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온선생묘 (沈溫先生墓)
영동고속도로 동수원 톨게이트를 나오면서 광교 신도시를 바라다보면 왼편 산아래 심온선생 묘가 눈에 들어 온다.
심온의 묘역에는 무덤 이외에 홍살문을 비롯하여 외삼문, 내삼문, 재실, 신도비와 비각, 사당인 안효사(安孝祠) 등이 조성되어 있다. 1979년 9월 10일에 경기도 기념물 제53호로 지정되었으며,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이의동에 위치한다.
심온(沈溫, 1375~1418)은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청성백(靑城伯) 심덕부(沈德符)의 아들이며 소헌왕후(昭憲王后)의 아버지이자 세종의 장인이다. 그가 1418년(태종 18) 영의정으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가게 되었는데, 귀국 도중 의주에서 체포되어 수원으로 압송되어 사사되었다. 그가 국구로 세력이 커짐을 염려한 좌의정 박은(朴訔)의 무고로 밝혀져서 사후에 세종은 그의 관작을 복구해 주었다.
묘역 규모는 750㎡이며, 봉분의 규모는 높이 170㎝, 직경 650㎝이다. 묘역은 장대석(長臺石)으로 계절(階節 : 무덤 앞에 평평하게 만들어 놓은 땅)을 쌓아 2단으로 조성하였으며 제1단에는 봉분 앞 백대리석에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의 글씨로 된 묘비와 상석(床石)이 있다.
묘비는 총 높이 101㎝, 너비 46.5㎝, 두께 7.5㎝이고 전면에는 ‘유명조선국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영서운관사 청천부원군증시안효심공지묘(有明朝鮮國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府事領書雲觀事 靑川府院君贈諡安孝沈公之墓)’라는 명문이 있다.
제2단에는 장명등(長明燈)과 좌우에 문인석 한 쌍이 있다. 묘소에서 조금 떨어진 마을 입구에는 1737년(영조 13)에 세운 신도비(神道碑)가 있는데 비문은 9세손인 심단(沈檀, 1645~1730)이 글을 짓고 서명균(徐命均, 1680~1745)이 글씨를 썼으며 전액(篆額)은 정제두의 문인인 심육(沈錥)이 썼다.
1979년 9월 10일에 경기도 기념물 제53호로 지정되어 있으나 묘역 관리는 후손들에 의해 이루어 진다고 했다. 후손들이 살고 있는 집이다.
홍살문이다 그 넘어에 사당이 보인다.▼▼▼
1737년(영조 13)에 세운 신도비(神道碑)가 있는데 비문은 9세손인 심단(沈檀, 1645~1730)이 글을 짓고 서명균(徐命均, 1680~1745)이 글씨를 썼으며 전액(篆額)은 정제두의 문인인 심육(沈錥)이 썼다▼▼▼
신도비 옆에 있는데 아마 묘비의 머리석이 아닌가 생각된다.
안녕사라는 사당이다.
내삼문은 언제나 굳게 잠겨져 있다.
다른 여느 묘소보다 더 깔끔하게 관리되고 있는게 눈에 보인다.
묘소에서 바라본 사당 내삼문과 외삼문은 굳게 닫혀 있다.
멀리 광교신도시 건물들이 마천루를 이루고 있다.
문인석의 표정이 온화한 느낌이 든다.
나중에 문인석에 대해 정리를 하고자 한다.
아담하기까지한 장명등.
세종대왕의 장인. 곧 부원군의 묘역치고는 아담하다.
봉분 앞 백대리석에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의 글씨로 된 묘비와 상석(床石)이 있다.
묘비는 총 높이 101㎝, 너비 46.5㎝, 두께 7.5㎝이고 전면에는 ‘유명조선국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영서운관사 청천부원군증시안효심공지묘(有明朝鮮國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府事領書雲觀事 靑川府院君贈諡安孝沈公之墓)’라는 명문이 있다.
지금 이것은 모조품이고 진품은 수원역사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