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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고난받은 이들을 위한 목회상담-
I.서론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현재까지 고난의 문제는 인간과는 결코 분리시켜 생
각할 수 없는 것이었다. 고난이라는 문제를 어느 시대인들 피할 수 있었겠으며 누
구라고 예외가 될 수 있었겠는가. 물론 사회가 발달하면 할수록 도덕적 악의 증가
로 범죄,전쟁등의 부산물로 고난의 문제가 동반되게 되고 아프리카와 같이 낙후된
곳에서는 굶주림,말라리아,가뭄등의 우주적인 악으로 인한 고통이 존재하게 되는
차이는 있을수 있다.
{{
) 마이클 커웬, 박종수 역, 아프리카와 선교사 , (서울 : 보문 출판사, 1994), 112.
}}
또한 개인적으로도 자신의 위치나 신분이나 부에 따라 느끼
는 고난의 차이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차이가 있을지라도 고난은 모든 인
간이 공유하는 것이다.
1. 고난받는 이들의 현주소
이제 이렇게 인간과 밀접하게 관련된 고난의 유형들을 살펴보면서 우리 인간들은
어떠한 고난의 현주소에 있는지를 살펴보도록 한다.
우선 가장 일반적이면서도 가장 풀기 어려운 고난의 모습은 질병의 문제이다.질병
은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각가지 종류로 인간을 괴롭혀왔고 그리스도 인들
도 하나님의 은총이 질고로 부터의 분리가 아니기에 이 인간적인 조건에서 제외될
수는 없었다.
토마스c.오덴, 이기춘 역, 목회신학, (서울 : 한국신학연구소, 1986), 361
이 질병이 인간에게 사무치는 고난이 되는 경우는 그것이 평생 고
칠수 없을 경우나 죽음으로 이어지게 될 때 일것이다.
한 사람의 죽음은 그가 상대하던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
오덴 , op.cit, 423.
부모가 죽던지
자식이 죽던지 아내나 남편이 죽던지 형제 자매나 친구가 죽던지 그 죽음을 통하여
그 사람이 속한 공동체에는 위기를 맞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에게 내세의 사상
이 있긴 하지만 죽음이 주는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히게 되기는 마찬가지 이다.
이 외에도 현대사회와는 웬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지만 그래도 엄연히 존재하고 있
는 가난의 문제가 있다. 가난한 자란 이 세상에서 필요한 재원이 없고 또한 쉽사리
그것들을 취득할 수 없는 사람이다.
Ibid., 385.
사람이 가난한 상황에 놓여지게 되는 요인이
자신의 게으름에서만 비롯되는 것이면 수용할 수 있다고 하겠지만 그것이 부익부
빈익빈과 같은 자본주의의 사회 구조에 의해 어쩔수 없이 생산되어지는 희생물이라
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그 구조 속에서 가난한 자의 목소리는 어느 곳에서도 묵살
당할 수 밖에 되는 것이다. 혹은 자신이 속한 나라가 기근과 전쟁 등으로 인하여
극심한 가난 가운데 있는 상황 이라면 어디에도 호소할 수 없고 불가피한 고난을
당해야만 한다.
또한 요즘에 특히 부각되고 있는 가정간의 불화는 가정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
회문제로 이어지고 있어서 더 큰 문제이다. 부부의 이혼문제나 자식과 부모의 단절
문제로 많은 가정들이 병들어 가고 있음을 흔히 볼 수 있다. 이러한 문제는 어떤
비 정상적인 가정에서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가정에서도 빈번히 일어나는
문제이다.
2. 성서의 고난 인식
위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고난은 모든 사람에게 예외없이 다가온다. 그렇다면 성서
는 이 고난의 문제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먼저 구약에서는 고난의 이해에 대한 상당수의 본문들은 하나님의 교육방법의 일환
으로 인간의 고통을 고찰한다. 하나님에 의해 약속된 그 고통은 우선 정화의 방법
으로 제시된다. 시련을 통한 정화의 방법을 구약의 인간들을 필요하며 또 유효한
것으로 여겼다(사 48:10,슥 13:9,렘 6:29). 이러한 정화 가치와 함께 구약성서는
고통이 하나님의 계획을 드러내주는 역활을 한다고 언급한다.(신 8:2,시
119:71,94:12). 마지막으로 고난은 회개에로의 호소로 본다(대하 32:26,시 119:67,
호 2:8-9).
장 레베크, 김건태 역, 욥기 , (서울 : 가톨릭 출판사, 1990), 138.
이 세번째 회개로의 호소는 하나님의 구속순환 모형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즉 하나님을 섬기면 복을 주시고 그들의 삶을 풍성케 하시지만 죄악이 만연
해지고 우상들을 섬기게 되는 상황에서는 고통을 면치 못하게 하시고 거기서 회개
하면 다시 구원을 허락하시는 구속 싸이클(cycle)을 통해서 알 수 있게 된다.
한편 신약에서는 나서부터 소경된자의 이야기(요 9:1-3) 속에서 고난에 대한 신약
시대의 사상에 대해 알수 있다. 나면서 소경된 자를 보며 예수께 묻기를 소경된 원
인이 누구의 죄로부터 기인하냐는 사람들의 질문을 통해서 그 시대의 고난의 원인
에 대한 인식은 대부분 죄로부터라는 생각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3. 현대교회는 고난 받는 이들에게 어떤 메세지를 줄 수 있나?
그렇다면 현대교회는 고난에 대한 인식을 어떻게 하고 있으며 성서 전통을 설교의
핵심으로 간주하고 있는 현대교회가 고난받는 이들을 위해 어떠한 메세지를 전해줄
수 있는가? 고난이라는 것이 인간의 보편사라고 하여서 그 문제에 관하여 깊은 관
심이 결여되어 있다거나 고난 당하는 개인에 대해 주의깊은 통찰이 미흡한 상태로
있지는 않는가. 또한 성서를 근거로 하지만 고난자에게 참 위로를 주지 못하고 있
는 현실은 아닌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면서 이 논문을 통하여서 현대교회가 그 동안
간과하며 지나갈 수도 있었던 고난에 대한 깊은 이해와 통찰을 가지는 계기를 마련
하고자 하며 고난의 문제가 일률적이지 않고 다양한 형태를 가지고 다가오는데 이
럴때 현대교회로 하여금 더 폭 넓은 고난에 대한 이해를 갖게 하고자 한다.
그리고 많은 고난자들 가운데서도 이유를 알기 어려운 의인들의 고난의 문제를 생
각해 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 논문을 통해 원인 모르게 고난을 당하는 자들에게 현
대교회가 좀 더 특별한 배려와 대안의 준비를 할 수 있는 바탕이 되고자 한다. 이
러한 특수한 고난의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서 생각할 것은 이런 문제가 비단 현대인
만의 문제가 아니었기에 고대 근동으로 부터 성서적 전통까지 살펴보기로 하겠다.
고대 근동에서 '수메르판 욥기'로 불려지는 "남자(또는 인간)와 그의 신"에서는 신
들이 인간을 처음부터 결함을 가진채로 만들었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그러한 인
간이 신으로 부터 부당한 고통을 받게 되는 것에 대해 반감을 갖게 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신들이 고통 당하는 자에게 은총을 주며 고통 당하는 동안의 올바른
처신에 대해서는 그의 보상으로 기쁨을 선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또한 '바벨론
의 욥기'라고 부르는 "나는 지혜의 주를 찬미하리라"는 곳에서는 한 귀족이 뒤바뀐
운명으로 사회에서 버림받고 중병에 걸리게 된다.그는 좌절하는 가운데서 자신이
회복될 것이라는 확신을 고백하게 되며 그때에 비로소 초 인간적인 힘의 지배를 받
으며 완전히 회복하게 된다.
제임스L.크렌쇼 , 강성일 역, 구약 지혜 문학의 이해, (서울 : 한국장로교 출판사 ,1993) 316-318.
이처럼 고대 근동에서도 부당한 고통을 받는 의인들
의 문제를 다루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고대 근동의 지혜사상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여겨지는 구약의 욥기 역시 의인의 고
난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욥은 의로운 자라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자였고(욥
1:1) 하나님이 유의하여 보심으로 사탄에 의해 재산,자녀,질병등으로 고난을 받게
되고(욥1:7-12), 고난의 과정에서 친구들과 논쟁을 벌이게 된다. 이 논쟁속에서 욥
은 자신의 무죄함과 정당함을 변호해 줄 하나님을 찾게 되었다. 결국 욥은 하나님
과 대면함으로써 자신의 신앙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신비한 일들을 찬양
하며 회개를 통해 하나님을 만난 체험을 한다. 그는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항변이
잘못 되었음을 발견하게 되고 우주가 합리성이라는 원리를 따라 운행된다고 보는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어 있음을 배우게 된다. 하나님의 진노와 은총이 반드시 인간
의 선악개념에 상응하는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으로 욥의 고난의 의문점이 해결되게
되었다.
Ibid., 169-170.
그 밖에도 의인의 고난에 대해 시편의 기자들은 종종 자신의 깨끗함과 무고함을 주
장한다. 윌리엄 헨리 그린, 윤영탁 역, 욥기이해, (서울 : 엠마오, 1993), 179.
또한 예레미아와 같이 조국의 패망을 지켜보며 개인적인 고통을 감수 해
야 하는 예언자도 있었다. 그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선포하며 재난을 공포했기 때문
에 그는 자연히 모든 백성과 왕,제사장,거짓 예언자들에게 미움을 받게 되었다. 그
가 당한 내적 고통은 여간 심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탄식시를 보자면 욥이 자신의
고통을 이기지 못해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는 것만큼 예레미아도 자신의 생일을 저
주한다.
저주 받을 날,
내가 세상에 떨어지던날,
어머니가 나를 낳던날.
복과는 거리가 먼날
......
어찌하여 모태에서 나와
고생길에 들어서 이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되었는가
이렇게 수모를 받으며 생애를 끝마쳐야 하는가(렘20:14-18)
이러한 그의 탄식시를 보면서 예레미아는 하나님의 종이었지만 그 시대의 누구보다
도 고난 당하는 자였음을 알수 있게 된다
{{
) 장일선, 생명나무와 가시덤불 (서울 : 전망사, 1991), 232-233.
}}
위의 근거로 보아 의인의 고난은 고대로 부터 있어왔던 것이며 이러한 많은 전승들
은 인간이 아무리 의로울지라도 인간이 관여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의 영
역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와같은 불가해한 고난을 인정치 않으며 하나님에
대한 규격을 맞추어 놓은 이들에게 새로운 교훈을 제시하여 주게 된다.
이러한 우주적 성격을 지닌 고난에 대한 전이해를 바탕으로 본론에서는 한국교회에
서 교회 생활을 하는 한 기독교인을 모델로 하여 그 기독교인의 경험을 성서적 전
통과 접맥하고 해석하며 대화를 시도함으로서 현대교회의 고난자들을 위한 목회신
학에 있어서 하나의 가능성있는 제안을 하고자 한다.
방법론에 있어서는 먼저 한인물의 고난의 경험과 해결을 위한 시도,응답등을 제시
하면서 성서의 욥과 접맥하여 그들의 고난에서 나타난 유사점과 차이점을 비교하면
서 이들과 같이 인간으로 풀기 어려운 고난을 당하는 이들의 심리적,신앙적 상황을
검토, 분석하려고 한다.
II.몸 말
1. A 인물의 경험과 욥의 경험 비교
고난자 A는 현재 인천에서 살고 있는 31세의 임OO라고 하는 기혼여성이다.이 A라는
인물은 현재 나와 함께 교회의 중.고등부 교사로 일하고 있으며 노동조합과 관련된
곳에서 근무하고 있다. A는 2남 2녀 중에 2째,차녀로 태어났으며 가정에서 부족함
없이 자라왔다. 그녀의 성격은 내성적이지만 한번 하자고 마음 먹으면 끝까지 하고
자 하는 성격이었다. 특별히 모나지 않게 착하다는 평을 들으면서 자랐으며 꾸준하
게 신앙생활을 하여왔다.
그러던 중 오랜 기도를 통해서 이OO라는 한 남자와 만나서 1991년 결혼을 하게 되
었다. 그녀의 남편은 아들을 낳기 위하여 무당에게 굿을 하는 정성을 가졌던 어머
니의 밑에서 자란 사람이었다. 그 어머니는 어렵게 낳은 아들에게 온갖 비위를 맞
추어 주었으므로 그러한 편협한 사랑속에서 의타심이 강했으며 "나는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자라났다. 또한 그의 아버지가 10여년간 병석에
누워계시다가 국민학교 시절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어려서의 성장과정이 그리 밝지
못했었다. 그래서 그에게는 늘 피해의식이 자리잡고 있었으며 무엇인가 남을 도와
주면 반드시 받아야 한다는 의식이 자리잡고 있으며 이것이 이루어 지지 않았을 때
는 무척이나 섭섭한 감정을 드러내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둘은 서로의 신앙을 바탕으로 하여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이들은 연립주택에서 시어머니와 함께 살다가 새집을 마련하고 그 집으로 이사가기
를 손꼽아 기다리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들의 신혼의 단꿈과 새집에 대한 모
든 희망을 정리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이 주어지게 되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닌 남편
의 큰 질병의 문제 때문이었다. 그 병은 만성 신부전증이라는 병으로 A는 그병이
어떤것인지 알 수도 없었고 세상에 그런 병도 있나 싶기도 하여 그저 당황한 채로
겪을 수 밖에 없었다. A는 29년을 살면서 그다지 아파보지 않았었기에 그녀의 인생
에서 평생 누워지내야 한다는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인생의 항로였다고 그 때
의 심정을 말한다.
A는 미련한 것인지 모르지만 무턱대고 남편을 기도원으로 올려 보냈다. 그런데 설
상가상으로 남편이 기도원에 가있는 동안 10개월이라는 고생끝에 낳은 아이가 일주
일 만에 죽어버리는 실로 큰 충격을 당하게 되었다. 10개월을 아이를 기다리며 힘
든 상황을 이기며 지냈는데 그 소망의 열매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나니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구나'라는 생각과 '하나님은 왜 나를 이 자리에 그
냥 놔두고 계시는 걸까'라는 생각과 함께 하늘나라와 지옥과의 차이는 별것이 아니
라는 생각이 그 녀를 지배하게 되었고 하늘나라에 대해 그동안 가져왔던 핑크빛 소
망도 차차로 흩어지기 시작하였다.
2개월 동안 기도원에서 아무런 진전이 없는 남편이 내려오게 되고 이들의 사이는
싸움으로 점점 멀어져 가게 되었다. 남편은 한번도 찾아오지 않는 본가 식구들에
대한 미움을 모두 A에게 돌리며 "내가 받은 학대와 고통과 절망을 네가 맛볼때까지
괴롭히겠다"는 증오 어린 말을 내뱉었다고 한다.
기도원에서 내려온지 얼마안되어 남편의 병이 갑자기 악화되었다. 남편은 엠브란스
를 타고 급하게 병원에 실려가게 되었고 A는 남편이 치료중 죽어도 병원에서는 책
임을 지지 않는다는 각서를 쓰게 되었다. A는 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전율과
같은 고통을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그 날밤은 친정어머니와 뜬 눈으로 밤을 세웠
고 그날로 부터 2주정도의 힘겨운 입원생활을 마치고 퇴원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퇴원후에도 일주일에 한번 옴 몸의 피를 거르는 투석이라는 치료방법을 위해 통원
치료를 하여야만 했다. 이 치료는 육체에 큰 무리를 주는 것 뿐이 아니라 경제적으
로도 이 부부에게 큰 타격을 주게 되었다. 병원의 치료비 때문에 기존에 있던 집은
1300만원의 전세금만 가지고 시동생에게 주었으며 새로 이사가려고 사두었던 집은
다른 사람에게 팔아야만 했다. 일생을 살면서 이사를 다녀보거나 남의 집에서 살아
본 기억이 없었던 A로서는 헤쳐나가기 힘든 현실이었다. 시어머니와의 불화로 따로
단칸방에서 살게된 이후로 남편에게는 점점 이상한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조금만 신경을 거스리는 일이 있으면 밤에 경련을 일으키고 뭐든지 닥치는 죽여버
리겠다고 협박을 하고 또한 자신을 학대하는 행위로 종이를 방안에 가득 찢어서 성
냥을 긋기 위한 준비를 하기도 하고 유리병을 던져서 난장판을 만들어 놓기도 하고
그것을 또 치우지 않는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등 도무지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만큼의 비정상적인 행동들이 계속되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떤 날은 길거리에서 몽둥이를 들고 들어와서 여자와 북어는 삼일에 한번
씩 얻어맞아야 한다면서 "내가 무섭지도 않냐?, 너 나한테 한번 맞아봐라 ","나 건
드리면 다 죽여 버릴거야"라는 폭언을 서슴지 않았고 또 어떤 날은 벽돌을 가지고
와서 위협을 하는 등의 비정상적인 행위를 자주 일삼곤 했었다.
이때에 그녀가 생각해 낸것은 차라리 맞아서 죽게 되면 천국에 가게 될 것이고 지
옥이 아무리 무섭고 아프고 힘든 곳 일지라도 지금의 현실보다는 덜하리라는 것이
었다. 이 때 깨달은 것은 사람이 힘들고 괴롭고 절망의 끝에 서 있을때는 "당신은
죽어서 지옥에 갑니다" 라는 말은 효과가 없다는 것과 현실에서 어느정도의 기쁨과
즐거움과 소망이 있는자 만이 천국에 대한 기대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
다. A는 지옥에라도 빨리 가고싶다는 심정으로 참기로만 하자던 생각에서 벗어나
사력을 다해 남편에게 대들기 시작하였다. 물론 속으로는 무섭고 떨렸지만 겉으로
는 대담하고 겁없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노력을 하였다. 남편이 처음에는 거세게
나왔지만 서서히 포기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또 다른 증상이 남편에게 있었다. 남편이 직장을 나가지 않고 부인만 나가
게 되자 남편에게는 의처증이라는 증세가 생기게 되어 늦게 온다고 시비,화장하는
것에도 시비를 걸며 그녀와 연관된 모든 사람들을 욕하게 되었다. 그녀는 남편의
끝없는 이상증세와 질병의 간호와 제대로 안아보지도 못하고 떠나버린 아이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으로 지칠대로 지치고 하나님을 향하던 기도와 찬양을 하는것도 무
의미하게 느껴져서 무기력한 신앙생활의 반복만 거듭하게 되었다.
고난자 A와 똑같은 상황은 아니지만 유사한 고난을 받는 성서의 욥을 여기서 잠깐
생각해 보기로 한다. 욥은 우스땅에 거하는 자로 많은 가축과 재산을 소유하고 있
었으며 10명의 아들과 딸,그리고 많은 종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는 부유하면서도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자(욥1:8)"이라는 인정을 하나
님으로 부터 받은 자이다. 그는 윤리적 규범들을 수용하며 사회적 생활속에서 정의
를 실천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
) 구스따보 구띠에레즈, 성찬성 역, 욥에 관하여, (왜관 : 분도 출판사,1990), 33-34.
}}
또한 하나님을 두려워 한다는 말을 통해서 그의
신앙상태를 알수 있으며 또한 1장 4-5절에서 그 신앙을 잘 입증해 준다. 빈번하게
잔치를 벌이는 아들들을 염려하는 마음으로 욥은 잔치가 있고 나면 아침에 일어나
서 그들의 수대로 각각 번제를 드렸다. 이는 아들들이 속으로 죄를 짓고 하나님께
욕을 돌렸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므로 그렇게 했던 것이다.
{{
) Ibid., 32.
}}
이러한 신실한 생활
가운데 욥에게 이유를 알기 힘든 고난이 겹치게 되었다. 그의 부유한 소유물과 자
식들은 천재와 인재로(1:14-19) 다 잃어버리게 되었고 그의 몸에는 발바닥으로부터
정수리까지 악창으로 뒤덮이게 되었으므로 이에 아내는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
는 소리를 욥에게 퍼붓는다. 욥의 육체적,물질적,정신적,영적 고통은 욥의 힘을 점
점 빼앗아 가고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신정론의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거론해야 할 것이다.
신정론이란 엄청난 고난의 사실 가운데서 하나님은 올바르다고 말하는 것을 의미한
다. 신정론의 기능은 악이 계속 존재하고 있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속성 특히 의
와 자비 및 사랑의 속성을 입증하려는 것이다. 이는 고난중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전혀 받아들일 수 없어서 의심을 하게 되는 바로 그 순간에 하나님은 그래도 의로
우시다고 하는 것이다.
{{
) 오덴, op.cit, 321.
}}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신정론을 바탕으로 고난 당하는 자
들을 보면 그 고난은 자신들의 죄 때문에 발생하는 하나님의 경고나 심판만으로으
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
) 커웬, op.cit, 92.
}}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고난자들과 접하게 되면 고난
자들의 상처는 더욱 깊어지게 된다.
A의 경우에도 이런 오류로 빚어진 상황이 전개되었다. A는 더군다나 신을 잘 믿으
면 복을 받고 병도 고치고 부자도 되지만 부정을 하면 집안이 망해간다는 생각을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한국이라는 곳에서 당한 고난이기에 그러한 많은 소리를
들으면서 더 큰 좌절에 빠지게 되고 교회에 대한 깊은 회의에 빠지게 되었다.
A에게 제일 먼저 들려진 이야기는 바로 "둘이 하나님은 뒤로 하고 서로에게만 빠져
있어서 그렇다."라는 것이었다. 이 말을 한 사람들은 과연 하나님에 대해 자신을
잠시 바라보지 않았다고 해서 금방 벌을 내리시는 분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인가.
그 다음으로 그가 들은 말과 그가 받은 눈초리는 "당신은 교회에 본이 안되고 당신
때문에 전도 할 수 없다"는 말이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복 받아서 보기에
좋아야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하기 좋다는 말이었다. 더우기 집사,권사,장로들은 그
녀의 고난에는 진정으로 동참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의만을 주장하면서 "네가 분
명히 잘못한 무언가가 있을 테이니 잘 생각해 보라"고 하여서 A를 미궁에 빠뜨리고
궁지에 몰아 넣었다. 또한 무엇하나 해결되지 않는 고난자를 부담스러워 하는 목회
자의 모습과 하나님의 권능과 선하심을 강조하여 전율과 같은 고통을 외면해 버리
거나 고난은 우리를 몰락시킬 힘이 없다고 이야기 함으로써 고난자에게 문제를 회
피시키려는 목회자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교회란 곳은 소외되고 헐벗고 굶주리고 낙오된자들에게 삶의
희망과 정신적인 지주 역활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 왔었는데 고난의 현장에서 교회
를 바라보니 오히려 성공하는 자를 위해 존재하는 곳과 같았고 오히려 교회 밖의
사람들이 더 큰 용기와 위로를 주는것을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A는 교회
와 교회안의 여러 직분자들에게 더 이상 도움받기를 기대하지 않게 되었다.
욥도 이처럼 친구들과의 대화를 통해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욥에게는 세 친구가
있었다. 이 친구들은 처음에는 욥이 당한 엄청난 재앙을 바라보며 "소리질러 울며
각각 자기의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띠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 칠일 칠
야를 그와 함께 땅에 앉았으나 욥의 곤고함이 심함을 보는고로 그에게 한 말도 하
는 자가 없더라(욥:12-13)"와 같이 욥의 고통에 눈물과 침묵으로써 고난에 동참 하
였었다. 그러나 그 우정어린 침묵은 욥의 독백으로 깨어지고 만다
{{
) 구띠에레즈, op.cit, 71.
}}
칠일간을 지
켜보면서 그의 고통이 큰 것은 알았지만 욥의 탄식을 들어보니 의로우신 하나님에
대하여 너무 심한 소리를 하는 것에 이들은 흥분하였으며 모든 고난이 욥으로부터
기인됨을 확신하며 그러한 논조로 욥을 공박하게 된다.
먼저 엘리바스는 죄로 인해 고통을 받는다는 인과 응보의 교리에 입각한 초경험적
교리를 고집하며 욥의 무죄 항변을 꺽으려 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죄악의 사회성,
단체성,그리고 원인과 결과사이의 복잡하고도 먼거리를 알지 못하고 있다.
{{
) 구덕관, 구약신학, (서울:대한 기독교 서회,1992), 317.
}}
또한
엘리바스는 욥에게 자신의 죄를 깨닫게 함으로서 욥을 침묵시켜 무안하게 만드려고
하는 도덕론자(moralist)의 방법을 취했다.
{{
) Jay E.Adams, Competent to Counsel, 정정숙 역, 목회상담학 (서울 : 총신대학 출판부
,1981), 200.
}}
둘째 친구 빌닷은 가장 동정적인 수
사학적인 질문만을 되풀이 한다. 또한 빌닷은 자신의 말을 인증으로 조상의 가르침
을 제시하며 전통교리로 돌아오라고 욥에게 권면한다. 세째 친구 소발은 신학적 정
열에 차 있어서 공갈과 협박으로 욥을 책망한다. 그는 지혜전통에 의존하여 볼때
욥에게 경건과 도덕이 없다고 한숨 짓는다.
{{
) 구덕관, op.cit, 317.
}}
그리고 엘리바스와 빌닷처럼 하나님
의 초월성과 고난의 불가피성을 말하며 순응하면 보상을 준다는 전통적인 인과 응
보의 교리를 제시한다.
이와 같은 친구들의 공격적인 말에 욥은 친구들이 자신의 편에 서지 않음을 원방하
며 자신의 고난에 대한 원인제시를 요구한다. 또한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29,30장
에서 각각 비교하면서 현재의 고난이 과거의 자기 윤리생활에 비추어 볼때 인과 응
보의 교리와 반비례하는 모순이 있다고 진술하며 지금과 같이 자신이 고난을 받고
저주를 받는것이 부당하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욥은 의인의 환난과 악인의 행
복을 설명하지 않고 무조건 소화하라는 친구들의 인과응보의 교리로 부터 탄식하며
경험의 교리로 전환으로의 도전을 하게 된다. 그것은 나쁜 신학,구멍뚫린 신학에서
새로운 신학을 찾으려는 도전이었다.
{{
) Ibid.
}}
A와 욥의 친구들은 "하나님은 분명히 의로우시다.또한 그 능력 또한 크시다.그럼에
도 불구하고 고통과 악
{{
) 악은 인간의 생명과 삶에 직접 또는 간접으로 화나 해를 주는 유형 또는 무형의 부정적 실
재를 총칭함. 악은 인간도덕의 내면에 있는 선의 대립개념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되고 근원적인 악과
악마적 힘으로도 이해되어야 한다. 벤A.하비, 박양조 역, 신학용어 해설 , (서울 : 기독교문사,
1984), 210.
}}
은 존재한다."
{{
) 오덴, op.cit, 323.
}}
는 신정론의 애매한 문제에 대해 깊은 통
찰 없이 하나님은 의로우시므로 고난의 원인은 바로 그 자신에게서 비롯되는 것이
니 인정하라는 이야기 또한 아무리 고난중에 있어도 하나님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금지시키려는 이야기들을 하므로써 하나님의 참 모습을 찾으려는 이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또한 어떤 이들은 악의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정당화 할 어떤 필요도
요구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창조사실 그 자체는 하나님의 완전한 선하심과 지혜,
그리고 능력을 완벽하게 확증하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완
전하심과 능력에 대한 언급만을 하게된다면 고난 당하는 이들에게는 만족할만한 설
명이 되지 않는다.
{{
) 커웬, op.cit, 88.
}}
그러므로 악은 그 악에 관련된 개개인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
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이해해야 하며 고난 자체를 개인적인 문제와만 연결시키는
자세에서 벗어나는 것이 요청된다고 하겠다.
2. 문제 해결 시도
자신의 고난에 대한 인과 응보적 해석만을 고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속에서 벗어나
서 A는 하나님과 일대일 대면을 요구하는 방침을 세웠다. 그녀는 겉으로는 부정했
지만 무의식적으로 매달려 왔던 하나님을 시험하는 도구로 또 소망을 갖게하는 방
편으로 일천번 헌금을 작정하였다. 주위에서 가끔 어려움을 당할 때에 하는 것을
보아오다가 이제 자신이 그것을 행하기에 이른것이다. 그러는 가운데 일관적이지는
않지만 변해가는 남편의 모습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리고 전도사님의 권유를 통해
서 모 신학교에 입학을 하게되고 그 곳에서 하나님의 다른 모습들을 접하면서 많은
깨달음을 얻게 되었고 그 곳에 온 다른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하나님의 여
러가지 인간에게 향한 계획들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A는 3년동안 하나님을 붙잡고는 있었지만 아무것도 도전하지 못한채 원망만 하던
자신을 돌아보며 또한 900번에 가까운 일천번 헌금이 끝날 그 날을 바라보면서 그
리고 작으나마 자신의 보금자리를 마련하게 되고 어렵지만 학업에 필요한 자료를
얻을 수 있게된 자신의 현 상황을 생각해보면서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모습임을
인정하고 감사의 조건들이 너무 많음을 꺼닫게 되었다. 결국 A는 자신의 문제를 즉
시 해결하려 하지 않고 시간을 두고 명상과 하나님에 대한 체험을 통해 문제를 서
서히 해결하는 지혜를 얻게 되었다. 이것은 "시간이 약이다"라는 우리의 속담을 연
상케 한다.
이렇게 A는 존재하시나 자신에게 무의미하고 능력자시나 자신에게는 무력해보였던
하나님을 삶의 현장에서 발견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그녀는 감사함을 찾게 되었으
며 그 간의 수많은 실망과 좌절로 부터의 극복하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인간의 관
계문제와 물질적 문제에도 차차로 소망이 생기게 되는 환경적인 응답의 문제도 이
루어지게 되었다.
친구들로 부터 고난에 대한 탐탁한 원인을 발견치 못하던 욥도 역시 최후 진술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정면대결을 요구하고 더욱 간절히 찾게 된다. 더 나아가 그는
"누구든지 나의 변백을 들을지니라.나의 서명이 여기 있으니 전능자가 내게 대답하
시기를 원하노라.내 대적의 기록한 소송장이 내게 있으면 내가 어깨에 메기도 하고
면류관처럼 내걸음의 수효를 그에게 고하고 왕족처럼 그를 가까이 하였으리라.(욥
31:35-37)"이라고 말하며 하나님과 소송할 것과 같은 태도를 취한다. 그러나 인간
의 요구대로 현현하시는 하나님이 아니기에 하나님은 욥의 당당하게 따지고 드는
모습에 일단 침묵하신다. 그 사이에 출현한 엘리후의 역활 즉 욥의 고난을 욥만의
것이 아닌 보편사로 돌리는 역활을 통해 그의 마음은 좀 가라앉게 된다.
그 후의 완전한 내적 해결은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대면으로 이루어지게 된다.하나
님은 자신의 정당함을 위해 하나님을 불의한 존재로 만들었으며 인간의 머리로 하
나님을 이해하려고 했던 욥의 부르짖음 앞에 자신의 때에 자신의 의지대로 나타나
셨다. 그리고는 두번의 연설을 하신다.
야웨의 첫 연설에서 하나님의 창조사업들의 파노라마 속에서 펼쳐진 지혜와 능력이
욥이 압도되게 된다.
{{
) 문희석, 오늘의 지혜문학 연구, (서울 : 대한 기독교서회, 1991), 194.
}}
여기에서 비록 욥이 몰리게 되지만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대면이 이루어짐으로 욥의 마음이 어느정도 후련해진다. 욥은 이 첫번째 연설이후
자신의 미천함을 발견하게 되어 "나는 미천하오니(욥40:4)라고 고백을 한 후 그는
침묵을 선언한다. 아직도 그는 하나님의 의도에 대해 확실하고 충분한 인식이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하나님은 정의와 심판에 대한 두번째 연설을 하시게 된다. 이때 비로소
욥은 지신의 머리로는 헤아릴 수 없는 신비한 일들을 입을 열어 말했던것을 회개하
게 된다. 이어 욥은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
를 뵈옵나이다.(욥42:5)"라는 고백을 한다. 하나님은 욥의 소망을 실현시켜주는 해
답을 해주었으며 무죄체험과 인과응보 교리 사이의 모순 때문에 갇혀 있어야 했던
감방과 같은 곳으로 부터 해방시켜 주시었다.
{{
) 구띠에레즈, op.cit, 196.
}}
이로써 욥은 하나님은 모든 일에 계획들을 가지고 추진해 나가신다는 것을 인식하
게 되었고
{{
) Ibid., 198.
}}
인간의 알 수 없는 고난의 문제는 아무리 뛰어난 인간의 지혜와 지식
으로도 알 수 없는 영역이므로 이러한 고난의 문제에 닥쳤을 때 어떠한 신학적 이
해와 철학적 변론을 통하여 안식을 얻는것이 아니라
{{
) 문희석, op.cit, 199.
}}
그 신비한 영역의 존재함
에 대한 가능성을 받아들일 때에 비로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내적 해결과 함께 하나님께서는 그 전의 소유물 보다 갑절이나 더 허락하시
는 외적인 문제의 해결까지 주셨다. 욥은 하나님과의 직접 대면을 통해 문제 해결
을 시도한 것으로 성서는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오늘의 기독교인의 경우에
는 A와 같이 삶 속에서 간접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생활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을
발견하며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모습이 더 일반적이라고 볼 수 있다.
III. 맺는 말
이제 위에서 소개했던 A라는 인물과 그와 유사했던 성서의 인물 욥사이에 있는 유
사점과 차이점을 통해 필자의 결론에 이르고자 한다.
1) 유사점
이 두 인물은 각자의 시대와 공간의 큰 차이를 가지고 있지만 많은 유사점들을 가
지고 있다. 우선 이들은 어느 정도의 연령까지 행복한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즉 고
난이라는 것이 닥치기 이전의 삶 속에서는 어려움과 부족함을 느끼지 못한 안정된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었다. 또한 그들은 신앙 생활 역시 남들과 다르게 열심을
보여 왔다. 그들은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고 삶 속에서 순간 순간 하나님을 존재를
인식하며 그 뜻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자들이었다.
이러한 평안한 이들의 삶을 뒤짚고 엄청난 고난의 현실이 닥쳐왔는데 상실의 고난
과 인간의 능력으로 고치기 어려운 심각한 질병의 고난 그리고, 고난자들을 향해
쏟아지는 전통적인 교리와 듣기조차도 어려운 비난의 말들을 감수해야 하는 고난이
었다. 이들은 이 상황 속에서 망연자실한 채로 침묵하기도 하고 하나님께 탄식하기
도 하고 삶 자체에 의미를 상실하여 오히려 죽음을 부르며 자신의 생명이 멈추어지
기를 갈구하였다. 고통이 심화되면서 이들은 천국과 지옥을 고난속에서 체험하게
된다. 사람들과의 이야기 속에서 아무런 진전이 없고 해답없는 이야기의 반복속에
서 이들은 벗어나고자 했다
그래서 이들은 언젠가, 어떤 방법으로든가 답을 주실 하나님게 매어달릴 방법을 모
색하고 도전한다. 그럼으로서 이 두사람은 심리적인 괴로움으로 부터 마음속의 평
안함을 찾게되고 외적으로 잃었던 것들도 나름대로 회복하게 되는 결과를 가지게
되었다.
(2) 차이점
먼저 이들의 신앙 생활에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다. 고난자 A는 신앙 생활에 열심
을 다했으나 그 누구에게도 완전한 신앙인이라는 평가를 받은 근거는 없었다. 그러
나 욥은 성서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고 순전하여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악에서 떠
난자라고 하는 인정을 받은 자이다. 욥은 성서의 인물이기에 이러한 신앙에 대한
확실한 근거를 가졌던 것이다. 그다음으로 고난의 문제에서도 상실된 것은 재산,자
식등으로 유사하지만 질병의 문제에 있어서 고난자 A는 자신의 병이 걸린것이 아니
었기에 이차적 고난의 경험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남편으로부터 받은 핍박과 위협
들을 볼 때 A의 고난을 이차적이라고 말하기는 어럽다. 반면 욥은 머리부터 발바닥
까지 악창으로 뒤덮여 피고름을 내며 기와장으로 몸을 긁으며 지내야만 했다. 아무
도 느껴줄 수 없고 아픔을 나눌 수 있는 질병의 문제를 혼자 겪어야만 했던 것이
다. 이들의 이러한 차이점 중에서 가장 두드러졌던것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사고
였다. 고난자 A는 고난이 닥치자 하나님에 대한 실망으로 "하나님은 없다"라고 공
공연히 말하면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부인을 하였다. 물론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의 완전한 부인은 아니였다. 다만 받아들일 수 없는 자신의 현실앞에서 하나님이
계신다면 이런 일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에 반해 욥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
한 의심이 아닌 하나님의 이러한 고난을 주시는 목적에 대한 의구심이었다. 하나님
이 분명 계시지만 나타나시지 않으시는 의도를 알고자 했던 것이다. 문제 해결의
시도에 있어서 A 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현현으로 모든 것이 저절로 해결 되리라는
기대를 하지 않았기에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며 삶 속에서 탈출구를 찾고 그
삶을 이겨나갈 온갖 노력을 하였다. 그러나 욥에게는 앞으로 살아갈 문제가 더 시
급했다기 보다는 자신의 정당함을 밝히고 하나님의 의도를 밝히는게 시급해보였고
또 그것이 밝혀지는 것이 다른 것보다 더 큰 문제의 해결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이
들은 동일하게 하나님으로부터 문제의 해결을 받았지만 A는 간접적인 하나님을 통
하여서 문제 해결을 받게 되었고 성서는 욥이 직접적인 대면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
게 되었다고 보도한다.
위의 고난받는 자들의 모습을 통해서 나는 고난받는 자들에게는 남들이 결코 동참
할 수 없는 부분이 있고 이러한 자들에게 깊은 배려와 관심이 없이 하나님의 의만
강조하여 악의 결과를 그 사람에게 돌리는 식의 해답은 이제 배제되는 것이 바람직
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한결같은 소리를 하게되는 현대교회가 지속된다면 진정한
아픔을 가진 자들이 위로를 얻을 것이 사라지게 되리라고 생각한다.
무책임하고 무관심한 소리만이 계속되는 가운데서 고난자들은 하나님과의 대결만이
참 길이라고 여기게 되는데 그렇다면 교회는 그리고 목회자는 이들의 고통을 결코
덜어줄 수 없다는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교회는 무엇을 위하여 서있는 것일까?
교회와 목회자가 한 고난자에게 줄 수있는 정해진 해답은 없다. 그러나 그 고난자
들의 고난을 진정으로 공유하고자 하는 마음가짐과 그들의 억울하고 괴로운 심정을
어떠한 공격의 비수를 갖지 않고 들어줄수 있는 마음의 여유와 귀를 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목회자는 하나님의 단편적인 모습을 제시함으로 고난자를 더 힘겹
게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다양하심을 인식시켜 주는 것이 필요하리라고 본다. 그리
고 고난에 닥친 자들을 만났을 때 그 문제를 성급히 풀려고 하는 것보다는 시간이
라는 것을 하나의 처방으로 생각하고 고난자를 대하는 태도를 가져야하리라고 본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