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라는 지명이 언제 생겼을까요 ? 정감록 10승지 중 1승지요 순흥도호부가 있을 정도 번성했던 이곳 영주. 역사의 흐름에 따라 내기군, 내령군, 기목진, 기주, 흥주, 순흥, 영천, 순안, 풍기 등 참으로 다양하게 불려 졌습니다. 영주시홈페이지 연혁표상에는 1914년 일제강점시대에 영주라는 지명이 처음 사용한 것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고려사에 고종46년(서기 1259년)에 위사공신(衛社功臣) 김인준의 내향(內鄕)이라는 이유로 지영주사(知榮州事)로 승격시켰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영주(榮州)라는 지명이 고려시대에 생긴것과 일제시대에 생긴것을 엄연히 많은 차이가 납니다. 저가 역사를 전공한 사람이 아니지만 그래도 전혀 근거없는 내용은 아닌것 같이 이렇게 올려봅니다.
============================================================================= 영주시홈페이지 연혁표
• 고구려의 내기군 및 급벌산군 • 신라의 파사왕이 점령 • 신라로 복속(AD100 무렵) • 통일신라시대 • 내기군을 내령군으로 개칭 • 풍기지역에 기목진 설치 • 고려시대 • 기목진을 기주로, 급산군을 흥주로 개칭(995) • 내령군을 강주로 개칭하였다가 다시 순안으로 개칭(1143) • 급벌산군은 흥주로 하였다가 다시 순정으로 개칭 • 순흥을 부로 승격(1348) • 조선시대 • 순안을 영천으로 개칭하고 군수를 두었으며, 기주는기천현으로 개칭 • 문종의 안태지로 은풍, 기천 두 고을의 이름을 따 풍기로 개칭 • 순흥을 도호부로 승격(1413) • 순흥도호부는 폐부, 영천군, 풍기군, 봉화현에 분리 편입(1457) • 순흥도호부 부활(1683) • 칙령28호로 안동부 관할(고종32년, 1895) • 일제강점시대 • 부령 제111호로 영천군, 풍기군, 순흥군을 합쳐 영주군(1914) • 부령 제221호로 영주면이 영주읍으로 승격(1940) • 해방이후 • 풍기면이 풍기읍으로 승격(1973) • 영주읍이 영주시로 승격되고 풍기읍과 9개면은 영풍군으로 분리(1980) • 영주시, 영풍군이 통합(1995) ========================================================================================= 아래 내용은 고려사에 나오는 내용과 그에 따른 영주라는 지명과의 관계를 설명한 글을 인용한 내용입니다. ============================================================================= 순안현(順安縣)은 원래 고구려의 내기군(柰己郡)인데 신라 파사왕(婆娑王)이 탈취하였으며 경덕왕이 내령군(柰靈郡)으로 고쳤다. 성종 14년에 강주도단련사(剛州都團練使)라고 불렀고 현종 9년에 본부에 소속시켰으며 인종 21년에 지금 명칭으로 고쳐서 현령관으로 하였다. 고종 46년에 위사 공신(衛社功臣) 김인준(金仁俊)의 내향(內鄕)이라는 이유로 지영주사(知榮州事)로 승격시켰는바 구성(龜城)〔성종이 정한 명칭이다〕이라고도 부른다. 이 현에 마아령(馬兒嶺)이라는 험준한 지대가 있다. (1)
김준의 초명은 김인준(仁俊)이며 그 아비 김윤성(金允成)은 본래 천예(賤隸)로서 그 상전을 배반하고 최충헌에게로 투신하여 종노릇하는 사이에 김준과 김승준(金承俊)을 낳았다. 김준은 풍골이 늠름했으며 천성이 관후하고 아랫사람에게 공손하였다. (2)
즉 김인준은 천인 출신이라 고향을 알 수 없는 것이 당연한데, 순안을 고향으로 지명하고 있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 추측되는 것이다. 물론, 그의 먼 조상이 순안 사람일 가능성도 있지만, 신분적 콤플렉스가 있는 김준은 본향이 중시되는 당시 시대적 흐름에 편승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시 집권자인 김준이 순안을 본향으로 지목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고종 45년에 유경(柳璥), 박송비 등과 함께 최의를 죽이고 정권을 왕에게 복귀시키면서 김준은 왕에게 건의하기를 “최의가 백성을 돌보지 않고 굶어 죽어도 방관시하면서 양곡을 내어 구제하지 않았으므로 저희들이 의거(義擧)해서 죽였습니다. 양곡을 내어서 주린 백성을 구제하여 백성의 기대를 만족시켜 주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즉시 장군 벼슬과 위사공신(衛社功臣) 칭호를 주고 그 공훈을 제2로 논정하였으며 이어 우 부승지로 임명하였다...(중략)...원종 원년에 김준을 제1등공으로 고쳐 평정해 주고 추밀원 부사 어사대부 주국 태자빈객(樞密院副使御史大夫柱國太子賓客)으로 삼고 익양군 개국백(開國伯)으로 봉하고 식읍(食邑) 1천호에 실봉(實封) 1백 호를 주었다...(중략)...그리고 김준을 교정 별감(校定別監)으로 임명하여 국가의 그릇된 일을 규찰케 하였다. 왕이 몽고로 떠나가면서 김준에게 감국(監國)케 하였는데 김준은 별초 30명을 시켜 주야로 자기 집을 호위하게 하였다.(3)
이처럼 김준의 당시 영향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무신집권기에 본향과 처향의 중요성은 세력을 증식하고, 유지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요소였다. 따라서 김준이 순안을 본향으로 삼았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순안현이 한미하고 보잘 것 없는 지역이었다면 당시 집권자인 김준은 굳이 순안현을 본향으로 지목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가 연원을 알 수 없는 천인출신이란 점은 이러한 추측에 더욱 힘을 실어 주는 요소이다. 결국, 당시 순안현의 위상은 작지 않았음을 이 사실을 통해 추측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12~13세기 강화된 지방통치의 경향은 무인집권기를 거치면서 보다 강력하게 통치체제에 편입되었고, 그 과정에서 영주는 왕실의 안태지로서의 역할과 집권자인 김준과의 관계 등에 의해 행정적으로 격상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1)『고려사』제57권 - 지 제11 > 지리 2 > 상주목 > 안동부. (2)『고려사』 제130권 - 열전 제43 > 반역 4 > 김준. (3)『고려사』제57권 - 지 제11 > 지리 2 > 상주목 > 안동부 ======================================================================================================================
고려사를 보면 "고종46년(1259년)에 지영주사(知榮州事)로 승격시켰는 바" 라고 적혀있습니다. 옛날에는 고을주(州)자는 큰고을에 붙여주는 이름이였답니다. 그럼 영주라는 지명은 1259년에 김준이라는 인물의 고향이라는 이유로 고종이 붙여준 이름이라는 결과가 나옵니다. 또한 여기서 우리가 집고 넘어가야 될 것은 조선시대 정감록 이전 부터 우리지역(영주)은 살기좋고 이름있는 고장이라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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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동의 지명유래 영주시의 중심지인 영주초등학교에서 영일초등학교, 영주평생교육원, 서천교까지 이어지는 넓은 지역이 '영주동'이다. 고려시대 최씨 무신정권을 평정하는데 큰 공을 세운 이곳 출신 김인준(金仁俊)을 위사공신으로 책봉하고 그의 고향 순안을 주로 승격시키면서 지명이 영주가 되었다. 1413년(조선태종 13) 영주를 영천으로 개칭하였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영천군, 풍기군, 순흥군을 합쳐 '영주군'이 되면서 옛 지명을 다시 찾게 되었다.- 연혁
- 1914. 3. 1 : 영주군 영주면 영주리
- 1980. 4. 1 : 영주시 영주동
- 1995. 1. 1 : 영주시, 영풍군 통합
- 1998. 10. 15 : 영주1·2·3동을 영주1동으로 통합
- 영주1동 주요 지명유래
- 1)철탄산(鐵呑山)
- 영주초등학교와 영주여자고등학교 뒤편에 영주의 진산(鎭山)이라 일컫는 해발 276m의 우람한 산봉우리가 있는데, 이 산을 ‘철탄산’이라 불러오고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 산줄기 형상이 '마치 남쪽을 향하여 달리는 말(馬)'의 형상으로 쇠를 삼키는 힘찬 말과 같다고 하여 무쇠 철(鐵) ・ 삼킬 탄(呑)자를 써서 ‘철탄(鐵呑)’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2) 신사골(神社谷)
- 영주시의회 오른편 골목길을 따라 약 200m 쯤 가면 영주초등학교 뒤편 철탄산 기슭에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신사골’이라 불러 오고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1935년 9월 새로 부임한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오(남차랑南次郞)가 우리민족의 황민화(皇民化)를 강요하면서 각 군마다 신사를 만들어 일본의 국조신(國祖神)인 아마데라스오오미가미 (천조대신天照大神)을 모셔놓고 매일 아침 참배하도록 하였는데, 당시 이 마을 아래편 영주초등학교 교실 옆에 영주의 신사(神社)가 있었다. 8・15 광복 후 집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 이 골짜기를 찾아 집을 지어 살게 되면서, 옛날 신사가 있었던 곳이라고 하여 ‘신사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3) 낙운정(洛雲亭)
- 신사골 입구에 김해김씨 일족이 1925년 7월에 건립한 정자가 있는데, 이 정자를 ‘낙운정’이라 불러오고 있다. 낙운정은 이 고장에 흩어져 사는 金海 金氏와 金海 許氏가 그 시조 首露王을 추모키 위해 1923년에 건립하였다. 그 후 1964년에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위치는 영주초등학교 바로 뒤편에 자리잡고 있다.
- 4) 영훈정(迎薰亭)
- 영주시의회 본관 건물 왼편에 정자가 있는데,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14호로 지정된 이 정자를 ‘영훈정’이라 불러오고 있다. 전해오는 '영천군지'에 의하면, 이 정자는 조선 세조 때 군수 정종소 (鄭從韶)가 고을을 찾는 손님을 맞이하고 배웅하는 장소로 사용하기 위하여 고을 남쪽 돌다리 북쪽에 세워, 처음에는 '남정자(南亭子)'라고 불렀으나 명종 3년(1550년) 풍기군수 이황(李晃)이 '영훈정(迎薰亭)'이라 명명하고 직접 편액을 써서 달았다고 한다. 그 후 퇴락하여 없어졌다가, 인조 21년(1643년) 군수 신속(申洬)이 고을에 온갖 재난이 자주 발생하자 그 연유를 고을 사람들에게 물어 보고 이 정자를 다시 새울 때, 자신의 봉록(俸祿)을 떼어 보태면서 경비를 모아 이듬해 다시 세웠다고 한다. 왜정시대 이 건물은 영주군청 사무실로 개조되어 1970년대 중반까지 사용하다가, 지금은 원래의 모습을 되찾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 5) 사직골(社稷谷)
- 수용소골 철탄아파트 옆 골목을 약 200m 쯤 가면 '대승사'절 주변 둔덕에 마을이 있는데, 조선시대 이곳에서 고을 원님이 토지신과 곡신에게 고을의 평안과 풍년을 기원하기 위하여 제사(祭祀)를 올리는 사직단(社稷壇)이 있었다고 하여 ‘사직골’이라 불러오고 있다. 일제시대 일본인들이 사직단을 철거하여 우리 고유의 토지신과 곡신에게 올리던 제사를 올리지 못하게 하고, 일본의 국조신(國祖神)인 아마데라스오오미가미(천조대신․天照大神)을 모셔놓고 매일 아침 참배하게 하였다고 한다.
- 6) 숭은전(崇恩殿)
- 제일교회 옆 골목을 따라 약 100m 쯤 가서 왼편 골목길을 따라 영광여자고등학교 방향으로 약 200m 쯤 가면 학교 앞 둔덕에 옛 건물이 있는데, 이곳을 ‘숭은전’이라 불러오고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영주에 사는 경주김씨 후손들이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敬順王)의 영정을 봉안하여 제사를 드리는 곳이라고 한다.
- 7) 숫골․수용소골(收容所谷)
- 제일교회 옆 골목을 따라 약 100m 쯤 가면 둘리원룸이 있는 곳에서 영광중학교 사이에 철탄산 줄기까지 이어진 오래된 마을이 있는데, 이곳을 ‘숫골(수곡)(睡谷)’이라 불러오고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 마을 뒤편에 뻗어있는 철탄산 줄기가 마치 호랑이가 잠을 자고 있는 '수호형(睡虎形)'이라 하여 마을 이름을 잘 수(睡) ・ 골 곡(谷)자를 써서 ‘수곡’이라 불렀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 오면서 발음이 변하여 ‘숫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제일교회 옆 왼쪽 골목을 따라 약 200m 쯤 가면 철탄아파트가 있는데, 이곳을 ‘수용소골’이라 불러오고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일제시대 때 고을에 전염병이 발생하면 환자들을 격리 수용시키는 병막(病幕)이 있었다고 하여 ‘수용소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에 의하면, 6.25전란으로 피난 온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자, 이곳에 판자집을 지어 피난민들을 수용시켰다고 하여 ‘수용소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8) 문재도 효자각
- 영광중학교입구에서 시외버스터미날 방향으로 약 70m 쯤 가면 길 가 오른편에 비각이 있는데, 이 비각을 ‘문재도 효자각(文載道孝子閣)’이라 불러오고 있다. 이 효자각은 고려 恭愍王 23年(1374) 평해군수 문재도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연혁은 고려 禑王 2年(1367)에 왜구가 침입하자 문재도는 아버지를 업고 산으로 피신하는데 왜구들이 쏜 화살이 아버지 등에 꽂혔다. 황급히 화살을 뽑고 응급치료를 하여 숲 속에 숨어 계시게 하고 칼을 뽑아 뒤쫓는 왜구에 대항하여 용감히 싸우니 왜구들은 앞을 다투어서 도망하였다. 그 후 조정에서 이 사실을 알고 문재도를 세상에 드문 효자며 충신이라하여 포상하고 비를 세워 길이 귀감이 되게 하였다.
- 9) 관사골(官舍谷)
- 영광중학교 왼편 길을 따라 약 100m 쯤 가면 갈림길이 있고, 그곳에서 오른편 길을 따라 영광여자중학교 방향으로 약 200m 쯤 가면 좌우편에 오래된 일본식 집들이 있는데, 이 마을을 ‘관사골’이라 불러오고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1941년 11월 1일 영주~안동 구간 철로가 개통되고, 이듬해 4월 1일 서울 청량리에서 경주까지 이어지는 경경선(중앙선)철로가 개통되어 지금의 중앙시장 자리에 영주역이 있었는데, 당시 역(驛)과 가까운 이곳에 철도공무원들의 관사를 지어 살게 되어 인근 사람들에 의하여 ‘관사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10) 뒤새[杜西]
- 영광중학교 왼편 길을 따라 가면 서천교 방향으로 이어지는데, 이 주변 마을을 ‘뒤새’라 불러오고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고려 공민왕 때 군수로 부임한 하륜(河崙)이 풍수지리에 밝았는데, 고을 산천을 둘러보고 '산수가 절묘하기는 하나 서쪽이 허술하여 고을에 재난이 많고 큰 인물이 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래서 고을의 지세를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자, 막을 두(杜) ・ 서녘 서(西)자를 써서 마을 이름을 ‘두서(杜西)’라고 불렀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오면서 발음이 변하여 ‘뒤새’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11) 부용대(芙蓉臺)
- 영광중학교 왼편 길을 따라 약 100m 쯤 가면 갈림길이 있고, 그곳에서 왼편 길을 따라 서천교 방향으로 약 200m 쯤 가면 왼쪽에 태호목공소건물이 넓은 바위 위에 지어져 있는데, 이 바위 주변을 ‘부용대’라 불러오고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옛날 서천의 물길이 이 바위 아래를 감돌아 구성공원 앞으로 흘렀는데, 당시 이 바위 주변에 버드나무 숲과 맑은 개천 물이 절경을 이루어 고을 선비들이 이 바위 위에서 풍류를 즐겼다고 하는데, 조선 명종 때 풍기군수 퇴계 이황이 고향 안동 예안을 가기 위하여 이곳을 지나다가 주변 경치가 너무 아름다워 ‘부용대(芙蓉臺)’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그 후, 인조 14년(1636년) 영천 고을에 사는 선비들 중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진사(進士) 27인과 생원(生員) 28인이 이곳에 모여 문중간의 친목을 다지기 위하여 '사마계(司馬契)'를 만들었는데, 이 부용대의 이름을 따서 ‘부용계(芙蓉契)’라 하였다고 한다. 그 후 오랜 세월이 지나오면서 후손들의 무관심으로 '부용계'는 잊혀져 오다가 1970년에 옛 문서가 발견되어 관련 문중 후손들이 옛 조상들의 유덕을 기리기 위하여 다시 모임을 이어오면서, 구성공원 가학루 옆에 '부용계기념비(芙蓉臺紀念碑)'를 세우고 매년 음력 8월 6일에 추모행사를 지내오고 있다.
- 12) 새마(新村)
- '부용대'에서 서천교 방향으로 약 200m 쯤 가면 오른편 오르막길 위 산기슭에 마을이 있는데, 약 40여 년 전 새로이 생긴 마을이라고 하여 ‘새마(신촌)(新村)’라 불러오고 있다.
- 13) 영암교(榮岩橋)
- 새마 입구에서 서천교 방향으로 약 50m 쯤 가면 중앙선 철로 위에 작은 다리가 있는데, 이 다리를 ‘영암교’라 불러오고 있다. 아주 오래전 지금의 시외버스터미널 앞으로 국도가 생기기 전에 영주에서 단양 ・ 서울 등지로 가는 모든 차량들이 이 다리를 지나다녔다고 한다.
- 14) 고청산(高靑山)
- ‘새마' 뒤편에 멀리 철탄산으로부터 길게 뻗어져 내린 산봉우리가 있는데, 옛 '영천군지'에 의하면, 이 산을 ‘고청산’이라 하였다.
- 15) 임천대(臨川臺)
- 고청산 서쪽에 옛날 서천(西川)과 맞닿은 높은 누대가 있었는데, 옛 '영천군지'에 의하면 이 누대를 ‘임천대’라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지금의 서천교 주변의 개천을 '임천(臨川)'이라 하였으며, 동구대 ・ 서구대 앞으로 흐르던 개천을 '구천(龜川)'이라 하였다고 한다.
- 16) 서천폭포
- 영암교를 건너 서천교 방향으로 약 100m 쯤 가면 오른편에 인공폭포가 있는데, 이곳을 ‘서천폭포’라 불러오고 있다. 원래 이곳 '웅덩이마을'에 약 10여 호의 집들이 있었는데, 2004년 도시 미화 사업으로 다른 곳으로 이주시키고 폭포를 조성하였다.
- 17) 분수대
- 조흥은행 옆 가로변 삼각지에 나무도 심고 물줄기를 뿜어 올리는 분수를 설치하였는데, 이곳을 ‘분수대’라 불러오고 있다. 이 분수대는 1970년대 초에 설치하였다가 철거되었으나, 2004년 다시 설치하여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분수대 뒤편에 1961년 수해복구비가 있다. 비의 높이가 수해 당시의 물의 높이라고 한다.
- 18) 채소전골목
- 분수대에서 시장 골목으로 약 150m 쯤 가면 주부쇼핑센터가 있는데, 이곳에서 구성공원 방향으로 골목을 ‘채소전골목’이라 불러오고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8・15 광복 후 이 골목에 각종 채소를 파는 시장이 형성되었다고 하여 ‘채소전골목’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19) 후생시장(厚生市場)
- 분수대에서 하나은행 방향으로 약 100m 쯤 가면 사거리 오른편에 영신양복점이 있는 옛 상가 건물들이 있는데, 이곳을 ‘후생시장’이라 불러오고 있다. 전해오는 기록에 의하면, 6・25전란 후 구역통로에 시장이 형성되면서 '중앙시장'이라고 하였으나, 생활이 넉넉해지도록 돕는다는 뜻에서 ‘후생시장(厚生市場)’으로 이름을 바꾸게 되었다고 한다.
- 20) 구-역통로
- 분수대에서 하나은행 방향으로 약 300m 쯤 가면 중앙시장이 있는데, 이 구간 도로를 ‘구-역통로’라 불러오고 있다. 1941년 7월 1일 영주 ~ 안동 구간 철도가 개통되면서 지금의 중앙시장 자리에 영주역이 있었는데, 1961년 대홍수로 인하여 신시가지가 휴천동에 들어서면서 1973년 12월 23일 역(驛)은 지금의 자리로 옮겨가자, 사람들에 의하여 ‘구-역통로’로 불리어지고 있다.
- 21) 염매시장(艶賣市場)
- 하나은행 앞에서 기독병원 방향으로 골목이 있는데, 이곳을 ‘염매시장(艶賣市場)’이라 불러오고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1941년 11월 1일 영주 ~ 안동 구간 철로가 개통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기차를 타기 위하여 영주역으로 드나들었는데, 언제부터인지 이 골목에 요염(妖艶)한 여자들이 모여들어 남자들을 유혹하는 사창가(私娼街)를 이루게 되어 요염할 염(艶) ・ 팔 매(賣)자를 써서 ‘염매시장’ 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22) 구-역(舊驛)
- 기독병원 옆에 중앙시장이 있는데, 바로 이곳을 ‘구-역(舊驛)’이라 불러오고 있다. 전해오는 기록에 의하면, 1941년 11월 1일 영주 ~ 안동 구간 철로가 개통되어 영주역이 여성복지회관 ・ 중앙시장 ・ 영주시농협 ・ 우리은행영주지점까지 이어져 있었다. 그 후, 1961년 7월 11일 영주 대홍수로 인하여 수해복구사업으로 구-시가지에서 휴천동에 신-시가지를 조성하면서 당시 영주의 가장 큰 곡창 지대라 일컫던 '남산들'을 매립하여 중앙선 ・ 영동선 ・ 경북선 철길을 지금의 위치로 옮기고, 역사(驛舍) 건물을 지어 1973년 12월 23일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게 되자, 옛날 역이 있었던 곳이라고 하여 ‘구-역(舊驛)’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23) 중앙통
- 영주시의회 앞 삼거리에서 농협중앙회 영주시지부까지 넓은 도로를 ‘중앙통’이라 불러오고 있다. 옛날부터 이 도로는 영주의 가장 중심가로서 5일 장(場)도 열렸으며, 1950년대 중반에는 밤이 되면 이 도로 한복판에 대형 스크린을 쳐서 활동사진(영화)를 상영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 24) 객관터
- 옛영천 객사의 터, 현재 영주시의회가 됨.
[출처] : 영주소식 등 수합하여 편집 |
첫댓글 옛날 어릴적 골목골목이 생가나내
응 나도 그래... 지명이 낮 익은 곳 설명 자세해서 옮겨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