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은 행복한 삶을 추구한다. 그런데, 행복한 사람보다는 불행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더 많은 원인은 무엇 때문일까?
고대철학자들은 삶의 현상보다는 만물의 근원은 무엇인가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는데, 우주에서 좋은 삶이란 어떤 것일까? 인류가 아직도 답을 구하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 최초로 답을 찾으려고 시도했던 철학자중 한 사람이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였다.
그는 우주는 역동적이고 끊임없는 변화와 대립 속에서도 우주적 지성에 따라서 조화를 이루는데, 이 우주적 지성을 로고스Logos라 부르고 그것은 불로 이루어졌다고 믿었다. 그의 영향을 받은 스토아학파 철학자들은 자연이 인간에게 의식, 이성, 자유의지라는 축복을 내렸고 이런 축복 덕분에 인간은 모든 상황에 자신을 적응시켜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모든 역경은 훈련일 뿐이라고 하면서, 하나의 과정으로 받아들이면 된다고 한다. 마치 권투코치가 스파링파트너를 붙여 주듯이 신은 우리에게 역경을 보내 준다는 것이다. 흔히 우리가 금욕주의라고 배웠는데, 그들이 추구한 최고의 선은 아파테이아Apatheia로 마음에 파토스가 없는 상태, 즉 육체적인 고통보다는 정신적인 즐거움, 평정심을 추구하였다.
그리고 서로 경쟁관계에 있었던 에피쿠로스학파의 창시자 에피쿠로스Epicouros는 친구들과 아테네 외곽의 강 근처의 올리브 밭 가운데에 있는 집을 구입하여 철학공동체를 설립하여 정원이라 부르고 입구표지판에는 ‘낯선 자들이여 여기 머무르십시오. 여기서 최고의 선은 즐거움입니다.’라고 썼다.
그들이 추구하는 최고의 선을 아타락시아Atarxia, 고통이 없는 상태, 즉 부동심이다. 에피쿠로스는 즐거움은 존재의 알파이자 오메가라고 가르쳤다. 절대적인 선이나 악은 없고, 즐거움으로 이끄는 생각과 행동, 고통으로 이끄는 생각과 행동이 있을 뿐이라고 하면서 고통을 피하고 즐거움을 추구하며 살았다. 여기서 즐거움이란 신체에 고통이 없고 영혼에 문제가 없는 상태이다.
그는 성공하여 많은 돈이 있더라도 친구와 자유, 사색하는 삶이 없다면 진정으로 행복할 수 없을 것이고, 비록 부는 얻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친구와 자유, 사색을 누린다면 우리는 결코 불행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결핍에서 오는 고통만 제거된다면 검소하기 짝이 없는 음식도 호화로운 식탁 못지않은 쾌락을 제공한다고 하였다. 즉 쉽게 이야기하면, 최고급 자동차를 가졌다고 하더라도 친구가 없다면, 훌륭한 별장을 소유했다고 하더라도 자유를 만끽하지 못한다면, 최고급 침대시트를 가졌다 하더라도 고민이 너무 많아 잠을 이룰 수 없다면 우리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인생의 목표를 행복이라고 하면서 인간의 본성에서 가장 고결하고 좋은 것을 추구하는 데서 오는 기쁨을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라고 했다.
그 후로 공리주의자 벤담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주장하면서 에피쿠로스철학을 정치적인 철학으로 바꾸려고 노력했다. 21세기에 와서 알랭 드 보통이 세운 인생학교에서 행복에 대한 강연을 하였던 리처드 레이어드 경은 ‘행복을 위한 행동’이라는 정치운동으로 전개하여 전 세계 3만 명이 넘는 지지자를 모았다.
그리하여 영국정부는 2010년에 국민의 행복지수를 측정하기 시작하였다. 행복과학자들의 연구를 통하여 개인이 얼마나 행복한지, 사회전체가 얼마나 행복한지를 측정해 정책에 반영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행복과 경제적 풍요와는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이 여러 통계를 통하여 밝혀지고 있다. 국민소득이 매우 낮은 부탄이나 방글라데시, 미얀마 등이 국민의 행복지수가 가장 높게 나왔다.
1998년 미국 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먼 회장은 긍정심리학이라는 분야를 출범시켜 긍정심리학의 병적 특면에 부정적으로 초점을 맞추는 것을 넘어서서 인간을 더 행복하게 만들자는 긍정적 목표를 내세워 습관적 믿음을 바꿈으로써 좋은 삶이 어떤 삶인지 묘사하였다.
그는 행복의 비전에는 긍정적 감정, 참여, 관계, 의미, 성취의 다섯 가지 요소가 있다고 말한다. 즉, 기분이 좋은 상태로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좋은 관계를 형성하여 의미를 부여하여 몰입할 때 우리는 성취감을 느끼고 행복한 미소로 크게 웃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심리학에서는 눈과 입 주변 모두를 움직이는 진짜 웃음을 ‘뒤센 스마일’이라고 부른다. 1952년에 미국 메이저 리그에서 뛰었던 야구 선수들 중, 2009년 6월 이전에 사망한 선수 150명의 사진을 분석해서 이들이 뒤센 스마일을 짓고 있는지, 입 주변만 웃는 억지웃음을 짓고 있는지, 아니면 전혀 웃고 있지 않은지를 조사했다. 그런 다음 이들이 몇 살에 사망했는지를 조사했다.
분석 결과, 1952년 당시의 사진에서 전혀 웃지 않았던 선수들은 평균 72세까지 살았고 억지웃음을 웃었던 선수들은 평균 75년을 살았지만, 뒤센 스마일을 지었던 선수들은 평균 80세까지 산 것으로 나타났다. 건강하게 오래 사니까 웃는 것이 아니라 젊은 시절 표정이 밝았기 때문에 오래 산다는 점을 보여 주는 연구 결과이다.
그리고 친구가 많은 사람은 우울증과 아픔에 시달리지 않고 더 장수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나도 한 때, 성공의 대열에 함유하려고 긴장하고 스트레스를 받고 보여지는 현상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좋은 직책과 빵을 찾아 방황하며, 소중한 시간을 허비하며, 마음의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한 적이 있었다. 또한 그것을 극복하려고 부단한 독서와 사색을 하면서도 가족과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망 때문에 깊은 상실감과 자괴감에 괴로워해야 했다. 그러나 모든 욕망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마음을 비우고 현재의 나의 존재를 인정하고 타인의 존재도 있는 그대로 인정하자, 마침내 진정한 행복과 소소한 삶의 의미가 다가왔다.
인문학 독서 열풍이 불고 있는데 그 이유는 인문학은 땅, 부자, 명성, 권력을 가져다주지 않지만 내면의 풍요와 행복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독서로부터 지혜를 얻어, 우리는 슬픔과 걱정과 분노를 멀리하고 기쁨과 평안 그리고 정의와 자유를 선택 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슬픔으로부터 우울이 시작되고 걱정으로부터 불안이, 분노로부터 적개심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죽음 질병 가난 미신 등 주요인을 사색을 통하여 누구에게나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고도 필요한 것이라는 인식을 가짐으로써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최소한의 의식주로도 우리는 즐거움과 평안 그리고 우정을 통하여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고대철학자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추구하는 행복의 방법론은 다르지만, 최종적으로 추구하는 삶의 목적이 행복이라는 것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마치 네잎클로버(행운)를 찾기 위하여 수많은 세잎클로버(행복)를 짓밟고 있지는 않는지, 또한 성공을 위하여 수많은 미소와 이타심을 잃어버리고 있지는 않는지, 지나온 삶에 대한 복기가 필요하다.
진정한 성공과 행복은 자주 웃고 많이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성공하면 행복한 것이 아니라, 행복하면 성공한다.
(정갑수 님의 수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