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이 지난 9월, 최고시청률 18.1%, 한국갤럽 선정 “한국인이 좋아하는 TV 프로그램” 1위에 오르며 많은 사람들의 호평 가운데 종영했다. 더욱이 마지막 회를 정점으로 20세기 초 대한제국 시대 이름 없는 선조들 - 의병들의 존재를 일깨우는 드라마로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조선을 상징하는 인물 고애신(김태리 역)을 제외한 주요 인물 모두 조선을 떠났던 자들이었다. 그것이 자신의 혈육이 지운 짐으로부터 도망친 경우든(김희성(변요한 역)), 혈육이 팔아넘긴 경우든(쿠도 히나(김민정 역)), 살아남기 위해 떠난 것이든(유진 초이(이병현 역), 구동매(유연석 역)) 말이다. 그렇게 조선과 이방의 경계를 넘나들고 신분의 경계를 허물며 조선을 위하여 애쓴 사람들을 드라마가 조명한다. 아무리 작은 캐릭터라도 사소하지 않으며 모든 캐릭터마다 각자의 서사가 있고 애정이 가지만, 그중에서도 유진 초이에게 살펴볼 수 있는 몇 가지 지점을 기독교인들과 함께 나누어보고자 한다.
노비에서 자유인으로
“당신이 지키려는 조선엔 누가 살 수 있는 거요? 백정은 살 수 있소? 노비는 살 수 있소?”(9화) 조선 최고의 명문가 고사홍 대감의 손녀 애기씨 애신에게 이 질문을 던진 것은 유진 초이였다. 미국인이라는 ‘외부’의 시선과 조선의 천한 노비의 자식이었던 ‘내부’의 경험이 뒤섞인 질문이다. 유진의 어린 시절, 외부대신의 눈에 든 어머니를 지키다 아버지는 멍석말이로 죽고, 어머니는 아들을 살리려다 우물에 몸을 던졌다. 노비인 부모를 잃고 주인집에서 도망친 어린 유진은 머리 둘 곳이 없어 머나먼 이국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미국인이 되어 조선으로 다시 돌아왔다.
애신의 곁에 서서 나란히 걸을 수 있고, 위험한 상황마다 애신을 보호하고, 고종 황제의 휘하에서 조선의 군사 고문관이 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그가 미 해병대 대위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조선으로 돌아온 그는 조선의 모든 법과 제도와 관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고, 부모와 달리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었다.
조선인도 아닌, 미국인도 아닌, 이방인
그러나 미국에서 유진은 환영받는 존재가 아니었다. 신분제로부터 자유로워진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인종차별이었다. 서구인들과 얼굴색과 생김새가 다르고, 눈동자색이 다르고, 말도 달랐던 그는 미국 어디에서든 눈에 띄었다. 살기 위해 긴 댕기머리를 자르고, 총을 잡았으며, 영어를 배우고 군인이 되었다. 미국 시민권을 얻고 목숨을 건 전투에서 승리해 훈장에 특진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가는 곳마다 멸시 어린 주목을 받곤 했다.
그런 그가 조선에 돌아왔을 때, 미국의 군복을 입고 말을 타고 길거리를 활보하는 그를 보며 다들 “검은 머리 미국인”이라 불렀다. “미국은 일이 틀어지면 그를 조선인이라고 할 테고, 조선은 일이 틀어지면 그를 미국인이라고 할테니, 그는 그저 쓸쓸한 이방인입니다.”(10화) 히나의 말처럼 유진은 언제나 조선과 미국, 어느 한쪽에 뿌리를 내리기 어려운 이방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자유로 불평이나 무기력, 회피를 선택하지 않았다. 마침내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진짜 이방인”이 되기를 선택한다. 하나님 나라에서 이 세상으로 소풍 나온 그리스도인들처럼 말이다.
자유인, 이방인, 그리고 하나님을 부른 사람
19세기 말 조선의 것과 일제의 것, 서구의 것이 뒤섞여 혼란스럽고, 돈만 있으면 노비 신분을 벗을 수 있고, 양반이 될 수 있었던 시대에 기독교 복음은 대가 없이 모든 사람에게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선포했다. 누구든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그분의 자녀가 된다는 말씀은 신분이 낮은 사람일수록 기쁜 소식으로 다가왔다. 유진은 이 복음으로 자유를 얻고 삶의 구원을 얻었다. 동시에 이방인으로서의 삶도 얻었다. 재일조선인 2세 서경식의 말처럼, ‘조국’이란 “식민지배와 인종차별이 강요하는 모든 부조리가 일어나서는 안 되는 곳”이어야 하지만, 그곳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유진은 어쩌면 하나님 나라와 같은 ‘진정한 조국’에 대한 갈망이 누구보다 컸을지 모른다. 평생 “기도하지 않는 자의 기도도 들으십니까? 제 모든 걸음걸음에 함께 하셨습니까? 제 온 생을 흔드신 이유가 진정 있으신 겁니까?”(22화)라는 기도를 해왔을지 모른다.
유진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었을까? 그건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그가 자유인이자 이방인으로서 기독교 복음을 누구보다 깊이 경험하였으며, 요셉을 따라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이다.
그의 곁에 있었던 그리스도인들
녹록한 삶이 아니었다. 눈앞에서 부모의 죽음을 지켜보고, 자신을 좇는 주인집의 추적을 피해 여러 달 동안 바다를 건너 마침내 도착한 미국에서조차 폭력적인 차별을 온몸으로 겪어야 했다. 그런 유진의 폭풍 같은 삶을 지탱해준 것은 곁의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아들의 생을 자신의 목숨과 맞바꾼 어머니, 다른 미국인들과 싸우면서까지 친구가 되어준 보스 카일, 사랑하는 애신, 그리고 조선도, 미국도 끌어안지 않은 유진을 거두고 평생 그를 위해 기도한 선교사 요셉.
유진이 미국에 갓 도착했을 당시, 요셉은 유진의 미국식 이름을 새로 짓지 않고, 조선에서 부르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기로 한다. 대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미국에서 Eugene(유진)은 ‘고귀하고 위대한 자’란 뜻이”라며. 하나님께서 한 집안의 아버지(아브람)를 열국의 아버지(아브라함)로, 한 집안의 어머니(사래)를 열국의 어머니(사라)로 이름을 바꾸어주신 것이 그들에게 주신 새로운 비전을 암시하는 것처럼, 한 선교사는 한 어린 노비를 고귀하고 위대한 자로 변화시켰다. 그리고 아들로 삼았다.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라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갈 4:7) 요셉을 따라 유진은 마치 야곱과 같이 요셉이 믿었던 하나님의 이름을 간절하게 부른다. “내 아버지 요셉의 아버지이신 하나님.” 선교사이자 요셉의 아버지였던 요셉이 자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누군가에게 “신이 너와 함께 하기를” 축복하며, 누군가에게 도움의 손길을 베푼다. "그의 걸음은 언제나 옳은 쪽을 향해 걸었"고 결국 사랑하는 이를 위해 목숨을 버린다. 그의 죽음으로 살게 된 애신은 새로운 의병들을 양성하여 독립된 조선의 미래를 빚어나간다.
리처드 니버는 신앙인이란 모든 사건들에 현존하는 그분께 신뢰와 충성으로 응답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이때 신앙은 비단 하나님과 나만의 관계가 아니라 동료들도 포함되는 삼자 간의 인격적인 관계이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믿고 유진과의 관계 속에서 그 사랑에 응답한 요셉과 카일을 통해 유진은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을 통하여 그리스도 공동체 내부의 이야기와 관계를 맺으며, 관찰에서 참여로, 관찰된 역사에서 경험된 역사로 인도되었다.
나가며
하나님의 사랑을 통하여 구속의 은혜를 누리는 자유자로서,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본향에 두고 이 땅에 잠시 머물기 위하여 나아온 이방인으로서 신앙인의 자아는 홀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과 나, 그리고 너와의 관계 안에서 비로소 신앙이 이해될 수 있다. 십자가 죽음과 사랑, 그리고 부활을 믿고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는 우리들은 이 복음을 어떻게 경험하고 이해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백인들과 싸움을 하면서까지 “왜 나랑 친구하자고 한 거”냐는 유진의 질문에 카일이 “난 신을 믿으니까.”(22화)라고 답한다면, 신앙인으로서 나는 이웃과 어떠한 관계를 맺고, 하나님에 대한 나의 충성과 신뢰는 이웃에게 어떻게 향하고 있는가? 나와 내가 속한 교회 공동체의 시간과 역사는 동료들에게 어떻게 이해되는가? 드라마와 허구의 인물인 유진을 통해 교훈을 얻는다는 것이 좀 어색할 수도 있으나, 그럼에도 그리스도인이란 누구인가, 그리고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