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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암聾巖 이현보(1467-1555)선생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시조작가로 본관은 영천이다. '농암가' '어부가'같은 국문시가를 창작하거나 개작하여 영남가단을 이끌었다. 연산군 때 과거에 급제해 44년간 아홉 고을의 수령과 경상도 관찰사를 지냈다. '어부가'와 '어부단가'는 훗날 윤선도의 '어부사시사', 이중경의 '오대어부가'에 영향을 주었다. 이후 이황의 '도산십이곡', 권호문의 '독락팔곡', 이숙량의 '분천강호가'로 계승된 영남가단은 송순, 정철, 윤선도의 호남가단과 더불어 조선후기 한국문단의 양대 산맥을 형성한다. '종손', 이번 호에서는 농암 이현보선생의 17대 종손인 이성원씨를 찾았다. |
낙동강의 상류는 거칠다. 거친 모습의 흐름이 청량산 입구에 와서야 비로소 강의 형상을 갖춘다. 담潭이 있고, 지池가 있고, 소沼가 있고, 협峽이 있고, 대臺가 있다. 낙동강 7백리에서 가장 강江답고 아름다운 곳이 바로 청량산에서 가송을 거쳐 단천, 원천, 낙천, 분천, 월천, 오천에 이르는 도산구곡이다. 낙동강의 이 구간은 농암 이현보선생의 '어부가'와 '농암가'로 세상에 알려졌고, 후일 퇴계선생에 의해 도산십이곡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농암종택은 바로 이 도산구곡중의 제8곡인 가송곡에 있다. 가송곡은, 청량산의 마지막 자락이 낙동강에 의해 끊어지는 지점에 있다. 강을 건너면 가송에서 시작되는 건지산이 태극모양의 낙동강을 감싸며 도산방향으로 이어져 있다. ㄷ 자 형태의 종택과 사당, 그리고 긍구당이 있는 농암종택은 조경을 마무리하지 못한 탓에 아직은 허전하다. 그러나 기운찬 건지산을 뒤로 두고 앞으로는 낙동강과 청량산의 끝자락을 바라보며 들어선 종택은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형국이다. 종택 앞에 너른 들만 있다면 부내(분천)의 옛 종택과 견주어도 빠지지 않는다. |
영남가단의 남상濫觴인 농암종택은 원래 도산면 분천리에 있었다. 뒤로는 산이 있고 앞으로는 낙동강과 문전옥답 70만평이 펼쳐진 아름다운 고장이었지만, 안동댐 건설과 함께 농암종택은 안동시내로, 농암사당과 분강서원 및 긍구당은 도산면 운곡리로, 애일당과 농암각자는 분천리 뒷산으로, 신도비는 예안면 신남리 농암묘소 앞으로 옮겨졌다. 고향을 물속에 담고 종택과 유적마저 흩어지자 지손支孫들도 삶의 터전을 찾아 각지로 흩어졌다. 현 종손의 선친인 한학자 이용구선생은, 댐 건설이라는 국사國事때문이기는 했지만 고향과 종택을 물속에 담았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하고 세상을 버릴 때(98년)까지 늘 종택의 복원을 염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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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암종택의 현 주인은 17대 종손 이성원씨(51세). 부친이 타계하기 4년 전인 94년에 올미재(도산면 가송리)에 종택 터를 잡았다. 농암이 마흔 넷에 부내에 집터를 잡았듯이, 500년 후손인 그의 17대 주손도 비슷한 나이에 비슷한 집터를 잡은 것이다. 그리고 그는 지난해 8월까지 만 오천평의 집터를 마련한 뒤, 23년간 봉직하던 교직을 그만두고 강호江湖로 돌아왔다. 종손의 귀거래歸去來는 농암과 닮아 있다.
농암은 44세(1510년)때 고향 분천에 ‘명농당明農堂’이라는 집을 짓고 벽 위에 ‘귀거래도歸去來圖’를 그렸다. 그리고 5년 뒤에 잠시 휴가를 얻어 명농당에 들려 시詩를 써 붙이고 다시 한번 귀거래의 의지를 다졌다.
“1510년 가을, 외직을 자청하여 영천군수로 나왔는데, 그 때 고향 ‘부내汾川’와는 공사간에 달마다 왕래가 있었다. 그러던 중 드디어 조그만 빈터를 얻고 연못(影襟塘)을 파서 그 위에 정자를 지어 도연명의 ‘귀거래도’를 그렸으니 생각한 바가 있기 때문이었다. 1515년 겨울, 밀양부사로 임명되어 다시 고향을 찾으니 '귀거래도’는 여전한데, 5두의 봉급으로 허리를 꺾음이 어찌 부끄러움이 없으랴만... 중략”- 농암집, 제명농당題明農堂’
종손이 만 오천평에 이르는 터를 잡기까지는 곡절도 많았다. 30대 중반부터 고향 부내와 닮은 배산임수의 땅을 찾아 도산 일대 낙동강변을 헤매던 종손은, 94년의 어느 가을 날, 올미재(도산면 가송리)에서 고향처럼 푸근한 땅을 찾아냈다. 3천여평의 땅으로 터전을 만들고 이후 조금씩 주변의 땅을 사들인 종손은 98년 부친이 타계한 뒤, 장례를 마친 자리에서 지손支孫들에게 고향과 종택의 복원계획을 밝히고, 모금에 들어갔다. 침묵과 한숨으로 20년의 세월을 보냈던 지손들은 새 종손의 계획에 큰 박수로 화답했다. 모금은 시작됐지만 생각지도 않았던 장애가 곳곳에서 발생했고, 부지 매입비용도 당초예상을 훨씬 웃돌았다.
우여곡절끝에 마련된 집터에는 올해 초 종택과 사당 및 긍구당이 먼저 자리를 잡았다. 종손은 2005년까지 애일당과 분강서원, 농암각자 등도 이곳으로 이건移建해 과거의 종택을 완전하게 복원할 생각이다.
새로운 종택부지는 운명처럼 그렇게 종손에게 다가왔고, 종손은 보종과 종가중흥의 책무를 자임했다. 전국 각지로 흩어져 고향과 종가를 잊거나 모르고 살았던 후손들은 이제 종택복원과 크게는 농암유적지 복원이라는 대의아래 빠른 속도로 다시 모여들고 있다.
종손의 외가는 안동시 송천동 백죽당종가(고려말 문신 배상지선생의 종가)다. 45살의 종부 이원정씨는 경주 양동이 고향으로 회재 이언적선생의 후손이다. 차종손이 올해 대학에 입학하면서 학비걱정도 해야 할 터이지만, 종부 역시 종손의 퇴임을 말리지 않았다. 종손은 왜 직장을 버리면서까지 종손의 길을 선택했으며, 종부는 또 무엇때문에 종손의 무모(?)한 계획을 수긍했을까? |
과거 안동문화 1번지는 도산 일대였다. 농암과 퇴계, 신재(주세붕)선생이 노래한 도산 일대의 풍광은 전국의 명유名儒들에게 널리 알려졌고, 이들은 안동을 방문할 때마다 도산 일대를 유상유산遊賞遊山하곤 했다. 이런 까닭에 도산 일대를 노래한 시가詩歌가 이어지면서 훗날 호남가단과 양립하는 영남가단의 모체가 됐다. 지금은 하회마을과 봉정사가 각광을 받고 있지만,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전국의 대학생들은 어부가와 도산십이곡 목판을 탁본하기 위해 수시로 도산 일대를 방문했다.
이런 고향, 이런 문화의 1번지, 나아가 영남가단의 남상濫觴을 복원해야 한다는 종손의 생각은 나이가 들수록 더욱 짙어진다. 교직을 버리고 보종保宗의 길을 선택한 것은 아마도 이런 연유였을 터이다.
종손이 말하는 현대적 의미의 종손은 무엇일까? '종손은 오너'라고 농암종손은 말한다. '21세기에서 종손은 고가유속古家遺俗을 전승하고 전파하면서 같은 뿌리의 동질성을 깨우쳐 주는 역할을 한다. 지손들을 이끌며 그들에게 자연스럽게 전통문화와 예절을 습득시켜 주는 일이야말로 어떤 교육보다도 효과가 크다.' 이런 점에서 종손은 농암의 후손들에게 고향을 새로 만들어주고 공동의 목적인 유적을 함께 지켜나가자는 대의에 불씨를 지핀 것이다. 종가의 큰제사에서 어동육서漁東肉西로 진설을 하면 그 제사에 참석한 후손들은 모두 각 집의 제사에서 어동육서로 진설을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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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바로 고가유속을 견문하고 습득해서 실천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풍속의 척도가 된다. 종손도 직장을 가지는 현대사회에서 봉제사 접빈객이 쉽고 편안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여전히 봉제사는 후손들간의 결속의 수단이며, 접빈객은 결속의 실천이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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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암종손은 이 종택의 전통을 두 가지로 압축한다. 하나는 적선積善이요, 또 하나는 경로효친敬老孝親이다. 종택의 사랑마루에는 적선이라고 쓴 선조의 글씨가 있다. 선조 때 안동에는 화산花山(안동을 지칭함) 삼처사로 명명되는 사림이 있었다. 농암의 여섯 째 아들인 매암 이숙량과 송암 권호문, 그리고 후조당 김부필이 그들이다. 이들은 조정에서 벼슬을 내려도 한사코 받지 않았고, 오로지 성리학 공부에만 매진했다. 선조 연간에 벼슬을 받았던 매암은 사은숙배(벼슬을 거절하면서 임금에게 올리는 절)를 위해 선조를 배알했고, 선조는 그 자리에서 적선이라는 글씨를 내렸다.
선조의 어필御筆은 농암의 행로와 무관하지 않다. 농암은 안동부사로 봉직하던 1519년(기묘년) 가을에 부府내의 80세 이상 남녀노인들을 관아마당으로 초청해 성대한 경로잔치(화산양로연花山養老燕)를 베풀었다. 맹자의 '老吾老以及人之老'(남의 부모를 내부모처럼 섬긴다)의 전통을 이어받은 이 양로연에서, 농암은 중국의 노래자老萊子가 그랬듯이 색동옷을 입고 춤을 추었다. 농암은 특히 당대의 사족이면서도 부府내의 귀천을 막론하고 나이 든 노인들을 모두 초청하는 파격을 보였다. 화산양로연의 미풍과 양속은 이후 예안에서 1902년까지 전승된다.
농암은 또 나이 든 양친을 위해 애일당愛日堂이란 집을 짓고 명절 때마다 색동옷을 입고 술잔을 올렸다. 당호를 '애일'로 삼은 것은 일신의 즐거움을 위함이 아니라 부모효도에 날이 부족하다는 뜻을 알리고자 함이었다. 농암의 시호는 효절공. 조선시대를 통틀어 효절이란 시호를 받은 분은 농암이 유일하다.
종손은 농암의 실천을 받들어 이 같은 경로잔치를 계속 이어가고 싶다고 한다. 경로효친과 적선의 정신이 희박해져 가는 요즘, 도산의 한갓진 마을에서 오십대 초반의 종손은 경로와 애일과 적선의 의미를 되새기고 있었다.
농암종가의 세의는 어떨까? 문중간의 세의야 다반사지만, 물경 6백년에 이르는 농암종가와 퇴계종가간의 세의는 더욱 각별하다. 퇴계의 숙부인 송재(이우)와 농암은 동방급제同榜及第(같은 과거에서 함께 급제하는 것)했고, 농암의 셋째 아들 하연 이중량과 퇴계 역시 동방급제해 양대에 걸친 기연을 이었다. 그런가하면 퇴계선생의 조모(노송정 이계양선생의 배위)는 농암 증조모의 외손녀였고, 농암의 맏손자와 퇴계는 풍천 가일의 권씨문중 손녀들에게 장가를 들어 동서가 됐다. 궁벽진 도산에서 양대에 걸쳐 이루어진 이 같은 기연은 지금까지도 양 문중간의 각별한 세의로 이어져 온다. 이런 기연에 문학적 소양까지 갖춘 농암과 퇴계는 34살의 나이차가 있었지만, 함께 강호를 노래하고 도산을 노래하면서 부자지간이나 다름없는 관계요 문학의 동반자로 살았다.
벼슬을 버리고 강호로 돌아간 농암의 귀거래는 '사람답게 사는 법'을 일러준다. 농암은 예안으로 돌아온 다음 어부가를 비롯한 수많은 시가를 남기며 풍류風流의 삶을 살아간다. 그러한 연유인가? 농암의 선친은 98세까지, 모친은 94세, 농암 자신은 89세까지 장수했다. 아들 6형제도 모두 일흔을 넘겼다. 일흔을 일컬어 오래 살아봤자 드물다는 고희古稀로 명명한 그 시대에 아흔을 넘나든 장수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농암선생으로부터 내려온 무욕의 삶은 17대 종손의 귀거래로 이어졌고, 이제 종손은 보종과 적선과 경로의 의미를 새삼 배우고자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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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암종손은 요즘 보인회輔仁會라는 모임에 자주 참석한다. 보인회는 경상북도내 4,50대 종손 16명이 참석하는 모임이다. 97년 결성된 이 모임에서는 젊은 종손들이 겪는 동류의 아픔을 공유하며 아름다운 종가문화를 계승하자는 논의가 치열하다. 때로는 '기제사를 2대 봉사로 줄이자' 또는 '불천위제사에서 떡 높이를 낮추자'는 등의 제안도 나온다. 떡 높이를 낮추자는 말에는 종손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사연이 있다. 옛날 불천위不遷位제사에서 진설하는 떡의 높이는 쌀 다섯 말을 써서 최고 1m에 이르렀다. 먹는 것이 귀하던 시절, 불천위제사가 올려지는 날이면 지손은 물론 마을의 타성받이와 동냥꾼들마저 몰려들어 문전성시를 이루었으니, 쌀 5말 분량의 떡이라도 모자랐다. 문중의 세를 과시하기보다는 제대로 먹지 못하는 일가와 주변 사람들에게 제사음식만이라도 골고루 나누어주자는 의도였으리라. 적선의 의미가 컸던 제사풍습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 세상이 되면서 이제 허례허식이 됐다. 종손들은 그래서 떡 높이를 낮추고 싶어도 다른 문중에서 혹여 욕이라도 할까 싶어 마음대로 하지도 못한다. 다같이 떡 높이를 낮추자는 종손들의 웃기는(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에)제안은 전통과 현대의 점이지대에서 시대변화에 부응하고자 하는 종손들의 조용하고도 의미 있는 몸짓일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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