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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덜보스의 바울신학 해설 4강
V. 새 생명의 실존 방식으로서의 믿음
믿음은 믿는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가 다시 일으킴을 받는 것, 성령으로 말미암는 생명, 새 사람을 입는 것,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시므로 내가 그분의 형상을 따라 지속적으로 새로워지는 것, 중생, 즉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가 각 개인에게 실현되고 개별화되는 것으로서 새로운 존재, 새로운 피조물이 실존하는 방식 등을 결과로 가져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이 모두 믿음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능력이 내 삶 속에서 역사하게 하는 것도 믿음을 통해 가능하다.
우리는 이 기회를 통해 이미 내 안에서 형성되어 있는 잘못된 믿음의 개념을 바로잡아야 한다. 믿음은 하나님 말씀에 따라 살면서 자기가 하나님 품성을 닮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대부분 교인이 믿음이 이렇게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이신칭의 의미도 잘 모른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세상 사람에 의해 밟힌다. 특히 조**에 의해 믿음이 자기 소원을 이루는 수단으로 전락되어 이러한 불건전하고 적그리스도적인 생각이 한국교회 전체에 바이러스처럼 퍼졌으므로 우리는 성경이 믿음을 무엇이라고 하는지 주의 깊게 배워야 한다. 우리는 먼저 자기를 개혁하고 한국교회를 개혁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새 생명을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일으키심을 받는” 것, “성령으로 말미암은 생명”으로 설명하는 일반적인 설명을 통해 살펴보았다. 이제 우리는 이 새로운 생명이 어떻게 성령님을 통해 인간 안에서 구현되는지, 그리고 성령님이 어떻게 인간을 이러한 새로운 사람으로 만드는시지를 살펴본다.
우리는 이미 다음과 같은 것을 알고 있다: 교회가 믿음을 통해 죄에 대해 죽었으며, 하나님을 위해 산다는 것(롬 6:11)과, 또한 교회는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었으며 “일으킴을 받았”다(골 2:12). 성령님을 통한 새로운 삶을 다루는 구절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그곳에서도 성령님께서 여러 가지 다양한 방식으로 역사하시고, 인간에게 은사를 나누어주시고, 그럼으로써 인간을 새로운 생명에 참여하게 만드시는 수단도 믿음을 통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여기에서도 성령님과 그리스도는 분리되지 않고 결합하여 있다는 사실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성령님은 이적을 일으키거나 능력을 부여하는 정체불명의 권능이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의 영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와 성령님 사이의 관계도, 교회가 실제로 성령님에 참여하는 방식도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규정된다. 그러므로 바울은 엡 3:16-17에서 다음과 같이 기도한다: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즉,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능력이 자기에게 속한 자들의 삶 속에서 역사하시는 방식은 성령의 역사와 믿음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하신다.
이미 여기에서, 예전에 때때로 주장되었던 것, 즉 바울이 말하는 믿음과 신비주의, 믿음과 그리스도와의 영적인 교제가 두 종류의 다른 흐름이며, 유대와 그리스라는 서로 다른 세계의 산물이라는 주장(These)이 근거가 없다는 것이 드러난다. 갈 2:20은 이들이 바울이 말하는 새로운 생명을 신비적으로 이해하는 데에 사용하는 전형적인 구절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여러 가지 이유에서 갈 2:20의 이 선언은 바울이 말하는 “새 생명”에 대한 이해를 위해 매우 중요하다. 먼저 여기에서 “그리스도와 함께한 우리”로부터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로 전환되는 것을 뚜렷하게 볼 수 있다. 그리스도와 함께 단번에 죽었다는 것과, 자기가 죄에 대해 죽었고 하나님에 대하여 산다는 것이 그리스도와의 영적 교제와 연결되어 있고 그 교제의 근거를 마련해 준다. 더 나가서 이 본문은 이 교제의 성격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 바울은 교제에 있어서 (우리에서 그리스도로) 주체가 바뀐 것처럼 말한다. 그는 이로써 자기 삶을 더는 자기 자신(참조: 롬 7:25b)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박혔기 때문이다. 그 대신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살고 계신다.
이것은 자기를 초월한 탈인격적 신비적인 현상과 거리가 멀다. 그는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고 있다고 이해한다. 이러한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는 자기 안에 거하시고 자기를 다스리시게 된다. 문맥(갈 2:16 이하에서 칭의 가르침을 펼침)으로 볼 때 다음과 같은 것이 분명하다: 믿음을 통한 삶과 성령님을 통해 그리스도와 교제하면서 사는 삶은 두 가지 사고의 세계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전자의 삶과 후자의 삶에 참여하는 방식이 둘 다 믿음이라는 것을 확증해준다.
다른 구절도 이 사실을 분명하게 말한다. 바울은 고후 13:5에서 “믿음 안에 있음”과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나란히 놓고 비교한다. 이 말은 단지 두 가지가 같은 것을 의미해야, 즉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교제하는 것이 믿음이라는 방식을 통해서 가능하며 또한 유지된다는 것을 의미해야 말이 된다. 바울은 이곳에서 이 사실을 명시적으로 말하지만, 그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 안에서”, “믿음 안에서”, “믿음을 통해서”라는 표현을 번갈아 사용할 때는(롬 6:11; 갈 5:25; 2:20, 그외) 그가 이것을 간접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믿음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가 다시 일으킴을 받는 것, 성령으로 말미암는 생명, 새 사람을 입는 것,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시므로 내가 그분의 형상을 따라 지속적으로 새로워지는 것, 중생, 즉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가 각 개인에게 실현되고 개별화되는 것이라고 우리는 확신있게 말할 수 있다.
이렇게 “믿음”은 때가 찼음을 나타낸다(참조: 갈 3:23, 25; 4:4). (때가 차서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지고 이것을 개인이 믿음으로 영접하여 이 새로운 창조 속으로 합병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실존 방식으로서의 믿음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살아나는 것이나 성령 안에 있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구속사적 의미가 있다.
믿음과 성령님과의 관계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어야 구원받는다. 즉 우리가 믿어야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신다. 성경 전체에서 이것을 강조하여 가르치므로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믿음과 성령님과의 관계에서 성령님의 사역은 무엇인가? 성령님은 수동적이신가? 우리는 죄인이 스스로 믿을 수 없다는 확신에서 이러한 질문을 해야 하고 리덜보스는 이에 답한다. 그는 하나님의 능력이 믿음을 불러일으키고 인간은 이에 순종함으로써 믿음이 생기며, 이 믿음은 그리스도인이 실존하는 방식이라고 한다. 즉, 그는 앞으로 이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인간의 결단을 차단하지 않고 복음에 대한 순종을 요구한다.
이제 우리는 믿음과 성령님과의 관계에 대해 논해야 한다. 바울이 믿음과 성령님과의 관계를 말할 때 먼저 믿음에 대해 말하고 그다음에 성령으로 넘어간다. 이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는 이유는, 첫째로 믿음을 통해 의롭게(이신칭의) 되어야 성령님 안에서 사는 새로운 기초가 마련되고, 둘째로 성령님 자신이 믿음을 통해 주어지기 때문이다(갈 3:2를 3:14와 비교하라; 4:6). 여기에는 믿음의 능동적 성격이 상당히 강조되어 있다. (성령님이 자의로 인간에게 들어오셔서 믿음을 부어주시는 것이 아니다). 엡 1:13에서는 우리가 믿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약속된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다”고 말한다. 이 일련의 사고 속에서 성령은 거듭 위대한 구속의 때에 주어지게 되어 있던 선물이자 옛 구속의 약속의 내용으로 등장한다. 그리스도는 성령을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는 분이고, 그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이 성령의 약속에 참여하는 방식 또는 수단이다.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한에서는, 사도가 믿음이 하나님 혹은 성령님의 선물이라고 한 곳은 성경 어느 곳에서도 분명히 나타나지는 않는다[1]. 그럼에도 믿음이 인간의 동의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인간이 죄와 육신 안에 갖혀 있으므로), 은혜를 기반으로 하는 하나님의 새롭게 하고 새롭게 창조하는 능력에 근거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복음은 (은혜가 아니라) 새로운 율법이 되며, 구원 문제에서 율법은 무능력하므로 우리는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믿음이 인간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의존되어 있다는 것은, 복음이 선포될 때에 믿음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보여주는 구절에서 잘 드러난다(믿음의 기원).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믿음이 복음에 대한 응답이자 순종임에는 틀림없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복음 선포가 믿음을 요구할 뿐 아니라 믿음을 일으키며, 복음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능력이 믿음을 불러 일으킨다[2]는 것도 분명하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 말씀으로 말미암노라”(롬 10:17). 복음과 복음 사역자들을 통해 교회는 믿음에 이르게 되고, 각 사역자는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그들을 믿게 하는 자들이다(고전 3:5). 즉 이들은 심었고 물을 주었고 하나님께서 성장하게 하셨다. 이들은 하나님의 동역자이며, 교회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다(고전 3:5-6,9). 이러한 의미에서 바울은 서신의 서두에서 늘 교회의 믿음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했다. 십자가 말씀이, 혹은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할 때에도 기본적으로는 이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복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실어나르는 수단이다. 복음은 사람 속에서 믿음을 만들어 내어 믿음으로 살게 하는 방식으로 그 능력을 행사한다(살전 2:13). 믿음은 사람의 지혜에 달려 있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에 달려 있는데(고전 2:5), 이 하나님의 능력이 바로 성령님의 능력이다(살전 1:5). 믿음은 하나님 말씀의 압도적인 권능에 의해 지대한 영향을 받는 순종이고,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에서 생겨나게 한 빛을 증언하는 것이다.
이러한 연관성 하에서 우리는 바울이 하나님께서 교회를 부르신 것(교회의 소명)에 대해 가르친 곳도 살펴보아야 한다. 이 교회라는 말은 하나님 백성에 대한 구약 명칭과 연관되어 있으며, 바울은 이것을 전문용어로 신약 교회에 적용했다(예: 롬 1:6-7). 바울은 이 용어에 특별한 의미를 첨가했는데, 그가 이 용어를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새롭게 창조하시는(존재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말씀과 연관시켰다[3](롬 4:17-18: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러한 효력있는 하나님의 부르심은 복음을 통해 일어난다. 이 능력의 부르심을 통해 하나님은 교회를 믿음으로 부르시고, 교회는 믿음을 통해 새 생명으로 오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택하시는 은혜는 이렇게 복음을 통한 효력있는 부르심을 통해서 실행에 옮겨진다. 이것은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그분이 먼저 결정하신 구원 계획을 근거로(살후 2:13-14, 그외) 이루어진다. 이렇게 선택된 사람을 위해서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에 대한 강설이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가 되며(고전 1:24), 그들의 믿음은 성령님을 통한 새로운 생명이 실존하는 방식이 된다(참조: 딛 1:1).
바울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그리고 선택과 부르심의 연관성을 이렇게 강조한다고 해서 이것이 믿음에서 순종의 의미를 축소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 사실은 그가 이스라엘이 불순종했다고 말하는 곳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그곳에서 그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자유와 선택을 말하는데, 인간론적인 의미에서 이스라엘의 강퍅함과 이방인이 믿음으로 영접했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바울 선포의 커다란 구원론적 주제, 즉 “행위로서가 아니라 부르시는 분에 의해서”(롬 9:12,16)를 명확하게 내세우려는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예에서 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은 인간의 결단(Entscheidung)을 차단하지 않고 오히려 복음에 대한 순종을 요구한다는 것이다[4]. 이 모든 것은 하나의 큰 연관성 안에 있는데, 이것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영광을 받으시는 분으로서 처음과 마지막이시라는, 좀 더 큰 맥락 속에서 이루어진다.
VI. 믿음의 본질
리덜보스는 순종과 신뢰가 믿음의 본질이라고 한다. 믿음이란 그리스도께서 내 죄를 위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것을 전인적으로 인정함으로써 내가 새 창조에 속하게 되는 것이며, 이 새 창조가 나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것을 의미하므로, 믿음의 본질은 신뢰와 순종이다. 순종이란 복음 메시지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내용 대로 사는 것을 말한다. 신뢰와 준종이 없이는 이러한 복음을 받아들일 수도 없으며 내가 변하지도 않는다.
리덜보스가 비록 이곳에서는 이러한 순종의 대상을 성경 전체와 연결하지는 않지만, 그가 간접적으로 성경영감설을 말하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그는 본서 전체에서 성경 기록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학자들을 끊임없이 비판한다.
믿음은 새 생명의 실존 방식으로서 대단히 포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으므로 간단히 정의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지 자세히 살펴본다.
일반적으로 신약 전체에서와 마찬가지로 바울서신에도 믿음은 중심 개념이며, 믿음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종말론적인 구원의 실제[5](eschatologische Heilswirklichkeit)에 대한 인간의 상응(das menschliche Korrelat)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믿음 자체가 구속사적인 개념이 되었으며(참조: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갈 3:23), 복음에 대한 마땅한 인간의 반응이다(예: 롬 10:8). 즉, 복음은 믿음을 위해 있으므로 복음이 선포되는 곳에서는 당연히 믿음이 요구된다.
이렇게 믿음과 복음이 상호적으로 결합되어 있으므로 우리는 믿음의 본질을 이와 관련해서 생각해야 한다. 그러므로 믿음은 복음의 내용을 전적으로 받아들이고(surrender: 순종) 신뢰하는 것이다. 이것은 율법의 행위(자기 의)를 신뢰하는 것에 대한 반대되는 개념이다. 우리는 순종과 신뢰 중에서 좀 더 일반적이고 포괄적인 개념인 순종이 무엇인지에 대해 먼저 생각해본다.
1. 순종으로서의 믿음
바울에게는 믿음이 주로 순종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의 서신에서 이 사실을 자주 가르쳤다. 로마서의 첫 부분(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음의 순종”)과 마지막 부분에도 순종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o 롬1:5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o 롬16:18-19 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들의 배만 섬기나니 교활한 말과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 너희의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
그러므로 불신은 복음에 대한 불순종이며 하나님의 구원의 의지에 거역하는 행위다(롬 10:16). 믿음은 하나님의 구원 복음의 권위적인 선포에 반응하는 것이므로 믿음을 말할 때에는 이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러므로 순종으로서의 믿음의 이러한 구조(Struktur)는 복음 내용과 잠시도 분리될 수 없다. 복음 내용에 대해 순종해야지만 복음에 대한 믿음의 길이 열린다. 왜냐하면 복음은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길을 받아들일 것과 모든 다른 구원의 길을 버리기를 결단하라고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행하기를 요구하고 복음 안에서 선포된 것 이외의 다른 어떤 구원 수단도 포기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당연히 기대되는 응답이다. 왜냐하면, 은혜는 선물로서 우리가 복음을 듣고 그것을 따를 때에만 우리에게 주어지기 때문이다.
1) 고백은 단순한 입장 발표가 아니라 고백한 내용대로 실제 삶에서 순종하며 사는 것이다
믿음의 고백은 믿음의 순종과 밀접하게 묶여 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9-10)
“고백”이라는 말은 원래 “같은 것을 말한다”라는 의미인데, 바울에게는 특히 다음의 의미를 가진다: 고백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대답이며, 그분 메시지에 대한 순종이며, 의무를 이행하라는 요구에 대한 동의이다. 그러므로 고백의 특별한 점은 먼저 자기 믿음에 대해 밖으로, 즉 세상과 사람들에 대해 자기 믿음(자기 고백과 말)에 대해 책임을 지겠다고 선언하는 것이다(참조: 딤전 6:12). 이러한 점에서 고백에는 법정적 요소가 있다고 볼 수도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같은 것을 말한다”의 의미에서의 고백은, 믿음이 (복음을 통하여) 어떠한 규범(Normen)을 알고 있으며, 이것을 존중하고 지키는 것이 당연히 믿음의 본질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고백에는 자발적으로 믿음을 증거하는 것과 자기가 복음을 믿을 때 동의한 것을 순종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고백이란 자기를 고백 내용(복음)에 묶는 것이므로 (항상 새로운 것이며) 이로써 그는 한편으로는 잘못된 전통주의와 주지주의로부터, 다른 한편으로는 신비주의와 이상주의로부터 보호받는다.
2) 믿음은 복음(성경) 내용에 한정된다
믿음은 (단순한 확신이 아니라) 복음에만 한정되고, 믿음이 복음에 순종하는 것이므로, 이제 우리는 믿음과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무엇인지 말할 수 있다(복음의 핵심이 그리스도에 대한 것이므로). 바울은 자주, 그리고 매우 다양한 표현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대해 말한다. 어떤 학자들은 여기에서 바울이 믿음을 신비주의적 의미로 사용했다고 말한다. 물론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그리스도에 대한 개인적인 관계를 포함한다는 것(믿음에 신비적인 면이 전혀 없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예: 갈 2:20; 롬 10:9,12,14). 그러나 이러한 관계는 복음에 대한 믿음에 의해 규정되며, 이 관계는 어떤 면에서는 믿음과 동일하다. 즉, 복음을 믿는다는 것이 복음 내용을 차지하는 Person(인격적인 인간. 이곳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과 관계하는 것이므로,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도 단순히 인격적인 관계라고 말할 수 없고, 그리스도라는 Person과의 관계 – 복음이 그분에 대해 우리에게 알려주는 대로 – 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서도 믿음은 항상 복음과, 복음의 구체적인 구원에 대한 내용에 묶여 있다(믿음은 어떤 신비적이거나 주관적이 확신, 체험 등과는 다르다. 그리스도와의 어떤 주관적이고 신비적인 관계가 아니다. 단지 그리스도께서 자신에 대해 성경에서 알려주시는 대로 믿어야 한다).
3) 믿음의 내용인 교회 전승에 대해
(1) 전승은 사도적 권위를 가진다
믿음이 항상 복음이 가르치는 내용에 묶여 있으므로 믿음과 가르침(전승 포함) 사이에 떨어질 수 없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 벌써 명백해진다. 바울 서신에서는 바울이 교회에 넘겨준 전승과, 그가 훈계한 가르침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전승이라고 하면 보통 어느 집단에서 익명으로 발생한 것을 말하는데, 이곳에서 말하는 전승은 그런 것이 아니다. 또한 교회의 (주관적인) 믿음이 전승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6]. 바울적 전승 개념은 – 이에 대해서 근래 설득력 있게 증명이 되었는데[7] – 유대교 전승 개념과 같은 것으로서, 복음은 명확한 경계를 가진 권위적인 전승(Tradition)이며 이것을 전승한 사람은 특별한 자격과 권능을 가진 사람이다(참조: 고전 11:2,23; 15:1,3; 갈 1:12). 그리고 바울이 여러 번 사용한 표현인 “전승하다”, “받아들이다”라는 말도(참조: 갈 1:9; 빌 4:9; 살전 2:13; 4:1; 살후 3:6) 이러한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전승이라는 말이 사도가 말하는 전승과는 다른 의미이므로 혼동을 일으키는 점이 유감이다. 전승과 가르침이 이렇게 연결되어 있으므로 복음에 대한 믿음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또한 믿음의 순종도 내용적으로 , 그리고 구조적으로 규정되어 있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규범적인 사도들의)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롬 6:17). 이렇게 교회의 믿음과 사도적 권위는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이러한 사도적 전권을 믿는다는 것은 순종을 의미한다.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늘 이것을 말했다. 그는 논리적인 설명으로 교회를 설득했을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주님으로부터 받은 전권을 내세웠으며, 그가 복음 내용이 잘못 이해될 위험에 처하거나 위조되었다고 생각했을 때는, 권위적이고 반박을 허용하지 않는 “내가 …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라는 말로 대응했다(고전 15:1; 갈 1:11).
복음이 이렇게 “형식적인” 그리고 “내용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으며, 믿음은 이에 대한 순종이므로 이 둘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임이 여기에서 다시 한 번 드러난다. 바울은 먼저 자기 전권을 순종적으로 인정하게 하고, 그다음에 그의 메시지 내용도 순종할 것을 요구하는 방식을 취하지 않았다. 그의 사명과 전권은 (하나님의) 비밀이 계시되었음을 선포하는 것이며, 그의 사도적 권위는 그 선포의 내용으로부터 도출되었다(참조: 엡 3:2 이하). (즉 사람이 사도가 전해준 그리스도의 비밀인 복음을 듣고 이것을 믿은 후에 사도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다).
(2) 전승은 (사람이나 교회가 만든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근거로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 복음은 인간의 의지와는 전혀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하신 구원 사역의 선포인 바, 복음의 권위가 무엇보다도 역사적으로 실제로 일어난 일에 근거한다는 것이 복음의 본질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약 구원 사건을 전승한 그 내용이 신뢰할만하지 않고, 구원사역에 대한 믿음이 전승을 근거로 할 수 없고, 그것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 없다면, 복음은 복음이 될 수 없고, 믿음도 믿음이 아니고 믿음의 순종도 순종이 될 수 없다(고전 15:14 이하; 참조: 15:1 이하). (이것은 복음 자체가 내용적으로 권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렇게 믿음과 복음과 전승이 서로 결합되어 있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 늘 자기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근거로 대었다. 즉, 승귀하신 그리스도께서 직접 복음 전승과 선포가 올바르다고 확증하시고, 그에게 그것을 전하라는 전권을 주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전승에 대한 믿음은 궁극적으로는 증인이나 전승을 전해주는 사람이 얼마나 신뢰할만한지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주님께서 자기 사도들을 교회의 초석으로 세우셔서, 이들이 자기 이름과 권위로 선포하는 모든 것에 대해 순종을 요구하신다는 사실에 근거한다(참조: 롬 15:18 이하; 살전 1:5; 엡 2:20 그외). (그러므로 사도의 선포는 곧 주님 말씀과 같다).
(3) 전승의 보존
그 결과 자연적으로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이 변질되지 않고 혼란에 빠지지 않도록 잘 보존하는 것이 교회의 부르심이 되었다. “그러므로 너희가 (사도들의 전승을 통해)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골 2:6-7). 그러므로 “믿음에 굳게 선다”는 것은 전승을 굳게 붙잡는 것을 의미하고(살후 2:14-15), 삶을 새롭게 하고 옛 사람을 벗어 버리는 것은 그런 식으로 받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및 그 규범에 끊임없이 순종하는 것과 아주 밀접한 관계에 있다.
2. 믿음과 지식과의 관계
이미 19세기에 독일 교회에 합리주의적 성서비평이 지배하면서 많은 교인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게 되었다: “그러면 우리는 모순 투성이인 성경을 통해서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여기에 많은 신학자들이 대답했는데, 불트만과 같은 실존주의 신학자들은 성경의 비신화화 작업을 시도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서 신화를 통해서 가르치려고 하신 것을 추려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즉, 성경에서 신화라는 옷을 벗기면 순수한 하나님의 메시지가 나온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많은 신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학문적 기류에서 칼 바르트도 기가 막힌 해결책을 내놓았다. 성경에 비록 오류가 있을지라도, 하나님이 이를 통해 자신의 뜻을 계시하셨으므로 진리로 알고 믿으라고 했다.
리덜보스는 이러한 정신적, 신학적 흐름에 반대하여 믿음은 반드시 올바른 지식(진리)을 기반으로 해야 함을 강조한다. 성경에 오류가 있다면 우리는 성경을 믿을 수 없다.
따라서 목회서신에서 등장하는 “올바른 교훈(건강한 가르침)”, “올바른 믿음”이라는 말이 진짜 바울 서신에서 나오는 믿음의 이해와는 다르다고 주장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8]. 물론 바울 서신에는 변화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세월이 흐르면서 이루어지는 자연스러운 발전이다. 믿음과 전승이 일치한다는 것은 바울의 믿음의 개념의 본질에 속하므로 이것이 서로 다르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믿음은 처음부터 이방의 지혜와 대립되었으며(고전 1:20 이하) 혼란과 변질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내적 필연성을 가지고 있다(참조: 롬 16:17). 그러므로 “지식”(Erkenntnis; 인식, 깨달음)이라는 말은 바울의 믿음 이해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믿음은 이교의 신비주의 같은 “감성”의 영역으로부터 접근될 수 없고, 자기가 어떤 것에 복종하고 무엇을 위해 결단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없는 가운데서의 결단(Entscheidung)의 행위로 정의될 수 없다. 믿음은 지식을 전제하고 거기에 기반해서 거기로부터 거듭 반복적으로 힘을 얻는다.
(1) 믿음과 지식은 상충되면서도 병존한다
믿음과 지식, 피스티스(믿음)와 그노시스(지식)의 관계는 믿음과 행위의 관계처럼 상충되면서도 병존하는 관계이다. 지식이 인간을 자력 구원의 길로 인도한다든지, 지식이 자기애를 섬긴다면 지식은 믿음을 방해하는 것이다(참조: 고전 1:26-29). 기독교적인 지식(Gnosis)(고전 8:1; “우리는 안다”)도 그것이 교회를 세우지 않으면 잘못된 것이다. 사도 바울은 그노시스 자체를 인정하고, 우리는 우리 모두가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고전 8:3). 하지만 그는 즉시 거기에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운다”고 덧붙여 말한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잘못 사용되는 모종의 기독교적 그노시스, 즉 믿음이 약한 자들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지식, 또는 교회를 세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개인적인 자유를 위한 지식이다. 이러한 그노시스는 오직 교만한 개인주의만을 촉진할 뿐이고, 사랑과는 반대된다. 그런 의미에서 그노시스는 믿음과 대립되는 행위와 마찬가지로 사랑과 대립되고, 그런 점에서 해롭기만 할 뿐이고 유익이 없다(고전 13:2-3).
그런데 믿음이 행위에 반대 되지만, 행위가 없이는 믿음이 아무것도 아닌 것과 같이, 믿음과 지식, 지혜(Sophia)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은 세상의 지혜를 무너트리시지만,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지혜가 되셨다(고전 1:30). 그러므로 지식과 지혜는 믿음과 반대가 되면서도 복음선포의 열매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속한다.
바울 서신에서 이렇게 믿음과 지식을 통합해서 연결하는 것을 보여주는 구절이 상당히 많다. 이 모든 것을 뛰어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단지 이론적인 지식 만이 아님)이 그에게 자기 과거의 모든 업적을 배설물로 여기게 하고 의를 단지 믿음의 기반 위에서만 찾게 했다(빌 3:8 이하; 참고: 2:14). 무엇보다 이러한 지식은 믿음의 내용과 믿음에 대한 지식의 근거로서 그리스도의 부활과 관련되어 있다:
o 롬4:24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o 롬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o 살전4:14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o 골2:12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지식은 일반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고후 4:6). 그외에도 자주 “지식”이라는 말을 사용하는데(“우리는 … 알므로”; 롬 5:3), 이것은 믿음이 의식적이고 목표를 향해 노력하는 믿음이며, 그럼으로써 확신에 찬 믿음임을 말하기 위함이다.
교회는 이러한 지식을 처음부터 완전하게 갖출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될 때까지” 지식 안에서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 이르기까지” 성장해야 한다(엡 4:13). 그리스도 안에서 주시는 지혜에 대해서는 어린 아이 상태로부터 성인이 되기까지 계속 자라야 한다. 고전 3:1 이하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어린이 상태”와 “완전한 상태”를 두 부류로 구분하는 것은 아니라, 미성숙에서 성숙으로 나가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지혜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일 뿐이다. 전체로서의 교회는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 즉 “그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달아야 한다(골 2:2-3). 그러면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올바른 믿음에서 이탈하고 “사람의 헛된 속임수”에 의한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이리저리 요동하는 일이 없게 된다.
(2) 지식의 내용은 윤리적 의미를 나타낼 때도 있다
지식(gnosis, epignosis)과 지혜(sophia)가 무엇인지는 그 내용을 바울서신으로부터 어렵지 않게 알아낼 수 있다. 먼저, 지식은 가면 갈수록 하나님의 뜻을 더 잘 이해하는 것과 관련되는 것으로서, 이것은 윤리적인 내용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골 1:9 이하에서 사도는 교회가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워져 “주께 합당하게 행하게” 해달라고 자기가 도고기도를 한다고 말하고, 빌 1:9에서는 그 동일한 것을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는 지식과 총명이라고 표현하는데, 거기에서 지극히 선한 것(진정으로 중요한 것들)은 윤리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음에 틀림없다(참조: 몬 1:6; 롬 15:4).
(3) 지식의 내용은 근본적으로 구원에 관한 지식을 깊고 포괄적으로 통찰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윤리적 측면이 핵심은 아니다. 엡 1:9에 나온 “하나님의 뜻의 비밀”에서 하나님의 뜻은 문맥에 따르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윤리적 요구 보다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그분의 사역에서 드러내신 하나님의 구원의 의지로 이해해야 한다. 이에 따라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엡 1:17-18). 여기에서 믿음의 지식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선물하시고 또한 선물하실 것에 대해 더 깊고 포괄적으로 통찰하는 데에 있다. 다른 곳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비밀을 아는 지식”과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진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도 그런 식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바울은 종종 한층 더 강력한 언어로,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신다”고 말하고서는,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은”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을 알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고전 2:10 이하).
이것은 특정한 소수의 사람에게만 이 “완전성”이 주어진다고 하는 밀의적 계시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바울은 십자가에 달리신(고전 2:2)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 외에는 모른다. (성경에 분명히 나타난 복음에 대한 지식 외에는 다른 비밀이 없다!) “그리스도의 비밀”(엡 4:3), “하나님의 깊은 것”(고전 2:10)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계획하시고 때가 차서 계시하신 것(이것은 모두 성경에 기록되었다!)을 말한다. 그런데 이것은 단지 일어난 사건의 전승에서뿐만 아니라 그 사건의 포괄적인(umfassend) 의미에도 깊은 비밀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자신을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고전 4:1)라고 하면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모든 측면에서 조명함으로써 그 지식과 지혜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전한다[9]:
구약을 그리스도적으로 해석[10]하고, 로마서 9-11장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웅장한 구속사적인 해석에서(이곳에서도 11:33에서 “하나님의 깊음”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로마서 5장과 고린도전서 15장에서 그리스도와 아담을 유형학적으로 비교한 곳에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죽은자들의 부활에 대한 조명에서(고전 15:35-49) 그렇게 했다.
그런데 그가 이제 거짓 교리와 싸우면서 그리스도의 의미를 모든 피조물과 그의 세력에게까지 확장해서 설명하고, 그후에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표현할 때는 한걸음 더 나아간다(골로새서). 그리스도의 영을 가지고 있고, 그분으로부터 배우는 자는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져 있는 비밀을 깨닫고,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것이 무엇인지를 안다(참조: 고전 2:6-16). 바울은 교회 자신이 이 지식에 참여하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바울은 그 자신이 이러한 하나님의 “비밀들”을 맡아서 분배해 주는 자이고, 하나님이 교회에 이 지식을 주기를 반복적으로 기도할뿐만 아니라, 교회가 이 지식을 적극 활용해서, 그들의 생명의 원천이자 뿌리인 그리스도에 의해서 믿음 안에서 세워지고 견고해져 가고(골 2:7),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계시의 성령을 수여받아서(엡 1:17; 빌 3:15), 그 비밀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엡 3:18)를 알 수 있게 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11].
지식과 지혜는 확장된 의미에서도, 그리고 그 설명에서도 단순하게 믿음과 같은 것이 아니다. 즉, 그것은 즉시 사용할 수 있는 은사가 아니라 모든 성도와 모든 세대가 발견해야 하고, 탐구하고 연구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식과 지혜와 같은 보물은 사람이나 교회가, 그리고 한 세대가 깨달을 수 있는 것보다 더 크기 때문이다. 은사가 같지 않고 여러 가지라는 것을 통해서도 이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은사 중에서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의 은사도 있다고 했다(본서의 70장을 참조하라).
(4) 지식은 교회를 세워야 한다
지식과 지혜는 단지 교회 전체를 세우기 위해서만 주어졌다: 그것은 다른 것들과 함께 믿음의 본질을 추가적으로 규정하고, 그럼으로써 성령님께서 교회에 선사하신 교회의 새로운 실존 방식에 속한다.
3. 신뢰, 헌신, 능력, 소망으로서의 믿음
우리는 지금까지 믿음과 구원의 메시지(전승을 비롯한 가르침)는 서로 분리되지 않고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살펴보았다(믿음의 내용은 성경 가르침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이제 바울이 사용하는 언어 용례에서 믿음을 단지 믿는 행위(fides qua creditor)뿐만 아니라 믿음의 내용(fides quae creditur)도 의미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 믿음은 다음과 같은 것을 통해서도 규정된다. 즉 믿음은 구원의 약속을 믿는 것이므로, 믿음은 신뢰, 헌신[12], 소망의 성격을 지닌다. 믿음이라는 것은 전승과 밀접하게 관련되었으므로 사도적 구원의 가르침에 순종하면서 전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므로, 믿음은 단지 혹은 특별히 인식적인 차원에만 관계가 있으며, 원칙적으로 인간의 전 실존과는 관계하지 않는다는 생각은 전혀 맞지 않는다. 바울이 믿음을 마음의 일이라고 말하고(롬 10:9[13]), 지식을 항상 깨달음(nous)과 연관시키는 것을 보았듯이, 바로 이러한 개념들이 새 사람의 결단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다(믿음이 있다는 말은 신뢰와 소망 가운데서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1) 신뢰는 믿음의 본질적 요소이다
신뢰라는 말은 신약 전체에서뿐만 아니라 바울 서신에서도 구약에서만큼 자주 사용되지는 않는다. 예를 들면, 시편에서보다 훨씬 적게 나온다. 이것은, 시편에서는 곤경에 빠진 기도자의 개인의 운명에 대한 이야기가 많으므로, 극한 어려움에 처한 경건한 자가 온통 하나님만 신뢰한다는 것과 관련된 반면, 신약에서의 믿음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포괄적이고 종말론적인 구원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신뢰가 바울의 믿음 이해에서 본질적인 요소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신뢰는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믿는 믿음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신뢰는 이 믿음 안에 포함되어 있으며, 이로써 믿음의 본질을 구성한다.
바울은 성령님 안에서의 새로운 삶을 “더는 육을 신뢰하지 않는” 삶(빌 3:3-4)이라고 함으로써 신뢰라는 말을 소극적인 의미로 사용하기도 했다. 그가 로마서 4장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모범적으로 내세웠을 때에는, 그의 믿음을 하나님 약속과 이 약속을 성취하시는 그분의 능력을 신뢰하는 것이라고 한다(롬 4:11; 17-21); 다른 구절에서는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고 함으로써 믿음을 다시 신뢰의 의미로 사용했다(롬 9:33; 10:11; 참조: 28:16). 바울은 이러한 믿음의 본질로서의 이러한 신뢰를 유대인의 율법에 대한 신뢰와 대조하여, 그 대조를 특징적으로 첨예화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인간의 모든 행위를 의지하지 않고 모든 “자랑”을 버리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 은혜에 온전히 자신을 맡기는 것과, 이 하나님의 “은혜에 들어간다”는(롬 5:2) 담대함과 확신을 갖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인식을 갖는 것이다(롬 8:15).
2) 신뢰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의 관계
이와 같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이러한 신뢰를 기반으로 한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인간의 노력의 결과, 즉 명상과 연구의 결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기 자신을 계시하여 알리시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것을 신뢰함으로써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하나님을 아는 것에 대해 말할 때에는 아는 행위의 주체와 대상을 수시로 바꾸고 인간이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을, 하나님이 인간을 아는 것에 상응한다는 것과 그 결과로 묘사하는 독특한 방식에서 나타난다. 그래서 갈 4:9에서는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아니 우리가 하나님에 의해 아신 바 되었거늘”(개역개정: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이라고 말하고, 고전 8:2에서는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알 것을 마땅히 알지 못하는 것이요,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에 의해 아신 바 되었느니라”(개역개정: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접근하셔서 구원하시고자 관계를 맺고자 할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며, 이런 이유에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구원에 관한 지식이며, 사람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해서 자기 자신을 맡길 수 있는 지식이다. 그리고 믿음은 언제나 그 믿는 내용을 자신의 운명 및 삶과 결합시키는 데 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아신다는 것(das Erkanntsein durch Gott in Christus: 인간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에 의해 알려진다는 것), 사람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해서 자기 자신을 맡길 수 있는 지식도 개인적, 혹은 신비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안 되고, 구속사적 관점에서 규정된다. 따라서 믿음은 어떤 마음의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단번에 우리를 아셨고고 찾으셨으며 구속하셨고, 이후로도 그리스도 안에서 그러한 사역을 계속해 나가실 것이라는 사실에서 그 근거를 가진다.
그러므로 믿음은 속죄를 통해 화해가 단번에 이루어져 자녀 신분으로 받아들여졌다는 확신에 있지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과거에도 행하셨고 미래에도 하실 하나님의 사역에 근거하여, 기쁨과 불안과 소망과 핍절을 포괄하는 그의 삶 전체와도 관련되어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바울은 믿음에서 나지 않은 것은, 즉 위에서 말한 것과 연관성이 없는 것을 “죄”라고 말하고,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와 같은 의미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롬 14:23,8). 그러므로 믿음은 자기가 믿음을 가졌다고 해서 쉴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 계속 전진하는 투쟁이며, 이 투쟁은 강함과 연약함과 전진과 후퇴를 포함한다(빌 3:12-14; 살전 3:10; 그외).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사람의 믿음이 약하다거나 강하다고 말할 수도 있고, 믿음이 커지거나 떨어졌다고 말할 수도 있다(롬 14:1; 고후 10:15; 살전 3:10). 그러나 그렇다고 할지라도 믿음은 지금이라도 당장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낸 힘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연약함이 아니라 능력이며 정지가 아니라 진보가 믿음의 특징이다.
3) 믿음은 연약함 속에서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는 것이다
바울이 가르치는 믿음의 특징 중의 하나는, 믿는 자는 살아계신 주님과 함께 교제하면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며, 이러한 능력에 참여한다는 의식을 갖는 것이다. 그러므로 엡 1:19에서 하나님이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라고 했다. 교회가 하나님의 능력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새 생명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신(골 2:12)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능력을 믿는 믿음으로 계속 유지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죄의 유혹과 능력에 빠져 그리스도 안에 거할 수 없다). 그것은 단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만 포함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아는 것도 포함한다(빌 3: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믿음은 능력으로 나타나고(살후 1:11: “이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 성령도 능력의 영이며, 신자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자신들의 부르심을 성취하여야 한다(딤후 1:7-8). 그리고 자기가 하나님의 능력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이러한 확신이 더욱 돋보이는 것은, 이 확신이 자신이 연약하다는 깨달음과 함께(고후 4:17), 신자가 하나님의 능력이 자기 자신 안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게 하기 위해, 자신의 약함에 만족하는 법을 배우게 되기 때문이다(고후 12:9 이하). 사실 이 약함은 자기가 그리스도와 묶여 있다는(연합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이다(고후 12:9-10; 13:3-4). 왜냐하면, 그리스도 자신도 약함 가운데서 십자가에 못 박혔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다시 살아났기 때문이다(고후 13:3 이하). 신자는 그리스도와의 이러한 연대 속에서(약함과 고난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함으로써) 현세 삶의 가장 깊은 의미를 알게 되고(고후 4:11; 6:9; 골 1:24; 딤후 2:10), 그리스도와의 이러한 연대는 현세의 삶 속에서도 이미 힘의 원천으로 경험되고 장차 도래할 영광의 증거로서의 역할을 한다.
o 고후12:8-10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o 고후13:4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
o 고후4:11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o 고후6:9-10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o 골1:24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o 딤후2:10 그러므로 내가 택함 받은 자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받게 하려 함이라
4) 소망[14]
믿음의 초점이 그리스도에게 맞추어져 있으므로, 믿음은 소망과도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롬 6:8). 이렇게 그리스도 자신이 영광의 소망이라고 불리며, 이 소망은 소망의 행위(spes sperans; 소망하는 소망)로도, 그리고 소망의 대상(spes sperata; 소망되는 소망)으로도 표현된다.
사도는 소망을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를 표현하는 것으로서 언급한다:
o 고전13: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o 딤전1:1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o 골1:5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으로 말미암음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그뿐 아니라 믿음 및 지식과 더불어서, 특히 믿음 및 사랑과 더불어서 소망을 다양한 방식으로 언급한다. 소망은 믿음에 의거하고(갈 5:5), „복음의 소망“(골 1:23) 또는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엡 1:18)이라 불리며, 한 성령과 한 몸과 한 믿음과 한 세례와 함께 “부르심의 한 소망”으로 언급되는 등(엡 4:4-5), 소망은 그리스도 안에서 선사되고 성령님을 통해 역사된 새 생명의 삶의 특징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소망은 그 기능과 작용 면에서 볼 때 보이지 않는 미래의 것에 관계하며, 이 미래의 것은 영원한 것이며(참조: 롬 8:24 이하; 고후 4:18; 그외), 소망이 미래의 영원한 것과 관련되므로 소망은 능력이 있다. 소망이라고 해서 그것이 믿음과 지식보다 약한 형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바로 신뢰와 능력의 근원(Quelle)이다(고후 1:9-10; 3:12). 소망은 허망으로 결말이 나지 않는 간절한 기대이며(빌 1:20), 소망하는 것이 성취되기까지 인내하게 하고 견디게 하므로 인내와 온유함을 그 열매로 낳는다(롬 8:25; 살전 1:3 그외). 이러한 면에서 아브라함의 모범적인 예를 들 수 있는데, 그는 결코 소망할 수 없는 상태에서 믿고 소망했기 때문이다(롬 4:18). 소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롬 5:5). 왜냐하면, 우리는 소망으로 이미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4. 이미와 아직
바울은 새 생명의 삶이, (힘찬) 소망 안에서 믿음으로 사는 삶으로서, 능력있고 확신에 차고 어려움을 극복한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믿음과 소망에는, 새로운 생명과 새로운 인간의 이러한 능력과 확신에 잠정적인 성격[15]이 있다는 것도 분명히 나타낸다. 이러한 이유로 사도가 믿음과 소망을 번갈아 강조하고 있는 것이 두드러진다. 이를 통해 바울이 자기 신앙 체험을 묘사하는 곳에서는, 이것은 대부분 그의 서신에서 매우 개인적 체험이나 느낀 점을 말하는 곳으로서, 믿음이라는 말이 강한 긴장을 포함하며 감동을 자아내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잠정적인 성격이 전면에 부각되는 것은 특히 믿는 것과 보는 것이 대비되고 있을 때이다:
o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고후 5:7).
o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고전 13:9).
o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고전 13:12).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선포가 설교 내용의 기본이 되고 또한 필수불가결하지만(고전 15:3-8. 14-15),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났고 보여진 것은, 그것을 믿는 자 안에서는 아직 일어난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복음의 본질이 파라독스라고 말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의 생명은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감추어져 있으며,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비로소 분명히 드러난다(골 3:3-4).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났고 우리에게 보여진 구원은 이러한 이유로 지금은 믿음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줄을 아노니”(고후 5:6). 그러므로 “믿음 안에 있다”는 말은, 우리가 종말론적인 실존과 구원의 선물로서의 새 생명에 “이미” 참여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새 생명의 잠정적인 실존 방식으로서의 믿음은, 우리가 “아직”은 현 세대에, 시간 속에서의 실존으로 살므로, 아직 완전하지 않고 우리 앞에 놓여있는 것을 아직 붙들지 못했다는 것을 말한다[16](빌 3:12-14):
o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o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o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고전 13:13(“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에서 이러한 것들이 “항상”, 즉 영원토록 있다고 하는데, 그러면 위에서 말한 것, 즉 믿음의 새 생명의 잠정적인 실존 방식으로 설명하는 것과 갈등을 일으키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다. 특별 은사는 믿음 소망 사랑의 단순함을 넘어서므로 고린도 교인이 특별 은사를 더 높이 여길지라도, 이것은 “효력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믿음 소망 사랑은 그리스도에 매고, 이것들은 새로운, 영생을 누리는 완전한 삶에서도 우리가 이 임시적인 삶에서 가졌던 것과 같은 모습으로 지속될 것이다. 믿음과 소망은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들을 단단히 묶어주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온전한 자들 안에서는 그들의 영원한 생명의 정도에 따라서(pro mensura vitae aeternae) 달라지기는 하겠지만, 여전히 이 땅에서의 잠정적인 경륜에서와 마찬가지로 영원히 동일한 것들로 남아 있고 폐기되지 않는다.
여기에서 또 다시 아브라함의 믿음은, 믿음이 지닌 이러한 성격과 관련하여 모범을 보여 준다. 비록 그가 거의 100살이 된 자기 몸이 죽은 자와 같고 사라의 태도 죽었음을 알았음에도 그는 하나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소망이 전혀 보이지 않았음에도 소망으로,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만드시는(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을 믿었다(롬 4:17 이하). 그러므로 그는 믿음으로 견고하여 져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성취하신다는 것을 온전히 확신함으로써(20-21) 그 믿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믿음을 이렇게,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에 대해 갖는,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믿음”, 모든 절망에 대항한 소망으로 설명하고, 또한 다른 한편으로는 “온전히 확신한” 것으로 이중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믿음에는 긴장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또한 사도 바울은 이러한 성격을 가진 아브라함의 믿음이 아무 공로 없이 선물로 주어지는 칭의를 받을 수 있다는 교회의 믿음을 위해 모범적인 의미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렇게 해서 믿음은 아직은 영화되지 않은 이 세상의 실제에 대립하여 긴장 가운데서 존재하며, 이 세상의 현실을 결코 오판하거나 이상화하지도 않는다. 믿음은 자기 육신 안에서, 그리고 세상적인 유혹과 시련 앞에서 무력하고 죽어 있음을 알기 때문에(롬 4:19; 고후 5:4), 소망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바라고 믿는다”. “지금과 여기”의 관점에서 본다면 아무것도 없음에도 믿는 것이다. 그러나 믿음이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게 하시는 하나님과 관계하므로, 믿음은 확신이며 동시에 소망이며 영광을 돌리는 것이며 인내며 능력이며 승리이다(롬 4:18 이하; 5:2 이하; 8:18,37-38; 고후 12:9).
연약한 육신에 대한 구절:
o 롬4:19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o 고후5:4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그럼에도 소망하면서 인내하는 구절
o 롬4:18-20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o 롬5:3-4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o 롬8:18-19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o 롬8:36-37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o 고후12:8-9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이러한 믿음의 이중적 성격은 바울 서신에서 “이미”와 “아직”이라는 팽팽한 긴장이 있는 상반관계로 다양하게 표현된다. 사도로서의 그의 삶은, 한편으로는 온갖 시험과 시련, 즉 고난과 감옥생활과 매를 맞은 것과 죽을 뻔했던 위험들을 겪은 것으로 가득한 반면에(고후 11:13), 이와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낙심한 자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깊은 위로를 체험하며(고후 7:6), 그리스도 때문에 연약함과 고난과 박해와 압박을 기꺼이 감당하고 이것을 자랑하는 것에서 이 양면성이 잘 나타난다: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 2:10). 고후 4:7-9에서도 이것이 다음과 같이 드러난다:
o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o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o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이러한 믿음의 이중적인 성격은 감동적인 빌 3:7-14에서도 분명히 나타난다. 이곳에서 바울은, 믿음으로 얻는 의의 목적이 그리스도를 알고 그의 부활의 능력과 그분의 고난과 함께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과 그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 사이에 모순이 있는 것이 아니라 후자가 전자의 길을 열어준다(고난을 통해서만 부활의 능력에 참여할 수 있다):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10-11).
고난은 이렇게 신자를 그리스도의 제자의 삶으로 인도하므로 고난은 제자가 어려움을 이기고 있다는 승리의 증표가 된다: 십자가의 길을 통해 빛의 길로(via lucis via crucis). 그러나 죽음과 삶, 고난과 부활과 같이 서로 모순되는 것이 이해되려면, 그리스도를 아는 자기의 모든 지식을 가지고 아직도 도달하지 못한 것을 향해 온힘을 다해(mit aller Anspannung der Seele) 손을 뻣치며 달려가야(투쟁해야) 가능하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3-14).
새로운 삶은 전적으로(in seiner Ganzheit) 그리스도의 전투(militia Christi)에 참가하여 함께 싸워나가는 것의 문제이다. 이것은 특히 새로운 순종에서 더욱 그러한데, 이제 이 주제로 넘어간다.
[1] 믿음이 하나님의 은사라는 것을 말할 때 빌 1:29와 엡 2:8을 근거대기로 하는 사람이 있지만, 사실은 별 관계가 없으며, 고전 12:9에서는 성경의 은사로서의 특별한 믿음을 말하고 있다(고전 13:2).
[2] 믿음이란 이렇게 신비한 것이다. 믿음은 개인이 자기 뜻대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선물하시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은 죄인에게 믿음의 결단을 요구하신다.
[3] 루터는 교회를 하나님 말씀의 피조물이라고 했다.
[4] 복음의 능력은 인간을 믿음의 결단으로 이끈다.
[5] 하나님께서 오랫동안 구약 선지자들을 통해 약속하신 구원이 종말에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 길을 열어놓으셨다.
[6] 성경비평학에서 전승이라는 말은 교회의 주관적인 믿음과 같다. 그러므로 이것은 사실과 일치한다고 볼 수 없다. 그러나 리덜보스는 여기에서 전승은 권위를 가진 사도들의 가르침이라고 한다.
[7] 예를 들면, O. Cullmann, Tradition, 1954, 9ff.
[8] 성경비평학자들은 이러저러한 이유를 들어 목회서신이 가짜바울서신이라고 한다.
[9] 이러한 지식과 지혜는, 사도가 우리와는 다른 특별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거나 전수받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단지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구약과 예수님 말씀, 그리고 그분의 행적을 모든 연관성 속에서 우리보다 훨씬 깊게 깨달은 것이다.
[10] 롬 4장; 갈 3장; 4:21-31; 고전 10:1-13; 고후 3:7-18 등.
[11] 엡3:18-19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12] HIngabe, surrender: 자기를 희생하는 것. 이것은 하나님 아들의 주요 속성이다.
[13]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4]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주로 미래의 구원에 관계한다.
[15] Vorläufigkeit: 임시적이라는 말로 번역이 되지만, 원래 의미는 이것과 좀 다르므로 나는 “잠정적”이라는 표현을 선택했다.
[16] 성령님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으로 다시 태어난 새 생명은, 원칙적으로 능력과 확신과 기쁨과 사랑이 넘치고 늘 거룩함을 갈망해야 한다. 늘 소망가운데서 살아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새 생명은 아직은 하늘에 감추어져 있다. 우리가 육을 입고 사는 동안에는 갖은 유혹에 열려 있고, 많은 것이 희미하게 보이고, 부분적으로만 알고, 연약하고 고통스럽게 살아야 하며, 때로는 하나님이 눈앞에서 사라지신 것 같아 불안해진다. 이러한 실존을 잠정적, 임시적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은 하늘에 있기 때문에, 이것이 온전히 드러날 때에만 이러한 완전한 실존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땅에서 불완전하게 보이는 삶을 유지하게 하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그러므로 믿음에는 늘 긴장이 따른다. 그뿐 아니라 믿음에는 늘 고난이 있다. 고난을 통해서만 우리가 이러한 믿음의 실제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이 땅에 대한 소망을 벗고, 하나님과 천국에 대한 소망이 자라기 때문이다. 우리는 늘 믿음 생활에서 승리하도록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한다.
*강의자 : 송다니엘 교수
*본 리덜보스의 바울신학 해설 4강은 2024년 8월 25일(주일)과 9월 1일(주일)에 실시된 부천개혁교회의 사경회와 부천개혁성경신학교의 집중강의를 겸하여 강의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