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의 생활방식 삭고개 마을에서의 모든 생활은 현대적 문화, 문명의 혜택과는 동떨어진
전근대적인(좋은 말로 전통적인) 생활방식으로 살아 갈 수밖에 없었다.
전기, 전화가 들어오지 않았으니 호롱불로만 밤을 밝혀야했고 시장, 학교, 관공서가
멀리 동떨어져 있으니 면사무소 출생신고 한번 하는 것도 새벽 별보고 출발해야
저녁 어스름 녘에 돌아올 수 있었고,
청도읍에 서는 4일장(4일, 9일이 청도 장날이다)을 보기 위해서도
역시 새벽 별과 저녁 달 따라 오갈 수밖에 없는 조건이었다. 초등학교는 시오리 산아래 명대 마을에 가야 하는데 등교길은 내리막길이라
한시간 조금 넘는 시간이면 뛰어서 등교할 수 있으나 집에 돌아오는 길은
30~50CM의 좁고 험한 오르막 산길 두시간 정도 걸어야 했다.
4학년 정도 넘는 아이들은 그럭저럭 다닐 만 했으나
일곱 여덟살짜리 코흘리개 들에게는
가혹하다고 할 수 밖에 없는 조건이었다.
중학교부터는 유학하듯 먼 동네에서 방을 구해 자취생활을 하면서
학교를 다녔다. 지금 돌이켜보면 학생들 몸고생보다 부모님들 마음고생이
얼마였을까 가슴이 시리어 온다.
경운기도 올라올 수 없는 산속 마을이라서 순전히
소와 지게만을 가지고 농사를 지었다.
산아래 마을의 농사가 50년대 후반 무렵부터 리어카와 경운기라는
가히 혁명적인 농기구와 운반기구의 등장으로 수월해졌어도
삭고개에선 지게와 소에 의존했으며 탈곡기로 추수하고 건조기가
도입되었어도 도리깨라는 탈곡방식을 벗어날 수 없었다.
한마디로 설명해서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다고 생각해 보라,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살 수 밖에 없겠는가를......
그 생활이 서울에서 올림픽이 열리고 난 이후까지도 계속되었다.
차가 들어갈 수 없는 여건으로 의해 의료대책 역시 전무한 실정이었다. 가장 가까운 병원이 산넘어 삼십여리 떨어진 청도읍에 있던
반재돈 의원이 전부였었던 형편상 어지간히 아파도 세월이 약이거니
하고 참고 넘길 수밖에 없었고 조약이라고 불리우던 민간요법에
의존하는게 대부분이었었다.
필자의 기억으로 초등학교 1~2학년 때 지금은 돌아가신 고실 아지매께서
몹시 아프셨는데 며칠을 앓으시다 결국 고실 아재께서 아지매를 지게에 지고
재넘어 병원에 가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필자의 동생도 갓난아기 때 소아마비가 걸렸었는데 어머니께서 밤을 낮 삼아
업고 세시간씩 걸어 청도읍과 관하 쪽으로 치료를 다니셔서 결국은 낮게 만드셨다.
또 먼담 아재(용섭이 형님 부친)께서도 어느 해인가 농사일 하시다
낫으로 발목에 아주 큰 상처를 입으셨는데 (뼈가 다 보였었다) 지금 같으면
최소 50~60바늘 꿰매고 2~3주는 입원해야 할 정도였으나 빨간 약 아끼정끼 바르시고는
소죽 솥에 물을 붓지 않고 불을 때어 달아오른 무쇠솥의 열기에 상처 부위를 훈증으로
소독하는 것으로 치료를 대신하던 일도 있었다.
또 송자 누나네가 부야로 이사 간 후 이사 들어온 최 태봉 씨의 아주머니께서
둘째를 출산하시다 잘못되어 사산을 했었다. 산모의 목숨마저 위협받던 상황에서도 병원에 가지를 못하고 필자의 모친께서
천신만고 끝에 태반 안에서 죽은 아기를 꺼내고 산모의 목숨을 겨우 구해냈을 정도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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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필자가 누구신지? 내용이 너무 좋아서 향수에 젖어 한참이나 멍하네...그렇게 오랜 세월동안 용산이란 같은 동네이지만 역사는 오늘에야 처음 알았어니...좋은 글에 감사...재열아!!!
이곳은 친구 희섭 희태의 친 가가 있는곳이지 그리고 우리동기 중에도 삭고개란 마을 이름은 알지만 가보지도 어느곳에 있는지 보지도 못한 친구도 있을것 같아 올려 놓았으니 잘보길 바라고 친구여 글선이에 말과같이 여우도 그렇는데 고향을 생각하는 마음은 사람은 더 그렇겟지 ......사이트를 뒤지다 보니 눈에보여 여러우리 친구에게 고향을 생각하며 보면 좋을것 같아 알리고 싶어서 퍼왔단다 글쓴이는 나도 모러는 이 승렬이란분이 단다...재열이가
정말 좋은 내용을 올려주어 고맙다 음악도 죽여주는 구만 음악이 너무좋아서 죽겠다
친구야 고맙네 내 고향 삭고개를 소개해주어서 ,,,,,,,,,,,,,,,,,,,상남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