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신전 숲 속까지 가라앉은 잿빛 하늘이 태온의 의식 속으로 암울하게 스며들었다. 차츰 정신이 돌아오면서 무지개 속으로 떠오르던 기억과 함께 샤마가 불던 피리소리가 바람을 타고 언뜻 들리는 듯했다. 그 환청에 정신이 번쩍 돌아온 태온이 주술에 걸린 인형처럼 몸을 일으켜 세웠다.
“샤마야!”
티라노사우루스의 계단에서 떨어질 때 다친 다리에서 전해져 오는 통증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다리를 절뚝거리며 숲 속을 헤매던 태온의 눈에 한 소년의 모습이 들어왔다. 티라노사우루스 속에서 샤마를 꼭 끌어안고 있던 바로 그 소년이었다. 그렇다면 샤마도 근처에 있으리라 생각하며 뒤쪽을 돌아보니 도토리나무 옆에 대나무피리를 손에 쥔 한 소녀가 무표정한 얼굴로 태온을 바라보고 있었다.
“샤마야!”
높지도 낮지도 않은 태온의 음성이 날아가 소녀의 가슴에 꽂혔지만 소녀는 마치 처음 보는 사람인양 낯선 얼굴을 했다. 뜻밖의 반응에 당황한 태온은, 그러나 샤마가 아직 정신을 못 차린 걸로 짐작하고 서둘지 않았다. 그때 소녀를 부르는 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파티아, 괜찮니? 응, 괜찮아?”
태온이 돌아보니 조금 전 쓰러져 있던 바로 그 소년이었다. 소녀가 태온의 곁을 스쳐지나 소년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으응, 괜찮아! 루아는……?”
“응, 나도 괜찮아! 근데 여긴 어디지?”
파티아가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신전이야. 내가 찾던 바로 그 신전!”
“뭐야, 신전? 네 아바타가 있다는 그……?”
“맞아. 바로 그 신전… 저 언덕 위에 있을 거야.”
루아가 태온에게 물었다.
“아저씨는 누구세요? 혹시 이곳 사람이에요?”
태온이 차분한 음성으로 소녀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니야! 난 이 아이의 아빠란다. 네가 왜 이 아이를 파티아라고 하는지 모르겠구나. 이 아이의 이름은 샤마다.”
태온의 말에 루아와 파티아가 동시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파티아가 태온의 얼굴을 스캐너처럼 훑었다. 태온은 미안하고 죄스러운 마음에 가슴이 터질 것 같았지만, 가능한 딸에게 충격을 주지 않기 위해 온화한 얼굴을 유지하려 애썼다. 무언가를 기억해내기 위해 한참동안 정신을 집중시키던 파티아가 머리를 세차게 흔들며 소리쳤다.
“아아아, 몰라! 아니야, 아니란 말야!”
태온이 참담한 얼굴로 파티아를 끌어안았다.
“그래, 너무 애쓰지 말거라! 시간이 지나면 차츰 기억이 돌아올 테니.”
태온이 파티아의 목에 걸려있는 반달 모양의 목걸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목걸이 네 엄마 거란다. 이게 어떻게 네 목에 걸려있는지 모르겠구나.”
“아냐, 난 엄마 없어. 아빠도 없고. 난… 난 아무도 없단 말야!”
태온은 몹시 당황했지만 아마도 딸이 충격 때문에 기억에 혼선이 온 거라고 생각했다.
‘서두르면 안 돼!’
태온은 마음을 진정시켰다. 어쨌든 딸을 찾았고 기억은 곧 돌아올 것이다.
그때 숲 바깥쪽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이어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얘야, 정신 차려 봐! 아니… 꼼짝도 안 하네.”
‘저건 람스 교수!’
태온은 그제야 자신이 공중으로 떠오를 때 그 근처에 두레도 있었음을 기억해 냈다.
“나가 보자, 무슨 일인지……”
태온이 앞장섰고 아이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숲 속을 빠져나와 언덕을 올라서는 순간, 제일 먼저 거대한 돌기둥들이 태온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모두 8개의 돌기둥들이 하늘 위 한 지점을 가리키고 있었다. 바깥쪽으로 4개의 돌기둥들이 정사각형의 각 꼭짓점 위치에 하나씩 솟아 있었고, 안쪽으로도 4개의 돌기둥들이 바깥보다 작은 정사각형의 각 꼭짓점 위치에 하나씩 솟아 있었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두레가 얼굴을 돌렸다. 두 아이를 대동하고 다리를 절뚝거리며 걸어오는 남자는 태온이었다. 태온이 두레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람스 교수, 여긴 어쩐 일이오?”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오. 카슈 교수는 혹시 여기가 어딘지 아오?”
“나도 처음 보는 곳이오. 그런데 그 아이는……?”
두레가 다시 한 번 아이를 흔들어보더니 말했다.
“누군지는 모르겠고… 기절한 것 같소.”
그때 루아와 파티아가 동시에 비명을 질렀다.
“아악, 쟨 리오다!”
“리오야!”
“리오야, 정신 차려! 리오야!”
두 아이가 리오에게 달려들어 몸을 마구 흔들어댔지만 리오는 그저 몸을 한번 뒤척였을 뿐 여전히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리오가 몸을 뒤척일 때 새까만 딱정벌레 한 마리가 그의 주먹 속에서 기어 나왔다. 파티아가 탄성을 질렀다.
“아아, 딱정벌레!”
파티아가 딱정벌레를 집으려 하자 놈은 여섯 개의 다리에 힘을 잔뜩 주며 잠시 뻗대었지만 파티아가 손가락을 부딪쳐 딱! 소리를 내자 어느 틈에 그녀의 손 위로 올라와 있었다. 파티아가 딱정벌레의 더듬이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리오 마스코트…… 너도 따라 왔구나!”
이 장면을 본 태온은 황금판에서 해독했던 내용이 떠올랐다.
‘딱정벌레, 타키온 왕국의 상징문양!'
빛보다 빠른 입자인 타키온을 국명으로 정한 것은 에스퍼의 다섯 속성 ‘빛, 소리, 불, 속 그리고 환’ 중에서 ‘속’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두레는 파티아와 루아가 티라노사우루스 속에 있던 아이들임을 금방 알아보았다.
‘쟤들이 티라노사우루스의 암호를 해독한 모양이구나. 정말 신기한 일이야!’
두레가 물었다.
“혹시 너희들 천사의 집에 같이 있었니?”
파티아가 두레를 노려보았다.
“아저씨가 천사의 집을 어떻게 아세요? 혹시 아저씨도 마법사와 한패예요?”
파티아가 쏘아보는 눈매가 하도 사나워서 두레는 갑자기 긴장하여 말까지 더듬었다.
“아아, 아니다! 내 내가 마법사와 한패라니… 절대 아니다. 천사의 집… 그건 스칼이… 스칼… 너희들도 알지? 천사의 집에 같이 있었다며…? 근데 걘 어디 있지? 조금 전까지……”
두레가 신전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사람이라곤 그림자도 없었다. 루아가 어두운 얼굴로 물었다.
“스칼도 왔어요?”
두레가 말했다.
“그래, 내가 봤어. 저 리오라는 아이 곁에 있었거든. 근데 얘가……”
파티아가 말했다.
“혹시 스칼이 리오를 해친 거 아니에요?”
“글쎄 모르겠다. 스칼이 저 아이를… 아아 그럼……”
파티아가 리오의 목을 살펴본 후 말했다.
“이 나쁜 자식! 리오의 목을 졸랐나 봐요. 목에 붉은 자국이……”
“아아 난 그런 줄도 모르고……”
루아가 넋이 나간 얼굴로 중얼거렸다.
“스칼이 왜 그랬을까?”
그러다가 무언가 불길한 예감에 호주머니 속을 뒤지던 루아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없다! 내 마스코트…… 하트별…… 아아아아……!”
순간 파티아의 얼굴도 창백하게 변했다.
“스칼은 내 마스코트도 빼앗으려 했어. 도대체 그걸로 뭘 하려는 거지?”
루아가 두레에게 물었다.
“혹시 마법사는요? 마법사도 왔어요?”
두레가 말했다.
“그래, 그게 마법사가 틀림없을 거야. 지팡이가 보였거든.”
파티아의 얼굴에 먹구름이 드리웠다.
“마법사가 왜 우릴 따라왔을까? 그럼 여기도 혹시 천사의 집처럼……?”
다시 한 번 리오의 몸을 흔들어 보던 루아가 울먹이며 말했다.
“그보다 더 나쁜 곳인지도 몰라!”
파티아를 찬찬히 뜯어보던 두레가 태온에게 말했다.
“따님을 찾았구려!”
태온이 고개를 끄덕거렸지만 무언가 심상치 않은 눈치였다.
‘천신만고 끝에 만난 부녀가 왜 저러지? 만나자마자 싸웠나?’
그때 파티아의 목에 걸린 반달 목걸이가 두레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두레가 호주머니에서 조개목걸이를 꺼내어 파티아에게 내밀었다.
“혹시 이거 네 목걸이 아니니?”
파티아의 눈이 반짝 빛났다.
“아아, 맞아요! 제 거예요, 제 마스코트!”
조개목걸이를 받아든 파티아가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하자 태온이 두레에게 물었다.
“저 목걸이 어디서 났소?”
“스칼, 그 아이가 떨어트린 걸 주웠소. 근데 리안 교수 소식 들었소?”
“무슨 소식?”
“모르나 보군. 리안 교수가 천사의 집에 잡혀갔소.”
“뭐 뭐요? 어쩌다가……?”
“마법사가 잡아간 모양인데 어떻게 된 건지 나도 모르오.”
파티아가 조개목걸이를 목에 걸려다가 먼저 걸려있던 반달 목걸이를 벗어서 태온에게 내밀었다.
“이거, 아저씨 거예요?”
순간 태온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딸이 아무리 기억이 없기로 ‘아저씨’라니! 그 말은 두레에게도 충격이었다.
“아니, 그럼……!”
태온이 반달 목걸이를 받아들며 얼른 두레의 말을 막았다.
“아아, 아니오! 지금 기억이 약간… 혼란스러운가 보오.”
태온이 ‘약간’이란 말에 힘을 주어 말했지만 두레는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제 아빠를……!”
태온이 두레의 주의를 다른 데로 돌리기 위해 신전 기둥을 가리켰다. 8개의 기둥 중 바깥 쪽 기둥 꼭대기에 흰 비둘기가 앉아있었다.
“저 돌기둥이 좀 이상하지 않소?”
두레는 그보다도 매직랜드에 있던 흰 비둘기가 여기까지 따라왔다는 게 심상치가 않았다.
‘무슨 사연이 있는 비둘기임이 분명해!’
불길한 눈길로 비둘기를 바라보던 두레의 눈에 신전의 거대한 검은 기둥이 제대로 들어왔다. 두레가 8개의 기둥을 빙 둘러보며 말했다.
“아아… 그렇군! 돌기둥… 주사위 속에 또 다른 주사위… 저건 테서렉트라는 유명한 도형이지요. 초정육면체, 사차원의 상징!”
태온이 돌기둥을 찬찬히 살펴본 후 말했다.
“기둥의 양식이나 돌의 부식 정도로 보아 이 신전은 지어진지 족히 천년은 되었을 것이오. 천년 전 사람들이 테서렉트를 알았다면 우리가 모르는 어떤 고도의 문명이 아닌가 생각되오.”
두레가 반신반의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천 년 전에 그런 문명이 있었다는 얘긴 처음 듣는데……”
태온이 갑자기 열을 올렸다.
“우리가 아는 문명이 다가 아니라오. 고대 문명 중에는 흔적만 남기고 사라진 신비한 문명이 비일비재 하다오.”
두레는 고고학자들이란 하찮은 돌멩이 하나에 수만 년의 역사를 쓰는 사람들임을 상기하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좋소! 그게 고고학자들이 실직하지 않는 이유일 테니… 그렇다면 말해보시오! 저 신전은 대체 어떤 문명의 유산이오?”
태온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스쳤다.
“나도 모르겠소. 내가 웬만한 신전은 다 돌아다녔지만 저런 신전은 처음이오.”
두레가 산 정상 쪽을 가리켰다.
“그런데 저건 뭘까? 저 위의 오크통 같은 저 구조물들……”
“글쎄… 이 신전과는 영 어울리지 않는데……”
“우리가 정말로 이상한 세계에 온 거 아니오?”
신전 기둥의 거대한 그림자를 밟으며 중앙으로 걸어가던 태온의 눈에 신전 쪽으로 걸어오는 건장한 남자 세 명이 들어왔다. 그들은 모두 검은 양복을 입고 있었고 하나 같이 굳은 인상이었다. 앞장서서 걸어온 금발의 남자가 태온에게 말했다.
“당신들 누구요? 이곳이 출입금지지역이란 걸 모르오?”
태온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아…… 그렇소? 내가 몰랐구려! 그 그런데 여기가 어디오? 저건 무슨 신전이지?”
금발이 태온과 두레를 훑어보다가 명령조로 말했다.
“따라 오시오!”
테온이 당황하여 변명을 늘어놓았다.
“아아…… 내가 몰라서 잘못 온 것이니 곧 내려가겠소. 미안하오!”
태온이 아이들의 손을 잡고 몸을 돌려 내려가려 하자 금발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따라 오시오! 조사할 것이 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