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관료나 공무원, 국회의원 등이 현장을 잘 모르는 듯해요.” 지난 7월 13일
오후 무역협회 회장실에서 마주한 김재철(69) 회장은 1년여 만의 언론 인터뷰에서 말을 아꼈지만 쓴소리도 서슴지 않았다.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며 바다를 누빈 기업가로서, 경제계 원로의 한 사람으로서 던지는 생생한 조언이다. 사회 전반에 팽배한 이념 논쟁에 따른 편 가르기 모습은
답답해 보였을 법하다. 중국이 무섭게 성장한 배경 가운데 하나도 이념보다는 현장을 잘 아는 테크노크라트가 많아서였다고 말하는 김 회장은 ‘산을
옮기는 것은 이념이 아니라 트랙터’라는 피터 드러커의 말을 옮기며 현장 경험과 실천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요즘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어떤 기분이 듭니까. “답답하죠. 그래서 아예 텔레비전을 켜지 않습니다. 신문은 기사를 골라볼 수 있지만
텔레비전은 싫든 좋든 봐야하니까요. 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오면 몸과 마음이 푹 가라앉곤 합니다.”
-그런 기분을 추스르는 좌우명이나 마음에 되새기는 문구 같은 게 있나요. “어느 조직에서나
윗사람이 모범을 보여야 기업도 나라도 잘 됩니다. ‘병든 주인도 아흔아홉 머슴 역할을 한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CEO라면 더욱 그래야죠.
나는 젊은 시절에 남 못지 않게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원양선을 타면서 죽을 고비를 많이 넘겼죠. 그때 죽었으면 지금 아무것도 없지 않겠어요.
그래서 지금 더욱 대범할 수 있는 듯해요. 최선을 다했으면 그만 아닙니까. 심신의 한계까지 최선을 다해야죠.”
-경제 전망이 밝지 않은데 어떻게 봅니까. “수출뿐만 아니라 우리 경제가 걱정이에요. 단군
이래 가장 잘 산다지만, 가장 소란스러운 것도 사실이고…. 무엇보다 경제 주체가 성장에 대한 확신을 잃었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투자는 기업가의
모험정신에서 비롯되는데 지금은 다들 위험 감수는커녕 위험 관리에만 치중하고 있어요.
일본의 어떤 기업에서는 중역 회의에서 한두 사람이
찬성할 때 (투자를) 결정한다고 합니다. 대여섯 명이 하자고 달려들 때는 이미 늦었다는 거지요. 별난 사람이 일을 저지르는 것 아닙니까. 새로운
창의력이 발휘되는 분위기?필요합니다. 우리 사회는 요즘 그런 게 용납되지 않는 것 같아요. 예컨대 재벌을 나쁘게만 보잖아요. 삼성이 반도체를,
현대가 자동차를 손댄 건 그룹 차원에서 적극 밀어줘서 시작했던 일인데도 말이죠.”
-하반기
수출 전망은 어떤가요. “하반기 걱정을 많이 하는데 하반기까지는 그럭저럭 괜찮아요. 올 상반기 수출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39% 늘어 유례없는 호조를 보였습니다. 반도체 ·휴대전화 ·자동차 등 5개 주력 품목이 선전한 결과죠. 중국 ·일본 ·대만 등
경쟁국과 비교해도 수출 증가세가 높은 편입니다.
이런 호조는 하반기에도 계속될 전망입니다. 미국과 일본 등 선진국 경기가 여전히
괜찮고, 주력 수출 품목인 정보기술(IT) 제품 시장도 성장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하반기 수출여건이 밝은 것만은
아닙니다. 고유가 등으로 수출업계가 채산성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중동지역 불안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미국의 금리인상, 중국의
긴축정책 등이 우리 수출에 부담을 줄 것으로 우려됩니다.”
김 회장은 수출 이야기를 하면서 중국의 추격을 주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과거 세계경제 여건과는 상관없이 경공업 분야에서 중국에 밀려 선진국 시장을 내준 경험이 있듯, 머지않아 이런 현상이 반도체 등 우리가
아직 경쟁력이 있는 분야까지 확대될 가능성이 있다는 설명이다.
“미래에 먹고 살 것을 미리 준비해야 하는데 다음에 따라올 게
막연합니다. 위험을 감수하고 과감하게 투자해야지요.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지요. 그런 점에서 정치권도 좀더 고민해야 합니다. 정치권은 민생과
경제보다는 공론과 이념을 둘러싼 극심한 정치대결과 당리당략에 집착하는 구습을 벗지 못하고 있어요. 경제는 민주주의 원리가 아니라 경제논리에 의해
움직여야 하는데 정부의 경제정책은 국민정서에 지나치게 민감한 것 같고요. 각종 규제를 풀어주면서 투자하라고 하면 잘할 텐데…. 뭘 이뤄놔도
민주적이니 합법적이니 하는 부분만을 지나치게 따지니….”
김재철 회장은 누구인가 |
1935년 전남 강진에서 태어난 김재철 회장은 바다 개척이 한국의 살 길이라는 뜻을 품고 부산수산대에
진학하면서 바다와 인연을 맺었다. 대졸자로는 극히 드물게 원양선인 지남호에 몸을 싣고 수출 전선에 뛰어든 그는 승선 3년 만인 26세에 선장이
됐고, 69년에는 35세의 젊은 나이에 동원산업을 세웠다.
동원산업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어획량을 자랑하는 수산기업으로 키운 김
회장은 현재 17개 기업을 거느린 동원그룹의 총수이자, 8만여 개 무역업체를 대표하는 한국무역협회의 사령탑을 맡고 있다.
‘선장
출신의 그룹 총수’, ‘현대판 장보고(張保皐)’, ‘해양 개척의 선두 주자’ 등의 수식어가 잘 보여주듯 김 회장은 바다를 개척해 지금의
동원그룹을 일궜고, 한국의 미래도 바다에 달려있다고 믿는다. “지도를 거꾸로 보면 한국인의 미래가 보인다”고 강조하는 그는 한반도를 바라보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해 한국의 무한한 발전 가능성을 주창하는가 하면 복합무역전략, 동북아물류중심지화 전략 등을 강조하는 미래 전략가로도
활약하고 있다. 91년 금탑산업훈장, 98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상했으며 ‘거센 파도를 헤치고’ 등의 수필이 초 ·중등교과서에 수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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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계의 그런 우려를 정부 측에 전달하지 않았습니까.
“이야기는 기탄없이 합니다. 정부 규제도 문제지만 요즘 사회의 분위기가 더 큰 문제입니다. 시대정신이랄까. 중국을
보세요. 좀 오래된 이야기지만 덩샤오핑(鄧小平)은 선부론(先富論)을 주장했지요. 능력있는 사람과 지역부터 부자가 되라는 거죠. 반면 우리는 모두
같이 가자 아닙니까.
국제 사회에 나가 경쟁해야 살 수 있는데 나라 안의 평등만 강조해서야 되겠습니까.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의
인식과 정책이 우리보다 훨씬 자본주의적이지요. 그러나 난 가급적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합니다. 시계추처럼 언젠가 다시 돌아오지 않겠어요?”
반기업 정서 해소는 교육으로 -결국 국민의 인식과
관련된 문제인 듯한데, 그래서 경제교육에 관심을 많이 갖는 겁니까. “경제교육은 무역협회 역점 사업 가운데
하나입니다. 지난 2월 경주에서 중 ·고교 교사를 대상으로 경제단체장들이 시장경제 특강을 했죠. 어느새 만연하고 있는 반기업 정서는 잘못된
교육에서 비롯된 점이 많아요. 그래서 선생님들이 기업의 본질과 시장경제에 淪?올바르게 가르쳐달라고 부탁을 하죠.
청소년 무역현장
체험단 파견 행사도 비슷한 취지입니다. 서울 ·부산 ·광주 지역 초등학생 250명을 대상으로 해당 지역의 대표적인 수출현장을 탐방하는 자리를
만들었지요. 초등학생들에게 무역에 대한 개념과 우리 경제에서 무역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일깨워주기 위해 올해 처음 시행한 사업입니다. 현대자동차
·포스코 등 대표적인 수출기업과 부산 ·광양 ·인천항 등을 견학하며 무역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직접 보고 배울 수 있는 기회죠.
좀
늦었다 싶지만 교육 쪽으로 눈을 돌리고 있습니다. 마냥 (기업을) 비판만 하는 사람들 보면 실정을 잘 몰라요. 너무 이념적인 문제에만 치우쳐
있죠. 국내외 현장에 가봐야 합니다. 특히 국제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모르는 것 같아요. 확고한 이념이 있어서라기보다 이론에 도취해 엉뚱한
이야기를 하는 듯합니다.”
-교육계 인사와 자주 만납니까. “접촉은
하는데…. 그런 얘기를 합디다. 우리나라 교육제도에 문제가 많은데 이를 고치려면 교육부 장관이 총리 이상의 능력이 있어야 한다더군요. 그렇지
않으면 기존 제도의 포로가 돼 바꾸지 못한다고.
어떻게 생각하면 내가 속한 세대와 산업발전 세대, 그리고 386세대 사이에 대화가 너무
적은 것도 문제지요. 옛날에는 자식과의 대화보다 먹고 살기에 바빴지 않습니까. 교육의 기본은 가정인데, 윗세대가 얼마나 피와 땀을 흘리며 지금의
역사를 이뤘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죠. 선진국과 비교하면 부족함만 보이는 게 당연하고요. 그래서 직원들에게 자녀와 대화를 많이 하라고
충고합니다. 다행히 20대들은 사회를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 것 같더군요. 반대하고, 남이 틀렸다고 비판만 하는 게 정의는 아닙니다.”
IT 인력 교육시켜 해외로 보내야 -무역협회에서
IT 인력을 직접 교육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2001년 1월에 IT 마스터 과정을 열었습니다. 그동안 5기에 걸쳐
498명의 수료생을 배출했는데 평균 취업률은 98%입니다. 특히 7월에 수료 예정인 6기 일본어반의 경우 과정 종료 2~3개월 전에 일본 IT
기업들이 방한해 교육생의 60%가 넘는 학생을 입도선매식으로 뽑아갔습니다. 청년실업 해소에 미약하나마 도움이 되고 있어요. 해외로 많이
나가있어야 다음 사람이 나가기 좋습니다. 실리콘밸리에서 인도 출신의 기술자가 많은 것도 그런 배경입니다. 우리는 IT 분야에서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는 경쟁력이 있습니다. 지방공항을 짓는데 5조5,000억원이나 썼다는데 지금 반도 활용하지 못하지 않습니까. 그런 돈을 연구
·개발(?R&D)에 썼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김 회장은 IT 인력 육성론을 강조하면서 부품 전문기업을 키우는 일도
급하다고 역설했다. 그는 “한국은 일본과 자원 수입국을 빼고는 모든 교역 상대국과 무역에서 흑자를 내고 있다”며 “대일 적자는 국내 부품산업의
수준이 떨어져 일제 부품을 사올 수밖에 없는 구조에서 생긴 것”이라고 설명했다.
“국내 산업 가운데 부품과 소재산업이 가장 취약한
부문으로 꼽힙니다. 수출이 잘 돼도 부품 ·소재 수입이 따라 늘어 알맹이 없는 수출이라는 비판을 받죠. 예컨대 삼성전자의 휴대전화 단말기는
세계적인 수준이지만 중소 휴대전화 부품업체가 이를 따라가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고품질을 유지하려면 일본 부품을 쓸 수밖에 없죠.
상품 수출의 부가가치를 높이려면 부품 ·소재산업 육성이 필수입니다. 이를 위해 대기업이 제품개발 단계에서부터 중소기업을 참여시켜
경쟁력 있는 기업으로 키워야 합니다. 아울러 부품 개발에 필요한 자금 지원은 물론 제품 생산기업과 부품기업 사이에 원활한 정보교환이 이뤄질 수
있는 데이터베이스의 구축도 필요합니다.”
수출 더 늘리려면 부품 전문기업 키워야
-차세대 수출 주자를 꼽는다면. “바이오산업이
가능성 있다고 봅니다. 특히 IT와 나노 기술이 접목된 바이오산업이죠. 우리나라 사람은 손재주가 좋아 바이오산업에서도 경쟁력이 있습니다. 황우석
서울대 수의학과 교수와 인연을 맺게 된 것도 평소 생명공학 분야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황우석 교수팀이 세계 최초로 인간배아를
복제하고 여기서 치료용 줄기세포를 추출, 배양하는 데 성공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죠. 올해는 연구가 순조롭게 진척되기를 기원하는 사람들의 뜻을
모아 ‘황우석교수후원회’가 만들어졌고 내가 회장을 맡고 있습니다. 황우석 교수의 연구성과는 바이오 산업이 전자산업 못지 않은 발전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줬습니다. 우수한 청소년들이 이공계 기피 현상에 위축되지 않고 과학자의 꿈을 키울 수 있도록 하려면 황우석 교수와 같은 성공모델을
더 많이 만들어 내야 할 겁니다.”
김 회장은 수출 문제와 관련, 일본 ·미국 등과의 자유무역협정(FTA)을 어떻게 맺느냐에 따라
경제 전반에 미치는 효과도 크게 달라질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특히 교섭시기와 내용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재계 일각에서 상품
경쟁력이 떨어지니 협상을 미뤄야 한다는 주장도 합니다만 무턱대고 그럴 게 아니라 서비스 쪽 문제에도 매달리면 협상력을 키울 수 있다고 봅니다.
예컨대 부산항에서 우리가 일본 곳곳으로 물건을 실어나르는 등 서비스 분야에서 경쟁력 있는 분야가 분명히 있습니다. FTA 협상은 단순히 상품
분야의 관세를 서로 낮추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합니다. 농업 및 서비스 분야를 포함하여 비관세 장벽, 기업 간 협력 등 모든 분야에서 효과를 얻을
수 있도록 일괄 타결하는 방향으로 협상력을 집중해야 합니다.”
서비스업 무기로 FTA 협상 적극
나서야 서비스 분야를 앞세워 FTA 협상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아이디어에서 보듯 김 회장은 발상의 전환을
강조한다. 무역협회 회장실에 걸려 있는 ‘거꾸로 보는 세계지도’ 또한 그의 역발상의 하나이다.
“3년여 전에 만들었는데 외국 사람들이
와서 보고는 복사본을 달라고 난리지요. 어제(7월 12일)도 러시아 교수가 이곳을 들렀는데 왜 세계지도가 거꾸로 되었느냐고 자꾸 묻더군요.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그건 고정관념에서 온 문제일 뿐이라고 답합니다. 지도란 게 유럽사람들이 해양을 정복하고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유럽을 우리 머리
위에 그려놓은 것 아닙니까. 어디가 위고 아래인지 정해놓은 법은 없지요. 고정관념을 갖지 않고 다른 각도에서 본다는 게 중요합니다. 세계 인구의
0.01%도 안 되는 유대인이 노벨상 수상자의 18%나 차지한 저력이 뭡니까. 이 사람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질문을 많이 하라는 가르침을
받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선생님 말씀 잘 들어라 아닙니까.”
-무엽협회에선 무엇이 많이
달라졌습니까. “무역협회 직원들에게 물으면 회장 때문에 못살겠다고 말하곤 하지요. 뭐, 발상의 전환이라기보다 기업
하던 사람이니 성과를 많이 따지고 피드백을 강조합니다. 관에서는 일단 일이 끝나면 다행이라고 생각하죠. 공익과 사익은 엄연히 다르지만 성과가
있어야 한다는 건 공통점일 겁니다. 코엑스몰을 새로 짓고 확장할 때 2010년에야무차입경영을 하겠다고 목표를 세웠지만 7년이나 앞당겨
달성했죠.”
-마지막으로 김 회장이 오너로 있는 동원그룹의 성장 전략은 무엇입니까.
한국투자증권은 왜 인수하려고 합니까. “사업은 크게 하는 게 아니라 남에게 누 끼치지 않게 조용히 하라고 자식들에게
가르칩니다. 내실 있게 하라는 얘기죠. 지금까지 그래왔습니다. 먹을거리도 내 식구가 먹는다고 생각하고 만들지요. 실제로 집에서 먹고요. 한투
인수는 좀 다릅니다. 국내상황을 보면 기간산업부터 금융산업까지 외국인 손에 좌지우지되는 경우가 많은데, 자산운용사까지 외국인에게 넘어가면 적대적
인수 ·합병(M&A) 등에 대처하기 어렵게 됩니다. 하나쯤은 우리 손에 있어야죠.”
해신의 작가 최인호와 김재철의 인터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