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 마도진 만호(康津馬島鎭萬戶/從四品武官벼슬/동리, 서리,성하리, 성상리, 외리의 5개마을 관장) 이종호(李鍾浩)는 경주(慶州)인으로, 조선말 외적으로부터 남해안을 지킨 수군 장수이다. 그는 고려말 문신이자 대학자인 익재 이제현의 20세 손이다. 강진현 고금도(현 완도군 고금면) 청학동에서 1837년에 출생하였다.
그리고 학문과 무예에 출충하여 22살때인 1858년(철종 9) 9월에 무과에 급제한 후 권관『權管: 변경지방 진관(鎭管)의 최하단위인 진보(鎭堡)에 두었던 종9품의 수장(守將)』을 거쳐 1870년(고종 7) 절충장군(정3품)으로 마도만호(종4품)에 임명되어 1년 6개월동안 만호로서 관할 지역 방위에 힘쓰며 선정을 베풀어 인근 백성들이 그 뜻을 높이 사 선정비를 세워 마도진 성옆에 남아 있다. 그동안 풍화작용으로 글씨가 많이 훼손되 내용은 자세히 알수 없으나 후대에 좋은 본보기가 되고 있다.
또한 어려서부터 효행이 탁월하여 1870년 12월에 강진, 장흥 유생 수백명이 연명으로 그 내용을 예조에 진정하여 예조절목(禮曺節目)을 내려받음으로서 조정으로부터 효행을 공인받아 인근지역의 모범이 되었으며, 1874년(고종 11년)에는 격포진 관내 위도수군동첨절제사(종3품)로 승진 발령되어 2년 3개월 동안 서해안의 요지를 잘 지키며 백성들을 편안케하여 1877년(고종 14) 조정으로부터 지중추부사 겸 오위장으로 근무하다 낙향 후 고향에서 후진을 양성하다 1887년 가리포(완도) 수군첨절제사(종3품)로 6개월 정도를 남해안 요지를 잘 지켜 인근 지역의 민안에 크게 기여했다.
1887년(고종 24) 10월에는 한양의 친위별장 기사장(정3품)으로 임명받았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부임하지 않고 사직하여 말년에 고향에서 후학을 양성하다가 1890년(고종 27) 54세에 영면하였다. 묘소는 완도군 고금면 청학동에 있으며 그 후손들도 현재 청학동에서 일부 살고 있다.
▲강진 마도만호 이종호 장군 무과 급제 교지(1858년(철종 9) / ⓒ사느로
▲강진 마도첨사 이종호 장군 만호 임명 교지 / ⓒ사느로
승정원일기 : 1870년(고종 7) 12월 24일(맑음) 이종호(李鍾浩)를 마도 만호(馬島萬戶/ 從四品武官)로 명하다.
▲소재지 : 전라남도 강진군 마량면 마량리 / ⓒ돌구름
▲강진 마도진성(康津馬島鎭城) 아래 세워진 마도만호 이종호장군 선정비[行萬戶李鍾浩將軍善政碑] ⓒ한국문화정보원
강진 마량입구에 구축된 마도진성(馬島鎭城)이다. 세곡 약탈을 노린 왜구를 방어하기 위해 1499년(연산군 5년)에 축조된 것으로
전해진다. 비의 규모는 높이 130㎝, 폭 50㎝, 두께 15㎝이다.
▲전라남도기념물 제179호 / ⓒ한국문화정보원
▲비의 전면에 글씨가 마모되어 보이지는 안치만 아마 行萬戶李鍾浩善政碑로 각자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 ⓒ사느로
▲강진 마도만호 이종호 장군 생가가 있는 마을 전경 / 완도군 고금면 청학동 / ⓒ사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