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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의 8,000m급 봉우리 초등을 국위선양으로 간주하던 1957년까지 세계 열강 가운데 8,000m급 봉우리를 초등하지 못한 국가는 미국뿐이었다. 1938년 찰스 허드슨 대가 케이투봉(K2·8,611m) 아브루치 능선상의 최대 난코스인 하우스 침니(6,400m)와 블랙 피라미드(7,400m)를 돌파해 7,925m 지점까지 진출했고, 1939년 비스너 대가 아브루치능선 상부의 최난코스 폭 3m, 경사도 45도의 얼음 걸리인 보틀네크의 좌측 암릉을 돌파하며 8,370m 지점까지 진출했다. 또한 1953년 찰스 허드슨 대가 숄더 7,800m 지점까지 진출했지만, 미국 대는 행운이 외면하여 다 잡은 토끼를 놓치듯 1954년 이탈리아 대에게 K2 초등을 넘겨주었다.
가셔브룸6봉의 남벽 아래 5,182m 지점에 베이스캠프 구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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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셔브룸1봉(히든 피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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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미국 대는 마칼루(8,463m) 남동릉 7,163m 지점의 암벽지대까지 진출했지만, 다음해 1955년 프랑스 대가 북서릉의 설릉으로 마칼루 초등을 차지했다. 1956년 오스트리아 소규모 등반대의 가셔브룸2봉(8,035m) 등정, 1957년 오스트리아 대의 브로드피크(8,047m) 초등 이후 카라코룸의 4개 8,000m급 봉우리 중에서 가셔브룸1봉(8,068m·히든 피크)만 미답봉으로 남았다.
미국 스탠퍼드 법과대학을 졸업한 니콜러스 클린치(Nicholas Clinch)는 가셔브룸1봉의 1958년 등반허가를 어렵사리 얻었다. 1892년 영국 탐험가 마틴 콘웨이가 카라코룸 원정대를 이끌면서 발토로빙하에서 가셔브룸1봉을 찾았으나 여러 봉우리들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되자, ‘숨어 있는 산’이란 뜻으로 ‘히든 피크’라고 명명했다.
하버드 산악부 출신인 앤디 가우프만이 등반대에 참가했다. 봅 스위프트, 톰 매코맥, 팀 닥터 톰 네비슨도 등반대원이 되었다. 피트 쇼닝(31·엔지니어) 대원도 클린치 대장의 집요한 초빙에 마지못해 응했다. 쇼닝은 1953년 K2의 남벽 7,600m 지대의 절벽에서 혈전증에 걸린 환자 아트 길키 대원을 확보하고 있던 중에, 두 자일 파티가 빙벽을 미끄러지며 아트 길키와 연결된 자일과 엉켜 추락하는 것을 아이스 액스 빌레이(belay)로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여 5명의 생명을 구한 산악영웅이었다. 파키스탄의 아크람 중위와 리즈비 대위도 이 등반대에 참가했다. 한편 클린치 대장은 스위스로 건너가 수소문 끝에 스위스 육군의 직업군인으로 근무하던 1934년 가셔브룸1봉 등반대원 로흐(Roch)를 만나 그 산의 자세한 정보를 입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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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클린치 등반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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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는 파키스탄의 스카르두에서 알렉산더 거룻배에 짐을 실어 인더스강 건너로 옮기고, 긴 행렬을 이룬 포터 일행과 캐러밴을 시작해 덩굴 다리를 건너고, 무릎까지 빠지는 브랄두강을 건너 아스콜(Askole)에 도착했다. 7명의 대원과 6명의 지원조 그리고 150명의 포터들이 캐러밴을 계속해 높이 150여m의 가파른 자갈 걸리(gully)를 올라 발토로빙하에 들어섰다.
그들은 모래밭 릴리고(Liligo)에 도착해 포터들에게 신발을 지급했으나, 포터들은 신발을 아끼려고 그들의 관습대로 바윗길을 맨발로 걸어서 발가락이 찢겨 피를 흘리는 자들도 있었다. 그들은 파이유 피크와 거대한 암탑들, 롭상 타워들, 무즈타그 타워를 지났다. 캐러밴은 모레인 지대로 10여km 계속되었고, 발토로빙하 90여m 위쪽에 위치한 유명한 캠프지, 즉 초록색 풀밭 우르두카스(Urdukas)에 도착했다.
다음날 그들이 캐러밴을 계속할 때 빙하 건너편에 마셔브룸이 나타났다. 돛단배를 빼닮은 ‘발토로 얼음 배들’이라고 불리는 높이 30여m의 빙탑 3개의 아름다운 모습도 눈에 띄었다. 그들은 눈밭이 나타나자 포터들에게 설맹에 걸리지 않도록 고글(goggle·보안경)을 분배하고, 눈길로 캐러밴을 계속해 콩코르디아에 도착했다. 구름 속에 가려서 정상의 일부만 바라보이는 K2 쪽으로 고드윈 오스틴빙하가 뻗어 있었다. 그들은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상부 발토로빙하에 도달해 야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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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캠프(6,858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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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베이스캠프까지 짐을 운반할 아스콜 출신의 포터 20명만 남기고, 나머지 포터들은 귀가시켰다. 그 이튿날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화이트아웃 속에서 피트 쇼닝, 앤디 카우프만, 지원조 칸이 선발대가 되어 베이스캠프 지를 찾아 아브루치빙하 쪽으로 떠났고, 나머지 대원들과 포터들은 그들의 뒤를 따라 짐을 운반했다.
그들은 가셔브룸6봉의 남벽 아래, 즉 아브루치빙하의 모레인 지대 5,182m 지점에 베이스캠프를 구축했다. 빙하 건너편 발토로 캉리의 가파른 빙벽 위로 굉음과 함께 눈사태가 규칙적으로 쏟아져 내렸다. 남부 가셔브룸빙하와 아브루치빙하 사이에 미국의 그랜드 캐년같이 생긴 거대한 피라미드인 히든 피크가 3,000여m 높이로 우뚝 솟아 있었다. 이 산이 바로 그들의 등반목표인 가셔브룸1봉이었다.
피트 쇼닝, 앤디 카우프만, 봅 스위프트는 가셔브룸1봉의 북서벽과 남부 가셔브룸빙하를 정찰했다. 그들은 숨은 크레바스들이 벌집 모양으로 밀집되어 있는 남부 가셔브룸빙하 상에 위치한 빙폭의 5,639m 지점까지 올라가 높이 15m의 빙탑 꼭대기에 텐트를 설치하고 야영했다. 북쪽으로 가셔브룸4봉이 보였다. 마틴 콘웨이가 8,000m에서 20m가 모자라는 이 산의 서벽을 ‘빛나는 벽’이라고 명명하여 유명해진 산으로, 그 해 가셔브룸1봉 등반허가를 신청했다가 밀려난 이탈리아 대의 등반 목표였다.
다음날 정찰대는 2시간 동안 빙폭을 돌파하고, 숨은 크레바스에 빠지면서 전진해 히든 피크의 북서릉을 정찰했다. 북서릉의 하단 설사면은 등반이 어렵지 않았다. 정상까지의 경사도는 그다지 높지 않았으나 상부 760여m는 암릉이라는 사실이 커다란 부담감을 주었다.
베이스캠프 남서쪽으로 초골리사의 백색 피라미드가 하늘 높이 솟아 있었다. 1892년 영국의 탐험가 마틴 콘웨이는 초골리사 동벽을 보고, 신부의 드레스를 연상시킨다 하여 이 산을 ‘신부 봉’이라 명명했다. 신부 봉은 오후의 그늘 속에서 측면의 세로 얼음주름들이 진홍색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1년 전 낭가파르바트의 초등자 헤르만 불이 브로드피크를 초등하고 나서 쿠르트 디엠베르거 대원과 함께 초골리사 동벽을 등반 중에 정상 부근에서 푹풍설을 만났다. 두 사람은 화이트아웃 속에서 하산 중에 헤르만 불이 눈처마를 밟고 실종되는 비극이 발생했다. 미국 대원들은 그 비극을 생각하고 마음이 숙연해졌다.
클린치 대장, 암릉보다 설릉이 유리하다는 판단에 ‘로흐 아레트’ 택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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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셔브룸1봉의 북서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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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는 가셔브룸1봉의 루트 선택에 난항을 겪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 고산에서 자신의 생명을 우연에 맡길 수는 없었다. 선택은 생사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산악인은 충분히 계산된 모험을 선택해야 한다. 산악인은 오산을 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등반과정의 예측된 난관과 위험에 관한 오판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산악인의 등반 경험이 풍부할수록 등반과정의 난관과 위험에 관한 그의 평가가 정확할 수 있다. 그는 모든 요소를 주의 깊게 고려한 다음, 내포된 위험과 등반성공의 가능성을 저울질해야 한다. 다음으로 그는 자신의 등반 목표가 겪게 될 위험을 정당화시킬 수 있는지 가늠해야 한다. 이것은 극히 개인적인 결정으로서, 모든 고산 산악인은 자신의 등반관과 인생관에 입각하여 결정을 내려야 한다.
등반 목표가 높을수록, 산악인이 그것을 성취하기 위하여 감당해야 할 모험의 강도가 그만큼 높아진다. 고산 등반 자체가 위험 속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100% 안전이란 존재할 수 없고,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야 할 뿐이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도전을 받아들이기를 두려워해서도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부주의하게 판단해서도 안 된다. 등산가의 무능력은 모험이 아니라 하나의 죄악이다.
등정 가능성이 있는 5개의 등로 중에서 클린치 대장은 로흐 아레트(arete·빙하의 침식으로 형성된 날카로운 암릉이나 설릉)를 선호했고, 봅 스위프트, 쇼닝 등 다른 대원들은 북서릉 루트를 선호했다. 대원들은 정상까지의 거리가 짧은 북서릉을 선호했지만, 북서릉으로 가자면 먼저 남부 가셔브룸빙하를 통과해야 하는데, 그 빙하가 숨은 크레바스 투성이여서 대원들이 고소 포터를 일일이 에스코트해야 할 판이었고 암릉 구간도 미지수였다.
로흐 능선, 즉 남서릉 버트레스의 상단은 6,858m 지점으로, 이곳에서 평균 고도 7,010m 이상의 남동 만년설 플라토와 만난다. 이 플라토로 8km를 더 오르면 정상 피라미드의 밑이 된다. 그들은 1934년 앙드레 로흐가 크램폰도 착용하지 않고 3시간 만에 남서 버트레스의 6,300m 지점까지 진출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로흐 능선 쪽에는 눈처마(커니스)들이 너무 많아서 등반이 중단될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그들은 북서릉 상부의 길이 762m의 암릉을 돌파하느냐, 아니면 로흐 아레트로 등반을 시작하여 정상까지 8km의 플라토를 돌파하느냐 하는 기로에 서 있었다. 클린치 대장은 히말라야의 8,000m급 봉우리 등정에서는 암릉보다 설릉이 유리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그는 에베레스트도 북동릉의 암벽지대, 즉 슬랩(slap) 지대에서 실패한 후 남동릉의 설릉으로 초등되었고, 또한 K2의 아브루치능선을 제외하고 그때까지 초등된 모든 8,000m 봉우리들이 설릉을 이용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고도가 낮은 암벽에서는 피톤과 볼트만 설치하면 돌파가 가능하지만, 7,925m 지점에 위치한 암벽에서는 1m 거리의 난관도 등반을 좌절시킬 수 있다. 1954년 미국 대의 마칼루 등정 실패가 바로 그러한 예의 하나였다. 그러나 히든 피크의 설릉 루트, 즉 남동 만년설 플라토는 낭가파르바트의 악명 높은 ‘질버 자텔(1934년 비극의 현장)’을 빼닮았고, 그곳의 수많은 크레바스들이 그들의 등반을 저지시킬 가능성도 컸다. 그리하여 클린치 대장만 제외하고, 나머지 대원들은 모두 북서릉을 선호했던 것이다.
그들은 루트 결정의 최종 결론을 내리기 전에 먼저 피트 쇼닝, 앤디 카우프만, 클린치 대장은 로흐 아레트를 정찰하기로 했다. 나머지 대원들과 고소 포터들은 북서릉 등반의 기점인 남부 가셔브룸빙하 상의 제1캠프까지 짐을 운반했다. 클린치 대장은 대원들과 고소 포터들이 남부 가셔브룸빙하를 등반 중에 숨은 크레바스에 혼쭐나서 로흐 아레트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지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