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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덕동파출소의 무기를 압수하다
증 언 자:김광호(남)
생년월일 :1959(당시 나이 21세)
직 업 :택시기사(현재 자개공)
조사일시 : 1989. 1
개요
1980년 5월 18일 병무청에서 신체검사를'받고 귀가하던 김광호 씨는 조선대 부근에서 공수에게 머리를 맞고 간신히 풀려났다. 그 후 시위에 참여하게 된 그는 21일 개방대학 부근의 파출소(효덕동파출소)에서 무기를 탈취하는 등 열심히 활동했다.
소년원을 들락거린 어린 시절
막둥이인 나는 어린 시절부터 무척 개구쟁이로 자랐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면 무엇이든지 남의 눈치 보지 않고 하고야 마는 성미였다. .중학교 때 휴학계를 제출하고 친구들이랑 어울려 다니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나는 속칭 '주먹세계'라고 일컫는 조직생활을 하게 되었다. 1976년에 집단폭력 사건에 연루되어 공범 12명과 함께 1년 6개월의 실형을 받았다. 인천 소년교도소에 복역중이던 1977년 아버님이 법무부에 제출한 탄원서 덕분에 가석방되었다. 내가 석방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상습폭력배 근절'에 걸려 다시 소년원에 수감되었다. 2년 동안 소년원에 있으면서 운전면허증을 취득하고 1979년에 석방되었다. 이렇듯 10대 후반기를 거의 소년원에서 보내고 말았다.
계엄군의 만행을 보고
1980년 5월 18일 병무청에서 신체검사를 받고 귀가하다. 전남대병원 앞에서 계엄군들이 진을 치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일부는 곤봉을 들고 데모하는 학생들을 곤봉으로 내리치면서 진압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산수동에 있는 집으로 가기 위해 동명 테니스장을 거쳐 농장다리로 가는데 군용트럭이 내 옆을 휭하니 지나갔다. 산수동에서도 공수들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그날은 별탈없이 집으로 갔다.
다음날(19일) 오후 어제 봤던 시내의 상황이 떠올라 집에 있을 수 없었다. 강한 호기심을 품고 조선대학교 앞으로 걸어갔다. 그곳에도 공수들이 있었으나 나는 잘못한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태연히 지나갔다. 당시 내 나이 스물두살 이었고 빨간 잠바를 입고 있었다. 이런 외모가 대학생처럼 보였는지 그들 앞을 막 지나치려는데 불러세웠다. 내가 발걸음을 멈추자마자 군화발로 머리를 찼다. 머리를 얻어맞고 본능적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사력을 다해 뛰었으나 얼마 못 가서 붙잡히고 말았다. 그들은 그때부터 무작정 두들겨 팼다. 머리, 어깨 가리지 않고 온몸을 곤봉과 군화발로 짓이기더니 한참 후 보내줬다. 억울한 심정으로 시위대에 합세 공수한테 얻어맞은 머리에서 피가 흘렀다.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상처를 손으로 감싸쥐고 집으로 갔다. 피를 흘린 채 집으로 가자 깜짝 놀란 가족들이 그 길로 병원으로 데려갔다. 병원에서 머리에 난 상처를 꿰매고 집으로 왔다.
병원에 갔다 온 후부터 자리를 깔고 누워버렸다. 뼈마디 쑤시고 아파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다음날(20일) 오후까지 방에만 누워 있자니 좀이 쑤셔서 견딜 수 없어 밖으로 나와보니 사람들이 군데군데 모여서 웅성거렸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오늘 밤 시민들이 시내에서 한판 벌이기로 했다"는 것이다. 나는 심상찮은 분위기를 직감하고 계림동 로터리 부근으로 갔다. 그곳에 있던 시민, 학생들과 함께 농장다리로 갔다. 그때 "공정보도를 하지 않는 MBC방송국을 불태우기로 했다"는 말을 들었다. 우리는 너나없이 농장다리 일대의 주택가를 뛰어다니며 "빨리 전깃불을 꺼라"고 소리쳤다. 시민들의 호응도가 높았다. 우리가 불을 끄라고 외치고 다니면 즉시 소등을 했다. 한참을 외치고 다니자 그 일대가 캄캄한 어둠에 휩싸였다. 다시 농장다리로 와서 그곳에 몰려 있던 시위대와 함께 MBC방송국 앞으로 갔다. 그곳에서 공정보도를 촉구하는 구호들을 외쳤다.
그러자 2층에서 한 사람이 창문 밖을 내다봤다. 시민들이 2층을 향해 돌을 던졌다. 돌에 맞았는지 그 사람은 다시 안으로들어가 버렸다. 몇 사람의 시민이 방송국 2층으로 올라갔다. 나도 따라 올라갔다가 곧바로 내려와 버렸다. 잠시 후 시위대를 향해 "방송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나오라"고 외쳤으나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나는 방송국 앞에 있던 시민들과 함께 그곳을 빠져나와 광주고속터미널로 갔다. 시위대차량으로 쓰기 위해 그곳에 있던 고속버스를 거리로 때냈다. 광주역 부근에서 화염병을 만들기 위해 휘발유를 가득 싣고 오던 용달차가 불에 타는 것을 봤다. 운전수는 간신히 빠져나왔다.
계엄군을 향해 돌격
계엄군이 진을 치고 있던 광주역을 뚫기 위해 우리는 버스에 탔다. 몇 명이 탔는지는 전혀 알 수 없고 왜 많은 시민이 탑승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광주고속터미널 쪽에서 차를 몰아 KBS방송국 앞에 도착했을 때 공수들이 버스의 유리창을 깨고 최루탄을 무수히 집어넣었다. 숨이 막혀 죽을 지경이었는데 그 자리를 어떻게 빠져 나왔는지 모르겠다. 우리가 탄 차가 뒤쪽으로 간신히 빠져 나와 정신을 차린 후 다시 광주역을 향해 질주하려는데 여러 발의 총소리가 올렸다. 그 시간이 아마 8시 40분에서 9시정도 되었을 것이다. 광주역에서 다발의 총성을 듣고 우리가 탄 버스는 MBC방송국 앞으로 갔다. 우리가 도착하기 전에 MBC는 이미 불타고 있었다. 방송국 건물 바로 옆에 있던 전자제품 대리점에서는 옮겨 붙는 불길 때문에 거리로 가전제품을 꺼내고 있었다. 미처 다 꺼내지 못한 전자제품을 시민들이 도와서 꺼내주었다. 시민의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는 시위대를 보자 눈물이 핑 돌았다. MBC방송국 건물이 불타는 광경을 지켜보다 도청에 주둔하고 있는 공수들을 내쫓기 위해 장동 로터리로 갔다. 그 부근에서 구한 통나무에 불을 붙여 도청을 향해 굴리는 등의 방법을 시도해 봤으나 계엄군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밤새 내내 그곳에서 우왕좌왕하다 새벽녘에 시위에 참여했던 시민 3명과 함께 장동에 있는 건물로 들어가서 소파에 누워 잤다. 날이 밝자 산수동 집으로 갔다.
파출소 무기탈취
전날 밤에 쏘다닌 피로가 겹쳐 집에서 낮잠을 자고 오후에 산수동 오거리로 나갔다. 그곳에서 친구를 만나 트럭을 타고 시내를 돌아다녔다. 시외버스공용터미널 부근에서 차 한 대가 불타고 있었다. 차를 타고 금남로로 접어드는 데 총소리가 들렸다. 광주은행 부근에서 친구와 함께 차에서 내렸다. 그곳에 있던 시민들로부터 공수부대들이 쏜 총에 맞아 사망한 청년의 이야기를 듣고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것 같았다. 트럭에 탄 젊은이가 태극기를 들고 가다 총에 맞아 죽었다는 것이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친구와 나는 그곳에 있던 지프차를 탔다. 이미 차에 있던 사람들까지 모두 여섯 명이 군용지프차를 몰고 광주를 빠져나갔다. 광주에서 효천으로 가다 보면 개방대학 부근의 오른쪽에 파출소가 있다. 무작정 그 파출소로 들어가서 망치로 자물쇠를 부수고 카빈을 꺼냈다. 총이 몇 자루였는지 모르겠고 실탄은 없었다. 시내로 가던 길에 나주에서 총과 실탄을 가지고 들어오는 선배를 만났다. 그 선배가 "공원으로 가라"고 했다. 공원에서 무기를 가지고 집결하기로 약속이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도 차를 몰고 공원으로 가던 중 시민들이 요구하면 총을 나눠주기도 했다. 공원 앞에서 태극기로 둘둘 말아 지프차 위에 올려놓은 시체를 목격했다. 태극기가 빨갛게 피로 젖어 있었다. '아마 조금 전 금남로에서 총에 맞은 시체인가보다'고 나는 생각했다.
무장한 채 화순으로
공원에서 카빈 한 정과 실탄을 지급받고 그곳에 있던 트럭에 탔다. 총으로 차를 두들기고 다니면서 '계엄령 해제하라, 전두환 물러가라, 김대중 석방하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그렇게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다 화순 쪽으로 갔다. 아줌마들이 머리에 이고 온 김밥을 받아서 차에 싣고 너릿재터미널을 지나가는데 광주로 가기 위해 걸어오는 아주머니들을 만나 그들을 태우고 다시 광주로 왔다. 아주머니들을 내려주고 우리는 다시 화순으로 갔다. 화순에서 차를 타고 돌아다니면서 광주의 상황을 알렸다. "지금 광주에서는 공수들이 쏜 총에 선량한 시민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다녔다. 오후 늦게 광주로 와서 총을 메고 집으로 갔다. 22일 후배를 만나 15인승 미니버스를 운전하고 다녔다. 후배를 태우고 다니다 서방주유소에서 기름을 넣고 아가씨 2명도 태웠다. 산수동 오거리를 지나 장원국민학교 부근에서 잠깐 차를 세우고 공포탄을 2발 쏴봤다. 지산유원지에서 딸기밭을 하는 선배를 찾아가서 딸기를 먹었다. 내려오던 길에 총을 후배에게 건네주고 산수동에서 내려 집으로 갔다.
그 후로는 무슨 일을 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거의 집에서 보냈을 것이다.26일 집에 있는데, 문화동 밤실에 사는 선배가 고기를 잡다가 감전사고로 죽었다는 연락이 왔다. 급히 달려가서 리어카에 싣고 운전면허시험장 쪽으로 오다 '기동타격 대'차량을 만났다. 그 차를 타고 전남대병원으로 갔다. 무장한 시민군들이 전남대병원을 지키고 있었다. 병원에 있던 의사가 선배를 진찰해 보더니 이미 사망했으니 집으로 데려가라고 했다. 병원에 있던 리어카에 싣고 선배 집까지 가서 가망이 없음을 알려주고 그 집을 나왔다. 나는 느닷없이 죽은 선배를 생각하자 기분이 울적해 터벅터벅 걸어서 대인시장까지 갔다. 기동타격대원들이 어떤 아줌마를 수갑을 채워 데리고 가는 것을 봤다. 간첩을 잡았다는 것이다. 그들을 따라 도청까지 갔는데 잠시 후 그 아줌마는 간첩이 아니라는 확인을 한 후 풀려났다고 했다. 그날도 특별한 일 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27일 새벽에 "광주 시민은 도청으로 나오라"는 가두방송을 듣고 시내로 나가려다 부모님의 만류에 못 이겨 주 저앉고 말았다. 나는 지금도 5·18 당시의 얘기를 남한테 하기를 꺼린다. 내가 만약 5 · 18 광주민중항쟁 기간 동안에 하루도 빠짐없이 열심히 싸웠다면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중간에 포기하고 집에서 보내고 특히 마지막 날 도청에 가지 못했던 것을 생각하면 너무나 부끄럽다. 그리고 먼저 가신 분들께 죄스러울 뿐이다.
합수부에 붙들려가
5월 28일인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데, 합수단에서 3명이 총을 메고 집으로 왔다. "깡패 김광호 어디 있느냐"는 말을 듣고 나는 담을 넘어 도망쳤다. 그들이 집을 온통 뒤집어놓고 심지어 화장실까지 뒤졌다고 한다. 놈들이 우리 어머니한테 변소에서 탄피를 건졌다고 하면서 김광호 빨리 내놓으라고 온갖 협박을 다 했다고 한다. 부엌을 뒤지던 놈들이 선반 위에 올려놓은 솜이 바람에 흔들리자,"김 광호 나와!"하면서 총을 6, 7발이나 쏘자 어머니는 기절해 버렸다고 했다. 아마 어머니는 난데없는 총소리에 놀라기도 했겠지만 나를 향해 쏜 줄 알았던 모양이다. 장롱 속에 있던 옷까지 샅샅이 뒤져도 내가 나오지 않자 놈들은 돌아갔다고 했다.
나는 집으로 가면 안 될 것 같아 그 길로 선배와 함께 서울로 가기로 했다. 완행열차를 타려다 검문에 걸렸다. 그들은 나에게 총을 겨누고 있었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수배자의 명단에 내 이름과 똑같은 학생이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더럭 겁이 나서 도망치려고 했으나 나를 겨누고 있던 총부리가 마음에 걸려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그들은 내 주민등록증을 보더니 그냥 갔다. 그때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서울에서 며칠을 보내고 집에 연락해 보니 아무 일도 없다며 집으로 오라고 했다. 광주로 내려와서 '동광택시'에 기사로 취직했다.
지옥같은 고문을 견디며
그해 6월에 장마가 시작됐다. 6월 30일 자정이 넘어서 교대를 하고 7월 1일 새벽에 비를 맞고 집으로 왔다. 방에 들어가서 비에 젖은 옷을 벗고 머리를 닦고 있는데 담을 넘는 소리가 났다. "김광호 꼼짝마!" 하는 소리와 동시에 방문을 열어 젖뜨렸다. 이렇다 할 말 한마디 듣지 못하고 산수동파출소로 끌려갔다. "무슨 일로 이러냐, 영장을 내놔라"면서 내가 소리를 지르자 여러 명의 형사들이 달려들어 손을 뒤로 해서 수갑을 2개나 채웠다. 그들은 수갑을 채운 손을 의자에 묶더니 큰 주전자를 가져왔다. 자장을 바른 수건을 내 얼굴에 씌우고 머리를 잡아 뒤로 젖히고 물을 붓기 시작했다. '물고문'이었다. 가슴이 터질 듯이 아파오고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은 고통이 엄습해 오자 고문을 시키는 형사를 냅다발로 차버렸다. 그러자 철사로 발을 묶어버렸다.
"김 대중한테 자금을 얼마나 받았어. 김대중이 대통령 되면 지서장 자리 하나 준다고 하던?"이런 식으로 질문을 했다. 나는 이 순간만 참으면 된다는 각오로 버티었다. 그러자 또다시 물고문을 했다. 나는 팬티에 오줌을 싸면서 까지도 끝내 입을 다물고 버티다 한순간 정신을 잃고 말았다. 정신이 들자 발을 움직여보라고 하더니 묻는 말에 대답하지 않자 또 물고문을 시작했다.가슴이 터질 것 같은 고통 속에 몸부림치다 다시 실신하고 말았다. 두번째 기절하고 깨어났을 때,"총을 어디에 숨겼냐"면서 총기은닉 장소를 대라고 했다. 나는 고통에 못 이겨 허위자백을 하고 말았다. 있지도 않은 총의 행방을 불라고 다그치자 나는 거짓말로 "내 방천장에다 감췄다"고 했다. 내가 한 말을 믿었는지 다음날 산수동파출소에서 형사들이 우리 집에 와 천장을 뜯어봤다고 했다. 그제야 우리 집에서는 내가 파출소에 잡혀간 사실을 알과 동네 유지를 찾아가 돈을 주면서 나를 빼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그러나 엄마한테 돈을 받은 영감님은 그로부터 얼마 후 사망했다.
산수동파출소에서 이틀 밤을 고문에 시달린 후 광주경찰서로 보내졌다. 광주경찰서에서 거의 한 달간을 매일 밤 불려가서 취조 받고 고문당하는 일을 되풀이했다. 광주경찰서에서도 '김대중으로부터 정치자금을 얼마나 받았느냐'는 것과 '총을 어디다 숨겨 두었느냐'는 심문을 받았다.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다. 나는 그때까지 한 번도 김대중 씨를 본 적이 없었다. 텔레비전이나 사진을 통해서만 봤던 사람인데 그 사람을 만나 정치자금을 받았다고 하니 복장이 터질일이었다. 또 5 · 18 기간 동안 이틀에 걸쳐 총을 가지고 다닌 사실은 있었지만 후배한테 넘겨주었는데 행방을 대라고 하니 미칠 노룻이었다.
사실대로 말하면 거짓말한다고 의자에 양손을 묶은 뒤 몽등이로 뼈만 골라서 때렸다. 그 고통을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또 허벅지에 몽등이를 끼우고 돌려버리거나 발로 밝아버리면 뼈가 끊어질 것 같은 아픔이 느껴졌다. 한마디로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개 패듯이 팼다. 매일 밤에만 계속된 심문 때마다 욕하고 뺨맞고 구들발로 채이는 것은 예사였다. 한 달 동안을 구타와 고문에 시달리다 '총기은닉 범'으로 몰린 세 사람과 함께 상무대로 옮겨졌다.
상무대에서 B급 판정을 받고
상무대에서도 똑같은 조사를 받았다. "너 여기가 어떤 곳인지 알어!"하고 엄포를 주더니 광주경찰서에서와 같은 질문을 했다. 사실대로 얘 기 하자 그들도 몽등이로 사정없이 때렸다. 상무대에서 두 차례에 걸쳐 지하실로 끌려가 취조를 받은 후 '폭력배'라는 이유로 B급 판정을 받았다. 상무대 헌병대 영창에서는 우리들한테 '역적'이라고 했다. "역적들은 4:발을 신을 필요도 없다"면서 맨발로 생활하게 하고 러닝셔츠만 입게 했다. 또 고개를 들어 퍼다보지도 못하게 했다. 특수교육이라며 '원산폭격', '한강철교'등의 단체기합을 주고 한 방에 80명씩 넣었다. 넓지도 않은 곳에 그 많은 수가 있으려니 서로 어깨가 부딪쳐 앉기도 힘들었다.그곳에서 생활하는 동안 파장 견디기 힘들었던 점은 배고픈 고통이었다. 밥 한 덩어리를 국에다 말아주는데 만찬도 없고 그나마 돌이 굉장히 많았다. 라면은 우동발처럼 굵어지도록 놔뒀다가 한 국자도 못 되게 줬다. 장정들이 그것만 먹고 어떻게 버티겠는가! 숟가락 놓기도 전에 배가 고팠다.
누가 역적이란 말인가
상무대 영창에서의 생활을 말하려면 며칠이 걸려도 못할 것이다. 변소를 갈 때도 보고를 해야 하고 평소 잡담은 커녕 움직이기만 해도 집단기합에 구타였다. 또 나중에는 말썽 을 피운 사람은 골라서 '7소대'에다 집어넣었다.상무대에서 재판을 받을 때에도 우리는 '역적'이라고 고개도 못 들게 했다. 맨발에 군복바지를 입고 위에는 러닝셔츠만 입은 채 갔다.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더니 끝났다고 했다. 죄없는 시민을 총으로 쏴 죽이고 칼로 찔러 죽이는 것을 보고 분개한 시민들이 무슨 죄가 있는지 모르겠다. 김대중 씨 얼굴도 한 번 제대로 보자 못한 사람을 잡아다놓고 정치자금을 받은 사실을 대라고 족치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이란 말인가! 석방되기 3일 전 상무대내에 있는 교회로 데려다놓고 여러 가지 교육을 시켰다. "상무대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전혀 발설하지 않겠으며 혹 발설했을 시는 어떠한 벌도 받겠다"는 각서를 했다. 또 5월 27일 도청 진압작전 당시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는 거짓말을 했다. 도청에 다이너마이트까지 있는 상황에서 그렇게 진압을 끝낼 수 있었던 것은 사상자를 내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기 때문이라는 등의 교육을 받았다. 나중에 들어보니 석방자의 가족들도 상무대에서 동장 입회하에 몇 시간에 걸쳐 교육을 받았다고 했다.
정신이상 증세가 나타나
9월 5일 지긋지긋하던 상무대 감방에선 석방되었다. 석방된 후로도 건강이 나라져서 한동안 무척 고생했다. 날마다 불면증에 시달리다 아침이 되어야 잠이 들고, 뼈마디마디가 쑤시고 아팠다. 특히 항상 머리가 아프고 열이나고 조금만 신경을 쓰면 머리가 빠개질 듯이 아팠다. 이렇게 망가져버린 몸을 보호하기 위해 몇 년 동안 일을 않고 한약도 먹고 인삼도 먹었지만 지금까지도 날씨가 조금만 흐려도 온몸이 무너져내리는 것 같은 통증에 시달린다. 무엇보다도 고민되는 것이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는 것이다. 석방된 직후에는 모르겠더니 시간이 흐를수록 정신분열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기억력도 없어지고 가끔 헛소리도 한다.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지금은 술을 한두 잔만 마석도 나도 모르는 사이 이상한 행동을 하고 헛소리를 지껄인다. 가끔 평상시에도 이상한 행동을 한다. 나도 모르는 사이 산에 올라가 있기도 하고 전혀 뜻밖의 장소에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흠칫 놀란 적이 여러 번 있다. 나중에 정신차려서 생각해 보면 외 산에 왔는지 언제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런 신체적인 조건 때문에 고민이 참 많다.
5 · 18 당시 우리형이 공수부대원이었다. 물론 광주시내 시위진압에는 투입되지 않았지만 그 당시의 내 심정으로는 형이 내 눈앞에 있으면 죽여버렸을 것이다. 그때 광주에서 형수님과 같이 살았는데 공수들이 나를 이렇게 병신으로 만들었다는 증오심 때문에 괜스레 형수님과 말다툼도 자주 했었다. 그 일로 형수님이 서울로 이사가 버릴 정도로 공수에 대한 증오심이 뼈에 사무쳤었다. 지금 생각하면 굉장히 미안하지만 그때 당시는 어쩔 수 없었다.
그 후의 생활
1986년 10월에 건강이 안 좋다는 것을 숨기고 결혼하여 아들 하나를 낳고 살고 있다. 영업용 택시 운전을 해도 몸이 아파 쉬는 날이 많으니 업적급도 못 올리는 경우가 많아 쉽게 들어갈 수도 없다. 그래서 지금은 앉아서 하니까 비교적 편한 자개 붙이는 일을 한다. 동서가 직접하기 때문에 편의를 봐주지만 그래도 성실히 하려고 노력하다 보니 육체적으로 여간 힘이 드는 게 아니다.1987년에는 영업용 택시 기사로 일하면서 파업을 했는데 내가 조직부장을 맡았었다. 사원들의 권익을 보호하자는 결의를 하고 '근로시간 준수하라, 그동안의 착취자금 내놔라'등의 요구조건은 내걸었다. 그때 내가 사장한테 욕하고 대들었다고 명예훼손죄로 고발당해 이틀간 검찰청에 있다 나오기도 했다. 결국 우리들의 요구조건을 수락되었으나 회사측의 회유, 분리책동에 넘어간 사,원들이 부분적으로 일을 하자 나는 그만두고 나와버렸다.
5 · 18낱 의로운 항쟁
나는 5 · 18을 학생과 시민들이 힘을 합쳐 민주화를 위해 싸운 의로운 항쟁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일로 해서 나도 부상을 입게 되었지만 보상금은 원치 않는다. 아직은 젊기 때문에 무슨 일을 해서든지 내가 벌어서 떳떳하게 살 수 있다. 5· 18 항쟁기간에 끝까지 동참하지 못해 부끄러운 마음 금할 수 없지만 광주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5·18 광주민중항쟁이 민주화를 위한 투쟁이었음을 생각할때 무척 자랑스럽다. (조사·정리 양난희) [5.18연구소]
첫댓글 행복한 시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