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카페 프로필 이미지
하늘냄새의 살아 가는 이야기
 
 
 
카페 게시글
문화재 조상의 슬기 스크랩 향교(鄕校)건축
하늘냄새 추천 0 조회 60 12.10.29 11:4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향교(鄕校)건축

『향교란 시골에 있는 문묘(文廟)와 그곳에 부속된 옛날의 학교, 일명 교궁(校宮), 재궁(齋宮), 학궁(學宮), 향학(鄕學)이라 하고, 고려시대를 비롯하여 조선에 계승된 관학으로서의 지방교육기관이다』라고 사전적 의미로 정의하고 있으며, 『牧民心書』에는 “옛날의 소위 학교는 예(禮)를 익히고 락(樂)을 익히는 것이다…”라고 의미를 두고 있다.
향교의 향(鄕)은 서울을 제외한 행정구역을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말이고 교(校)는 학교를 의미하는 것으로 즉 ‘지방의 학교’라고 할 수 있다.

1. 향교건축의 성립

『향교란 시골에 있는 문묘(文廟)와 그곳에 부속된 옛날의 학교, 일명 교궁(校宮), 재궁(齋宮), 학궁(學宮), 향학(鄕學)이라 하고, 고려시대를 비롯하여 조선에 계승된 관학으로서의 지방교육기관이다』라고 사전적 의미로 정의하고 있으며, 『牧民心書』에는 “옛날의 소위 학교는 예(禮)를 익히고 락(樂)을 익히는 것이다…”라고 의미를 두고 있다.
향교의 향(鄕)은 서울을 제외한 행정구역을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말이고 교(校)는 학교를 의미하는 것으로 즉 ‘지방의 학교’라고 할 수 있다.

1.1 향교건축의 성립

우리나라의 교육제도는 삼국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고구려는 소수림왕 2년(372)에 태학을 설립하였고, 백제는 오경박사(五經博士)를 두고 성현의 가르침을 받기 위한 교육이 시작되어 일본에까지 전파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신라는 신문왕 2년(682)에 국학이 설립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의 교육기관은 수도에 설치된 관학(官學)으로서 중앙의 귀족자제들에게만 입학을 허용했기 때문에 본격적으로는 지방교육이 시작된 것은 고려시대부터이다.

고려시대는 중앙에 국자감(國子監)을 설치하고 지방의 3경(三京) 12목(十二牧)을 비롯한 군, 현에 박사와 교수를 파견하여 생도들을 교육시켰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를 향학(鄕學)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의 교육기관으로는 중앙에 성균관, 4학이 있었으며 지방에는 관학기관인 향교와 사학기관인 서원과 서당이 있었다. 그 중 향교는 고려시대에 설립되어 조선시대에 들어와 신진 사대부의 지배이념인 유교정신을 널리 보급하고 인재를 양성하며 국가기관의 중앙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발전하였다. 그러나 후기에 들어서 국가재정의 결핍과 양반자제들의 입학 기피, 국가의 관심 소홀, 사학기관인 서원의 난립으로 인해 쇠퇴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향교는 유교의 이념과 인재양성이라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향교의 시작과 명칭에 관해 여러 설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최초 향교의 설립은 고려 초기로 알려져 있다. 고려사(高麗史)를 보면 「태종 13년에 왕은 서경에 학교를 세우게 하고 수재(秀才) 정악을 서학박사로 삼아 특별히 학원을 세워 육부생도(六部生徒)를 가르치도록 명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지방교육기관으로서 향교가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성종 때에는 지방 통제를 강화할 목적으로 일단 향교를 폐쇄시킨 후 다시 중앙 통제하에 재정비하였다. 인종 때에는 「모든 주에 학교를 세워 널리 가르친다.」는 교서를 내려 전국에 향교를 세우고 지방교육을 활성화 시켰고 「배움(學)이 없이 쌓은 선(善)이란 선이 아니고, 선현에 임하지 않은 성공이란 성공이 아니다. 그러므로 안으로는 상서(學校)를 열어 유교의 학술을 돈독히 숭상토록 하고 밖으로는 학교를 설치하여 생도들에게 근면토록 하여 기예(技藝)를 겨루는 장으로 가르치게 하라」하였다. (윤사순, 『한국유학사상론』, 열음사, 1989, p.960)

이어 성종은 지방 12목에 경학박사(經學博士), 의학박사(醫學搏士)를 파견하여 지방교육을 담당하게 하였다. 그러나 고려 중기 이후 무인집권과 몽고의 침입으로 인하여 향교는 잠시 쇠퇴하였다. 그 후 공민왕과 공양왕의 적극적인 교육정책으로 향교는 다시 진흥을 맞게 되었다. 이는 신진 사대부들이 유교 정신을 새로운 국가의 사상적 기반과 통치 이념으로 확립하고자 향교 진흥책을 적극 장려하였던 것이다.(대한전통건축연구회, 『韓國傳統建築(鄕校․書院建築)』, 황토, 1997, pp.267-268)

조선이 건국되면서 향교는 더욱 국가의 적극적인 보호 정책 아래 육성되었다. 조선왕조는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성리학을 지방 사회로 보급하는 등 유교문화를 널리 확산시켰다. 이러한 일환으로 태조는 즉위 직후부터 향교 육성 정책마련에 힘썼다.

태조는 즉위 원년에 모든 도(道)의 안찰사에게 「학교의 흥폐(興廢)로써 수령을 고과(考課)하도록 하라」고 하여 향교에 대한 수령의 관심을 높게 했다. 이어서 수령의 직무로서 제시되는 “守令七事”에 “學校與”이 추가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상황을 살펴보면 적어도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이 나온 성종 17년(1488)까지는 전국에 “一邑一校”의 체제를 갖추게 되었고 중앙에서 교수와 훈도(訓導)가 파견되어 교육활동을 하고 있었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8도에 모두 328개소의 향교가 존재하였는데 이는 당시의 지방관제와 비교해 볼 때 거의 모든 읍에 향교가 설립되어졌음을 알 수 있다.

도(道)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강원도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
향교수 37 54 57 66 26 24 42 22 328

향교는 초창기에 전국의 주에 1개소씩 설치되었으며 조선의 건국과 더불어 현까지 확대되었다. 그리하여 전국의 주, 군, 현에 1개씩 329개소가 설치되어 지방의 교육․문화를 전반적으로 지배하였으며 사상적 중심 역할을 수행하였다. 향교는 一邑一校의 원칙에 의해 군현의 흥망성쇠와 함께 운명을 하여 중간에 변동되기도 하고, 또 군현의 발전에 따라 규모가 확충되기도 하였다. 현재 현존하는 향교의 분포 경향도 전국적이며, 그 수도 남한만 231개소에 달한다. 북한지역도 조선시대 지방행정 체제와 여러 문헌에 나타난 향교의 기록사실로 볼 때 상당수의 향교설립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나 현존하는 향교의 수가 얼마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김지민, 『한국의 유교건축』, 발언, 1996, p.33)

1.2 향교의 기능

향교의 기능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문묘 선현봉사(先賢奉祀) 임무이다. 이는 배우는 사람들로 하여금 공자를 비롯하여 유교를 빛내고 발전시킨 성현들의 훌륭한 덕을 기리고 그 위업을 물려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둘째, 교육기능으로 교육을 통한 인재양성을 목적으로 두고 이곳에서 마친 후 1차 과거시험에 합격한 유생은 생원(生員) 또는 진사(進士)의 칭호를 받고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게 되며, 성균관에서 문과시에 응시하여 고급관리로 발탁되는 까닭에 국가 인재 양성에 크게 기여하여 왔다.
셋째, 지역사회의 민풍교화에 큰 비중을 두고 있는 것이 유교이념이요 향교교육의 목적이었다. 따라서 유교 교육은 가르치고 배우는 단계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실천까지 포함한다. 향교는 지방의 풍속을 바로 잡고 각종 의례의 보급 및 전파 등을 통하여 유교적 이념에 입각한 지역사회의 교화에 많은 역할을 하였다.
『太祖實錄』을 살펴보면 “농상(農桑)은 왕정(王政)의 근본이요, 학교는 풍화의 근원이다”라 하여 즉위이래 여러 번 교서를 내려 농상을 권장하고 학교를 일으키는 뜻을 보였다.

1)문묘향사기능

조선시대 각 지방관아에서 행하였던 공적이고 정규적인 제사의 대상은 삼단(三檀-社稷壇, 勴壇, 城隍壇) 일묘(一廟-文廟)가 있다고 『牧民心書』에서 밝히고 있다.
사직단은 인간의 생존을 관장하는 토지와 곡식의 신령을 위해 마련된 단이며, 성황단은 고을의 수호신을 모신 곳이고, 여단은 주인 없는 고을의 잡귀를 위해 제사지내는 단이다. 공적이고 정규적인 제사의 대상 중 하나인 문묘는 유학적 이념의 계승을 위한 의례적인 공간으로 유학의 전통에 기여한 선현들을 받들어 제사하는 곳이다. 문묘란 문선왕묘(文宣王廟)를 약칭하여 불리는 명칭으로, 문선왕은 공자를 일컫는 말로서 문묘란 공자를 모신 사당을 의미한다. 문묘는 신라의 국학, 고려의 국자감, 조선의 성균관 등 국립대학 구내에 건립하여 국가적 대사인 석전대제(釋奠大祭)를 지내는 장소로 사용되어 온 공간으로, 공자를 모신 대성전을 문묘라 하고, 일반적으로 대성전과 동․서무를 포함하여 넓은 의미로는 그 경역 전체를 의미한다. 『東文選』에 “…本國鄕校之制 廟學同宮…” 이라 하여 문묘가 중요한 의미로 취급되어 묘(廟), 즉 대성전이 없으면 향교의 개념에 들지 않았다.

2)교육기능

조선시대의 유학교육 기관으로는 중앙에 문과를 준비하는 고등교육기관인 성균관과 문과의 예비시험인 생원과 진사시를 준비하는 초․중등교육기관에 해당하는 중앙의 사학(四學)과 지방의 향교를 관학(官學)으로 육성하고, 사학(私學)으로는 서원과 서당이 있었다.
중앙의 성균관에서는 유교적 소양을 갖춘 관리양성을 주된 목적으로 교육을 실시하였고 지방의 향교는 새로운 통치체제에 필요한 치국(治國)의 전제가 되는 관리양성 및 확보의 목적도 있었겠으나 근본적인 목적은 성리학의 철학적 교육이 아니고 유교적 이념에 입각한 도덕적 규범에 의한 교양교육으로서의 백성을 교화라는 것이 근본 목적이었다.
억불숭유의 정신을 배우는 곳이 관학이며 그 중에서도 유교이념에 따라 지방의 민풍을 순화할 수 있는 곳이 향교였다. 향교는 성균관과는 달리 전국 각 고을마다 있었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서민문화에 깊이 접촉할 수 있었다. 또한 조선초부터 국가에서는 지방교육에 관심을 기울여 중앙관리를 지방 군현에 파견하여 수령이 정치를 담당하여 중앙집권적 통치수단일 뿐 아니라 향교에서는 교관(敎官-敎授, 訓導, 敎道)을 두어 지방민의 교화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이는 향교가 교육제도상 성균관과 직결된 하부 교육기관이 아니라 독립된 것으로 보아 관료양성의 목적보다는 민풍교화(民風敎化)에 설치 의의를 두었음을 알 수 있다.

(1) 교생의 신분
교생의 신분은 양반 자제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위로는 공신의 자제로부터 국역(國役) 전반을 담당하는 평민의 자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교생으로 입학하게 되면 특별한 경우 외에는 거의 평생동안 교생신분을 유지하게 된다. 교생의 정년은 60세로 교육년한이 없으며 60세가 넘어야 교생신분에서 노제자로 밀려나게 된다. 명륜당 좌우에 교생들이 거처하는 동․서재가 배치되는데 동재에는 액내교생(額內校生)이라 하여 양반들이 거처하고, 서재에는 액외교생(額外校生)이라 하여 평민이나 서류(庶類)들이 거처하면서 서로 구분되어 있었다. 교생은 4부학당과 같이 향교에서 수학을 마치고 1차 과거, 즉 경서(經書)시험에 합격한 자는 생원, 시부(詩賦)에 합격한 자는 진사의 칭호를 얻고, 다시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게 되고, 문과시에 응시하여 고급관리에 오를 자격이 주어진다. 따라서 성균관 입학을 위해서는 반드시 향시(鄕試)에 합격하여야 향교는 향시를 위한 교육기관이기도 하였다.

(2) 입학자격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은 생원이나 진사 시험에 합격한 사람 가운데 선발되며, 향교에 입학할 수 있는 사람은 15세 이상의 서당에서 한문의 기초를 닦은 지방 양반의 자제들이었다.
『經國大典』「生徒條」에 “府 大都護府 牧 九十年 十六歲以下 不在額內 都護府 郡縣同”이란 기록을 볼 때 향교에 입학하여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자의 연령기준은 16세를 기준으로 16세 이상인 자는 정식입교가 가능하고 그것에 미달이면 부교(赴校)하여 청강을 할 수 있으나 정원내의 정식교생으로 간주하지는 아니한다고 하였다.

(3) 교생정원
교생정원은 조선 초기부터 정부에서 책정하였으나 시대에 따라 약간의 변동이 있고, 소재 관부의 대소 차이에 따라 차이를 두어 책정하였다.
태종 6년에 교생의 정원을 정하고 성종 2년에 재조정하여 『經國大典』에 법제화하여 조선말까지 변동이 없었다. 그러나 인조 때 법제상으로는 정원이 있었으나 소위 액외(額外)라 하여 법정의 정원을 초과하여 납표(納票)만하여 교적에 입속시키었다. 또한 임․병란 이후 향교가 운영이 어려워지고 교생의 피역장소(避役場所)로 변함에 따라 법제화된 정원이 지켜지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4) 교육과목
향교의 교육에 채택된 교육과목은 『小學』과 유교의 기본 경전인 『四書五經』(四書: 論語, 孟子, 中庸, 大學. 五經: 詩經, 書經, 易經, 春秋, 禮記)이 주요 학과였는데 그 중에서도 『小學』을 가장 중요시하고 교육의 기본이 되는 과목으로 채택하였다. 그리고 다른 주요 과목으로 『大學』을 들 수 있는데, 유학은 나만의 이기적인 가르침이 아닌 이웃과 더불어 인간다운 삶을 함께 하는 기본적인 가르침을 유학의 경전인 『大學』에서 유교 교육의 목적을 「삼강령(三綱領)」, 「팔조목(八條目)」에서 유학의 근본사상과 덕행단계를 제시하고 있다. 이외에『四書三經』,『性理大典』,『三綱行實』,『二倫行實』,『孝經』등이 있었고 때로는『近思錄』,『史書』등도 지도하였다.

1.3 향교 건축의 변천 및 구성

1) 향교건축의 변천

향교건축의 시작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일반적으로 고려 초기로 알려져 있다. 당시 향교에 관한 명칭이나 기능이 뚜렷하게 알려져 있지 않지만 여러 기록에 의하여 향교 건축의 성립을 알 수 있다. 이들 기록은 주로 조선조에 작성된 내용으로 일부 향교지 등을 제외하고는 신뢰성 있는 기록이어서 향교건축의 존재는 사실로 인정할 수 있다. 고려 초기에 건축된 향교 건축은 <표 7-3>과 같다.
<표 7-3> 고려 초기 창설된 향교

 학교명 건축연대 자료출처 비 고
진주 목종 진양지(晉陽誌)  
부평 인종 2년(1127) 부평향교안(富平鄕校案)  
강화 인종 5년 강도지(江都誌)  
교동   교동읍지(僑棟邑誌)  
단양   단양향교안(丹陽鄕校案)  
태안   태안향교안(泰安鄕校案)  
황려   동국이상국후집(東國李相國後集) 이세화(李世華) 창건
공주   동문선(東文選)  
백령진 고종 8년(1220) 동국이상국후집(東國李相國後集)  
보안 고종 18년(1230) 동국이상국후집(東國李相國後集)  
안동 고종 34년(1247) 보한집(補閑集)  
위의 향교는 고려 중기 향교 건축의 부흥기를 맞게 되는 인종조 이전에 건축된 것으로서 고려시대 초기의 향교 건축을 대표하고 있다. 이들은 각 고을 규모에 따라서 향교가 건축되었다는 점을 보여 주고 있다. 특이한 것은 백령진향교의 경우 군사적인 위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설치되었다는 점을 미루어 보아 거의 각 지방에 향교 건축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 고려 중기 무신정권 이후 향교는 다시 부흥하기 시작하여 많은 수의 향교가 건립되었다.
<표 7-4> 고려 말기의 향교
학교명 존재시기 건축구조 자료출처
강릉  1313(충선 5) 복구 예종대에 존재 가능
영주  1313(충선 5) 기존 삼봉집(三峰集)
주성(舟城)  충선왕 창설 주성읍지(舟城邑誌)
경산(京山)  1320(충숙 7) 이전 보수 동문선(東文選)
제주(提州)  1329(충숙 16) 이전 복구 양촌집(陽村集)
양양  1333(충숙 복위 3) 이전 복구 근재집(謹齋集)
김해  1334(충숙 복위 1) 이전 증측 가정집(稼亭集)
상주  1343(충혜 복위 1) 이전 기존 근재집(謹齋集)
예주(禮州)  1346(충목 2) 이전 증축 가정집(稼亭集)
남원  1359(공민왕 8) 이전 기존 목은집(牧隱集)
강화  1366(공민왕 15) 복구 복구 동문선(東文選)
영광  공민왕 창설 향교안(鄕校案)
함양  1375(선왕 1) 창설 향교안(鄕校案)
연안  1391(공양왕 3) 기존 양촌집(陽村集)
인천  고려말 이전 기존 동문선(東文選)
토산(兎山)  고려말 이전 기존 운곡시사(耘谷詩史)
용담  고려말 이전 증건 신증동국여지승람
연산  고려말 이전 기존 신증동국여지승람
고려 말의 향교 현황은 <표 7-4>와 같다. 위의 표에 의한 기록들에 의하면, 고려 후기에는 향교가 마을의 규모에 관계없이 거의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충선, 충숙왕 때에 향교가 복구되었던 것은 비교적 안정된 정치상황과 무신정권의 휴유증에 대한 정책으로 국학진흥정책을 폈기 때문이다. 고려 후기에는 잦은 외침과 내란으로 인하여 향교건축 역시 크게 발달하지는 못했다.
특이한 점으로는 고려 후기에 잦은 변란으로 인하여 향교가 폐허가 되면서 기존의 불사건물(佛舍建物)을 향교로 사용하였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예로는 강릉향교이며 조선 초기의 향교인 이천 향교도 마찬가지이다. 이는 고려가 국시로 여겼던 불교의 세력이 새로운 유학 중심의 신진 사대부에게 그 역할이 전환되었음을 보여 주는 예이다. 또한 초기에 건전했던 불교가 후반기에 타락하면서 국민의 지지를 잃었고 배타적 속성을 지닌 주자학과 불교의 마찰이 두드러졌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초기에는 유교의 숭상정책에 의하여 향교가 어느 정도 성행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조선시대를 거쳐 고종 4년에 건립된 오천 향교에 이르기까지 현재 남한에 233개의 향교가 남아 있다. 그러나 최초의 향교가 언제부터 건립되었는지 확실하지 않다. 그 중에서 창설연대가 분명한 것은 109개 향교뿐이다. <표 7-5>에서 처럼 고려시대에서는 7개의 향교만이 설립되었으며, 조선시대에는 태조에서 세종대의 기간에 많이 세워졌다.
<표 7-5> 설립년도에 따른 향교건축의 건립추이
 연대 왕조 설립향교수 연대 왕조 설립 향교수
1127-1150 고려 인종-의종 3 1601-1650 선조-인조 5
1151-1300 의종-고종 0 1651-1700 효종-숙종 6
1301-1350 충렬-충정 4 1701-1750 숙종-영조 2
1351-1400 조선 태조-정종 24 1751-1800 연조-정조 2
1401-1450 태종-세종 31 1801-1850 순조-헌종 2
1451-1500 문종-연산군 9 1851-1900 철종-고종 4
1501-1600 연산군-명종 8 계  109

2) 향교 건축의 구성

향교의 기능은 공자를 비롯하여 중국과 우리나라의 선현을 제사하는 제향기능과 자제를 교육하는 교육 기능으로 구분하였다. 이러한 기능적 분화는 건축의 구성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공자와 선현을 모시는 대성전과 자제를 가르치는 학당인 명륜당이 향교 건축의 기본이 되고 있다.


나주향교 배치도

강릉향교 대성전
(1) 대성전(大成殿)
대성전은 공자의 위패와 중국의 4성, 우리나라의 18현(賢) 등을 모시고 제향을 거행하는 건물로, 내부에는 공자를 주벽으로 하고 4성과 10철(十哲)을 모시고 있다. 그러나 전국의 향교는 경제적 상황 등에 맞추어 대성전을 조영했기 때문에 건물의 규모에 따라서 제향 인물은 약간씩 다르다. 대성전의 규모를 보면 성균관의 대성전은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되어있으며 전주ㆍ경주향교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규모로 나타나고 있다.


능주향교 동무
(2) 동ㆍ서무(東ㆍ西廡)
대성전의 좌우에 위치한 동ㆍ서무는 공자의 제자 및 선현의 위패를 모시는 장소이다. 그 규모는 선현의 위패의 수에 따라서 결정이 되며 정면 12칸(경주향교)에서 2칸(단양향교)까지 규모가 다양하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많은 향교가 동ㆍ서무를 실제로 건립하지 않았고 서원의 경우는 제향하는 인물이 향교에 비하여 적기 때문에 대부분이 동ㆍ서무를 세우지 않았다.


낙안향교 명륜당
(3) 명륜당(明倫堂)
낙안향교 명륜당강학 공간의 중심인 명륜당은 유생들을 교육하는 장소이다. 조선 후기에는 강학 기능은 약해지고 지역사회의 교화를 위한 상징적 기능이 강화되었으며 봄, 가을 향사 때에는 제관들이 대기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명륜당의 평면구성은 전부 대청으로 된 경우와 중앙 대청을 두고 양측에 방을 두거나 한쪽에만 방이 있는 경우가 있다. 방은 온돌구조로 되어 있으며 퇴칸이 있는 경우도 있다.



능주향교 동재
(4) 동ㆍ서재(東ㆍ西齋)
동ㆍ서재는 유생들이 숙식과 독서를 하는 장소로서, 사마재(司馬齋), 양사재(養士齋) 등으로 구성된다. 양사재는 중앙에 명륜당을 두고 좌우에 배치되어 동재와 서재로 나뉜다. 동재는 상급의 유생이 사용하고 서재는 아래의 유생이 사용되었다. 동ㆍ서재의 평면구성은 온돌방과 그 앞에 툇마루로 되어 있는 것이 일반적이나 방으로 둘러싸고 마루와 부엌에 의해서 그 유형이 구분되기도 한다.



돌산향교
(5) 누각
누각은 유생들의 학업으로 인한 피로를 풀고 호연지기를 기르는 장소로 유생들이 풍수를 즐기고 시작(詩作), 사색을 하며 여가를 보내던 건물이다. 누각의 명칭은 풍화루, 만화루 등이 주로 명명되었다. 누각의 구성은 대다수가 1층은 정문이며 2층은 대청형과 대청에 마루방 또는 온돌방이 첨가된 형, 다른 건물에 누의 기능을 첨가시킨 형태 등이 있다.

(6) 장판각(藏板閣)
장판각은 선현들의 사상을 기록한 서적이나 문집, 원생들의 교재를 간행하거나 그 목판을 보관ㆍ관리하기 위하여 건축되며 판본이나 서적들을 수장하기도 하는데 장판고, 문집판고, 판각, 서고 등으로 불리워진다. 건물규모는 정면 2~3칸, 측면 1~2칸 정도로서 대부분 맞배집이다. 내부 바닥은 습기 방지를 위해 마루를 깔았으며 벽체는 통풍을 위해 판벽으로 처리한 건물이 많다.

(7) 전사청(典祀聽)
전사청, 제기고 등으로 불려지는 데 제향시 제수를 마련하고 기물을 보관하는 곳이다. 건축형태는 정면 2~3칸, 측면 1칸 정도이다. 전사청의 평면은 다양하여 마루, 온돌, 흙바닥 등 여러 가지 조합으로 되어 있다.

(8) 고직사(庫直舍)
교직사(校直舍), 고직사 등으로도 불러지며 향교를 관리하는 사람들이 거처하는 곳으로서 제향시에는 제수를 만들고 식사를 준비한다. 평면형식은 민가와 같은 형식으로서 때문에 일정한 형식을 갖고 있지 않고 다양하다.

3) 향교 건축의 현황

고려시대부터 시작된 향교 건축의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으나 현재 전국에 남아 있는 향교는 233개 향교가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 중에서 창건연대를 알 수 있는 향교는 109개 향교에 불과하다. 또한 극히 일부의 향교에서만 제향의식이 거행될 뿐 교육의 기능은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다만 방학기간을 이용해 청소년들에게 전통예절 교육, 문화 보존, 유지를 위한 약간의 교육이 이루어질 뿐이다.
현재 향교의 조직은 서울의 성균관 관장하에 중앙에 유도회(儒道會) 총본부를 두고 지방조직으로서는 시도에 시․도지부, 시․군에는 향교단위로 지부를, 읍․면에는 지회를 두어 전국적인 유림 조직망을 형성하고 있다. 성균관을 포함한 전국에 분포된 향교의 문화재 지정 현황을 보면, 성균관의 문묘는 사적 제143호로 지정되어 있고, 중요건물들은 보물 제141호, 경내의 은행나무는 천연기념물 제59호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전국의 향교 중 보물로 지정된 건물은 장수, 나주, 영천, 강릉향교의 대성전이 있고, 전주향교는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1.4 향교건축의 입지 및 배치

1) 향교의 입지 우리나라 대부분의 건축이 그렇듯이, 향교 건축은 인문적 환경과 자연적 환경의 조화를 꾀하였다. 유교건축의 특징인 권위주의적인 색채를 고려하여 배치하는 데에 힘썼다. 즉 건축을 배치할 때, 축을 형성하여 권위를 상징하게 하였고 가급적이면 좌우 대칭을 이루도록 하였다. 지형상 축이 형성되지 않으면 비대칭의 축을 이용하여 권위주의적인 특성을 표방하였다. 또한 지형 조건에서 볼 때 높은 지형에는 위계가 높은 건물을 배치하여 정문 입구에서부터 점차적으로 접근하는 건축배치의 특성을 보여주었다.
풍수지리를 반영한 향교 건축의 대표적인 예로는 장수향교, 나주향교, 밀양향교, 울산향교, 진주향교, 함양향교 등이 있다. 나주향교는 뒤로는 금성산, 좌측에는 무등산, 우측에서 전면으로 조산(造山)이 위치하고 있어 전형적인 풍수지리를 반영하고 있다. 또한 울산향교는 경주로부터 뻗어내린 읍 동쪽의 무룡산을 진산(鎭山)으로 하고, 함월산을 주산(主山)으로, 태화강을 음수(陰水)로, 동천을 양수(陽水)로 하고 있어서 풍수지리에 입각하였음을 뚜렷이 볼 수 있다. 특히 나주향교는 처음에는 의곡사의 옛 절터에 세웠다가 다시 풍수지리에 입각하여 옥봉의 중턱에 위치하고 있을 정도로 풍수지리를 중요시하였다. 이러한 예를 보더라도 조선의 향교 건축은 풍수지리를 기본적으로 반영하였음을 알 수 있다.
강릉부지도의 향교조선시대의 읍성 축조계획은 중국에 영향을 받아 좌묘우사(左廟右祀) 면조후시(面朝後市)의 기본 법칙이 적용되었다. 이는 풍수지리와 더불어 중국 전한(前漢)시대 『주례』의 「동관고공기(冬官考工記)」에 나오는 읍성 계획에서 기본 원칙으로 삼았다. 이에 따라 도시의 구성은 읍성에 의해 성안과 성밖이 구분되어 있었는데, 성안에는 관아시설이 성밖에는 누(樓), 정(亭), 묘단(墓壇) 등이 있다.


강릉부지도의 향교

향교건축은 관학으로 인해 전체적 읍성계획에 따라 건립되는 경우도 많다. 그 대표적인 예가 전주향교(全州鄕校)이다. 전주향교는 부성(府城) 남쪽에 처음 창건되었으나 경기전(慶基殿)이 조영되면서 책 읽는 소리가 시끄럽다 하여 부성 서쪽에 위치한 화산(華山)의 기슭으로 이전하였다. 이후 선조 때에는 향교가 부성과 너무 거리가 멀다 하여 부성밖 동편인 현재의 기린봉 아래로 옮겼다. 풍수지리와 관아 건축의 특성을 종합적으로 반영한 대표적인 향교는 광주향교, 동래향교를 들 수 있다. 광주향교는 단석산 완봉밑에 처음 세웠으나, 호환(虎患)이 있다 하여 동문내로 위치하였다. 동래향교는 원래 읍성 밖 2리 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하였는데 유생들의 소청에 의하여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지금의 위치는 풍수지리설에 의하여 금정산의 줄기를 타고 내려와 수영강과 온천천이 감싸고 있는 읍성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 이렇듯이 향교 건축의 입지는 크게 네 가지 요소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

첫째, 향교가 제향과 강학의 기능을 수행하는 건축물답게 빼어난 자연경관을 배경으로, 즉 풍수지리설을 반영한 점이다.
둘째, 향교는 지방의 관학교육을 전담하는 기능을 가졌기 때문에 관아와의 거리나 위상관계의 영향을 받았다.
셋째, 풍수지리설과 관아 건축으로서 읍성과의 관계 영향을 혼합하여 위치한 점이다.
넷째, 특수한 경우로는 절터에 향교를 세움으로써, 풍수지리의 대원칙을 지키기 위해 시행된 점이다.
<표 7-6> 향교와 읍성의 거리

읍성과의 거리 향 교
읍성내 동래,하동,만경,옥구,임피,용안,영천,제주,경원,회령,종성,안주,의주,창성
읍성-2里 의령,산청,거제,영암,태인,옥과,장흥,익산,해남,장수,용담,흥덕,정읍,화순,부안,함열,구부,보성,무안,남원,무주,장성,고창,남평,김제,임실,포천,파주,영월,현풍,예안,청창,선산,홍주,예천,진도,연산,창녕,협청,론양,남해,웅천,진해
3-4里 동복,강진,광주,여산,곡성,여주,경주,순흥,거창,함양,진주,언양,사천,안의,김해,함안,칠원
5-6里 광양,무장,전주,함양,운봉,순천,구례,상주,홍산,울산,양산,기장,밀양,단성,고성
7-10里 창평
이러한 내용은 향교와 읍성과의 거리를 보면 알 수 있다. 향교는 대부분 읍성으로부터 10리 안에 위치하고 있으며 특히 읍성에서 2리 이내의 거리에 주로 세워진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향교 건축이 관의 통제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통치의 효율상 가까이 위치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향교가 읍성 내에 위치하는 것을 회피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대정향교지(大靜鄕校誌)』에서 ‘향교는 현의 성 가운데에 있었으나 지금은 옮겨 동쪽 밖에 있다’라는 기록과 『광산향교지(光山鄕校誌)』의 ‘향교는 현의 서쪽 3리에 있으며 옛날에는 성안에 있었다(鄕校在縣西三里 舊在城內)’는 기록으로 보아 향교를 성밖으로 이전한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다만 예외적으로 성내에 위치한 향교의 경우는 <표 7-6>에서처럼 전라도(제주), 함경도, 평안도로서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서 변방에 위치하고 해안가에 위치하여 외적의 침입을 대비한 향교의 위치 선정도 나타나고 있다.
읍을 중심으로 향교의 위치에 관한 방위는 『신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전체 330개소의 향교 가운데 211개소가 읍으로부터 동쪽과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는 읍성 축조 계획의 원칙에 의하여 좌묘우사의 방향을 따른 것이다. 따라서 향교 건축은 풍수지리에 의하여 배산임수의 지형을 택하였고, 관아 건축과 마을 주민과 교화를 고려하여 읍으로부터 가까이 위치하였음을 알 수 있다.

2) 향교의 배치

(1) 좌향(坐向)
『가례(家禮)』에 의하면 사당은 반드시 앞을 남쪽으로 하고 뒤를 북쪽으로 하도록 하였다. 이는 향교 건축 공간의 축이 형성됨에 따라 중요한 건물은 축을 중심으로 하고 주변의 건물은 좌우에 배치하여 건물의 위계성을 갖추도록 하고 있다. 특히 유교건축물로서, 권위를 강조하여 일직선을 축으로 하고 정면 상부에 중심 건물을 배치하며 그 주변으로 가급적이면 대칭을 형성하도록 배치하고 있다. 평지에 세워지는 경우 이러한 배치 원칙은 그대로 지켜질 수 있지만, 풍수지리에 입각한 산지에 건축되는 경우에는 이러한 원칙을 적용하면서 축을 꺽든가, 아니면 축을 변형하여 병렬형 등으로 자연지세(自然地勢)와 어울리도록 하였다.

(2) 배치유형
향교 건축의 배치유형은 향교 건축의 기능을 그대로 반영하여 이를 근거로 유형화한다.
첫째, 향교 건축의 가장 일반적인 양식인 전면에 강학 공간을 위치시키고 그 후면에 제향 공간을 배치한 전학후묘형이다. 다음으로 이들 제향 공간과 강학 공간의 순서를 바꿔 전면에 제향 공간을 위치시키고 후면에 강학 공간을 위치시킨 전묘후학형이다. 이 외에 제향 공간을 좌측에 강학 공간을 우측에 배치시킨 좌묘우학형과 제향 공간을 우측에 강학 공간을 좌측에 배치시킨 좌학우묘형이 있다.
전묘후학형은 앞쪽에 문묘가 오고 같은 축선상의 뒤쪽에 강학공간이 들어서는 유형으로 대부분 평지에 형성된 경우이다. 이는 동일선상에서 유교적 위계성이 後보다 前이 당연히 앞선다는 논리이다. 따라서 성현의 신위를 안치한 문묘구역이 강학구역보다 앞쪽에 들어서는 것이 당연한 논리이다.
이 형식을 취한 향교는 조선시대 부와 목의 큰 고을로 계수관이었던 경주, 전주, 나주, 함평, 영광, 정읍, 대구, 경산향교 8개소가 해당된다.
전학후묘형은 강학구역이 전면에 들어서고 그 뒤쪽으로 문묘구역이 오는 한국 향교건축 배치의 절대적인 유형이다. 이 배치유형을 결정짓는 요소는 지형에 의한 것으로 야트막한 야산의 경사지에 보통 3단으로 정지한 다음 낮은 단부터 진입구역, 강학구역, 그리고 제일 높은 곳에 문묘구역이 들어서 상․중․하의 위계성이 드러난 형태이다.
이 형식을 취한 대표적인 예로는 장수향교, 순천향교, 강릉향교, 남원향교 등이 있다.
좌묘우학형은 진입축을 중심으로 제향 공간이 좌측에 위치하고 강학공간이 우측에 위치한다. 이들 공간은 배치상으로는 동등한 위치에 속하지만 건물 기단의 높낮이를 조정하여 제행공간의 위계를 더 높이고 있다. 좌묘우학의 대표적인 예로는 영천향교, 밀양향교, 제주향교 등이 있다.
좌학우묘형은 좌묘우학형과는 반대로 진입축을 중심으로 좌측에 강학 공간이 위치하고 우측으로 제향공간이 위치한다. 대표적인 예로는 돌산형교와 단양향교가 있다.


전학후묘형의 영월향교

전묘후학형의 나주향교

단면에서 살펴본 향교건축의 위계(나주향교)
향교는 유교적 이념에 입각하여 신 사회체계를 확립하려 했던 조선초기 사회의 관제적 기구였기 때문에 건축에 있어서도 획일적이고 통일적이 요소가 다른 건축보다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지역적으로 배치구조에 차이점이 드러난 경우도 있다. 그 중 제일 두드러지는 것이 배치형식의 ‘전묘후학’형이고 또 하나는 강학구역의 건물배치로 명륜당과 동․서재의 위치에 따라 결정되는 ‘전재후당’형, ‘전당후재’형이다. 전묘후학형은 전라도 지역에 절대적으로 우세하며 경기도나 충청도, 강원도 그리고 경상도 남부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또한 전당후재형은 전라도 지역에 거의 모든 향교에서 나타나고 있으며 전재후당형은 경상도 지역에서 주로 나타나고 있다. 중부지역인 충청도와 경기도, 강원도는 두 형식이 혼재되어 있어 통일적인 요소는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향교건축은 평지와 구릉지에 배치하는 기법이 다르게 나타난다. 평지에 건축하는 경우 전학후묘형이 경사지에 2~3단으로 지형을 정지한 다음 전묘후학형으로 배치하였다. 전묘후학형의 경우 서울 문묘를 비롯한 나주향교, 전주향교 등 대규모의 향교와 함평, 정읍, 영광 등의 소규모 향교가 있다. 이 유형의 배치는 그다지 많지 않지만 각 지방의 중심 향교가 이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는 중국 문묘의 제도를 충실히 따름으로서 권위를 나타내려는 의도로 보인다. 전학후묘의 배치는 서울의 성균관을 비롯한 대다수의 향교 건축에서 건축 규범으로 지켜져 왔으며, 서원 건축에서는 거의 대다수가 이러한 배치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이는 제향 공간을 중시하는 유교의 사상을 표현한 것으로, 예로는 광주향교, 장수향교와 나주향교가 있다.

2. 서원(書院)건축


병산서원 전경

조선시대 지방의 사립교육기관인 서원은 조선 중기 이후 향교의 쇠퇴로 인해 서원의 부흥을 가져오게 되었으며,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이 내려질 때까지 사학교육기관으로서 중심 역할을 다하였다. 조선시대 서원은 유교를 숭상하던 사림 세력의 향권주도와 향촌 교화를 위한 집결체로서 유향소(留鄕所), 관학교육기관인 향교와 더불어 향촌 운영기구의 하나로 인식되어졌다.
서원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강력한 중앙집권제와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사상적 기반으로 유교를 육성하고자 한 왕조의 정책에 의해서 탄생하게 된다.

2.1 서원건축의 성립

1) 서원의 발생 우리나라의 서원은 신라시대로부터 유래를 찾아볼 수 있는 사학(私學)교육과 고려시대부터 발생하여 세워진 사묘(祠廟)제도가 결합되어 성립된 사학교육기관이다.
조선왕조의 탄생과 성리학적 유교문화의 실천주체인 사대부 계층이 조선시대의 지배계급으로 등장한 이후 유교는 불교를 대신하여 민중의 생활을 이끌어 온 사상적 지주로서 종교적 권위를 행사하였다. 그러나 사대부 계층은 시대의 흐름과 양적 확대로 인하여 15C말에 이르러는 제한된 관직과 토지의 급여를 둘러싸고 상호간에 갈등을 빚어내니 이에 지배조직과 직접적인 관계를 갖지 못하는 비관료층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들은 각기 연고를 찾아 지방에 흩어져 사림을 형성하여 갔다.

조선시대 성리학의 철학적 연구는 사림의 성장과 길을 같이 하였다. 길재, 김숙현, 김종직으로 이어지는 사림의 학풍은 관학의 학풍과 달라서 경학에 치중하고 성리학에 대한 신용이 컸다. 그들은 도덕과 절의를 숭상하고, 학술과 언론을 발판으로 하는 왕도정치를 희구하였다. 특히 사화로 인하여 성리학의 철학적 발전은 더욱 고조되었고 여기에 국제적 긴장도 완화되어 평화적인 분위기가 오랫동안 지속되어 철학적 사색에 깊이 참여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였다. 그리하여 16C에는 우리나라 철학사상 특기할 만한 심오한 철학적 이론과 논쟁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이제 성리학은 출세의 길을 찾는 외구적인 학문보다는 순수 학문으로서 우주의 본질과 이성의 탐구라는 내구적인 학문의 방향으로 완전히 방향을 돌린 것이다. 서원의 성립은 이와 같은 성리학의 성격 변화와도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서원성립의 배경에는 관학의 한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중소지주층의 신분상승을 배경으로 성립한 조선왕조는 그들의 지식인화를 위한 배려를 적지 않게 가졌다. 즉 유교정치의 이론과 실제를 이해 실천하기에 힘쓰게 했을 뿐 아니라 유교적 의례를 널리 보급 시켰고, 나아가 교육관계의 확충을 보게 하였다. 관학체제로 지방의 향교, 중앙의 사부학당, 성균관 등을 세우고 그 발전을 위한 정책적 배려를 적지 않게 지속적으로 가졌다. 이들 국가 교육기관의 목적은 관사의 배양도 물론 지적될 수 있지만 본원적으로는 교화에 중점을 두어 향풍을 진작시킴에 있었던 것이다.

조선시대 최초의 서원은 중종 38년(1453)에 풍기군수 주세붕이 설립한 백운동서원이다. 주세붕은 주자(朱子)의 백록동서원의 규례에 의하여 고려의 유학자 안향(安珦)의 거주지인 백운동에 그를 추모하고 제향하기 위해 사우(祠宇)를 건립하고, 사묘 앞에 서재를 세워 강학하는 공간인 백운동서원을 건립하였던 것이다.

또한 사액(賜額)제도가 발생하였는데 사액이란 서원의 교화사업을 장려하기 위하여 국가로부터 서원의 명칭을 현판(額板)에 모사한 편액을 선사하는 것으로 이와 함께 서원의 유지관리를 위해 토지와 노비 그리고 다수의 서적을 내리고 또 면세 면역의 특전을 주게 되었다. 백운동서원은 1550년에 소수서원(紹修書院)이란 어필(御筆)편액을 선사 받음으로 최초의 사액서원이 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명종대부터 사액서원이 발생하였고 숙종대에는 서원의 수가 295개, 사액서원의 수가 132개로 남설의 경향이 농추하였다. 이처럼 서원의 수가 많아지자 조정에서는 여러 가지 정책 등으로 이를 저지하려 하였으나 별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또한 이와 함께 서원에 많은 폐단이 발생하여 영조대에 이르러서는 서원정리문제가 대두되어 영조는 300여개소의 서원을 정리하였다. 그 후 고종 5년(1868)에 대원군은 서원철폐령을 내려 전국에 47개의 서원만을 남기고 모두 철폐해 버렸다.

결국 서원건축은 사찰건축이나 향교건축에 비하여 그 기간이 300여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동안 존속되었으나 조선시대 사학교육시설로서 그 존재가치가 크며 건축적 모습도 한국의 지리적 환경과 유학적 사상에 맞추어 나름대로 특징 있는 건축으로 정착하였다.

2) 서원의 기능

사학교육기관인 서원과 관학교육기관인 향교와의 차이점이라면 제향의 기능에 있어 향교가 공자를 위시한 중국의 성현과 우리나라의 선현을 모신다면 서원은 유학의 이념에 철저하여 선현들의 제향 기능을 더욱 강화하였다. 또한 향교에 비해 자기 수양과 은둔의 생활을 즐긴 점이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

서원의 기능은 세 가지로 말할 수 있는데,

첫째는 선현에 대한 제향사상에 의한 사묘적(祠廟的) 기능이다.

둘째는 유생들의 자기 수양과 자제들의 교육을 담당했던 강학 기능이며,

셋째는 이들을 지원하면서 지식을 전달하기 위해 펼쳤던 문집 및 출판․보관 기능을 들 수 있다.

2.2 서원건축의 구성

1) 서원건축의 입지
성균관이나 향교가 조정의 직접적인 관여를 받게 되는 관학인 반면 서원은 사학으로서 과거에 대한 준비기관이란 면에서는 향교와 같으나 조정과는 행정상으로 상당히 분리되어 있다. 또한 서원제도 자체에 함유된 은둔사상 등이 내포되어 서원 건축의 위치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경상도와 전라도 지방의 읍지들에 나타난 서원 및 향교의 위치를 살펴보면 성곽이나 현치, 읍치 부근의 서원이 소수인데 비해 이들로부터 원거리에 위치한 서원은 큰 숫자를 차지한다. 이는 관아를 비롯한 행정의 중심지로부터 대부분 서원이 격리되어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 있어 지배적인 택지사상으로서 풍수지리설은 서원건축의 입지선정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우선 지세에 있어서 서원건축은 주로 산의 아래에 위치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는 강학 공간보다 제향 공간을 후면의 고지에 두려는 서원건축 특유의 위계성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성균관의 경우는 평지에 건립하되 전면에 제향 공간을 두고 후면에 강학 공간을 두었고, 향교건축에 있어서도 경사지에 입지할 경우는 전학후묘 배치를, 평지일 경우는 전묘후학의 배치로써 지세에 따라 융통성 있는 배치를 하였다. 그러나 서원의 경우는 평지이든 경사지이든 전학후묘의 배치로 일관하였는데 이는 제향 공간을 강학 공간보다 고지에 두려는 의도로서 자연히 경사지를 얻기 쉬운 산 아래에 주로 건립하였던 것이다. 다만 예외적으로 경주시의 서악서원은 평지에 건립되어 강학, 제향 공간의 고저차를 두지 않았으나 배산지형을 취한 것은 다른 서원과 다름이 없다.


노강서원 배치
2) 서원의 공간구성
서원의 공간구성은 향교와 마찬가지로 기능에 의하여 구분된다. 일반적으로 서원의 경우는 향교건축의 배치와는 달리 전학후묘형이 전부이며 전묘후학형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공간의 구성과 공간의 위계는 향교보다는 뚜렷하게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서원의 입지가 읍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구릉지에 위치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공간의 구성도노강서원 배치 자연과의 조화를 이루면서 구성된다.
평지에 위치한 서원과 구릉에 위치한 서원이 약간 차이는 있지만, 일반적으로 외삼문에 들어가기 전에 오솔길 등의 진입공간을 거치게 되며 외삼문을 들어서면 강당 공간이 위치한 본 공간이 나타나게 된다. 누각이 있는 경우 강학 공간을 둘로 구분하여 1차적인 공간과 2차적인 공간으로 구분할 수도 있다.
강당을 지나면 내삼문이 위치하게 되며 이 문안에는 사당을 중심으로 한 제향 공간이 위치한다. 이와 같은 공간구성은 모든 서원건축에서 동일하게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원칙은 지켜지고 있다.



노강서원 강당
⑴ 강당(講堂)
병산서원 강당강학공간의 중심으로 유생들이 강학하던 곳이며, 또한 원장이 거처하는 곳이기도 하다. 향교의 명륜당에 해당하는 건물이다. 서원내에서는 제일 규모가 크며 기능적으로 넓은 대청, 그리고 온돌방이 적절히 배치되어 있다. 정면 3~6칸, 측면 2~3칸 정도로 대청과 온돌방으로 구성된다. 서원 강당으로 규모가 큰 것은 예림서원의 강당으로 정면 6칸, 측면 2칸의 규모로 되어 있다. 그러나 대다수의 서원은 강당 규모가 5칸×3칸, 5칸×2칸의 규모가 일반적이다. 평면은 대부분 중앙에 대청을 두고 양측에 정면 1칸씩 온돌방을 두는 것으로 이러한 형식이 가장 많다. 그러나 양측의 온돌방이 좌우균형이 많지 않는 예도 있다.(도연, 수림, 예림서원 등) 그리고 양측 중 한편에만 온돌방을 두는 형식이 있다.(소수, 도산, 서계서원 등) 마지막으로 전체를 온돌방으로 하고 전면에 1칸 폭의 대청을 둔 형식이 있는데 이는 강당의 기능상 불합리한 평면형식으로 보인다.(덕양, 오봉서원 등) 강당의 명칭은 [-堂], [-書院], [-講堂], [-軒] 등의 어미를 붙여 부르는데 이 중 [-堂], [-書院]이 주로 쓰인다.


노강서원 사당
⑵ 사당(祠堂)
해망서원 사당제향 공간의 중심으로서 선현, 선조 등의 위패를 모시거나 영정을 함께 모시고 춘추로 제향을 베푸는 건물이며, 신실(神室)이라고도 한다. 제향인은 보통 1인을 원칙으로 하나, 후에 더 모실 분이 있는 경우에는 여러 명을 봉안하게 되어 서원에 따라 1~5인을 두고 있다. 평면 구성은 정면 3칸이 대부분이며 측면은 1.5~3칸 정도인데 전면에 퇴칸을 많이 두는 것이 다른 건물과 다르다. 사당은 제향의식만을 위한 것이므로 온돌방은 없고 우물마루나 회반죽바닥으로 하였다. 사당에 있어서 퇴칸의 구성은 제례의식과 관련이 있는데 <가례>에 의하면 사당 섬돌 아래에 토봉이 넓고 좁으냐에 따라 사당 처마와 마주 연결하여 지붕을 덮고 제향 시에 여러 사람이 서 있을 수 있도록 하여야 하는데, 이는 주택의 사당, 향교의 대성전, 서원의 사당 등에는 퇴칸의 형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내부공간과 외부공간의 중간공간 역할 뿐 아니라 죽은 자와 산 자의 매개공간의 역할까지도 하고 있는 것이다. 사당의 명칭은 [-祠], [-廟], [祠宇], [-書院] 등의 어미를 붙이는데 이 중 [-祠]가 대부분이다.


병산서원 동재
(3) 재(齋)
원생들이 숙식과 독서를 하던 곳으로서 정면 2~5칸, 측면 1~3칸 정도로 그 규모가 다양하다. 재는 일반적으로 동재와 서재로 나누어지는데 동재에 기거하는 원생이 서재의 원생보다 선임된다. 동재와 서재의 명칭은 서원마다 각 서원마다 고유의 명칭을 부여하였다. 도동서원의 경우 거인재(居仁齋:동재)와 거의재(居義齋:서재), 도산서원의 경우 박약재(博約齋:동재)와 홍의재(弘毅齋:서재), 필암서원은 진덕재(進德齋)와 숭의재(崇義齋)라는 현판을 걸었다. 건축형식은 유생들이 기거하는 방이었으므로 살림집의 형태에 가깝게 건축되었다.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1칸 정도이며 전면은 툇마루를 설치하는 경우 반칸이 더 나간다. 평면의 구성은 안쪽으로 모두 온돌방을 설치한 경우도 있고 한쪽 끝으로 부엌, 또는 중앙으로 1칸 대청을 배치하는 등 다양한 모형으로 되어 있다.


병산서원 장판각
(4) 경각(經閣)
경장각(經藏閣), 어서각(御書閣), 묵판고(墨版庫)등으로 불리워지는데 필암서원과 옥산서원에서만 찾아볼 수 있고 이는 전술한 장판각과 함께 건축되어 있으나 그 기능에 있어서는 대동소이한 것으로 생각된다. 또 이런류의 것으로 도산서원 내진도문 양측의 동․서광명실을 들 수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바닥은 마루로 되어있다.
그밖에 향교에 구성된 건축물과 비슷한 기능을 하는 누각와 동․서재, 전사청(제기고), 고직사(교직사)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일반적으로 향교보다는 규모와 기능면에서는 축소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3) 서원건축의 위계와 축

서원건축의 위계의 표현 방법은 향교와 마찬가지로 지형을 이용한 것과 배치를 이용한 방법이 있다. 지형을 이용한 위계는 경사지에 서원을 배치, 진입공간에서 승화공간에 이르는 공간을 점차적으로 높게 배치하여 위계를 표현하는 경우이다. 배치에 의한 위계의 경우 강당과 사당에 이르는 구획을 내삼문과 담장으로 구획하여 표현하고 있으나, 지형에 의한 높이의 단차를 이용하여 위계를 표현하기도 한다.
배치에 의한 방법은 남북을 중심으로 일직선의 축을 형성하고 이 선에 따라 건물들을 배치하였다. 중심축의 경우 맨 위에는 사당을 배치하여 가장 높은 위계를 표현하고 그 다음에는 강당, 그 하부에는 문을 위치시켰으며 기타 부속건물은 좌우나 주변에 배치시켰다.


단면에서 살펴본 서원건축의 위계(도동서원)
서원건축은 위계를 표현하기 위해 축을 사용하였다. 축은 유교건축 등에 권위를 상징하기 위하여 흔히 사용되는데, 서원건축의 경우에는 권위를 상징하면서도 자연과의 조화를 꾀한 점을 볼 수 있다.
직선형의 경우, 주요 건물을 완전히 직선상에 일치시키고 대칭구조를 이루도록 하였다. 그 예로 필암서원, 옥산서원, 무성서원, 도동서원, 금오서원, 고천서원, 심곡서원 등이 있다.
꺽은축선형은 지형의 변화나 시지각적 측면에서 변화를 주기 위하여 사용된다. 충렬서원, 신안서원 등이 있다.
주부축형은 주축과 나란히 부축이 되는 형성되는 형으로 주축선이 있고 그 주변에 부축이 형성되어 좌우이동이나 진입동선과의 연계를 중시한 형이다. 예로는 병산서원, 도산서원, 인흥서원, 삼계서원, 덕천서원, 덕양서원, 강성서원 등이 있다.
직교축형은 축이 직교하는 형으로 중요 건물의 중심축선이 직교하여 개별적인 성격을 유지하여 문묘의 성격을 직접적으로 고양하는 기법이다. 소수서원, 임천서원, 수암서원 등이 있다.
병렬축형은 주요 축선이 평행하여 개체성을 동등하면서도 강하게 표현하는 형으로 오봉서원이 있다.

3. 사우(祠宇)건축

조선시대의 사우(祠宇)는 설립목적이나 기능, 명칭 상에서 서원과 그 성격이 크게 구별될 수 있는 것이었다. 예컨데 서원이 양육인재(養育人才)와 사문진흥(斯文振興)에 목적을 두고 장수강학(藏修講學)의 기능을 담당하였음에 반하여 사우의 경우는 이러한 교육적 기능보다는 보본숭현(報本崇賢)의 사현에 더욱 큰 비중이 있었다. 그러나 17세기 후반기 이후부터 書院이나 祠宇는 모두 조선시대 양반들이 그들의 사회적 기능을 유지 보강하려는 같은 목표를 가진 것이었으므로 점차 그 엄격한 구별이 무너져 갔다.

순천 충렬사호남지역의 서원·사우 건립은 전국 총 건립수의 20%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시기별로도 전라도가 선조 현종대의 전국 평균 사우점유율 34%를 훨씬 넘는 42%를 차지하고 있는 점이나, 숙종-정조대의 평균 56%를 크게 상회하는 65%에 달하는 점에서 돋보여진다. 이같이 사우의 점유율이 높다는 것은 조선후기에 이르러 서원과 사우의 구분이 모호해진다는 사실을 인정하더라도, 서원보다는 사우의 경우 문중적인 성향의 인물제향이 상대적으로 많다고 볼 수 있다.


순천 충렬사
전남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해 문중적인 서원의 성격이 비교적 잘 드러나는 지역이라는 점이다. 즉 전라지역의 향촌사회는 조선후기 노론정권이나 남인세력의 거점확보를 위한 공략과 경쟁이 치열했던 곳이면서, 영남·기호지역의 도학적인 학맥중심의 연결과 달리 충절인맥을 중심으로 하는 문중기반의 지속이 돋보여지는 곳이다.

조선후기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가문의 지위를 유지한 전남지역의 유력 성씨들은 자진들의 사족적 특성을 대체로 <世祖의 王位簒奪-己卯士禍-倭亂,胡亂,忠節>로 연계시켜 일반화하려는 경향이 있다. 각 성씨들은 대개 그들의 조선전기 入鄕治祖를 조선개국이나 세조의 왕위찬탈에 반대하는 입장의 절의적인 인물로 묘사하고, 기묘사화기에 성립한 사림학맥에서 왜란과 호란기에 충절인물을 다수 배출하였음을 내세운다. 그리고 이들에 대한 국가의 포장정책이 숙종-정조대에 집중되면서, 또 붕당정치기에 서인-노론계 세력의 집요한 잠식으로 이 지역의 문중세력들은 문중의 이해를 선점하고자 경쟁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또한 조선후기 농업생산력 발전과 관련하여 새로운 경제세력의 성장이 예견되고, 그들에 의한「門中書院」건립활동도 검토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조선후기의 농업생산력 발전과 함께 영산강과 탐진강, 섬진강 등을 면한 농토가 많은 전남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하여 사족들의 경지 확대를 통한 경제력 증대가 용이했던 지역이었다는 점이다. 즉 농지의 평야 저지대확산은 새로운 농지를 중심으로 생활권을 형성하는 신흥세력의 출현을 가능하게 하였을 것이고, 이 과정에서 조선 전기 이래 사족가문들이 지녔던 사회경제적 지위가 도전 받거나 전도될 여지가 적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새롭게 성장하는 신흥세력들은 그들의 경제력을 기반으로 타 가문과의 우위권 경쟁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자체 문중조직의 기반강화 내지 정치권력과의 연계가 필요했고, 전남지방의 특징적인 「門中書院」의 건립경향은 바로 그러한 필요를 반영하면서 유용하게 활용되었던 결과로 보여지는 것이다.

4. 재실(齋室)건축


광산김씨 재실
齋室(祭閣, 齋閣, 齋舍)은 제수를 장만하고 제례절차를 논의하고, 또한 많은 후손들의 숙식을 위해 지어진 건물로 곳에 따라서는 문종의 모임이나 서재와 같은 강학기능을 하는 곳도 있다.
조선시대 재실의 건립도 역시 유교적 사회윤리관이 그 배경이 된다. 주자가례에 의한 예제(禮祭)는 제사로 이어져 가묘가 세워지고 또한 문중 중심의 재실이 건립되게 되었다. 이같은 문중의 재실 마련은 조선후기(특히 17세기 중반이후)에 와서 일반화되는 역사적 산물로 주목되고 있다. 이는 17-18C에 일반화된 서원·사우의 건립을 통해 향촌사회에서 가문의 지위를 높이려는 경향과 관련이 깊다고 하겠다.

예컨데 재실의 건립은 ① 문사(門祠)의 건립경향 ② 장자중심의 제사상속과 재산상속 ③ 중시조의 강조 ④ 동성동족 관념의 강화 등과 연결되는 일련의 변화양상이 일정하게 반영된 것이라고 하겠다. 현재 전국적으로 재실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물론 이중에는 20C 이후부터 최근에 창건된 재실이 상당수 차지한다.

재실은 향교나 서원, 정사, 정려 등 다른 유교유적과는 달리 지극히 문중 중심의 시대성을 초월한 유적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수적으로 많은 만큼 재실은 향촌사회의 유교문화적 경관 구성요소로 큰 몫을 담당하고 있다. 즉 재실은 종가, 서원, 사우, 정사, 정자 등과 더불어 동성마을의 구심점이 되기도 한다. (김지민, 『韓國의 儒敎建築』, 발언, 1996, pp.139-145)

5.정려(旌閭)건축


연안김씨 종가 삼효문
효자나 열녀, 충신 등의 행적을 높이 기르기 위해 그들이 살던 집 앞에 문을 세우거나 마을 입구에 작은 정각을 세워 기념하는 것을 말한다. 정려란 용어는 정문(旌門), 정표(旌表) 등으로도 『신증동국여지승람』등에 표기 되어있다.
정려를 받는 절차는 그 고을의 관청 또는 대상자의 직계후손이나 고을 유림들이 중앙의 예조에 정려를 내려주기를 청하면 왕명에 의하면 명정(命旌)을 받게 된다. 따라서 명정을 받는 것은 개인이나 가문의 대단한 명예가 될 수도 있고 아울러 그 마을의 자랑거리가 되기도 한다. 정려를 받게 되면 그 자체가 국가에서 주는 크나큰 은전이 되지만 이와는 별도로 호세면제, 부역면제 등의 포상이 주어지고 경우에 따라서는 벼슬도 주어진다.(『신증동국여지승람』 제23권, 동래현 효자조)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