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박현기, [무제], 1979년
얕은 강물 위에 거울을 꽂아놓고, 물결의 흐름이 시시각각 반영되는 모습을 영상 및 사진으로 촬영했다. |
![]() 박현기, [무제], 1979년
위 작품의 설치 장면(2015,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
![]() 박현기, [무제], 1980년
작가 자신이 약 3분간 반복적으로 뛰다가 지쳐서 주저앉는 영상작품. 8m 필름을 복원하여 35년 만에 재생된 작품이다. |
그는 평생 대구에 있으면서도 세계적인 예술의 흐름을 누구보다도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의 관심은 어떻게 우리가 지닌 고유한 정신세계를 깊은 뿌리로 삼으면서도, 그것을 세계에서 최고로 ‘아방가르드’한 예술 언어로 표현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박현기는 대구 근교 화원의 남평 문씨 세거지인 ‘광거당(廣居堂)’의 80세 노인에게서 한국의 전통문화를 배웠으면서도, 동시에 한스 홀레인(Hans Hollein)이라는 포스트모더니즘 건축가의 작품에 빠져들었던 인물이다.
동양적인 것과 서양적인 것, 정적인 것과 동적인 것, 성스러운 것과 세속적인 것 등 세상의 온갖 극단(極端)들이 서로 갈등하고 공존하는 20세기의 문화 지형도에서 자신의 위치는 어디일까? 그것이 1960년대 이후 그의 고민이었다.
![]() 박현기, [무제], 1984년
1979년 이후 반복적으로 작업했던 TV 돌탑 시리즈 중 하나. 1984년 타이베이 전시 때의 설치 장면 사진이다. 그는 한국뿐 아니라 상파울루, 파리, 도쿄, 오사카, 타이베이 등에서 이 작품을 발표하면서, 항상 현지의 돌을 구해다 썼다. |
![]() 박현기, [무제], 1982년
1982년 대구 근교 강정에서 행했던 6개의 설치 및 퍼포먼스 작업 중 하나이다. 그는 콜라캔이 널브러진 쓰레기 더미 사이에, 당시로서는 매우 비쌌음에 틀림없을 모니터들을 던져놓았다. 나중에는 저런 골동 모니터가 실제로 쓰레기처럼 버려지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예견하기라도 하듯. |
그의 초기 비디오 작업은 돌탑 사이에다 돌을 찍은 영상 모니터를 끼워 쌓아 올린 것들이다. ‘그냥 돌’과 ‘모니터의 돌’은 서로 중첩되어, 실재하는 돌과 영상으로 비추인 돌 중에서 무엇이 진짜인지를 물어보게 한다.
하늘에 뜬 달과 강물에 비친 달을 구별하지 못한 채 강물의 달을 잡으려다 익사했다는 전설을 남긴 이백(李白)이나, 호접몽(胡蝶夢)을 꾸고 인간과 나비의 구분을 할 수 없었던 장자의 정신세계를 생각나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실제로 보고 느낀다고 믿는 ‘현실’ 세계는 과연 ‘진짜’일까. 그 너머 ‘현실’을 관재하며 ‘만물’을 관통하는, 좀 더 근본적인 우주적 질서가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인간 존재가 그러한 우주적 질서를 언뜻 스치듯이라도 인지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러한 질문은 어떤 점에서 철학과 예술의 매우 오래된 과제였으며, 박현기는 자신의 방식과 언어로 그 해답을 찾고자 노력했던 예술가였다. 그것도 이왕이면 ‘모니터’라는 당시로서는 ‘최신의’ 장치를 도구 삼아……
그의 작품은 전혀 팔릴 수 없는 물건들이었고, 국내에서는 알아주는 이들도 극히 적었다. 그는 1980년대까지 주로 상파울루, 파리, 도쿄, 오사카, 타이베이 등지에서 작품을 발표했다.
그가 뒤늦게 국내에서 활동 영역을 넓히게 된 것은 1990년대 중반 이후 IT 붐, 미디어 열풍, 국제화 추세가 고조될 때였다. 제대로 작업을 해보겠다는 강한 의지로 1997년을 정점으로 하여 [현현], [만다라], [지하철 정거장에서] 등의 작품이 쏟아졌다.
그러나 이 해 12월에 터진 IMF로 인해 예술작업의 자금이 되어주었던 인테리어 사업이 어렵게 되었고, 1999년 8월 위암 말기 판정을 받아 2000년 1월 갑작스런 임종을 맞았다.
그의 작업은 사후 오랫동안 유족의 손에 보존되어 왔다. 총 2만여 점에 달하는 드로잉, 판화, 사진, 영상필름 등이 빛을 보기를 기다려 왔다. 국립현대미술관이 2013년 아카이브 기반의 미술연구센터를 운영하기 시작하면서, 그의 대규모 아카이브가 기증되어 처음으로 정리되기 시작했다.
약 2년간의 체계적인 분류, 정리, 기술 작업을 거친 후 이번 전시를 통해 1,000여 점의 아카이브 및 작품이 선별, 공개되었다. 이로써 박현기라는 한 작가의 진면모가 제대로 알려지는 계기가 마련된 셈이다.
전시가 끝난 후에는 미술연구센터 원본열람서비스를 통해 그의 아카이브를 하나하나 직접 열어보고 살펴보는 기회를 연구자에게 제공할 수 있게 된다. 그에 대한 연구는 이제 시작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그를 ‘비디오 작가’라고만 표현하기에는 지나치게 한정적인 측면이 있다. 그에게 비디오는 그저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인간의 힘으로는 영구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을 ‘우주적 코드’를 암시하는 여러 가지 매개체 중의 하나일 뿐인 것이다.
박현기가 남긴 풍부한 드로잉, 사진, 작업 노트 등을 통해, 한 예술가가 끊임없이 손을 움직이며 생산해낸 다종다양한 세계를 만나보면 어떨까. 세상 만물의 이치, 만다라의 세계가 여기에서 발견될지도 모를 일이다.
![]() 박현기, [현현(顯現)] 시리즈 중에서, 1997년
그저 이리저리 흘러가는 물의 형상을 영상으로 담았다. 하염없이 물결을 바라보는 ‘무념’, ‘무위’의 경지에서 어쩌면 인간도 진리의 언저리에 잠시 닿을 수 있을지 모른다. |
![]() 박현기, [만다라] 시리즈 중에서, 1997년
밀교에서 우주의 진리를 표상하는 도상으로 알려진 만다라. 기하학적 패턴은 만다라에서 차용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포르노 사진의 합성된 이미지가 드러난다. |
![]() 박현기, [개인 코드], 2000년
박현기의 유존작. 모든 개별 인간이 우주적으로 부여받은 자연적 코드인 ‘지문’과 사회적으로 부여받은 인위적 코드인 ‘주민등록번호’. 그것들이 빠르게 교차하며 끊임없이 생겨났다 사라진다. 이렇게 수많은 인간들이 각자의 '코드'를 지닌 채 태어나고 죽는다. |
![]() [박현기 1942-2000 만다라] 전시장 아카이브 설치장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