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각해 볼 이야기
¶ 하버드 대학의 교수이자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헨리 나우웬이 다른 두 사람과 함께 긍휼에 대한 책을 쓰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그래서 가장 남을 잘 배려하는 정치인으로 알려진 허버트 험프리 상원의원을 방문해서 이렇게 물은 적이 있다고 합니다. “정치계에서는 긍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그러자 그는 자기 책상으로 돌아가더니 끝에 작은 지우개가 달린 기다란 연필을 하나 집어 들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이 연필을 보세요. 이 연필에서 지우개는 극히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지요. 왜냐하면 지우개는 실수를 했을 때만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긍휼도 일이 제대로 되지 않을 때에만 필요하답니다. 인생의 주된 부분은 경쟁입니다. 긍휼은 그저 지우개일 뿐이지요.”
- 치열한 경쟁 속에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긍휼은 그렇게 가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의 중요한 관심사도 우선순위도 아닙니다. 오히려 긍휼을 베푸는 것이 시간 낭비라고 우리는 철석같이 믿고 있습니다.
- 실제로 사람이 길에 쓰러져 있어도 모른 척하고 지나가는 것은 더 이상 이상한 일도 아닙니다. 지난 해 10월 중국의 광둥성 시장 골목에서도 두 살짜리 여자아이가 뺑소니 차량에 치어 위급하게 되었는데 아무도 돕지 않아 결국 뇌사상태에 빠졌다는 안타까운 보도가 있었습니다.
■ 성경 속의 진리 찾기
■ 그런데 현대인들에게는 별 가치가 없는 이 긍휼이라는 단어가 예수님에게는 매우 중요한 단어입니다. 7절 보세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 예수님께서 참된 그리스도인 다섯 번째 표지로 긍휼을 이야기 하신 것입니다. 자신을 따라오는 제자들에게 너희들이 진정 나를 따르는 제자들이라면 마땅히 긍휼을 여기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긍휼히 있을까요? 저는 이 질문을 던지는 순간 떠오르는 영상이 있었습니다. 횡단보도에 서 있었을 때, 다가오는 걸인을 모른 척했습니다. 그러면서 저 사람들을 뒤에서 조종하는 폭력배들이 있어 돕지 않는 것이 더 나은 것이라고 제 자신을 다독거렸습니다.
- 여러분은 어떠세요? 우리 몇 가지 질문을 던져볼까요? 나는 불쌍한 자들에게 대해 긍휼을 베푸는가 아니면 거만한가? 나는 억압받는 자들에 대해 온유한가 아니면 냉담한가? 나는 범죄한 자에 대해 호의적인가 아니면 무정한가? 나는 타락한 자에 대해 동정적인가 아니면 냉정한가? 답이 나오죠.
Ⅰ. 우리가 어떻게 긍휼함이 있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까요?
■ 진리 찾기 Ⅰ-긍휼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 많은 사람들이 긍휼을 오해합니다. 그냥 막연히 누군가를 불쌍히 여겨 도와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나가는 걸인에게 천 원짜리를 던져 주거나 방송에서 불쌍한 사람이 나오면 ARS전화를 하는 것쯤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이것도 쉽지가 않습니다. 제가 해보니까 그것도 매번 실천하는 것이 쉽지가 않았습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긍휼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긍휼히 여긴다는 것은 단순한 동정이 아닙니다. ‘저 사람들 안됐다’라는 것은 동정이지 성경이 말하는 긍휼이 아닙니다. 두 번째로 긍휼히 여긴다는 것은 누군가 불쌍해서 돕고자 하는 마음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긍휼히 여기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하실 때 복을 받을 사람의 마음 상태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복 받는 사람들의 행동에 대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긍휼은 막연하고 추상적인 마음가짐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 지난 번, 여러분도 아시는 것처럼 아주 유명한 사회복지단체의 비리가 연이어 터져 나오면서 많은 사람들이 기부를 하지 않아 가난한 사람들이 더 힘든 연말을 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저도 가난한 사람들을 돕겠다고 모금한 돈을 가지고 장난을 친 그 복지단체 사람들을 목소리 높여 비난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조용히 생각해 보니까 저도 별반 다르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기부금을 횡령한 사람들을 비난하면서도 정작 기부금이 필요한 어려운 이웃들을 돌아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른 방법을 얼마든지 찾을 수도 있었는데 그냥 기부행위를 중단한 것입니다.
- 그래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누군가를 불쌍히 여깁니다. 그리고 돕고자 하는 마음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아무 행동도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그것이 긍휼히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 도대체 긍휼히 여긴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긍휼은 영어 단어로 compassion입니다. 라틴어 ‘파티’(pari) '쿰‘(cum)에서 파생된 말로서 “함께 고통 받다”라는 뜻입니다. 헬라어로는 ’엘레오스‘(eleos)인데 “비참한 상태에 빠진 사람을 오히려 불쌍히 여겨 그를 돕는 행동”을 의미합니다.
- 긍휼은 누군가 불쌍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비참한 사람들의 삶속으로 뛰어드는 행동입니다.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스스로 일어날 수 없는 비참하고 불쌍한 사람들과 함께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 아무리 다른 사람을 동정하는 마음을 가졌더라도 함께 하는 행동이 없다면 그것은 긍휼이 아닙니다. 또한 아무리 많은 돈을 기부했다하더라도 그 기부한 돈에 함께 고통을 나누는 마음이 없다면 그것도 긍휼은 아닙니다.
- 긍휼히 여기는 것, 그것은 비참한 사람과 함께 고통을 나누고자 하는 마음 때문에 그들 속으로 기꺼이 들어가 함께 고통을 나누는 것입니다. 누가 그 일을 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그리스도인이라 일컫는 제자들, 바로 우리들이 그 일을 하는 복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Ⅱ. 우리가 어떻게 긍휼함이 있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까요?
■ 진리 찾기 Ⅰ- 긍휼이 필요한 자신의 상태를 깨달아야 합니다.
■
- 며칠 전, 미국에서 함께 공부를 했던 목사님이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올렸습니다.
“어제 미국으로 돌아오는 대한항공 기내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식사를 마치고 커피 한잔을 하면서 영화 한편 볼 수 있는 최적의 시간, 가장 평온한 그 시간에 갑자기 모니터가 멈추고 이어폰으로 기장의 다급한 목소리가 전해져왔습니다. 손님 중에 피를 토하는 응급환자가 있어서 의사선생님을 찾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승객 중 네 분의 다국적 의사 선생님들이 지원하셨고, 그들은 비닐 옷과 장갑을 끼고서 피범벅이 되어가며 환자를 돌보았습니다... 그들은 환자의 생명을 위해 큰 병원으로 긴급후송 해야 한다는 진단을 내렸습니다. 비행기는 신속한 리더십 회의를 거쳐 거의 직각으로 항로를 변경하여 알래스카 앵커리지에 착륙했습니다. 빙하와 설원이 창을 통해 시야에 가득 들어오더니 눈밭에 난 활주로에 사뿐히 내렸습니다.
이내 안전요원들이 뛰어 들어왔고, 구급차가 창밖에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비행기는 이륙을 위해 다시 연료를 공급받고, 비행허가를 받기까지 한 시간을 기다려야했고, 항로변경으로 인한 추가시간을 포함하여 총 3시간이 추가로 소요되었습니다... 그런데, 단 한사람도 불평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생명을 살리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나 일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 글을 읽으면서 마음에 감동이 왔습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 위급한 상황에 처한 불쌍한 사람이 나 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면 다른 사람을 좀 더 배려하며 긍휼히 여기며 살 수 있지 않을까?’ 순간,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지 못하는 것은 내가 긍휼히 여김을 받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잊어버렸기 때문이구나!
- 7절 보세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 이 말씀을 잘 읽어보세요. 이 말씀이 전제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긍휼히 여길 때 우리도 긍휼히 여김을 받는 복을 누린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도 긍휼히 여김을 받아야 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 아니 아시는 것처럼,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습니까? 죄와 허물로 망가진 비참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신 하나님의 자비하심 때문이 아닙니까? 베드로전서 2장 10절 보세요.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 그렇습니다. 우리가 구원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 하나님의 긍휼하심 때문이었습니다. 죄의 결과로 인해 마땅히 버려져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운명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런 우리를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신 것입니다. 자업자득이라고 하셔도, 지옥에 쳐 박아 놓으셔도 아무 할 말이 없는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외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 사랑하는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긍휼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살 수 있는 인간들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지속적인 긍휼이 아니라면 단 한 순간도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기에 날마다 기억하십시오. 내가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한 불쌍한 인간이구나! 하나님의 긍휼만이 비참한 나를 일으킬 수 있는 것이구나! 이것을 깨달음으로 다른 사람을 동일하게 긍휼히 여기시는 마음 갖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Ⅲ. 우리가 어떻게 긍휼함이 있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까요?
■ 진리 찾기 Ⅰ- 긍휼한 마음을 부으시는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
- 말씀드린 것처럼, 긍휼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들을 보면 마치 자신에게는 긍휼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행동합니다. 그런 사람들의 인생철학은 누구에게 신세지고 싶지도 않고 누구를 돕지도 않겠다는 것이지요. 왜 사람들이 그런 인생철학을 갖게 된 것일까요?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 앞에 서 보지 않은 사람은 자신의 죄와 허물을 보지 못합니다. 거울 앞에 서기 전까지 자신의 모습을 알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 서기 전까지 사람들은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가 없습니다. 그저 자기 나름대로 선하게 살아왔고 다른 사람들에게 나쁜 짓 하지 않았다는 의인 의식으로 가득 차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 서면 우리 안에 온통 죄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로마서 3장 23절 보세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말입니다. 본문 7절을 다시 한 번 상기해 보십시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 이 말씀을 처음 들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습니다. 라영환 교수의 “천국을 소유한 사람”이라는 책에 보면 이들은 병자,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당한 자, 억눌림을 받은 자, 버림 받은 자들이 대부분이었다고 합니다. 긍휼을 베풀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긍휼히 여김을 받아야할 사람들이었다는 말입니다.
-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긍휼히 여기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왜요? 자신들에게 고통과 가난과 억울함을 준 사람들을 대적할 수 있는 힘은 주시지 않고 왜 그들에게 긍휼히 여기라고 말씀하신 것일까요? 그것은 제자들만이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넉넉한 재물을 갖고 있는 구경꾼이나 바리새인들이 아닌 제자들만이 하나님의 긍휼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 아시는 것처럼 저는 기독교방송국에서 탤런트 이응경집사님과 함께 간증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때 만난 손님 중에 “나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손”이라는 책의 저자 박관태 선교사라는 분이 있습니다. 의료선교사로 몽골에서 보낸 경험을 책으로 낸 것입니다.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것이 참 많은 사람인데 왜 몽골 선교사로 헌신한 것일까요? 그는 처음부터 몽골 사람을 사랑한 것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몽골에 들어간 지 넉 달쯤 되었을 때, 그 곳에서 7년 사역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귀국하는 나이 일흔을 바라보는 한 노선교사의 마지막 당부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사역을 마친 노선교사님의 마지막 당부는 이것이었습니다.
“나는 이곳에서 많은 일을 하고 구제를 했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선교후원을 받는다는 부담과 사역에 대한 부담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몽골에 있는 동안 몽골 사람을 더 많이 사랑하지 못한 것이 가장 마음에 아픕니다. 여기 남아 있는 여러분은 부디 그들을 더 많이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 노선교사의 마지막 당부를 들으면서 박관태선교사님이 깨집니다. 자신 안에 몽골 사람들을 향한 사랑과 긍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깨어진 마음으로 기도하는 데 하나님이 선교사님의 마음에 긍휼을 부어주신 것입니다.
-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만나야 긍휼한 마음이 생깁니다. 왜요? 하나님은 긍휼이시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2장 4-5절 보세요.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 이 구절을 듣는 순간 눈물이 나지 않습니까? 이 구절이 없었다면 우리는 살아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죄와 허물로 망가진 우리가 구원받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 십자가는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긍휼히 많으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과 긍휼로 오늘 우리가 여기 이렇게 살아있습니다. 그러니 그 엄청난 긍휼을 받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것, 그것은 참된 그리스도인들에게 거는 하나님의 당연한 기대가 아닐까요?
■ 말씀따라 생활속으로
■ 세계적인 문학가이자 사상가인 돌스토이가 길을 가다가 구걸하는 걸인을 만났습니다. “선생님, 한 푼만 주십시오.” 톨스토이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보았지만 주머니가 텅 비어 있었습니다. 불쌍한 그를 돕고 싶었지만 도울 수 없었던 톨스토이는 손을 내밀어 걸인의 손을 잡아 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 “미안합니다. 지금 가진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걸인이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돈은 받을 수 없었지만 그 누구에게도 받을 수 없었던 따뜻한 마음을 처음 느낀 것입니다. 자신을 동정하며 던지 동전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톨스토이의 긍휼이 냉대와 천시만을 받아왔던 걸인의 마음을 녹인 것입니다.
- 사랑하는 여러분, 걸인보다 못한 우리가 아니었습니까? 그런 우리가 십자가에서 자신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긍휼을 경험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 긍휼을 세상에 보여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궁휼을 베풀지않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