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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분 / 15세 이상 관람가>
=== 프로덕션 노트 ===
스페인의 위대한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의 전기 영화
거장 카를로스 사우라 감독이 만들어낸 창의적이고 화려한 미장센
노련한 촬영감독 비토리오 스트라로가 이루어낸 영화 속 고야 그림들의 재현
제13회 유럽영화상 (2000) 유러피안 촬영상 - Vittorio Storaro Winner
1999 몬트리올 국제영화제 예술공헌상 심사위원상 수상
제작 : 안드레스 빈센테 고메스 (Andres Vicente Gomez)
감독 : 카를로스 사우라 (Carlos Saura)
각본 : 카를로스 사우라 (Carlos Saura)
촬영 : 비토리오 스토라로 (Vittorio Storaro)
음악 : 로퀘 바뇨스 Roque Banos
편집 : 줄리아 주아니즈 (Julia Juaniz)
고야가 죽어가면서 자기의 딸 로사리토에게 자기의 생애를 이야기하면서 지난날을 되돌아보는 형식으로 영화가 진행된다. 영화는 화면의 색깔을 통제하고 절제하여 주로 붉은 색 계열의 단색으로 처리하여 색의 화려함에 의한 시선의 분산을 제한한다. 그러면서 화면은 더욱 아름다워지면서 의미를 담아내고 있다. 영화의 한 장면 한 장면이 하나의 명화 같다. 고야는 늙고 병들어 침대에 누워있다. 그는 의식이 가물거리는 상태에서 안개 낀 거리에서 지나가는 여인의 환영을 본다. 그 환영을 보고 고야는 “카예타나, 저 짐승 같은 놈들이 무슨 짓을 하였니?”하고 말을 한다. 관객은 이게 무슨 이야기인가 하고 궁금해 한다. 그 말은 자주 반복된다. 그리고 또 자주 하는 말은 “45살 이후의 나의 삶은 기적이었다.“라고 이야기 한다. 이 말들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런 말들은 우리를 영화 속으로 끌어들인다.
고야는 딸 로사리토에게 이성과 상상을 예술의 최고 가치라고 말한다. 상상력은 예술의 근본이고 이성과 상상의 결합이 경이로움의 원천이라고 이야기한다. 이것은 고야의 예술론이다. 로사리토에게 눈을 감고 상상을 하는 훈련을 하게 한다. 상상력 속에 이미지와 생각들이 하나가 되고 공상에는 제약이 없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상상은 언제 멈출지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카예타나, 저 짐승 같은 놈들이 무슨 짓을 하였니?”라는 말의 주인공인 카예타나는 알바 공작의 부인으로 고야가 한눈에 반한 여자다. 눈이 무척 아름답고 얼굴이 갸름한 형으로 고혹적으로 생긴 그녀에게 반하여 사랑하게 된 것이다. 45세에 기적 같은 삶이 시작되었다고 하는 것은 이것을 말한다.
고야는 그녀를 모델 삼아 그리면서 사랑을 나누는 행복한 시간을 가진다. 그러나 그녀를 좋아하는 라이벌들의 정치적인 음모로 마리아 루이사 여왕이 그녀를 싫어하여 여왕의 애인인 고도이를 시켜 카예타나를 독살해버린다. 그리고 그녀의 재산과 그림을 여왕과 고도이가 나누어 가진다. 고도이가 카예타나에게서 빼앗은 벨라스케스 그림을 자랑하는 것을 고야는 구경해야 한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 자리를 떠날 뿐이다. 그리고 이단으로 몰려 처단 당할까 두려워 부끄럽게도 권력을 잡고 있는 사람들을 그려주어야 한다. 이때의 고야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고야는 벨라스케스 그림에서 많은 것을 깨닫는다. 미완성처럼 보이고, 쉽게 보이는 여유, 그럼에도 섬세하며 물리적이고 현실을 뛰어넘는 신비로운 순간을 포착하는 것 등... 고야는 벨라스케스, 렘브란트 그리고 자연을 존경하는 3명의 거장으로 친다. 그리고 상상력. 고야는 끔직한 시대에 살았다. 정치적인 음모로 무지비한 시대, 나폴레옹 동생의 침공으로 인한 인민들의 참상을 보며 괴로워한다. 감독은 단 몇 장면으로 전쟁의 참혹함을 우리가 뼈저리게 느끼도록 묘사하고 있다. 고야는 사랑하는 사람이 독살당하는 고통, 정치적인 음모로 양심을 속이고 숨죽이고 살아야 했던 고통, 참혹한 전쟁의 체험으로 인한 고통, 예술가로서 고통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고통을 그의 그림에 담았다. 고야는 시대의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진정한 예술가의 자세를 보여준다. 고야를 연기하는 배우는 고야의 모든 고통을 제대로 살려서 연기를 하고 있다. 이 배우보다 적역은 없을 것 같다. 그의 얼굴에는 고야의 모든 고통이 담겨 있다가 움직이거나 말을 하면 뿜어져 나온다. 숨이 가빠서 간신히 내는 말소리, 죽어가면서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며 의식과 무의식 사이를 오가는 연기까지 환상적인 연기다. 고야는 죽는다. 그가 "지금의 나는 누구지?" 하면서 내미는 손가락이 가리키는 것은 무엇일까? 그가 추구하는 예술의 혼일까? 아니면 카예타나의 환영을 가리키는 것일까? 고야는 딸 로사리토를 부른다. 그리고 카예타나를 부른다. 죽어가면서 사랑하는 두 사람을 부르며 그는 죽어간다. 카예타나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컸으면 죽은 지 오래 되었을 것인데……. 그의 뼈 속에, 그의 무의식 저쪽에 카예타나에 대한 사랑이 꼭꼭 박혀있었나 보다. 그의 진정한 사랑이 심금을 울린다. 죽어가면서 내미는 고야의 손가락은 밝은 빛을 받지만, 밖의 들판은 빛이 사라진다. 감독은 손가락에 비치는 빛과 대지에 드리워지는 그림자의 대조에 의해 그의 죽음을 추모하고 있다. 침대에서 죽어가는 고야를 검은 그림자가 다가오며 덮는다. 그것은 아마 죽은 카예타나가 그를 맞이하러 온 것일 것이다. 그는 떠났고 그가 누웠던 침대의 하얀 시트는 빛을 받아 더욱 찬란하게 희다.
감독은 예술가의 고뇌를 이해하고 그것을 예술적인 감각으로 훌륭한 영화를 만들었다.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 고야의 인간으로서 화가로서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느끼는 고통을 함께 느끼게 하고 있다.
감 독 : 카를로스 사우라 (Carlos Saura)
카를로스 사우라는 1932년 1월 4일 스페인의 우에스카에서 태어났다. 스페인 내전 중에는 이곳 저곳 옮겨 다녔는데, 그의 영화에서 전쟁과 그 영향력이 끊임없이 등장하는 것도 이런 성장기 체험 때문이다.
1941년 마드리드에 정착, 직업 사진작가로 활동하면서 대학에서 공부하던 사우라는 1952년 영화 연구소에서 영화 수업을 쌓으며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의 작품들을 많이 접하게 된다. 1958년 첫 번 째 작품인 다큐멘터리 <해역>을 만들어 마침내 감독으로 공인 받고, 그 해부터 영상 실습 교수로 강의를 나가게 된다. 데뷔작 <개구쟁이들>이 칸 영화제에 진출하고 사우라는 그곳에서 루이스 브뉘엘을 만나 그가 죽을 때까지 깊은 교분을 나눈다. 1962년부터 1964년까지 공립영화학교에서 연출을 강의하면서 두 번째 영화 <악당을 위한 눈물>을 연출한다. 루이스 부뉘엘이 사형 집행자로 나오는 이 영화는 정부 검열로 인해 유명한 시작 부분이 삭제 당하는 치욕을 겪기도 했다.
국제적 명성을 얻게 된 작품은 세번째 영화 <사냥>이다. 폭력미학을 통해 스페인 내전의 상흔을 탐구한 작품으로 그 해 베를린 영화제 은곰상을 받았다. 이후 제작자인 엘리아스 케페헤타 등 유능한 영화인들의 협조에 힘입어 자신의 스타일을 정착해 나간다. 사우라는 <얼음에 얼린 박하>를 브뉘엘에게 바치기도 했다. 검열 및 경제적 궁핍 등으로 고통을 당함에도 불구하고 사우라는 그 시대에 가장 응집력 있는 작품을 만들었다. <사촌 앙헬리카>는 칸 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을, 유명한 <까마귀 기르기>는 칸 영화제 그랑프리를, <100세가 된 어머니>는 오스카상에 오르는 등 스페인 영화를 국제적으로 알리는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 1975년 독재자 프랑코가 죽자 스페인 현실을 보다 사실적으로 그려 낸 <서둘러라 서둘러라>를 만들어 베를린 영화제 금곰상을 거머쥔다. 또 스페인 전통이 흠뻑 배어나는 뮤지컬 삼부작 <피의 결혼식> <카르멘> <마법사를 사랑하라>를 연출한다. 이 세 작품은 국제적으로도 대성공을 거둔다.
자신의 영화 세계에 대한 세계적인 인식의 확대 속에서 미국 아카데미 영화제가 그에게 경의를 표하는 영광을 누리기도 한 사우라는 펠리페 2세 시대 아마존 정복자의 모험을 그린 <엘 도라도>와 성폭행 당한 여인의 복수를 그린 <안나 이야기>로 우리나라에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후 사우라는 <택시> <탱고>와 <고야> 등을 찍으면서 지칠 줄 모르고 작품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 각 본 ]
2009 돈 조반니 (Io, Don Giovanni)
2005 이베리아 (Iberia)
2001 브뉴엘과 솔로몬 왕의 탁자 (Bunuel Y La Mesa Del Rey Salomon)
1999 보르도의 고야 (Goya in Bordeaux)
1998 탱고 (Tango)
1993 안나 이야기 (Dispara!)
1986 마법사를 사랑하라 (El Amor brujo )
1983 카르멘 (Carmen)
1974 사촌 앙헬리카 (La Prima Angelica)
1965 사냥 (La Caza)
1960 부랑자들 (Los golfos)
[ 감 독 ]
2009 돈 조반니 (Io, Don Giovanni)
2007 파두 (Fados)
2005 이베리아 (Iberia)
2004 일곱 번째 날 (El Septimo dia)
2002 살로메 (Salome)
2001 브뉴엘과 솔로몬 왕의 탁자 (Bunuel Y La Mesa Del Rey Salomon)
1999 보르도의 고야 (Goya in Bordeaux)
1998 탱고 (Tango)
1996 택시 (Taxi)
1993 안나 이야기 (Dispara !)
1990 아 카르멜라 (I Ay, Carmela!)
1988 엘도라도 (El dorado)
1986 마법사를 사랑하라 (El Amor brujo )
1983 카르멘 (Carmen)
1981 피의 결혼식 (Bodas De Sangre)
1980 질주 (Deprisa, deprisa)
1976 까마귀 기르기 (Cria Cuervos)
1974 사촌 앙헬리카 (La Prima Angelica)
1965 사냥 (La Caza)
1960 부랑자들 (Los golfos)
배 우 : 프란시스코 레이벌 (Francisco Rabal)
2001 데이곤 (Dagon)
2001 리스본행 노란색 시트로엥 (Alla Rivoluzione Sulla Due Cavalli)
1999 보르도의 고야 (Goya in Bordeaux)
1998 천사의 대화 (Talk Of Angels)
1997 리틀 미라클 (Pequenos Milagros)
1989 에스케이프 (The White Dove)
1986 붉은 무대 (Camorra)
1985 마담과 갱 그리고 가방의 행방 (Un Golpe De Cinco Estrellas)
1984 에필로그 (Epilogue)
1980 나이트메어 시티 (Incubo Sulla Citta Contaminata)
1977 최후의 시실리 (Corleone), 워맨 (Sorcerer/Wages of fear)
1974 사탄과 춘희 (It's Nothing, Only a Game)
1970 런던의 독수리 (Eagles Over London)
1962 일식 (L'Eclisse)
1961 비리디아나 (Viridiana)
1958 나자린 (Nazarin)
1957 어둠 속의 기적 (Amanecer En Puerta Oscura)
배 우 : 호세 코로나도 (Jose Coronado)
TV와 영화, 연극 무대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조세 코로나도는 매번 다른 인물들을 통해 관객들에게 다채로움을 선사하는 배우로 주목 받고 있다. 이번에 그가 연기한 캐릭터 역시 이전과는 색다른 인물이기에 연기하기에 결코 쉬운 인물이 아니었다. 폭력 안에서의 명백한 내적 갈등 안에서 희미하게 고통 당하는 복잡한 인물을 연기했는데 실감나는 이상의 연기를 해내고 있다. 미묘한 감정의 가운데에서 갈등하는 복합적인 심리를 가진 캐릭터를 통해 또 한번 그의 실력을 검증했다.
2006 라 디스탄시아 (La Distancia)
2004 로보 (El Lobo)
1999 보르도의 고야 (Goya in Bordeaux)
1992 살사 로사 (Salsa rosa)
=== 인물 정보 ===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 반 룬의 예술사
고야
최후의 위대한 만능 화가
회화가 18세기 후반에 완전히 끝장난 것은 아니다. 오늘날에도 파리에는 화가가 3만 명이나 되고, 통계에 의하면 뉴욕에는 그 10여 배에 달하는 화가들이 있다. 게다가 19세기에는 사하라 사막을 캔버스로 덮을 수 있을 만큼 많은 그림이 그려졌다. 그러나 예술과 삶이 완전히 단절되자 화가는 더 이상 서유럽인들의 뚜렷한 이념을 해석하지 못하게 되었다. 과거에는 사람들이 공통의 정신적·사회적 유산을 가졌기 때문에 그 이념을 이해하고 느낄 수 있었으나 이제는 그럴 수 없게 된 것이다.
그 첫걸음은 종교개혁이었다. 당시 신교와 가톨릭은 서로를 불구대천의 원수로 삼고 현대의 세계대전에 버금가는 대량 살육을 저질렀다. 그러나 그들은 문화적 생활방식이 같았고, 같은 그림을 그렸고, 같은 집과 궁전을 지었고, 같은 옷을 입었고(신교도의 옷이 가톨릭교도의 옷보다 더 부드러운 색깔이었을 것이다.), 같은 음악을 작곡했다.
물론 가톨릭 군주의 궁전에 있는 전용 예배당에서는 가톨릭 의식에 따라 미사가 치러진 반면, 신교 군주의 궁전에 있는 전용 예배당에서는 가톨릭 신앙의 모든 흔적이 세심하게 제거되었다. 하지만 그런 종교분쟁에 관해 자세히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북유럽에서 남유럽까지, 베르사유에서 포츠담까지 다녀봐도 전혀 차이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유럽 문화는 여전히 보편적이었으며, 정교한 경제적·사회적 피라미드를 이루고 있었다. 맨 아래에는 대부분의 나라에서 중세 농노보다 더 처지가 어려운 농민의 두터운 층이, 그 바로 위에는 그들보다는 형편이 약간 나은 상인과 제조업자들의 얇은 층이 있었다. 또 상층부에는 농노의 노동으로 살아가는 귀족들이 있었고,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는 피라미드의 맨 꼭대기에는 왕이라는 값비싼 설화석고 덩어리가 있었다.
프랑스 혁명은 이 오래된 구조를 완전히 뒤집어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회복할 수 없는 치명타를 가했다. 혁명은 전통적인 문화 국제주의를 민족주의로 대체해버렸다. (독일의 위대한 작가이자 과학자인 괴테는 문화 국제주의의 가장 빛나는 마지막 대표자였다.)
이제 유서 깊은 유럽 대륙은 서로 적대적인 수많은 무장 진영으로 분열되고 지도에는 붉은색, 녹색, 자주색의 국경선들이 어지러이 그어졌다. 이 국경선을 즐겁게 넘나드는 예술 형식은 오로지 음악뿐이었다. 그림은 음악에 비해 이동이 쉽지 않았고 보편적인 호소력을 지니지 못했으므로 음악처럼 자유롭게 국경을 넘나들 수 없었다. 회화 예술은 일종의 민족적 방언으로 축소되어 외국인은 이해할 수도 없었고 외국인에게 이해시키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고야(Francisco Goya)도 벨라스케스나 엘 그레코에 못지않게 에스파냐의 정서에 충실했다. 그를 플랑드르나 이탈리아 출신으로 착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는 당대의 모든 문화적 표현 형태들을 대표할 만한 특성이 있었다. 그를 바로크 예술가로 부른다고 해도 반박할 수 없다. 또한 그의 그림에서 로코코적 요소를 찾아내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하지만 자연을 자신이 보고자 하는 모습으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충실하게 모방하려는 욕구, 17세기 네덜란드 화파에서 시작되어 18세기 후반에 널리 유행한 자연주의 예술 이념은 고야의 초상화에 가장 완벽하게 구현되어 있다. 우리가 늘 19세기 최대의 예술적 성과로 평가하는 '인상주의'도 이미 1808년의 마드리드 대학살을 묘사한 고야의 작품에 훌륭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러므로 장차 이론을 수정해 인상주의를 발견한 공로를 이 위대한 에스파냐 화가에게 돌려야 할 것이다.
고야 자신은 그런 것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는 옷을 입은 채로 잠들고 손에 팔레트를 쥔 채로 세상을 떠난 구식 예술가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여든두 살까지 살았으나 대부분의 생애를 어려움 속에서 보냈다. 당대의 사람들에게서 인정을 받았고, 에스파냐 궁정화가라는 근사한 직함을 얻었고, 음식을 얻기 위해 전당포에 옷을 잡히는 일은 없었지만, 그는 기질적으로 미켈란젤로와 렘브란트, 베토벤을 닮은 탓에 현세에서 안식을 얻지 못했다.
그가 살던 시대는 지금과 매우 비슷했다. 찬란한 출발의 시대였다. 계몽의 여명이 먼 지평선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인류애에 바탕을 둔 시대, 자유와 완전한 기회의 평등이 모든 사람의 천부적 권리가 되는 시대가 막을 열고 있었다. "가자, 조국의 아이들아!" 그런데 뭔가 잘못되고 있었다.
행렬은 자유의 여신상으로 향하지 않고 도중에 어딘가에서 방향이 바뀌었다. 알고 보니 어느새 단두대의 계단을 향하고 있었다. "영광의 날이 왔도다!" 그러니 시민 여러분, 한 걸음만 내딛어주신다면 우리가 신속하고도 능숙하게 여러분의 목을 치고 몸뚱이를 생석회 구덩이에 묻어드리리다! 이 모든 일은 고결하고 참된 친구 로베스피에르(Robespierre) 시민께서 자신의 설계도에 따라 현세에 낙원을 건설하기 위한 것이라오. 그의 뒷주머니에 설계도와 종이 몇 장이 삐죽 나와 있는 게 보인다. 그 종이들은 설계도가 아니다. 거기에는 내일 마담 기요틴과 입맞춤하게 될 사람들의 명단이 있다.
파리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을 때 고야는 마드리드에서 에스파냐 왕가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었다. 1746년에 푸엔데토도스에서 태어난 그는 장난꾸러기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사라고사에서 그림을 배운 뒤에는 유랑 투우사 집단과 함께 에스파냐 전국을 방랑했다. 로마에 갔을 때는 빈털터리가 되어 어렵게 살았으나 강철 같은 의지로 역경을 헤쳐나갔다. 늘 그림을 손에서 놓지 않았던 그는 파르마의 어느 미술대회에서 2등상을 받았고 어렵사리 사라고사로 돌아갈 여비를 모았다.
그 무렵 거리에서 다툼이 일어나 이웃 마을의 젊은이 세 명이 살해되었다. 고야는 이 사건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는 혐의를 받았으나 다행히 혐의가 풀리고 기소가 철회되었다. 이제 어디든 갈 수 있게 되자 고야는 마드리드로 가서 승부를 걸기로 결심했다. 당시 마드리드에서는 체코슬로바키아 태생으로 덴마크인 아버지를 둔 독일계 유대인 화가 라파엘 멩스(Raphael Mengs)가 왕궁의 벽과 천장에 그리스 신들을 그려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 그림을 보면 따분하기 짝이 없다.
멩스는 화가로서의 재능은 형편없어도 인격은 훌륭한 사람이어서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을 곧잘 도와주곤 했다. 스승인 프란시스코 바예우(Francisco Bayeu)의 누이와 결혼한 젊은 고야는 멩스의 도움으로 왕립 고블랭 공장(책임자가 바로 멩스였다.)에서 직조되는 수많은 태피스트리의 디자인을 맡았다. 그 뒤 고야는 장인과 함께 몇 년 동안 왕위 계승자의 궁전에 사용할 벽지에 통속적인 그림을 그리는 단조로운 일에 전념했다. 이런 밑그림은 예술 작품이라기보다는 멩스의 화풍에 가까웠으나 장식용으로는 상당히 괜찮았으므로 왕의 관심을 끌었다. 이때부터 고야는 순탄하게 경력을 쌓아갔다. 그는 왕립 예술아카데미 원장으로 임명되었고 얼마 뒤에 궁정화가가 되었다.
그 뒤 그는 국왕 부부와 왕실의 아이들에게 예술의 역사 전체를 통틀어 가장 몹쓸 짓을 저질렀다. 물론 초상화가는 후원자에게 정나미가 떨어졌을 경우 후원자의 좋지 않은 측면을 살짝 드러낼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고야는 국왕 카를로스 4세의 가족을 그린 단 한 장의 초상화로, 프랑스 혁명 초기의 저급한 언론이 쓴 모든 비방의 글보다도 더 심하게 왕실의 체면을 깎아내렸다. 이 사건에서 특히 개탄스러운 점은 왕실 전체가 너무 우둔하고 상식을 전혀 갖추지 못한 탓에 왕과 왕비, 대신들이 모두 그 초상화가 신성한 왕권의 이념을 가차 없이 짓밟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대단히 재주가 뛰어난 작품이다. 당시 고야는 자신의 일을 완벽하게 꿰뚫고 있었다. 고객이 두세 시간만 앉아 있으면 그림을 완성할 수 있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그 빠른 솜씨 덕분에 그는 유명한 알바 공작부인의 누드 초상화를 그렸을 때 위기를 모면한 적이 있었다. 고야가 자기 부인의 누드화를 그렸다는 소문을 들은 그녀의 남편은 고야의 화실을 찾아가 진위를 확인해보고 만약 그 소문이 사실이라면 에스파냐 귀족의 명예를 위해 복수하겠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이튿날 화실에 가보니 과연 아내 그림이 있었으나 옷을 제대로 갖춰 입은 모습이었다. 이 손 빠른 화가는 남편의 노여움을 가라앉히기 위해 단 하룻밤 사이에 또 한 점의 초상화를 완성했던 것이다.
고야는 알바 공작부인을 두 가지로 그렸다. 하나는 옷을 벗은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옷을 입은 모습이다. 하지만 두 작품 모두 당국으로부터 외설죄로 고발되어 몰수당했다.
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소개하는 이유는 과거의 위대한 예술가에 관해 흔히 전해지는 이야기와 상당히 닮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대가들의 작품은 전혀 기억하지 못하면서도 그런 이야기는 상식으로 알고 있다. 알바 공작부인은 실제로 고야의 여자 친구였던 듯하다. 그러나 또 다른 그림, 즉 공작의 분노를 달래기 위해 황급히 그렸다는 그림은 사실 공작이 죽은 뒤에 그려졌다.
따라서 그 재미있는 사건은 사실 꾸며낸 이야기다. 「옷을 벗은 마하(The Maja Nude)」와 관련된 실제 사건은 따로 있다. 1928년 에스파냐 정부는 고야의 서거 100주년을 기념하는 우표에 이 그림을 사용했다. 그러자 미국의 점잖은 부인들은 이 우표가 미국에 수입되는 것을 막으려 했다. 국제우편협약이 없었다면 부인들의 노력은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청교도의 후손들은 공작에게 통쾌한 복수를 한 셈이 된다. 공작과 이름이 같은 인물은 바로 청교도의 말살을 필생의 목표로 삼았기 때문이다.
한편 프랑스에서는 예정된 사태가 진행되고 있었다. 「라 마르세예즈」는 「황제 행진곡」으로 바뀌었다. 1808년에 에스파냐 왕 카를로스 4세가 폐위되고 나폴레옹 황제의 형인 조제프 보나파르트가 왕으로 즉위했다. 이 때문에 몇 해 동안 내전이 일어났다. 이 내전에서 왕당파는 아서 웰즐리(Arthur Wellesley)가 지휘하는 영국군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웰즐리는 탈라베라에서 프랑스를 무찌르고 웰링턴 자작의 작위를 받았다. 고야는 어떤 이유에선지 처음에 왕위 찬탈자들 편에 가담했으며, 궁정화가의 지위를 그대로 유지했다.
그러나 그 전쟁에 대한 그의 진심은 많은 회화작품과 에칭 연작에 표현되어 있다. 이 작품들은 어리석은 전쟁에 대한 강렬한 고발장으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 특히 에칭은 악몽에 자주 시달리는 사람들에게는 감상을 권하고 싶지 않다. 대부분이 그림으로 묘사된 악몽이며, 한 번 보면 결코 잊지 못할 소름 끼치는 장면이다. 이 작품들은 바로 오늘 그린 것처럼 선명하다. 거의 매일 아침 신문에서 자주 보는 사진, 스페인 내란의 불가피한 귀결인 산더미처럼 쌓인 시신들의 모습과 너무도 닮았기 때문이다.
1822년 일흔을 훌쩍 넘긴 나이에 고야는 홀연히 고국을 떠나 (홀몸으로) 피레네 산맥 너머 보르도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그는 옛 친구들을 만났다. 나폴레옹이 몰락한 뒤 부르봉 왕조가 에스파냐로 돌아오자 수천 명의 에스파냐인들이 망명을 택했다. 그 이유는 그들이 국왕 조제프를 지지했기 때문이 아니라, 진정한 애국자의 자세로 입헌군주제를 지지하고 왕과 교회의 전제정치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왕과 교회야말로 조국을 곤궁으로 내몰고, 무어인 칼리프의 시절에 번영했던 나라를 황폐하게 만든 주범이었다.
고야는 1828년 보르도에서 세상을 떠났다. 만년에는 청력을 완전히 잃었으나 시력은 죽을 때까지 좋았다. 그 눈으로 본 것을 그의 손은 캔버스와 종이에 충실하게 옮겨놓았다. 그렇게 해서 남겨진 작품들은 주체적인 이념에 따라 살아가는 법을 알지 못한 탓에 쇠망해버린 사회의 완벽하고도 정교한 초상이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고야 - 최후의 위대한 만능 화가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 반 룬의 예술사, 2008. 5. 6., 도서출판 들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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