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선비의 신앙고백
-김길수 교수 강의
1783년 조정에서는 베이징으로 동지사를 보내게 됩니다. 이때 서장관으로 간 이가 바로 이승훈, 이치훈 형제의 아버지인 이동욱입니다. 광암 이벽은 아버지를 수행해서 베이징에 가는 이승훈을 불러 서양신부들을 만나 천주교 서적을 구해오라고 부탁합니다. 이승훈은 천주교에 관심이 없었지만 광암이 간곡히 부탁하니까 그렇게 베이징 남당에 가서 그라몽 신부를 만납니다.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아 필담으로 대화를 주고 받습니다.
이제 말씀드리는 건 정사에 기록된 건 아닙니다. 야사지요.
이승훈이 베이징에 머물면서 그라몽 신부와 필담으로 의견을 나누다 보니 세월이 흘러 부연사행이 돌아갈 시간이 됐습니다. 돌아갈 날을 일주일 남겨놓고 이승훈이 그라몽 신부에게 말합니다.
“내가 그동안 천주교 교리를 들어보니 너무나 좋소. 천주교 신자로 살 테니 세례를 받게 해주시오”
그라몽 신부는 난감하지요. 예비신자 교리가 6개월인데 한 달 만에 줄 수 있습니까. 그래서 그라몽 신부는 두가지 조건을 제시합니다.
첫째, 천주교 신자는 끊임없이 복음을 전해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천주교 신자 자격이 없다.
적어도 1년에 한 번은 복음을 전한 상황을 분명히 적어서 베이징에 보고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겁니다.
그러니까 이승훈이 그 자리에서 “할 수 있습니다”고 하는데 이거 쉬운 대답이 아닙니다.
나중에 한국천주교회가 베이징에 소식을 전하려고 사람 편에 편지를 보냈는데 그 사람이 북만주 벌판에서 얼어 죽고 굶어 죽는 일이 생깁니다. 편지 전하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서울에서 베이징까지 걸어가니까, 그것도 혼자는 갈 수 없고 반드시 부연사행을 따라가야 하니까요. 그런데 그 어려움을 무릅쓰겠다는 겁니다. 그만큼 이승훈이 대단한 열의를 가졌던 게 틀림없죠.
천주교 신자가 된다는 것은 세례성사를 받고 자기 혼자만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세례를 받고 이제부터 거룩하게 살아야 하니까 더러운 것들하고 어떻게 상종하겠느냐면서 혼자 미사에 열심히 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레지오 나가는 게 오히려 신앙 생활에 방해된다면서 안나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 혼자 거룩하게 살아요. 그런 사람들이 천당에 가겠어요? 만약 천당에 그런 사람만 모여있으면 아무 재미 없겠지요.
둘째로 내건 조건은 가정에 관한 겁니다. “당신네 나라에서는 소실을 두는 게 당연하고 자랑거리지만 천주교는 일부일처제다” 이승훈이 처음에는 대단히 난감해 합니다. 이미 있는 소실에게 “나는 오늘부터 천주교 신자니까 당신 집으로 가쇼. 오늘부터 그만이오.” 그럴 수 있느냐 이 말이에요. 그런데 이승훈은 그것도 정리하겠다고 약속합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이승훈이 과연 그 말을 지켰는가 하는 문제가 남습니다. 그런데 이승훈이 한국에 천주교를 매년 전파했다는 증거가 있습니다. 1789년에 이승훈이 한국의 천주교 교세를 보고한 편지가 베이징에서 발견됐습니다. 그걸로 보아 복음을 전한 상황을 매년 보고하겠다는 약속을 지켰으니 이승훈이 다른 약속도 지켰으리라고 믿는 거지요. 약속한 것은 꼭 지키던 우리나라 선비들의 정신을 생각해보아도 지켰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이승훈은 그렇게 해서 세례를 받고 베드로라는 세례명을 얻습니다. 그리고 교리책을 많이 얻어 기쁨에 차서 돌아옵니다. (1783년 한국 최초의 영세자, 한국 가톨릭의 시작)
이승훈이 세례를 받았을 때 그라몽 신부가 친구 신부에게 편지를 써서 말하기를
“조선의 선비가 천재다. 가르쳐주는 바를 다 알아듣고 또 핵심을 질문해온다.
나는 한국교회의 머릿돌이 되라는 의미에서 그에게 베드로라는 세례명을 주었다.”
광암은 그때 나이 불과 서른밖에 안되었지만 이승훈이 얻어올 책을 읽으려고 기다립니다. 천주교를 알려는 그 진지성은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드디어 이승훈이 돌아왔습니다. 갈 때는 천주교에 대해 별 관심이 없다가 세례까지 받았으니 무척 기뻤던 이승훈은 광암에게 “내가 세례를 받았다”고 자랑합니다. 그렇지만 정작 광암은 세례 성사가 뭔지 아직 모를 때라 같이 기뻐하지도 않으니 이승훈이 머쓱했겠지요.
광암은 그저 덤덤하게 책만 내놓으라고 하더니 미리 얻어둔 외딴집에 들어가 수개월 동안 두문불출합니다.
몇 달이 지나 책을 다 읽고 외딴집에서 나온 광암은 이승훈과 정약용을 만납니다.
그 자리에서 광암 이벽이 처음 한 말이 이겁니다.
“이것은 진리입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우리 민족을 불쌍히 여겨서 구원의 은총을 내려주시고자 함입니다. 우리는 이 진리를, 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아무도 이 소명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기막힌 신앙고백이지요. 요즘 우리나라 천주교 신자 중에 이만한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이 있겠어요?
그리고 그는 스스로 세례명을 정합니다. “나는 구세주가 우리 민족에게 오시는 길을 닦겠습니다.”
그게 누굽니까. 그래서 세례명을 세례자요한이라고 합니다.
요즘이야 예비신자 교리 실컷 하고 난 다음에 세례명 정하라면 “너무 흔한 것 말고 부르기 좋은 걸로 해달라”고 하지요. 광암의 마음과 지금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다릅니까. 그는 이렇게 분명한 의식을 갖고 세례자 요한처럼 살면서 민족 복음의 선구자가 됩니다.
광암은 다산과 함께 한강을 건너는 배를 탔습니다. 배에는 마을 사람도 몇 명 있습니다. 그 두 사람은 하느님에 관한 얘기, 십자가 구원의 얘기, 인간은 영혼이 있어 불사불멸하고 마침내 죽으니 하느님 나라로 간다는 얘기를 합니다. 한강을 건너는 동안이니 긴 시간이 아니죠. 그런데 배를 탔던 마을 사람들이 “일찍이 들어보지 못한 황홀한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합니다. “놀랍고 새로운 얘기를 들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반응 아닙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팔레스타인에서 강론하셨을 때 사람들의 반응이 바로 그거였습니다. ‘놀랍고 새로운 가르침’ 그래서 달레 신부는 이것을 초대교회와 연결시켜서 광암의 '선상강화(船上講話)'라고 합니다.
-가톨릭 다이제스트 2016년 3월호
닫힌 시대의 젊은 열정 - 광암 이 벽 성조편
(KBS 한국사傳 25회 2007년 12월 23일 방영분)
1부 상반 15분
2부 중반 15분
3부 하반 15분
4부 마무리 3분
출처: http://blog.naver.com/aria_company/220642930826
첫댓글 좋은 글 감사합니다 부끄럽게도 이벽에 대해서 처음 들어봅니다 ㅜㅠ 한번 찾아봐야겠어요
그 신앙고백에 너무나 부끄러워집니다
실은 부끄럽게도 저도 이번에 알게 되었어요.
'놀랍고 새로운 가르침'을 알고나서 구세주가 우리민족에게 오시는 길을 닦겠다는 결심을 하고 죽기에 이르기까지 실행하신 신앙선조들의 믿음과 활동마다 하느님의 뜻 안에서 주님께 감사와 찬미와 영광, 흠숭을 드립니다.
'새롭고 놀라운 가르침' 하느님 뜻 영성에 관한 글들을 읽고난 뒤의 느낌과도 비슷한 것 같아요. 우리도 하느님 뜻의 나라가 이 땅과 온 인류가운데 오시도록 길을 내는 도구가 되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당신 뜻으로 저희를 통하여 일하시고 그 뜻을 이루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코스모스 아멘 감사합니다. 주님 찬미받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