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던져진 존재의 독백 – 옛날에 참 예뻤지
우대식(시인)
이화은 시인은 글을 쓰면서 만난 몇 안되는 심리적(?) 벗이라고 생각하며 지내왔다. 과연 심리적 친구, 이러한 말이 있을까 싶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지내왔다. 옛말에 동사위붕(同師爲朋)이요, 동지위우(同志爲友)라 했다. 스승이 같으면 붕(朋)이라 칭하고 뜻이 같으면 우(友)라 칭한 것이다. 더 나아가 이년위우(異年爲友)요 망년지우(忘年之友)라 했으니 벗(友)이란 연배를 초월하기 일쑤이다. 나이를 넘어 1년에 한 두 차례 술집에서 만나 우의를 다져온 사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망년지우인 셈이다. 그것은 이화은 시인의 대범과 낭만이 빚은 인간 관계의 소산이라 할 터이다. 이 대범과 낭만의 이면에 불타는 내면이 있다는 것은 오래 전부터 느껴왔던 터이고 어느 시에서도 시인이란 “불타는 장작을 뒤집어”야 하는 운명임을 스스로 고백한 바 있다. 대개 매혹적인 인간형들이 가지고 있는 두 가지의 상반된 성질, 예를 들어 따스함과 서늘함 그리고 인정과 무관심 등의 묘한 결합이 이화은 시인에게도 있다. 좀 더 쉽게 말하면 어떤 편벽이 있다. 한쪽으로의 기울어짐이 어쩌면 이화은 시인의 시가 지닌 매력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번 시편들은 피투성(被投性)의 인간 실존에 대한 깊은 번민이 고여 있다. 물론 이러한 양상이 사르트르의 “본질에 우선하는 실존”이나 “앙가쥬망”으로 전이되지는 않는다. 다만 내던져진 존재로서의 비애의 표정이 쓸쓸히 새어나오는 것도 사실이다.
길에서 우연히 만난 옛 이웃이
아는 듯 모르는 듯 애매하게 웃는다
곁에 선 남편의 눈짓으로
아프구나
어제 어제 어제의 어제까지 모두 잊어버린다는
그 아름다운 병에 걸렸구나
짐작한다
상어 이빨 같은 과거에게 이제 물리지 않아도 되는,
그녀의 눈 속에 평화가 가득하다
행여
피 묻은 꽃다발 하나 건져볼까 돌멩이를 던져 보았지만
어림없다 완고하다
애매한 웃음에
애매한 웃음으로 답하며 돌아서는데
그녀가 당도한 저 평화의 구역에는
정말 웃음만 있을까
웃어도 될까
웃을 수밖에 없는 어떤 까닭이 있을까
의심하고 또 의심한다
그녀가 남기고 간 흰 꽃 같은 웃음이
성난 이빨처럼 나를 물어 뜯는다
나는 아직 멀었다
-「웃음을 의심하다」 전문
이 시의 핵심적 정황은 역설과 아이러니를 통해 드러난다. 역설로서의 “아름다운 병”과 아이러니로서 “눈 속에 평화”의 실체는 치매라는 병이며 그 결과물이다. “우연히 만난 옛 이웃”의 애매한 웃음 속에서 시적 화자가 인지한 병의 실체는 치매이며 그 증상은 “어제 어제 어제의 어제까지 모두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병”이라는 규정은 바로 이 지점 즉 과거에 대한 일체의 망각에서 비롯한다. 그 과거란 “상어 이빨”과 같은 것으로 온갖 오욕의 기원으로 작동한다. 그러한 점에서 치매는 “아름다운 병”이 되는 셈이다. 사유란 경험과 동반한다는 점에서 경험의 망각은 사유의 부재를 불러오게 된다. 시적 화자가 이 부분에 집착하게 된 연유의 이면에는 시인으로서의 자의식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사유란 경험의 단순한 재생이 아니라 경험된 것 가운데서 감각만 될 뿐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사건에서 시작된다는 것이 들뢰즈의 사유론이다. 즉 예민한 감각의 촉수와 보이지 않는 것을 인지하려는 고투가 사유이며 그것의 드러냄이 예술이라는 측면에서 예술가는 오마쥬의 대상인 동시에 현실적 관점에서 본다면 괴롭기 짝이 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늘 애매한 웃음을 웃는 “그녀가 당도한 저 평화의 구역”은 경험의 망각과 사유 부재의 공간이라 할 수 있다. 던져진 존재로서 인간의 실존에 대한 연민과 함께 “의심하고 또 의심”할 수밖에 없는 시적 주체의 양가 감정이 이 시에 투영되어 있다. “흰꽃 같은 웃음”에 묻은 상처란 삶의 전 과정이며 치매란 완전한 망각인 죽음의 전 단계라는 점에서 “웃음을 의심하”는 일은 끝내 볼 수 없는 죽음을 사유하는 한 방식이 될 터이다. “나는 아직 멀었다”는 선언적 문장은 어쩌면 인간이 끝내 중얼거리게 되는 내적 비명이라 할 수 있다.
헌 신문지를 깔아 놓고 멸치똥을 까며 마주 보고 웃는다
노부부
저 하염없는 풍경을 세윌이라고 해야 하나
그냥 평화라고 하면 안되나
저녁이라고 하면 안되나
-「노인7-늙어가는 일은 지독한 희극이다」 전문
이번 시편들 속에 유독 늙음 혹은 나이를 사유의 대상으로 삼은 작품들이 많다. 생로병사의 과정을 우리는 단순히 자연이라 통칭하지만 개별자들에게 죽음이란 내던져진 존재로서 극명한 자기 확인이라 할 수 있다. 앞의 치매에 대한 시가 완전한 죽음의 전 단계인 의식의 죽음을 통하여 실존의 비애를 그리고 있다면 이 시는 세월의 더께에서 비롯되는 “평화”를 형상화 하고 있다. “늙어가는 일은 지독한 희극이다”는 부제는 젊은 날에는 도무지 생각할 수 없었던 일이 일상화될 때의 이질적인 정서를 반영하고 있다. 사람살이란 그악하기 짝이 없는 경우가 허다하며 수많은 자극과 유혹 그리고 욕망의 웅덩이를 텀벙거리고 건너오기가 일쑤이다. 더군다나 교환가치만이 최선으로 작동하는 한 세상을 건너와 “헌 신문지를 깔아 놓고 멸치똥을 까며 마주 보고 웃는” “노부부”의 형상은 동양 예술의 여백을 연상시킨다. 비어서 아름다운 것의 경지란 오욕의 전 과정을 통해 얻은 결과값이다. “세월”과 “평화” 그리고 “저녁”이라는 말의 등가적 성립도 젊음과 전쟁 그리고 아침을 통과해 온 자의 경험치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 짧은 한 편의 시에서 받는 무한한 위로는 누구나 직면하게 될 “저녁”과 “세월”이라는 일상이야말로 삶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옛날 시가 좋았어
옛날에 참 예뻤지
옛날의 나를 그리워하는 당신 앞에
옛날의 나를 데리고 올 재간이 없어요
옛날로 가는 기차는 끊어진지 오래
나도 내가 낯설답니다
기찻길 옆에서 기차가 오는 동안 맥문동과 놀았다
보라가 좋았다
보라가 내 귀에 무언가 속삭인것 같은데
나는 꽃의 말을 알아 듣지 못하고
사람들과 휩쓸려 기차를 탔다
그 기차는 편도행이라고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고 말했는지도 몰라
그 예쁜 옛날은 기찻길 옆에서 보라와 놀게 두고
우리는 이제 차나 마실까요
죄 없는 찻잔 속을 너무 오래 휘저은것 같아요
찻값은 제가 낼께요
미안해요
-「미안해요」 전문
이 시는 앞의 시에서 형상화 한 “세월”의 실체를 규정하고 있다. “옛날의 나를 그리워하는 당신”에게 답하는 형식으로 쓴 시를 통하여 흘러간 시간이란 끝내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하이데거는 시간이라는 어떤 객관적인 무언가가 있고 그 시간 안에서 어떤 여러 가지 일들이 벌어진다는 생각을 비판한다. 그에 따르면 우리가 애초에 객관적인 시간을 기록할 수 있는 이유는 그 시간이 우리에게 의미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바로 의미를 가진 시간인식으로부터 객관적인 시간이 파생적으로 발견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시에서 “옛날”이라는 시간의 지표도 “시가 좋았어”, “참 예뻤지”와 같은 사건의 맥락과 끈이 닿아 있다. 그러한 점에서 “옛날의 나를 그리워하는 당신”은 옛날의 나를 그리워하는 나의 또 다른 퍼소나이기도 하다. “나도 내가 낯”선 세계에 도달했다는 것은 ‘좋았다’ 혹은 ‘예뻤다’와 같은 것으로부터 멀어진 세계의 생소함을 감각했음을 의미한다. 이 시 중간의 기울여 쓴 부분은 시적 화자의 과거 행적에 대한 나레이션으로 구성되어 있다. “맥문동”의 “보라”를 좋아했지만 그 “보라”가 건넨 “꽃의 말을 알아 듣지 못하고” 세속의 무리들과 어울려 “편도행” 기차를 타고 옛날로부터 멀어진 여정을 찬찬히 말해준다. 이 고백적 진술을 관통하는 인생론은 쓸쓸하지만 끝내 관용하는 생의 태도라 할 것이다. “편도행”에 묻은 비애와 단호함의 혼란을 관용하는 힘이야말로 요란스러운 예술적 태도를 넘어 자신이 살아온 세계를 긍정하는 데서 비롯하는 것이다. “찻값은 제가 낼께요/미안해요”에 담긴 염치와 자존은 시를 통한 인생론인 셈이다.
한기로 피는 꽃이 있었구나
한 남자의 피묻은 발을 닦기 위해,
한 남자의 피묻은 발을 감싸 안고
아낌없이 지는 꽃이 있었구나
“목련아 너 어디 있느냐”*
“예 주님 저 여기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요”
하늘과 꽃의 밀담을 엿듣는 황홀한 봄이 있었구나
*구약성서 「사무엘기」에서 인용
-「사순절에 피는 꽃」 전문
이 시는 교회력으로 사순절 기간에 피는 목련의 순결한 이미지와 신의 음성을 통하여 신과 인간의 관계를 알레고리적으로 보여준다. 사순절이 대략 3월 초에서 4월 중순까지며 목련은 그 시기에 피었다 진다는 점에서 “한기로 피는 꽃”인 셈이다. 목련꽃의 황홀한 낙화와 “한 남자의 피묻은 발”의 이미지는 선명하게 겹쳐진다. “아낌없이 지는 꽃”으로서의 목련은 세속의 인간을 위해 자신의 버린 예수의 피 묻은 발의 이미지와 중첩되며 이미지를 확장한다. “목련아 너 어디 있느냐”는 절대자의 음성은 창세기 죄 지은 아담을 호출하는 절대자의 목소리를 연상케 한다. 절대자의 음성이란 로고스 즉 진리를 상징하는 것이며 어떠한 거짓도 용납될 수 없다. “예 주님 저 여기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요”라고 말하는 목련의 형상 속에 시적 화자가 생각하는 온전한 세계상이 담겨 있다. “하늘과 꽃의 밀담”은 어쩌면 인간과 하늘이 관계 맺고자 하는 모범적 표상일 터이다. 그러나 그것은 밀담 즉 존재와 존재자 사이의 특별한 대화이기 때문에 타자는 알 수 없는 것이다. 허무하도록 지는 꽃의 형상 속에 신과 존재의 비밀을 “황홀”로 간파하는 혜안을 보여준다. 앞의 노년에 관한 시편에서 묻어 나는 비애의 표정이 비관적 세계로 흐르지 않는 이유는 신과의 대면을 통한 성숙한 내면 때문이라 추론하게 된다. 이는 아마도 세월이 주는 지혜를 넉넉히 수용해 낸 정신의 힘에서 비롯될 터이다. 모든 것을 희망으로 치환하려는 종교의 힘은 종종 문학을 망치기도 한다. 이화은 시인에게서는 그러한 모습을 볼 수 없다.
일종의 독극물이다
다량을 복용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저 화려한 포장지에 아예 손대지 마라
소량이라도 후유증이 심각하다
-「희망」 전문
희망에 대한 시적 정의가 “독극물”이라는 사실은 냉철한 현실 인식과 삶의 지혜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희망의 과장은 인간으로 하여금 현실로부터 거리를 가지게 만들고 실제의 자신을 소외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세월의 더께를 통하여 얻은 지혜는 담담한 일상을 살아가는 것이 대개의 인생이며 지나친 희망은 끝내 실현되지 않고 더 깊은 절망을 불러온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금단의 열매와 같은 “희망”이라는 단어 앞에 인간의 욕망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늙어간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고뇌가 깊이 새겨진 시편들과 절대자와 관계 그리고 인생의 지혜를 담은 시편들을 살펴보았다. 비애의 표정이 새겨진 것은 분명하나 앞에 말했듯이 비관적 세계관으로 흐르지 않는 것은 이화은 시인의 결백한 품성 탓이라 할 수 있다. 유한 듯 보이지만 때가 되면 보이는 단도직입의 태도는 시적 포우즈를 거절하고 단호한 시의 결구로 아로새겨져 있다. 후배들을 모아 술을 내면서도 끝내 농으로 일관하되 그 무엇도 가르치려고 하지 않는 자세야말로 이화은 시인의 시적 실존의 단면이라 할 수 있다. 아무 것도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이렇게 들었다. 누구나 혼자 가는 길이다. 가끔 만나 술을 마시자. 술값은 내가 치르마. 그리고 다시 혼자다.
첫댓글 멋져요
제가 존경하는 우리 선생님 우대식 시인님
시도 멋지고 평론도 너무 멋집니다 짱! 입니다
맞아요, 시도 평론도 참으로 멋지네요.
감상 잘 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