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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生의 만남의 歷史
사람의 一生은 만남의 歷史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每日 만남의 連續 速에서 살고 있습니다.
어느덧 내 나이 백수(白壽)깜짝할 사이에 91살에 當道 하였습니다. 나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驗한 世上을 사신 까닭에 이 古稀 고개를 넘지 못하고 하늘나라로 가셨다. 그런데 나는 그 고개를 거뜬히 넘겨 그래서 이렇게 삶의 歷史를 엮게 된 것입니다.
父母, 兄弟姉妹, 家族, 親戚들과의 만남은 勿論이고,
이웃과 親舊들과 先後輩,
그리고 先生任들과의 만남,
結婚을 通한 配偶者와의 만남,
子女들과의 만남, 職長의 同僚들과의 만남,
길거리와 公共場所에서 만나는 많은 낯선 사람들,
人間의 삶의 旅路에서 每日 우리는 만남을 떠나서는 生覺할 수 없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人間과의 만남 뿐 아니고, 우리 周圍의 環境과 自然의 森羅萬象도 우리의 만남의 對象인 것입니다.
누구를 만나는가, 어떤 環境을 만나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一生이 左右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만남이 重要한 것입니다. 事實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父母를 잘 만나야하고, 兄弟 姉妹를 잘 만나야 하고, 親舊와 配偶者와 先生任을 잘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特히 學窓 時節에는 親舊를 잘 만나야 하고, 先生任을 잘 만나야 합니다. 나쁜 사람을 만나고, 나쁜 親舊들과 어울리면 人生을 亡치게 되기 때문입니다. 만남이 重要합니다.
東西古今을 莫論하고, 사람은 어디서나 좋은 사람도 있고 나쁜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紐帶人 處世術에 이런 말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出世를 하려면, 每日 自己보다 나은 位置에 있는 좋은 사람을 열명 征途 만나서 부지런히 正中하게 人事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一年 內에 반드시 좋은 일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一理가 있는 忠告라고 生覺합니다. 環境도 나쁘다고 生覺되면, 될 수 있 으면 그런 나쁜 環境에서 벗어나도록 해야 합니다.
亂氣流를 만난 航空機는 深하게 흔들 릴 수밖에 없고, 높은 波濤를 만난 선박이 搖動칠 수밖에 없는 것과 같이, 人生의 行路도 마찬가지입니다.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亂氣流 地域을 벗어나고 危險 地域을 避해야 하는 것입니다.
盧事緣이 부른 “만남”이란 노래에 첫 歌詞가 “우리의 만남은 偶然이 아니 야...”라고 始作하는데, 저도 그런 生覺을 했습니다. 저는 이러 한 만남은 결코 偶然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攝理하시고 人道하시는 일 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人間 關係의 만남이나 環境과 만남도 重要하지만, 社會生活을 해 보니까 有力한 分이나 높은 分들은 내가 만나고 싶어도 잘 안만나 준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電話를 해도 通話하기가 너무 힘이 듭니다. 朝鮮 王朝와 舊韓末의 混亂期와 日帝 時代의 暗黑期를 거쳐 解放 以後 建國 過程에서 南北 分斷의 試鍊과 苦痛을 겪었고, 6.25 同族相殘의 戰爭으로 거의 廢墟가 된 나라에, 繼續되는 革命 事態와 데모와 軍部獨裁의 苦難속에서도 挫折하지 않고 民主的인 政權 交替를 거듭하면서 오늘 우리나라가 이만큼 잘살고 있는 것은 奇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筆者는 이 奇籍이 결코 偶然히 이루어 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人生이 너무 아름답습니다. 나의 삶은 내가 살아가는 그 瞬間까지만 내 것이지 그 後에는 내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文學에 一生을 바쳐 볼려코하는 사람이 일찍부터 이 땅에서 사람들의 存在와 歷史를 通해 이루어 진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父母를 잘 못만나고, 兄弟나 親舊나 配偶者나 先生任이나 사람들을 잘못만나고, 環境을 잘 못만났어도, 그 모든 歪曲된 만남의 問題들도 解決될 수 있습니다.
筆者는 大山面 葛田 柳木에서 태어나서 눌려 살았디면 名譽의 榮光을 얻었까? 故鄕을 더나 客地에서 좋은 分들을 만나 希望의 길이 열렸습니. 葛田里에 살았다면 學位 取得을 못했을 것입니다. 나를 위한 삶 文學博士 學位 取得 歷史 紹介합니다.
살아오면서 지난날을 돌리켜보면 아버지와 어머니를 生覺하니 子息에 對한 父母任의 사랑이 얼마나 뜨거운 것인가 91歲 나이가 되어서 이제서야 조금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채찍에 쫓기는 軍馬처럼 不安한 生活의 聯速으로 어린 時節 兄弟가 많았고 집안이 家難하여 初等學校를 마치고 馬山商業中學校에 應試 合格 再從 兄에 依託 下宿하여 1年 다니던 中 6. 25戰爭으로 交通이 막히기 前 歸鄕, 戰爭 勃發 後 豫備軍 및 訓練 兵의 一種으로 國民 防衛 軍(學訓團)이 創設되어 젊을 사람들을 强制 徵集 붙잡혀서 學徒兵으로 編成되어 初等學校 校庭에서 訓練받고 酷寒에 홀바지와 홑웃도리, 고무신 차림으로 굶으며 行軍을 强行 倭館 戰鬪에 投入中 倭館에서 脫出 避難民 隊列에끼여 脫눈하다.
當時 1950年 11月까진 北進 統一을 눈앞에 둔 듯 했으며. 그러나 中共軍의 連續的인 攻勢에 戰爭은 새로운 局面을 맞게 되어 이에 韓國 政府는 獨自的으로 '國民防衛軍이 設置되어 國民防衛軍은 1950年 12月 21日 恐怖된‘國民防衛軍 設置 法’에 依하여 만 17~40歲 未滿의 第 2 國民兵이었다.
兵力 應募를 時作하자 瞬息間에 50萬名을 넘어섰으며, 政府는 이들을 慶南 北道 一員에 51個의 敎育 隊를 設置하고 收容했으며. 司令官은 軍 經歷 없는 大韓 靑年團 團長 김윤근을 신성모 國防長官을 뒷배로 단번에 准將으로 任官시켜 任命하고, 大韓 靑年團 出身들로 參謀 陣을 構成 副 司令官에는 獨立運動가 出身 윤익헌이 大領으로 特別 任命된 뒤 補職되어 戰鬪에 參加하다.
國民 防衛 軍 幹部들 豫算을 橫領하여 5萬名이 굶어 죽거나 얼어 죽고 營養失調에 결렸다. 그後 김윤근, 윤익현, 강석한, 박찬언, 박기환을 軍法會議에 회부해 銃殺刑에 처했다.
昌原大山初等學校 뒤쪽 2敎室에서 方榮權氏 外 敎育에 支待하신분들이 假稱大山中學校가 設立이 되어 濟洞里 상포부락 金慶鎭씨가 運營하던 事業場을 寄贈받아 文敎部 認可 大山中學校 開咬 當時 全國 서울, 釜山, 馬山等等 學生들과 聽講生을 聽講하다.
6. 25 戰爭으로 우리 學校는 63野戰病院으로 徵發되고 交通이 막혀 學校에 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當時 學群이 5年制로 馬山商業中學校 2學年 復棋하지 못하고 가슴 늑막 疾患이 생겨 治療 1年間 休學 後 大山中學校 庶務課長 金鐘三님의 도움으로 2學年 編入하여 3年을 마처습니다.
大山中學校 卒業 馬山商業高等學校 應試하여 當時 會員區 會員初等學校 校庭에 24用 軍텐트 40棟 1. 2. 3 學生들 軟弱한 生活環境 속에 馬山商業高等學校 3年을 마치고 大學에 가려고 工科大學에 應試 合格하여 아버지에게 議論한바 同生들도 눈을 밝혀 주어야지 하시기에 進學 못하였습니다.
昌原郡廳에서 實施하는 地方公務員 試驗에 應試 合格하여 發令을 받고 東邑事務所에 勤務하다 大山面事務所 옮겨 2年 7個月 勤務 中 張勉 政權이 執權하면서 兵役未畢로 辭退시켜 濟州道 第 1訓鍊所에 自願入隊하여 兵으로 基礎敎育을 받고 排出 訓鍊所 補充隊에서 待期중 光州步兵學校 內 尙武隊 機甲學校 敎育隊로 差出되어 6週 敎育을 받고 春川補充隊 待期 중 10機甲戰車隊대 創設部隊에 配屬 이렇듯 士兵生活은 어려운 點이 많았습니다.
國民의 生命과 財産을 保護하기 위하여 같은 배를 타고 共同運命 體인데 兵士들의 人格은 完全히 無視되는 點이 特히 견디기 어려운 點이었습나다. 第一 괴로운 것은 毆打였다.
잘못이 있거나 軍隊의 紀律에 違反하면 應當 處罰받는 것은 當然하나 私事로운 感情에 의해서거나 또한 불당한 指示에 順應 않다고 때리는 등 理由없이 毆打當하는 境遇가 많았다.
人格的으로 侮辱하는 辱說과 使役 아닌 使役 등 아무리 軍隊 末端의 士兵이라 하지만 兵士들에게도 人格이 있고 自尊心이 있는데 그것이 無視되는 것 같아 卒兵 身世가 恨歎스럽기도 해서 士兵 生活 면하고 싶었다.
6個月간 勤務 休暇를 얻어 서울 龍山 三角紙에 位置한 陸軍本部 副官 監室에 찾아가 紹介하는 사람, 아는 사람도 없는 그곳을 찾아가 兵籍係 擔當者를 만나 카투사에 가는 試驗이 있는지 問議(封套에 3萬원 同封)를 하니 없다 하면서 釜山에 있는 印刷工倉에서 技術工 募集이 있다하면서 試驗 應試願書를 받아 陸軍本部에서 當日 試驗에 應試하고 休暇를 故鄕에서 지나다 部隊에 復歸하여 戰車 兵 1種 補給 行政 要員으로 나날 連續이었습니다.
勤務 중 12月 中旬 釜山 廣岸里에 位置한 印刷工廠 活版部 揷紙要員으로 轉屬 命令이 내려와 10戰車機甲部隊 將, 兵 中隊 要員의 부러움을 뒤로하고 釜山 陸軍印刷工廠 部隊에 찾아가 轉入 活版部 庶務 職 補職을 받고 勤務 服務 期間을 마치고 除隊를 하였습니다.
除隊 後 故鄕에 돌아와 父母任 農事를 도와 지나다 釜山 陸軍印刷工 廠 部長 金瑛煥 中領 紹介로 서울特別市 恩平區 佛廣洞 製靴(軍靴)會社 總務課에 勤務 中 豫備軍 敎育 通知書가 나와 昌原所在 39師團 入隊 敎育을 마치고 歸家 後 會社에 復歸 못하고 집안에서 서들러 이웃 知人의 紹介로 慶南 密陽 난생 처음 가보는 明禮里라는 곳 崔氏家門 處女와 선을 보고서 舊式結婚 내 故鄕 葛田이라는 農村에서 사랑의 보금자리를 만들고 설흔살에 家長이라는 玉座에 올라 2 아들 딸을 낳았습니다.
製靴 會社에 復歸할려코 하니 里長에 出馬 勸誘로 洞民과 相議 끝에 面에 통보 이장 2년동안 하다가 사퇴하려니 1년만 더 하도록 勸誘 받았으나 辭退하여 軍務試驗 應試 合格하여 OSMA 兵器統制 團에 7年間 勤務중 財物 調査 特別調査 要員으로 일을 했습니다.
OSMA 兵器 統制 團에 勤務 中 越南 派兵으로 衛官 將校가 모자라 12月 中旬 候補生으로 差出되어 3士官學校 全身인 泰陵 校庭에서 6個月 敎育받고 少尉로 任官 後 釜山 載松洞에 位置한 兵器學校로 移送되여 8個月間 兵器 敎育을 받고 春川 隣近 兵器部隊 2年 勤務 중 高等軍事班 敎育을 받으라는 命을 받고서 다시 兵器學校에 入校 敎育을 마치고 部隊歸隊 못하고 前方 兵器勤務隊에 配置 되었습니다.
勤務 중 歲月이 흘러 大尉로 進級 兵器部隊 中隊長(中隊兵力 150名)으로 勤務 少領으로 進級 陸本에서 實施하는 財物 調査(Property inve stig ation)要員으로 差出되어 숫자 病院이 한글病院으로 改稱이 바뀌는 63野戰病院(國軍洪千病院長, 後 醫務監)에 派遣 要員으로 准將 1名, 大領 1名, 少領 1名으로 構成된 兵器 Inventory始作 되었습니다.
兵器 財物 把握 損失·紛失 報告書를 차트를 만들어 筆者가 說明하게 되어 病院長이 負擔할 損忘失 金額을 合算하니 2億 8千萬원이 發生 報告 病院長이 놀라며 傘下 兵器將校를 너무 믿었다 하시면서 派遣 調査冠 4名과 會議 續開 病院 直屬 餘他 野戰病院 部隊에 나누어 놓으니 損失金額이 發生하지 않았습니다.
이 病院에서 Inventory 마치고 他 病院으로 移送 準備 中 病院長이 불러가니 手鼓 많았다 하면서 언제가 當身을 찾을 것이라면 人事를 받고 헤어지고서 7個 病院 財物 調査를 Inve ntory 마치고 他 病院으로 移送 7個 病院 財物 調査를 마치니 OSMA로 轉屬 命令나 났습니다.
野戰 國軍洪千病院長님은 義務感(鄭秉浩)으로 補職變更 陸軍本部에 勤務중 大統領 下命으로 除隊 保社部 直屬 支援金을 받아 大韓家族計劃支援 센타 病院을 釜山市 中區 富坪洞(깡통 市場 只今 먹자골목)患者 800名 收用 病院을 지어 全國 外科醫師와 産婦人科醫師를 政府에서 差出 卵管, 精管 醫術 敎育을 20日間시켜 一線에 配置 施術이 時作되어 家族 計劃 事業을 成功시켜습니다.
OSMA 勤務중 業務를 手動으로 하였는데 手動타자기가 補給되어 익히기 위해 熱心히 練習하여 1分에 120打를 치게되어 商工會議所에 實施하는 打字機 試驗에 應試 1級 資格을 獲得하고 1年후 2팔 컴퓨터가 補給되어 檢索 遞信部長官을 하시던 유경희 任이 1969年 12月 하이텔 元老坊이 創立 釜山支部가 생겨 部隊 生活을 하면서 創設 멘바에 同參 爐邊情談 글을 쓰서 올리고 月會때 마다 外出證을 發給받아 參席하였습니다.
하루는 要員에 勤務하고 있는데 衛兵 所에 電話로 나를 찾아온 손님이 있다 하여 찾아가니 陸軍洪川病院 院長 任으로 반가워 人事를 하니 當身 人跡 事項을 몰라서 陸軍本部에 當身 軍番으로 照會 南區 橄灣洞 OSMA 兵器統制 團에 勤務 確認 찾아왔다면서 財物 調査 特別調査 要員을 그만하고 病院 일을 도와 달라는 請願이 있었습니다.
要請을 받고서 生覺하니 面書記 2年 7個月, 軍務院, 兵,將校 15年 7個月 4年 5個月 20年 勤務하면 年金을 받게 된다면서 이야기를 하니 그래 알았다면서 헤여 졌습니다.
3個月 후 釜山南區家族計劃協會 會議에 參席 後 왔다하면서 OSM A 두번째 찾아오셔서 月給을 얼마나 받느냐면서 묻기에 대답을 하니 釜山市 南區 龍號洞에 14坪 國民 主宅과 받는 月給을 倍를 줄 때니 나를 도와 달라고 하기에 拒絶을 못하고 病院에 가기로 許諾하였습니다.
兵器帝統團長에께 집안 事情이어서 辭職書를 提出 釜山市 南區 龍號洞에 14坪 國民 柱宅에 移徙 後 病院에 主任으로 發令 勤務하였으며 病院長 許諾 그 後 元老坊 生活이 繼續되었습니다.
全國高齡者 PC競進 大會에 全國 元盧坊에서 200名 모여 檢索 科擧 試驗에 釜山 代表로 出廷 問題 풀어 1等을 하여 償으로 冷藏庫 70리틀 받고 서울 各 新聞社 記者들이 찾아와 新聞에 記事가 실렸습니다.
하루는 元老坊 受講生들에게 컴퓨터 基礎敎育을 講義하고 있는데 5·16 쿠데타 政府가 끝나고 朴正熙 大統領 2期 民間 大統領 選擧 期間이 時作되어 院長任은 釜山市 選擧 總責을 맡아 敎育界 元老인 東義大學 理事長 金任植을 對同하고 元老坊 敎育場에 찾아와 選擧 運動次 오시게 되어 반갑게 人事를 나누였습니다.
選擧 運動 結果는 釜山에서 得票가 많이 나와 東義大學 金任植임은 比例 代表 國會議員으로 推戴 敎育分科委員長으로 活動하시다 伽倻洞 一帶 林野 58,000평을 拂下받아 東義大學를 綜合大學으로 承認 認可를 받았습니다.
살아온 길을 濾過 없이 돌이켜으 보면 軍 部隊生活을 마감 社會에 나와서 病院職員 課長으로 進級 勤務하면서 醫師들 屬에 生死古樂을 하면서 學閥로 因하여 푸 待接을 몇번 받고서 院長任을 찾아가 배움을 갖고 싶다고 아뢰니 東義綜合大學 理社長에게 付託 夜間大學에 獎學生으로 入學하라는 指示를 받게 되었습니다.
못 배운 限을 풀기 위해 40歲에 修能試驗을 거쳐만 學生으로 夜間大學 入學한 4年을 마치고 大學院까지 마쳤지만 但 한 學期도 文學 講義를 듣지 못했고 文學工夫를 하게 된 同期는 筆者가 精管, 卵管 醫師 敎育病院 勤務 中 院長任 불려가니 우리나라는 家族計劃 事業成功 말레이시아 政府의 招請으로 5年間 精管, 卵管 醫師 敎育을 위해 떠나니 자네는 내가 없으면 病源職員 課長으로 오래 勤務할 수 없으니 社團法人 團體를 만들어 獨立하도록 指示를 받아 이름 있는 病院長任들의 後援을 받아 定款을 만들어 總會를 거처 內務部 長官에게 稟議 社團法人 釜山法醫鑑定委員會를 發足하다.
釜山法醫鑑定委員會 常任理事로 勤務時 서울大學校 文學敎授 계셨던 87歲의 老令 敎授任을 當時 하이텔 爐邊情談에서 알게 되어 釜山에 모셨고 누가 시켜서 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지만 率直히 떨리는 마음속엔 부끄러움과 글쓰기는 원래 나와 실낱같은 因緣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老 敎授任 89歲 되시던 어느 날 저를 만나자 해서 서울을 찾아갔을 때때 이젠 가진 것 (많은 冊)을 整理 後代에 물려 주려니 食口中에 아무도 받을 사람이 없고 釜山 松島에 사는 딸 아들 外孫者가 물려 받게다하여 當時 釜山大學校 物理大 隨筆 文學科 入學하여 外孫子 名義로 2億 5千萬원을 맡기었는데 2學年 때 軍服務 除隊를 하여 復學 中 外할아버지 찾아와 文學을 해서 밥 먹을 수 없으니 大田에 있는 KIAS에 轉科 合格證을 보이다.
外할아버지는 失望 當身에게 물려주고 싶다는 文學 敎授任의 말씀이 계셨고 그 後 많은 文獻을 釜山집으로 宅配로 無償으로 寄贈받은 後부터 살아계실 때까지때 까지 隨筆 한권 한권을 읽은 후 讀後感을 要求하셨고 病院 일 때문에 冊을 읽지 못하여 讀後感을 보내지 못하고 1個月 後부터 읽은 冊 內容의 讀後感을 보내니 滿足하시면서 釜山大學校 外孫子 名義로 寄託한 2億 5千萬원을 當身名義로 修整 寄託 해 놓았다 했다.
一週日 後 釜山大學校에서 連絡와 찾아가니 寄與入學 通知書를 주면서 文學博士 3年 코스 敎育을 받으라면서 그 자리에 文公部 홈페이지에서 東義綜合大學 碩士 學位證과 經營大學원 學位證을 出力 보이면서 文學博士 3年 入學願書 作成 오늘부터 出講하라기에 文理大 隨筆 文學科로 案內를 받아 찾아가니 總 23名으로 講義를 받게 되다.
3년課程을 마치고 論文을 써서 提出하니 23名 中 論文審査 結果 學位論文이 잘되었다 하면서 個人 相談을 하자면서 敎授가 1千萬원 돈을 準備하라기에 나는 寄與 入學生인데 무슨 돈이냐면서 웃으면서 이야기하니 아시면서 뭘 그런 말을 하기에 젊은 親舊에게 讓步하니 다음 期會 받도록 하였으나 TO가 없어 받지 못했습니다.
老 敎授任은 自己 著書를 물려준 弟子가 學位記를 받지 못함을 안타까워 하시며 둘째 아드님이 釜慶大學校 總長 理학博士 金榮燮에게 찾아가 銳敏한 感受性과 날카로운 直觀力으로 名聲을 날리던 分이 아드님에게 懇曲히 付託하여 釜慶大學校 國語國文學科에 入學 모든 科程의 節次를 밟아 學位論文을 提出하여 所定의 試驗과 論文審査에 合格하여 文學博士 學位를 받았습니다.
75살 弟子가 學位를 받게되는 것을 깊게 生覺하시며 病苦로 苦生하시다가 世上을 떠나신 敎授任 "仁奈 金興壽"는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每日같이 弟子가 잘되기를 바라며 하늘나라에서 祈禱하고 계시는 敎授任을 뵙고 이승에서 못 이루신 便安한 삶 이루시길 무릎 꿇고 빌어드립니다.
그 동안 情든 病院生活을 마감 職場生活 46年 78歲에 縱貫 언제까지 내 마음대로 健康하게 살 줄 알았는 데 몸이라는 집이 忘가 저 무너지는 瞬間, 내 몸은 나하고 가장 親한 벗이었으나 次次 나이가 들면서 내 몸은 틀어지기 時作했고 交通事故로 나의 몸에 이렇게 奇襲的으로 反亂을 일으켜 身體에 病魔가 찾아와도 職場을 射手 病院이기에 職場生活을 할 수 있었고 理事長任과 理事任에게 感謝의 글을 올립니다.
社會에 나와 勞動部에서 支援金 30 0萬원을 支援받아 컴퓨터 修理 資格證과 서브構築 資格證을 獲得하였으며 釜山廣域市 釜山綜合老人福祉管에서 컴퓨터 講師 16年을 하고 壯年 選定基準 끝난다.
우리 父母任께서 大學에 合格하여서나 敎育을 家難 때문에 시키지 못하고 職場生活을 하며 大學 4年, 大學院 2年. 文學博士 3年科程 마첬음을 生覺하니 不孝子인 저를 위해 흘리셨을 눈물을 生覺해 봅니다.
그리고 筆者에께 잘해 주시던 院長任은 말레이시아에서 卵管, 精管 醫術專修 中 3年 차에 過勞로 서려져 運命하시고 아버지, 어머니 只今 내 가슴에는 그 많은 눈물이 얼마나 살아 숨 쉬고 있는가를 反省해 봅니다.
아버님과 어머님을 家族墓地 安置해드렸는데 昌原 水道 淨水場이 擴張 計劃工事로 移葬하여 樂骨堂에 모시고 글을 쓰니, 나 卽時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그리고 그間 自敍傳과 隨筆問題 집 14卷 原稿紙를 執筆해 出刊하여 여러 네티즌님들에게 나누어 드렸습니다.
"나의 삶 履歷書 쓰다" 살아 있을때 執筆 할 것입니다. 긴글 읽어 주셨서 感謝합니다.
仁奈 金 興 6壽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