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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목사 안수에 대하여
Ⅰ. 한국 교회에서의 여자 목사 안수
한국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져 교회가 세워지고 교단의 시발이 되는 독노회가 세워진 이래 남자가 맡아 왔던 목사직이 지금은 남, 녀 모두가 맡고 있는 시대에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여자 목사를 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만큼 그 수가 많습니다.
한국 교회는 목사로 임직하는 안수를 남자에게 행해왔으며, 여자에게는 금해왔었습니다. 이는 우선 한국 교회의 최초의 노회가 되는 1907년 독노회가 세워졌을 때 33인의 선교사와 36명의 장로가 교회 규칙을 만들었는데 목사와 장로는 세례 받은 남자여야 한다고 명시적으로 규정한 것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이후 여러 노회가 구성됨으로 인해서 총회를 만들 것을 필요로 하여 1912년 총회가 조직될 때는 여자는 전도하는 일에만 전념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여자 안수 문제 건이 나왔습니다. 이것은 여자 장로를 세울 수 없는가에 대한 문제로 1932년에 경안노회에서 처음 질의와 답변이 되었는데, 이때 "본 정치에선 여자를 장로로 세울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1933년 함남노회에서도 여신도 103인과 노회장의 명의로 여신도의 장로 자격에 대한 헌의가 올라왔을 때 "개정할 필요가 없다"고 부결하였습니다. 1935년 제24회 총회시에는 "여자는 장로가 될 수 없음이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라며 차후에 다시 여자 장로 문제를 들고 나오는 사람은 엄중히 처리한다고 결의하였습니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여장로건이 문제화 되자 1955년에는 여장로를 대체할 수 있는 직분인 '권사' 제도를 신설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장로의 안수건은 집요하게 계속 청원, 헌의, 부결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1994년 총회(통합측)에서 701:612로 여성 안수건이 통과되어 가결됨으로써 여자 목사가 배출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장로교단에서 통합측과는 별도로 장로교회에서 보수주의로 알려져 있는 재건측 장로교회에서 1951년에 최덕지 여전도사를 목사로 안수하여 최초의 여자 목사가 배출되었습니다. 그리고 한국기독교장로회에서도 1956년에 여자 장로제도를 채택했으며, 1974년 제59차 총회에서는 "목사는 신앙이 진실하고 교수 능력이 있는 사람으로"라고 '교수 능력이 있는 사람'으로 표현하여서 남녀 모두 목사 안수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명시화하였습니다. 그에 따라서 1977년 기장측 경기노회에서 양정신이 기장측 여자로서는 최초로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이후 여자 목사가 배출되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이번에 장로교단에서 합동정통에서도 여성 목사 안수가 가결되어서 통과될 가능성이 유력하다는 기사도 나오고 있습니다.
장로교단 외의 교단으로서는 감리교단에서 감리교단에서는 1931년부터 여자 목사가 있어왔습니다. 감리교단은 1931년 발행한 '교리와 장정'에서 교직자의 자격에 '남녀구별은 없음'을 명시화하여 여자 목사 제도를 승인하였으며, 이에 따라서 한국에서 활동하던 여선교사 중에서 베어, 채핀 등 14명이 최초로 양주삼 총리사로부터 안수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해방 후에는 전밀라, 명화용 2명이 기독교대한감리회 중부연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아 한국인의 여자로써는 최초의 목사가 되었습니다.
또한 성결교단에서는 대한예수교성결교회측에서 2003년에 여자 안수안을 가결하였으며, 기독교성결교회측에서도 2004년에 역시 가결하여 통과시킴으로써 이후 여자 목사가 배출되었습니다.
이제는 여자 목사 안수는 한국교회에서는 범교단적으로으로만이 아니라 범교계적으로도 행해져 오고 있습니다. 여자를 목사나 장로로 임직하기 위하여 안수를 행하는 문제는 루터교회에서도 1965년에, 성공회에서는 1975년에 각각 승인하여 오고 있습니다.
그런 중에서도 여자 목사 안수의 반대를 일관되게 고집하며 주장해 오는 교단도 있습니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은 전반적으로 여자 목사 안수를 찬성하거나, 전폭적인 찬성은 아닐지라도 교회 내에서의 여자의 위상 문제를 고려하여 현실적으로는 인정하여서 허용하는 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교단의 생존과 관련하여서 그러한 편입니다. 왜냐하면 신학교(신학원, 신학대학교)에서 군소 교단일수록 여자의 수가 많은 편이며, 여자 목사 안수를 허용하지 않을 경우 그 대다수는 여자 목사 안수를 허용하는 교단으로 옮겨감으로 인해서 신학교의 존립 여부가 걸려 있으며, 이는 교단적으로도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단의 세가 큰 곳이라고 해서 다른 것은 아닙니다. 통합측의 경우에서 보는 바와 같이 여자의 목사와 장로의 안수 문제는 계속해서 청원과 헌의가 되고 있으며, 그 목소리가 나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교단이건 간에 처음에는 여자의 목사, 또는 장로의 안수 문제는 성경의 근거를 들어서 금하며 반대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랬던 교단들은 결국은 현실론을 들어서 모두가 찬성하는 것은 아닌 일부 찬성이지만 허용해 왔습니다. 이는 점차 더욱 그러할 것이며, 결국은 모든 교단들이 허용으로 갈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Ⅱ. 여자의 목사(장로) 안수 의 찬성과 반대에 대한 견해
여자 목사 안수는 찬성인가? 아니면 반대인가? 하는 식의 질문을 종종 받아왔었습니다. 즉 여자 목사 안수의 찬성과 반대라는 서로 대립되는 이해 속에서 각각의 견해가 있어온 것입니다.
1. 여자의 목사 안수를 찬성하는 견해
왜 여자의 목사 안수를 찬성하는가? 에서 찬성하는 분들의 견해는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듭니다.
(1) 성경에서는 여자들도 사역하며 활동했던 것을 들어서 여자의 목사 안수 제도를 찬성합니다. 구약에서는 여선지자로 활동하던 여자들이 등장합니다. 이스라엘의 여선지자로서 사사로 활동하던 드보라, 요시야왕때 활동하던 여선지자 훌다가 그들입니다. 다른 선지자와 함께 도비야와 산발랏에게 고용되어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할 때 느헤미야를 위협하였던 여선지자인 노아댜가 있었습니다. 여선지자로 활동하던 여자는 신약에서도 등장합니다.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인 안나가 여선지자로 활동했으며, 일곱 집사 중의 한 사람인 전도자 빌립의 결혼하지 않은 4명의 딸도 여선지자로 활동했습니다.
(2) 그런가 하면, 신약성경에서는 사도시대의 초대교회에 활동하던 여자 집사를 들어서 여자의 목사 안수 제도를 찬성합니다. 겐그레아교회의 여집사인 뵈뵈가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집사는 처음 일곱 집사를 세울 때에서 볼 수 있듯이 장로 임직의 경우와 같이 안수하여 세웠기에 여집사로 임직 받은 뵈뵈의 경우에서도 그러한 과정이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은 당연하다고 여깁니다.
(3) 교회사적으로 장로교회의 시작인 스코틀랜드 교회에서 여자 목사를 세웠던 사실을 들어 여자의 목사 안수 제도를 찬성합니다.
(4) 무엇보다도 성령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교회 시대에서 성령께서 여자를 집사로 세우시기를 원하시는 일을 사람이 임의로 반대하는 것은 성령을 거스리는 일이라는 것을 들어서 여자의 목사 안수 제도를 찬성합니다.
(5) 그리고 여자를 목사로 안수하여 세울 수 있다는 찬성을 관련 성경구절의 해석을 통해서 말합니다.
첫째, 창세기 1장 27-28절인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에서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실 때 남자와 여자를 각각 창조하셨는데, 남자와 여자의 관계는 종속적이 아니라 협력하는 자(partnership)인 동반자로서 서로 상응하는 존재라는 창조하셨기 때문에 남자만이 아니라 여자도 동등하게 목사로 안수 받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둘째, 갈라디아서 3장 28절인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를 여자 목사와 장로 안수의 찬성 구절로 제시합니다. 이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유대인도 없고 헬라인도 없고 자유자도 없으며, 남자도 없고 여자도 없이 모두가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라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이 세상의 모든 차별들이 없어졌으므로 목사의 안수에 있어서도 남녀불평등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셋째, 고린도전서 14장 34-25절인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같이 오직 복종 할 것이요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임이라"는 말씀은 여자에게 가르침을 금하는 것으로 하시고 있는 말씀이 아니라 당시의 교회적 예배의 상황에서 한 사람이 아닌 각각 예언하는(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은사를 받은 신자들이 저마다 무질서하게 행하는 것에 대한 주의로 질서를 지킬 것을 권하는 것이기에 이것이 여자의 목사의 안수를 금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며 여자의 안수를 찬성합니다.
여자의 목사 안수를 찬성하는 이들은 또한 디모데전서 2장 11-14절인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도 여자의 안수를 금하는 구절로 삼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2. 여자의 목사 안수를 반대하는 견해
여자의 목사 안수를 찬성하는 견해의 목소리에 비해서 이를 반대하는 분들의 견해 또한 대등합니다. 그러면 이분들은 왜 여자의 목사 안수를 반대하는가요? 반대의 견해는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듭니다.
(1) 성경이 여자의 가르치는 일과 다스리는 일을 엄격히 금하고 있다는 것을 듭니다. 그 중요한 근거로는, 고린도전서 11장 2-10절인 ""너희가 모든 일에 나를 기억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전하여 준 대로 그 유전을 너희가 지키므로 너희를 칭찬하노라.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 이러므로……"와 고린도전서 14장 34-37절인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같이 오직 복종 할 것이요,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임이라.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 그리고 디모데전서 2장 11-14절인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를 듭니다.
첫째, 여기서 반대자는 우선 디모데전서 2장에서 '가르치는 것'과 '주관하는 것'은 각각 목사직과 장로직으로 보고서, 이 두 가지의 일을 여자에게는 허락하지 않았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그처럼 여자에게는 목사직을 허락하지 않았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는 두 가지 이유로 보고 있습니다.
① 창조 질서와 교회 질서에 위배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남자인 아담과 여자인 하와를 창조하셨는데 먼저 아담이 지음을 받고 그 후에 하와가 지음을 받음으로써 남자인 아담과 여자인 하와간에는 질서가 있었으며, 또한 여자인 하와는 아담을 돕는 배필, 곧 협력자(helper or partnership)로 창조되었는데, 그 창조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에 의한 하나님의 언약을 따르지 않고 불순종하여서 범죄하여 온 인류의 타락을 가져올 때는 아담이 꾀임을 받지 않고 먼저 하와가 꾀임을 받고 그 하와가 아담을 자신이 받은 꾀임에 함께 빠지도록 미혹하는 일을 함으로써 여자가 남자를 가르치고 주관하는 잘못된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들어 바울이 디모데에게 여자가 남자를 가르치거나 다스리는 것은 창조 질서에 위배되는 악행인 것을 말하여 교회 안에 여자가 남자 위에 있는 것을 금하였으므로, 이 교회 질서의 원리에 의해서 여자가 목사가 되어서 가르치거나 장로가 되어서 다스리는 일을 한다는 것은 결국은 창조 질서와 교회 질서에 위배되는 잘못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반대를 한다는 것입니다.
② 여자의 특성이 남자에 비해서 사단의 시험에 쉽게 이끌릴 뿐만 아니라 남자를 미혹하여 범죄하게 하는 연약성을 띠고 있기 때문에 여자가 남자를 가르치거나 주관하지 못하게 하였다는 것으로서의 해석학적 인식도 작용하고 있습니다.
둘째, 반대자는 고린도전서 11장 2-10절과 14장 34-37절을 근거로 해서는 남자와 여자는 본질적으로 서로 사응하는 동등된 자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교회의 관계성에서 그리스도와 남자, 남자와 여자의 관계성을 규정하고 있으면서 남자는 자신의 머리(주)그리스도에게서 다스림을 받듯이, 여자는 자신의 머리(주)인 남자의 다스림을 받는 관계에 있기 때문에 여자는 남자에게 오직 복종(순종)할 것을 기록하고 있다는 것과, 만일 여자가 묻고 싶은 것이 있으면 집에서 남편에게 물음으로써 교회의 회집(집회)에서는 조용히 할 것을 가르치고 있으며, 여자가 남자를 가르치는 것을 금하며 이 유전(遺傳; 전해져 내려오는 전통)을 지킬 것을 명령하고 있는 것이 주의 명령인 까닭에 이것에 의해서 여자가 가르치는 일을 하거나 다스리는 일을 하는 목사직과 장로직을 반대한다고 말합니다.
(2) 여자의 목사, 장로 안수를 반대하는 자들은 또한 신약 시대의 초대교회에서 최초로 일곱 집사의 안수에서나 장로회에서의 장로 임직에서의 안수에서 여자가 안수 받아 임직된 사실이 없다는 것을 근거로 말하기도 합니다.
Ⅲ. 여자의 목사 안수의 찬성과 반대에 대하여 성경은 가르침을 주고 있는가?
여자의 목사 안수는 이를 찬성하는 자들과 이를 반대하는 자들의 주장이 서로 대립되어 있는 상태에서 한치의 물러섬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적 상황은 여자의 목사 안수를 허용하여 인정하는 쪽으로 대세를 이루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리 멀지 않은 언젠가는 전 교단에서 허용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말이죠. 한국 교회의 경우에서만이 아니라, 개신교의 상황(로마카톨릭교회는 여자의 안수를 허용하고 있지 않다)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여자의 목사 안수를 찬성하든 아니면 반대하든지 간에 그 여부를 막론하고, 그리고 그것이 시대적 요청이요 상황에 부합하는 것의 여부를 막론하고, 그래서 교회사적으로와 한국 교회적 상황이 여자를 목사로 안수하고 있는지의 여부를 막론하고, 그들이 각각 자신들이 주장하는 견해를 정당화하는 관련 성경구절로 삼는 내용들이 과연 성경적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이죠.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으로서 자신들이 주장하는 견해의 관련 성경 구절로 삼고 있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본인들은 분명 그렇게 삼고 있기 때문에 그 구절을 제시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 구절이 자신들이 주장하는 견해를 뒷받침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서가 아닌 하나님이 그 말씀을 통해서 교회에 주시고 있는 참된 의미의 이해에 의해서 되어져야 할 것이기에 이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있어서는 여자의 목사와 안수의 찬성과 반대의 근거가 될 수 있는 여타의 근거 제시는 다루지 않으며, 오직 성경을 근거로 삼는 것으로서만 살펴볼 것입니다.
1. 여자의 목사, 장로 안수를 찬성하는 견해에 대하여 봄
(1) 여선지자의 활동에서 봄
여자의 목사 안수를 찬성하는 자들은 우선 구약과 신약 시대에 각각 활동하던 여선지자를 들어서 오늘날에도 여자의 안수를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들의 견해를 주장하는 것으로서의 관련 근거 자료가 되지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말입니다. 구약과 신약에 각각 나오는 몇 몇 여선지자는 당시 하나님께서 선지자로 세워 하나님의 구원을 자기 백성들에게 나타내 그 믿음에 있을 수 있도록 활동하게 하신 것의 보편성을 띠고 있는 것으로서의 등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당시 이스라엘(또는 유대)이 처한 시대적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하여 등장시킨 참으로 특별한 경우였습니다.
가령 드보라가 여선지자로서 활동하던 시대는 사사 시대인데 이스라엘이 여호와이신 하나님에게서 떠나 있음으로 인해서 가나안인으로부터 20년간에 걸쳐 압박을 받고 있던 때였습니다. 이러한 때에 하나님께서는 랍비돗의 아내인 드보라를 선지자로 세우시고 또한 이스라엘의 사사로 활동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가나안인의 압박으로 흩어져 있던 이스라엘 지파를 일치 단결시키고 바락을 격려하여 가나안 족속의 왕 야빈의 군대장관 시스라와 싸우게 하여 승리를 거두었습니다(삿4:) 이로써 이스라엘인에 대한 가나안인의 20년에 걸친 압박은 끝났으며, 이 승리를 노래한 '드보라의 노래'(삿5:)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드보라가 여선지자로 그리고 사사로 활동했습니다만, 이것이 당시 여자도 남자와 동등하게 사사로 세워져 활동했다는 사사의 일반적인 기준은 아니었습니다.
한편 여선지자 훌다가 활동하던 시대는 요시야왕이 통치하던 때였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에는 선지자 예레미야와 스바냐와 같은 참된 선지자가 활동하고 있던 때였습니다. 그런데도 여선지자 훌다가 등장하며, 요시야왕은 예레미야나 스바냐가 아닌 여선지지 훌다에게로 사람을 보내어서 묻게 합니다. 그것은 당시 서기관 사반이 성전에 가서 대제사장 힐기야를 만나 성전의 보수에 관하여 왕의 명령을 전달하게 했을 때 대제사장이 성전에서 여호와의 율법책을 발견하고는 이를 왕에게 보고하였는데, 왕은 그 율법책에 기록된 말씀을 듣자 크게 두려워서 자기 옷을 찢고 제사장 힐기야와 사반의 아들 아히감가 미가야의 아들 악볼과 서기관 사반과 왕의 대신 아사야에게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를 여호와께 물어오도록 지시한데 따른 것입니다. 당시 요시야왕은 자신의 종교개혁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성전을 보수하는 등의 일련의 일들을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율법을 지키지 않은데 따른 하나님의 진노가 유다 온 백성에게 임하여 피할 수 없을 것을 율법책에 기록된 말씀을 듣는 것에서 깨닫고 그 두려움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여선지자 훌다가 전하는 예루살렘의 멸망 예고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시야왕이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도성과 주민에게 내리기로 작정한 재앙을 알고 옷을 찢고 울면서 하나님의 경고를 두려워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한 그의 기도를 듣고 그로 하여금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직접 보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보다 먼저 그를 평안히 잠들어 선조의 묘에 안치될 것을 함께 예고하셨습니다(왕하22장). 이렇게 예루살렘의 멸망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다른 신들을 섬긴 자들에게 임하는 것으로 이것은 이미 하나님의 작정하신 데 따른 것이었습니다. 그에 따라서 하나님의 저주로 유다 왕국의 멸망이 임박한 사실을 두각시키기 위하여 특별한 선지자로서 여선지자인 훌다를 등장시켜서 하나님의 초월적인 역사를 나타내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를 통해서 자기 백성의 구원을 일해나가실 것입니다. 따라서 여선지자 훌다의 경우도 다른 모든 남자의 선지자의 경우와 같이 여자도 선지자가 되어서 활동할 수 있다는 근거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데, 여선지자인 드보라나 훌다를 들어서 마치 여자도 남자와 같이 목사로 동등하게 안수 받는 근거로 삼는 것은 얼마나 편협적이며 자의적인 주장인지요!. 해서 말입니다. 여선지자를 들어서 여자의 목사의 찬성 근거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이는 말입니다. 여선지자로 활동한 또 다른 사람인 노아댜의 경우는 더더욱 그러합니다. 노아댜는 도비야와 산발랏에게 다른 선지자와 함께 고용되어서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할 때 느헤미야를 위협한 여선지자입니다. 그런 노아댜가 오늘날에 여자 목사의 근거로 삼아지다니요!.
여선지자가 여자의 목사 안수의 성경적 근거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은 신약에서 여선지자로 활동한 경우에서도 동일합니다. 신약에서 여선지자로 등장하는 안나는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입니다. 여선지자 안나는 결혼한지 7년 만에 남편이 죽음으로 84세 때까지 과부로 살았습니다. 그런 안나는 성전을 떠나지 않고 밤낮으로 기도하며 때로는 금식하면서 하나님을 섬겨 왔습니다. 그런 안나가 성전에서 시므온이 예수의 탄생에 대해서 마리아와 요셉에게 하는 말인 주께서 모든 나라를 비추는 빛으로,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으로 세상에 보내주신 것을 하나님께 찬양하는 말을 듣고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 후 구주를 기다리며 예루살렘의 구속을 바라는 예루살렘의 모든 사람에게 메시야가 오셨음을 알렸습니다(눅2:25-38). 안나가 여선지자로 있는 당시 예루살렘은 외식적인 제사장과 서기관들로 가득 차 있었는데, 그런 가운데서 하나님은 안나를 예루살렘에서 경건과 순결을 지닌 선지자로 있게 하는 것에서 그가 선지자로 성전에서 하나님의 예언을 말해온 그 하나님의 구원의 영광을 눈으로 보는 기쁨에 있게 하셨으며, 또한 이를 예루살렘의 모든 사람에게 전하게 하셨습니다.
신약에서 여선지자로 활동한 인물은 일곱 집사 중의 한 사람인 전도자 빌립의 결혼하지 않은 4명의 딸에게서도 볼 수 있습니다. "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행2:9). 그러나 여기에서는 '선지자'(예언자)라는 직접적인 호칭은 없습니다. 다만 '예언하는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의 '예언하는 자'란 구약에서 말해오고 있는 '선지자'(예언자)로서의 하나님의 메시야 언약을 예언하는 일을 해온 자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말하고 있는 것인지를 봐야 합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서의 예언하는 자는 고린도전서 11장 4, 5절, 14장 1, 3-5, 24절에서의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설교하는 것으로서의 예언의 성격을 띠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당시 교회적인 은사로 다양하게 나타났던 은사의 하나인 예언의 은사입니다.
(2) 여집사의 안수에서 봄
여자의 목사 안수를 찬성하는 자들은 안수하여 세우는 집사에게서 여자가 있었던 점을 주목합니다. 그 여자는 '뵈뵈'입니다.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군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천거하노니"(롬16:1)에서 우리말 개역성경에는 자매 뵈뵈를 직접적으로 '집사'란 말을 쓰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뵈뵈가 집사였다는 사실은 아무도 의구심을 갖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 자매 뵈뵈'에서 헬라어 '디아코논'이 쓰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단어는 '집사'를 일컫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실은 여자도 남자와 같이 장립집사의 성격을 띤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여자를 집사 임직 시킬 때 안수하는 것은 당연히 성경적이라고 할 것입니다. 집사 임직을 갖는데 남자는 안수를 행하여 집사로 세우고, 여자는 안수를 행할 수 없다며 집사로 세우지 않는 것은 비성경적입니다. 교회 헌법이 비록 이러한 논리로 남자만 장립집사의 자격으로 둡니다만, 이는 잘못되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한국 교회는 여자를 장립집사 대신에 권사로 세웁니다. 또는 장로를 대신하는 것으로 권사로 세우기돟 합니다. 이는 권사를 세울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얼마든지 임시직을 세울 수 있습니다. 권사 외의 다른 직분으로도 세울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자를 집사로 세울 수 없기 때문에 그 대신으로 권사 직분을 맡기고, 여자를 장로로 세울 수 없기 때문에 권사로 세우는 식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권사의 직분은 집사나 장로를 대신하는 직분이 아닙니다. 비록 권사직이 목사, 장로, 집사와는 구별되는 다른 직분이라고 할지라도, 그리고 그 직분의 성격상 항존직이 아닌 임시직이라고 할지라도 모두가 다 그리스도의 자비를 나타내는 독립된 직분이요 상호 협력적인 직분입니다.
문제는 여자 장립집사로서의 뵈뵈가 있기 때문에, 이를 근거로 해서 여자의 목사, 장로 안수도 찬성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집사 뵈뵈는 아마도 남집사들이 쉽게 할 수 없는, 그러니까 여성의 힘으로서 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 곳에 참으로 적절히 봉사하는 일을 하였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바울을 비롯하여서 교회를 섬기는 자들이 겐그레아에서 말씀을 전하는 일과 함께 구제와 환자를 돌보는 일 등등의 기타에 있어서 여자의 손길이 더욱 필요한 부분이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란 것을 추측한다고 할지라도 결코 무리는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뵈뵈의 경우를 들어서 여자 목사, 장로 안수로 확대해 나갈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뵈뵈 한 사람의 경우를 들어서 당시 교회가 말씀을 전하고 교회를 감독하여 다스리고 하는 목사와 장로의 사역을 여자집사가 일반적으로 다루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말입니다. 여집사 뵈뵈는 그가 장립집사로 있게 된 것에서 이것이 집사 임직에 있어서 남자와 함께 여자도 안수하여 세울 수 있다는 근거가 될 수 있습니다만, 이것으로 목사와 장로의 안수에 여자도 당연하다는 식의 논리는 비약적인 것이 될 것입니다. 여자가 집사만이 아니라 목사와 장로로도 안수 받을 수 있다는 것이 되려면 그에 합당한 근거가 제시되어야 합니다. 뵈뵈는 집사의 직무를 수행할 수 있기 위해서 안수를 통해 장립됨으로 모든 교회 앞에서 그가 어떤 봉사의 일을 통해 교회를 섬길 것인지를 나타낸 것이지, 목사와 장로의 직무도 수행할 수 있기 위해서 안수를 통해 집사로 장립된 것이 결코 아닙니다.
(3) 남자와 여자의 창조 원리에서 봄
여자의 목사 안수를 찬성하는 자들은 창세기 1장 27-28절인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를 근거로 제시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실 때 남자와 여자를 각각 창조하셨는데, 남자와 여자의 관계는 종속적이 아니라 협력하는 자(partnership)인 동반자로서 서로 상응하는 존재라는 창조하셨기 때문에 남자만이 아니라 여자도 동등하게 목사, 또는 장로로 안수 받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본 구절이 남자와 여자를 종속적 관계를 두고서 차별하는 것이 아닌, 서로 상응하는 존재로 협력하는 자의 관계인 것을 의미하고 있음은 너무나도 분명합니다. 남자인 아담에게 있어서 여자인 하와는 분명 아담에게 상응하는 존재입니다. 이는 말이죠. 아담이 자기에게 나아오는 하와를 보고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하면서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고 한 말에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창2:23). 그러므로 "남자가 여자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 것이다"라고 하였으니(창2:24), 이는 몸의 성격상 같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이 성경구절을 남자와 여자의 한 몸된 존재성에 이해를 갖는 것으로 제시한다면 참으로 적절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자신과 교회의 관계를 동일하게 설명하였습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시며,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에게서 보는 창조의 원리가 교회 직분에서 각각의 독립된 목사와 장로와 집사의 직분이 서로 동등하며 협력적인 관계라는 것을 설명하는 것으로 사용될 수는 있습니다만, 이것으로 여자도 남자가 하는 일을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식으로 비약하여서 여자의 목사 안수를 찬성하는 논리로 말해질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남자는 남자이며, 여자는 여자인 까닭이며, 그래서 남자는 남자로서의 독립적인 역할과 그 기능이 있고 여자는 여자로서의 독립적인 역할과 그 기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서로의 역할과 기능이 서로 협력적인 관계에 있는 것이지 모두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으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말입니다. 남자는 결코 여자가 하는 일을 할 수 없다거나, 또는 여자는 결코 남자가 하는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자가 여자가 하는 일을 얼마든지 할 수 있고, 여자도 남자가 하는 일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사는 현실에서 그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보고 있지 않습니까? 이는 목사의 직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여자는 남자가 해온 목사와 장로의 사역을 할 수 있느냐 라거나 없느냐 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에 여자의 목사, 장로 안수를 찬성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인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신 원리를 가지고 그것으로 남자가 해온 목사의 일을 여자도 동등하게 할 수 있는 근거로 제시하면서 여자의 안수를 합당화 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3) 갈라디아서 3장 28절의 자유자에게서 봄
여자의 목사 안수를 찬성하는 자들은 안갈라디아서 3장 28절인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를 근거 성경구절로 삼습니다. 이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유대인도 없고 헬라인도 없고 자유자도 없으며, 남자도 없고 여자도 없이 모두가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라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사람간에서는 이 세상의 모든 차별들이 없어졌으므로 목사의 안수에 있어서도 남녀불평등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왜 이런 말을 하게 되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이 말은 바울이 갈라디아교회에 한 것인데, 율법과 복음의 관계성을 말하는 것으로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 말을 하게 된 당시의 갈라디아교회에서는 구원에 있어서 율법이냐, 아니면 믿음으로만 이냐에 대해서 정리해 주어야 할 필요성이 생겼습니다. 믿음으로만 아니라 율법을 지켜야 할 필요성을 구원론으로 끌고 나가는 주장하는 자들에 대해서 바울은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 얻는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가르치게 됩니다. 여기에 있어서 바울은 우리가 죄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밖에는 없다는 것과 이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를 믿는 사람들을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세워 주시기 전까지는 율법이 교사요 안내자의 역할을 하였었는데,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지금에는 율법의 실체 앞에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율법이 필요하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하늘에서 온 자유하는 아들에 의해서 그분 안에서 우리 또한 자유하는 아들이 되었는데 율법의 종이 되어 있는 것이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래서 말이죠. 이제는 더 이상 우리에게는 유대인과 헬라인, 노예와 자유인, 남자와 여자의 구별이 없이 다 같은 그리스도인이며 그분 안에서 하나라는 것을 말하면서 그런 우리는 참다운 의미에서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에 참여한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갈라디아서 3장 28절은 우리가 믿는 믿음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리의 존재성을 알게 해주시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이 있었으며, 율법의 노예가 되어 있어서 하늘에서 주어진 약속을 따라 난 자유인과는 구별이 있었으며, 남자와 여자의 구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지금의 우리는 이런 구별이 없어졌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므로 갈라디아서 3장 28절은 하나님께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있게 하신 구원의 원리에 의한 이해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지, 이것이 교회의 목사 안수에서 남자와 여자의 차별 없이 행해져야 할 것을 가르치는 것으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4) 고린도전서 14장 34-25절, 디모데전서 2장 11-14절에서 봄.
여자의 목사 안수를 찬성하는 자들도 자신들이 주장하는 견해의 옳음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그 근거의 관련 성경 구절로 찬성자들과 마찬가지로 고린도전서 14장 34-25절인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같이 오직 복종 할 것이요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임이라"와 디모데전서 4장 11-14절인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를 제시합니다.
이 구절들은 여자의 목사 안수를 반대하는 자들도 자기들의 견해를 주장하는 근거로 삼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같은 성경 구절인데도 서로 상반된 이해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자의 목사 안수를 찬성하는 자들은 이 성경 구절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기에 이것으로 자신들의 견해를 지지하는 근거로 삼고 있을까요? 그들은 고린도전서 14장 34-25절의 말씀은 여자에게 가르치는 일을 하는 것을 금지시키고 있는 것으로 하시고 있는 말씀이 아니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당시의 고린도교회가 갖는 예배 모습에서 한 사람이 자신이 주께로부터 받은 예언의 은사를 따라서 설교함으로써 예언하는 말을 했던 것이 아니라, 예언하는 은사를 받은 여러 명의 신자들이 저마다 각각 말함으로써 무질서하게 행해지는 것에 대한 주의로 질서를 지킬 것을 권하는 것이기에 이것이 여자의 목사 안수를 금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며 여자의 안수를 찬성합니다.
과연 본 절은 예언의 은사를 받은 자들의 무질서로 인해 이를 주의시키는 것으로서 말해지고 있는 것이기에 여자의 목사나 장로의 안수를 금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본 절이 여자가 목사나 장로의 안수를 받는 것을 지지하고 찬성하는 것으로서 사용될 수 있는 구절도 아닙니다. 특히나 무질서한 중심의 자리에는 다름 아닌 여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여자들에게서는 교회의 집회에서는 조용히 할 것을 주의 주면서 성경에 기록된 대로 여자는 남자에게 순종할 것과 만일 묻고 싶은 것이 있으면 집에서 남편에게 묻고 교회의 집회에서는 조용히 하지 않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야 할 것을 말하고 있는데 이것을 여자의 목사의 안수를 찬성하는 구절로 삼을 수 있겠는지요.
여자의 목사 안수를 찬성하는 이들은 또한 디모데전서 2장 11-14절인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도 여자의 안수를 금하는 구절로 삼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 역시 여자의 안수를 찬성하는 구절로도 삼을 수 없습니다. 지금 이 구절은 교회의 예배 모임 자리에서 남자들과 여자들이 각각 취할 행동의 원리를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1절에서 디모데에게 당부하기를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자비가 함께 하도록 기도하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는 것을 믿고 감사를 드릴 것을 말하였는데, 이제 그 기도의 연결 속에서 각처에서 남자들이 교회의 모임에서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할 것을 권면하는데 분노와 다툼이 없이 할 것을 말하면서 또한 여자들도 단정한 태도와 복장을 하며 조용하고 겸손하게 듣고 배움으로써 분별력 있게 행동할 것을 권면하였습니다. 그런 이유로 여자는 결코 남자를 가르치거나 다스리려고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음으로 인해서 발생할 수 있는 일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남자인 아담과 여자인 하와를 창조하실 때 아담을 먼저 만들고 하와는 나중에 만든 것과 사단에게 미혹되어 속아넘어감으로 해서 죄에 빠진 사람은 아담이 아니라 하와였던 사실을 상기시키는 것으로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여자들의 분별력 없는 행동으로 인해서 교회에 언제든지 사단의 간교한 시험이 있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자들이 교회의 예배 모임에서 태도와 복장에서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행동을 하고 남자들을 가르치거나 다스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녀를 기르면서 하나님을 믿고 조용하고 순결하게 사랑에 넘치는 생활을 할 것을 권면하였습니다. 즉, 여자의 가르치는 일과 다스리는 일은 교회의 예배 모임에서가 아니라 가정에서 자녀에 대하여 행해질 것을 말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으로써 그들은 구원받을 것이라고 함으로써 그 일이 여자에게 주어진 일임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해서 말입니다. 이 구절을 통해서 여자들은 자신들이 목사로 안수 받는 찬성의 근거로 삼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여자에게 주신 참으로 고귀한 봉사의 일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를 알고 여기에 여자가 지닌 아름다움과 힘을 발휘해야 합니다. 그러한 여인이 혹 교회의 예배 모임에서 봉사하여 섬길 일을 갖는다면 이는 자랑과 자신을 드러내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참으로 온유함과 겸손함으로 사랑을 베풀어서 교회에 신령상 덕을 세우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5) 여자의 목사, 장로 안수를 찬성하는 것으로 제시하는 성경 구절은 전혀 근거가 없음.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여자의 목사 안수를 찬성하는 자들이 관련 성경 구절로 제시하고 있는 것에서는 그 어떤 구절에서도 여자의 안수를 지지하거나 찬성하는 내용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 그 성경 구절들은 여자의 안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내용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성경 구절들을 가지고서 여자의 안수를 정당화하려는 근거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구원을 알게 하시는 계시의 방편입니다. 그러한 것을 자신들이 주장하는 견해를 합리화시키는 방법으로 임의로 해석하고 적용하는 잘못을 범해서는 안 됩니다.
2. 여자의 목사 안수를 반대하는 견해에 대하여 봄
여자의 목사 안수를 찬성하는 견해의 목소리에 비해서 이를 반대하는 분들의 견해 또한 대등합니다. 그런데 이들은 찬성자들이 제시하는 성경구절인 고린도전서 11장 2-16절과 고린도전서 14장 34-37절 및 디모데전서 2장 11-14절과 같은 것으로 자신들의 반대 견해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들은 같은 성경구절을 가지고 왜 다르게 이해하면서 여자의 목사 안수를 반대하는 것일까요? 이들은 이 성경구절에서 반대의 견해로 주께서 여자에게 남자를 가르치는 것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금했다는 것과 여자는 교회에서 일절 조용히 할 것과 배우고자 하는 자는 집에서 남편에게 배울 것을 명령하셨다는 것을 듭니다. 그리고 이것은 주께서 아담과 하와를 들어서 창조 질서의 원리를 교회 질서의 원리로 주신 데 따른 것으로 시대를 불문하고 모든 시대에 동일하게 적용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의 견해가 설득력이 있으려면 왜 바울이 그러한 권면을 했는지를 아는 것으로서 교회의 예배 모임에서 교회 질서 속에서 얼마든지 남자와 여자의 각각의 은사를 발휘하는 것을 통해서 신령상 덕을 끼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무시하고 여자가 남자 위에 있음으로 인해서 남자를 가르치려들거나 주관하려 듦으로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사단의 미혹케 하는 시험에 대한 주의를 갖게 하는 것으로서여야 하는 것이지, 여자의 목사로서의 안수를 받는 것에 대한 반대를 하는 것으로서 이것이 창조 질서와 교회 질서의 원리에 따른 것이라는 주장을 하는 것은 억지입니다. 이는 말입니다. 반대자들이 제시하는 관련 성경 구절이 교회 안에 발생한 무질서한 설교를 통한 예언의 은사의 잘못 사용으로 권면하고 있는 것과 예배 모임에서 기도하는 남자와 예배에 참여하는 여자의 태도와 복장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주의시키면서 권면하는 것에서 여자가 남자를 가르치는 것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않는 것이며, 여자에게 일절 조용할 것과 집에서 남편에게 배울 것을 말하면서 여자의 가르침과 주관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를 권면하는 것에서 하고 있는 이야기인 것을 알면 충분히 이해되는 일일 것입니다.
더욱이 바울이 여자에게 조용히 할 것과 배우고자 하는 사람은 집에서 남편에게 배우라고 한 것은 가르치는 위치에서 여자는 남자에게서 배워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성도들이 모여 있는 교회에서 각각의 은사가 나타나고 있는데, 그래서 예언의 은사, 곧 하나님께 말씀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받은 말씀을 모인 성도들에게 전하는 일을 하는데, 여기에는 질서가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기 차례가 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여기 저기서 말을 함으로써 무질서와 혼란이 오는 것에 대한 훈계로써 한 것이며, 이들 중에는 여자들이 그 중심에 서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38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명료하게 전할 수 있는 은사자가 되도록 간절히 원할 것을 권면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여자의 목사 안수를 반대하는 자들은 주께서 명령하신 것임을 들어 여자가 남자를 가르치는 것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않는다는 것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며, 또한 이것이 창조 질서의 원리에 따른 교회 질서의 원리인 것으로 규정하면서, 이 원리는 모든 시대에 적용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에 여자가 가르치는 일을 하는 목사의 안수를 받고 다스리는 일을 하는 장로의 안수를 받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맞지가 않습니다. 그렇다면 말입니다. 여자의 목사 안수를 반대하는 것으로 제시하는 성경 구절도 찬성자들의 경우에서와 같이 전혀 근거가 없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Ⅳ. 여자의 목사 안수, 과연 찬성인가? 아니면 반대인가?
이제까지 여자의 목사 안수에 대하여 찬성과 반대에 대하여 살펴보면서 과연 그들이 그 근거로 제시하는 성경 구절이 그들이 주장하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 결과 찬성자들의 경우에서도, 또한 반대자들의 견해에서도 그들이 근거로 제시하는 성경 구절은 그들의 견해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말입니다. 여자의 목사 안수는 어떻게 이해하여야하고 또한 대처가 되어야 하겠습니까? 과연 찬성입니까? 아니면 반대입니까? 과연 허용이 되어야 합니까? 아니면 금지되어야 합니까?
성경은 구약이든 신약이든 어떤 곳에서도 여자의 목사 안수를 다루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가지고서 여자의 목사 안수 근거로 삼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성경을 가지고서 여자를 목사로 안수하여 세울 수 있다거나 또는 결코 그럴 수 없다는 찬성과 반대의 논리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사실은 성경이 여자의 안수 문제를 말해 주고 있기 때문에 성경을 근거로 삼는 것이 아니라, 여자의 안수를 찬성하는 사람들과 반대하는 사람들이 각각 자기들이 주장하는 견해가 옳다는 것을 인정받기 위해서 성경의 몇 군데를 관련 근거로 제시하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여자 안수에 대한 자기들의 이해를 뒷받침해 줄 수 있는 것으로 성경을 이용하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성경에서 여자의 목사 안수를 다루고 있지 않는 한, 여자의 안수는 찬성이든 반대이든 모두다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저들 생각대로 임의로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찬성하며 지지하는 사람들은 여자의 안수를 허용할 것이고, 반대를 말하는 사람들은 여자의 안수를 계속해서 금지하도록 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추세는 결국은 찬성의 대세를 탈 것입니다.
가령 말입니다. 고금 이래로 여자를 안수하여 목사로 세우는 것을 자신들 나름대로 이런 저런 근거를 제시하면서 그렇게 반대했을지라도 교회는 여자에게 안수를 행하여 목사로 세우는 일을 해 왔습니다. 회중교회를 비롯해서, 성공회, 루터교회, 장로교회, 감리교회, 성결교회 등 교파와 교단적으로 가리지 않고 여자의 안수가 인정되어 왔습니다. 그러면서 그 찬성의 대세 속에서도 여전히 반대자들의 목소리도 존재해 오고 있습니다. 그들은 각자가 성경을 내세우지만 이는 자신들의 견해가 옳다고 하는데 대한 힘을 얻기 위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기에 사실은 다른 여러 가지를 시도해왔습니다. 여성신학의 관점을 말하기도 하고, 현실론을 말하기도 하고, 다른 교파와 교단들이 해온 것을 말하기도 하고, 여자가 목사가 되어야만 하는 불가피성을 말하기도 하면서 등등으로 말입니다.
여자의 목사 안수는 찬성과 반대의 견해 중에서 어느 것이 맞으며, 따라서 옳으냐는 것으로는 그 해결이 풀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이것에 대하여 그 뜻을 말한 바도 없거니와 사람은 하나님의 본의와는 상관없이 자신들의 생각대로 해나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자가 안수를 받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은 그들이 주장하는 견해만으로 분명 정당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그렇게 알고 또한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주장하는 견해를 반대해서는 안 됩니다. 이는 여자가 안수를 받는 것에 찬성하는 것에 대해서도 동일합니다. 대체 어느 것이 맞고 어느 것이 틀리겠습니까? 하나님이 내신 제도가 아니라 사람들 자신들이 만들어 가는 제도인데요. 이는 마치 사형 제도의 존속하는 것이 옳으냐, 아니면 틀리냐는 것과 같으며, 그래서 사형 제도를 폐지하는 것이 옳다고 하며 또한 옳지 않다고 하는 주장의 견해들과 같습니다. 사형제도가 존속하든, 폐지되든지 간에 그것이 있든지 없든지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며 자기들 임의대로 악행하며 삽니다.
여자의 안수도 그렇습니다. 대체 여자의 안수를 왜 그렇게 찬성하며 여자 목사가 되고자 하고 또한 이런 그들을 배출해 내려고 합니까? 진정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기 위해서인가요? 그래서 성령께서 자신들을 부르시는 그 부름이 있어서 순종하는 것으로서인가요? (일반적인 면에서)결코 아닙니다. 여성도 중에서 안수를 받아 목사가 되려고 하는 분들은 교회 안에서 행해온 자신들의 열심과 실력을 목사의 위치와 그 지위에서 해 나가려고 하는 마음이 강합니다. 또는 남자 목사에게서 지위와 그 권위에 이끌려서 하고자 하는 마음이 강합니다. 이 외에도 이런 저런 욕망의 이끌림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단정하는 것은, 여자가 목사가 되어서 하는 일에서 그 성격이 그대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이 생각하는 교회를 만들어 가는데서 목사의 활동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한결같이 교회가 커 가는데 교회 부흥과 성장의 목적을 둡니다. 이를 위해서 복음을 참되게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복음을 선포하며, 온갖 비신앙적인 방법과 수단들이 동원됩니다. 여느 남자 목사와 장로에게서 보고 있는 것을 이들도 그대로 하는 것입니다.
교단은 이런 그들을 이용합니다. 신학교의 대다수는 여자이며, 여자의 목사를 허용하지 않음으로 인해서 이들을 다른 교단에 빼앗기고 싶지 않습니다. 이들을 붙잡아 두어야 교단의 세가 커집니다.
이렇게 안수를 받아서 여자 목사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과 이런 이들을 목사로 배출함으로써 교단이 얻는 이익이 서로 맞아떨어지기 때문에 여자의 안수를 찬성하고 허용을 합니다. 그렇다면 이 모두는 진정 하나님의 뜻과는 거리가 먼 것이 아니겠습니까?
만일에 말입니다. 여자의 목사 안수를 반대하는 사람들 앞에서 찬성하고 또한 허용한다고 하면, 그래서 여자가 목사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다면, 이는 여자가 왜 목사가 되는 안수를 받아야 하는가에 대한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종이 되고자 해서인가? 하는 것입니다. 단지 목사는 남자만의 점유물이 아닌 여자도 남자와 평등하며 동등하게 목사, 장로 안수를 받을 수 있다는 논리로만은 여자 안수의 근거가 되지 못합니다. 아무리 여자가 남자와 평등하며 동등하다고 할지라도 남자에 비해서 여자가 폄하되는 것에 대한 반발로 여자의 목사 안수를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목사직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 전하는 봉사직으로 행해지는 것으로써 말씀을 가르치는 은사를 받은 자가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여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은사가 확인되어서 봉사하여 섬기는 일은 교회 안에서 되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은 목사가 아닌 여자 신자로서는 교회에서 못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안수를 받아야만 하는 상황인가 하는 것이죠. 한국 교회의 실정에서 볼 때 설사 여자 목사를 인정한다고 할지라도 안수를 받은 여자는 대개가 지금까지 자신이 섬기던 교회 밖으로 나가 교회를 개척하고서 목회를 하는 형편이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신자로서 그 일을 하든 목사로서 그 일을 하든 주께서 맡기신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일이 주어지는데 같은 일인 목사로서 그 일을 해나가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여자가 목사로서의 안수를 받는다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 전무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여자로서의 해산하는 수고(자녀의 양육)에 아무런 지장이 없어야 합니다. 즉 그리스도만을 위해서 봉사하여 섬겨나갈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교회가 여자 목사를 섬기고자 하는 것인가 하는 점도 생각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여자로서, 그리고 남편을 섬기는 여자로서, 그리고 자녀를 책임지고 있는 여자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두를 다 포기하고 기꺼이 그리스도의 복음만을 전하는 일에 자신을 바쳐 희생한다는 것은 참된 희생에서 벗어나 있게 됩니다. 그럼에도 여자가 목사가 되어서 주를 위하여 봉사한다는 일념으로 가족을 돌아보지 않는 것은 바울의 권면에서 보듯이 여자가 부끄러움을 당하는 일입니다. 남편과 자녀를 모욕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여자의 영광은 목사로 안수 받아 목사의 일을 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여자가 목사 안수를 받아 목회에 전념함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이 지닌 영광을 드러낸다고 하면 하나님이 이를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이기에 이보다 더 큰 기쁨과 즐거움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가 그렇게 주의 일을 할 수 있기 위해서 주께서 그를 그러한 처지에 있게 하셨는지, 그래서 주께서 그를 부르셨는지를 생각하여야 합니다.
둘째는, 여자가 목사 안수를 받아서 남자가 목사의 일을 봉사하는 것을 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목사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가르치는 봉사의 일을 하는 것은 남자가 하는데도 힘든 일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고생도 하게 되며 고통도 겪게 됩니다. 그런데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서 능히 목사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과 함께 그 모든 것을 능히 감당하고 지고 가겠는가 하는 것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남자에게는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을 수 있게 하시고, 여자에게는 해산의 수고를 하게 하신 것은 남자와 여자의 각각의 위치가 있고 그들의 몸에 맞는 역할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자가 목사 안수를 받아 목회를 한다는 것은 남자와 여자의 역할을 모두다 감당하여야 하는 현실이 됩니다. 자신이 목사의 일을 한다고 해서 아내로서 해야 할 일을 남편에게와 자녀에게 떠맡기고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또는 자신이 목사의 일을 한다고 해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인 자녀를 기르며 하나님을 믿는 일을 남편과 바꿔서 하자고 할 수 없습니다. 설사 역할을 바꿔서 하더라도 분명 여자가 목사의 일을 하기에는 연약성을 띠고 있습니다. 그렇게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건장한 남자의 몸으로 하기 힘든 목사의 일을 왜 하려고 하는지...., 그리고 이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인데 과연 그러한 삶을 살아가려고 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여자가 목사 안수를 받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여야 할 필요를 교회가 갖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남자이든 여자이든 한 개인이 자신 스스로 소명과 사명 의식을 갖고서 신학을 배우고 또한 목사가 되어서 목회를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 목사의 직분은 교회가 말씀의 은사를 받은 자를 학교에 위탁해서 양성하여 목사로 준비케 하는 일을 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목사의 직분을 필요로 하고, 또한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일을 위하여서 여자 목사를 필요로 하는가 하는 점이 다루어져야 합니다. 한국 교회는 전혀 이런 실정과는 거리가 멉니다. 목사이든 장로이든 집사이든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서 언제든지 간에 주님이 부르시면 그 부르심을 따르는 준비 속에 있는 자들이 성도입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목사, 장로, 집사의 일을 하여야 할 주의 일군으로 여기에 칭찬 받는 여성도가 필요하기에 교회를 통해서 주님이 그를 쓰시고자 하는 것으로 부름을 받아 목사의 안수를 받는 것이 되어야 하는데, 교회와의 관계에서는 전혀 상관없이 여성도 한 개인의 생각과 결심만으로 신학을 하고 목사의 안수를 받는 것이 주의 부르심에서 되어진 일이겠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와 관련해서 여자가 목사 안수를 받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여야 할 교회적 상태인가 하는 점도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섬기는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여 봉사하는 일을 하는 남자 목사가 있는데 여자인 자신도 목사 안수를 받아 같은 일을 하여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도 고려되어야 합니다.
여자의 안수, 그것도 여자의 목사 안수는 찬성과 반대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데 여자의 목사 안수를 찬성하고 이를 인정하는 쪽에서는 참으로 여기에 나타나게 되는 강한 죄의 힘을 의식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말이죠. 하나님의 뜻에 의한 성경의 가르침과는 관계없이 어느 시대에서나 사람은 항상 자기들의 생각에 좋은 대로 행동해 왔으며, 여자 목사 안수 건도 그렇다는 점을 인식해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 후 타락한 본성에 의한 이 두 사람의 관계는 서로 지배하려는 경향을 띠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자에게는 이제 남편을 돕는 배필로서의 남자와 상응하는 관계성이 깨지고 남편의 지배를 받게 되는 힘의 원리가 작용하게 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남자가 여자보다 먼저 창조 받았으며 남자의 몸에서 여자를 나오게 하여 남자를 돕는 배필이 되게 하였으나 남자의 몸에서 나온 여자가 남자를 유혹하는 시험자의 위치에 있던 것에서 남자가 여자를 지배하려는 힘[욕망]에 눌릴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여자가 받은 이 저주의 심판은 남자와 여자가 한몸된 연합의 관계가 깨졌음을 의미합니다. 왜 이렇게 서로의 관계성이 깨지는가 하면 남자가 단지 남자의 우월성으로 힘을 내세워 여자를 지배하려고 하기 때문이 아니라, 여자가 남자를 지배하려고 하는 욕망에 대해서 남자가 그러한 여자를 오히려 지배하려고 하는 욕망을 행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여자에게 "너는 남편을 사모할 것이나 오히려 남편이 너를 다스릴 것이다"(창3:16) 라는 말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씀하시고 있는 '너는 남편을 사모할 것이다'라는 말의 뜻은 '너는 남편에게 소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인데 그 소원은 뒤이어서 나오는 남편이 그를 다스린다는 것과 관련해서 볼 때 여자는 남편을 다스리려고 하는 소원을 가진다는 것이요 이런 여자에 대해서 남편은 여자가 소원하는 것과는 다르게 오히려 여자를 다스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서로를 지배하려고 함으로써 서로 사랑하고 공경하는 몸의 조화가 깨지고 부조화로 인하여서 비참한 불행 속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남자와 여자간에는 서로를 지배하려는 본능적 욕구가 항상 분출이 됩니다. 이것은 목사에 대한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서도 동일합니다. 18세기 이후에 여자들의 역할이 두드러지기 전에는, 그리고 19세기에 이르러 여자들에게도 설교와 가르치는 일을 맡길 수 있는지의 논쟁이 있기 전에는 여자가 설교를 하고 가르치며, 그래서 목사 안수를 받을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는 대두되지 않았었습니다. 한국 교회에서는 초기에는 여자도 안수를 받을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매우 단호하게 "여자 장로를 세울 수 없다"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나라의 교회에서든, 한국교회에서든지 간에 지금의 시점에 이르러서는 여자의 안수가 장로에 국한하지 않고 목사의 직분에게로 확대되어서 찬성과 반대가 계속해서 대립되어 주장될지언정 여자의 안수를 허용하고 있으며 또한 계속해서 허용하는 쪽으로 각 교단과 교파가 자신들의 입장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여자의 안수가 합당한 근거가 있어서가 아니라, 사실은 남자가 여자를 지배하는 것에 대한 여자의 남자를 지배하려는 본능적 욕망의 분출과 그에 따른 죄의 힘의 원리가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그러기에 말이죠. 바울이 고린도교회와 디모데에게 각각 다음과 말한 것입니다.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같이 오직 복종 할 것이요.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임이라",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자, 이제 여러분들이 답변을 해 보시지요?
여자 목사 안수, 과연 어떻게 보아야 하겠습니까?
나는 말입니다.
"목사 안수를 받으려는 여자에게서 악한 죄의 힘을 봅니다."
그리고 이는 역시 목사 안수를 받으려는 남자에게서도 봅니다.
그리고 또한 그들에게서 있는 그것을 목사인 내게서도 봅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목사 안수를 받으려는
남자에게서도,
또 여자에게서도,
그리고 목사인 나에게서도,
하나님의 은사인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봅니다.
이상으로 님의 질문에 대한 답글을 마치겠습니다.
여자의 목사 안수에 대하여 알고자 하시는 님에게
올바른 생각과 판단을 가질 수 있도록
도움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며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공손함으로 복종하게 하는 자라야 할지며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리요)[딤 3:2-5]
첫댓글 긴 답글 감사드립니다. 내용은 좀더 반복 정독하여 숙고하도록 하겠습니다만, 답글을 작성하시기 위해 관련 자료를 준비하시느라고 참으로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늘 성심을 다해 답변해 주시는 목사님께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참 감사드립니다, 평신도로 내내 의문이었는데 신학적으로 정립해주시니 감사한 말씀 이루 다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며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공손함으로 복종하게 하는 자라야 할지며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리요)[딤 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