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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과산행 --♣ 스크랩 남해 금산(錦山;681m)-보리암(菩堤庵) 산행기
무인도사랑 추천 0 조회 94 09.11.08 21:53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남해 금산(錦山;681m)-보리암(菩堤庵) 산행기


  아름다운 해상국립공원인 한려수도(閑麗水道)에 위치한 남해, 그 따뜻한 남쪽 나라의 이국적인 풍경이 길손의 마음을 부풀려 놓는데, 한려해상국립공원 내에 유일한 산악국립공원인 금산(명승 제39호)이 있고, 금산엔 강원도 낙산사 홍연암, 강화도 보문사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관음성지로 꼽히는 보리암이 있다. 

 

  따라서 금산 없는 남해를 생각할 수 없고, 보리암 없는 금산을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남해가 곧 금산이고, 금산이 곧 보리암이며, 한려수도가 곧 남해이기도 하니, 이 모두가 조화롭게 어울려 아름다움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곳을 산행하나니, 아름다운 풍광에 취해 정신이 몽롱하여, 산행기를 쓴다는 것이 그만 여행기가 되고 말았다. 글재주도 글재주지만 경관에 취해 그렇게 된 것을 탓해서 무엇 하겠는가. 

 

  남해군은 자칭 ‘보물섬’이라 부른다. 아름답고 깨끗한 자연환경이 그러하고, 그와 더불어 살아가는 순박한 사람들이 그러하며, 다양한 문화유적과 철마다 넘쳐나는 해산물, 농산물 등이 모두 그러하여, 이 모두가 ‘보물’이라는 뜻에서다.

  하긴 조선의 4대 명필이고 인수체(仁壽體)로 유명한 자암 김구(自菴金絿;1488~1534)는 남해에서 귀양살이를 하면서 ‘화전별곡(花田別曲)’을 지어 남해의 경치를 노래하며, 「가없는 하늘, 끝없는 지평선, 한 점 신선이 사는 섬(天地涯地之頭一點仙島)」이라 읊었으니 남해를 ‘보물섬’이라 해도 결코 과장된 말은 아닌 듯싶다.

  

  그리고 남해(南海)라는 지명이 이미 신라 경덕왕 때인 757년경부터 사용되었다고 하며, 오래 된 말이라서 그런지 ‘남해'라는 말엔 몇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즉 동해나 서해처럼 남쪽 바다라는 뜻이 있고,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로 큰 남해라는 섬을 일컫는 말이기도 하며, 행정구역으로서의 남해군을 의미하기도 하므로 ‘남해’는 이런 여러 의미가 담김 중의적(重義的)인 단어이기도 하다. 


  그런 남해에 있는 해발 681m의 금산(錦山)은 남해군 상주면과 삼동면, 그리고 이동면에 걸쳐 있고, 빼어난 암릉미를 자랑하고 있으며, 쳐다보는 기점이 낮아서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생각보다 우람하게 보인다.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각가지 형상의 기암괴석들은 온갖 전설을 담고 있어 금산삼십팔경(錦山三十八景)이라 불릴 정도로 장관을 이루고 있으며, 금강산을 빼어 닮았다 하여 소금강이라 불리는가 하면, 금강산을 개골산(皆骨山)이라 하듯이 금산을 개암산(皆岩山)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동물 형상의 바위들이 많아서 바위동물원으로 불리기도 하며, 이런 기암괴석들이 쪽빛 바다, 초록빛 들녘과 조화를 이루어 아름다움을 연출함으로써 남해인들의 자존심을 일깨워주는지라, 이 고장 사람들은 그냥 금산이라 부르지 않고 꼭 ‘남해 금산’이라 부른다.

                                           강아지 바위

 

  금산의 원래 이름은 보타산(寶陀山)이었으나 신라 고승 원효대사가 신라 문무왕 3년(663년)에 이곳을 찾았을 때 갑자기 서광이 비추는지라, 이곳에 초당을 짓고 수도 정진한 나머지 관세음보살을 친견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화엄경>에 관세음보살이 상주하는 곳을 보광궁(普光宮)이라 한 데에 착안하여, 산 이름을 보광산(普光山)이라 고쳐 부르고, 절 이름을 보광사(普光寺)라 하였다고 한다.  

                                이성계가 기도했던 자리에 세워진 선은전

 

  그러던 것이 고려 말 태조 이성계가 석가래 세 개를 짊어진 꿈을 꾸고, 무학대사에게 해몽을 부탁한 결과 앞으로 임금이 될 꿈이라고 했단다. 이에 이성계는 전국 명산을 찾아다니며 기도를 했고, 관세음보살이 주석한다는 남해의 보광산에도 들려 백일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그런데 백일기도가 끝나가는 어느 날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서 네가 임금이 되면 무엇을 해 주겠느냐 하고 묻는 것이 아닌가. 이에 이성계는 내가 임금이 되면 이 산을 비단으로 덮어주겠다고 약속을 했단다.

                                            금산 정상부

 

  그런 후 실제로 임금이 된 이성계는 산신령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신하들에게 보광산을 비단으로 덮어라 하고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당시 비단은 중국에서 수입하는 귀한 물건이어서 너무 비싸 보광산을 비단으로 덮는다면 국고가 텅 비고, 백성들이 굶주려야 할 판국이었다.

 

  이에 신하들(정도전 혹은 무학대사란 설이 있음)이 도저히 그렇게는 할 수 없으니 차라리 산 이름을 비단 ‘錦(금)’자를 써서 보광산을 ‘錦山(금산)’으로 바꾸면 사철 비단을 덮는 이치가 된다고 상소문을 올렸다. 그렇잖아도 고민을 하던 이성계는 그 기막힌 발상에 동의를 하고, 그때부터 산 이름을 금산이라 고쳐 부르게 하였다고 한다.

 

  비록 전설이긴 하지만 적어도 오래전부터 금산 일대가 기도 효험이 있는 기도처임을 보여주는 대목이고, 실제 보리암은 우리나라 3대 기도처의 하나이기도 하단다. 

  그리고 조선 현종 1년(1660)엔 태조 이성계가 이곳에서 기도하여 새 왕조를 열었다 하여 절을 왕실원당으로 삼고, 절 이름은 보광사에서 보리암이라 개명하였다.

                                              삼천포 대교

 

  이런 금산과 보리암이 있는 남해로 가는 길은 두 길이 있다. 하나는 최근에 개통된 사천시 삼천포항에서 연륙교인 삼천포대교와 창선대교를 거쳐 가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하동에서 기존의 남해대교를 거쳐 들어가는 방법이다. 

  삼천포대교 쪽은 4개의 섬을 징검돌 삼아 이어진 5개의 다리가 사천시 대방동(삼천포항)과 남해군 창선도를 연결하는 해상연륙교를 이루고 있으며, 총 연장 3.4km인 5개의 다리는 각기 다른 구조와 형식으로 건설되었고, 8년의 공사 끝에 2003년 4월에 준공되어 한려수도 명물의 하나가 되었다.

                                            창선대교

 

  삼천포대교로 해서 남해로 들어가는 길은 3번국도이고, 하동에서 남해대교로 들어가는 길은 19번국도로서 이 두 길은 섬 전체를 아우르는 해안도로이기도 하여, 해안을 따라 진행하다가 남해의 최남단 미조항에서 만난다.

 

  따라서 이 두 길은 남해 최고의 해안 드라이브 코스이기도 하여 해안선을 샅샅이 훑으며 진행하고, 가는 길 내내 시야에 들어오는 풍광이 아름답다. 짙푸른 바다와 점점이 떠있는 섬, 다랭이논, 고즈넉한 어촌, 남국의 수목 등 차장 밖으로 스치는 풍경이 가는 곳마다 한 폭의 수채화 같다.

 

  그러므로 산행을 먼저 하든, 산행 후에 귀가 길에 지나치든, 왔던 길로 되돌아가지 말고, 삼천포대교 쪽에서 왔다면 남해대교로 빠져나갈 것이요. 남해대교로 들어왔다면 삼천포대교 쪽으로 빠져나간다면 대체로 섬 전체를 살펴볼 수가 있다.


  그리고 금산은 오르는 들머리는 두 곳이 있다. 하나는 상주해수욕장 인근 탐방지원센터가 있는 곳을 들머리로 삼아 등반에 나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복곡주차장을 들머리로 하여 8부 능선까지 차량을 이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금산의 진가를 온전히 맛보려면 상주 쪽을 들머리로 하여 산행을 해야 하며, 그렇게 할 경우 정상까지 산행거리 약 5km, 넉넉잡아 왕복 3시간 잡으면 된다.

 

  상주마을의 금산 들머리에서 보리암으로 오르는 코스는 울창한 숲과 남해바다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리하여 금산탐방안내소를 출발하여 보리암까지 가는 동안 내내 거친 돌길을 올라가야 하지만, 뒤를 돌아보면 눈부신 바다를 만날 수 있고, 온갖 기암괴석들로 뒤덮인 금산의 참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지루한 줄 모르고 올라갈 수 있다.

                                       복곡저수지 쪽 들머리 제1주차장

 

  그러나 노약자를 동반했거나 시간에 쫓겨 등반이 여의치 않다면 이동면 복곡저수지 쪽을 이용해 볼만하다. 이곳 제1주차장에서 보리암행 셔틀버스를 타거나 승용차로 금산 8부 능선에 위치한 제2주차장(보리암 주차장)까지 갈 수 있다.

 

  셔틀버스는 1인당 편도 요금이 1,000원, 정원이 29명이며, 정원이 차면 바로 출발하고, 정원이 되지 않으면 30분 간격으로 운행한다.

  그런데 승용차를 이용하려고 할 경우, 제2주차장까지 올라가는 길이 대단히 가팔라서 운전에 주의를 요하며, 제2주차장은 승용차 50대 정도만 주차할 수 있을 정도로 좁아서 주말이나 성수기엔 50대 내에 들지 못하면 제1주차장에 주차를 해 두고 셔틀버스를 이용해야 한다.

                                       제2주차장(보리암주차장)

 

  제2주차장엔 매표소(입장료 어른 1,000원)가 있고, 그 옆의 이정표엔 ‘보리암 0.9km, 금산정상 1.0km, 제1주차장 3.2km’라 적혀 있다.

 

  제2주차장을 출발하여 차도 수준의 넓고 완만한 오르막길을 따라 20여분 발품을 팔면 보리암과 정상으로 가는 길이 갈라지는 갈림길에 닿는다. 거기 이정표에 ‘보리암 0.1km, 금산정상 0.2km, 단군성전 0.3km’라 적혀 있다.

 

  그 갈림길에서 보리암에 들리는 것은 뒤로 미루어 두고, 정상 쪽을 향하여 200여m, 천천히 10여분 올라가면 정상에 닿는다. 암릉으로 이루어진 정상엔 옛날 봉수대로 쓰던 망대가 있다. 망대 아래 정상 표지석엔 ‘명승 제39호, 남해금산 해발 681m’라 새겨져 있다.

 

  그리고 망대(望臺)를 설명한 안내판에는 ‘금산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701m)로서 사방의 조망이 넓고 아름다운 남해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곳이라 하여 망대라고 한다. 이곳에 오르면 금산의 38경과 남해의 만경창파를 한눈에 볼 수 있으며, 장엄한 일출은 가히 절경이다. 망대는 고려시대부터 우리나라 최남단 봉수대(烽燧臺;병난이나 경축 등이 있을 때 불을 피우거나 연기로 이를 알릴 수 있게 만들어놓은 곳)로 사용되었으며, 현존하는 것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라고 적혀 있다.

 

  그런데 표지석엔 해발 681m라 새겨져 있고, 망대 안내판엔 701m라고 적혀 있어서 어느 것이 옳은지 어리둥절하지만 아무래도 표지석의 것이 맞을 것 같다.

 

  아무튼 안내판의 설명처럼 정상인 망대에 올라서면 사방으로 막힘이 없이 시야가 열려 있어서 멀리 남해까지 찾아온 길손들에게 시원한 전망을 선사한다. 날씨가 쾌청한 날엔 발아래 점점이 떠 있는 호도, 조도, 목과도 등의 섬들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보이고, 멀리 미조면에서 40여㎞ 떨어진 세존도까지 아련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가까이 화엄봉, 제석봉, 쌍홍문(雙虹門), 일월봉, 사선대(四仙臺), 상사암(相思巖) 등의 명소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남해금산의 정상 표지석 옆에는 정상을 오르는 길목을 지키고 있는 버선모양의 바위가 있다. 문장암 혹은 명필바위라고도 하는 바위이다.

  조선 중종 때 대사성을 지낸 한림학사 주세붕(周世鵬)이 전국을 다니며 풍류를 즐기다가 남해에 있는 금산이 명산이라는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 그리하여 쌍홍문을 통하여 이곳 정상까지 올라와 보니 과연 아름답기가 이루 말할 수 없고, 신비로운 전설이 가득하므로 이에 감탄한 나머지 문장암에 '由虹門 上錦山(유홍문 상금산)' 이라는 글을 음각 해 놓았다. 그래서 이 바위가 문장암 혹은 명필바위란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정상에서 되돌아 100여m 내려가면 보리암으로 내려가는 길과 단군성전 쪽으로 내려가는 길이 갈라진다. 거기 이정표에 ‘보리암 0.2km, 금산정상 0.1km, 상사바위 0.7km, 헬기장 0.3km’라 적혀 있다.

 

  거기서 상사바위 쪽으로 5분 정도 내려가면 다시 단군성전, 화엄봉, 흔들바위 등으로 이어지는 길이 갈라지는 갈림길에 닿는다. 거기서 흔들바위 쪽으로는 내려가는 것은 뒤로 미루어 두고, 화엄봉에 갔다가 되돌아와서 반대편(서쪽)의 단군성전을 다녀올 일이다.

 

  이성계가 금산에서 백일기도를 드릴 때 매달린 절대자가 환인(桓因), 환웅(桓雄)과 단군왕검, 이렇게 삼대였다고 한다. 그런 인연으로 이곳에 환인, 환웅, 단군왕검을 봉안하고, 우리 민족의 상징으로 기리고 있다고 한다.

  흔들바위는 상사바위까지 갔다가 되돌아와서 보리암을 향할 때 들릴 수 있기 때문에 뒤로 미루라는 것이고, 화엄봉과 단군성전을 다녀오는데, 각기 5분 정도씩밖에 걸리지 않는 가까운 곳에 있다.

 

  화엄봉과 단군성전을 다녀와서 다시 상사바위 쪽으로 5분 정도 내려가면 헬기장이 있다. 헬기장을 지나 12~3분 내려가면 상사암에 닿는다.

                                             상사암 정상

 

  상사암을 소개한 안내판엔 ‘상사암(금산 제27경)/옛날 남해 상주에 살던 한 사내가 이웃에 사는 여인에게 반하여 상사병에 걸려 사경에 이르게 되자, 이를 알게 된 여인이 이곳에서 그 사내의 순수한 마음을 받아들여 사랑을 이루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고 하여 상사암이라 한다.’라고 적혀 있다. 금산 최대의 전망대이자 규모나 면적에서도 최고를 자랑한다.

                                        상사암 원경

 

  그리고 제2주차장에서 보리암을 향하는 중간에 남해 출신의 문인 박영운씨가 읊은 ‘상사암’이란 시가 안내판에 소개되어 있다.


  상사암 여기저기를 옮겨 다니며 전망을 즐기노라면 상사암 주변이 아찔한 낭떠러지다. 상사암에 관련된 또 다른 전설은, 상사병으로 죽은 머슴의 혼백이 뱀이 되어 주인집 딸의 몸을 칭칭 동여맸다가 이곳에서 한을 풀고 벼랑 아래로 떨어졌다는 이야기이다. 박영운씨의 시 옆엔 이성복씨의 시가 소개되어 있다. 그 내용으로 봐서 이 또한 상사바위에서 시의 모티브를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상사암에서 전망을 즐기고 난 다음 도로 헬기장에 이르면 헬기장 한쪽에 산신제단 비석이 있다. 이곳이 바로 산신께 제를 올리는 곳이라 한다.

                                               흔들바위

 

  그리고 단군성전 갈림길까지 올라가서 100여m 동남쪽 계단 길을 내려가면 좌선대 인근에 흔들바위가 있다. 흔들바위 앞의 안내판엔 ‘거북이 모양을 닮아 원래 귀암이라 하였으나 한 사람의 힘으로 흔들거리기 때문에 요암(搖岩)이라고도 한다.’라고 적혀 있다.

 

  흔들바위 서쪽 50여m 아래에는 산장이 있다. 부산산장 혹은 금산산장(055-862-6060)이라고 하며, 신라시대 비구니 절터였던 곳에 산장을 지어 50여 년 전부터 등산객을 맞고 있다.

  금산은 남해에선 드물게 일출과 일몰을 모두 볼 수 있어서 사진작가들이 이 산장을 많이 찾으며, 보리암 기도객들도 자주 묵는다고 한다. 산행으로 배가 출출해진 사람들을 위해 산채 정식과 시래기 된장국이 일품이고, 전통 쌀 막걸리와 파전도 있다.

 

  그리고 흔들바위에서 동쪽으로 내려가면 제석봉이 있고, 제석봉 아래에 쌍홍문(雙虹門)이 있다. 바위벽에 커다란 구명이 둘 뚫려 있어서 그 구멍으로 사람들이 오르내린다. 두 개의 굴이 짝이 되어 한 쌍의 굴로서 높이는 7~8m쯤 된다. 주세붕이 홍문을 통하여 정상에 올랐다는 그 쌍홍문이다.

 

  옛날 석가세존께서 이곳에서 득도하고 돌배(石舟)를 만들어 타고 인도로 향하자 막힌 바위가 굴을 만들어 길을 열어주었고, 그리하여 세존께서 쌍홍문으로 빠져나가 앞바다에 있는 세존도(世尊島)의 복판을 뚫고 나갔기 때문에 세존도에도 큰 해상 동굴이 만들어졌다고 전해 온다.

                                          세존도(퍼옴)

 

  굴이 둥근 모양이어서 어떻게 보면 여인의 눈동자 같기도 하지만 커다란 해골에 두 눈이 뻥 뚫린 형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무지개 형상의 홍예문이 두 개라 해서 ‘한 쌍의 무지개’ 즉 쌍홍문이라 이름 붙여졌다.

  일반적으로 절을 찾아가면 절 입구에 해탈문이 있다. 사바세계를 벗어나 절간을 찾아들어오는 사람들에게 속세에 묻은 때를 벗겨준다는 의미의 문이다. 그런데 보리암은 별도로 해탈문을 짓지 않고, 이 쌍홍문을 해탈문으로 대신하고 있다. 그러므로 쌍홍문이 보리암의 정문 격이다. 

 

  상주들머리에서 올라올 경우, 등로는 좌측 굴로 들어가 우측 굴 위쪽으로 나가게 되어 있고, 굴 안에는 3개의 작은 구멍이 있어, 돌을 던져 작은 구멍에 들어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 하여 많은 사람들이 발길을 멈추고 돌을 던져 보기도 한다.

  굴속에 들어가서 뒤로 돌아보면 굴을 통해 다도해의 풍광이 한 눈에 들어온다. 멀리 상주해수욕장의 쪽빛 바닷물이 반짝이고 크고 작은 섬들이 그림처럼 떠 있다.

                                               장군암

 

  쌍홍문 입구에는 늘 푸른 덩굴식물인 송악이 붙어사는 장군암이 있다. 장군이 칼을 짚고 동쪽을 향하여 서 있는 형상을 하고 있어 장군암이라 하였다고 하며, 금산의 첫 관문인 쌍홍문을 지키는 수문장이기도 하다.


  쌍홍문을 둘러보고, 7~8분 돌계단의 오르막을 올라가면 보리암(菩堤庵)에 닿는다. 남해의 섬 지형이 마치 ‘아기를 안고 앉아 있는 엄마의 모습’을 닮아 자애로운 분위기라서 남해는 불국토(佛國土)의 고장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미륵이 돕는다’는 뜻의 미조리(彌助里) 등 불교와 관련된 지명이 적지 않으며, 금산 역시 불교와 깊은 연관이 있다.

 

  또한 금산은 바위마다 불교에 얽힌 전설들을 간직하고 있고, 보리암은 대장봉과 화엄봉, 제석봉 등 불교 이름을 가진 기암괴석에 둘러싸여 있다.

  거대한 암봉인 대장봉(大將峰)을 등지고 깎아지른 절벽 위에 지은 보리암은 마치 제비집처럼 아찔한 곳에 있으면서 남해를 바라보고 있는데, 보리암 법당 왼편(서쪽)으로 내려서면 하얀색의 해수관음보살상이 서 있고 그 옆으로 작은 삼층석탑이 빛바랜 모습으로 천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관세음보살은 입가에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남해 먼 바다를 굽어보고 있어서 쳐다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불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3층 석탑은 김수로왕비인 허 황후가 인도에서 올 때 가져온 파사석(婆娑石)이란 돌로 원효대사가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기 위해 보리암을 창건할 때 세웠다는 탑이다. 이상하게 탑 앞에 나침반을 올려놓으면 바늘이 제 방향을 찾지 못하는 신비스런 탑이기도 하다.

 

  삼층석탑 앞은 금산의 제1전망대이기도 하여, 이곳에서 암자 전체의 풍광을 조망할 수 있고,상주해수욕장에서 시작되는 푸른 바다와 첫새벽의 일출을 감상할 수 있는 최고의 장소이기도 하다.

  그리고 보리암 동북쪽 아래로 작은 정자각이 보인다. 그 정자각을 선은전(璿恩殿)이라 하며, 바로 그곳이 이성계가 기도를 했던 장소라고 한다. 


  그런데 보리암에는 일반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또 하나의 보물이 있다. 즉 암다(巖茶)이다. 암다(암차)란 절벽 위에 자라는 차로서, 중국에서는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딸 수가 없을 정도로 깎아지른 높은 절벽 위에 자라는 차나무가 있어 잘 훈련된 원숭이로 하여금 차 잎을 따게 했는데, 이것이 중국의 유명한 무이암차(武夷巖茶)이다. 그런 암차가 바로 보리암에도 있다는 것이다.

 

  김수로왕의 왕비인 허 황후가 인도에서 김해로 가는 도중, 이 남해 금산에 잠깐 머물렀을 때 인도에 가지고 온 차 씨를 이곳에 심은 것이라 하기도 하고, 신라시대에 원효 대사가 보리암을 세울 때 심었다고도 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금산의 정상부 주위를 한 바퀴 돌고 마지막 보리암에 들려 산사의 분위기에 젖었다가 다시 제2주차장으로 걸어 나오면 산행거리 대략 3.8km, 산행시간 2시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아서 조금 아쉽기는 하나 다음 일정을 즐길 수 있어서 오히려 다행스럽다는 느낌이 든다.


  그리하여 남은 시간을 활용하여 우선 상주해수욕장의 그 유명한 은모래비치를 살펴볼 일이다. 경북 상주시(尙州市)와 한자까지도 같은 이름의 상주해수욕장은 여름철에 100만 명의 관광객이 찾는다는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해수욕장이다.

 

  해수욕장 앞에 펼쳐진 작은 섬들이 2km에 이르는 부채꼴 모양의 해안 은모래 백사장을  마치 호수모양으로 감싸고 있고, 뒤에는 금산을 배경으로 송림이 백사장을 감싸고 있으면서 잔잔한 파도와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상주해수욕장에 들렸다가 19번 국도를 따라 미조항 쪽으로 계속 전진하면 해안과 조화를 이룬 가로수가 색달라서 남국의 정취를 진하게 느낄 수 있다.

 

  남해 최남단에 위치한 아름다운 미조항은 남해의 대표적인 어업 전진기지이다. 그런데 남해의 대표적인 어종이 멸치과 갈치이다. 따라서 맛이야 어떻든 남해에 갔으면 제철에 맞는 멸치회나 갈치회를 맛보고 오는 것도 색다른 경험이고, 간 김에 마른 멸치와 멸치액젓을 사오면 여행을 즐거움을 더해 줄 것이다.

 

  이번에는 미조항에서 3번국도를 따라 북상하면 남해의 동안, 즉 남해군 삼동면 물건리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자리 잡고 있는 해오름예술촌에 들려볼 일이다. 6년여 동안 폐교로 방치되었던 옛 초등학교(물건초등학교) 건물을 개조하여 꾸민 문화, 예술의 공간으로 2003년 5월 10일 문을 열었다. 학교의 골격은 그대로 유지한 채 유럽풍 산장처럼 외관을 재단장하였다.

 

  국내외에서 수집한 약 5만여 점의 수집품이 옛 교사(校舍)와 운동장 곳곳에 전시되어 있으며, 회화, 공예, 사진, 등의 전시회가 수시로 열리고, 예술가들의 창작 작업실로도 운영되고 있으며, 각종 공예체험 프로그램이 진행되어 학생들의 체험학습공간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그리고 승용차로 5분 정도 전진하면 독일마을에 닿는다. 1961년, 군사 쿠데타에 성공은 했으나 경제개발을 위한 자금이 없었다. 이에 군사정부는 독일이 간절히 원하던 광산 노동자와 간호사를 파견하여 외화 벌이에 나서게 되었다.

 

  가난에 찌들어 꿈도 희망도 가질 수 없었던 1960년대 젊은이들이 남자는 광부란 이름으로, 여자는 간호사라는 이름으로 이역만리 타국 땅인 독일로 떠났다. 어려운 생활 속에 그들 광부와 간호사들이 한국으로 송금해 오는 금액이 당시 우리나라 총 수출액의 30%에 해당하는 거금이었기에 이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하는 원동력으로서의 한 축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40년의 세월, 어려운 시기에 조국근대화와 경제발전에 헌신한 독일거주 교포들의 정착생활 지원과 조국의 따뜻한 정을 느낄 수 있는 삶의 터전을 마련해 주고, 독일의 이국문화와 전통문화예술촌을 연계한 특색 있는 관광지 개발을 위하여 지난 2001년부터 남해군에서도 가장 아름답고 자연경관이 뛰어난 삼동면 물건리 일원 3만여 평의 부지에 남해군에서 기반을 조성하여 70여동을 지을 수 있는 택지를 분양하였다.

 

  건축은 교포들이 직접 독일의 재료를 수입하여 전통 독일식 주택을 신축하였고, 지금은 29동 정도가 완공되어 독일 교포들이 생활하고 있어서 고향의 포근함을 느끼고 있으리라, 동향으로 자리 잡은 주택은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듯하며, 일출과 월출 관망에도 최적의 위치이다.

                                          독일인마을 앞 바다

 

  다만 이곳 사람들은 우리나라로 귀화하지 않고 계속 독일국적을 가지고 있다. 연금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독일마을에 일 년에 몇 개월 살지 못한다. 대부분의 독일인은 친인척 등 관리인을 두고 독일에 거주하고 있다. 연금과 비자 때문에라도 귀국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이 독일에 가 있는 동안은 관광객을 위한 민박을 운영하고 있기도 한다.


  독일마을에서 다시 3번국도로 북상하여 창선대교 부근까지 올라가서 이번에는 3번국도를 버리고, 1024번도로로 서진하여 이동면에 이른 후, 다시 19번국도로 북서진하여 남해읍을 지나 남해대교 가까이에 이르면 길가에 노량마을 표석이 작은 공원에 호젓이 서 있고, 그 아래로 남해대교가 보인다.

 

  경남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와 하동군 금남면 노량리 사이 노량해협을 잇는 한국 최초의 현수교인 남해대교는 길이 660m, 너비 12m, 높이 52m이며, 1968년 5월에 착공하여 1973년 6월 22일 준공하였다.

  남해대교가 가설됨으로써 남해도가 육지와 연결되어, 한려해상국립공원 지역과 남해도 전체의 개발에 이바지했다.

 

  그리고 남해대교가 가설된 노량해협은 이충무공이 정유재란 때 마지막 해전을 벌였던 곳이고, 동시에 이순신 장군은 이 전투 중에 관음포에서 적의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그리하여 장군의 유해를 아산으로 운구하기 전 3개월간 안치했었던 곳에 지금은 충무공을 추모하는 충렬사(忠烈祠)가 세워져 있다.

 

                                        이순신 장군의 가묘

 

  경남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 노량 앞바다의 푸른 물결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노량마을 해안 언덕 울창한 숲 속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거룩한 뜻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고, 바로 앞 바다엔 거북선의 모형이 있다.

                                              섬진강

 

  충렬사를 뒤로 하고, 남해대교를 건너면 하동 땅이고, 하동의 섬진강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꿈속을 헤맨듯했던 남해에서의 일정에서 완전히 벗어났음을 실감하게 된다.

 

글쓴이 - 둘 산악회 아미산(이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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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9.11.09 16:12

    첫댓글 쾌청한 가을날에 보는 남해 금산 보리암 정말 좋더군요. 사진들이 멋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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