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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제국1 - 셀주크 투르크가 무너진 소아시아에서 오스만 투르크가 일어서다!
아시아의 돌궐 (突厥 türk) 제국이 당나라와의 오랜 전쟁에서 패해 서쪽으로 이동하며
중앙아시아인들과 결합해 탄생한게 튀르크 (Türk) 인으로 여겨지니 2년
전에 터키는 자기 나라 이름을 영어식인 터키 대신에 “튀르키예” 라고 변경했습니다.
현재 튀르크(투르크) 민족의 분포를 보면 튀르키예(터키) 7,400만, 우즈베키스탄 2,770만,
카자흐스탄 1,640만, 아제르바이잔 820만, 키르키스스탄 540만, 투르크메니스탄
510만에다가 러시아에 1,040만명등 일곱나라에 모두 1억 4천 720만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6세기에서 8세기에 중앙아시아와 동북아시아의 스텝지대 (몽골, 카자흐스탄 초원) 에서 활동한 튀르크계
민족과 그들이 세운 제국이 돌궐인데, 강력한 통합 국가를 세워 당대 중국사, 한국사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으니, 터키 부터 중앙아시아의 여러 스탄국 까지 튀르크 계통 민족 국가들에 영향을 주었다고 봅니다.
한때 동아시아의 최강국으로 군림한 탓에 주변 민족들을 깔보았는데, 중국의 사서인 신당서 북적(北狄)편을
보면 돌궐의 카간이 당나라 사신한테 "티베트는 개의 자손이고, 거란족과 해족은 우리의 노예인데,
왜 당나라는 그들 한테는 공주를 시집보내면서 우리한테는 안 보내는가?" 라고 화를 내는 내용이 있습니다.
고대 튀르크어로는 Kök Türük 이며 중국인들의 한자로는 突厥(돌궐, 튜주에)인데 현대 터키어로는
Göktürk Kağanlığı(괵튀르크 카안르으) 이며 돌궐 문자로 적힌 비문을 직역하자면 쾩 튀뤼크
또는 튀르크(Türk) 정도가 되니.... 즉, 돌궐인들이 쓰던 명칭은 쾩 튀뤼크(Kök Türük) 이고
돌궐은 튀르크 라는 발음의 가차이니 쾩 튀뤼크는 ‘뿌리의 튀르크’ 또는 '신성한 튀르크' 뜻입니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 (Ottoman Empire) 은 발칸반도와 아나톨리아(소아시아: 터키)를 중심으로 유럽
과 아시아 및 아프리카 3대륙에 걸쳐 광대한 영역을 지배했던 제국으로..... 서진해 2차례나
오스트리아 수도 빈을 포위해 함락직전 까지 갔으니 유럽 기독교 국가들을 전전긍긍케 만들었습니다.
1299년 아나톨리아(소아시아) 내륙에서 오스만 가지(عثمان غازى, Osmān Gāzi) 라는 베이(Bey, 부족장)
가 다스리던 작은 나라에서 시작하였으며..... 그후 정복 전쟁을 통해 룸 셀주크
(셀주크 투르크) 멸망후 난립했던 여러 소국들을 병합하며 성장해서 아나톨리아 일대를 장악합니다.
1453년에 2,200년을 이어온 로마 제국을 정복하며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장악해 수도로 삼고 이후에
사방으로 진출하는데 성공했으니 이후 북으로는 오스트리아와 폴란드, 서로는 모로코,
남으로는 에티오피아, 동으로는 이란과 접하는 전 세계적 영향력을 미치는 강력한 패권국가가 됩니다.
후대에 이르러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보수적 성격으로 인해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를 읽지 못한
데다가 무능한 황제까지 배출되어 쇠락하기 시작하였고, 특히 산업혁명으로 대표되는
과학기술의 전파가 늦어진 탓에 영토를 하나하나 잃으며 위세가 수축되다가
제1차 세계대전 시기 독일과 동맹국의 일원이 되는 악수를 두니 영국등 협상국에 패배합니다.
소수민족들이 독립하고, 그리스에 아나톨리아의 이즈미르까지 점령당하며 강대국들에게 의해
튀르크(오스만 투르크) 가 영국과 프랑스의 반식민지로, 그리스와 아르메니아 그리고
쿠르디스탄에 국토를 뺏기고 소국으로 전락할뻔 했지만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장군의
지휘 아래 1922년에 튀르크 민족의 국민 국가, 터키 공화국이 건국되니 오스만은 사라집니다.
오스만 제국 종교는 이슬람이지만, 밀레트 제도에 의해 다른 종교 및 그들의 종교법 또한
존중했기에, 이슬람을 국교라 하기에는 애매하니 실제로, 제국헌법에서 이슬람을
국교로 명시한 시기는 압뒬하미트 2세 시절에 미트하트 파샤가 주도한 '1876년 헌법
이 처음으로 제국의 존속기간(1299~1922)을 따져보면 623년 역사 중 46년밖에 안 됩니다.
오스만 제국이라는 이름은 제국의 왕가인 오스만 가문에서 따 온 것이며, 오스만 가문은 제국의
초대 군주인 오스만 가지(عثمان غازى, Osman Gazi) 의 이름에서 딴 것이니, 영어권에서는
중세 라틴어식 표현인 오토마누스 (Ottomanus) 에서 유래한 오토만(Ottoman) 이라고 합니다.
오늘날 한국에서는 오스만 제국, 오스만 투르크, 오스만 투르크 제국 등으로 부르며, 과거
에는 오스만 터키라고 하기도 했는데.... 터키어 발음으로는 투르크가 아니라
“튀르크”이기 때문에 오스만 튀르크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는데, 학술적으로는
오스만 투르크나 오스만 튀르크 다 잘못된 표현이며 오스만 제국이 가장 적절한 표현 입니다.
튀르크 (Türk) 라는 말은 오스만 제국 당대에도 있었지만 튀르크어를 모어로 하는 집단이 아니라,
척박한 아나톨리아 동부 지역에 거주하던 가난한 농민들이나 유목민 부류를
가리킬 때 쓰던 말이었으니 가난뱅이, 시골뜨기 처럼 좋지 않은 뉘앙스의 말이었기
때문에 남을 욕할때나 쓰였고 개인이나 집단 차원에서 튀르크를 자칭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그리스와 발칸 반도 지역의 기독교도 신민들도 투르크 라는 말을 썼는데, 이 경우에는 민족이나 혈통과
상관없이 이슬람교도를 가리키는 말이었으니, 그리스 혈통이고 그리스어를 쓰는 사람이라도
이슬람으로 개종했다면 그리스인들은 그 사람을 투르키 (Τούρκοι) 라고 불렀으니 오늘날에도
발칸 지역의 일부 국가들에는 무슬림을 싸잡아 투르크, 터키 놈이라고 부르는 관습이 남아 있습니다.
튀르크가 민족 정체성을 뜻하게 된 것은 오스만 제국 말기의 민족주의 물결에 따른 것으로
오스만 제국이 강성하던 시절에는 수많은 종족들을 지배했는데, 이 때의 제국은
신민들을 종교에 따라 나누어 다스렸을 뿐, 민족 정체성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국 말기가 되자 유럽에 불던 내셔널리즘 열풍의 영향을 받은 신민들이 민족 의식을 형성
하고 단일 민족 독립 국가 건설을 추구하기 시작했으니.... 400년간 지배를 받아오던
그리스를 시작으로 이런 독립운동들이 성공하면서 제국의 다민족 국가적 특성은 점점 약해집니다.
'수니파 이슬람을 믿고 오스만어 (터키어) 를 쓰는 아나톨리아 출신 사람들' 을 가리키기 위해
재발견된 말이 바로 튀르크이니... 이후 튀르크 민족주의가 제국 내에서 지지를 받게 되고,
거두인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오스만 제국을 멸망시키고 외세의 침공을 격퇴해서
튀르크 민족국가를 표방한 터키 공화국을 건국하면서 튀르크 민족이라는 개념이 완성 됩니다.
오스만제국이 공식적으로 신민들을 가리킬 때 쓴 말은 오스만인 (Osmanlı) 이었으니 이 말은 오스만
제국이 소규모 군장 국가이던 시절 오스만 가문의 추종자들을 의미하던 말인데, 제국이 거대
하게 성장하면서 중앙 정부의 관리나 군인 등 제국 지배층과 식자층을 주로 가르키는 말이 되었습니다.
바예지드 1세가 룸 셀주크에서 분열된 국가들을 정복하고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하는
과정에서 룸 술탄 (رُّومُ سلطان) 을, 메흐메트 2세가 동로마 제국을 정복하고 룸 카이사르
를 자칭하면서, 오스만 제국 전기에는 ‘로마국 (Memleket-i Rûm) 이라는 국호도 사용 되었습니다.
부유하고 인구밀도가 높아 오스만제국의 핵심 지역이던 동로마 고지 그리스 북부, 트라키아, 아나톨리아
서부 해안 지역의 지배층과 식자층에게 로마는 자신들의 문명, 문화를 의미하는 단어이기도 했으니
그들은 또 로마 지방(동로마 고지 古地 ) 에 산다는 의미에서 로마인 (Rûmi) 이라는 명칭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로마 계승 의식과 로마인이라는 표현은 바예지드 2세와 쉴레이만 1세의 치세를
거치면서 쇠퇴하고 점차 제국 내의 그리스 정교회 신민들을 가리키는 쪽으로
의미가 굳어지니.... 그리스 독립 이후에는 확실하게 후자로 의미가 고착화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아흐메트 1세나 메흐메트 4세는 종종 로마의 황제를 자칭했으니, 오스만인들은 사파비 제국을
비롯한 동쪽의 외국 (عجم, Acam) 과 대비되는 내지는 로마 (Rûmi) 였던 것이며 오스만 제국 바깥의
다른 튀르크계 국가나 민족들도 오스만 제국을 오스만, 아나톨리아, 룸 (Ruhm, Rum) 등으로 불렀습니다.
제국 말기에 튀르크 민족주의가 득세하기 전 까지 오스만인들은 튀르크 라는 정체성
이 없었고,서아시아와 중앙아시아의 튀르크계 국가/ 민족들도 범튀르크
주의와 투란주의가 유입되기 전까지 오스만인들을 튀르크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유럽인들은 오스만 제국과 튀르크 민족의 이런 상세한 사정에 대해 잘 몰랐고, 오스만 제국
사람들을 전부 싸잡아 '투르크인' 이라고 여겼으니 오스만 제국 당대에도 정식 국호인 오스만
을 잘 쓰지 않고 그냥 투르크 제국 (Imperium Turcicum), 터키(Turchia) 등을 훨씬 많이 썼습니다.
오스만 투르크 란 표현은 이런 역사적 배경을 모르는 사람들이 기존 관습적 표현인 투르크에 원래
국호인 오스만을 덧붙여 만든 이름으로 오스만 제국이 멸망하기 이전엔 그냥 투르크나
터키라고 불렀는데, 제국이 멸망하고 터키공화국이 들어서자 오늘날 터키(터키 공화국)
가 아닌 옛날 터키(오스만 제국) 를 가리키기 위해서 투르크, 터키 앞에 오스만을 덧붙인 것입니다.
21세기 들어 용어를 엄밀하게 따지는 학술용어로서 이제 거의 쓰이지 않지만, 일반인
들의 글에서는 한국이든 서구권이든 오래된 습관이 잘 바뀌지 않아서
아직 까지 오스만 투르크 (Ottoman Turks) 라는 표현이 매우 널리 쓰이고 있습니다.
오스만 투르크가 세계적인 대 제국으로 성장하게 된 계기는... 1453년에 2천년을 이어
내려온 동로마 비잔틴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포위 공격해 함락시킨
사건인데 이때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화약” 으로 운용된 거대한 대포 였습니다.
1453년 오스만 투르크의 술탄 메메트 2세는 1453년 콘스탄티노플 공략 작전을 시작했으니...
콘스탄티노플을 수비하는 7천명의 비잔틴 제국 군대에 대해 10만명의 병력을 동원
해 포위하니..... 오스만군은 기병대와 보병대에 포병 · 공병 · 해병등 전문화 되어 있었습니다.
헝가리인 우르반이 제작한 거대한 대포로 육중한 콘스탄티노플의 삼중 성벽을 파괴하는데....
성벽 가운데 취약한 곳을 골라 6주 동안 쉬지않고 집중 포격을 가했는데 대포는
발사후 식혀야 하기 때문에..... 하루에 7회 이상 발사하지 못하므로 시간은 오래 걸립니다.
비잔틴 수도 콘스탄티노플 인구는 4만으로 줄어든지라 정규군 5천에 제노바인 주스티아니의
유럽인 용병 2천을 합치고 시민을 징집해 1만의 군세로 넓은 해자를 파고 장벽을
쌓았으며 장벽 뒤에는 외성벽 을 두르고 원형탑 을 세우웠으며.... 또 해자 를 깊이 팠습니다.
그런 다음 내성벽 을 쌓고 사각탑 을 세웠으니 40미터마다 10~ 20미터 높이의 방어탑이
400개에 달했는데 톱하네산을 넘어온 오스만 투르크의 배 들이 금각만 성벽에 이르고
내륙 성벽에는 8미터 짜리 거포에서 600kg 짜리 돌포탄 이 6주간 성벽을 때리니 무느집니다.
5월 29일 메메드 2세가 총공격을 명령해 터키 비정규군 5만명이 방위망을 뒤흔들어 놓자
그 뒤를 이어 정규군 5만명도 모자라 예니체리군 1만 5천도 함께 돌진해 들어오는지라
비잔틴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 황제 는 적진에 뛰어들어 전사하니 멸망하는 것이라?
콘스탄티노플 성벽을 함락한건 화약으로 작동되는 대포이니..... ‘오늘날의 전쟁 있게 한 화력무기의
모든 것’ 이라는 동아일보 조종엽 기자가 폴 록하트가 지은 “화력” 이란 책을 소개하는 내용입니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의 해전을 다룬 영상 콘텐츠에서, 대포에서 발사된 포탄이 적선으로
날아간 뒤 다시 폭발하는 장면은 사실은 거짓이다. 당시 포탄은 대장군전 (大將軍箭·나무와
철로 만든 천자총통용 화살) 을 비롯한 고체탄이었다. 탄의 운동에너지로 적선을 파괴했던 것.
서양에서도 고체탄은 성벽을 부수는 공성전과 목선을 격파하는 해상전에서 필수로 쓰였다.
14세기 공성포 (攻城砲) 의 등장 당시 부터 ‘날아간 뒤 폭발하는’ 포탄의 가능성이
제기됐지만 이 같은 폭발탄이 서양에서 널리 보급된 것은 19세기 초가 되어서 이다.
화약을 넣은 포탄이 대포 안에서 찌그러지거나 폭발하는 위험을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발사된뒤 목표물에서 내부 화약이 폭발하면 철탄들이 적에게 퍼부어 지도록 설계된 폭발탄이
나중에 발명돼 전장 (戰場) 에서 빠르게채택됐다. 이 폭발탄은 발명자인 영국군 중위의 이름
을 따 ‘슈라프넬’ 로 불렸다. 전쟁사 전문가인 미국 라이트주립대 역사학과 교수가 공성포
의 등장으로 부터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함과 항공기의 활약까지 화기(火器) 의 역사를 다뤘다.
화약은 금속활자, 종이, 나침반과 함께 중국이 발명해 서양에 전해진 것인데..... 14세기 들어
서양에서 나타난 휴대용 화기는 ‘손 대포(hand cannon)’ 로 불렸다. 크기만 줄었을 뿐
작동 방식은 대포와 같았다. 발사 자세가 어색하고 총열이 무거워 널리 보급되지는 않았다.
서구 역사상 최초로 제식화된 보병 화기는 15세기 등장한 아쿼버스와 머스킷 총이다.
이 총들은 총가 (銃架·총 받침대) 가 정교해졌고, 개머리판이 등장해 조준이
비교적 정확해졌으며, 화승(火繩) 을 사용해 점화와 동시에 목표물을 겨냥할 수 있었다.
오늘날의 총기와 비교하면 살상력과 정확도가 턱없이 떨어지지만 밀집 대형과 근거리 전투가
기본이던 당시에는 매우 효과적이었다. 이 같은 총기를 운용하기 위해 군대는 상당한
수준의 조직과 협력, 전문성을 발전시켰다. 화약이 서양 최초의 현대식 육군을 창조한 셈이다.
충실한 내용이 밀리터리 마니아들의 눈길을 끌 만하다. 저자는 “전쟁이
오늘날의 국가를 만들었다면, 오늘날 의 전쟁을 만든 것은 화기
였다” 고 강조했다. 원제 ‘FIREPOWER: How Weapons Shaped Warfa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