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고갱의 의자
의자, 그렇다 빈 의자다. 그러나 의자는 충만하다. 촛불, 그리고 책 두 권, 그것들이 여백을 채운다. 노란 촛불은 빛과 열을 동시에 발산하며 공간을 훈훈하게 한다. 공간을 자기가 주도하려는 것만 같다. 그리고, 아마도 의자 앞에는 한기나는 몸을 녹일 벽난로도 있을 것만 같다. 누군가 앉아서 책을 읽을 것만 같은, 혹은 마악 독서를 마치고 자리를 비웠지만 아직도 체온이 느껴질 것 같은. 그래서 공간은 풍요롭다.
빈센트 반 고흐의 〈고갱의 의자〉. 의자만을 대상으로 한다면 가장 큰 그림이리라. 클로즈 업으로 시야를 가득 채운 의자의 구도가 대담하다. 의자는 화면을 뚫고 이쪽으로 걸어 나올 것 같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구도가 대담할수록 묘한 불안감이 야기되고 있으니. 자세히 보라. 의자가 균형을 잃고 앞으로 기우는 것 같지 않은가. 오른쪽 팔걸이를 지탱하는 다리는 화폭에서 완성되지 못한 채 잘려졌다.
이미 초는 앞 쪽으로 많이 기울었다. 촛불은 시나브로 창백하게 여위어 가고 곧 픽하고 쓰러질 것 같다. 두 권 중 한 권의 책은 바닥으로 추락하기 직전이다. 그래서 그림은 풍요와 안락함보다 어떤 불길함을 은폐한 것 같다. 의자를 중심으로 묘한 긴장이 형성된다.
색조 역시 불안감을 증폭시킨다. 온화한 노란색은 일견 정서적인 안정과 심리적인 유대감을 형성하는 것 같지만, 차다. 그것은 눈을 시리게 하는 진한 녹색이 벽면을 비롯하여, 여기저기 포진하며 분위기를 장악한 탓이리라. 그래서 온기를 띤 초의 불꽃마저 창백한 빛을 띤다. 벽면을 원형으로 밝히는 등마저 빛과 온기를 동시에 상실했다. 진한 고동색의 안정감 있는 의자의 다리 역시 차가운 푸른 색에 의해 냉혹하게 찢겨졌다. 색의 부조화가 심기를 불편하게 한다. 그림은 마치 폭풍전야의 고요를 연상시킨다.
따라서 이 그림은 안락과 풍요, 그리고 불안과 초조라는 모순되는 두 심리가 팽팽하게 충돌한다. 그러나 이 아슬아슬한 공존은 곧 와해될 것이다. 유리처럼 깨질 것이다. 추락하는 책이 은유하는 것처럼 곧 닥칠 불안한 사건에 초점이 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고흐가 의자를 소재로 자신과 고갱과의 애증, 그리고 곧 있을 파탄을 비유적으로 드러냈기 때문이다.
처절한 외로움에서 탈피하기 위해 전 생애를 걸었던 사람. 그러나 고통에 영원히 주박(呪縛)당한 사람. 고독하고 버림받은 사람. '고흐', 라는 이름만으로도 고통과 기쁨을 맛보던 광기의 시절이 있었다. 그를 알았다는 것만으로 절망의 사춘기는 아름다울 수 있었다. 고통에 가위 눌리기를 자청한 그 앞에서 어쩌면 우리가 체감하는 고통의 강도는 유치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고흐는 절망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러나 이 그림을 완성한 시기, 그는 잠깐 빛났다. 아를에 마련한 숙소에서 고갱과 함께 생활하며 작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고갱과 함께 할 수만 있다면, 하고 그는 얼마나 학수고대했던가. 그는 동생 테오에게 간절하게 고갱과의 만남을 거듭 부탁했었지. 그리고 그것이 현실화되었을 때, 그는 행복했다.
파이프가 놓인 고흐의 의자
파이프가 놓인 고흐의 의자
알려진 대로 고흐는 자신의 방을 수도원의 방처럼 꾸미고(고흐의 초라한 의자를 보라), 고갱을 위해서는 의자 12개와 거울 등을 마련하는 등 최대한 호화롭게 치장했다. 그들은 함께 사창가를 드나들었고, 같은 그림의 주제를 서로 변주하고 토론했다. 그러나 행복은 한 달을 넘기지 못했다. 특히 그림에 관한 토론이 과열되면서 격앙된 목소리가 둘 사이를 난폭하게 찢었다.
처음부터 개성이 강한 그들이 공동생활을 영위할 것이라는 기대 자체가 회의적이다. 성적 욕망이 강하며 자기 중심적인 거만한 고갱과, 미학적이고 윤리적이며 격정적인 고흐의 관계는 사실 견원지간이다. 고갱은 에밀 베르나르에게 보낸 편지에서 "풍경이건 사람이건 다 시시껄렁하고 구질구질하기만 해. 빈센트와 나는 사사건건 충돌하는데 그림에서는 더욱 그래"하고 밝힌 바 있다. 그렇다. 그들은 사사건건 충돌했다. 그리고 강도를 더해 갔다.
피로한 논쟁과 화해, 또 다시 반복되는 다툼은 그들을 사슬처럼 얽어 맸다. 파국이 가깝다고 내심 느끼는 순간 그것은 의외로 빨리 왔다. 고흐는 귀를 잘랐다. 1888년 12월 23일, 고갱이 아를에 도착(10월 28일)하고 두 달을 채 넘기지 못한 저녁이었다. 고갱이 자신을 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 다시는 홀로 지옥 같은 외로움을 극복할 수 없으리란 두려움이 이처럼 자기학대로 나타난 것이다.
사건 발생 전날, 그들은 카페에 있었다. 고흐는 압상트를 주문했고 술잔을 고갱을 향해 던졌다. 고갱은 유리잔을 피하며 고흐의 몸을 강하게 압박하며 자리를 피했다. 바로 그 다음날 고흐는 자신의 무례를 사과했다. 그러나 고갱은 단호하게, 어쩌면 너의 목을 졸랐을지도 모르며, 괜찮다면 이제 돌아가겠다는 편지를 테오에게 쓰겠노라고 통보했다. 날벼락이었다. 또 다시 고독 속에 영면해야 한다면 차라리 죽는 것이 좋으리라, 그는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날 저녁. 면도칼을 들고 고갱의 뒤를 밟다가 마침내 자신의 귀를 자른 것이다.
그 날을 고갱은 이렇게 회상한다. "그날 저녁 나는 한술 뜨는 둥 마는 둥 하다가 혼자 밖으로 나가서 꽃이 만발한 월계수 향내가 진동하는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빅토르 위고 광장을 반 정도 가로 질렀을 때 빠르고 불규칙적인 낯익은 발소리가 들렸다. 뒤돌아 보니 고흐가 면도칼을 손에 들고 나에게 달려 오고 있었다. 내 얼굴에 겁먹은 표정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인지 그는 우뚝 멈추더니 머리를 숙이고 집을 향해 돌아 갔다." 그날 밤. 거울 앞에서 자신을 노려 보며 고흐는 귀를 머리 가까이까지 도려냈다.
이 그림이 완성된 것이 11월(반 고흐 미술관 도록)이니 고흐는 앞으로 닥칠 고갱과의 파국을 절망적으로 예견하고 갈등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니까 고흐는 고갱과 함께 하는 행운에 감사하면서도 동시에 닥칠 이별을 두려워 한 것이다. 이 그림이 일견 안락하면서도 어떤 불안을 담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 그림을 고갱의 부재에 대한 고흐의 기대와 후회라는 모순감정으로 읽는 것은 이 때문이다. 고흐 혹은 고갱은 서로에게 빈 의자만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