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식 / 내 운명은 인연이 결정한다 『나의 인생 나의 문학 1편』
... 한국문인협회 문단실록 3호... 2022.6.25. 발행
■ 안재식 『나의 인생 나의 문학 1편 』
- 내 운명은 인연이 결정한다
。 한국문인협회 문단실록 3
。 2022년 6월 25일 발행
。 정가 30,000원
내 운명은 인연이 결정한다
안재식(1942~) 시인
내 부친의 고향은 용인 백암면 용천리 밤골이다. 백암평야 너른 들판에 새가 날 듯 홀로 우뚝 솟은 조비산(鳥飛山) 아랫동네다. 증조는 진사, 조부는 통정대부 삭주부사(정3품)를 지낸 사대부 집안으로 부친은 한학에 능통하였다. 일제하 부친은 용인에서 행정사, 측량기사를 하다가 골드러시 열풍이 불자 고향을 떠나 강원 정선 용탄리 일대 100만평의 금광을 경영했다.
부친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 만주에 별말씀도 없이 여러 번 왕래했다는 모친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혹시 독립운동자금을? 부친은 나라 잃은 슬픔과 몰락한 선비 집안의 애환을 달래고자 함인지, 두보의 樂游園歌 구양수의 秋聲賦 유령의 酒德頌 소동파의 赤壁賦 제갈량의 出師表 등 손수 붓으로 쓴 행초(行草) 필사본을 여러 권 유산으로 남겨주셨다. 수십 편의 자작시도 함께 남기셨다.
나 역시 부친의 영향으로 문청시절 습작을 많이 했다. 심지어 해군에 자원입대한 후에도 콘세트 막사 한켠에 촛불을 켜고 습작을 했다. 미쳐서 산 세월, 어림잡아 소설이라고 쓴 원고지가 일만 매는 훨씬 넘겼으리라. 그때 일간지 신춘문예에 여러 번 낙선(한 번은 결심에 올랐으나 2% 부족)하고는 포기하고, 생업에 매달렸다. 그로부터 시인, 작가는 존경과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2021년 9월 마지막 화요일, 나는 중요한 일을 처리하려고 집을 나섰다. 세상은 온통 미세먼지로 컬러를 도둑맞은 듯 흑백의 거리가 낯설다. 동대문세무서를 찾아가 1980년 5월 1일부터 운영하던 ‘한국서적공사’ 폐업신고서를 제출했다. 사유는 코로나 무실적이라고 썼다. 세무서 직원은 아무 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됐다.”는 한마디뿐이었다. 세금을 잘 내서 명색이 모범납세자고, 특별서비스를 받던 처지에 조금은 섭섭했다. 내친김에 동대문구청에도 출판사 폐업을 신고했다. 애지중지 키워온 출판사를 41년 5개월 만에 문을 닫은 것이다.
그런데 시원하지도, 섭섭하지도 않다. 이상스레 덤덤한 마음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고마워하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는데, 그때 그 사람들 어느 누구도 관심이 없다. 생계와 삶이 연계된 짐, 그 짐을 지고 다녔던 시간에 비해 순식간 단출하게 처리된 종이 한 장, 폐업사실증명원이 늙어버린 내 손에서 팔랑거린다.
돌이켜보면 출판사를 처음부터 천직으로 삼은 건 아니다. 인연을 따라 운명이 정해졌을 뿐이다. 나는 출판사를 경영하면서 많은 문인들과 교류했다. 문청시절로 되돌아가 문학이 나의 전부인 양 빠져들게 된 것이다.
1976년부터 나는 한국굳윌 사무국장으로 장애자복지와 관련한 일을 하고 있었다. GOOD WILL은 ‘자선이 아닌 기회’라는 철학으로 1908년 미국 보스턴에서 설립된 장애자 직업자활서비스를 위한 세계 최초의 조직이다. 당시 22개국에 200여 비영리기관이 연대하여 국제적 활동을 하고 있었다.
1981년은 UN이 정한 ‘세계심신장애자의 해’ 였다. 이를 기념하여 여러 단체들이 각종 행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일회성에 그치는 행사였다. ‘병든 몸보다 남의 고통을 외면하는 병든 마음이 더 큰 병’이라는 테레사 수녀의 외침을 치유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나는 이방자(영친왕비) 자행회 총재, 김동극 자혜학교장(한국특수교육협회장), 황년대 정립회관장(한국소아마비협회장) 등 사회복지분야 활동가들의 권유로 ‘독서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그 시절에는 장애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차별이 심했다. 고통받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긴 책을 읽고, 그들을 바르게 이해하고, 그들의 자립재활을 돕자는 취지였다. 그런데 독서를 하려면 책이 있어야 하는데, 장애자복지에 관한 책이라곤 김영혁 한국굳윌 이사장의 『사람을 보라』 외에는 전무 상태였다.
출판에는 문외한이지만 나는 도서출판 ‘한국서적공사’를 창업했다. 서둘러 작가들에게 원고 청탁을 하고, 『재활문고』를 시리즈로 출판하였다.
이렇게 시작한 ‘제1회 재활문고 읽기운동’ 전국학생 독서감상문 및 심신장애자 생활수기 모집 행사는 해를 거듭할수록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물론 행사 주관은 내가 담당하고, 주최측은 정립회관, 자행회 등이 번갈아 맡아서 했다.
위 행사는 연례적으로 13년간 지속되다가 1993년 제13회를 끝으로 마감하였다. 그동안 희로애락이 참으로 많았다. 매년 시상식을 할 때마다, 특히 장애자 생활수기를 시상할 때는 눈물 없이는 보지 못할 풍경이 벌어지곤 했다. 눈물바다, 감격의 장면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1991년 낙동강 페놀오염사건이 터졌다. 이 사건은 마시는 물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환경문제가 바로 우리들의 생존이 달린 문제라는 걸 깨닫게 해줬다. 그로부터 수돗물을 불신하게 되었고, 정수기를 사용하던가 생수를 사먹기 시작했다.
자연보호헌장 첫구절에 ‘사람은 자연에서 태어나 자연의 혜택 속에서 살다가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말이 있지만, 돈이 되는 일이면 콩나물에 농약도 넣고, 죽순에 표백제도 바르는 세상이 되었다. 나는 독서운동을 했던 경험을 살려 자연보전・생명사랑・인간존중을 슬로건으로 ‘녹색운동’에 뛰어들었다.
1995년 사회단체 ‘한국녹색교육협회’를 창립하여 이사장에 취임하고, ‘제1회 녹색문고 읽기운동’ 전국학생 환경과학 독후감 공모대회를 실시했다. 산하단체로 ‘한국녹색문학회’를 만들고, ‘녹색문학상’을 제정하여 전국의 내노라하는 문인들의 원고를 공모, 시상하였다. 입상작은 『녹색문고』로 출판, 전국 서점에 배포했다. 첫해부터 열화와 같은 성원이 답지했다. 연례행사로 진행하다가 2001년 제7회를 끝으로 마감하였다.
30여 년간 장애자 재활과 환경보전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한 ‘독서운동’은 UNICEF, 보건사회부, 환경부, 교육부, 문화관광부 등 중앙부서와 EBS교육방송, 조선일보, 동아일보, YTN 등 언론사 후원으로 행사의 공신력을 인정받았다. 시상식은 세종문화회관, 전경련국제회의장 등에서 성대하게 치루고, 각 신문 방송이 앞다퉈 행사를 보도했다.
그동안 후원기관인 각부장관, 단체장들의 상장 말고도, 내 명의로 시상하는 상장을 받은 학생, 지도교사, 각급학교장이 30,000여 명이 넘는다. 상당수의 입상 학생은 문학특기자전형으로 우수 대학에 입학하는 영예를 안기도 하였다.
나는 행정부나 기업체로부터 재정적인 뒷받침을 한 푼도 받지 않았다. 여러 차례 재정적 지원 제의가 있었지만 번번이 거절하였다. 왜냐하면 행사의 독립성이 저해될까 우려되었고, 간섭받는 게 싫었다. 30년 독서운동은 나만이 할 수 있었다는 자부심을 안겨주었고, 사회공헌에 이바지했다는 뿌듯함은 나의 긍지였다.
매년 2~50만 명이 응모하는 대회이기 때문에 집필에 참여한 작가들로서는 전국적인 명성을 얻기에 충분했다. 집필작가는, 하청호 김영일 박홍근 송명호 이상기 최균희 박성배 이동태 함종억 장영주 송재윤 김철수 김영훈 김선태 송재찬 이상교 김상삼 심후섭 곽영석 박형구 노경실 김병규 류근원 차원재 김원석 이규희 이영두 등 100여 명이 참여했다. 매년 심사를 맡아 수고한 인사로는, 집필작가 외에 이재철 김신철 최태호 김동극 김한룡 최홍규 유경환 임원재 조대현 박광정 등 제씨였다.
중간에 청탁원고가 펑크나거나 태작(駄作)일 경우, 내가 대신 집필을 했다. 문청시절 습작한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1985년 『꽃동네 아이들』 집필을 기점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월간 『아동문학』 동화부문, 계간 『자유문학』 시부문 천료로 본격적인 문단활동에 들어갔다.
1992년 『조갯터에서 생긴 일』, 1993년 『공룡을 닮아가는 지구사람들』, 1996년 『지구야 웃어봐』 를 잇달아 집필하였다. 1998년에는 『아낌없이 주는 지구』가 환경부 우수환경도서로 선정되었고, 환경부장관의 문학부문 표창까지 받았다.
1995년 소설 『야누스의 두 얼굴』을 집필할 때의 일이다. 앞니 3개가 빠질 만큼 몰입해서 작품을 썼는데, 주인공을 저세상으로 보내면서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다. 어느 날, 일면식도 없는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박용덕 사무총장께서 전화를 주셨다. “교보문고에 꽂혀 있는 『야누스의 두 얼굴』을 읽고 감명을 받았다. 권장도서로 추천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그런 연유로 1996년 9월 제23차 청소년 권장도서목록에 오르는 영광을 안았다. 사람의 운명, 인연이란 참으로 신묘함을 느낀다.
그 후에 출간한 창작동화집 『검정고무신을 신은 제비꽃』은 면목역광장에서 ‘팬 사인회’를 가졌고, 설화집 『설화의 고향, 중랑』, 『설화에게 길을 묻는다』는 중랑문화원의 창작지원금(각1000만원)을 받아 집필하기도 했다.
2005년 여러 차례 사양했음에도 중랑문인협회 회장으로 추대됐다. 1995년 같은 창립회원인 송영택 초대회장이 지방으로 이사를 하여 부득이 맡게 된 것이다. 그때의 중랑문협은 친목단체 수준이었다. 나는 문호를 활짝 개방하고 신입회원들을 받아들였다. 구청 예산을 받기 위해 보조금지원단체 등록을 하였다. 중랑문학상 상금도 구청 예산으로 시상했다. 문학기행을 대형버스로 다니기 시작했다. 『중랑구민신문』 『중랑뉴스』 에 회원들의 작품을 연속 게재하였다.
그당시 한국문협은 구(區)단위가 있는 서울이나 부산 등에는 지회만 있고, 지부는 1곳도 없었다. 내가 처음으로 2006년 8월 18일 (사)한국문인협회 중랑지부창립 초대지부회장으로 취임 인준을 받았다. 대도시 최초로 승인된 인준1호인 셈이다.
2년 임기를 마치고, 나는 후학양성에 남은 열정을 쏟아붓고 싶었다. 2007년 3월, 전국 최초 종합문학강좌인 『중랑문학대학』을 중랑문화원 부설로 설립하고 개강했다. 내가 지도교수를 맡아 수강생모집, 강좌운영, 특강초청, 재정문제 등 제반사항을 책임지고 운영했다. 강의는 장르별로 나누지 않고 시, 시조, 동시, 동화, 수필 등을 한교실에서 수업받는 형식이다. 1년과정으로 총64회 각2시간씩 강의에 심혈을 쏟았다. 수강생 중에는 대학교수, 단체장 등도 상당수 있었다. 해를 거듭할수록 인기가 좋아 마감일 이후에 접수하면 1년을 기다렸다가 입학하는 경우도 흔해졌다.
나는 기교를 부려 글쓰는 방법을 가르치지 않는다. 문인이기 이전에 사람으로서 갖춰야 할 품성을 먼저 강조한다. 특히 동양철학의 근간인 사단(四端 : 惻隱之心 羞惡之心 辭讓之心 是非之心)과 사덕(四德 : 仁義禮智)의 실천에 방점을 둔다.
2010년에는 중랑문학대학 출신들의 본격적인 문단활동을 돕기 위해 ‘소정문학창작실’을 개소, 심화과정을 운영하였다. 수십 명의 등단문인을 중심으로 ‘소정문학동인’이 결성되었고, 동인활동은 현재도 이어지고 있다.
베란다 화분에서 용케 살아남은 꽃기린이 오늘따라 핏빛이다. 비좁은 공간에 물감공장을 차리고 세상에나! 요렇게 예쁜 모습으로 꽃피우는 재주가 경이롭다. 나는 수십 년간 어떻게든 사계절 내내 붉은 꽃을 피워보려 애쓰는 꽃기린을 키우고 있다. 때맞춰 물을 주고, 1년에 한 번씩 영양제도 준다. 햇빛 좋은 날에는 창문을 열어 바람을 쐬어준다. 그러면서 나는 꽃에게서 배운다. 누구에게나 인연의 시작은 운명까지 결정한다는 것을... 꽃기린이 산통을 겪으면서 꽃을 피우는 것처럼 ‘고난의 깊이를 간직한 것이 문학’이라고 믿는다.
| ▶안재식(安在植) 약력 1942년 서울 신설동 출생. 한국문인협회 편집위원, 국제PEN한국본부 자문위원, 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 한국아동문학회 지도위원, 「소정문학」 동인, 중랑문학대학 출강. 수상 : 환경부장관 표창(1997. 문학부문), 한국아동문학작가상 외 시가곡 : 「그리운 사람에게」 등 20여곡 저서 : 『야누스의 두 얼굴』 등 20여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