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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문센과 스콧 [내셔널 지오그래픽 2011년 9월호 기사의 일부입니다.]
100년 전, 로버트 스콧이 로알 아문센에게 패배했다. 이는 아문센이 언제 돌아서야 할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남극점으로 가는 길 스콧은 맥머도 만에 있는 로스 섬에 기지를 세웠다. 맥머도 만은 이전에 두 영국 탐험대가 출발점으로 삼았던 곳이다. 그중 한 탐험대는 스콧 본인이 이끌었고, 다른 하나는 어니스트 섀클턴이 대장이었다. 스콧은 섀클턴이 지나간 경로를 따라갔다. 아문센은 남극점과 보다 가까운 경로를 택한 대신 미지의 땅에서 완전히 새로운 길을 개척해야 했다. 두 탐험대 모두 보급품을 미리 갖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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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9월 12일 화요일. 시계(視界)에 들어오는 것이 별로 없음. 영하 52℃의 날씨에 남쪽에서 부는 매서운 바람. 개들이 추위에 힘들어하는 게 여실히 보임. 대원들은 옷이 얼어붙어 몸이 뻣뻣하게 굳었지만 맹추위 속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나더니 어느 정도 만족한 상태임…. 날씨는 누그러질 것 같지 않음." 이 간결한 일기를 작성한 사람은 노르웨이의 탐험가 로알 아문센(Roald Amundsen, 1872–1928)이다. 그는 이미 5년 전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가는 북극의 전설적인 북서항로를 최초로 항행하여 명성을 얻었다. 이제 그는 당시 탐험계에서 가장 인정받는 영예로 남아 있던 남극점 정복을 목표로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남극 대륙에 와 있었다. 이 대담한 모험은 그의 성격대로 치밀하게 계획됐지만 우연의 산물이기도 했다. 2년 전 아문센은 북극해 탐험의 범위를 넓혀 북극점으로 항행하려던 계획에 몰두해 있던 중 로버트 피어리가 먼저 북극점을 정복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훗날 아문센은 그 순간 ‘방향을 정반대로 돌려 남극에 가기로 결심했다’라고 회고했다. 만약 자신이 사상 최초로 남극점에 도달한다면 명성은 물론이고 향후 탐험에 필요한 자금도 확보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는 표면적으로는 북극 탐험을 준비하면서 은밀하게 남극 탐험을 계획했다. 그러나 사상 최초의 남극점 정복은 쉽게 장담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영국의 남극 탐험대 역시 로버트 팰컨 스콧(Robert Falcon Scott, 1868-1912) 대령의 지휘 아래 요란한 선전과 함께 남극으로 향하고 있었다. 9월 12일자 일기에서 드러나듯 아문센은 경쟁자를 몹시 의식했다. 스콧에게 패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리던 아문센은 남극에 봄이 찾아와 날씨가 풀릴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성급하게 일찍 출발했다. 그 결과 개들이 목숨을 잃고 대원들은 발에 동상에 걸려 한 달간 치료를 받아야 했다. 이런 명백한 실수들은 곱씹어 볼 가치가 있는데, 이는 아문센의 흠을 잡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랫동안 그를 따라다녔던 한 가지 낭설을 일소하기 위해서다. 바로 아문센의 남극점 정복은 열정도 없이 그저 전문적인 지식과 냉혹한 야심을 활용한 것에 불과하며, 따라서 아문센은 개성 없는 탐험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런 평가는 스콧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과는 현저히 대조된다. 스콧은 용감한 대원들과 함께 전진하는 매 순간 사투를 벌이며 근성과 용기를 보여주다 빙원에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탐험가로 여겨졌다. 1911년 9월 아문센의 그릇된 출발이 빚은 사건은 위험천만한 극지 탐험에서 아무런 이유도 없이 불가피하게 일어나는 일은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아문센은 성격이 꼼꼼하고 치밀하기도 했지만 엄청난 야심가이기도 했다. 모든 탐험가로 하여금 야생의 세계에서 죽음을 무릅쓰게 만드는 위험한 꿈과 충동에 휘둘리기 쉬운 사람이었다는 얘기다. 그러나 계속되는 그의 일기에서 드러나듯 아문센의 위대함은 그런 충동적 욕구가 있었음에도 그것을 능숙하게 제어했다는 데 있다. 아문센은 성급하게 출발하고 나서 나흘 뒤 탐험대의 상황을 냉정하게 평가한 다음 결정을 내렸다. ‘서둘러 돌아가 봄을 기다리기로 했다. 일단 출발했으니 탐험을 계속하겠다고 고집을 피워서 대원들과 동물들의 목숨을 위태롭게 하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게임에서 이기려면 말을 제대로 움직여야 한다. 한 치라도 잘못 움직이면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다.’ 개인적인 꿈같이 짜릿한 무언가를 추구하다 균형 감각을 되찾고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은 귀한 자산이다. 다른 위대한 탐험가들처럼 아문센도 언제 돌아서야 할지를 알고 있었다.
경주가 시작되다 로알 아문센이 이끈 노르웨이 탐험대는 1911년 1월 14일 남극대륙의 훼일스(고래) 만에 도착했다. 그들은 개썰매를 갖추고 영국 탐험대와 남극점 정복 경주를 할 준비를 했다. 아문센이 타고 간 프람 호는 당대 최고의 극지 탐험선이었다.
아문센 늑대털 외투 차림으로 노르웨이의 자택 근처 설원에서 당당하게 자세를 취한 아문센. 이 사진은 그의 회고록과 강연들에 자주 사용된 인기 있는 홍보용 사진이었다.
스콧의 탐험대 영국 탐험대(로버트 팰컨 스콧, 가운데)는 모직 의류를 입었고 썰매를 끌기 편하도록 바람막이 튜닉을 착용했다. ‘내가 볼 때 어떤 탐험이든 털가죽으로 만든 옷이 없다면 장비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것이다.’ 아문센은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썼다.
숙명적 선택 스콧이 타고 간 테라 노바 호는 시베리아 산 개들과 만주 산 조랑말들을 실었는데, 녀석들은 엄청난 양의 사료와 세심한 보살핌을 필요로 했다. 조릿대 줄기를 꼬아 만든 스칸디나비아식 설피가 일부 조랑말들에게 도움이 됐다. 설피가 없는 조랑말들은 무릎까지 빠지는 눈 속을 그냥 걸어가야 했다. 최고의 운송 수단을 둘러싼 많은 논의가 있었다. 가령 아문센의 북극 탐험 계획 원안에는 북극곰을 이용한 썰매 끌기가 포함돼 있었다.
모터의 위력 스콧은 개를 이용해 썰매를 끄는 것은 영예롭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도움을 받지 않는’ 탐험의 이상적인 모습은 인간이 직접 보급품을 끌고 가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전동 썰매는 기꺼이 사용했다.
개의 위력 개에 대한 아문센의 신뢰는 개를 이용하면서 점차 깊어졌다. ‘오늘 눈발이 많이 흩날렸지만 개들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개들은 애초에 아문센이 택한 알래스카식보다 그린란드식을 따라 하니스(harness)를 목에 걸고 부채꼴로 썰매에 묶이는 방식을 좋아했다.
생사가 걸린 비축물 극지 탐험용 식량을 비축하는 작업은 행군이 시작됐을 때 두 탐험대가 살아남기 위해 꼭 필요한 조치였다. 아문센이 기록한 대로 탐험대는 남위 80°에서 ‘멈춰 보급품을 내려놓았다. 개 사료용 페미컨(쇠고기를 말린 후 과실과 지방을 섞어 빵처럼 굳힌 것) 12상자, 바다표범 고기 약 30kg과 비계 50kg 및 초콜릿 20팩, 그리고 마가린 한 상자와 썰매에서 먹을 비스킷 두 상자.’
승리와 패배 1911년 12월 14일, 아문센과 4명의 대원들은 목적지에 도달했다. 그들은 남극점의 정확한 위치를 확증하기 위해 천측을 하면서 사흘을 보냈다. 스콧이 이끄는 5명의 탐험대는 그로부터 34일 후에 도착했는데, 마지막 몇 킬로미터 구간에서 노르웨이 탐험대의 흔적과 마주쳤다.
승리와 패배 그들은 패배감으로 망연자실하며 자신들이 그 같은 노고를 마다하지 않은 이유는 ‘사상 최초로 그곳에 도착하고 싶어서였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국 화가 엘리자베스 키스가 그린 한국, 한국인 _ 박수영(작가·건국대 겸임교수)
‘시골 결혼잔치’ 1921년, 채색 목판화. 엘리자베스 키스는 한국의 일상적인 모습을 즐겨 그렸다. 그림 속 20여 명의 동작과 표정이 아주 사실적이다. 책과함께 제공 일 경찰은 초라했고 한국죄수는 당당했다 1919년 3월 28일, 영국 여류화가 엘리자베스 키스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는 독립만세운동이 한창이었다. 한국에 오기 전 이미 이 운동을 알고 있었던 엘리자베스는 현장의 비극을 직접 피부로 느꼈다. 어느 날, 그는 일본 헌병에 끌려가는 한국인들을 이렇게 묘사했다. “죄수들은 짚으로 된 삐죽한 모자를 쓰고 짚신을 신은 채 줄줄이 엮여 끌려가고 있었다. 그들은 6척 또는 그 이상 되는 장신이었는데, 그 앞에 가는 일본 사람은 총칼을 차고 보기 흉한 독일식 모자에 번쩍이는 제복을 입었지만 덩치가 왜소했다. 죄수들은 오히려 당당한 모습으로 걸어가고 그들을 호송하는 일본 사람은 초라해 보였다.” 독립운동 하다 감옥에 갇힌 여학생 3월 운동 기간에 키스는 무엇보다 남자 못지않게 싸우는 여성들에게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과거에는 담 밖의 세상을 엿보기 위해 마당에서 널뛰기를 했던 여자아이들이 독립만세운동 때는 비밀문서를 전달하며 지하조직에 참여하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이화학당 교장인 앨리스 아펜젤러(배재학당을 세운 헨리 아펜젤러의 딸. 이화학당 교장을 지냄)와 함께 감옥에 갇힌 여학생을 면회하러 갔다. “(감옥의) 구멍이 어찌나 작은지 이쪽저쪽으로 머리를 움직여야만 여학생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루스(Ruth)라고 불리는 이 여학생은 반질거리는 까만 머리를 등 뒤로 땋아 내렸고 기품이 있는 얼굴이었다. 여학생은 왜 자기가 학교의 명령을 어기고 독립운동에 참여했는지 말했다. 동정을 구하는 표정이라기보다는 승리한 자의 모습이었다. 선생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울었지만 루스는 조용하고 침착했다.” 키스는 한국 사람들의 그림을 그리면서 한국인의 정서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 구한국 군인 제복을 입은 무인을 그릴 때는 멸망한 조국의 명예를 더럽히고 싶지 않은 한국인의 내면을 다음과 같이 포착했다. “그는 이 제복을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모든 것을 제대로 보여주려고 하면서 작대기도 올바르게 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무인은 자신이 차고 있는 검에도 커다란 자부심을 가졌다.” 옛 궁정관료의 집을 방문했을 때는 시대의 우울을 느꼈다. 그는 집주인과 어떠한 깊이 있는 대화도 나눌 수가 없었다. 집안의 음울한 분위기로 보아 일본 정부의 감시를 받고 있다는 걸 눈치 챘다. 한국인들은 시들어 가고 있었다. 어디에서 누굴 만나는지, 무슨 책, 무슨 신문을 읽는지 일본에 일일이 보고하는 것은 자기 집안에서 족쇄가 채워진 것과 같았다. 한 젊은 의사는 그에게 “한국이 일본보다 정신적으로 더 풍요롭다”는 역설적인 말을 들려주었다. 일본이 서구에서 배운 것은 오직 물질문명이었지 정신적으로는 파탄이라는 것이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정신적 바탕 위에 건립되지 않은 나라는 결국 재난을 당합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나는 진실로 그들을 불쌍하게 생각합니다. 일본은 정신적으로 가치 있는 문화를 절대로 건설하지 못할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국 해낼 겁니다.” 한국에 와서 일본에 대한 인식 바꿔 ‘정월 초하루 나들이’ 1921년, 채색 목판화. 책과함께 제공 키스가 한국에 있는 동안 교류했던 앨리스 아펜젤러는 20여 년 동안 한국에 살면서 느낀 일본과 한국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해주었다. “치밀하게 계획된 일본의 악선전으로 인해 한국인들의 성품이나 공적은 폄훼되었고, 온 세상 사람들은 그것이 실상인 양 믿었습니다. 일본은 줄기차게 한국 사람들을 무식하고 후진적이라고 악평을 해댔지요. 그러나 일본은 한국의 전략적 중요성을 잘 알았고, 2400만 한국 사람들이 강인하고 지성적이며 슬기로운 민족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한국에 오기 전에 일본에서 목판화 기법을 배우며 동양적인 정취에 흠뻑 빠져 있던 키스는 한국에 와보고 나서 일본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바꿨다. “그동안 서구는 ‘군기가 엄하고 부지런하며 싹싹한’ 일본이 한국을 문명국가로 만들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서구는 일본을 크게 오판하고 있었다.” 그는 일본에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처럼 한국의 문화와 미술을 존경하고 일본의 무력통치를 반대하는 인사들도 있다고 소개했다. 이런 사람들은 주로 교육계와 기독교계에 몸담고 있거나 사회주의를 신봉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일본 내에서 핍박받고 있는 실정이었다. 어떤 인사는 “일본인은 육체적인 면에서는 선천적으로 용감한 듯하지만 도덕적인 용기는 별로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일본으로 돌아간 키스가 한국에서 벌어진 일을 이야기해주자 그는 “어쩔 도리가 없어요. 우리 군부는 미친개와 같아서”라고 탄식했다. 20여 년 동양 여행하며 그림 그려 키스와 동생 엘스펫은 1919년 3·1운동 직후에 한국을 여행했다. 1915년 동생 부부가 일본에 정착할 때 키스도 동행해 함께 살게 됐다. 그는 20여 년 동안 한국 외에도 중국 필리핀 인도네시아를 여행하며 그림을 그렸다. 판화 수채화 등 다양한 작품을 남겼는데 특히 동양의 색채를 감각적으로 표현한 판화가로 명성을 얻었다. 키스는 평생 미혼으로 살며 그림을 그리다 1956년 세상을 떠났다. 그와 동생이 함께 만든 책 <조선: 고요한 아침의 나라>(‘영국 화가 엘리자베스 키스의 코리아 1920∼1940’. 책과 함께. 2006년)는 한국인의 내면을 조명하면서 부당한 식민지의 현실을 고발하는, 감성과 이성을 겸비한 내용으로 이뤄져 있다. 키스의 목소리는 부드럽고도 단호했다. 책에는 ‘정치적 성명서라기보다는 한편의 시 같은 느낌’이라면서 3·1운동 때 배포된 ‘독립선언서’(우리가 아는 독립선언서와는 다른 듯)의 한 구절이 소개돼 있다. ‘거룩한 단군의 자손인 우리들/ 온 사방에는 우리의 적들뿐/ 우리는 인류애의 깃발 아래 목숨을 바친다/ 구름은 검어도 그 뒤에는 보름달이 있나니/ 우리에게 커다란 희망을 약속하도다.’ *엘리자베스 키스의 그림에 대해서는 29페이지(2010-09-27_그림 좋아해) <마음으로 그린 90년 전 한국과 한국인-엘리자베스 키스>에 자세히 소개해 놓았으니 함 들러보시기 바랍니다.~~ 다음 클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