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덕오거리. 20여 년 전부터 최대포로 대표되는 돼지고기 요리집들의 발상지로 유명해지기 시작하여 지금은 공덕역 5번 출구 쪽 신공덕시장 안에 몰려있는 부침개집들로 더 유명해진 곳이다. 조선시대 때, 부유한 상인들은 스스로는 고기 먹기를 자제한 반면, 그들 밑에서 무거운 물건을 옮기는 등 몸으로 힘쓰는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고기를 충분히 먹게 하였다고 한다. 팔도의 물산이 모여들던 나루터에서 가까웠던 공덕오거리에 고기요리를 중심으로 하는 음식문화의 흔적이 남아있는 것은 그곳이 몸으로 힘을 쓰는 부두노동자들의 생활터전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곳은 도성 내의 번잡함을 벗어나 한가한 시간을 즐길 수 있으면서도 도성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이는 노년의 대원군이 그곳에 별장을 짓고 살았다는 데에서도 알 수 있다.
이런 역사를 배경으로 하면서, 생긴 지 얼마 되지 않는 고층 건물 뒤로 10미터만 더 들어가도 곧바로 5, 60년 전의 풍경을 만날 수 있는 곳. 그래서 아직 재개발의 ‘혜택’을 누리지 못한 시민들의 상대적 박탈감이 더욱 심하기도 하고, 재개발의 거침없는 속도전을 우려하는 시민들의 상실감과 공포감 또한 심한 곳. 세월의 무상함 속에 간신히 남은 무엇과 뭉개져버린 것들의 빈 터가 이질적인 무엇으로 급히 채워지고 있는 곳. 공덕동과 염리동이 이런 곳이다.
[덧없음]
공덕역 3번 출구를 나서서 뒤를 돌아보면 롯데 캐슬 누런 건물이 우뚝 솟아있다. 그 건물과 도로 사이의 작은 공원에 공덕리(孔德里) 금표(禁標)가 서 있다. 공덕리 금표는 흥선대원군이 거처하는 아소정(俄笑亭)의 위치를 알리는 푯돌로 1870년 8월 공덕동 394-3에 세워졌다고 한다. “限一白二十步 孔德里禁標 同治庚午八月 日 ” 즉 “여기서부터 120보 이상 갈 수 없음. 공덕리 금표. 동치경오8월 일.” 내려쓰기 세 줄 중 가운데 줄인 孔德里禁標는 조금 굵은 글씨로 새겨져 있다. 동치는 청나라의 연호, 경오년은 1870년이다.
공덕리 금표
공덕리 금표는 길가 고층 주상복합 아파트 어린이 공원에 있다.
아소정은 흥선대원군이 말년을 보내다가 세상을 떠난 집이라고 한다. 지금의 염리동 150번지 일대 서울디자인고등학교와 동도중학교가 들어서 있는 곳에 아소정이 있었다고 한다. 아소정은 아흔 아홉 칸의 대저택이었는데 한국전쟁 후 동도중·공업고등학교 증축공사로 헐려 일부는 연세대학교 부근 봉원사로 이전되었으며, 지금은 아소정에 딸린 우물의 디딤돌만이 학교 운동장 한 구석에 남아 있다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이 건물의 일부가 종로구 부암동 16-1호에 있는 대원군의 별장 건물인 석파정(石坡亭)의 일부가 되었다가 1958년 지금 서울특별시 종로구 홍지동에 있는 석파랑이라는 건물의 일부가 되었다고도 한다. 아마도 이는 아소정과 석파정이 모두 흥선대원군의 정자였기에 만들어진 부정확한 정보인 듯하다.
한강을 향해 지어진 서울디자인고등학교 건물
동도중학교 건물 앞모습 반세기 역사를 지켜온 돌건물
철봉 뒤의 철구조물이 럭비69연승 기녑탑이다.
공덕역 2번 출구 앞으로 난 길을 따라 조금 걸으면 서울디자인고등학교 건물이 나온다. 조선말 흥선대원군이 머물다가 세상을 떠난 별장 터라고 쓰여 있는 아소정터 표석이 교문 안쪽에 있었다. 남아있다던 우물의 디딤돌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럭비 69연승 기념탑을 중심으로 하는 운동경기 관람석이 눈에 들어왔다. 1983년부터 1986년까지 동도공업고등학교 럭비부는 69연승을 하였단다. 아소정 우물의 디딤돌은 찾지 못하였으나 관람석의 재료로 쓰인 돌 가운데 아소정의 석재도 한 점 쯤 있으려니 하는 생각이 들었고, 럭비 69연승의 기록을 가지고 있는 동도공업고등학교의 이름이 서울디자인고등학교로 바뀐 데에서 세월의 덧없음을 더 깊게 느낄 수 있었다.
아소정터 럭비69연습 기념탑
아소정의 아소(俄笑)가 뜻하는 바는 ‘제 풀에 웃는다.’ 이다. 이는 권력을 잃은 말년의 대원군이 권력의 무상함과 그에 연연하였던 자신의 과거사를 향하여 스스로 웃음을 보내며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이름 탓인지 아소정이 산산조각이 나서 이리저리 흩어져버린 것도 쓸쓸한 일이지만 동도공업고등학교라는 이름이 사라진 것 또한 쓸쓸하고 낯설었다. 뭔가 직접 만들어내는 공업보다 디자인이 중요해진 이 세상이 몇 날이나 지속되려는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은 남아있는 풍경]
아소정 터를 나서서 동네 구경을 하다가 길을 잘못 들어 아소정 뒷산이라 할만한 산의 꼭대기에 올라가게 되었다. 각양각색의 살림집들 사이로 난 경사가 심한 길을 따라 오르니 산 꼭대기에 한세사이버보안고등학교와 한서초등학교가 있었다. 두 학교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산꼭대기에 올라보니 아소정 쪽은 아파트들에 가려 전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남산 방향을 바라보니 그 아래로 애오개와 공덕오거리 사이의 골짜기가 보였다. 골짜기의 양쪽이 모두 붉은 흙을 드러내고 있었다. 몇 년 지나지 않아 이 붉은 산비탈들은 아파트 숲이 되어있을 것이다.
한세사이버보안고등학교
한서초등학교와 한세고등학교의 사잇길 아소정 뒷산 동쪽 기슭의 재개발 현장
골목 구경을 하며 산에서 내려와 다시 동도중학교 앞에 이르러 길을 건너 늘봄2길로 접어들었다. 10여 년 전에 이 지역을 찍은 사진을 들고 비교하여보니 그때 무슨 원조집이었던 곳이 가람 생태찌개집으로 바뀌어 있었는데, 음식냄새 빼는 함석통 등 집의 구조는 전혀 변함이 없었다. 그 집을 오른쪽에 두고 앞을 바라보니 10여 년 전에는 경의선이 둑 위를 지나고 둑에 굴이 뚫어져있던 곳이 쉽게 알아볼 수 없게 변하여 있었다. 혹시 기찻길 아래 굴의 위치를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인가 하여, 길 두 개를 건너면서 한참을 걸어가다가 배가 고파서 들어갔던 해장국집 주인장은 그 둑이 없어지고 경의선은 지중화(地中化)되었다고 알려주었다. 염리초등학교와 마포자이 아파트 사이로 난 길을 따라 늘봄 2길 쪽으로 되짚어 걸어서 돌아오다 한미교육위원단 건물을 오른쪽에 두면서 늘봄 2길로 접어들어 조금 걸으니 공사장에 ‘경의선 용산 문산 간 복선전철 1-2A 공구’라고 쓰인 설명 판이 붙어있었다. 경의선이 지중화되면서 예전의 둑이 깎여나간 것이다. 아마도 언젠가 한강의 범람에 대비하여 둑을 만들었는데 그 둑 위로 경의선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20세기 늘봄 2길의 골목
21세기 늘봄 2길의 골목
공사장 사이로 난 통로를 지나 생태찌개집 앞에서 돌아서서 옛 사진을 들고 지금의 풍경과 비교해보니 둑이 사라진 것이 분명하였다. 철둑길 즉 둑 위의 철길이 사라진 것이다. 철둑길을 따라 늘어선 집들 가운데에는 거의 똑같은 모습의 개량한옥들이 있었다. 이 집들은, 20세기 중반에 당시의 시대적 요구에 따라, 한강변 둑 위를 지나는 기찻길 옆에 나란히 지어졌던, 아마도 주상복합이었을, 한국의 최신 건축물들이었을 것이다.
20세기 둑 위를 지나는 경의선 뒤로 한미교육위원단 건물이 살짝 보인다.
21세기 둑을 깎아내고 경의선을 지중화하고나자 한미교육위원단 건물이 다 보인다.
늘봄 1길 개량한옥들 개량한옥들 모양이 비슷하다.
[금지된 훈련]
큰 길로 나서서 공덕역 1번 출구 앞에서 2번 출구 앞쪽으로 길을 건너며 우측을 보면 남영역과 용산역 사이로 뻗어있는 도로가 보인다. 이 도로는 만리재와 무관하다. 2번 출구에서 조금 걸어서 건널목을 찾아 5번 출구 쪽으로 건너가면 만리재길이 보인다. 공덕오거리의 다른 네 길에 비하면 번듯하지도 못하고 경사져서 불편한 길이지만, 예전에는 소의문을 통하여 한양 성내와 마포 한강변의 중요 상업지역을 연결하는 중요한 길이었다.
고갯마루에서 석전을 하는 사람들 20세기 초 영국인이 그린 석전 모습 (기산 김준근 작품으로 추정) (출처 : 조선일보)
돌을 싸서 던지는 가죽 제구인 망패 석전에서 망패를 사용하는 소년 (출처 : 조완묵, 우리민족의 민속놀이) (프랑스인 큐빌리에 사진)
오래전 이 길이 넘어가는 만리재에서는 돌 던지기 싸움[석전(石戰)]이 행하여졌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음력 정월 대보름에 흥인지문, 돈화문, 숭례문 등 삼문 밖과 애오개[아현(阿峴)]사람들이 만리재에 모여 석전을 했다고 한다. 삼문 밖 쪽이 이기면 한양 인근[기내(畿內)]에 풍년이 들고 애오개 쪽이 이기면 여타 지방에 풍년이 든다는 말이 있었기에 이 싸움은 전국적 관심사였으며 한양 사람들에게는 큰 구경거리였다고 한다. 석전은 고구려시대 때부터 무(武)를 숭상하는 기풍을 진작하는 놀이 겸 전쟁 연습으로 중시되었다고 한다. 『매천야록』에 의하면 1908년에 서울에서 석전이 금지되었다. 일본이라는 외세가 작은 훈련 하나를 금지함에 따라 하나의 정신이 단절된 셈이다. 더 이상 석전이 벌어지지 않는 해질 녘, 공덕동 쪽 만리재길 입구는 술꾼들을 부르는 부침개집의 네온사인으로 휘황했고, 고갯마루는 양편의 고지대에서 쏟아져 나오는 차량과 사람들로 붐볐다.
글/사진 이유진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