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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orge Orwell(조지 오웰)은 필명이고,
본명은 에릭 아서 블레어(Eric Arthur Blair, 1903년 6월 25일 ~ 1950년 1월 21일)이다.
에릭 블레어는 20세기 영어권의 가장 중요한 소설가, 비평가, 정치평론가 중 한 명이며
영미권에서 널리 존경받고 있다.
그는 만년의 두 소설 《동물 농장》과 《1984년》으로 특히 유명해졌다.
1950년에 오
랫동안 앓아 온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에릭 블레어는 1903년 6월 25일에 당시 영국령이던 인도의 벵갈에서 태어났다.
에릭의 아버지인 리처드 블레어(Richard Walmesley Blair)는 식민국 공무원으로 근무하고 있었고,
어머니 이다 블레어(Ida Mabel Blair)는 에릭이 두 살이 되던 해 그와 함께 영국으로 돌아왔다.
에릭은 아버지가 3개월간 영국에 돌아왔던 1907년까지 아버지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에릭에게는 마조리라는 이름의 누나와 에이브릴이라는 이름의 여동생이 있었다.
그는 《위건 부두로 가는 길》에서 자신의 가족에 대해 묘사하기를
'상류 중산층의 하급 계층'(lower-upper-middle class)이라고 표현하곤 했다.
6살 때
에릭은 성공회에서 운영하는 헨리온템즈의 유치원에 보내졌다.
헨리온템즈 유치원은 누나가 다니던 유치원이었다.
그는 그 시절에 대해 회고한 적이 없으나
그는 선생님들이 좋게 본 학생이었으며
2년 뒤 세인트 시프리언즈 스쿨에 추천되었다.
서섹스에 위치한 세인트 시프리언즈 스쿨은
당시 영국에서 가장 좋은 예비학교 중 하나였다.
에릭은 우수한 성적을 거두어 반액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다.
결국 그는 이곳을 마치고 웰링턴과 이튼스쿨의 입학 허가를 받았다.
웰링턴에서 1년을 마치고
에릭은 이튼스쿨로 옮겨갔다.
훗날 오웰은 상당한 자율을 허용했던 이튼스쿨 시절을
'그런대로' 행복했다고 회고했지만,
입학 후 공부 이외의 것들에 대해서는 신경 쓸 수가 없게 되었다.
이튼에서의 그의 학업에 대한 평가는 바보 같은 학생이었다는 것과
훌륭한 학생이었다는 것이 공존하고 있다.
자신들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는 것에 대해 분개하는 몇몇 교사를
에릭은 노골적으로 싫어했다.
오웰은 훗날 에세이
'기쁨은 그 정도로 컸다(Such, Such Were the Joys)' 에서
이튼의 교육에 대해
'(아는 척 할 줄 아는) 신용 사기를 향한 과감한 준비'만을 시켰다고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결국 그가 이튼을 졸업할 무렵에는
167명중 138등을 할 만큼 성적이 신통치 못했다.
이 성적으로는 옥스퍼드에 갈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는 식민지 관료의 길을 선택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릭은 이튼에서 훗날 자신의 지기들이 되는 친구들을 몇몇 사귀었다.
그중 싸이릴 코놀리는 잡지 '호라이즌'의 편집자가 되어
오웰의 유명한 에세이 대부분을 출간해주었다.
오웰은 어린 시절 계급차별을 느낀 경험이 있었으며
이튼에서는 그것을 더욱 체계적으로 인식했다.
그는 약하고 못생겼다는 것에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스스로를 실패한 인생으로 생각했다.
어려서 형성된 실패한 인생이라는 감각은
그가 평생 동안 가졌던 것이었다.
에릭을 직접 만나본 사람들은
그가 추남이었으나 맑고 푸른 눈을 가졌다고 회고한다.
이튼의 생활에 분개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그가 제국주의와 영국의 식민정책에 대해 비판적인 생각은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아버지처럼 식민 관료의 길을 선택했다.
당시 이튼의 교육은 학생들을 식민 관료, 군인, 제국주의자로 만드는 것이었고,
아직 에릭은 그것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에릭은 옥스포드에 진학할 성적도 여유도 되지 않았으므로
버마에서 인도 제국 경찰이 되는 길을 선택했다.
총독부 시험도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으나
그는 1922년 인도 제국 경찰 간부 후보로 합격하였다.
그는 당시 인도 제국 내의 한 주였던 버마(현 미얀마)를 부임지로 선택하였다.
당시 버마는 90명 정도의 영국인 경찰 간부가
13000명 정도의 현지인 경찰을 관리했고
그들이 1300만 명이나 되는 인구를 장악했다.
에릭은 미얀마에서
다른 영국인 간부들이 영국식 사교생활을 즐기던 것과는 달리
고독하게 지냈고 가끔 사창가를 찾았다.
그는 미얀마어를 쉽게 익혀 사용하였으며
훗날 미얀마를 배경으로 한 그의 글들에서 미얀마어의 표현들을 구사했다.
에릭이 가혹한 식민통치자는 아니었으나
불교 승려들과 매춘부들에 대해 경멸하는 태도를 취했고
이는 훗날 제국주의자임을 거부했던 글에서도
확인이 가능할 정도로 체화되어 있었다.
그는 5년간이나 식민 관리 생활을 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것에 대한 깊은 자기혐오에 빠지게 되었다.
휴가차 영국으로 돌아온 그는
바로 사표를 제출하였다.
아버지가 35년간 근무하여 가족이 '중류 생활자'로 지내게 해준,
그리고 자신에게 5년간 영국 신사로 지낼 수 있도록 했던 신분을 차버린 것이다.
가족의 반대가 당연하였으며
그는 글로서 먹고살겠다고 선언하며
집을 나와 런던의 빈민가인 노팅힐에서 자취를 시작하였다.
오웰의 두 번째 저서인
'버마 시절'은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비극적인 로맨스가 제국주의 시대를 배경으로 펼쳐지고
반제국주의적 정서가 강하게 드러나 있다.
주인공 플로리는
식민 경찰로 있던 오웰의 페르소나로 읽히며
그는 어떻게 자신이 제국주의를 혐오하게 되었는가를 실감나게 묘사한다.
그는 버마에서 보낸 시간들의 이미지가 너무도 강해서
그것을 어딘가에 쏟아붓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것 같다는 기분이 들어
이 책을 썼다고 했다.
그는 이모가 살던 파리로 이주하였다.
그는 프리랜서로 글을 쓰며 살 생각을 하고 건너갔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그는 몇몇 잡지에 기고할 수 있었지만
종종 접시닦이로 하루 13~17시간 동안 일해야 했다.
돈도 없고 병이 들어 그는 영국으로 돌아왔다.
집에서 '버마의 나날'을 쓰기도 했지만
그는 수시로 나가서 밑바닥 생활을 하곤 했다.
가정교사 일을 잠깐 했고
집에서는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에 열중했다.
그는 그 와중에 잡지 《뉴 아델피》의 정규 기고자가 되었다.
《뉴 아델피》는
대중적 사회주의를 불러일으킨 주요 잡지 중 하나였으며
1935년까지의 오웰의 글 대부분이 발표되었다.
그는 다시 밑바닥 생활을 하였다.
런던의 빈민가에서
홈리스 생활을 하고,
켄트로 가서 홉 줍기 노동을 하루에 열 시간씩 3주간 한 뒤
다시 런던으로 돌아왔다.
그는 돌아와서 호손즈 학교의 교장 자리를 얻어 1933년까지 근무한다.
그는 이 시기에 엘리노어 자크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오웰은 1933년에
그의 첫 번째 저서인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을 출간한다.
오웰은 여기서 처음으로
조지 오웰이라는 필명을 사용하는데
이것은 그가 작가로서 실패할 경우를 대비하고
가족들이 놀라지 않도록 선택한 것이다.
또 조지는 너무나 평범한 이름이었기에 그렇게 정했다.
그러나 한동안 기고문에는 계속 에릭 블레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에는
그의 접시닦이 생활,
구빈원에서의 생활 등이 생생하게 묘사되어있다.
첫 번째 저서임에도 불구하고
사회 모순들을 묘사함에 있어
매우 신랄한 필치를 구사하고 있다.
밑바닥 생활을 묘사하는 것 뿐 아니라
그 와중에 런던의 속어와 욕설을 정리해둔다거나
구빈원 시스템의 모순을 치밀하게 폭로하는 등
다층적이면서도 종합적인 글쓰기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오웰다운 위트가 곳곳에 넘친다.
잭 런던의 《밑바닥 사람들》(1903)의 영향을 받았다고 알려져있다.
1933년 말에
《버마의 나날》을 탈고하였으나
영국에서는 35년 5월에 겨우 출간되었다.
명예훼손 위험이 있어서 출간 자체가 어려웠고
출간 이후에도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에 비해
호의적이지 못한 평가와 판매고를 올렸다.
오웰은 탈고 직후 폐렴에 걸려 교사 생활을 그만두었고
바로 세 번째 저서인 《목사의 딸》을 쓰기 시작했다.
오웰은 고서점에서 근무하기 시작했다.
그는 《서점의 회상》,
《책값 대 담뱃값》,
《좋으면서 나쁜 책》(문제가 있지만 그럭저럭 읽을 만한 책) 등의 에세이에서
책에 대한 애정을 밝혀놓은 바 있다.
이 시기에 오웰은 시 창작에도 주목하여
《아델피》에 발표하곤 했는데 꽤 좋은 평가를 받았다.
1935년 3월에 출간된 《목사의 딸》은
교구 목사관이나 여학교의 일상에 대해
사회학적인 분석에 가까운 묘사가 담겨있다.
출간당시 감상적인 중류계급 소설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훗날 스스로 '어리석은 돈벌이를 목적으로 쓴 창작품'이라고 혹평했지만
상업적으로는 괜찮았다.
1935년에 오웰은 '엽란을 날려라'를 쓴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경험이 많이 반영된 소설로 주로 고서점 시기의 경험과
엘리노어와의 사랑이 그것이다.
영국 중류계급의 위선에 대한 혐오감을 표출한 것으로
'목사의 딸'처럼 모호한 결말을 가지고 있는 소설이다.
1936년 초에
영국 북부의 공업지대 실업자에 대한 책을 의뢰받았고
그 결과물은 1937년에 《위건 부두로 가는 길》로 출간되었다.
1부는
과도한 공업화로 피폐해진 랭커셔와 요크셔의 생활실태와
가계조사 등으로 이루어져있고
2부는
자신이 어떻게 사회주의자가 되어가고 있는가,
사회주의를 위해서는 왜 사회주의를 공격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에 맞추어 서술되어있다.
《좌파 북클럽》(영어: Left Book Club)을 위해 쓰여진 책이었지만
골란츠는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이 포함된 것을 우려하여
그것을 해명하는 서문을 포함하여 출판하였다.
《좌파 북클럽》은 문고본에 가까운 가격으로 가입자들에게 책을 공급하는 회원제 단체이자,
영국의 좌파 출판사로 당시 영미권 사회주의자들에게 광범위한 영향력을 주었다.
《위건 부두로 가는 길》에서
북부의 석탄이 북부 사람들을 어떻게 착취하여 남부에 부를 가져다주는지,
그리고 왜 민중들에게는 사회주의가 아니라
파시즘이 지지를 받고 있는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얼마나 교조적인 태도로
즉, 마르크스주의를 아무런 비판없이 맹신하는 태도로
민중들과 동료들을 비판하고 있는지를 서술하며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맹목적인 소련 숭배를 비판한다.
이 책은
오웰이 사회주의자로서의 의식을 표출한 첫 번째 본격적인 저서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영국의 좌파 지식인들은
노동운동보다는 공산당에 매몰되는 친소경향을 가지고 있었으며
일부 보수파들은 나치가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아줄 것이라는 순진한 기대를 하고 있었다.
특히 좌파 지식인들은
오웰이 나치도 스탈린도 모두 전체주의라고 평가하는 것을
소련의 중앙유럽 '진출'과 나치의 '침략'을 혼동한다고 비판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오웰의 현실 인식이 관념적이지 않고 정확했다는 것 뿐 아니라
이후 스페인 내전에의 참가로 이어지는 오웰의 행동에서 볼 수 있는
민중중심적인 아나키즘이 드러났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오웰은 탁월한 현실 인식 능력을 가진 반권력의 작가였다.
또 오웰은
'배운' 사회주의자들이
부르주아 이데올로기,
프롤레타리아의 연대,
수용자들에 대한 수용 등의 말을 씀으로서,
아니 거기까지 가지 않더라도
'동지'라는 말 따위를 억지로 사용하는 사회주의자들의 문화가 피착취 계층이자
잠재적 사회주의자들인 중산층의 마음을 떠나가게 했다며
사회주의자들이 종종 사회주의의 적이 되곤 한다고 비판한다.
또 영국의 뿌리깊은 계급문제를 넘어서는 것은 쉽지 않으며
서로 다른 계급(먹고살만한 노동계급과 가난한 지주계급 등)이 공존할 수 있도록
서로의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즉 오웰은
본질적이지 않은 차이때문에
주적에 대항하는 연대가 깨져서는 안된다는 점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다.
이 책의 2부는
오웰의 자서전이라고 할만한 부분을 담고 있으며
여기서 오웰은 자신이 어떻게 제국 경찰에서 피압제자들의 친구가 되어보기로 시도했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태생적 계급을 어떻게 넘을 수 없었는지 고백한다.
이는 그의 첫 번째 르뽀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을 쓴 동기이기도 했다.
《위건 부두로 가는 길》에서
그는 위건의 탄광노동자에 대한 묘사로 시작해,
결국 계급 차이 따위는 극복하고
전면적인 반 파시즘 연대로 가야한다는 것을 주장했고
이 책의 원고를 넘긴지 얼마 되지 않아 이를 실천하기 위해 스페인으로 건너가게 된다.
그 결과물이 또 하나의 걸작 르뽀 《카탈로니아 찬가》이니,
오웰이 쓴 세 편의 르뽀는 모든 억압에 반대한다는
그의 사상적 궤적을 순차적으로 꿰어준다.
오웰은 영국 북부를 방문한 후
런던 근교에 집을 얻어 시골생활을 시작했다.
시골생활을 하면서 한산한 식료품 가게를 운영했는데
그것은 이득이 되지 않았지만 오웰에게 평화를 주었다.
오웰은 하숙집 주인의 소개로 만난 아일랜드계 여인 아일린 오쇼네시와 결혼한다.
아일린은
영문학을 전공하고
교사, 사회복지사를 거쳐 교육심리학을 다시 전공하고 있던 인텔리였다.
그녀는 오웰의 사상적 동반자로서
스페인 내전에 오웰과 함께 동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