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독서가 성서 말씀으로 기도하는 것일진대, 이를 위해 시편보다 나은 것이 또 있으랴 싶습니다. 시편은 그 자체가 사람이 하느님께 바치는, 그것도 노래로 바치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시편은 ‘내 안에 계신 하느님’께서 ‘내 바깥에 계신 하느님’께 바치시는 기도입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할 지도 모르는 우리 안에서 하느님의 영이 몸소 이루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대신 해 주시는 기도입니다(로마 8,26 참조). 따라서 시편으로 기도할 때에는, 아주 단순하게 그 시의 내적 흐름에 자기를 내맡기면서, 천천히 떠내려가듯 여러 번 읽기만 하면 될 것입니다. 그 시편의 기도가 성서에서가 아니라 내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 샘솟아 흘러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까지 말입니다. 그리되면, 그것을 “시편 저자의 작품으로서가 아니라 마치 내가 저자인 것처럼”(요한 카시아누스) 읽고 기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제가 안내할 거룩한 독서는, 여러분 각자가 직접 성서 본문을 들고 진행하시는 거룩한 독서에 비한다면 정녕 사족(蛇足)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야 합니다.
흔히 ‘미세레레’란 제목으로 소개되는 이 시편은 글자 그대로 죄인이 하느님께 용서와 자비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죄’라는 주제 앞에서 우리 마음은 종종 뭔지 모르게 무거워집니다. 없는 죄를 억지로 만들어내기라도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에 짜증스러워지기도 합니다. 복음의 해방과 힘을 강조하면 되지, 무슨 중세풍의 음울한 죄인 타령인가... 그러나, 죄의 신비라는 관문을 통과하지 못하면 구원의 좁은 문도 결코 통과할 수 없다는 것이 복음의 심장부에서 언제나 울려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음 자체를 축소시키거나 변질시키지 않고서는 결코 ‘죄’라는 주제를 가볍게 다룰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죄의 체험과 자비의 체험, 어둠의 체험과 빛의 체험이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한 몸인지, 오늘 주님께서 다시금 우리 각자에게 몸소 밝혀 주시길 기도합니다. 은총으로 ‘소화된’ 죄의 체험이 음울하기는커녕 얼마나 큰 기쁨의 원천인지 확인시켜 주시길 기도합니다.
기도하며 여러번 읽다보니 본문을 대략 세 부분으로 나누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죄의 고백(3-8), 정화(淨化)의 간청(9-14), 찬미와 헌신의 약속(15-21), 이렇게 말입니다.
“저의 죄에서 저를 말끔히 씻으시고, 저의 잘못에서 저를 깨끗이 하소서.
저의 죄악을 제가 알고 있사오며, 저의 잘못이 늘 제 앞에 있기 때문이옵니다.”
이 시편에서 시인이 고백하는 죄는 물론 구체적으로 범한 어떤 죄일 것입니다. 다윗이 노래의 주인공이라는 전승을 따르면 그것은 더욱 자명합니다. 그러나 잘 읽어보면, 시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심지어 “나는 죄 그 자체입니다”라고 말하는 듯 느껴집니다(7). 용서의 체험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죄를 지어야 한다”는 우스개 소리가 있습니다만, 하느님 자비를 체험하기 위해서 무슨 죄를 먼저 지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는 분들이 더러 계십니다. 복음서의 빛으로 이 시편을 깊이 기도하게 되면, 그것이 야무진 착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흔히 겸손으로 포장된...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들린 여인을 두고 주님께서 “너희 중 죄없는 사람이 먼저 돌을 던지라”고 하시자 나이 많은 이부터 하나하나 떠나갔습니다(요한 8,8). 노인이 젊은이보다 죄를 더 많이 짓는다는 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노인들은 죄와 그 세력에 대하여 젊은이들보다 더 잘 ‘안다’(성서적 의미에서)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평생의 체험에서 노인들은 죄가 무엇인지, 그것이 얼마나 현실적이고도 교묘히 개인과 공동체 삶의 구석구석에서 작동되는 은밀한 세력인지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어둠 속에서 잘 안보이던 얼룩이 빛 속에서는 다 드러납니다. 성인들일수록 스스로를 세상에서 가장 큰 죄인으로 여겼다는 것도, 그분들이 하느님 현존에 가장 철저히 노출된 분들이셨기에 그랬을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밝고 따뜻한 현존 앞에서만 나는 비로소 내 어둡고 칙칙한 내면의 실상을 솔직히 인정할 수 있게 됩니다. 깐깐한 심판자 앞에서는 스스로를 변호하기 마련이지만, 어진 아버지 앞에서는 제 안에 들어와 설치는 죄의 세력을 안심하고 인식하게 됩니다. 어두운 내가 비로소 밝아지는 것이 바로 이 순간입니다! 그러므로 내 어둠에 밝은 것, 그것이야말로 밝음입니다. 거룩함 역시 수행과 공로로 획득하는 어떤 경지가 아닙니다. 그것은 내 어쩔 수 없는 허약함과 어둠 안에서 드러나는 하느님 자비의 작열하는 빛일 따름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가 죄 없다고 말한다면 우리 자신을 속이는 것이며 우리 안에는 진리가 없습니다”(1요한 1,8)는 구절을 주해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니 그대가 죄인이라고 고백한다면 진리가 그대 안에 있는 셈입니다. 그리고 진리는 빛입니다”(<요한 1서 강해>).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반기시는 “가슴속의 진실”이요, 이 진실을 깨달음이 바로 애련(哀憐)으로 충만하신 그분 현존이 “남모르게 가르쳐 주시는 지혜”(8)입니다.
“하느님 깨끗한 마음을 제게 만들어 주시고, 굳건한 영을 제 안에 새롭게 하소서.
당신 면전에서 저를 내치지 마시고, 당신의 거룩한 영을 제게서 거두지 마소서.”
시인이 여기서 자기를 ‘씻어달라’, 죄를 ‘지워달라’고 간청하는 것은 단지 허물을 용서받고 원래 상태로 회복되고싶은 마음에서만은 아닙니다. 그는 하느님을 참으로 뵈옵고(觀想) 싶어합니다(13). 그런데 하느님을 뵈옵기 위해서는 마음이 깨끗해야 합니다(마태 5,8 참조). “깨끗한 마음을 만들어” 주십사, 씻어주고 지워주십사 탄원하는 것이 바로 그래서입니다. 그는 지금 하느님의 아름다우심을 언젠가처럼 다시 누리게 해 달라고, 그분 집에 사는 그 기쁨이(시 84,1 참조) 다시금 자기의 가장 큰 힘이 되게 해 달라고 청하고 있습니다. 온 마음으로 다시 당신 얼굴만을 찾고 있노라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용서의 이 순간은 단지 하느님께서 내 허물을 잊어주시는 것일 뿐만 아니라, 내 안에서 무엇인가가 새로이 창조되는 순간, 새로운 창세기의 순간입니다. “묵은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2고린 5,17)는 말씀은 하느님 자비를 체험할 때마다 매번 마음에서 터져나오는 고백입니다. 사막의 포에멘 압바는 피오르 압바의 일생에 대해, “그분은 매일 새로 시작하시더라”고 꼭 한 마디로 표현하신 바 있습니다. 우리가 언제나 있는 그대로의 상태에서 새로 시작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의 자비가 글자 그대로 무한하기 때문입니다. 어진 아버지께로는 언제 어떤 상태에서도 즉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루가 15,11-32 참조). 그리고 그때에는 모든 것이 새로 시작됩니다. 과거라는 칠판이 진홍처럼 붉어도 눈보다 희어집니다. 그 위에 모든 것이 새로 쓰여 집니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가장 큰 축복이라 믿습니다.
이처럼 씻어주시고 일으켜 주시는 하느님의 애련(哀憐)을 체험하게 되면, 내 ‘부서진 뼈’가 춤추게 될 뿐만 아니라(10), 진정한 감사와 찬미가 터져 나오게 됩니다(16.17). 나아가, 사람들에게 참으로 하느님이 누구신지, 그분 사랑이 어떤 것인지 비로소 증언할 수 있게 됩니다(15). 그리고 이 증언은 정녕 사람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습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들켜 끌려온 여인, 그러나 기막힌 사랑의 기지(機智)로써 조건없는 용서를 체험한 그 여인을 예로 들어봅니다. “다시는 죄짓지 말라”는 말씀을 듣고 돌아간 그 여인이 죄만 짓지 않았겠습니까. 예수께서 땅바닥에 무언가 쓰셨을 때는(요한 8,6.8), 실로 그 여인의 가슴에 성서가 쓰여지는 순간이 아니었겠습니까. 온갖 우상을 섬기는 중에 묻었던 때가 깨끗이 씻기워져 돌처럼 굳은 마음이 도려내지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이 형성되는 순간(에제 36,25-28 참조), 주님 사랑의 법이 돌판이 아니라 심장에 새겨지는 순간(예레 31,33 참조), 그리하여 “아직 쓰여지지 않은 성서가 쓰여지는”(그레고리우스 대종) 순간이 아니었겠습니까. 마침내 그 여인은 하느님의 자비가 무엇인지 온 몸으로 드러내 보이는, 살아있는 말씀으로 이웃들의 가슴에 새겨지는 그분 필적(筆跡)이 되지 않았겠습니까(2고린 3,3 참조). 우리는 받은 만큼만 줄 수 있을 따름,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한 만큼만 이웃에게 자비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과연 “부서진 영, 부서지고 꺾인 마음”(19)이야말로 최상의 제사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마음을 받아들이셔서 “깨끗한 마음”, “굳건한 영”, “거룩한 영”, “순종의 영”(12.13.14)으로 거룩하게 변화시켜 주시고, 이로써 “영과 진리로 바치는 예배”(요한 4,24)가 그 사람의 몸을 통해 실현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끝에 “예루살렘의 성을 쌓아” 달라고(20) 덧붙이는 것이 문맥으로 보아 좀 엉뚱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개인의 회심과 도성의 건설이 무슨 관계가 있나 봅니다. 개인의 정화(淨化)야말로 우주의 성변화(聖變化)의 출발점, 나의 거룩한 변모야말로 온 세상의 구원을 위한 유일한 담보입니다. 언제나 “내 탓이요!”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그것도 진심으로. “당신께, 오로지 당신께 잘못을” 저질렀노라 고백하는 것도(6)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 저지른 잘못, 그것은 모두 하느님을 직접 겨냥하는 것입니다. 사람 사이의 화해나 타협만으로 해결되고 정리되지 않습니다. 모든 죄는 하느님께 짓는 것이며, 하느님의 용서와 자비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사람 안에서 하느님을 뵐 수 없으면 인간 관계는 그 신적 깊이와 초월성을 상실하고 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