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꺽정의 난.
임꺽정은 사회가 혼탁하고 민심이 흉흉하여 도적이 들끓던 명종 시대의 대표적인 도적 두목으로 백성들 사이에서 의적으로 통하던 인물이다. 양주의 백정 출신인 임꺽정의 출생에 대한 기록은 별로 남아 있지 않다. 다만 힘이 장사인데다가 날쌔고 용맹스러우며 당시의 양반 중심 사회에 불만이 많았던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임꺽정이 출몰하기 시작하던 1559년은 척족 윤원형의 일파와 이량 일파가 발호하여 온 나라가 그들의 세도에 눌려 있었고, 반대로 왕의 권위는 땅에 떨어져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사회는 온통 부정과 부패로 얼룩질 수밖에 없었고, 민간은 학정과 수탈에 시달리며 고통을 호소해야 했다. 거기에다 설상가상으로 몇 년째 흉년이 계속되어 거지가 늘어나고 도적떼가 할거하였으며, 남쪽에는 왜구가 침입하여 민가를 불 지르고 약탈을 자행하였다. 그야말로 조선 사회는 아수라장이나 다름없었다.
임꺽정은 이 아수라장을 이용해 자신의 처지를 타개하려는 인물 중의 한 사람이었다. 처음에 그는 도당 몇명과 함께 민가를 돌아다니며 도둑질을 일삼았다. 그러다가 세력이 커지자 황해도로 진출하여 구월산 등에 본거지를 두고 주변 고을을 노략질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경기도와 황해도 일대의 관아를 습격하여 창고를 털어 백성에게 나눠주는 의적으로 둔갑했다.
이러한 의적 행각은 백성과 아전들의 호응을 얻어, 백성들이 관아를 기피하고 오히려 임꺽정 무리와 결탁하는 양상이 벌어졌다. 이 때문에 관아에서 그를 잡으려고 병력을 동원하면 백성들은 그들을 숨겨주거나 달아나도록 도와주었다. 일이 여기에 이르자 조정에서 선전관을 보내어 그들을 정탐하게 했는데, 되레 선전관이 그들에게 잡혀 죽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때부터 조정은 임꺽정을 잡기에 혈안이 되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관아에서는 임꺽정이 도적의 괴수라는 사실조차도 파악하지 못한 단계였다. 그러는 가운데 임꺽정 무리는 개성에 나타나기도 했으며, 1560년에는 마침내 서울에까지 출몰하였다.
1560년 8월 임꺽정 무리를 쫓던 관원들은 그의 아내를 잡는 데 성공하여 그녀를 형조 소속의 종으로 삼게 하였다. 그리고 이 해 10월에 들어서는 서울로 진입하는 길을 봉쇄하고 삼엄한 경비를 펼쳤다.
그러나 이들 도적 무리는 봉산에 중심 소굴을 두고 평안도의 성천, 양덕, 맹산과 강원도의 이천 등지에 출몰하여 더욱 극성을 떨었다. 이들은 황해도에서 앗은 재물을 개성에 가서 팔기도 하고, 서울에도 근거지를 마련하고 약탈을 일삼았다. 이 때문에 황해도 일대는 길이 막히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전 병력이 임꺽정 무리를 잡기 위해 나섰다. 이 해 12월에는 엄가이라는 도둑 두목이 잡혔는데, 그는 임꺽정의 참모인 서림이라는 자였다. 관아는 서림의 입을 통하여 임꺽정 일당이 장수원에 모여 있으면서 전옥서를 파괴하고 임꺽정의 아내를 구출할 계획을 짜고 있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그리고 그들이 평산 남면에 모여 자신들을 여러 번 잡아 그 공으로 영전한 봉산군수 이흠례를 죽일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이에 조정에서는 평산부와 봉산군의 군사 500명을 모아 평산 마산리로 진격시켰다. 그러나 관군은 오히려 그들에게 패하여 후퇴하였고 부장 연천령이 죽고 군마를 모두 빼앗기고 말았다.
사건이 이렇게 커지자 임금이 직접 황해도, 경기도, 평안도, 강원도, 함경도 등 각 도에 대장 한 명씩을 정해 책임지고 도둑을 잡으라는 엄명을 내렸다. 이 무렵 서흥부사 신상보가 도둑 무리의 처자 몇 명을 잡아 서흥 감옥에 가두었는데, 한낮에 도둑떼가 들이닥쳐 옥사를 깨고 그들의 처자를 구출해간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자 관군은 본격적으로 도적 소탕 작전에 돌입하여 그 해 12월에 황해도 순경사 이사증이 임꺽정을 잡았다는 보고를 했다. 하지만 그가 잡은 사람은 임꺽정이 아니라 그의 형인 가도치였다. 그래서 이사증은 이 허위 보고에 책임을 지고 파직당해 옥에 갇히기까지 했다.
이와 같이 5도의 군졸들이 모두 임꺽정을 잡기 위해 나섰지만 번번이 실패하였다. 1561년 9월 평안도 관찰사 이량은 의주 목사 이수철이 임꺽정을 잡았다고 보고했으나 그들은 임꺽정을 가장한 가짜였다. 이 때문에 이수철은 허위 보고로 파직 당했다.
그 해 10월에 임꺽정 무리에 의해 해주의 민가 30호가 불타는 화재 사건이 발생했고, 이때부터 관군들은 서림을 앞세워 임꺽정을 체포하기 위해 나섰는데 수상해 보이면 무조건 체포하여 옥에 가두고 구타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서울은 온종일 호곡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모든 관청은 일을 중단하고 임꺽정을 색출하는 작업에 투입되었고, 5도의 전 시장들을 휴업하게 하였다. 또한 황해도에서는 양민들이 도둑에 가담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전세를 전부 탕감시켜주었으며, 평안도에서는 전세의 절반을 깎아주기도 했다.
이렇게 소란이 심화되자 군민은 피로에 지치고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토벌 대장인 토포사를 다시 서울로 올라오게 하고 임꺽정 무리를 잡는 일은 평안도, 황해도의 병사와 감사가 맡게 하였다.
그 후 1562년 정월, 군관 곽순수와 홍언성이 임꺽정을 체포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이번에는 진짜 임꺽정이었다. (기재잡기)는 임꺽정이 잡힐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민가에 숨어 있던 임꺽정은 주인 노파를 위협하여 '도둑이야'라고 소리치게 한 다음 자신이 뛰쳐나가 도둑이 달아났다고 소리쳤다. 이 말을 믿고 관졸들이 임꺽정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몰려가자 그는 군졸들의 말을 뺏어 타고 달아났다. 그때 서림이 저 사람이 임꺽정이라고 소리쳐 끝내 상처를 입고 생포당하고 말았다 ."임꺽정은 조정에서 체포령을 내린 지 3년 만에 붙잡혔고, 체포된 지 15일 만에 처형당했다. 명종실록은 임꺽정 무리에 대해 '그들이 도둑이 된 것은 왕정의 잘못이지 그들의 죄가 아니다'라고 쓰고 있다.
이 기록은 당시의 사람들이 임꺽정을 단순한 도적 괴수로 생각하지 않고 민심을 대변하는 의로운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의적으로 추앙했으며, 무수한 설화와 소설로 그의 행적을 그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임꺽정을 가리켜 앞 시대의 홍길동과 후세의 장길산과 더불어 조선의 3대 도둑이라고 했다.
임꺽정은 평민과 몰락한 양반들에게는 의인으로, 양반들에게는 도적으로 평가되었다. 어쨌든 그의 도적 행위가 단순히 자기 자신의 사리사욕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또한 그의 활동이 3년 동안이나 조선의 행정을 마비시킬 정도였다는 점에서 '임꺽정의 난'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었다.
첫댓글 곰솔님! 열심히 글 올리시는데 댓글 많이 달지 못해 죄송합니다. 모임 후 제가 많이 아팠어요. 환절기 건강 유의하시고 금요일에 인천사랑방으로 영화보러 오세요. ^-^
호수님 아푸면 안되는데 병문안 못가 미안해유~ 인천사랑방에서 뵈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