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산줄기 바로알기에 동참하는 대간꾼들이기에 논개에 대해 잘못알고 있는 부분을 여기서 잠시 짚고 넘어갈까합니다.
'일본을 떠도는 논개의 혼령 대간 줄기를 따라 북으로 길게 골짜기가 이어지는데 이것이 바로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이다. 저수지 위로 마을 하나가 손에 잡힌다. 바로 주촌 마을인데 이곳은 주논개가 태어난 마을이다. 논개의 간단한 약력을 알아본다.
<1세-1574년> 현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주촌에서 탄생. <5세-1578년> 부친 주달문 사망후, 모녀는 한 마을에 사는 숙부 주달무 집에 의탁함. 숙부는 어린 조카를 김풍헌 집에 민며느리로 보낸다는 약조를 하고 금품을 받아 달아남.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어머니는 논개를 데리고 친정으로 피했다가 체포되어 장수관아에 수감됨. <6세-1579> 이른봄, 장수현감 최경회의 심리로 재판이 열림. 무죄 선고를 받았으나 돌아갈 곳이 없는 모녀는 침방관비를 자청. 김씨 부인의 배려로 내아에서 심부름을 하며 살게 됨. 늦가을, 모녀는 무장현감으로 전직된 최경회를 따라감. <9세-1582> 최경회가 영암군수로 전직되자 따라감 <14세-1587> 최경회가 사도시정으로 갈때 수행함. <17세-1591> 최경회의 부실이 됨. 최경회가 모친상을 당하여 고향 화순으로 갈때 논개는 고향 장수로 와서 기다림. <19세-1592> 최경회가 전라우도 의병장으로서 장수로 와 의병을 모집하고 훈련시킬 때, 논개는 의병 훈련 뒷바라지함. <20세-1593> 최경회가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제수되어 2차 진주성 전투를 할때 논개는 성안에서 전투의 뒷수발을 함. 성이 함락되고 최경회가 순국한 뒤, 논개는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의암으로 유인하여 남강에 투신 순절함.
이러한 주논개의 넋이 억울하게 일본 땅에서 통곡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못난 후손들이냐. 쓸개도 창자도 없는 넋빠진 후손들이 그의 혼을 다 팔아먹은 것이다. '용서하라, 그러나 잊지는 말아라'(Forgive, but don't forget') 나찌 치하를 겪은 프랑스의 독립기념관 입구에 새겨진 문귀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쉽게 망각해버리는 것은 아닐까. 그 사연을 <한겨레21>에 난 기사를 그대로 옮겨본다.
** 한 여인이 의롭게 죽었으니/ 곰과 물고기의 덕이라 하겠네/ 밝게 빛나는 청정한 자태여!/늠름하고 결백한 지조여!// 왜장 한놈 죽였다고 말하지 마라/ 모든 왜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네/ 한 작은 여인이라 말라지 마라/ 만 장부의 팔뚝처럼 떨쳤다네// 흐르는 강물도 바위를 갈지 못하니/ 천년의 의암은 언제나 남아 있네.”
조선 말기, 희재 안종창이 쓴 ‘의기암에서’라는 시다. 이 시에 나오는 ‘한 작은 여인 의암’은 임진왜란 때 왜장을 잡고 강으로 뛰어든 ‘논개’를 일컫는다. 최근 논개의 영정과 가묘가 그가 죽음으로 이끈 왜장과 함께 일본의 한 사당에 모셔진 것으로 확인돼 그의 후손들과 학자들의 의분을 일으키고 있다. 특히 논개는 기생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실제로는 의병장 최경회의 부인이었음이 밝혀져 분노가 더욱 증폭되고 있다.
이야기는 1970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은퇴한 일본인 건축설계사 우에쓰카 하쿠유는 후쿠오카현 다가와시 근처 히코산 기슭의 자신 소유 밭을 갈다가 한 묘비를 발견한다. 그 비석에는 임진왜란 때 이름을 떨친 게야무라 로쿠스케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신의 칼’이란 별명을 가진 게야무라는 임란 때 쇼군 가토 기요마사의 선봉장으로 승승장구한 전설적인 사무라이였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그런 명성에 걸맞지 않았다. 진주성 싸움의 승리를 기념하는 잔치에서 술을 마시다 조선의 여인 ‘논개’에게 죽임을 당한 것이다.
우에쓰카는 그런 게야무라의 비극적 죽음을 흠모했다. 그래서 그의 ‘부끄럽고도 억울한’ 죽음을 풀어줄 묘안을 생각해 냈다. 바로 그를 죽음으로 이끈 조선 여인의 영혼을 함께 모시는 것이었다. 그는 73년 한국의 진주에 처음 찾아와 그런 뜻을 전했다. 그러나 한국인들의 반발이 거셌다. 그러자 그는 새로운 명분을 내세웠다. 논개와 게야무라의 영혼을 함께 모시는 일이 한-일간의 역사적 화해와 교류, 영혼들의 원풀이라는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었다. 그런 주장으로 그는 진주시와 관계자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진주에서 논개와 게야무라의 넋을 건져 이를 일본으로 모셔가는 의식을 치렀다. 진주 남강에 국화를 뿌리고 1천마리의 종이학을 띄웠다. 나아가 그는 히코산에 게야무라와 함께 논개의 무덤을 만드는 작업을 벌였다. 그는 논개가 순국한 진주시에서 모래와 나무, 흙, 논개의 고향 장수에서 돌을 가져다 게야무라의 무덤 옆에 논개 무덤을 꾸몄다. 또 진주 촉석루 옆 ‘의기사’에 걸린 논개 영정과 똑같은 영정을 만들어 일본으로 가져갔다.
그뒤 논개의 영정은 마치 게야무라의 첩이라도 되는 양 그의 아내, 처제와 나란히 놓이게 됐다. 이에 따라 “전쟁중에 게야무라를 만난 논개가 전쟁이 끝난 뒤 게야무라를 따라 일본에 건너와 함께 해로하다 죽었다”는 사실과 정반대의 이야기까지 생겨났다. 심지어 논개는 이곳을 찾는 일본인들에게 “부부관계를 좋게 만들고 아기를 점지해주는 신”으로까지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76년 게야무라와 논개를 모신 사당인 ‘보수원’ 준공식 겸 합동진혼식 때는 우에쓰카를 도운 진주 유지들이 부부 동반으로 참석했다. 어처구니없는 일은 당시 진주 시장이 우에쓰카에게 감사장까지 줬다는 것이다.
얼핏 생각하면 논개와 게야무라의 영혼과 영정, 무덤을 함께 모신 일은 ‘한-일간의 역사적 화해와 교류’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일본쪽의 ‘방자한’ 행위는 논개의 숭고한 뜻을 훼손하면서 그를 두번 죽이는 일이라는 지적이 거세게 일고 있다.
최경회 장군의 후손들인 해주 최씨 전남 화순군 종회는 민순지의 <임진록> 등의 기록을 들어 논개가 1574년 전북 장수에서 태어나 1590년 어릴 적의 인연으로 최경회의 부실이 된 주논개 부인이라고 확인했다. 그전에는 유몽인의 <어우야담>에 따라 논개를 무심코 ‘진주 관기’로 여겨왔다. 해주 최씨 종회에 따르면 1593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인 최경회 장군은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 패배한 뒤 자결했다. 최 장군과 함께 이 싸움에 참가했던 주논개 부인은 슬픔과 의분을 참지 못하고 왜적들의 승전 잔치에 ‘기생으로 가장해’ 숨어든 뒤 술에 취한 적장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안고 진주 남강으로 뛰어들었다.
따라서 남편과 조국의 원수를 처단한 그의 영정과 무덤이 바로 그 적장과 함께 모셔진 일은 어떤 이유로도 이해될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논개 부인과 최경회 장군만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역사 자체를 모욕하고 능멸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해주 최씨 종회는 지난 4월부터 진주시와 중앙정부 등에 이런 진상을 철저히 조사해 논개의 영정과 진주에서 불러간 논개 부인 영혼, 장수지방의 돌로 만든 논개 비석 등을 정부 차원에서 찾아올 것을 요구해 왔다.
그러나 회신은 예상 밖이었다. 진주시는 이 일에 나서기가 어렵다는 난색을 표시했다. 일본 정부가 아닌 민간인 우에쓰카가 한 일이고, 그의 진의가 역사 사실이나 논개의 정신을 퇴색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며, 한-일간의 화해와 협력에 나쁘지 않다는 것 등이 이유였다. 논개 영정을 돌려받는 일 등을 굳이 하고 싶으면 해주 최씨 문중에서 주도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도 덧붙였다.
문화관광부는 해외홍보원을 통해 조처하겠다고만 답해왔고, 외무부는 보수원에서 열린 논개·게야무라 합동위령제에 후쿠오카 한국 총영사가 참석한 것에 대해 아무런 해명을 하지 않았다. 장본인인 우에쓰카는 “사전에 논개가 최경회 장군의 부인임을 몰랐다”며 “해주 최씨 문중에서 계속 문제를 삼는다면 영정을 반환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나 영정 외에 영혼과 비석은 돌려줄 수 없으며, 합동위령제는 계속하겠다는 입자이었다. 게다가 논개에게서 정신적 위안을 찾는 재일동포 거류민단의 반대로 영정마저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서사시 ‘논개’와 <논개> 평전을 발표한 문학가 정동주씨는 “논개의 의로운 죽음이 조정으로부터 공인을 받는 데 147년이 걸렸고, 그가 기생이 아니라 의병장의 아내였다는 것을 확인하는 데 400여년이 걸렸다. 적장 게야무라와 함께 있는 그의 영정과 영혼이 한국땅으로 되돌아와 그가 편안히 잠드는 데는 또 얼마나 긴 세월이 필요할지 모르겠다”고 한탄했다. 의로운 조선의 여성 주논개가 땅 속에서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김규원 기자>-한겨레21 1998년 12월 17일 제237호 ' -펌-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대단한 체력이 부럽네요.. 제가 맨 후미조 였습니다.
자세한 산행후기와 독특한 사진 배치 재미있군요. 두루 산을 다니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올올에도 자주 나와주십시요.
#뻐꾸기님! 아~ 그러셨군요 체력이라니요;; 전, 원래 시속 2km 정도의 산행속도를 유지하는데, 워낙 주력들이 좋은 분들만 계서서 따라 잡느라 혼줄났습니다.ㅠㅠ 특히 후미에 계셨던 분들은 여유가 있으셨고 즐기는 산행을 하시는 분들이라 기억에 남는군요^^.
아무튼 즐겁고 인정미 철철넘치는 분위기에 흠뻑 젖었던 하루였습니다. 뻐꾸기님! 건강하시고 즐거운 산행 끊임없이 이어가시길 진심으로 빕니다.
#견우님! 반갑습니다. 보통 10년이상 고등하신 분들 틈에 껴서 허부적 거리다 하산하여 정신없이 돌아온 하루였지만 그 느낌만은 오래도록 잔잔하게 가슴에 남습니다. 겨우 몇산에 불과한데 다산이라 하시니 엄청~부끄럽구요^^ 자주 참석하여 멋진 만남과 좋은 추억을 남길 수 있도록 노력 하겠습니다.
견우님! 행복 가득하시고 안전산행 이루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