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4월 5일
대저생태공원 부산 낙동강유채꽃축제(4월 6일~4월14일)를 다녀왔다 .
원래는 남지 창녕 낙동강유채꽃축제(4월 11일~4월 14일)를 가려고 했는데 버스 시간이 안 맞아 대저로 방향을 틀었다. 11시 50분에 현장에 도착했는데 꽃들은 거의 만개가 되어있었고 행락객들도 제법 있었다.
촬영을 하면서 아래쪽으로 내려가니까 튤립과 수선화등 여러 가지 예쁜 꽃들을 심어놓았다.
좀 더 많이 심어놓았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하면서 벚꽃이 있는 둑으로 올라갔다.
강서 낙동강30리 벚꽃축제가 열렸던 둑에는 벚꽃은 거의 떨어졌지만 행락객들이 벚나무 터널을 걷고 있었다.
나도 둑을 걸어서 입구까지 걸었는데 멀리서 보니까 구포대교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이 보였다.
구포대교에 보도가 있으니까 올라가서 찍고 있는 것인데 문제는 올라가는곳을 알 수 없는것이였다.
한참을 두리번거리며 찾으니까 화장실 옆에 붉은 철재 계단이 보였다.
계단옆 공터에는 행락객들이 자리를 깔고 준비한 음식을 먹고 있었다.
그걸 보니 나도 배가 고팠지만 그냥 계단을 올랐는데 말짱 헛일 했다. 반대 방향이었다. 유채꽃을 보려면 길을 건너야 하는데 엄청난 속도로 달리는 차들을 피하여 길을 건너는 것은 무리.
포기하고 내려와서 전철 타려고 구청역쪽으로 가는데 건널목 큰길옆에 다리로 가는 계단이 보였다.
배는 고팠지만 틀림없을 거라 믿고 올라갔는데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원래는 다리에서 대강 찍고 전철 타러 가려고 했는데 다리 위에서 보는 풍경이 보기 좋아서 걷다 보니까 950m짜리 대교를 건너 버렸다. 다음에 갈일이 있으면 또 건너보고 싶다.
다리를 내려왔는데 주위에 식당이 안보여 구포철도역으로 가서 주변 식당에서 식사하고 전철타고 귀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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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십종수(八十種樹)
박목월 선생의 수필 '씨 뿌리기'에 호주머니에 은행 열매나 호두를 넣고 다니며 학교 빈터나 뒷산에 뿌리는 노교수 이야기가 나온다. 이유를 묻자 빈터에 은행나무가 우거지면 좋을 것 같아서라고 했다. 언제 열매 달리는 것을 보겠느냐고 웃자 "누가 따면 어떤가. 다 사람들이 얻을 열매인데" 하고 대답했다. 여러 해 만에 그 학교를 다시 찾았을 때 키만큼 자란 은행나무와 제법 훤칠하게 자란 호두나무를 보았다. 홍익대학교 이야기일 텐데 그때 그 나무가 남아 있다면 지금은 아마도 노거수(老巨樹)가 되었을 것이다.
"예순에는 나무를 심지 않는다(六十不種樹)"고 말한다. 심어봤자 그 열매나 재목은 못 보겠기에 하는 말이다. 송유(宋兪)가 70세 때 고희연(古稀宴)을 했다. 감자(柑子) 열매 선물을 받고 그 씨를 거두어 심게 했다. 사람들이 속으로 웃었다. 그는 10년 뒤 감자 열매를 먹고도 10년을 더 살다 세상을 떴다.
황흠(黃欽)이 80세에 고향에 물러나 지낼 때 종을 시켜 밤나무를 심게 했다. 이웃 사람이 웃었다. "연세가 여든이 넘으셨는데 너무 늦은 것이 아닐까요?" 황흠이 대답했다. "심심해서 그런 걸세. 자손에게 남겨준대도 나쁠 건 없지 않은가?" 10년 뒤에도 황흠은 건강했고, 그때 심은 밤나무에 밤송이가 달렸다. 이웃을 불러 말했다. "자네 이 밤 맛 좀 보게나. 후손을 위해 한 일이 날 위한 것이 되어 버렸군."
홍언필(洪彦弼)의 아내가 평양에 세 번 갔다. 어려서 평양 감사였던 아버지 송질(宋軼)을 따라갔고, 두 번째는 남편을 따라갔으며, 세 번째는 아들 홍섬(洪暹)을 따라갔다. 아내가 처음 갔을 때 장난삼아 감영에 배를 심었고, 두 번째 갔을 때는 그 열매를 따 먹었다. 세 번째 갔을 때는 재목 으로 베어 다리를 만들어 놓고 돌아왔다. 세 이야기 모두 '송천필담(松泉筆譚)'에 나온다.
너무 늦은 때는 없다. 예순만 넘으면 노인 행세를 하며 공부도 놓고 일도 안 하고 그럭저럭 살며 죽을 날만 기다린다. 100세 시대에 이런 조로(早老)는 좀 너무하다. 씨를 뿌리면 나무는 자란다. 설사 내가 그 열매를 못 딴들 어떠랴.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오청원 교장님이 보내준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