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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찰 벽화로 배우는 부처님의 지혜 > 제1회 / 여시아문 如是我聞
어느 날 사찰에 갔다가 대웅전 뒷편 벽면에 부처님 일대기를 그려놓은 벽화를 본 적이 있다. 사찰 법당의 벽에 벽화로 불화를 그려놓은 것은 한자로 되어 있는 경전이 어렵기도 하거니와 요즘같이 역경譯經사업으로 많은 한글 불교경전들이 나오고 있으나 과거 글을 몰랐던 중생들이나 일상에서 불경을 접할 시간이 없는 신도들이나 불교에 대하여 제대로 공부가 부족했던 분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에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것이 그림인 까닭에 불화를 법당벽에 그려 넣었을 것이다. 물론 깊이 있는 공부를 하려면 당연히 경전을 통해야 되겠지만 ~
이것을 대중에게 쉽게 전달할 방법이 없을까?하고 생각하면서 본인의 블로그 "래용의 잡설"에 옮길 요량으로 사진을 찍었다. 집에 와서 사찰벽화로 보는 부처님 일대기를 검색하다가 마침 대한불교 천태종 편집국에서 「사찰벽화로 배우는 부처님의 지혜」란 책이 발간된 것을 알고 교리도 배워볼 겸 블로그에 옮겨 보기로 하였다. 비록 마음속으론 스스로 불자라고 자처하지만 소인같이 무늬만 불자인 신도님들이나 불교에 관심을 가진신 분이라면 알기쉽고 부담없이 다가갈 수 있을 것으로 사료되기에 「사찰벽화로 배우는 부처님의 지혜」가 그 길잡이 역할을 할 것으로 사료되기에 공유하고자 하는 바램에서 편집을 시작합니다.
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 소백산 소재 대한불교 천태종 총본산 구인사救仁寺 (좌) 천태종은 고려 숙종 2년에 대각국사 의천스님에 의해 우리나라의 천태종 역사가 시작되었으나 그간 끊겼던 법맥을 원각 상월(圓覺上月, 1911~1974) 스님이 1945년 5월 ‘억조창생 구제중생(億兆蒼生 救濟衆生)의 신조로 중창하셨다. 전국에 말사 108개를 거느리고 있다. 구인사 승려들은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수행하는 주경야선(晝耕夜禪)의 실천을 통한 신도위주의 사찰운영을 하고 있으며 애국불교·대중불교·생활불교를 지향하고 있다 / 부산 삼광사 (우) 대한불교 천태종 제2의 사찰로 등록신도수 40만명에 달한다
< 이야기를 펴며 >
불화, 불상에 생명을 불어넣는 불교의식을 점안點眼이라고 합니다. 새롭게 만들어진 불상이나 불화, 탑에는 의례에 따라 바른 절차를 거쳐야 비로소 종교적 의미가 부여됩니다. 점안의식으로 불상이 새롭게 태어난다면, 사찰벽화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은 그림 안내서격인 벽화 이야기라고 하겠습니다. 벽화는 방대한 경전의 가르침이나 전해 내려오던 설화를 배경으로 한 폭의 그림으로서 표현한 것입니다. 따라서 내용을 모르고서는 그림이 전하고자 하는 의미를 제대로 살릴 수 없습니다.
벽면에 그려진 그림만 봐서는 왜 스님이 소를 타고 가는지, 위태위태한 절벽위에 까치발로 서 계신 스님은 누구인지, 부처님께서 왜 뼈 무덤에 큰 절을 하시는지 도통 알 수가 없습니다. 이해는 커녕 괜한 오해를 불러오기 십상입니다. 더욱이 벽화가 그려진 시대가 지금과 전혀 상황이 다르고, 문화적인 차이도 큰 까닭에, 어떤 내용인지 듣지 않고서는 그저 사찰을 장식하는 미술품으로서의 가치만 남게 됩니다. 소나 마차라고는 가까이서 본 적도 없는 아이들에게 큰 소가 이끄는 수레보다는 전기차, 거대한 여객기가 더 쉽게 이해되는 그런 세상이 되었습니다.
물론 그림 그리는 화공의 생각이 벽화로 그려지기까지는 무수한 생각과 고민을 거쳐 붓을 들게 되었을 것입니다. 때문에 간혹 제목없는 그림만으로 무엇을 말하려는지, 어떤 그림인지 명확하게 이해하기가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무심사 관세음보살 점안식 (좌) / 전통의 맥을 잇는 사람 사찰 단청공사 (우)
따라서 벽화 앞에 선 사람들이 그림을 바라보며 부처님의 가르침이 일깨워지거나, 문득 떠오르는 교훈적 설화가 있다면, 설령 그것이 원래의 의도와는 다를지언정 새롭게 해석하여도 무방할 것입니다.
한량없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벽화 속에 함축되었습니다. 원래의 그림이 무엇이었든 바라보는 이에게 부처님의 법문이 들리면 됩니다. 아무 생각없이 보면서 그냥 스쳐 지나갈 것이 아니라, 마음에 한 줄기 희미한 동요라도 일어났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러나 내용을 알고 보면 더욱 의미있고 흥미로운 것이 사찰벽화입니다. 그러기에 본 책의 필요성이 더욱 절실히 느껴집니다.
사찰의 법당이 부처님의 가르침처럼 무한하게 존재하지는 못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낡고 상하기 마련이기에 수시로 뜯어 고치는 것이 일상입니다. 법당을 고칠 때 자연스레 단청을 새롭게 그려 넣습니다. 이때 벽화 또한 예외일 수 없습니다. 지금 볼 수 있는 벽화가 몇 해 뒤에도 그 자리에 있으란 보장은 없습니다. 따라서 기록으로 남겨 주는 일 자체가 의미 있는 일입니다.
한 권의 책으로 모든 벽화를 소개하기는 어렵습니다. 대신 우리가 절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그림으로, 그 중 불자들이 살아가는데 교훈이 될 만한 것들로 간추렸습니다.
어려운 부처님의 가르침을 마치 동화처럼 꿈꾸고 싶다면, 당장 법당 마루에 앉아 내민 창으로 빛나는 부처님의 그림을 새겨보기 바랍니다. 벽화를 보며, 마음 속 깊은 곳으로 내비치는 부처님의 법문에 가만히 귀 기울여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 녹음이 무른익은 여름 대한불교 천태종 총무원
Ⅰ. 여시아문 (如是我聞)
1. 내 깊은 뜻 누가 알리오
2. 여래의 씨앗을 갈무리해 둔 곳간
3. 보이는 것들에 편혹되지 말라
4. 바르게 피어나는 햐얀 연꽃
5.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길
부처님 법문을 듣는 청중들 - 단양 구인사 광명전 벽화로 그려진 불화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부처님께서 계실 당시에는 부처님의 말씀을 문자나 어떤 다른 방법으로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원래 인도에서는 외워서 전하는 형태의 암송이 전통적인 지혜의 전달 방식이었습니다. 불교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부처님께서 살아계시기 때문에 부처님의 말씀을 별도로 기록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궁금한 내용이 있으면 찾아뵙고 여쭈면 쉽게 해결될 일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라는 뜻의 여시아문如是我聞은 경전의 첫 머리에 붙는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하셨던 법문이 암송되어 시대의 변화에 따라 경전으로 옮겨졌습니다.
따라서 모든 경전이 시작될 때 여시아문이라고 하면 '이렇게 들었다'라는 뜻인데, 결국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언제 말씀을 하셨는지, 그 곳이 어디였으며 누가 참석을 했는지 등 설법하신 배경을 마치 증명처럼 경의 첫머리에 적게 됩니다.
부처님의 설법에는 많은 대중이 법문을 듣기 위해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여러 보살님들이 참석하였고, 덕 높은 스님들과 수 많은 하늘의 천신, 왕족, 평민 누구든 구분하지 않았습니다. 부처님은 가르침을 배우고 싶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법을 전했습니다. 마치 대낮의 환한 태양이 모든 곳을 밝혀주는 것과 같은 평등입니다. 하늘에서 큰 비가 내리면 차별없이 모든 곳을 적셔주는 것과도 같습니다. 두 손모아 합장한 모든 이들에게 우리의 부처님은 언제나 한 말씀으로 법을 설하고 계십니다.
단양 구인사 광명전 벽화에는 부처님께서 설법하시고, 대중들이 법문을 듣고 있는 모습이 벽화로 그려져 있습니다. 두 손 모아 우러러 보는 청중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이 마치 꽃비처럼 내려오고 있습니다.
1. 내 깊은 뜻 누가 알리오
노사나불로 화하시어 화엄경을 설하시다 - 단양 구인사 광명전 벽화로 그려진 불화
"신기하고 신기하여라!
어찌 이 모든 중생들이 여래의 지혜를 모두 갖추고 있는가!
그런데 어리석고 미혹하여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구나."
부처님께서 진리의 세계를 보셨을 때 이루 말할 수 없는 희열을 느끼셨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무엇을 보셨는지, 진리가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인지 감히 우리가 알고자 한다면, 그것은 욕심이지 않을까요. 부처님께서도 해탈의 세계를 보신 후, 중생들에게 전하는 것을 망설이셨다고 합니다. '과연 누가 큰 가르침을 알아들을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때 하늘의 천신, 범천이 나타났습니다. 이대로 진리의 말씀이 전해지지 않는다면, 중생을 제도할 방법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이시여, 법을 설해 주소서. 비록 이 세상은 먼지로 가렸지만, 사람들이 법을 듣지 못한다면 더욱 타락해 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에는 법을 이해하는 자도 분명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천신의 거듭된 간청을 들어 지혜의 눈으로 세상을 두루 살펴보셨습니다. 사람들의 수준은 참으로 다양했습니다. 마치 호숫가의 연꽃과도 같았습니다. 어떤 연꽃은 진흙 속에 잠겨 꽃을 피우지 못하기도 하지만, 또 어떤 연꽃은 물 속에 뿌리를 두었지만 물 위로 올라와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심하셨습니다. 진흙 속만 벗어난다면 본래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저 연꽃들처럼, 중생들을 어리석고 악한 마음에서 구제해 주리라 다짐하신 것입니다.
『화엄경』은 부처님께서 처음으로 가르친 경전으로 심오한 부처님의 말씀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심오한 탓인지 중생들의 마음속에 분명 참된 성품을 모두 갖추고 있지만, 아직까지 진리의 내용을 듣고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마치 진흙이 너무 두꺼워 빛을 보지 못하는 연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어려운 법문이라도 듣고 또 듣게 되면 반드시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진흙이 아무리 두껍더라도, 걷고 또 걷어내면 그 아래 맑고 투명한 샘물이 드러나는 것과 같습니다.
2. 여래의 씨앗을 갈무리해 둔 곳간
아난존자에게 능엄경을 설하시다 - 단양 구인사 광명전 벽화로 그려진 불화
'마음은 어디에 있을까' 누구나 한번쯤 떠 올리는 의문입니다. 만약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다면, 나를 괴롭히는 마음의 아픈 상처를 깨끗이 지워 버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병원 진료나 수술을 통해 상처를 치료하는 것 처럼, 마음만 찾아 꺼내어 의사에게 고쳐 달라고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 마음속에는 여래의 성품이 들어 있습니다. 그 성품을 불성佛性이라고 하는데, 그것을 찾아내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의 목적입니다. 그런데 불성을 찾으려면 어디에 담겨 있는지 구체적으로 알아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마치 연못 속에 잠긴 연꽃줄기를 물 밖으로 꺼내는 일과 같다고 했습니다. 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 캄캄한 물 속에서 연꽃줄기가 뿌리내리고 있는 곳, 그 곳을 찾는 일은 좀처럼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럼에도 더듬더듬 흔적을 따라간다면, 반드시 연꽃줄기를 두 손으로 움켜잡을 수 있게 됩니다.
『능엄경』은 부처님께서 제자 아난존자와 함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물음과 답변으로 이어지는 경전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부처의 성품이 되는 그 마음을 찾고자 합니다.
부처님께서 다정한 표정을 지으시며 세심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여래의 씨앗을 갈무리해 둔 곳간"이라고. 그 곳이 어디에 있는지 궁금하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었을 때 과연 내 마음이 어디서 울리고 있는지 귀 기울여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3. 보이는 것들에 현혹되지 말라
수보리에게 반야경을 설하시다 - 단양 구인사 광명전 벽화로 그려진 불화
마음을 찾는 여행의 도착지에 어마어마한 보물이 들어 있을까요? 아니면 텅 빈 곳간만 덩그러니 남아 있을까요? 하지만 혼자만 들어갈 수 있는 내 마음속 창고입니다.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나 외에는 가 본 사람도 없으며, 나 외에는 갈 수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가 내 마음에 도착한다면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몹시 궁금합니다.
『반야심경』은 불자라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누구나 외우게 됩니다. 관세음보살님께서 지혜를 닦는 수행의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해 놓은 경전입니다. 반야심경이라면 대부분의 불자들은 '색즉시공'色即是空이라는 말을 떠 올립니다. 여기서 '색'色은 우리가 받아들이는 모든 '대상'을 대표하는 말입니다. 구체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들, 귀에 들리는 소리, 코로 맡아지는 냄새, 혀에 전해지는 맛, 손이나 신체로 만져지는 것등 우리 감정이나 느낌을 일어나게 하는 모든 대상을 색이라고 생각하면 쉽습니다.
그 색色이 공空하다는 말이 색즉시공色即是空입니다. 관세음보살님께서 지혜로 바라보니, 모든 대상은 사실 그때 그때 변하는 것이지 항상 그 모습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는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시간에 따라 다르고, 장소에 따라 다른 것이 색즉시공의 이치입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말이 있는데, 내 눈에 내 자식은 그렇게 귀하고 예뻐 보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남의 집 자식이라면 눈에 넣을 생각이라도 할까요? 또 가족끼리 외식으로 고기 집을 갔는데, 고기 굽는 냄새가 배고픈 식당 안에서는 그렇게 행복할 수 없더니, 막상 배부르게 먹고 나오니 옷에 밴 냄새가 좋게 여겨지지 않습니다.
단지 상황만 조금 바뀌었을 뿐인데, 전혀 반대의 결과가 되어 버렸습니다. 인연법因緣法이 변한 것입니다. 그 인연을 공空이라 생각해 보면, 색즉시공이란, 같은 대상이라도 그 때의 인연에 따라 내가 갖는 느낌과 생각이 모두 바뀐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 제자 가운데, 공의 이치를 가장 잘 깨우친 해공제일解空第一수보리 존자에게 부처님께서 반야경을 설하고 계십니다. 마음을 찾기만 해서 되는 게 아닌 것 같습니다. 마음이 모두 공空이라고 하십니다. 혹시 우리의 마음 창고도 텅 비어 있는 것일까요?
4. 바르게 피어나는 하얀 연꽃
사리불에게 법화경을 설하시다 - 단양 구인사 광명전 벽화로 그려진 불화
바른 마음가짐으로 심성心性을 바르게 하면 내 마음에도 하얀 연꽃이 피어납니다. 무거운 진흙을 뚫고 흙탕물 속에서도 새하얗게 피어난 연꽃들 처럼, 중생의 마음도 무명無明의 번뇌를 걷어내어야 합니다.
그렇게 여래의 씨앗을 갈무리해 둔 곳간을 찾아 싹을 틔우니, 하얀 연꽃 한 송이가 바르게 피어났습니다. 각각의 연꽃 봉우리에는 한 분 한 분의 불자님들이 앉아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게 됩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든 세상, 말법의 시대가 닥치더라도 그 곳에 바른 마음으로 살아가는 한 중생만 있다면, 그 청정한 마음을 연못삼아 연꽃의 미묘한 향기가 부처님 가르침처럼 전해질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세상을 부처님께서 오가시는 도량으로 만들기 위해 『법화경』의 큰 가르침이 중생들에게 전해집니다.
5.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길
경전이운經典移運. 우마차를 이용해서 경전을 옮기는 모습 - 단양 구인사 광명전 벽화로 그려진 불화
부처님의 가르침을 담은 경전은 부처님의 육성과 마찬가지입니다. 부처님을 모시듯 예를 갖추어 머리에 이고 두 손으로 떠 받치고서 경전을 옮겨갑니다.
옛날 인도에서 서역을 거쳐 삼장법사께서 모셔오던 불서 행렬이 그림과 같지 않았을까요, 앞선 동자가 받쳐 든 향불을 따라, 스님과 대중의 원력으로 경전이 모셔지고 있습니다.
경전이운經典移運이란, 부처님의 말씀인 경전을 다른 곳으로 옮긴다는 의미입니다. 마치 법륜(法輪: 부처의 敎法)을 굴리 듯 우마차에 가득 실은 부처님의 말씀은 열 개의 살로 이루어진 수레바퀴를 따라 동서남북 시방十方세계 곳곳마다 부처님의 자비광명을 기다리는 곳으로 전해집니다.
다음 회에 계속됩니다.
[출처] < 사찰 벽화로 배우는 부처님의 지혜 > 제1회|작성자 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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