의 주요한 업무인 교육, 문화, 여성, 복지 분야에서 폭넓은 경험을 쌓게 되며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이후 '깨어있는 시민이 되자'는 고인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마포교육문화센터를 설립하였다.
유송화 (88년 이화여대 총학생회장)
전남 고흥 출신으로 이화여대 경제학과로 입학하여 1988년 이화여대 총학생회장을 역임하며 학생 운동에 뛰어들었고, 같은 해 서울지역 30여개 대학의 여학생 대표 3백여명이 종래 남학생들 주도의 범대학운동기구에서 탈피한 독자적인 '서울지역여학생협의회'(여대협)를 발족시켰다. 그리하여 반독재 민주화 투쟁과 더불어 사회적 여성 권리 운동에 대해서도 소리쳤으며, 8.15 남북학생회담과 관련하여 국가보안법 집시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기도 하였다. 졸업 후 노원구의회 의원으로 활동하며 정치에 입문하게 되었고 참여정부가 들어서며 노무현의 여성정책 수립에 참여하였고, 대통령 비서실 시민사회수석실 행정관, 균형인사비서관실 행정관으로 활동하였다. 19대 대선 전 김정숙 여사를 수행하였고,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며 대통령비서실 제2부속비서관으로 내정되었다.
한병도
(88년 원광대 총학생회장 제19대 신방과 87학번)
전북 익산 출신으로 원광대 신문방송학과에 입학하여 재학 중 6월 항쟁에 참여하였고, 1988년에는 총학생회장을 역임하며 학생 운동에 뛰어 들었고 이후 2004년이 되어서 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 후보로 공천되어 당선되며 정계에 입문하였다. 이후 친노계에 속하며 국회에서 산업자원위원회, 윤리특별위원회에 속하여 여러 활동을 하였고 2009년에는 한국-이라크 우호 재단 이사장, 노무현재단 자문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2016년 20대 총선에 출마하였지만 낙선되었지만, 그 다음 해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며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정무비서관에 임명되었다.
여택수(88 고려대 부총학생회장)
고려대 사학과 85학번으로 1988년 부총학생회장을 지내며 민주화 학생 운동에 중심에 있었다. 이후 1997년 대학 선배 안희정의 권유로 지방자치실무연구소를 운영하던 노무현과 인연을 맺고 참모로 일을 하게 되었다. 이후 98년 보궐선거와 2000년 4·13총선에서 노무현의 손발이 됐고, 2002년 2월부터 노무현의 수행비서를 맡으며 국민경선 때는 TV 토론 준비를 맡는 등 궂은 일도 많이 했다. 참여정부가 들어서며 대통령실 제1부속실 행정관을 맡게 되었지만, 2004년 3월 롯데그룹으로부터 3억원의 불법자금을 받은 혐의로 구속되어 같은 해 7월 항소심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현재에는 더좋은민주주의연구소의 부소장을 맡고 있다.
진성준 (88년 전북대 부총학생회장/법학과 1985학번)
전북 전주 출신으로 1985년 전북대 법학과에 입학하여 학생 운동에 뛰어들었다. 1987년에는 법대 학생회장으로 6월 항쟁에 참여하였고, 그 다음 해 1988년 전북대 부총학생회장을 맡았다. 졸업 후 군입대를 하는데, 대학 시절 학생운동 전적 때문에 심한 구타를 당하였고, 군대 내 인권 문제에 관심을 두며 동료들과 해결 방안을 논의하다가 보안사령부로부터 불순 조직으로 몰리며 체포되었고 3년 6개월 동안 육군 교도소에서 감옥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후 1995년 3월 장영달 의원의 권유로 정계에 입문하게 되었고, 2012년 19대 총선에 민주통합당 비례대표로 당선되면서 국회에 입성하였다. 이후 18대 대선 전 문재인 후보의 대변인과 박원순 서울시장 후보의 대변인으로 활동하였고, 추미애 대표 체제가 출범한 뒤 더불어민주당의 민주연구원의 상근부원장으로 임명되었다가 2017년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뒤 청와대 정무기획비서관으로 임명되었다.
박일남 (88년 중앙대 총학생회장/물리학 4년)
중앙대 물리학 전공의 85 학번으로 1988년 총학생회장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서울지역 총학생회연합(서총련) 소속으로 6.10 남북 청년 학생회담 성취를 위한 결의를 가지며 서울지역 대표를 역임하며 통일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뛰어들었고, 전두환에 대한 구속 수사를 요구하며 검찰청사에 들어가 점거농성을 벌이다 경찰에 연행되어 구속되기도 하였다. 이후 동작시민회의 사무국장을 지내며 시민운동을 시작하였고 5.31 지방선거에서 동작구의회의원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지만 낙선하였다.
정재교 (88년 인하대 총학생회장/자원학과)
인하대 자원학과 전공으로 85학번으로 1988년 총학생회장을 역임하며 반독재 민주화와 민족 평화통일을 위해 투쟁하였는데, 북한에 대한 민간 교류를 위한 '6.10 남북한 학생회담'을 조직하여 판문점을 통과하려는 시도를 하다 경찰들의 강력한 저지로 무산되며 연행되었다. 이후 민주화가 이루어진 후 2006년에는 인하대 역대 총학생회장 출신 동문들이 모교에 사후 시신기증서를 전달하고 사망시 보험금 7천만원 전액을 기부금으로 내놓기로 하며 화재가 되기도 하였다.
박동철 (88년 단국대 총학생회장)
단국대 사학과에 입학하여 1988년 총학생회장을 맡게 되어 학생운동권에 뛰어들었고,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국토종단순례대행진 준비위원장도 맡게 되면서 통일선봉대 발대식을 가지며 순례대행진과 8.15 남북청년학생회담을 성사시키기위해 노력하였다. 다음 해 1989년 반제애국청년회 결성에 가담하여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기도 하였고, 문민정부가 오면서 1993년 '군포시민의 모임' 사무국장으로 활동하며 시민운동을 시작하였고 이후 '바른자치를 위한 희망21'의 대표를 맡게 되었다. 2002년 민주당 내천으로 고양시 덕양구 오금동에 출마하며 현실 정치에 도전하기도 하였다.
1988년 당시 대다수의 총학생회장들은 반독재·민주화 투쟁과 평화 통일 운동으로 집회 및 시위에 선봉에 서면서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는 혐의로 구속되기 연속이었다.
김영종 (88년 동아대 총학생회장/ 정외과 3년)
8.15회담 관련 행사 경비7백만원 지원을 요구하며 온몸에석유를 뿌리고 분신 위협을하다가 직원들에 의해 저지됐
정승원 (88년 한림대 총학생회장/ 사학과 3년)
전두환·이순자 구속처벌을 위한 전대협 결사대
이희영 (88년 건국대 총학생회장/섬유공학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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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항쟁에 참여했던 당시 대학 운동권- 1989년
임종석,전문환,문광명,최인호,복기왕,
이기우,박영순,정재훈,신기정,이귀혜,
임봉철,박완주,강동규,고명종,이내창,
이철규,손영모,임상경,장봉수,신영대,
정제민,정재원,안영환,조정신,백기승,
김종희,박상진,임연규
임종석
(89년 한양대 총학생회장/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3기의장)
전남 장흥 출신으로 1986년 한양대 공과대학 무기재료공학과에 입학하였고, 1학년 당시 '소리개벽'이라는 민중가요 노래패에 가입하면서 학생운동에 뛰어들게 되었다. 1987년 6월 항쟁을 겪고, 2년 뒤 1989년 한양대 총학생회장으로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3기의 의장을 맡게 되면서 5공 부활 정권의 억압과 비리를 꼬집으며 반미자주화·평화통일을 위해 적극적으로 투쟁하였다. 당시 세계적인 냉전 종식으로 남북 화해 분위기를 타면서 민간차원의 통일운동을 추진하였고, 적십자를 통해 합법적으로 북측의 '평양학생축전 초대장'을 받아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석하려는 의도를 밝혔지만 정부는 허가하지 않고 그를 간첩으로 몰며 수배령을 내렸다. 전대협 일원은 독일 베를린을 거쳐 평양학생축전에 참가하였고 이후 임수경은 판문점을 통해 다시 넘어오면서 곧바로 체포되었고, 임종석의 행방이 묘연한 가운데 전국에 10만 장의 수배 사진이 붙혀짐과 동시에 포상으로 2계급 특진과 1000만 원의 보상금이 걸려 있을 정도였으며, 그를 잡기 위해 12만 명의 경찰이 동원되기도 하였다. 호감형 외모와 투사의 이미지 그리고 신출귀몰한 행적, 전대협 의장이라는 카리스마 등으로 인해 당시 사회적 신드롬을 일으킬 정도였고 심지어 여고생들이 주로 보는 하이틴 잡지에서 인기순위 1위를 차지하는 일까지 벌어지기도 하였다. 기나긴 도피 생활을 하다 같은 해 말에 체포되어 3년 반의 실형을 살게 되었다.
당시 언론과 갖게 된 인터뷰에서 임종석은 전대협이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지지하는 주사파라는 지적에 대해 “전대협이 지향하는 이념은 자주 민주 통일이며 북한의 주체 사상은 결코 전대협의 지도 이념이 될 수 없다..(중략) 전대협이 반공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북한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려고 하는 것은 사실이나, 정부가 주장하듯 북한을 일방적으로 찬양하는 이적단체는 아니다"라고 밝혔다. 또한 이후 2003년 한총련이 미군부대에 난입했을 때 한총련의 행위가 강성적이고 과격하다고 비판을 하며 현실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고, 현실 정치에 들어오면서 그가 발의했던 정책들은 오히려 친기업, 자본주의적 보수 성향을 띄고 있어 좌측 진보 진영으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한국의 극우 세력들(새누리당-자유한국당)은 그의 과거 운동권 경력과 친북 행보를 두고 본인들의 생명줄이기에 아직까지도 색깔론으로 공격하곤 한다. (과거 NL계열이자 범민족청년학생연합 결성을 주도했다가 이후 극우정치인이 된 하태경 의원도 그가 주사파가 아니며 종북몰이를 그만 둬야 한다며 옹호하기도 하였다)
1993년 5월 원주교도소에서 출소한 이후 8월에 한양대 4학년에 복학하였고, 1995년 8월 대학교 입학 10년 만에 졸업하면서 총동문회장상과 공로상을 받기도 하였다. 출소 후 청년정보센터를 창립하며 시민운동으로서 활동하다, 1999년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면서 사면복권되었고, 그 다음 해 국민의 정부의 ‘젊은피 수혈론’에 따라 16대 총선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당선되며 본격적으로 현실 정치에 발을 들여 놓게 되었다. 2004년 17대 총선에서 재선하고, 열린우리당 대변인도 했지만, 당내에서 큰 두각을 나타내거나 거물급 의원으로 성장하지는 못했다. 2008년 18대 총선에서 낙선하였고, 당내에서만 활동하면서 재기를 노렸고 2014년 지방선거에서 박원순 시장 캠프에서 활약하면서 서울시 정무부시장에 임명되어 박원순계 대표주자 정치인으로 분류되었다. 2017년 대선 전 문재인 캠프의 비서실을 이끌게 되었고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며 초대 비서실장이 되었다. 문재인 대통령의 거의 모든 일정에 함께하며 매번 같은 수트에 같은 넥타이 차림인 것을 보고 네티즌들은 대체 퇴근은 하는거냐는 궁금증을 자아냈고, 이 때문인지 문재인 대통령이 첫 미국 순방을 위해 출국하는 장면에서 유독 너무나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이며 '임종석 해방설'이라고 네티즌들과 여론 사이에서 농담스럽게 퍼지게 되었다.
전문환 (89년 서강대 총학생회장)
1986년 서강대 신문방송학과에 입학하면서 5공 정권 청산과 평화 통일 투쟁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고, 3학년이 되던 해 평양에서 열릴 예정인 '제 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참가를 추진하였다.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의 축전중앙준비위원장을 맡으면서 평양축전에 민간 차원의 대한민국 청년들로 참가하면서 냉랭한 남북관계를 개선과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국제적 연대를 강화한다고 주장하였고 1989년 서강대 총학생회장을 역임하며 정부의 강한 봉쇄가 가해진 데에도 6월 평양 축전 참가하였고, 몰래 귀국하여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촉진하기 위한 '남북학생공동선언문' 초안을 발표하는 등 경찰의 추적을 신출귀몰하며 따돌렸다. 전국에 10만 장의 수배 사진이 붙혀짐과 동시에 포상으로 2계급 특진과 1000만 원의 보상금이 걸려 있을 정도였으며, 그를 잡기 위해 12만 명의 경찰들이 동원되어 모든 대학교 및 동해안 등을 수색하기도 하였다. 전문환을 비롯한 전대협 의장이었던 임종석과 문광명 부의장은 11월 서울대 집회에 나와 15분 가량 연설을 하고 관악산 쪽으로 다시 잠적하면서 경찰들을 쉽게 따돌렸다. 그리고 결국 1991년 2월 국가안전기획부는 그를 검거하였고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하였지만, 전문환은 변호사를 통해 혹독한 고문으로 허위 자백을 강요받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는 서울형사지법에 따라 당시 전대협 소속으로 평양축전에 함께 참가했었던 임수경과 함께 징역 4년을 구형받게 되었다. 1993년 문민 정부가 들어서며, 전문환과 함께 당시 북한 축전을 주도하고 참가했었던 임종석 전 전대협의장 및 간첩 조작 사건들로 억울하게 복역하게 된 시국 관련 양심수들이 특별 사면되었다. 이후 학교를 졸업하게 되었고 1996년 정계 및 종교, 사회 여러 인사들과 함께 한겨례통일문화재단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이후 전대협 동우회장을 맡으며 국회에 입성한 과거 전대협 출신 의원들에 대해 개혁과 민주화를 위해, 국민의 편안한 삶을 위해 의정활동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하며, 친일잔재·군사독재·수구보수 등 기득권의 본질이 바뀌지 않았다며 시민운동을 지속적으로 펼쳤다.
문광명 (89년 서울대 총학생회장)
1986년 서울대 노어노문학과에 입학하여 1989년 총학생회장을 맡으며 학생 운동에 투신하였다. 서울지역총학생회연합(서총련)의 2기 부의장 겸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에서도 부의장을 맡았고 평양축전에 민간 차원의 대한민국 청년들로 참가하면서 냉랭한 남북관계를 개선과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국제적 연대 강화를 주장하며 평양에서 열릴 예정인 '제 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참가를 추진하였다. 그러나 정부로부터 시국 사범으로 몰리고 전국적으로 수배령이 떨어졌지만, 대대적인 검거작전에 전대협 및 서울대학생들은 격렬하게 저항하였고 '노태우 정권 퇴진 투쟁 본부'를 발족하며 본부장을 맡아 수 만명이 참여하는 거리시위와 집회를 주도하였다. 그 해 말 12월 임종석 의장이 구속되면서 전대협의 의장 권한대행을 맡으며, 1990년 3월 전대협 일원들과 함께 '친미·반민주 민자당 일당독재분쇄를 위한 전대협 결사대'를 조직하여 여의도 민자당사를 점거하려 했으나 안기부에 의해 결국 모두 검거당하였다. 국가보안법 및 집시법 위반 혐의로 서울형사지법에 의해 징역 3년을 선고받게 되었는데, 구치소에 들어간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 재소자들의 서적검열과 접견금지의 항의로 시국 관련 수배자 80여명과 함께 구치소 안 교무과장실을 점거하여 교도관들과 크게 충돌하기도 하였다.
이후 1993년 출소하였고 학교를 졸업 후, 1996년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1999년부터 법무법인 세경 변호사로 일하게 되었다. 또한 민주노동당의 인권위원으로 '함께하는 시민행동' 공익소송위원,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등에서 활동을 하게 되었으며, 끊임없이 보수수구세력 타도와 시민 사회를 위해 싸우고 있다.
최인호 (89년 부산대 총학생회장)
부산 출신으로 부산대 정치외교학에 입학하여 1989년 부산대 총학생회장을 역임하여 당시 부산지역 학생 운동을 이끌게 되었고,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3기 부산·울산지역 총학생회협의회 회장(부울총협의장)을 맡으며 같은 해 6월 노태우 정권 타도와 평양축전 참가를 쟁취할 것을 결의하며 도로에서 가두시위를 벌이기도 하였다. 10월 부울총협 선전국장이자 부산외대생 김태수의 아버지가 부산시경 공안분실에 근무하는 경찰이라는 사실로 알려지면서 학생들로부터 프락치로 몰렸고, 김태수는 자신이 감금 후 구타당했다고 주장하며 부산시경에 고소하였다. 김태수는 동료들이 자신을 프락치로 몰아 폭행하였다고 주장하였고, 부울총협은 여러 증거를 대며 그가 프락치가 확실하다고 주장하였지만 폭력은 쓰지 않았다며 서로 혐의를 부인하였다. 그러나 부산시검은 결국 부울총협을 체포하였고 최인호 부울총협의장 역시 구속 수감하였다.
그리고 출소된 이후 노무현의 비서로 처음 정계에 입문하게 되었고, 노무현과 함께 정치적 고락을 같이 하면서 2002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비서관에 이어 참여정부 출범 이후에는 청와대 언론비서관으로 근무하였다. 2002년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재보궐선거에 출마하여 의원직에 도전하였지만 17대, 19대 총선에 연이어 낙선하였고 2016년 제20대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 후보로 부산권 선거에 출마한지 14년 만에 국회 입성에 성공하였다.
복기왕 -(89 명지대 총학생회장)
충남 아산군 출신으로,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가득했던 1986년 그는 명지대학교 무역학과에 입학하였다. 다음 해 6월 항쟁의 한복판에 뛰어들어 4학년이 되던 1989년 총학생회장을 맡게되며 사회번혁을 이끄는 주체로 나서며 등록금 인상 반대 운동을 시도하였고, 같은 해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소속으로 남북청년학생대회에 대표로 참여하며 통일 운동에 앞장섰다. 졸업 후 농산물 유통 분야와 관련된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고,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대학 시절 가졌던 사회에 대한 관심, 연대의 끈을 놓지 않으며 청년단체 안에서 과거 전대협 소속이었던 이인영과 우상호와 함께 현실 정치에 대해 고민하며 대안과 사회개혁을 꿈꾸었고, 전대협 동우회 회장을 맡으며 의기투합하였다.
대선을 앞둔 2001년 문재인, 문성근이 대표를 맡게 되는 '정치 개혁과 국민 통합을 위한 개혁연대' 결성에 주도적으로 나서며 한 축을 담당하였고, 새천년민주당의 노무현을 지지하며 아산시 선거대책위원장을 역임하였다. 노 정권이 들어서며 2003년 대통령 정책실 신행정수도 건설기획단 자문위원으로 활동하였고 그 다음 해, 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 후보로 자신의 고향 아산시 선거구로 당선하게 되며 국회에 입성했다. 그러나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대법원에서 당선 무효형을 선고받고 의원직을 상실하게 되는 불행을 안게 되는데, 이때 문제된 것이 지역주민들의 청와대 관람행사 주선인데, 본인 말로는 관람을 위한 관련 경비를 갹출해서 사용했으나 그 과정에서 확인서를 받지 않은 것이 문제가 되었다고 한다. 이후 피선거권이 복권되며 2010년 민주당 후보로 아산시장에 당선되었고, 그 다음 선거에서도 재선하며 현재에도 시장으로서 아산을 이끌어 가고 있다.
이기우 (89년 성균관대 총학생회장)
경기 수원 출신으로, 성균관대 공과대학 금속공학과에 입학하였다. 당시 시대 상황에 의한 민주화 열기에 동참하여 1987년 6월 항쟁에 함께 하였고, 2년 뒤 1989년 성균관대학교 총학생회장와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수원 지역 대학생대표자협의회 의장을 맡게 되었다. 1990년 보안사에 의해 반체제·극렬분자로 낙인찍히며 구속 수감되어 5년동안 옥고를 치르게 되었고, 출소한 뒤에도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과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전국연합), 수원시민광장 사무국장을 지내며 시민운동에 몸담았다. 그리고 1998년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며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지방선거를 통해 정계에 입문하게 되는데, 당시 31세로 최연소 경기도의회 의원이 되었다.
2002년 16대 대선 전, 노무현을 지원하며 수원시 권선구 선대위원장을 맡아 적극적인 유세 지원을 하며 노무현의 당선을 도왔고, 2004년 17대 총선에 출마하여 국회에 입성하게 되었다. 정계에 있을 당시 금속공학과(이공계) 출신인 그는 이공계 출신들이 여전히 공직에서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고 있다며 정책적으로 배려하고 특단의 지원책을 펴야 한다며 포부를 밝히기도 하였다. 국회보건복지위원회 간사를 역임하고 2007년 초 열린우리당 원내대변인에 임명되며, 2008년 18대 총선에 다시 도전하였지만 낙선하였다.
박영순 (89년 충남대 총학생회장)
충남 부여군 출신으로 충남대 영문학과에 입학하여 1989년 충남대 총학생회장을 맡아 충남 지역 학생운동을 이끌었고,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의 3기 부의장을 지냈다. 같은 해 11월 전대협 소속 동지들과 5공 청산과 공안통치분쇄를 주장하며 민정당 연수원을 점거 농성하였지만 20분여만에 체포되고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다. 대전교도소에 수감 중 시국사건 관련자들의 재소자 접견을 유독 제한하고, 심지어 가족들도 면회가 금지하면서 이에 반발하며 단식 투쟁에 들어가기도 하였지만 가혹행위를 당하며 다른 교도소로 이감되기도 하였다.
1993년 특별사면된 후, 2002년 16대 대선 전 새천년민주당의 노무현 대통령 후보의 정책보좌역을 맡으며 현실 정치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고, 노무현 정부가 출범하자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행정관으로 임명되었지만 이후 지방선거와 총선에서 연이어 낙선하게 되었다.
정재훈 (89년 연세대 총학생회장)
연세대 철학과에 입학하여 학생 운동에 투신하며 1989년 연세대 총학생회장에 역임되었고, 이어 서울지역총학생회연합(서총련)의 부의장으로 내정되었다. 5공 정권이 연장된 노태우 정권에 대항하며 한반도 분단 고착화 저지 투쟁과 더불어 반미자주화운동, 평양청년 학생축전 참가에 대한 문제, 민중생존권 지원투쟁, 학원 자주화 등을 주도하며 집회·점거 시위와 단식농성 등으로 투쟁하였고 같은 해 6월 집시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다. 연세대 총학생회장이자 서총련 부의장으로 구속되자 운동권 세력은 잠시 주춤했지만, 다시 학내민주화투쟁을 열망하는 동지들에 의해 갖은 압박에서도 끊임없이 투쟁해 나아갔다.
신기정 (89년 중앙대 총학생회장)
1986년 중앙대 신문방송학과에 입학하여 1989년 중앙대 총학생회장을 맡게 되며 서울지역총학생회연합(서총련)의 일원으로 학생 운동에 투신하였다. 광주학살·5공비리 주범들과 노태우 정권의 퇴진을 위한 청년학도 투쟁본부 본부장을 맡기도 하였고, 노동운동탄압 규탄결의대회를 열어 적극적으로 투쟁하기를 결의하며 노동탄압, 언론탄압에 항의하며 단식농성을 주도하거나 거리 집회 시위를 이끌며 경찰과 격렬하게 대치하기도 하였다. 7월에는 서총련 농활준비위원회를 출범함과 동시에 좌경용공조작 규탄대회를 열고 남북학생공동선언문을 공표하여 경찰에게 수배됨으로써 1991년 구속되어 징역형을 받게 되었다. 1992년 세계적인 인권 감시기구인 국제사면위원회(엠네스티 인터네셔널)가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을 통해 전국 23개 교도소에 수감 중인 신기정을 포함한 양심수 77명에게 영치금을 보냈는데 교도소 쪽은 이를 모두 반송하여 물의를 빚기도 하였고, 출소 후 전대협 의장 출신 임종석이 만든 청년정보문화센터의 일원으로 시민운동에 나섰다.
이귀혜 89년 이화여대 총학생회장
이화여대 신문방송학과에 입학한 이귀혜는 1989년, 이화여대 총학생회장에 역임하며 이대 학생운동을 이끌게 되었다. 반독재와 통일운동은 물론 당시 사회적으로 남성우월주의가 강했던 탓에 남녀고용평등법을 위반한 회사들을 검찰에 고발하는 등 사회적 성평등을 위해 투쟁하였고, 시국 관련 수배령이 떨어지며 1991년 구속되었다 1993년 사면 복권되었다. 이후 서울대 석사 및 박사 학위를 수료하고 서울대 및 연세대, 동국대 ..등등 여러 대학에서 강사로 활동했으며 2016년 선거토론방송위원회 위원이자 청주 YWCA 여성종합상담소 운영위원회 위원, 커뮤니케이션인재연구소 소장을 맡았다. 2017년부터는 통영시지속가능발전교육재단의 사무국장으로 역임되었다.
임봉철 (89년 한남대 총학생회장)
한남대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하여 1989년 한남대 총학생회장으로 11월 전대협 소속 동지들과 5공 청산과 공안통치분쇄를 주장하며 민정당 연수원을 점거 농성하였지만 20분여만에 체포되고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다. 대전교도소에 수감 중 시국사건 관련자들의 재소자 접견을 유독 제한하고, 심지어 가족들도 면회가 금지하면서 이에 반발하며 단식 투쟁에 들어가기도 하였지만 가혹행위를 당하며 다른 교도소로 이감되기도 하였지만 이후 특별사면되었다. 이후 시민 운동 활동을 이어가면서 민주당 대전시당 정책실장을 맡으며 정치에 입문하게 되었고, 2014년 새정치민주연합 소속으로 대전 대덕구 시의원에 도전하였고, 그 다음 해엔 대전시당 지방자치위원장을 맡았다.
박완주 (성균관대 89년 성균관대 부총학생회장)
충남 천안 출신으로 성균관대 한국철학과에 입학하여 학생 운동에 뛰어들었다. 6월 항쟁 당시 수감되기도 하였으며, 1989년에는 성균관대 부총학생회장을 역임하여 민주화 투쟁을 주도하였다. 졸업 후 동서산업에 근무하면서 아산공장 노동조합 부위원장을 역임하였고, 2004년 대학시절 성균관대 총학생회장이었던 이기우 의원의 보좌관으로 정계에 입문하게 되었다. 민주당 소속으로 총선에 도전하지만 연이어 낙선하였고 2012년 19대 총선에서 본인의 고향이기도 한 충남 천안시 을 선거구로 당선되었다. 2014년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부대표를 역임하면서, 충남도지사 지방선거에서 안희정 지사의 재선 캠프 대변인을 맡기도 하였고, 같은 해부터 2015년까지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변인을 역임하였다. 2016년 그 다음 총선에서도 압승으로 재선을 하였고 2016년 더불어민주당 원내수석부대표를 맡게되었다.
강동규 경희대총학생회장
1986년 경희대 법학과에 입학하여 법대학생회 간부를 맡으며 사회 현실에 직접적으로 뛰어들었고 1989년 경희대 총학생회장을 맡아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의 일원 및 서울지역총학생회연합(서총련) 동부지구의장을 맡으며 학내 등록금 동결등을 요구하며 싸웠고, 反5공 정권과 평화민족통일을 위해 적극적으로 투쟁하다 국가보안법 혐의로 구속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후 국회사무처에서 일하면서 한겨레 통일문화재단에 국민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2003년 민주당 김옥두 의원의 보좌관에 이어 2008년 민주당 행정안전위원회 이무영 위원의 수석보좌관으로 임명되어 일하게 되었다.
128 고명종 (89년 서원대 총학생회장 22)
1966년 ~ 2007년 3월 15일
1989년 서원대 총학생회장 겸 전대협 충북대협의장을 맡아 학생 운동에 투신하며, 당시 추진하고 있던 평양학생축전 참가 등을 준비하였지만 구속되어 옥고를 치르게 되었고 1992년에 출소한 뒤에는 고향 충주로 돌아가 농사를 지으면서 농민운동을 함께 하였다. KYC 지방자치센터 부소장을 거쳐 2002년 제4대 충주시의회에 출마하여 충주시의원에 당선되었는데 2006년 희귀암의 일종인 악성 흉막 중피종이 발병하여 시의원직을 사퇴하고 서울대 병원 등에서 투병을 해오다 결국 2007년 3월 15일 세상을 떠났다.
이철규 열사 (조선대 전자공학과 4학년 25
조선대학교 교지 편집위원장)
조선대 전자공학과에 입학하여 1985년 11월 반외세독재투쟁위원회 활동과 관련해 국보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다가 1987년 7월 가석방 되었고, 이후 전횡을 일삼던 조선대 재단을 몰아내는 데 앞장선 인물이었다. 1989년 당시 그는 교지인 민주조선에 <미제 침략사 100년사>를 게재해 국보법 위반 혐의로 광주 전남지역 공안합수부에 수배중이었고 현상금 300만원에 1계급 특진이 걸려 있던 상태였는데, 같은 해 5월 3일 밤 10시 쯤 택시를 타고 친구를 만나러 가는 중 경찰의 심문을 받게 되었는데, 일주일 후 바다에서 변사체로 광주 청옥동 제 4수원지 상류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이철규의 사체는 발견 당시 얼굴을 위로 한 채 물 위에 떠있었는데 얼굴이 심하게 상해 있어서 누구인지 알아 볼 수 없었고 경찰은 당시 택시강도 혐의자를 위해 일상적인 검문을 했을 뿐 이철규인지는 몰랐으며 검문 도중 이철규가 도망가는 바람에 놓쳤다고 발표하며 논란은 더 커졌다. 타살 가능성이 높아지자 전남지역 대학교수와 재야인사, 학생들을 중심으로 '애국학생 고 이철규 열사 고문살인 규명 대책준비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이철규의 사망원인을 무리하게 고문하다 발생한 사건이라 규정하면서 이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시위가 잇따랐다. 그러나 검찰은 국과수에 재부검을 요청했고 국과수는 5월 14일 몸의 각 장기에 플랑크톤이 발견됐다며 익사라 발표했고, 검찰도 국과수 발표를 근거로 단순익사라 공식발표하였다. 유족들이 이에 반발하였고 시체 재부검을 위해 미국 인권의사회 소속 법의학자 로버트 커쉬너가 입국 했으나 검찰의 방해로 1차 부검 당시 슬라이드 조차 보지 못하였다. 그리고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며 출범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2004년 5월 이 사건에 대해 당시 학원 민주화 운동으로 취임한 이돈명 총장과 진보적 교수들을 몰아내고 광주지역 학원 민주화 운동을 짓밟기 위한 공작으로 안기부가 개입하였다고 밝혔다. 진상규명위원회의 요청으로 이 사건의 법의학적 감정을 맡은 일본 법의학자 카미야마 자타로 교수의 감정에 의하면 직접적인 사인은 익사인 것 같으나 그 전 외부의 갖은 구타에 의한 큰 상처를 입은 뒤에 물에 던져진 걸로 보인다는 것이었다.
이내창 열사 (중앙대 안성캠퍼스 총학생회장)
중앙대학교 안성캠퍼스 조소과에 입학하여 1989년 총학생회장을 맡았는데, 1989년 8월 15일 뜬금없이 400km나 떨어져 아무 연고가 없는 전남 거문도 어느 샤워장 옆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경찰은 당시 그가 총학생회에 의한 스트레스로 혼자 여행갔다가 실족에 의한 익사라고 발표하였지만 주변 지인들은 당시 8월 15일 광복절 집회를 구상 중이였기에 그의 죽음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게 되었다. 이내창 열사가 떠올랐던 바다는 수심이 굉장히 얕아 성인 남성이 빠질만한 깊이가 아니었기도 했고, 결정적인 것은 발견 당시 익사에 의한 사망이었긴 하지만, 외부 충격(구타)의 흔적이 곳곳에서 있었고, 목격자들에 의한 진술에서는 당시 낯선 경비정같은 배 한 척이 있었으며, 이내창 열사가 어느 커플과 섬 안에서 함께 동행하였다고 진술하였는데, 목격자 중 한 다방종업원은 그 외부에서 온 커플과 일행들이 본인들이 학생이며 본인들을 만나적이 없다고 요청했다는 것이었다.
조사 결과 그 커플의 한 여성(도연주)은 당시 국가안전기획부 인천지부 직원이었고, 그 커플의 일행 중 한 중앙대 학생 역시도 사실상 프락치이자 안기부 직원이었다. 하지만 당국에서는 의문사로 단정지어 깊은 조사없이 모두 풀어줬고, 안기부 직원 여성은 휴가를 맞아 자신의 남자친구와 함께 거문도에 거주하는 친구의 집을 방문했던 것이라고 해명하면서, 당시 이내창 열사를 만난적도 없고 다방을 간 적도 없다고 진술하며 목격자들의 진술에 대해 절대적으로 부정하였다. 훗날 2002년이 되어서야 의문사진상규명위원에서는 안기부(국정원)에 대해 도씨에 관한 자료를 요청하였지만, 안기부에서는 자료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현재까지도 진실은 밝혀지지 않고 있고 이내창 열사의 유해는 경기도 이천 '민주화운동기념공원'에 안장되어 있다.
손영모 (89년 건국대 총학생회장)
임상경 (89년 숭실대 총학생회장)
장봉수 (89년 명지대 용인캠퍼스 총학생회장)
신영대 (89년 전북대 총학생회장)
정제민 (89년 국민대 총학생회장)
정재원 (89년 한국외대 총학생회장)
안영환 (89년 인천대 총학생회장)
조정신 (89년 전남대 총학생회장)
백기승 (89년 동아대 총학생회장)
김종희 (89년 해양대 총학생회장)
박상진 (89년 청주대 총학생회장)
임연규 (89년 한양대 안산캠퍼스 총학생회장)
https://www.youtube.com/watch?v=kINRoUzGkg4&ab_channel=%E5%AE%AE%E5%AE%B6Entertainment
첫댓글 국회의원 이라는게 성분?을 보면..
판검사 출신과 운동권이 대부분을 차지 하고
있죠..
당연히 판검사 출신은 운동권이 없는게
당연 하구요...열심히 시험공부를 했으니까요..
처음부터 변호사인 운동권은 적지만..
있지요..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바보가 둘 있죠.
노무현과 문재인...
당시에 변호사는 고수입을 얻을수 있는
직업 이었습니다.
지금 널린게 변호사 이지만...
돈도 안되는 노동자 운동권 학생들을
변호 하면서 반평생을 보낸 정말 바보죠..
이념 이라는것은 변하는것 일까요?
변질 됬다면...처음 부터 그것은 이념이 아니고
수단이고 방편 이었을 겁니다.
정치는 잘 훈련된 전문가가 필요한
단계 인것 같습니다.
운동권 이나 판검사 출신이 아닌...
민생과 개혁을 동시에 할수 있는 프로
정치인이 절실한 요즘 입니다.
프로 정치인이 필요한 시대에ᆢ전적으로 동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