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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넘다
2018년 4월 27일의 감격은 가히 세기적이었다. 그날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은 세계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하였다. 단 하루의 만남이었지만 숱한 화제를 뿌렸다. 그 중 압권은 김정은 위원장이 분단의 경계선을 넘어 오는 장면이었다. 두 정상은 경계선을 사이에 두고 악수 한 후, 문재인 대통령의 제안으로 두 사람이 함께 손을 잡고 북으로 넘어갔다가 다시 남으로 내려왔다.
분단 73년을 가로지른 콘크리트 장벽은 어린아이도 건널 수 있는 낮은 턱에 불과하였다. 두 사람의 허물없는 행동과 함께 견고했던 마음의 장벽도 크게 흔들렸다. 북쪽에서 배달 온 평양냉면을 나누면서 김 위원장이 한 말도 오래도록 회자되었다. “멀다고 하면 안되갔구나.” 두 사람이 넘은 것은 금지된 선이었고, 금기시 한 턱이었다. 봇물이 터지듯 마음의 문이 열리자 잇달아 북측 판문각에서 또 평양과 백두산까지 이어졌다.
지난 1년을 돌아보면 한반도의 변화는 기대만큼은 아니더라도, 상상한 것 이상으로 변모하였다. 판문점회담 1주년을 맞아 판문점 JSA의 남측은 완전히 개방되었고, 신비에 쌓인 하늘색 ‘도보다리’에도 관광객의 접근이 가능하게 되었다. 비록 하노이에서 열린 제2차 북미정상회담이 한 걸음 더 내 딛지는 못했으나, 지난 일 년 동안 이룬 성과의 시선을 결코 낮춰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당장 눈에 띄는 것은 군사적 긴장완화이다. 1년 전만 해도 남과 북 사이 군사적 긴장과 대결은 당장에라도 불장난을 치룰듯 한 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핵과 미사일 실험의 중단과 함께 한미연합군사훈련이 멈췄고, DMZ를 사이에 두고 안팎에서 조금씩 군사적 비무장화를 진행하였다. 중무장 초소를 해체하고, 철조망을 거두었으며, 도로와 철로를 잇고 있는 중이다.
회담 1주년을 맞아 올해 4월 27일 민간 차원에서 진행한 DMZ 소풍도 그 중 하나이다. 봄날의 소박한 꿈이 현실로 된 것은 꿈을 이루려는 의지 덕분이다. 강화에서 고성까지 500km에서 열린 ‘민(民)+(플러스) 평화손잡기’ 행사는 물론 성공하지 못하였다. 적어도 50만 명을 한 줄로 이으려는 원대한 포부는 더 뒤로 미루어두었다는 것이 옳은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수 만 명의 사람들이 서로 손을 잡겠다고 참가의사를 밝힌 순간 이미 성공한 것이나 진배없다.
우리 경기중부지역에서도 2천 여 명이 참여하였다. 안양, 군포, 의왕, 과천 네 도시는 한 몸처럼 움직였다. 우리 지역에서는 네 교회가 자기 이름을 걸고 참가신청을 했는데, 아마 개인적으로, 또 단체의 일원으로 참여한 그리스도인들은 훨씬 많았을 것이다. 우리 교회의 경우에도 같은 버스로 동행한 15명과 외국인 친구들과 함께 한 1명, 군포여성민우회로 참석한 두 명, 대안학교에서 1박 2일로 참여한 7명으로 나뉘었다. 물론 한 줄로 연결되기를 기대하면서 나선 걸음이었다.
우리가 배정받은 곳은 철원 백마고지 아래 대마리두루미마을 인근이었다. 가는 길에 구 철원제일교회를 보고, 옛 철원노동당사도 보았다. 새로 건립한 교회 뒤에는 여전히 무너진 옛 교회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노동당사 앞에서는 아산 지역 등에서 올라온 시민들로 북적였다. 어디든 장터가 열려 잔치분위기가 났다.
평생 철원을 여러 차례 드나들었는데, 맨 처음 기억은 중학교 1학년 때였다. 1970년대 중반에 접어들 무렵 남북 사이 군사적 긴장은 점점 고조되었다. 한 때 곧 통일이 될 듯 ‘7.4 남북공동성명’의 희소식을 들은 곳은 초등학교 교실에서였다. 그런 기대도 무색하게 제2땅굴이 발견되었고, 연일 남침의도를 강조하는 분위기 속에서 학교 대의원회의에서 버스 한 대로 안보견학을 다녀온 것이다. 그런 까닭에 철원에 대한 기억은 여전히 1970년대에 머물러 있다.
그날 땅굴 견학을 마친 우리는 저녁 무렵에 현장을 떠나는데, 그 때 큰 기적소리가 긴 여운을 남기면서 우리 귀를 스쳐 지나갔다. 기차가 인근에 있느냐고 물으니 한 군인이 그 정체를 들려준 것이 오래도록 가슴에 남았다. 그 기적소리는 북쪽 평강 역에서 울린 것이란다. 아주 지척에 있는 듯 가까이 들린 그 기적소리 덕분에 너무 가까이 있는 북한의 실체를 느꼈고, 섬뜩한 두려움과 친밀감을 동시에 품게 되었다.
DMZ로 향한 소풍은 45년 전 그 때와 달리 아주 화창하고 따듯하였다. 색동교회는 안양YMCA와 한 버스로 동행했는데, 어린아이들이 여럿 참석해 정말 소풍가는 기쁨이 있었다. 돌아오는 버스에서 한 마디씩 소감을 말하는데, 한 어린이가 평소 토요일은 야구연습 하러가는 날인데 오늘 못 가서 속상했다면서, 이렇게 말을 이었다. “그런데 오늘 손잡기를 하고나니 엄마가 왜 가자고 한 줄 알겠어요. 엄마 말 듣기 잘 했어요.” 기특한 생각이다.
요즘 아이들의 생각은 그때 우리보다 훨씬 성숙하였다. 우리 그룹이 버스에서 나눈 프로그램 순서지에는 이런 문장이 메시지처럼 쓰여 있었다. ‘동무여 선을 넘어 지금 만나러 갑니다.’ 어느 6학년 아이가 엄마의 코치를 받아서 제안한 내용이라고 한다. 얼마 전만하더라도 ‘동무’, ‘선을 넘다’와 같은 단어들은 금기어였다. 두려움을 품은 낱말들이었다. 이제 그런 단어를 자유롭게 쓴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많은 선을 넘어 온 셈이다.
앞으로 우리 민족이 남과 북을 연결하고 손잡으려면 더 현명해지고, 더 당당해질 필요가 있다. 그 무수한 선을 넘기 위해서 세대를 이어가면서 더 큰 용기와 담대함이 필요하다. 생각이 다른 더 많은 이웃과 손을 잡아야 한다.
우리 지역 네 교회는 백마고지 위령비 앞에서 열린 한국전쟁 희생자를 위한 개신교추모기도회에 참석하였다. 감리교회 선교국이 주관하여 더욱 반가웠다. 매화교회 남성합창단은 얼마나 씩씩하던지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참가자들은 각자 평화와 통일에 대한 소망을 써서 봉헌하였다. 나는 설교자의 말씀에 깊이 공감하면서 이렇게 적었다.
“오늘 동과 서, DMZ 500Km를 잇는 가로의 손잡기가 내일 남과 북, 한라에서 백두까지 삼천리를 잇는 세로의 손잡기로 이어지게 하소서. 고난의 십자가가 기쁨의 더하기로 이어지게 하소서.”
그동안 시대의 고비마다 뺄셈만 해온 우리 민족이 바야흐로 덧셈의 역사를 시작하고 있다.
첫댓글 그날, 그곳에서 시작된 평화 손잡기가 판문점을 넘어 평양까지 이어지는 날을 늘, 기다리며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