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숨막히게 거대한 고려시대 석불, 독특한 개성과 멋이 넘쳐흐르는 용미리 마애2불입상(磨崖二佛立像, 석불입상) - 보물 9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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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시 동부와 파주시 동부를 이어주는 용암사 고개, 지금은 2차선 도로(혜음로)가 흘러가고 있 지만 옛날부터 황해도와 개성(開城), 파주(坡州) 지역에서 서울을 이어주는 주요 길목으로 사람 과 물자의 왕래가 빈번했다. 그 고개 동쪽이자 용암사 북쪽 산자락에는 고려 전기에 조성된 거대한 석불, 용미리 마애2불입 상이 커다란 바위를 몸통 삼아 자리해 있다. 무덤에 깃들여진 망자(亡者)의 극락왕생을 기원하 는 것일까? 용미리 시립묘지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는 석불은 오랫동안 미륵불(彌勒佛), 쌍미륵 불 등으로 불려왔으며, 광탄면에 있다고 해서 '광탄석불'로도 불렸다. 예전에 불광동서부터미널 에서 광탄까지 시외완행버스가 다니던 시절에는 석불 아래 정류장 이름도 '미륵불'이었다. 이 석불은 11세기 후반에 고려 선종(宣宗)의 3째 부인인 원신궁주(元信宮主)의 지원으로 조성된 것으로 전하며 석불의 위용은 한때 잘나갔던 궁주의 위세를 보여주는 듯 하다.
바위에 전신상(全身像)을 새기고 그 위에 다른 돌로 머리와 갓, 목 부분의 불두(佛頭)를 만들어 얹힌 형태로 머리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바위에 선각(線刻)으로 처리되어 마애불(磨崖佛)로 봐도 상관은 없다. 이런 형태의 마애불로 안동 제비원석불(이천동 마애여래입상)이 그 대표격인 데, 그 석불 역시 자연바위에 몸을 새기고 그 위에 다른 돌로 머리를 얹혔다.
본 석불의 가장 큰 특징은 머리가 2개, 즉 우리나라 유일의 쌍두불(雙頭佛)이라는 것이다. 절과 속세에서는 그를 쌍미륵불로 추앙하고 있는데, 그렇다고 몸 하나의 머리가 둘 달린 괴물은 아니 다. 비록 하나의 바위에 의지해 있지만 바위 사이로 마치 둘을 가르듯 틈이 나 있으므로 몸통 둘의 머리 둘로 봐도 무방하다. |
▲ 석불 앞에 마련된 기도처 중생의 소망이 한가득 담겨진 연분홍 연등의 행렬이 아무도 없는 기도처 주변을 따스히 감싸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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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불의 높이는 19.85m, 반올림하면 근 20m에 이르는 장대한 불상으로 바위에 그대로 만든 탓에 신체비례가 다소 떨어진다. 하지만 그런 것이 바로 고려시대 석불이 지닌 강한 특징이자 개성이 니 이에 대해 뭐라 중얼거릴 수는 없을 것이다. 고려 때 만들어진 불상은 다른 시대와 달리 덩 치가 유난히 크며 얼굴과 외모가 수려한 불상보다는 생김새가 정말 가지각색인 개성파 불상들이 많다. 용미리 석불 역시 그 시대의 유행에 충실하여 불상이라기 보다는 세속적인 특징이 배어있 는 석불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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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서 바라본 용미리 석불 900년의 세월을 견뎌 내면서도 그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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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 사이의 틈을 경계로 왼쪽의 불상은 선비마냥 둥근 갓을 쓴 원립불(圓笠佛)이다. 보통 불상 들은 화려한 보관(寶冠)을 쓰기 마련인데, 그런 화려함 대신 사람들이 많이 쓰고 다니는 갓을 씌워 놓아 무척 친근하게 다가온다. 은연히 미소가 깃들여진 그의 얼굴은 거의 네모난 모습으로 논산 관촉사(灌燭寺)의 은진미륵(恩津彌勒)과도 좀 비슷한 생김새이다. 불상의 얼굴이라기보다 는 그만의 특유하고 재미난 색채가 강하게 배어있으며, 목은 원통형이고 두 손은 가슴 앞에 대 고 연꽃을 살짝 들고 있다. 그리고 몸통이 들어앉은 바위에는 옷을 입혀놓았는데, 옷의 주름을 선각으로 세심히 처리했다.
오른쪽 불상은 동그란 갓 대신 네모난 갓, 즉 방립불(方笠佛)을 머리에 걸쳤으며 눈썹과 눈이 길다. 가슴 앞에 두 손을 모아 합장인(合掌印)을 선보이고 있으며, 왼쪽 불상보다 키가 약간 크 지만 덩치는 좀 작다. 하지만 듬직한 몸집에 넓은 어깨를 가지고 있어 은근히 웅장해 보인다.
지역 구전에 따르면, 둥근 갓의 불상은 남상(男像), 네모난 갓의 불상은 여상(女像)이라고 하는 데 듣고 보니 정말 그럴듯한 모습이다. 금슬이 짙은 부부처럼 다정히 자리하여 중생들을 살펴보 는 모습이 꽤 훈훈해 보인다.
이들의 작품성은 별로 우수한 편(안내문에 그리 나옴)은 못되지만 고려 왕족의 탄생설화가 담겨 져 있고 지방색이 짙은 고려 불상의 특징을 강하게 보여주고 있으며, 소망을 들어주기로 소문이 자자하여 찾는 이들의 행렬이 줄을 잇는다. 특히 아이가 없어 애태우거나 아이를 원하는 이들의 소망을 잘 들어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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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측면에서 바라본 용미리 석불 |
▲ 용미리 석불의 전경 |
※ 용미리 석불입상의 설화 고려 13대 군주인 선종(宣宗, 재위 1083~1094)은 적당한 후사가 없어 늘 고민에 빠져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3번째 부인인 원신궁주<元信宮主, 인주이씨 평장사 이정(李頲)의 딸>의 꿈 에 도승 2명이 나타나 하소연했다. '우리는 파주 장지산에 있습니다. 식량이 떨어져 배가 고프 니 이곳에 있는 두 바위에 불상을 새겨주세요' 이상하게 생각한 궁주는 사람을 보내 확인해 보니 그럴싸한 큰 바위가 하나 발견되어 바로 불상 조성에 들어갔다. 그러고 얼마 뒤, 그 도승이 다시금 꿈 속에 나타나 왈 '왼쪽 바위에 미륵불을, 오른쪽 바위에 미륵보살상을 만들어 공양하고 기도를 드리면 아이를 원하는 사람은 아들을 얻고, 병이 있는 사람은 완쾌가 될 것입니다' 도승의 부탁대로 두 불상을 새기고 그 밑에 절(이름은 전해오지 않음)을 세워 기도를 올리니 과 연 몇달 뒤, 그렇게나 소망하던 아들 한산후 왕윤(漢山侯 王昀)이 태어났다.
허나 선종은 위의 설화와 달리 아들 왕욱<王昱, 2째 부인 사숙왕후(思肅王后)의 소생으로 14대 헌종>이 있었다. 그러나 태자(太子) 왕욱은 심히 병약하여 늘 병을 달고 살았으며 소갈증(消渴 症, 당뇨병)까지 앓고 있던 상황이라 만약을 위해 건장한 아들을 하나 더 얻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 보람이 있는지 원신궁주는 한산후 외에 이름이 전하지 않는 아들 2명을 더 낳아 더욱 승승장 구하게 된다.
1094년 선종이 붕어하고 헌종이 제위에 오르자 자신의 오라버니인 '이자의(李資義)'와 공모하여 한산후를 왕위에 세우려고 모반을 꾀하다가 선종의 아우인 계림공 왕희(鷄林公 王熙, 뒤에 15대 숙종)에게 보기 좋게 털렸다. 결국 원신궁주 모자는 그 대가로 이름이 전하지 않는 머나먼 곳으 로 추방당하고, 그들의 행적과 사망 시기도 제대로 남기지 못한 채 역사 속으로 허무하게 잊혀 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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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쪽만 멀뚱히 바라보는 용미리 석불의 뒷통수 저들이 바라보는 곳은 용미리시립묘지 1구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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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불과는 이미 여러 번의 안면이 있다. 몇년 만에 찾았음에도 그들은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는 것 같다. 반면에 나는 그만큼의 세월이 누적되어 인정하긴 싫지만 그만큼 늙고 변해 있었다. 향 을 피워 그들에게 삼배(三拜)의 예를 올리며 마음 속으로 간절히 무언가를 소망한다. 평소에는 찾아와 안부도 전하지 않으면서 힘들고 어려울 때만 찾아와 '이러이러하니 제발좀 살 펴달라' 소망을 비는 것도 조금은 염치가 없는 것 같다. 정작 저들이 어려움에 처할 때는 나는 과연 그들을 지킬 수 있을까? 나뿐만은 아니지만 소원만 빌러 오는 사람들이 이기적으로 느껴지 기도 한다.
예불을 올리고 석불의 뒷쪽으로 올라갔다. 석불의 머리 부분까지는 산길이 나 있는데, 그들의 높이가 20m에 이르러 거의 조그만 언덕을 오르는 것 같다. 경사가 다소 있는 산길을 올라 문화 유산 보호 철책을 넘어 석불의 뒷통수로 살짝 숨어든다. 마치 앞쪽만 죽어라 쳐다보는 사람의 뒤쪽으로 살며시 다가가 팍 기습을 하려는 듯이 말이다. 석불의 뒷부분은 밋밋하고 간소하게 표현된 뒷머리와 목덜미가 전부이다. 그런 머리 위로는 머 리 크기만한 갓이 씌워져 있는데, 갓보다는 탑이나 석등의 윗부분을 보는 것 같다.
천하에 어느 누구도 당해낼 수 없는 무구한 세월의 시련, 그것을 100년도 아닌 900년이나 견뎌 내면서 예나 지금이나 변함 없는 모습을 간직한 석불을 친견하면서 나도 그처럼 영원히 한결같 은 인생을 살았으면 싶다.
~~~ 이렇게 하여 용미리 석불 답사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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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미리 마애2불입상(용암사) 찾아가기 <2015년 1월 기준> * 서울시내버스 703번(문산 선유리↔서울역)을 타고 용암사(용미리 마애2불입상)에서 내린다. * 703번과 환승이 가능한 전철역 - 5호선 광화문역(6번 출구), 1/2호선 시청역(8번 출구), 1/4 호선 서울역(3,9-1번출구), 5호선 서대문역(6번 출구), 3호선 독립문역(1번 출구), 3호선 녹 번역(1번 출구), 3/6호선 불광역(8번 출구), 3/6호선 연신내역(3번 출구), 3호선 삼송역(8번 출구를 나와서 도보 2분) * 승용차 ① 서울시내 → 구파발4거리에서 고양,파주방면 → 대자3거리에서 의정부방면 39번 국도 → 고 양2교 교차로에서 좌회전 → 고양동4거리에서 광탄 방면 → 벽제3거리에서 광탄방면 좌회전 → 용미리 → 용암사 주차장 ② 수도권외곽고속도로 → 통일로나들목을 나와 파주방면 → 대자3거리에서 의정부방면 39번 국 도 → 고양2교 교차로에서 좌회전 → 고양동4거리에서 광탄 방면 → 벽제3거리에서 좌회전 → 용암사 주차장
* 소재지 -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 산8,9 (용암사 ☎ 031-942-0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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