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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 全琫準
새야 새야 파랑새야 / 전주, 고부 녹두새야 / 어서 바삐 날아가라 / 댓잎 솔잎 다르다고 / 봄철인 줄 알지 마라 / 백설이 휘날리면 먹을 것 없다 / 새야 녹두새야 / 웃녁 새야 아랫녁 새야 / 전주, 고부 녹두새야 / 함박 쪽박 딱딱 후여 / 새야 새야 녹두새야 / 녹두밭에 앉지마라 / 녹두꽃이 떨어지면 / 청포장수 울고 간다.
이 노래가 어떻게 해서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밝혀진 바는 없지만 몇 가지 설이 있다. 먼저 여기서 파랑새는 팔왕새로, 팔왕은 ' 八 ' 과 ' 王 ' 으로 이것은 전(全)의 파자이다. 즉 파랑새는 전봉준을 의미하고, 청포장수는 녹두장군(綠豆將軍) 전봉준을 지칭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유력한 견해는, 동학농민운동(1894년) 때에 일본군(日本軍)이 푸른색 군복을 입고 있어 파랑새는 일본군을 뜻하며 ( 또는 淸나라를 상징한다는 설도 있음 ), 전봉준이 녹두장군(綠豆將軍)이라 불리었던 점을 보아 녹두밭은 전봉준을 상징하고, 청포장수는 백성들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어느 견해이건 동학농민운동의 주동자인 녹두장군 전봉준(全琫準)의 실패를 한탄하고, 백성들의 실망을 우의적(愚意的)으로 나타낸 노래이다. 이 노래는 우리나라 전역에 퍼져있던 전래 동요이며, 지방마다 음이나 가락이 조금씩 다르다. 그리고 이 노래는 아이들에게 널리 불리는 동요이기도 한데, 아이들의 입을 빌린 어른들의 동요라고도 볼 수 있다.
1894년 1월 10일 저녁, 전라도 정읍(井邑) 말목장터에서 울리는 때아닌 풍물소리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수천(數千)을 헤아리는 군중들이 모이자 그들 앞에 5척(尺) 단신(短身)의 사나이 하나가 섰다. 키는 작았지만, 담력은 산(山)같이 컸고 눈은 샛별같이 빛났다던 전봉준(全琫準)이다.
우리가 피땀 흘려 지은 곡식이 우리 손에 들어오지않고 저 악랄한 관료들 손에 들어간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중앙의 대소(大小) 신료들은 자기 잇속 채우기에만 정신이 빠져 있습니다. 여기에 조병갑(趙秉甲)마저 다시 부임해와 어제의 행패를 오늘 또 하고자 합니다. 이 기회를 놓지면 영원히 후회할 것입니다. 부디 저 탐관오리들을 물리치고 이 나라를 바로잡는 대열에 앞장섭시다.
듣고 있더 군중들은 한(恨) 맺힌 함성을 토해냈고, 전봉준은 이들을 두 패로 나누어 고부(古阜) 관아로 향했다. 전봉준은 농민대중의 밑으로부터의 힘을 결집하여 봉건제도를 타파하고, 동시에 우리나라에 침투해 들어오는 일본의 자본주의적 진출을 저지함으로써 국가의 근대화를 이룩하려 하였다. 비록 그의 변혁의지는 일본의 군사력 앞에서 좌절 당하고 말았지만, 그가 영도한 '갑오농민전쟁'은 조선의 봉건제도가 종말에 이르렀음을 실증하였고, 민중을 반침략, 반봉건의 방향으로 각성시킴으로서, 이후의 사회변혁(社會變革)운동과 민족해방(民族解放)운동의 진전에 원동력이 되었다.
전봉준(1854년 ~ 1895년 3월 30일)은 1855년 아버지 전창혁(全彰革 .. 일명 전승록)과 어머니 '언양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전봉준의 집안은 고조부(高祖父) 때만 해도 벼슬을 하였던 양반(兩班) 가문이었으나, 이후 관직에 진출하지 못하고 경제적으로 몰락해 갔던 것으로 보인다. 고창읍(高敞邑) 당촌마을에서 유년생활을 보낸 '전봉준'은 가세(家勢)가 기울어짐에 따라 순창, 임실, 고부 등지로 떠돌아다니며 살았다. 그러다 서른살 즈음에 고부(古阜)마을로 들어왔다.
몰락한 양반이었으나 아버지 '전창혁'은 고부군 향교(鄕校)의 장의(掌議)를 지낸 적이 있는 지역의 명사이자 성리학자이었다. 그러나 그의 집안은 평소 가난한 생활을 하였으며, 약을 팔아 생계를 이어갔다. 천안 전씨 족보에 의하면 '전봉준'의 족보상 이름은 영준(永準)이요, 봉준(琫準)은 어릴 적 이름이며, 녹두(綠豆)는 그 체구가 작아서 불리워진 별호라고 한다.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한 자료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기억력이 총명하였는데, 5세 때에 한문을 수학하였고, 13세 때에는 < 백구시. 白鷗詩>라는 한시를 짓기도 하였다.
스스로 하얀 모래밭에 놀매 그 뜻이 한가롭고 / 흰 날개, 자는 다리는 홀로이 淸秋롭다 / 소소한 찬 비 내릴 때 꿈 속에 잠기고 / 고기잡이 돌아간 후에는 언덕에 오른다 / 허다한 水石은 처음 보는 것이 아닌데 / 얼마나 풍상(風霜)을 겪었던가
전라북도 고창읍 당춘마을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전봉준'은 가세가 몰락함에 따라 순창, 임실, 고부 등지로 떠돌아다니며 살았다. 그러다 30살 즈음에 고부마을로 돌아왔다. 그리고 서당을 열어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한약방을 차려 한의사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그 외에 풍수도 보고, 사람들의 길흉사(吉凶事)에 날을 잡아 주기도 했으며, 편지를 대필(代筆)해 주었다. 그는 다섯 가솔(家率)을 거느린 가장(家長)으로 " 논이 서 마지기에 불과하였으며, 아침에는 밥 먹고 저녘에는 죽을 먹는 " 빈농의 처지이었다. 그는 조상의 묘자리를 봐주는 지관(地官)에게 " 크게 되지 않으면 차라리 멸족(滅族)되는 것만 못하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아버지의 죽음
1893년 그의 아버지 '전창혁(全彰赫)'은 당시 고부 향교의 장의(掌議)를 맡을 만큼 배움이 있었으나,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는 훗날 군수 조병갑의 탐학을 못이긴 백성들의 대표로 관가에 소장(訴狀)을 냈다가 모질게 두들겨 맞고 장독(杖毒)으로 한달만에 세상을 뜬다. 다른 이야기로는 조병갑의 모친상 때 부조금 2,000냥을 안거둬 줬다는 이유로 모진 곤장을 맞게 되어, 몸이 허약해지더니 이내 사망에 이르게 되었는데, 이 일이 전봉준의 동학농민운동과 사회개혁에 대한 생각에도 영향을 주었음은 확실한 듯하다.
전봉준, 東學에 입교하다
전봉준은 30대 전후에 동학에 몸을 담고, 이후 고부지방의 동학접주(東學接主)가 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그러나 당시 최시형(崔時亨)이 그를 만나 직접 임명하지는 않았고, 또한 최시형이 초기에 전봉준의 봉기에 반감(反感)을 나타내었기 때문에 반론이 있다.
당시 조선사회는 극히 어수선하였는데, 개항(開港)을 계기로 외세는 물밀듯이 밀려들어왔고, 종말론(終末論) 등 유언비어 등이 나돌고 탐관오리들의 착취가 극에 달하면서 위기적 상황은 날이 갈수록 가중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전봉준' 역시 나라의 장래에 대하여 고민하였으며, 그러한 고민의 과정에서 1888년 무렵 동학의 손화중(孫和中)과 접촉하였다.1890년 무렵 전봉준 자신의 표현에 의하면 " 그의 용무지지(用武之地)로서 동학 교문이 있음을 발견하고, 서장옥(徐璋玉)의 막료인 황하일(黃河一)의 소개로 동학에 입교하였다.
뒷날 동학운동의 실패로 관군에 체포된 뒤 1895년 일본 영사관에서 있었던 제2차 재판에서 전봉준은 " 동학(東學)은 수심(守心)하여 충효(忠孝)로써 근본을 삼고 보국안민(輔國安民)하려는 것이다. 동학은 수심경천(守心敬天)의 道이었다. 때문에 나는 동학을 극히 좋아했다 .. " 고 하여 스스로 동학에 입교하게된 경위를 밝혔다.
전봉준 고택
녹두장군 전봉준의 유물로 유일(唯一)하게 남아 있는 이 집은 18984년 고부(古阜)농민의 봉기 이후 안핵사 이용태(李容泰)에 의해 불타 버렸으나, 다시 보수하여 사적 제293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오늘날의 지명은 전북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 조소마을이지만, 갑오동학농민혁명 당시에는 고부군 궁동면이었다. 이 옛집은 고종 15년(1878)에 세워졌다. 1974년 이 집을 해체 보수할 때 발견된 상량문(上樑文)에서 확인되었다.
죽창문의 방 3개와 부엌이 딸린 본채가 있고, 마당가에는 변소와 헛간으로 쓰이는 아랫채가 따로 있는 전형적인 우리나라의 시골집으로, 각지에서 떠덜이 생활을 했던 전봉준이 고부농민봉기가 있기 5~6년 전에 이사와서 서당을 차리고 훈장생활을 하다 고부(古阜) 농민운동을 일으킬 떄까지 거주하였던 집이다.
흥선대원군과의 만남
전봉준은 30대에 서울에 가서 흥선대원군 이하응(興宣大院君 李昰應)을 만났다고 한다. 모두 무엇인가를 부탁하러 오는 사람들뿐인데, 아무 말도 없이 앉아 있는 전봉준에게 " 무슨 부탁이 있어서 왔느냐 "고 물었고, 이에 전봉준은 " 오직 저는 나라를 위할 뿐입니다 "고 답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이 비범한 청년과 대화를 나누던 중에 강(江)이라는 글자를 써주었다. " 네가 일어나서 한강까지만 와라. 그러면 내가 호응해 주겠다 "는 뜻이었다. 그러나 전봉준의 농민군은 한강까지 진격하지도 못하였고, 일본군에 잡혀서도 흥선대원군에 관한 이야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민중(民衆)은 역사(歷史)의 주체(主體)이자 객체(客體)라는 이중성(二重性)을 지니고 있어 왔다. 동학농민혁명은 그간 착취의 대상이었던 조선의 민중이 역사의 주체(主體)임을 자각하고 일어선 사건이다. 민중은 동학의 외피로 조직화되어 무능하고 부패한 지배층과 외세에 맞서 싸웠다. 동학은 비록 실패하였지만, 백범 김구(白凡 金九)가 여기에서 나온 것처럼 여러 민족운동(民族運動)의 시원(始原)이 되었다.
망국군주 高宗과 동학 농민혁명
경상도 영천의 역술가 정환덕(鄭煥悳. 1857~1944)는 시종으로 고종을 가까이에서 모셨다. 그는 남가몽(南柯夢)에서 고종(高宗)이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이후 불면증에 시달려 낮과 밤이 바뀐 생활을 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매천 황현(梅泉 黃玹)은 매천야록(梅泉野錄)에서 " 고종(高宗)은 놀기를 좋아하여 흥선대원군이 물러나고, 친정(親政) 이후 매일 밤이 되면 잔치를 베풀고 음란한 생활을 하였다 "며 밤낮이 바뀐 이유가 노는 습성 때문이라고 달리 전한다. 그리고 이어서 고종 부부(夫婦)의 야간 연회(夜間 宴會)에 대한 승지 이최승(李最承)의 목격담을 전해준다.
밤중에 풍악소리가 들려 가보니 양전(兩殿. 고종과 민비)이 평복차림으로 전각 위에 앉아 있고, 그 아래 수십 명이 놀면서 "오는 길 가는 길에 만난 정이 깊이 들어 죽으면 죽었지 헤어지지 못한다" 는 음란(淫亂)한 노래를 부르는데, 명성황후는 무릎을 치며 "그렇지"하고 좋아했다는 것이다. 황현은 계속해서 고종을 말하고 있다.
양전(兩殿)은 하루에 천금(千金)을 소모하여... 친정(親政) 1년도 안되어 대원군이 10년 동안 쌓아 둔 저축미가 다 동이 났다. 이로부터 매관매직의 폐단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명성황후는 수령자리를 팔기로 마음 먹고 민규호(閔奎鎬)에게 그 정가(定價)를 적어 올리도록 하였다...고 전한다. 돈 주고 벼슬을 산 자들은 착취에 열심일 수 밖에 없었고, 매천 황현(梅泉 黃玹)은 ' 백성들은 더욱 난리가 일어나기를 바라서 한 사람이 분개하여 소리를 지르면 따르는 사람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고 전하고 있다.
고종 즉위년 (1863년) 12월 선전관 정운귀(鄭雲龜)가 조령(鳥嶺)에서 경주까지 ... 어느 하루도 동학(東學)에 대한 이야기가 귀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없었으며, 주막집 여인들과 산골 아이들까지 그 글을 외우지 못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고종실록. 즉위년 12월20일) 이라고 보고한 대로 삼남(삼나)지방에 동학(東學)이 급속도로 전파되고 있었다.
동학교주 최제우(崔濟愚)는 고종 1년(1864) 체포된 후, 처음 그 공부를 시작할 때 몸이 떨리면서 귀신을 접했다 ..고 말했으나, 백성들은 종교적 체험보다는 사회변혁을 바라고 동학에 입도(入道)하였다. 그리고 최제우는 동경대전(東經大典)에서 " 내 도(道)는 이 땅에서 받았으며, 이 땅에서 펼 것이니 어찌 서학(西學)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라고 말하여다. 하지만 고종(高宗)은 그를 " 서양의 술법(西洋之術)"을 답습한다 ..는 정반대의 명목으로 그의 목을 베었다.
최제우가 죽고, 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은 ' 사람은 본래 하늘이니 사람 섬기기를 하늘 섬기 듯 하라人是天 事人如天..' 라고 하면서 자신은 비록 부인이나 어린아이라도 스승으로 모신다고 말해 사대부 지배체제를 부인하였다. 백성들은 더 이상 무능하고 부패한 정치체제를 숙명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1892년 (고종 29)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전개한 " 교조신원(伸寃)운동 "은 단순한 종교의 자유 획득 운동이 아니었다.
그해 12월의 전라도 삼례 집회와 이듬해 (1893년) 2월의 광화문 복합상소에서는 교조신원을 요구하였지만, 그해 3월의 충청도 보은(報恩) 집회에서는 교조신원 요구가 사라지고 대신 왜양(倭洋)을 소파(掃破 .. 깨끗이 부숨)하여 大義를 이루고자 한다..고 천명하였다. 백성들은 자신들이 역사의 주인이라고 각성하였으나, 당시 실권자 조대비(趙大妃)의 인척인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이 불효(不孝), 불목(不睦) 등의 명목으로 재물을 빼앗고 만석보(萬石洑) 수세(水稅)를 강제로 징수한 것처럼 지배층에게 백성들은 여전히 착취의 대상이었다.
전봉준, 흥선대원군의 食客 노릇
1890년 전봉준은 흥선대원군의 운현궁(雲峴宮)을 찾아가 식객(食客)노릇을 한다. 이때는 전봉준이 이미 동학에 입교한 후이었다. 이후 1890년 초반 전봉준은 운현궁에서 흥선대원군의 문객(門客)생활을 하였다. 1892년 초, 전봉준은 운현궁 문객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고향인 전라북도 고부군으로 내려와 농사를 지으며, 동리 서당의 훈장으로 아이들을 가르쳤다.
한편 그가 동학교도가 아니라는 의혹이 동학농민운동 당시부터 동학군 내부 사이에 돌고 있었다. 당시 '전봉준'은 은밀히 세(勢)를 불리고 있었으며, 동학농민운동 당시 은거(隱居) 중인 흥선대원군과도 접촉하기도 한다. 이는 그가 한때 1890년 초 잠시 대원군의 식객으로 있었던 인연 때문이었다. 이리하여 동학 내부에서는 그의 정체(正體)나 목적(目的)을 의심하는 교도들이 나타났다. 그러나 1892년 무렵에 교주 최시형(崔時亨)에 의하여 고부지방의 접주(接主)로 임명되므로써 그의 정체에 대한 의혹과 의심은 일단 불문에 부쳐지게 되었다.
고부군수 조병갑 古阜郡守 趙秉甲
조병갑(趙秉甲)은 여러 주군(州郡)의 수령을 거쳐 1892년 (고종 29) 4월 고부군수가 되었다. 조병갑의 아버지는 전라도 정읍시 태인군수 조규순(趙奎淳)이고 충청도 관찰사 조병식(趙秉式)과 사촌간이다. 또한 영의정 조두순(趙斗淳)의 서질(庶姪)로서 남다른 관료적 배경을 갖고 있었다.
그는 고부군수로 부임한 이래, 갖가지 명목으로 탐학비행(貪虐非行)을 저질렀다. 농민에게 면세를 약속하고 황무지의 개간을 허가해 주고는 , 추수기에 강제로 세금을 징수하였고, 부민(富民)을 이유없이 잡아들여 불효, 불목, 음행, 잡기 (不孝, 不睦, 淫行, 雜技) 등의 죄명을 씌워 그들의 재물 2만여 냥을 빼앗았으며, 대동미를 쌀 대신에 돈으로 거두고 그 돈으로 직이 나쁜 쌀을 사서 중앙에 상납하고 차액을 착복하였다.
또한 세곡(歲穀)을 운송하는 전운소(轉運所)에서 추가로 쌀을 강제로 징수하여 부족미(不足米) 명목으로 더 거두었고, 묵은 땅을 개간하여 면세가 되어야 할 땅에서 도조(賭租)와 시초(柴草)를 거두었으며, 태인현감을 지낸 아버지의 공덕비를 세운다고 1,000여 냥을 거두었다고 한다. 이뿐 아니다. 특히 1893년 초에는 고부읍 북쪽에 흐르는 동진강(東津江)에 축조되어 고부군과 태인현의 농민들이 수리(水利)의 혜택을 받고 있던 만석보(萬石洑)가 파손되어 있지 않음에도 농민들을 동원하여 구보(舊洑) 밑에 신보(新洑)를 쌓게 하고, 그해 가을에 신보(新洑) 이용에 따른 수세(水稅)를 1마지기에 상등 논은 쌀 2말, 하등 논은 쌀 1말씩 농민들로부터 거두어 700여 석을 사취하였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당시에도 호남지역은 비옥(肥玉)한 농토를 가지고 있었고, 서해안(西海岸)의 풍부한 해산물까지 얻을 수 있는 곳이었다. 문제는 당시의 부패한 지방관리들이 이땅을 한 밑천 챙기는 수단으로 여겼다는 데 있었다. 세도가(勢道家) '풍양조씨(豊壤趙氏)'의 척족(戚族)이었던 조병갑(趙秉甲)도 그런 인물이었다.
조병갑이 고부군수(古阜君守)로 부임해 온 뒤 온갖 노략질을 벌이자 참다못한 군민(郡民)들은 관아(官衙)로 달려가 소장(訴狀)을 올리고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하였지만, 조병갑은 이들을 난민(亂民)으로 몰아 엄한 형벌(刑罰)로 다스렸다.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全彰赫)도 이 일에 앞장 섰다가 체포되어 매 맞아 죽었다.
전봉준 .. 행동에 나서다
조병갑(趙秉甲)의 이러한 횡포에 전봉준은 농민대표와 함께 연명 상소를 작성하여 고부군수 조병갑에게 보내 그 시정을 진정하였으나 거부 당하였다. 전봉준은 상소문을 작성할 때 소두(小頭)의 한 사람이었는데, 군수 조병갑은 전봉준 등 상소에 서명한 군민 대표들을 잡아다가 공초를 하고 곤장을 쳐서 내 쫓았다. 1893년 2월 전봉준은 한성부로 올라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을 방문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잠시 식객(食客)으로 있었던 전봉준을 후하게 대접하였다. 이때 전봉준은 흥선대원군에게 " 나의 뜻은 나라와 백성을 위하여 한 번 죽고자 하는 바"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로부터 세간에는 전봉준과 대원군 사이에 무슨 밀약(密約)이 있었을 것이라는 말이 돌았다.
흥선대원군과 면담을 마친 전봉준은 다시 길을 떠나 고부(古阜)로 내려왔다. 그리고 동지들을 규합하기 시작하였다. 전봉준은 강연을 다니며 인간이 평등(平等)하다는 것과 탐관오리를 처벌하고 새로운 세상이 일어설 것이라는 것 그리고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자신들을 일부 도와줄 것을 약속하였다고 말했다. 전봉준을 사람들을 모았고, 그가 흥선대원군과도 연결되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수많은 청년들이 구름떼 처럼 몰려 들었다.
1893년 3월11일부터 시작되었던 동학(東學)의 보은취회(報恩聚會)에 참가하여 그 집회를 반봉건(反封建), 반부패(反腐敗), 반침략(反侵掠)의 정치적 운동으로 확대시키기 위해 보은(報恩)으로 향했으나, 보은(報恩) 집회가 4월3일 해산됨에 따라 뜻을 이루지 못했다. 보은군(報恩郡)은 당시 동학의 교조(敎祖)인 최시형(崔時亨)이 종종 머무르던 곳이었다.
흥선대원군과 연대
그러나 동학도의 일부는 그보다 앞선 2월 경 한성부로 올라가 경복궁 앞에서 복합 상소를 올렸다. 2월11일부터 2월13일까지 계속된 상소(上疏)의 내용은 폐정 개혁과 부패 관리의 처벌 등 이었다. 전봉준은 이들의 상소가 성공하면 호응하기로 계획하였다. 그러나 이들과 호응하기로 한 보은집회(報恩集會)가 취소되면서 한성부에 올라간 시위대도 해산되었다. 1만 여 명 이상의 많은 인파와 대규모의 시위는 한성부의 백성과 조정의 관료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고, 전봉준이 떠난 직후 이 시위를 접한 흥선대원군은 1893년 2월의 동학도들과 농민들의 집회를 주목하고 있었다.
이들의 시위를 주목하게된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손자(孫子) 이준용(李埈鎔)을 왕으로 추대하려고 하였다. " 정교 "는 이 시위가 대원군이 시킨 일이며, 이준용을 왕으로 추대하려고 했으나 실패하였다고 적고 있다. 동학의 교주 최시형(崔時亨)은 전봉준등이 흥선대원군과 모의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결국 대원군에 이용당하리라는 것이 최시형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전봉준은 이 뒤로도 동학농민군에 대한 지원을 약속하는 흥선대원군의 말을 신뢰하고 그와의 연대를 계속하게 된다.
1893년 겨울 농민들은 정부에 부패관리의 처벌을 상소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 때에 동학교도들 역시 교조 최제우의 신원(伸寃)을 상소했지만 역시 거부되었다. 1893년 12월부터 이듬해 1월에 올린 동학도 및 농민군의 상소(上疏) 중, 최시형의 탄핵 상소에 의하여 경상도 관찰사 조병식과 윤영기 등이 파직되기는 했으나, 이후 고관들은 농민들의 상소문을 검열하였고, 사태는 나아기지는 않았다. 도리어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은 전봉준과 그 일가를 잡아들이고, 전봉준의 부친에게 형문을 가하여 죽게 하였다.
제1차 농민봉기
농민을 중심으로 한 고부군민(古阜郡民)은 학정(虐政)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여 동학의 고부 접주(接主)로 있는 전봉준을 선두로 마침내 울분을 터트렸다. 1894년 1월 10일 새벽, 1000여 명의 동학교도와 농민들은 흰 수건을 머리에 동여매고 몽둥이와 죽창을 들고 " 전운사(轉運使)를 페지하라 ! 균전사(均田使)를 없애라 ! 타국 상인의 미곡 매점과 밀수출을 막아라 ! 외국 상인이 내륙 각지로 횡행하는것을 막아라 ! 각 포구의 오염선세(漁鹽船稅)를 혁파하라 ! 수세 기타 잡세를 없애라 ! 탐관오리를 제거하라 ! 각 읍의 수령, 이서(吏胥)들의 학정과 협잡을 근절시키라 ! "는 등의 폐정개혁(폐정개혁) 조목을 내걸고 노도(怒濤)와 같은 형세로 고부관아에 밀어닥쳤다. 이를 고부 봉기(古阜蜂起) 또는 제1차 봉기라고 한다. 이들은 무기를 탈취하고 불법으로 징수한 세곡을 모두 빈민(貧民)에게 나누어 주었다.
한편 전라감사로부터 '고부민란'에 관한 보고를 받은 조정에서는, 고부군수 조병갑(조병갑)을 체포 압송하게 하는 한편, 용안현감(龍安縣監) 박원명(朴源明)을 후임으로 부임케 하고, 이어 장흥부사 이용태(李容泰)를 안핵사(按劾使)로 파견하였다. 신임군수 박원명(朴源明)은 도내 형편을 잘 알고 있는 광주사람으로, 그의 적절한 조처에 의하여 농민들은 자진 해산하였다.
그러나 후에 부임한 '안핵사 이용태 (按劾使 李容泰) '는 민란(民亂)의 책임을 모두 동학교도와 농민에게 전가시켜, 농민봉기의 주모자를 수색하는 한편 동학교도의 명단을 만들어 이들을 체포하려고 하였다. 전봉준은 피신하여 정세를 관망하다가 이 기회에 고질의 뿌리를 뽑아야 하겠다고 판단, 인근의 동학접주들에게 사발통문을 돌려 보국안민(輔國安民)과 교조의 신원(伸寃)을 위하여 궐기할 것을 호소하였다.
사발통문 .. 아래 사진
사발통문 (위 사진) ... 1893년 11월 고부군 서부면 죽산리 (현, 정읍시 고부면 신중리 주산마을), 송두호의 집에서 전봉준 등 20여 명이 모여 고부농민항쟁(古阜農民抗爭)을 계획하고, 그 결의(決議) 내용과 아울러 사발을 엎어 놓은 모양으로 서명하여 각 리의 집강들에게 돌렸다 하여 일명 '사발통문'이라고 한다.
본문과 뒷부분이 떨어져 나가 그 전부를 밝힐 수는 없지만, 1968년 12월 세상에 공개되면서, 고부농민항쟁이 우발적 감정의 폭발이 아니라, 철저한 혁명적 거사 계획에서 치밀하게 진행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러나 글씨의 필체가 한 사람에 의해 씌여진 점과 제작에 사용된 종이와 먹이 비교적 후대(後代)의 것으로 감정되어진 점 등을 미루어 보아 원본(原本)이 아닌 사본(寫本)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사발통문을 돌리고 마침내 1894년 3월 하순, 태인(泰仁), 무장(茂長), 금구(金構), 부안(扶安), 고창(高敞), 흥덕(興德) 등의 접주들이 각기 병력을 이끌고 전봉준이 먼저 점령하고 있던 백산(白山)으로 모여드니, 그 수가 1만명에 가까웠다고 한다. 전봉준은 대오를 정비한 다음 거사의 대의(大義)를 선포하였다. 곧 ... 1. 사람을 죽이지 말고, 재물을 손상시키지 말 것. 2. 충효를 다하여 제세안민(濟世安民)할 것. 3. 왜양(倭洋)을 몰아내고 성도(聖道 .. 성군의 길)를 밝힐 것. 4. 병(兵)을 몰아 서울에 들어가 권귀(權貴)를 진멸(盡滅) 시킬 것 등의 4대 강령이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관리들의 탐학에 시달리던 인근 각처의 동학군과 농민들은 새로운 희망을 품고 앞을 다투어 백산(白山)으로 모여들었다. 태인의 동학군은 3월29일 자발적으로 관아를 습격하여 관속(官屬)들을 응징하고 무기를 탈취하니 혁명군의 기세는 한층 더 충천하였다.
동학농민운동 포고문
포고문 전문
세상에서 사람을 가장 귀하게 여김은 인륜(人倫)이 있기 때문이며, 군신(君臣과 부자(父子)는 가장 큰 인륜으로 꼽고 있다. 임금이 어질고 신하가 충직하며 아비가 자애롭고, 아들이 효도를 한 뒤에야 국가를 이루어 끝없는 복록을 불러오게 된다.
지금 우리 임금은 어질고 효성스럽고 자애로우며 지혜롭고 총명하다. 현량하고 정직한 신하가 있어서 잘 보좌해 다스린다면 예전 훌륭한 임금들의 교화와 치적을 날을 꼽아 기다려도 바랄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신하가 된 자들은 나라에 보답하려는 생각을 아니하고 한갓 작록과 지위를 도둑질하여 임금의 총명을 가리고 아부를 일삼아 충성스러운 선비의 간언을 요사스런 말이라 하고 정직한 사람들을 비도(匪徒)라고 한다. 그리하여 안으로는 나라를 돕는 인재가 없고 바깥으로는 백성을 갈취하는 벼슬아치만이 득실거리고 있다.
인민(人民)의 마음은 날로 더욱 비틀어져서 들어와서는 생업을 즐길 수 없고, 나와서는 몸을 보존할 대책이 없도다. 학정은 날로 더해지고 원성은 줄을 이었다. 군신(君臣)의 의리(義理)와 부자(父子)의 윤리(倫理)와 상하(上下)의 구분이 드디어 남김없이 무너져 내렸다. 관자가 말하기를 .. "사유(四維 .. 예의와 염치)가 베풀어지지 않으면 나라가 곧 멸망한다 " 고 하였다.
바야흐로 지금의 형세는 에전보다 더욱 심하다. 위로는 공경대부 이하, 아래로는 방백, 수령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위태로움은 생각지 아니하고 거의 자기 몸을 살찌우고 집을 윤택하게 하는 계책만을 몰두하여 벼슬아치를 뽑는 문(門)을 재물 모으는 길로 만들고, 과거(科擧) 보는 장소를 사고 파는 장터로 만들고 있다. 그래서 허다한 재물이나 뇌물이 국고에 들어가지 않고 도리어 사사로운 창고를 채우고 있다. 나라에는 부채가 쌓여 있는데도 갚으려는 생각은 아니하고 교만과 사치와 음탕과 안일로 나날을 지새워 두려움과 거리낌이 없어서 온 나라는 어육이 되고 만 백성은 도탄에 빠졌다.
진실로 수령들의 탐학때문이다. 어찌 백성이 곤궁치 않으랴..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다. 근본이 깎이면 나라가 잔약해지는 것은 뻔한 일이다. 그런데도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계책은 염두에 두지 않고 바깥으로는 고향집을 화려하게 지어 제 살길에만 골몰하면서 녹위만을 도둑질하니 어찌 옳게 되겠는가? 우리 무리는 비록 초야(草野)의 유민(流民)이나 임금의 토지를 갉아먹고 임금이 주는 옷을 입으면서 망해가는 꼴을 좌시할 수 없어서 온나라 사람이 마음을 함께 하고 억조창생이 의논을 모아 지금 의로운 깃발을 들어 보국안민을 생사의 맹세로 삼노라. 오늘의 광경이 비록 놀랄 일이겠으나, 결코 두려워하지 말고 각기 생업에 편안히 종사하면서 함께 태평세월을 축수하고 모두 임금의 교화를 누리면 천만다행이겠노라........... 1984년 3월20일. 전봉준.손화중.김개남
黃土峴 전투
급보에 접한 전라감사 김문현(金文鉉)은 영장(營將) 이광양, 이재섭 등에게 명하여 영병(領兵) 250명과 부보상대(負褓商隊) 수 천 명을 이끌고 동학군을 섬멸하라고 하였다. 4월6일부터 7일 새벽까지 관군은 道橋山에 진을 치고 있던 동학군과 황토현(黃土縣)에서 싸움을 벌였다. 관군은 철저히 참패하여 '이광양'을 비롯한 대부분의 장병들이 전사하였다. 사기충천한 동학군은 불과 한 달만에 호남 일대를 휩쓸면서 관아를 습격하고, 옥문(獄門)을 부수어 죄수를 방면하였으며, 무기와 탄약을 빼앗고 이서가(吏胥家)에 방화하였다.
전주성 함락
황토현(黃土峴)전투의 소식에 당황한 조정에서는 전라병사 홍계훈(洪啓薰)을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에 임명하고 군사 800명을 파견하여 난(亂)을 진압하도록 했다. 홍계훈(洪啓薰)은 정부에 증원군을 요청하는 한편, 청(淸)나라 군사를 불러들이도록 건의하였다. 그 사이 전봉준은 '호남 제일성 (湖南 第一城)'이라 불리는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전주(全州)에 도착한 초토사 홍계훈의 경군(京軍)과 동학군은 월평리의 황룡촌에서 첫 대전을 벌였다. 격전의 결과 홍계훈의 관군은 대패하였고, 동학군은 정읍 방면으로 북상, 4월27일에는 초토사가 출진한 뒤 방비가 허술한 전주성을 쉽게 함락하였다. 한편 '홍계훈'의 관군(官軍)은 28일에야 전주성 밖에 이르러 완산(完山)에 포진하고 포격을 가하였다.
전주(全州)를 점령한 전봉준은 홍계훈에게 탄원서를 보냈다. 전주화약(全州和約)을 맺기 전, 관군 최고사령관 홍계훈에게 보낸 이 탄원서에는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을 다시 권좌에 복귀시켜라..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홍계훈은 이를 반박하는 답장을 보냈다. 전주 화약(和約) 직전인 5월4일에 다시 홍계훈에게 보낸 밀서에서는 " 태공(太公)을 받들어 나라를 감독하도록 함은 그 이치가 심히 마땅하거늘 왜 이를 불궤라 하십니까? "라 하였다.
청나라, 일본의 출병
동학군은 여러 차례 반격을 가하였으나, 소총과 죽창만으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어 차차 수세(守勢)에 몰려 500명의 전사자를 내는 참패를 당하고 전의(戰意)를 상실하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ㅈㅇ부의 원병(援兵) 요청에 따라 청나라 군대가 상륙하였고, 그를 구실로 일본군(日本軍)도 인천에 상륙하였다. 홍계훈(洪啓薰)은 이 때를 이용하여 선무공작(宣撫工作)을 시작하였으니, 즉 정부는 고부군수, 전라감사, 안핵사 등을 이미 징계하였고, 앞으로도 탐관오리는 계속 처벌할 것과 폐정(弊政)의 시정을 약속하였다.
때마침 앞서 요청하였던 청(淸)나라의 원군(援軍)이 아산만에 도착하였고, 일본(日本)은 일본대로 거류민 보호를 구실로 6월7일에 출병(出兵)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렇게 되자 동학군은 우세한 장비를 갖춘 정부군과 지구전을 벌이는 것은 불리할뿐더러 청,일 양군이 출동하여 국가의 안전이 염려되는 시기에 정부군과 싸운다는 것은 대의(大義)에 어긋나는 일이라 하여, 페정개혁 12개조를 요구하고, 나라의 선무공작(宣撫工作)에 순응하여 전주성에서 철수하였다.
강화(講和)가 성립된 뒤 대부분의 농민은 철수하고, 동학군은 폐정개혁의 실시와 교세 확장을 위하여 전라도 53주에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조정의 요청으로 이미 청군(淸軍)은 상륙하였고, 일본(日本)도 천진조약(天津條約)을 구실로 군대를 파견하였다.
전주화약 全州和約
조선정부의 요청으로 청나라 군대가 들어오고, 동시에 천진조약(天津條約)을 구실로 일본군도 입국하여 압박함으로써 나라가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자, 12개 항목을 들어 개혁할 것을 요구하는 대가로 전봉준은 조정의 휴전(休戰) 제의를 받아들인다. 그 주요 내용은...
1. 우리나라 농민들은 조정과의 원한을 씻고 나라의 발전을 위해 조정과 협력한다. / 2. 탐관오리는 그 죄를 철저하게 조사하여 처벌한다. / 3. 백성들에게 횡포를 부린 부자(부자)들을 처벌한다. / 4. 못된 양반들을 징벌한다. / 5. 노비문서(奴婢文書)를 소각한다. / 6. 광대, 백정 등의 천민을 차별하지 않는다. / 7. 과부(寡婦)도 다시 결혼할 수 있도록 한다. / 8. 제멋대로 만든 세금을 모두 없앤다. / 9. 관리는 능력에 따라 뽑는다 / 10. 일본과 내통한 자는 엄벌로 다스린다. / 11. 그동안 농민이 진 빗은 모두 탕감한다. / 12. 땅은 공평하게 나누어 갖는다.
이 화약은 전주(全州)에서 체결되어 전주화약 (全州和約)이라고 부른다. 백산에서 전라감사에게 내놓은 개혁요구서에는 전봉준의 의지에 의하여 개혁조항 외에도 흥선대원군이 감국(監國)을 요구하는 항목을 추가하였다.
전주화약을 맺은 후, 전봉준은 20여 명의 간부를 인솔하여 각지로 다니며 교도를 격려하고, 집강소(執綱所)를 전국에 설치하는 등 조직 강화에 힘썼다. 한편 정부의 관헌들과 대등한 처지에서 시정을 감시하고 신임 감찰사 김학진(金鶴鎭)과 도정(道政)을 상의하는 등 강력한 권한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부패한 지배 계급의 근절과 근본적인 시정개혁이 실현되지 않아 재궐기를 계획하던 중, 청일전쟁(청일전쟁)이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진전됨에 따라 점차 조선에서의 침략행위를 더해가는 일본의 흉계에 격분하여 다시 봉기하게 된다.
이 전주화약(全州和約)대로 전봉준(全琫準)은 각 지방에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고 폐정개혁(弊政改革)을 실시하였다. 본래는 관(官)과 민(民)이 협력하여 개혁 작업을 진행한다는 취지이었지만, 실제 고을의 벼슬아치들이거의 도망가고 없는 상태에서 집강소(執綱所)는 농민(農民)들의 자치(自治)에 의해 운영되었다.
이것은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 있는 ' 농민자치(農民自治) '이었다. 비록 호남(湖南)지방과 일부 인근 지방에 한정되기는 하였지만, 농민이 자치(自治)를 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또한 폐정개혁안(弊政改革案)의 내용은 .. 탐관오리는 뿌리를 뽑을 것, 무명잡세는 혁파할 것 ..같은 농민들의 요구뿐 아니라 ' 노비문서(奴婢文書)는 불태워 버릴 것, 토지는 평균분작으로 할 것 등 매우 급진적(急進的)인 내용들을 담고 있었다.
제1차 농민 봉기의 휴전(休戰)은 동학군에게 불리(불리)하여, 정부는 강화(講和) 조건을 이행하지 않는 한편, 청나라 군대는 물론 일본군도 6월9일부터 1만의 군대로 인천에 상륙하였다. 일본은 1894년 7월23일에 친일정권(親日政權)을 세우고, '이노우에 가오루'를 새 공사(公使)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7월25일에는 청일전쟁(淸日戰爭)을 일으키는 등 험악한 정세를 조성하였다.
전봉준을 바라보는 敎主 崔時亨의 삐딱한 시선
동학교의 제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이 이끄는 북접(北接)은 북접의 다른 지도자이었던 전봉준의 무장봉기(武裝蜂起)를 탐탁치 않게 여겨 왔었다. 당시에 동학의 주요 지도자이었던 '오지영'의 진술에 의하면, 최시형은 호남(湖南)의 전봉준과 호서(湖西)의 '서장옥'은 나라의 역적이고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고 규정하고, 동시에 남접의 농민군을 칠 예정이었다고 한다.당시 남접(南接)의 지도자인 김개남(金開南) 등은 조선 정부를 부정하고 스스로 개남국왕(開南國王)이라 칭하고 있었다. 최시형(崔時亨)은 전봉준 역시 조선(朝鮮)을 부정(否定)하고 새 나라를 세우려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기도 하였다.
척왜 斥倭
그러나 일본군이 관군과 함께 농민군을 압박하자, 최시형(崔時亨) 등은 처음에는 협상론인 화전론(和戰론)을 주장하다가, 마침내 현실 상황의 급박함을 인식하여 스스로 자신의 주장을 포기하고 북접(北接)을 전봉준의 무장투쟁(武裝鬪爭) 노선에 동참시켰다. 인심이 천심이고, 이는 천운이 이르는 바이다. 고로 너희들은 도중(道衆)을 동원하여 전봉준과 협력, 이로써 교주의 원한을 풀어드리고 나아가 우리 도의 큰 뜻을 실현시키라 !!
이로써 손병희(孫秉熙) 등이 이끄는 북접(北接)이 전봉준의 남접(南接)과 힘을 합쳐 봉기에 가담하였다. 이에 조선 조정은 농민군이 밀고 들어오자, 일본과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하였고, 이에 전봉준, 김개남, 손병희, 최경선, 김덕명, 최시형, 성두환, 김낙삼, 김두행, 손천민, 김봉득, 유한필 등이 다시 2차 농민봉기를 일으켰다.
일본군(日本軍)의 경복궁(景福宮) 점령에 분격한 농민군은 이 해 9월 척왜(斥倭)를 구호로 내걸고 봉기하였다. 이제는 내정개혁(內政改革)을 목표로 하지 않고, 일본과의 항쟁이라는 반외세(反外勢)가 거병(擧兵)의 주요 목적이 되었다. 9월 충청남도 공주에서 관군과 싸웠다. 그런데 충청관찰사 박제순은 9월 봉기 이후 전봉준이 이끄는 북접군이 논산으로 진격하여 공주감영이 위급해지자, 교주 최시형(崔時亨)이 거느리는 다른 북접의 10만 대군을 막는 일보다 전봉준의 군사를 방어하는 일이 더 화급하다며 천안에 머물고 있는 토벌대장 이규태에게 급전을 보냈다.이규태가 이끄는 군사가 박제순 군과 가세하면서 농민군은 공주(公州) 싸움에서 패퇴, 은신하게 된다.
11월 27일, 태인싸움에서 패배한 뒤, 전봉준은 수행 몇 몇과 11월29일 입암산성(笠巖山城)으로 들어가 은신하였다. 이때 남하(南下)하는 일본군 오리오부대와 이규태(李圭泰)의 관군(官軍)이 정읍군 입암면 천원에서 전봉준 일행을 추격해 온다는 정보를 듣고, 11월 30일 다시 입암산성에서 동쪽 약 8km에 떨어진 내장산의 백양사(白羊寺)로 이동하였다.
전봉준 체포되다
전봉준은 백양사(白羊寺)에 은신할 때 사람을 통해 김개남(金開男)이 태인군 산내면 종성리 (지금의 정읍시 산내면 종성리)에 은신해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수행원들과 함께 태인(泰仁)으로 가던 중, 12월1일 저녁 순창군 쌍치면 피노리에 이르러 부하 '김경천'을 찾았다.
'김경천'은 전봉준을 맞이해 놓고 순창(淳昌)의 한 민가(民家)에 은신하도록 권유하였다. 그 후 전주부 감영에서 물러난 동지이며 이웃에 사는 한신현을 사주하여 전주부 관아에 고변(고변)하도록 하였다. 김경천의 부탁을 받은 한신현은 김영철, 정창욱 등 외에 9명과 함께 피노리 마을 장정들을 동원하여 매복하고 있었다.
민가(민가)에서 전봉준은 동지 몇명과 순창으로 피해 다시 거사를 일으킬 준비를 하고 있었으나, 현상금을 노린 옛 부하 한신현과 김경천 등의 배신으로 피로리(避老里)에서 관군에 체포되었다. 한신현과 김경천의 밀고(密告) 외에도 김영철, 정창욱 등의 제보와 마을사람 9명의 제보가 있었다. 1984년 12월 2일 새벽, 한신현과 김경천의 밀고 사실을 알고 위기에 처하자 담을 뛰어넘어 도피하려다 피노리 주민이 던진 몽둥이에 다리를 얻어 맞고 붙잡혔다.그리고 순창군 관아에 갇혔다가 담양군 관아에서 조선 관군(官軍)에게 인계되어 나주부와 전주부로 옮겨졌다가, 12월18일 한성부에 도착하여 의금부 감옥에 수감되었다. 1985년 3월, 그의 동지들인 손화중, 최경선, 김덕명, 성두환과 함께 체포되어 한성부로 압송되었다.
서울로 가는 전봉준 .... 시인 안도현
눈 내리는 만경(萬頃)들 건너 가네 / 해진 짚신에 상투 하나 떠가네 / 가는 길 그리운 이 아무도 없네 / 녹두꽃 자지러지게 피면 돌아올거나 / 울며 울지 않으며 가는 / 우리 봉준(琫準)이 /
풀잎들이 북향하여 일제히 성긴 머리를 푸네 / 그 누가 알기나 하리 / 처음에는 우리 모두 이름없는 들꽃이었더니 / 들꽃 중에서도 저 하늘 보기 두려워 / 그늘 깊은 땅 속으로 젖은 발 내리고 싶어하던 / 잔뿌리 였더니
그대 떠나기 전에 우리는 / 목 쉰 그대의 칼집도 찾아주지 못하고 / 조선 호랑이처럼 모여 울어주지도 못하였네 / 그보다도 더운 국밥 한 그릇 말아주지 못하였네 /못다 한 그 사랑 원망이라도 하듯 / 속절없이 눈발은 그치지 않고 / 한 자 세 치 눈 쌓이는 소리까지 들려오나니
그 누가 알기나 하리 / 겨울이라 꽁꽁 숨어 우는 우리나라 풀뿌리들이 / 입춘 경칩 지나 수군거리며 봄바람 찾아 오면 / 수천 개의 푸른 기상나팔을 불어제낄 것을 / 지금은 손발 묶인 저 얼음장 강줄기가 / 옥빛 대님을 홀연 풀어 헤치고 / 서해로 출렁거리며 쳐들어 갈 것을
우리 성상(聖上) 계옵신 곳 가까이 가서 / 녹두알 같은 눈물 흘리며 한 목숨 타오르겠네 / 봉준(琫準)이 이 사람아 / 그대 갈 때 누군가 찍은 한 장 사진 속에서 / 기억하라고 타는 눈빛으로 건네던 말 / 오늘 나는 알았네 / 들꽃들아 / 그날이 오면 닭 울 때 / 흰 무명띠 머리에 두르고 동진강 어귀에 모여 / 척왜척화 척와척화 물결 소리에 / 귀를 기울이라
전봉준의 최후
의금부(義禁府) 옥(獄)에 갇힌 전봉준 등에게는 무수한 고문(拷問)이 가해졌다. 그리고 의금부의 공초(供招) 중에는 그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과 내통(內通)한 사실 여부의 추궁이었다. 그러나 전봉준은 대원군과 만났느냐는 추궁에 한마디 언급도 없었다. 고문은 계속되었으나 자백이 없자, 그들은 일본 영사관(日本領事館)으로 이감되었다.
이후 2월9일, 2월11일, 2월19일, 3월7일, 3월10일 등 5차례에 걸쳐 일본 영사관에 설치된 헌병의 심문을 받았으나 역시 목적이나 동지들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일본의 심문관들은 흥선대원군이나 이준용이 그들을 사주(使嗾)했는가 여부를 집중 추궁하였다. 대원군에게 보내려던 편지가 발견되었고, 그가 대원군의 식객으로 운현궁에 있었다는 진술까지 나오면서 형문은 더욱 독해졌다. 그러나 그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대원군이 개입되었다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당시 일본은 겉으로는 협조하는 척 하면서, 뒤로는 반일(反日) 공작을 펼친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을 제거하고 싶었다. 그러나 갖은 고문에도 불구하고 전봉준은 대원군과의 관련성을 완강히 부인하였다. 고문(拷問) 과정에서 일본 심문관들이 흥선대원군을 비난하자, 그는 흥선대원군을 적극 변호하였다. 대원군이 국정에 간여하는 것이 민심이 바라는 바이다. 대원군을 받들어 나라를 감독케 함은 그 이치가 심히 마땅하거늘 왜 이를 역적질이라고 하느냐... 그러나 일본은 전봉준을 계속 회유한다. 살려달라고 하면, 일본으로 데려가 원하는 일은 무엇이라도 들어주겠다..고 회유한 것이다.
일본 영사관에서 다시 의금부(義禁府)로 옮겨진 전봉준은 드디어 1895년 3월30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는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 나는 바른 길을 걷다가 죽은 사람이다. 그런데 반역죄(叛逆罪)를 적용한다면 천고에 유감이다 " 라고 개탄하였다.
당시 상처가 아물지 않아 한 발자국도 옮겨 놓을 수가 없어서 아리(衙吏)가 그를 안고 사형장으로 갔다고 한다. 이때 그의 형제들도 연좌되어 사형을 당하였고, 그의 후처(後妻) '여산송씨'는 끌려가 노비(노비)가 되었다. 당시 전봉준의 나이는 41세이었다. 그는 죽음에 다달아 다음의 유시(遺詩)를 남겼다.
時來天地皆同力 때가 오니 천하가 모두 힘을 같이 했건만
運去英雄不自謨 운이 다하니 영웅도 스스로 할 바를 모를내라
愛民正義我無失 백성을 사랑하는 정의일 뿐 나에게는 과실이 없으니
愛國丹心誰有知 나라를 위하는 오직 한 마음 그 누가 알리
개인적인 야망이 아니라 " 민중을 위해 " 일어서 죽음을 앞둔 순간에도 목숨을 담보로 한 일본(日本)의 유혹마저 거부한 채 투쟁한 그의 삶은 민중을 반침략(反侵略), 반봉건(反封建)의 방향으로 각성시키므로서 이후의 사회변혁운동(社會變革運動)과 민족해방운동(民族解放運動)의 진전에 원동력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매우 앞서 있었던 그의 개혁안은 갑오개혁(甲午更張)에 부분적으로 수용되었고, 그가 보여준 무장항거(武裝抗拒) 정신은 항일의병(抗日義兵)전쟁으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