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 "해례본"]이야기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며 사람은 세모나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간송 전형필에 의해 1943년에 세상에 나오게 된다
간송은 10만석 부호가의 상속권자로 그의 재산으로 그는 우리 문화재가
일본에 유출되는 것을 막았다.
그가 문화재를 집중적으로 수장하던 1930∼40년대는
일제의 수탈이 최고조에 이른 시기였는데,
문화재 감식에 뛰어난 오세창과 함께 모은 것이
'청자상감운학매병'(국보 68호)·'혜원전신첩'(국보 135호) 등 12점의 국보와
10점의 보물 등 다수의 문화재였다.
그중 가장 눈여겨봐야할 것은 1943년
'훈민정음 해례본'(국보 제70호,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을
손에 넣던 이야기가 유명하다.
당시로선 존재 사실만 알려져 있던 훈민정음 해례본이 경북 안동에서 나왔는데
조선시대 이한걸 가문에 소장되어 있었다.
그의 선조 이천이 여진을 정벌한 공으로 세종이 하사했다고 한다.
표지 2장에 본체 33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가로 20센티미터,세로 32.3센티미터 크기이고,
처음 두 장이 망실되었는데 연산군의 기훼제서율을 피하기 위한것이라 한다.
간송은 이한결이 선조가 하사받은 것을 훈민정음 해례본인줄 알면서도 ,
그 가치를 알지 못하여 생활고 때문에 1000원으로 내 놨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1000원은 서울의 기와집 한 채 값으로,
고서 가격치곤 비싸다는 주위에 만류에도 불구하고 소개한 이에게
사례로 1000원, 해례본 값으로 1만원을 쳐 주며,
"훈민정음" 같은 보물은 적어도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합니다"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인 이유 아직 잘 모르고 있어
한국인들에게 과거 유산 가운데 가장 자랑스러운 것을 꼽으라면 열이면 열 모두 한글을 말합니다. 그 이유를 물으면 대개 “모든 소리를 적을 수 있기 때문” 또는 “가장 과학적인 문자이므로”라고 말하며, 어떤 사람은 “배우기 가장 쉬운 문자라서”라고 답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대답들은 부분적으로만 사실일 뿐, 충분한 답변이 되지 못합니다. 우선 한글이 모든 소리를 적을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세계의 문자는 그 나라 말만 정확하게 적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글로는 영어의 ‘f'나 'th'를 적을 수 없지 않습니까? 그 다음으로 한글이 세계 언어학자들을 깜짝 놀라게 할 만큼 과학적인 원리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맞습니다. 그래서 미국 메릴랜드 대학에 있는 램지(Ramsey) 교수는 한글날에 학생들과 조촐한 자축연을 했답니다. 이렇게 멋진 문자가 나온 날을 축하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말입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 한국인들은 어떤 의미에서 한글이 ‘과학적’인지 잘 모릅니다. 한글이 배우기 쉽다는 것도 이같은 ‘한글의 과학성’과 연관되기 때문에 우리는 이 부분에 대해 잘 알아야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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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문자 발달의 정점에 서 있는 우리 한글
한글은 그 치밀함과 복잡함에 혀를 내두를 지경입니다. 그것을 여기서 다 설명할 수는 없고 가장 기본적인 것만 보기로 하겠습니다. 이것을 알려면 인류의 문자 발달사를 간단하게나마 살펴야 합니다. 그런데 한자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글자 수가 많은 것도 있지만, 가장 큰 문제는 글자를 보아도 음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중국의 문맹률이 높았던 것이죠. 예를 들어 ‘西’자는 음이 ‘서’인 것을 대부분 알지만 이 글자와 비슷하게 생긴 ‘?’자는 음이 ‘천’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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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훈민정음 어제 서문. 백성을 위하여 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의 뜻이 담겨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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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연유로 좋은 문화재가 나오면 상인들은 간송에게 제일 먼저 보였다 한다.
간송이 해례본을 세상에 내놓기 전까진 그 누구도 훈민정음의 창제원리를 알지 못했다.
창제시 “고전(古篆, 옛글)을 모방했다.”는 말에 따라 여러 학설이 있었는데,
인도 구자라트 문자나 산스크리스트어, 몽골의 파스파문자, 갑골문자를 모방했다는 설부터
문고리나 창살모양을 본 땄다는 설까지 분분했다.
훈민정음 해례본을 통해,
한글이 천지인 삼재(三才)의 원리와 태극, 음양오행의 원리를 담고 있음이 밝혀졌다.
이후 훈민정음 해례본은 간송에겐 지켜야할 목표로서 6‧25 전쟁 당시에도
오직 이 책 한권을 오동상자에 넣고 피란을 떠났으며, 잘 때도 베게삼아 잤다고 한다.
간송의 이런 행적과는 반대로 지난 2008년 7월 배모씨가 "집을 수리하던 중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을 발견했다"고 공개하면서 소유권 전쟁이 시작됐다.
상주본은 현재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국보 제70호 훈민정음 해례본(간송본)과 동일한 판본으로,
서문 4장과 뒷부분 1장이 없어졌지만,
보존 상태가 좋아, 전문가들이 "가치가 1조원도 넘을 것"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또 하나의 이야기는 한글 사랑에 평생을 바쳐온 주시경 선생이
어느집 안방 벽에 도배
로 붙여진 몇장의 해례본 내용을 찾아내어 한글의 문법을 최초로 정리하고, 1894년
갑오개혁 때 언문을 국문이라 개칭한것을, 1913년 국문을 한글이란
이름으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1928년 주시경이 세운 조선 어학회에서 “가갸날”을
한글날로 바꾸었다.
'해례본'은 조선 세종 28년(1446)에 새로 창제된 훈민정음을 왕의 명령으로 정인지 등 집현전
학사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한문해설서이다. 책이름을 글자이름인 훈민정음과 똑같이
‘훈민정음’이라고도 하고, 해례가 붙어 있어서 ‘훈민정음 해례본’또는 ‘훈민정음 원본’
이라고도 한다. 전권 33장 1책의 목판본이다.
구성을 보면 총 33장 3부로 나누어, 제1부는 훈민정음의 본문을 4장 7면으로 하여 면마다
7행 11자씩, 제2부는 훈민정음해례를 26장 51면 3행으로 하여 면마다 8행 13자씩,
제3부는 정인지의 서문을 3장 6면에 1자 내려싣고, 그 끝에 ‘정통 11년’(1446)이라
명시하고 있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훈민정음은 세종 25년(1443)에 왕이 직접 만들었으며,
세종 28년(1446)에 반포한 것으로 되어있는데, 이 책에서 서문과 함께 정인지가
근작(謹作)하였다는 해례를 비로서 알게 되었다.
또한 한글의 제작원리도 확연하게 드러났다.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어 있는 『훈민정음(해례본)』은 국보 제71호로 지정되어 있는
『동국정운』권1, 6과 함께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주촌의 이한걸(李漢杰) 씨 댁에
전래되던 것이다. 1940년에 발견될 당시 원 표지와 첫 두 장이 떨어져 나가고 없었는데
그 후 보충하여 끼워 넣는 과정에서 실수가 있었다.
세종 서문의 마지막 글자 ‘이(耳)’가 ‘의(矣)’로 잘못 씌어지고, 구두점과 권성이
잘못되었거나 빠진 것도 있다. 이 책에는 구점(句點; 右圈點)과, 두점(讀點; 中圈點)
및 파음자(破音字)의 성조를 표시하는 권성(圈聲)도 정확하게 표시한 책이다.
구두점과 권성을 다 표시한 것은 『성리대전(性理大全』(1415년)의 체재와도 일치한다.
최근에 이 책 외에 또, 다른 『훈민정음(해례본)』 한 책이 경북 상주에서 발견된 바 있다. 훈민정음은 1997년 10월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국보 제71호 동국정운<권1,6>
동국정운<권1,6>(東國正韻<卷一,六>)
-서울 성북구 (간송미술관)-
조선 세종 때 신숙주, 최항, 박팽년 등이 왕의 명으로 편찬하여 세종 30년(1448)에
간행한 우리나라 최초의 표준음에 관한 책으로, 6권 6책이며, 활자본이다.
중국의 운(韻)에 관한 책인 『홍무정운』에 대비되는 것으로, ‘동국정운’이란
우리나라의 바른 음이라는 뜻이다.
당시 혼란스럽던 우리나라의 한자음을 바로잡아 통일된 표준음을 정하려는 목적으로 편찬,
간행되었다.
이 책은 세종 29년(1447) 9월에 완성되자 간행하라는 임금의 명이 있었고,
이듬해인 세종 30년(1448) 11월에
성균관, 사부학당 등에 보급되어, 이 책이 간행되고 보급되었던 시기를 알 수 있다.
현재 이 책은 전 6권 가운데 1권과 6권만이 남아있다. 내용을 보면 본문의 큰 글자는
나무활자이고, 작은 글자와 서문의 큰 글자는 갑인자이다. 글자체는 큰 글자가 진양대군의
글씨이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한자음을 우리의 음으로 표기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지고 있으며,
국어연구자료로서의 중요성도『훈민정음』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또한 한자음의 음운체계 연구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훈민정음의 글자를 만든 배경이나
음운체계 연구에 있어서 기본자료가 된다.
세종대왕 기념관
홈페이지에 액자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한글실
힌글실 내부
한글 이전의 우리 글에 대한 설명
세종대왕기념관
조선시대 세종대왕의 성덕과 위업을 추모하고 이를 길이 보존하기 위해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1970년 11월 준공하고 1973년 10월 개관하였다. 갖가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는 세종대왕기념관
에는 한글실, 과학실, 국악실, 일대기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옥외전시물에는 ‘세종대왕신도비(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2-1호)‘와‘
수표(수위측정기)(보물 838호)‘ 등이 있다.
홈페이지 http://www.sejongkorea.org
▲ 국립한글박물관 외관 (제공: 문화체육관광부)
박물관 관람은 무료이고 관람 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입니다.
국립중앙박물관 안에 있고 용산가족공원과 연결돼 있으니 가족 단위로 방문하기에 좋아요.
첫댓글 한글 창제의 원리와 사용방법을 알려주는
해례본의 귀한자료 고맙습니다;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한글
누가, 언제, 어떻게 만들었는지
조금 알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