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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나는 간이 짠 고등어 자반을 젓가락으로 헤집고 있었다. 밤 열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기름에 너무 오래 튀긴 자반은 바싹 오그라들어 있었다. 양푼속의 물에 만 밥은 좀처럼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밥 먹는 일이 지칠 때마다 나는 텔레비전 리모콘을 눌러대며 화면을 바꾸었다.
화면가득 등신대 형상으로 늘어놓은 옷가지와 운동화는 물에 젖었었는지 흙탕물이 배어 있었다. 방금 유적지에서 발굴해낸 세월을 건너뛴 유품들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누고 이 소녀을 아십니까?
인조가죽 점퍼, 무릎 길이의 청 반바지, 은제 십자가 목걸이, 사파리라는 영문자가 가슴께에 박힌 면 셔츠, 군청색 아디다스 운동화.
이것이 그 소녀를 짐작할 수 있는 유일단 단서들이었다. 소녀는 강 하류에서 발견되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그 소녀가 홀연히 내게 말을 걸어왔다.
소녀는 개망초라는 들꽃 이름을 내게 알려주었다.
낚시꾼이 날 강가로 끌어내려고 해.
저 사람은 한눈에도 초보자인 게 틀림없어. 낚시찌가 수면 위에서 달뜨게 오르내리고 낚시대 손잡이로 묵직산 손맛이 전달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두 다리를 벌린 채로 엉거주춤 일어서서 잔쯕 긴장하기 시작했거든. 누구든 이런 순간에는 다 긴장들을 할 거야.
하지만 한 번이라도 낚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다 알아. 고기가 낚시 바늘을 너무 깊이 삼키기 전에, 찌의 작은 미동을 알아 챌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진짜 강태공이라 불릴 만 하지. 것봐, 잔뜩 당황한 저 사람, 이젠 고함까지 지르잖아. 삽시간에 근처의 강가에 낚시대를 드리우고 앉아 있던 낚시꾼들이 그가 선 쪽으로 몰려들기 시작했어. 누군가 월척이라고 소리를 지르는군.
지금은 메기 낚시철이야.
낚시 바늘이 내 점퍼에 구멍을 냈어. 새것인데 말야. 엄마는 새옷에 흠집을 냈다고 날 꼬집을 거야. 짜깁기라는 걸 하면 아무런 표 없이 다시 새것처럼 입을 수 있을까. 우리 동네 명성 세탁소 아주머니는 재봉틀 솜씨가 일품이야. 명성 세탁소는 우리 집으로가는
골목 입구에 있어. 가게문 위에는 마냥 같은 옷들이 걸려 있지. 꽃분홍색 양단 한복은 손님이 맡긴 게 아니라 주인 아주머니의 것일 거야. 조금이라도 눈썰미가 있는 사람이라면 그 한복이 365일내내 그 자리에 그대로 걸려 있다는 걸 알아챘을 거야. 옷이 많이 걸려 있어야 손님들이 많이 모여든다는 거야. 보세요. 우리가게에는 는 이렇게 손님들이 맡긴 세탁물들이 많답니다. 그런 표시인거지. 하지만 그 가게에 걸린 옷의 절반은 전시용이라 해도 맞는 말일 거야.
아주머니는 볕이 바른 창가에 앉아 하루 종일 재봉틀을 돌려. 유리창에 붙인 드라이 크리닝와 옷수선이라는 글자의 획들이 하나, 둘 떨어져나가면서 길가에서도 가게 안이 잘 들여다보이지. 그러케 종일 재봉틀을 돌리는 아주머니도 양단 한복처럼 일종의 전시물로까지 보인다니까. 벽에 촘촘하게 박힌 못들마다 갖가지 색깔의 실패들이 꽂혀 있어. 전기 재봉틀이 돌아가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잠이 쏟아진다고 해. 그 촘촘한 바늘땀들은 또 어떻구. 컴퓨터 세탁소들이 여기저기 들쭉날쭉 들어섰지만 엄만 늘 그 집에만 세탁물을 맡기거든. 하지만 이제 아줌마는 코 끝에 돋보기 안경을 걸치던 걸. 전기 재봉틀 소리가 중간중간 자주 끊기는 건 아주머니의 노안 탓일거야. 아줌만 70년 동안 골고루 써야 할 눈을 세탁소를 시작한 지 15년 만에 모두 다 써버렸대.
제발 이 구멍이 엄마 눈에 띄지 말아야 할 텐데.
간밤 내내 강가를 따라 깜박이던 불빛들은 낚시꾼들이 켜놓은 칸델라등 불빛이었을까. 지금은 메기 철이잖아. 나는 물살에 떼밀리면서 조금씩 강 하류 쪽으로 흘러가고 있어. 이 강물은 서서히 흘러가고 있는 것 같아. 악취가 코를 찌르거든. 시야도 희뿌애. 이곳까지 떠내려오는 동안에도 등이 굽은 물고기들이 수없이 내 다리 사이로 헤엄쳐다녔어. 절뚝거리면서.
이곳은 내게는 너무도 낯익은 곳이야. 아버지를 따라 이곳으로 숱하게 낚시를 왔었어. 물론 아주 오래 전에 말야. 아버지 곁에 나란하게 낚시 의자를 놓고 앉아 어설프게 낚시대도 드리워 보았지만 매번 강물 속에 떡밥만 흘려버리고 말았지. 난 진득하지 못하대. 여자애가 어디 하나 쓸모 있는 데라고는 없대. 엄마한테 늘 혼나는 걸.
하루 종일 강물만 쳐다보고 있는 게 지루해 나는 아버지에게서 벗어나 강가를 따라 올라갔었어. 강가에는 꽂들이 피어 있었지. 이름 알 수 없는 꽂들이었어. 왜 들꽂에서는 향기가 나지 않는 걸 까. 꽃에서는 아릿하게 풀 비린내만 나던 걸. 강가에 무더기로 핀 그 꽃들이 내 바짓가랑이와 흰 양말에 풀물을 들여놓았어.
아버지가 붕어를 낚았나봐. 내가 뛰어갔을 때 수면 위로 막 붕어 한 마리가 낚아올라오고 있었어. 날카로운 낚시 바늘이 붕어의 입 속에 깊게 꿰어 있었지. 낚시 바늘이 보이지 않았을 정도였으니까. 붕어가 낚시 바늘을 너무 깊게 삼킨 모양이야. 아버지가 조심스럽게 낚시 바늘을 빼내려했지만 낚시 바늘 끝에 덜컥 붕어 내장이 달려올라와 버렸지. 물통속에 들어간 붕어는 곧바로 물 위로 둥실 떠올랐어.
그나저나 내 점퍼의 구멍은 감쪽같이 꿰맬 수 있을까. 정말 새것인데 말야. 칠칠치 못하다고 엄만 또 화를 낼거야.
히야, 월척이군, 월척.
월척을 구경하기 위해 근처의 낚시꾼들이란 낚시꾼들은 다 모여든 것 같아. 활처럼 팽팽하게 휜 저 낚시대 좀 봐. 50키로그램니나 나가는 나를 잡아당기려니 저렇게 휠 수밖에. 낚시꾼들이 입을 벌릴 때마다 술 냄새와 함께 역한 군내가 날거야. 그 사람들은 어젯밤 꼬박 이 강물만 들여다보고 있었을테니까 말야. 이곳은 사계절 내내 낚시꾼들로 붐비는 곳이야. 낚시회에서 단체로 온 사람들도 있을 거야. 아마 강둑 위는 그 사람들이 타고온 자동차들로 빼곡할 걸? 물론 아버지도 밤낚시를 했어. 아버지가 밤을 새는 동안 난 작은 텐트 속에서 몸을 오그리고 잤지. 잠자리가 불편해 자꾸 잠에서 깨고는 했는데 눈을 뜰 때마다 방충망 너머로 둥글게 구부러진 아버지의 등이 보이고는 했어. 새벽에 일어나면 텐트의 지붕이며 아버지가 입은 노란 방수복에 온통 이슬이 내려앉아 있었어. 왜 벌써 깼니? 들어가 더 자거라. 나는 아버지의 입냄새가 싫지 않았어. 고소한 담배 냄새가 났거든.
낚싯대 끝을 쳐다보는 낚시꾼들의 눈이 빛나는군. 왜 저런 월척은 내 낚시에 걸리지 않을까. 그런 생각들을 할 거야. 누구나 다 낚싯대를 드리운 순간에는 씨알 좋은 물고기 꿈을 꿀 거야. 아버지도 숱하게 월척을 잡았어. 물론 낚시 잡지 같은 데 지난주 최대어란 같은 데는 오르지않았지. 아버지는 다른 낚시꾼들처럼 낚시회 같은 델 가입하지 않았거든. 하지만 난 아버지가 족히 40센티미너나 될만한 붕어를 낚는 것을 이 눈으로 직접 보았어. 미끼는 지렁이를 썼었지.
제발 노련한 낚시꾼이 저 사람이 쥔 낚싯대를 대신 잡아주었으면. 아버지가 그랬어. 노련한 낚시꾼일수록 물고기에 상처를 남기지 않는다고. 이것 봐. 저 사람은 초보자가 분명해. 내 점퍼의 구엉이 자꾸 커지잖아.
그 꽃이 피었나봐. 아버지를 따라 낚시 왔을 때 강가를 따라 무더기로 피었던 그 꽃 말야. 냄새가 나는 걸. 비릿한 그 냄새. 나는 사탕을 탐내는 어린 아이처럼 사정없이 그 꽃줄기를 뜯어댔었지. 줄기 전체에 솜털이 나 있었어. 줄기가 얼마나 질기던지. 어떤 것은 끊기는 대신 아예 뿌리째 뽑혀비리고는 했지. 하얀 국화처럼 생긴 꽃이야. 조문할 때 쓰는 빵처럼 부푼 국화 말고. 들국화. 아주 작은 들국화. 난 그 꽃을 한 아름 꺽어들고 아버지에게로 달려갔어. 아버지가 말했어. 꽃은 함부로 꺽는게 아니라구. 그낭 두고 볼때 아름다운 거라구. 너무 급하게 뛰어온 때문일까? 꽃잎들이 모두 흩어져버렸어. 그 꽃 이름이 뭐였지? 아버지가 알려주었는데. 가물가물해.
아, 엄만 내가 집에 돌아오지 않는다구 불 같이 화를 내고 있을거야.
뜀틀 시험이 며칠이나 남았지? 난 도대체 이곳에 며칠이나 있은 걸까. 선생님에게 꾸중을 듣지 않으려면 연습을 해야 하는데 말야. 뜀틀을 넘다가 발목이 부러진 아이 때문에 체육 선생 짱구는 초비상이야. 난 정말로 뜀틀은 싫은데. 자꾸 뜀틀 중앙에 엉덩이가 걸치곤 한단 말야. 그럴 때면 짱구는 내 엉덩이를 손에 든 몽둥이 끝으로 마구 찔러대지. 연습을 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음 운동장을 스무 바퀴나 뛰어야 할 거야. 짧고 굵게. 그런 구령까지 붙이면서 말야. 체육선생 짱구의 인생 모토는 바로 '짧고 굵게'야.
그런데 이 강물은 정말 썩어가나봐. 악취가 나잖아.
간밤에도 누군가 이 강에 더러운 물을 버렸어. 짐칸 가득 드럼통을 실은 8톤 트럭이 새벽에 이 강가로 가가왔지. 강이 가까워지니까.트럭은 헤드라이트마저 끄고 속도를 낮췄지만 난 다 들을 수 있었어. 강에서는 모든 소리가 더 가깝게 들리는 법이거든. ㅏㅁ에 낚시터에 와본 사람은 다 알아. 아버지는 가끔 어둠 속에 대고 멀리 떨어져 앉은 다른 낚시꾼들과 이야기를 했거든. 그곳에는 고기가 입질을 좀 하느냐, 낚시밥은 무얼 쓰느냐, 몇마리나 잡았냐는 그런 정보 교환이었어. 여자 목소리보다 남자 목소리가 훨씬 더 먼 곳까지 들린다는 것 알아? 언젠가 잡지에서 본 기사니까 믿어도 될거야.
남자 두 명이었던 것 같아. 아니 발소리로 봐선 아마도 세 사람이었는지도 모르지. 아무튼 한 사람은 말수가 적은 사람이 분명해. 짐칸에서 드럼통을 내릴 때마다 트럭 아래 선 남자가 엄살을 떨던 걸. 옆으로 누인 드럼통을 강가까지 굴리고 와서는 드럼통의 마개를 풀어 무언가 끈적거리는 액체를 이곳에 쏟아 부었지.
젠장, 이 짓도 더는 못해 먹겠어. 줄을 타는 곡예사 심정이란 말야.
아까 검문소에서는 정말 오줌까지 지릴 뻔했다니까. 씨부럴.
이봐, 목소리 좀 낮춰. 정말로 감방엘 가고 싶은거야?
그들은 웃음조차도 속삭이듯 낄낄거렸어. 드럼통이 액체를 쿨럭쿨럭 게워내고 있는 동안 바지 지퍼를 내리고 강에다 오줌까지 누웠지. 그 사람들이 버린 게 뭘까? 휘발유 냄새가 너던 걸.
이 강물은 서울과 경기 지방의 상수원이야. 우리 집 수도꼭지를 틀면 이 물이 쏟아져. 차라리 내가 물이었으면 좋겠어. 수도꼭지를 타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텐데. 그럼 엄마는 날 알아볼까?
이러다 이 강도 메콩 강처럼 되어버릴 거야. 메콩 강이라고 들어봤지? 텔레비전에서 봤어. '메콩강의 탈출' 아니면 '메콩강의 사랑'. 이 비슷한 제목의 영화였어. 미국 신문 기자와 원주민 여자의 사랑 이야기야. 그 영화 속의 메콩 강은 그야말로 죽음의 강이었어. 당나귀 시체와 썩은 물고기들이 떠다니지. '메콩 강의 탈출'이란 제목이 맞는가 봐. 그 강물 속으로 잠수해 국격선을 넘은 두 연인이 마침내 사랑을 쟁취한다는 줄거리였던 것 같아. 사랑, 사랑, 사랑. 난 사랑이라는 말과 쿠키라는 말이 제일 좋아. 입이 간지러워지거든.
하긴 무엇을 내다버리는 건 이 트럭만이 아니야. 밤새 강가을 따라 반짝이던 것. 아니, 칸델라등 불빛보다 크고 화려한 불빛들 말야. 두 개의 불빛의 차이는 들꽃과 관상 식물의 차이쯤 될 걸? 난 들꽃이 좋아. 아무튼 전망이 좀 좋다 싶은 곳에는 여지없이 호텔들이 자리잡고 서 있어. 서울에서 차를 몰고 온 사람들이 묵었다 가는 곳이지. 낮에도 호텔은 만원이래. 엄만 그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해. 호텔들의 요란한 네온 간판들이 밤새 불야성을 이루지. 라스 베이거스 같아. 사막을 한참동안 달려가 차에 흙먼지가 잔뜩 묻어야 도착한다는 곳이 라스베이거스 아냐? 아마 모르긴 몰라도 그 호텔들의 하수관들도 몰래 이 강으로 숨어 연결되어 있을거야.
그런데 그 꽃 이름이 뭐였지? 혀 끝이 간질간질한데.
..........지금은 내 이름조차도 기억나지 않아. 내 기억력에 너무 많은 물이 섞여버렸나봐.
낚싯대에 여러사람이 달려든 모양이야. 요령 없이 힘만 줘 끌다가는 낚시줄이 끊기기 십상이거든. 사람들이 아직도 흥분하고 있어. 낚시줄 끝에 무엇이 따라올라올까, 저 호기심에 찬 눈들 좀 봐.
야 난생 처음인 걸. 이렇게 큰 메기는 말야. 형씨 오늘 운 좋은 날입니다.
혹시, 그 늙은 여우 아닐까?
설마 그 늙은 여우가 이렇게 호락호락하게 걸리겟어? 보아하니 조력이 얼마 안 되시는 것 같은데.
이봐,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말 몰러?
하여간에 늙은 여우를 제대로 본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니까.
기껏해야 등팡의 일부분이거나 커다란 입뿐이겠지. 재작년 자네 낚시줄을 끊고 달아난 것도 그 늙은 여우가 분명해.
늙은 여우? 그 이름은 나도 들은 적이 있어. 그 늙은 여우을 제대로 본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낚시꾼의 말이 사실이야. 그것이 나타나면 강 한가운데 소용돌이가 일어난다고도 하지. 아무튼 이야기를 만들어내는데 낚시꾼들처럼 허풍을 떠는 사람들도 없는 것 같아. 꼭 놓친 피라미를 두고도 팔뚝만한 월척이었다고 하거든. 아마도 늙은여우는 낚시꾼들이 만들어 낸 전설 같아. 월척을 원하는 낚시꾼들의 바람이 만들어 낸 전설.
누구든 그놈 입이 유원지에 띄워놓은 보트의 폭만하다고도 했어. 몸 길이에 대한 이야기도 사람들마다 제각각이야. 어떤 사람은 어린 아이만하다고도 하고 어떤 사람은 자그만치 2미터가 넘을 거라고도 해. 농구 선수 서장훈만한 메기, 어디 상상이나 할 수 있어?
늙은 여우를 다 잡았다가 놓친 사람들 이야기도 많아. 얼마나 신출귀몰한지 낚싯대를 놓지 못해 밤새 그놈에게 끌려다니다가 돌아온 사람도 있었대. 제 몸만한 보트, 그것도 몸집이 큰 장정이 탄 보트를 끌고 밤새 헤엄쳐다녔다니 이쯤되면 진짜 허풍 아니겠어? 결국은 지친 그 낚시꾼이 먼저 낚시줄을 끊어버리고 말았다지. 그러니 늙은 여우라고 불리우는게 당연해.
아무튼 낚시꾼들은 날 늙은 여우로 아는 모양이야. 내 키는 고작 153센티미터야. 우리나라 고등학교 여학생 평균치 신장에도 훨씬 못 미치지. 올 여름이 지나면 난 좀더 커 있을지도 몰라. 한 여름 동안 15센티미터의 키가 큰 아이를 알고 있어. 여름 방학이 지마고 학교로 돌아와 보니까 글쎄 교복 상의가 달려올라가 허리춤이 훤히 들여다 보이더라니까. 올 여름만 지나면 난 키가 훌쩍 커 있었을 텐데 말야.
초보 낚시꾼이 낚싯대를 잡고 씨름하고 있는 동안 낚시 바늘은 내 점퍼에 더 큰 흠집을 내고 말았어. 목덜미 바로 밑인 것 같아. 짜깁기를 잘 한다 해도 별 도리가 없을 것 같아. 목덜미는 너무도 눈에 잘 띄는 곳이고 게다가 난 짧은 단발머리거든. 십자형으로 찢긴 이 흠집을 엄마가 놓칠 리 없어. 명성 세탁소 아주머니도 이런 흠집은 어쩔 도리가 없을 거야. 게다가 아주머니는 이제 너무 늙었거든. 새 것인데 말야. 겨우 서너 번 입었을까.
여긴 물살이 세. 지나오는 길에도 가끔 이런 곳이 있었어. 수면은 잔잔해보이는데 물 밑으로 소용돌이가 치지. 그럴 때마다 난 소용돌이에 휘말려 강바닥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떠올랐어.
어, 아저씨 조심하세요. 여긴 물살이 아주 세요. 조금 더 힘을 주세요. 더 힘......아. 끊겼어 낚시줄이 끊겼어.
강가에 서 있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탄성을 질러 빈 낚시줄만 끌려올라왔겠지.
아이고 아깝군. 늙은 여우가 분명한데 말야.
그 놈에겐 당할 재주가 없어.
사람들이 하나, 둘 제자리로 흩어지고 낚싯대가 바람을 가르고 강으로 던져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해. 릴 낚싯대는 내가 있는 바로 옆으로 다가와 물 속에 곤두박혔어. 내 몸이 다시 가라앉기 시작해.
난 평생 씻지 않고 살아도 될거야. 내 몸은 조약돌처럼 반질반질해졌거든. 강 아래로 떼밀려가면 난 모래알이 되어 있을까.
경주 할머니가 돌아가셨어. 경주 할머닌 내 외할머니의 둘째 여동생이야. 경주로 시집을 갔대서 경주 할머니라고 부르지. 할머니는 돌아가신 지 하루만에 깨어나셨대. 결혼도 하기 전인 처녀적이었다지. 호두알처럼 주름진 할머니에게 처녀적이 있었다니 믿을 수 있어? 할머니는 다 빠지고 난 두 개 남은 앞니로 사탕을 맛있게 잡수셨지. 이가 다 빠지셨는데 불편하지 않으세요? 내가 물었더니 할머니는 홀쭉해진 뺨에 든 사탕알을 달그락달그락 굴리면서 웃었어. 이가 없으니 이 썩을 걱정 안 해 좋다. 만날 요렇게 맛있는 사탕도 먹고.
할머니는 꿈 속에서 도랑을 건넜갔다지. 한참을 걸어도 이상하게 다리가 안 아프더라는 거야. 웬 노인 한 분이 밭을 갈고 있다가 할머니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한 마디 툭 던지더라는군. 넌 아직 이곳에 올 때가 안 됐다. 돌아가거라. 그제서야 할머니는 할머니가 걸어온 길을 뒤돌아 보았더래지. 웬걸 도랑의 물이 어느새 점점 불어 강으로 변하고 있더라는 거야. 할머니는 치맛속이 들여다보이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멀리서 도움닫기로 달려가 풀썩 강을 뛰어 건넜대. 꿈을 깨고 보니 할머니 발 밑에 친지들이 모여 곡을 하고 있더라는 거야.
할머니는 춥지도 덥지도 않은 때 돌아가셨어. 여든두 해를 사셨으니 다들 호상이라고 했어. 할머니의 남은 형제분들은 혹시나 할머니가 전처럼 다시 깨어 일어나지는 않을까 꼼짝않고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어. 하지만 이번에는 할머니가 그 강을 다시 건너오지는 못했나 봐. 그 큰 강을 뛰어넘을 기력이 할머니에겐 없었을 거야. 엄마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섰을 때까지도 깨어나지 않으셨어.
처녀 적, 할머니는 그 강을 뛰어넘다가 그 강 속에 얼마간의 기억을 떨어뜨렸대. 평생을 악간 모자란 사람, 반푼이라고 손가락질을 받고 사셨어. 나는 지금 그 강을 건너고 있는가 봐. 강가에 피었던 그 들꽃의 이름도 가물가물해. 내 이름조차도 떠오르지 않는 걸.
그런데 아버지랑 낚시 갔던 건 너무 생생한 걸. 그 꽃도. 사진처럼.
아버지는 이제 낚시를 가지 않아. 공장의 프레스 기계가 아버지의 두 손을 가져가 버렸어. 정전이 되면서 멈춘 기계가 갑자기 움직이며 기계 위에 올려놓은 아버지의 손을 눌려버렸지. 학교에서 돌아와보니 아버지가 마루에 걸터앉아 있었어. 대문은 그냥 열어 둔 채로 멍 하니 한 곳만 바라보고 있었지. 내가 마당으로 들어섰는데도 아버지는 날 거들뗘보지도 않아. 예전 같으면 큰 소리로 웃으며 날 안아주었을 텐데. 뭘 그렃게 쳐다보는지 나도 아버지를 따라 그곳을 쳐다보았어. 그곳에는 그저 맨 하늘뿐이야. 아버지는 울고있었어. 붉게 충혈된 두 눈에는 눈곱이 끼어 있었어. 난 세숫대야에 물을 떠다가 아버지의 얼굴을 씻겨주었어. 아버지가 얼굴을 자꾸 내저었어. 그 바람에 아버지의 웃옷이 물에 흥건히 젖어버렸어. 필라멘트가 끊긴 전구알 같은 아버지의 눈이 싫어.
환각자라고 들어왔어? 수술이나 사고로 갑자기 수족이 절단되었을 경우, 없어진 수족이 마치 생생하게 존재하는 것처럼 느끼는 거래. 밥을 먹을 때마다 아버지는 아직도 생떼를 부려. 엄마가 이에 대준 숟가락을 도리질로 떨쳐버리지. 잘린 팔로 숟가락을 들려다 그제서야 잃어버린 손 생각이 나는 모양이야. 그럴 때면 벌컥 화를 내면서 밥상을 발로 차버리기도 해. 아직도 아버지는 낚시를 하는 꿈을 꾸나 봐. 새벽에 벌떡 일어나 앉아 두 손바닥에 전율이 온다고 한참을 떠들어댔어. 큰 거야 큰 거.
당신한텐 손이 없어요. 허튼 소리 말고 잠이나 자요. 엄마가 퉁명스레 잔소리를 하면 아버지는 멍하니 앉아 있다 풀썩 쓰러져 다시 잠을 자고는 하지.
엄마가 자꾸 화를 내는 건 아버지 때문이야. 아버지에게 두 손이 있었을때는 말야, 엄마도 나에게 도너츠나 잡채 가은 걸 만들어주고는 했어. 얘 날씨가 차다. 웃옷을 한 개 더 걸쳐라. 자근자근 그런 말도 해주었어.
그 날도 아침부터 난 엄마에게 혼이 났어. 엄마는 내 젓가슴을 호되게 꼬집었어. 내가 또 세수비누를 쓰고 비누받이에 올려놓는 걸 깜빡했기 때문이야. 비누가 퉁퉁 붓는다고, 헤프게 닳아버린다고, 돈 버는 게 얼마나 힘든지 몰라서 하는 짓거리라고. 엄마가 꼬집을 때면 눈물까지 나. 난 정말 엄마 말처럼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계집애인가 봐. 왜 비누받이에 비누 올려놓는 일 따윌 자꾸 깜박하는 걸까.
지금 내 몸이 그 비누 같아. 나는 퉁퉁 불었을거야. 내 몸이 다 닳아버리는 것 같아. 물에 풀려 아무것도,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면 어쩌지?
학교가 일찍 끝나는 날이면 난 친구들과 역으로 나가고는 해.역사 앞의 벤치에 앉아 기차를 타고 오는 사람. 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다가는 오는 거지. 지금이 가장 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때야. 대학생들로 보이는 젊은 남녀들이 우르르 기차에서 내려. 봄이년 이곳으로 많은 대학생들이 엠티를 오거든. 역 광장에 모여선 그들은 라디오의 볼륨을 크게 틀어놓고 노래를 따라부르거나 춤을 추기도 하지. 큰 소리로 떠들고 웃어대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아. 나는 내가 대학생이 되어 우리 동네로 엠티를 오는 장면을 생각해봐.학교와 과 이름이 적힌 깃발을 든 사람이 앞장을 서서 가면 그 뒤로 긴 행렬이 이어지고는 해. 엠티철이면 영락없이 나나나는게 잡상인들이야. 넓적한 나무 상자 속에 초콜릿이며 껌 따위를 넣고 다니면서 학생들에게 파는 거지. 행렬이 다 지나가고 광장에는 한 중년 사내만 남았어. 덩치가 큰 사내는 두터운 군복을 걸치고 있었지. 사내가 목에 상자를 맨 채 우리에게로 다가왔어. 남루한 군복 소매속의 두 팔이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 건 그 사람이 우리 앞에 서 상자를 내미는 순간이었어. 친구가 한 걸음 물러섰어. 헐렁헐렁한 사내의 소매 속에는 차가운 스테인레스로 만든 갈고리 손이 들어 있었어. 우리는 비명을 지르면서 줄행랑을 쳤지. 뒤돌아보니 사내는 우리가 앉았던 의자에 털썩 앉아 젓가락 같은 갈고리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고 불을 붙이더군. 아버지도 언젠가는 어쩔 수 없이 저런 손을 끼어야 할 거야. 난 가끔 아버지가 '가위손'이 되는 상상을 해. 영화 속에서 가위손은 그 손으로 정원을 멋지게 손질하거나 여자들에게 최신식 머리모양을 해주잖아.하지만 현실은 영화처럼 아름답지 않은 것 같아. 왜 그때 내가 도망쳤는지 몰라. 그날 내내 아버지를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어.
비가 와. 강물이 기름처럼 자글자글 끓어올라. 내가 떠내려가는 것도 점점 속도가 붙는 것 같아. 지금 내가 물 속에 있다니 어디 상상이나 한 일이야? 난 물을 무서워하는데 말야. 난 실내 수영장에도 가질 않아. 딱히 이류랄 건 없어. 그냥 감자채 속에서 양파를 걸러내는 것과 같아. 물 속에 들어가는 것이라면 딱 질색인데 말야. 난 너무도 오랫동안 물 속에 있었어. 그런데 자꾸 내 신발을 툭툭 치는 건 누구지? 넌 누구야?
정말 어마어마하게 크군. 내 눈을 믿을 수가 없어. 빨리 아버지에게 말해줘야 할 텐데. 아버지 늙은 여우를 봤어요. 전선줄처럼 뻣뻣한 수염이 내 얼굴을 건드렸어요. 저건 늙은 여우가 분명해. 저렇게 커다란 메기가 어디 흔해? 늙은 여우는 커다란 입으로 나를 툭툭 건드려보고는 그냥 헤엄쳐갔어. 꼬리 지느러미가 내 몸을 쳤는데 그 바람에 내 몸은 물 속에서 곤두박질쳤지. 큰 몸집이 강울을 헤집고 나갈 때마다 꼬리 지느러미 뒤로 물살이 나위어지던 걸. 쟁기로 밭을 갈아 속의 붉은 흙이 드러나는 것처럼 말야. 몸길이가 적어도 내 키만은 할 거야. 낚시꾼들의 이야기가 단지 허풍만은 아니었던 모양이야. 비늘 하나 없는 저 만질만질한 살갗좀 봐. 어떤 낚시 바늘로도 늙은 여우를 잡을 수는 없을 거야. 비가 오니까 수면 위로 떠오른 모양이야. 아마도 난 늙은 여우를 가까이에서 본 최초의 인간일 거야.
난 디카프리오의 브로마이드를 받지 못했어. '로미오와 줄리엣'에 나온 한 장면인데 말야. 디카프리오가 총구를 자신의 이마에 대고 분노에 차서 소리를 치는 사진이야. 미선이는 날 기다리다가 아마 집으로 돌아갔겠지.
미선이가 일하고 있는 카페 붉은 공은 새벽 두 시가 넘어야 문을 닫지. 두터운 스폰지를 댄 붉은 융단 문 안으로 난 한 번도 들어가본 적은 없어. 가게 밖에 서 있는 날 만나기 위해 미선이가 문을 열고 나올 때마다 카페의 내부가 잠깐잠깐 보이기는 해. 문일 열릴 때면 문 너머에서 요란한 음악이 흘러나와. 두터운 스폰지 문은 아마 방음장치 역할을 하는 것 같아. 미선이 말로는 그 브로마이드를 여러 애들이 탐을 내고 있다는 거야. 빨리 오지 않으면 다른 아이의 차지가 될 거라구.
미선이는 중학교 동창이야. 아까 한 여름동안 15센티미터의 키가 컸다는 애 있지? 그 애가 바로 미선이야. 미선이는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학교를 관뒀어. 아니 짤렸다는 말이 맞을 거야. 학교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우다 그만 짱구에게 걸렸지 뭐야. 유기 정학의 기간이 끝나고도 그 아인 학교로 돌아가지 않았어. 그 애 말로는 학교에서 더 이상 배울 게 없다는 거야. 내가 학교에서 푹 썩고있는 동안 자긴 일찌감치 부자가 되어 있을 거나나? 그 앤 붉은 공의 여급이야. 붉은 공의 그 두터운 문 안에서 미선이가 무슨 일을 하는지 난 묻지 않아. 하여튼 그앤 이제 처녀같아. 167센티미터의 키에 반짝이는 짧은 원피스를 입고 높은 굽이 구두를 신었지. 얼굴에는 짙은 화장을 하고 말야. 야간 학습이 끝나 집으로 돌아올 때면 난 가끔 붉은 공 앞을 지나. 미선이가 어두운 골목에서 쭈구리고 앉아 토악질을 하고 있는 걸 본 적도 있어. 미선이는 벌써 늙어버린 것 같아. 그앤 날 애 취급하지.
엄만 내가 그 애와 어울린다는 걸 알면 가만 두지 않을 거야.
맞아. 난 그날 미선이를 만나러 가고 있었어. 엄마는 마당에 앉아 내일 시장에 들고 나가 팔 나물들을 다듬고 있었어. 요즘 주부들은 귀찮은 걸 싫어해서 다 다듬고 데쳐까지 놓은 나물이어야 잘 사간다는 거야.
엄마는 아버지 공장에서 받은 약간의 위로금으로 시장에 가게하나를 세내었어. 통닭집이야. 아니. 예쁜 간판이 걸린 체인점은 아냐. 엄마 가게엔 간판도 없어. 가게앞엔 특란, 영양란, 통닭이라고적을 글씨가 전부야. 투명한 유리가 덮인 냉장고 속에는 털을 벗긴 핑크색 닭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어. 엄마는 전대를 두르고 하루 종일 커다란 튀김솥 앞에 앉아 있지. 머리카락은 튀김솥에서 올라오는 김 때문에 항상 끈적끈적하지. 전에 멈마는 그러지 않았어.아빠가 두 손을 잃어버리기 전에는 말야. 잔소리는 좀 하는 편이었지만 그 잔소리도 고양이 울음소리 같았거든. 소설책은 아니지만 가끔 여성 잡지 같은 것을 들여다보기도 했지.
엄만 180도 변했어. 닭 좀 튀겨가요. 서방님 술 안주로 그만야. 처음 본 사람들에게 말도 잘 붙이지. 목소리는 또 얼마나 우렁찬지.생닭을 통나무 도마위에 올려놓고 뭉툭한 무쇠칼을 내리쳐 닭을 토막낼 때면 엄마는 정말 내게도 낮선 사람으로 보여. 엄마가 토만내는건 닭이 아닌 것 같아. 엄만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을 토막내고 있는 것 같아.
엄마가 자꾸 내게 화풀이를 하는 건 아마 하기 싫은 일을 하기 때문일 거야. 엄마에게 아울리는 건 수예점이나 화장품 가게 같은 것일텐데 말야. 하지만 그런 장사로는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대. 이런 불경기에는 아무래도 먹는 장사가 제일이라는 거야. 엄마 말로는.
삶은 나물들을 같이 팔기 시작한 것은 얼마되지 않았어. 엄만 장사 수완이 뛰어난가 봐. 엄마는 가끔 날 가게로 불러내. 손님들이 사가지 않는 닭똥집이나 닭발 따위 같은 걸 집으로 가져가라는 거야. 난 가게에 가기 싫어. 엄마 가게 앞에는 돼지의 통머리며 돼지 내장이 담긴 솥이 놓인 가게가 줄지어 서 있거든. 그곳의 아주머니들은 다들 목소리가 우렁차. 술 손님들에게 농담도 잘하고 욕설도 쉽게 내뱉지.
가게에 생닭을 떼어다주는 젊은 남자가 있어. 엄마 심부름으로 가게에 갔다가 몇 번 본 적이 있디. 난 그 남자가 싫어. 누님. 달 한마리만 튀겨주쇼. 양념으로다가 . 닭을 넘겨주면 빨리 갈 일이지 그 남잔 매번 가게에 앉아 있다가 가고는 하는 모양이야. 엄마는 그 남자와 아주 친한 사인가 봐. 닭을 토막내고 기름솥에 던져넣어 닭이 익기를 기다리는 내내 엄만 그 남자와 농담을 주고 받았어. 그럴때면 엄마의 목소리른 예전처럼 가늘어지는 거야. 튀긴 닭이 든 알루미늄 봉투를 건네주면서 엄마는 그 남자의 허벅지까지 치더라니까. 정말 엄만 변해도 너무 변했어.
미선이는 굳이 밤에만 자기를 찾아오라는 거야. 낮 동안에는 밀린 잠을 자야 한다고 했어. 저녁을 먹은 설거지를 하는 내내 나는 브로마이드 생각만 했어. 난 디카프리오가 제일 좋아. 디카프리오가 나오는 영화는 찾아서 다 보았지. 자꾸 그릇들을 헛집어 소리가 날 때마다 엄마가 눈을 흘겼지. 난 대충 그릇들을 씻어 물 빼는 망에 얹어놓고 허둥지둥 옷을 갈아입었어. 지금 입고 있는 이 점퍼 말야. 아, 낚시 바늘이 뚫어놓은 이 구멍은 어떡하면 좋다지? 내가 옷을 갈아입으니까 마당에 따로 만든 아궁이에 장작을 넣어 솥의 물을 끓이고 있던 엄마가 투덜거렸어. 다 큰 계집애가 어딜 그렇게 쑈다녀? 도대체 누굴 닮았는지. 방안에 누워 있는 아버지가 들으라고 하는 소리야. 아버지는 낚시광이야. 물론 손을 다치기 전에 말야. 대문을 나서는 내 등에 대고 엄마가 다시 꽥 소리를 질렀어. 아홉시 까지는 들어와. 늦게 들어왔단 봐라. 엄만 집에 와서도 시장에서처럼 소리를 지른다니까. 엄마, 시험이 바로 낼모레예요. 빨리 들어오잖구요. 아홉시 까지도 필요없어요. 여덟 시면 충분해요. 미선이와는 일곰 시에 붉은 공 문앞에서 만나기로 했거든. 일곱시면 미선이에게는 제일 한가한 시간이야.
국도 위에는 가로등이 띄엄띄엄 서 있었어. 양쪽이 산기슭과 강으로 막힌 국도는 겨우 차 두 대가 지나다닐 만한 좁은 일차선 길이야. 안전한 보도가 있는 큰 길이 있었지만 난 지름길을 택하기로 한거야. 헤드라이트 불빛을 밝힌 자동차들이 내 옆으로 쏜 살같이 지나쳐갔지. 그럴 때마다 먼지가 섞인 바람이 내 머리칼을 다 헝클어놓았어. 하늘엔 달도 떠 있지 않았어. 길이 너무 어두웠어. 저쪽 산 모퉁이에서 자동차 한 대가 나타났지. 차는 두개의 차선을 점령하고 지그재그로 달려오고 있었어. 차가 지그재그로 달려오는 이유를 안 건 조금 뒤였어. 그 차 뒤에 다른 차 한 대가 바싹 따라붙고 있었어. 저러다 차들이 충돌하는 건 아닐까. 적어도 차는 시속 150킬로미터로 달려오고 있는 것 같았어. 두 대의 차는 자기들끼리 클랙슨을 눌러대며 속도를 냈지. 앞차는 뒤의 차가 추월하지 못하도록 앞을 막으면서 지그재그로 달려오고 있엇어. 한눈에도 그 두 대의 차는 경주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어. 반대편 차선으로 마주 달려오는 차들이 있을 때면 가까쓰로 차선 안으로 들어갔다가 차가 사라지면 다시 지그재그로 달리는 거야. 두 대의 차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속력을 높이고 있었어. 나는 차를 피하려 길가로 바싹 비켜서서 차가 지나갈 때까지 멈춰서 있었지. 상향등으로 조정해놓은 헤드라이트 불빛이 눈을 찔렀어. 불빛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어. 순간 무언가 둔탁한 것이 내 옆구리를 사정없이 치고 달아났지. 난 길에서 벗어나 언덕 아래로 튕겨나갔어. 내 옆구리를 친 건 아마도 그 차의 백미러였나 봐.
허리뼈가 탈골되었나 봐. 일어서려 했지만 일어설 수가 없던 걸.풀숲은 축축했고 나무 둥치에 얼굴이 긁혔어. 저 멀리 사라졌던 차 두 대가 후진으로 달려와 멈춰섰어. 언덕 위에 선 두 사람이 그늘진 언덕 아래를 내려다보았어.
재수 옴 붙었군.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한 사림이 소리나게 언덕 아래에 대고 침을 뱉었어.
야, 경주에서 진 건 너니까 네가 내려가봐.
마지못해 떠밀려 언덕을 내려오면서도 젊은 남자는 계속 욕지거리를 내뱉었어. 젊은 청년이 발을 헛디딜 때마다 잘디잔 돌들이 내 등 위로 굴러 떨어녀 내렸지. 억센 손이 내 어깨를 잡아 흔들었어. 이봐요, 괜찮아요? 젠장. 위에 선 누군가가 작은 소리로 물었어. 살아 있어? 억센 손이 나를 들쳐업었어. 내 허리가 기역자로 꺾어졌지. 죽, 었, 어? 언덕 위에서 기다리고 있던 다른 청년이 나를 받아 끌어올리면서 침을 꿀꺽 삼켰어. 야, 빨리 병원에 가야 할 것 같은데? 이 새끼, 제정신이야? 너 무면헌 거 잊었어? 인생 망치고 싶어? 여하튼 빨리 실어. 사람들 눈에 띄면 골치 아파진다구. 젠장. 억센 손들이 날 차의 트렁크에 쑤셔넣었어. 트렁크는 차 윤택제와 타이어, 기름 걸레 따위로 가득차 있었어. 내 몸이 트렁크에 꽉 끼었어. 여보세요. 난 살아 있어요. 살려주세요. 내 말으 알아듣지 못한 것 같아. 차가 달려 멈춰선 곳은 강가였어. 내가 트렁크 속에 들어 있다는 걸 잊어버렸는지 그 사람들은 한참 동안 싸웠어. 트렁크가 열리고 그들을 날 질질 끌고가 강 속으로 던져넣었지.
초등학교 2학년 때 말야. 그애 이름은 까마득히 잊어버렸어. 책상의 금을 넘어온다고 자주 싸우던 남자 짝이 있었어. 책상 중앙에 선을 그어놓고 그 금을 넘어오면 나는 괜히 짜증을 부리고는 했지. 여름 방학이 끝나고 학교로 돌아왔을 때 난 이상 그애와 싸울일이 없어졌어. 여름 방학 때 시골 외갓집으로 놀러간 그 아이가 저수지에서 멱을 감다가 물에 빠졌다는 거야. 우리는 선생님 지시하에 10분동안 묵념을 했어. 우는 아이도 있었지. 하지만 10분 동안의 묵념을 끝으로 우린 완전히 그애를 잊어버렸어.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 우리는 우르르 운동장으로 뛰어나가 깔깔거리면서 뛰어놀았지. 그땐 죽음이라는 게 뭔지 잘 몰랐으니까. 죽는 게 뭐냐고 물으면 어른들은 하늘나라에 가는 거라고 말해주었거든. 책상 위에는 그 애가 칼로 파놓은 그림과 글씨들이 아직 남아 있는데 그애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없는거야. 그 애는 고작 9년을 살았어.
엄마 대신 저녁밥을 지을 때 말야. 김치를 썰거나 파를 썰던 칼을 슬며시 내 손목 위에 얹어본 적이 있었어. 세수를 할 때 대야속에 얼굴을 담근 채로 숨을 참아봤을 떄도 있었지. 학교 운동장에서 건물 꼭대기 위를 쳐다볼 떄면 마구 계단을 뛰어올라가 옥상에서 아래로 추락하고 싶은 떄도 있긴 했어. 하지만 난 이제 겨우 열여섯 살인 걸. 올 여름이 지나면 아마 키도 훌쩍 커 있었을 테고 말야.
경주 할머닌 아마 돌아가실 걸 미리 짐작하셨던 모양이야. 얘, 돼지고기 좀 구어주련? 갑자기 며느리에게 고기 반찬을 해달라고
하셨대. 평생 입에 대지도 않던 돼지고기를 말야. 두 개 남은 이로 돼지고기를 아주 달게 잡수셨다는군.
내 초등학교 짝은 9년을 살았고 경주 할머니는 82년을 살았어. 난 열여섯 살이야. 난 고작 16년을 산 걸까. 아니면 16년이나 산 걸까. 속도가 느려지는 걸 보면 강 하류에 다 다가가나봐.
날 발견한 것은 강가로 산책을 나온 젊은 여인들이었어. 강가언덕의 둔치는 사람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이야. 두 사람은 언덕의 오목 파인 구멍 속으로 들어갔지. 그들은 쪽 소리나게 입을 맞췄어. 남자의 손이 여자의 옷 속으로 파고들어가 가슴을 더듬었어. 입을 맞추는 느낌은 어떤 것일까. 미선이는 아마 깔깔거리며 웃을거야. 넌 여태 키스도 못 해봤니? 놀려댈 테지. 둘의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했어. 그때 여자의 붉게 충혈된 두 눈에 우연히 내가 들어온 거야. 여자의 두눈이 활짝 열리는 순간 새된 외마디 비명이 울렸지.
더 이상 나를 떠밀고 갈 물이 없어, 이곳은 모래들이 퇴적되는 곳이야. 거친 돌들을 찾아볼 수 없지, 고운 모래들이 켭켭히 쌓여 있어. 내 머리는 커다란 바위 틈 사이에 끼어 있었어, 물살이 밀려올 때마다 내 점퍼가 둥실 떠올랐지, 겁게 질린 여자가 울기 시작했고 남자가 내쪽으로 조심스럽게 다가왔지. 아마도 남자는 반쯤 물에 잠긴 내 뒷모습을 발견한 모양이야. 남자가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졌고 슬금슬금 뒷걸음질치기 시작했어. 이렇게 흉측한 모습으로 발견되고 싶지는 않았는데.
사이렌 소리가 나. 경찰들이 온 모양이야. 결찰들이 날 꺼내 맨 땅 위에 바로 눕혔어. 햇살이 따뜻해. 사람들이 모여드는군. 경찰들이 내 호주머니를 뒤져. 하지만 호주머니는 텅 비어 있을 거야. 차에 튕겨 언덕 아래로 떨어질 때 호주머니 속에 든 지갑이 빠져 나와 잡풀 속에 떨어져버렸거든. 그곳에는 늘 쓰레기들이 가득하지. 지나치는 차들이 음료수 깡통이며 과자 봉지 따위를 함부로 버린 탓이야. 주민등록증 같인 것 없어? 서 있던 경찰이 담배를 피워물며 호주머니를 뒤지는 경찰에게 물어. 아무것도 없습니다. 대체 누가 이런...... 호주머니를 뒤지던 경찰의 목소리가 잠깐 불거졌어, 그는 내 점퍼 목덜이메 그때까지 꽂혀 있던 낚시 바늘을 발결하고 빼주었어. 아마 그 경찰은 내 또래의 막내 여동생을 떠올렸는지도 몰라. 난 아직 고등학교 일학년생이야. 주민등록증은 내년, 내 생일을 지음해서나 발급 받게 될 거야.
아, 이 악취는 내몸에서 나는 모양이야. 내 몸은 벌써 부패하기 시작했다고 누군가 속삭이는 것을 들었어. 아, 이 강물이 내 몸을 이렇게 더럽혀 놓았어. 내 얼굴을 내가 볼 수 없다는 게 천만다행이야.
지갑 속에는 학생증이 들어 있을 텐데. 어쩌면 지갑이 잡풀 속에 떨어졌다는 생각은 내 추축일지도 몰라. 어쩌면 난 내 지갑을 내 방 책상 위에 올려둔 채 나왔는지도 모르지. 이 점퍼는 새 것 이거든. 옷을 갈아입다가 지감을 주머니 속에 넣는다는 걸 깜박했는지도 몰라. 지금은 아무것도 생각이 나질 않아. 아, 이 강이 내 기억력을 다 가져간 모양이야.
경찰들이 나를 차에 실엇어. 그들이 나에 대해 알 수 있는 건 내가 아끼는 인조 가죽 점처와 반 청바지, 그리고 운동화, 내가 목에 걸고있는 십자가 목걸이, 그리고 진흙물이 밴 흰색 면셔츠 뿐야.
그런데 강가에는 분명 그 꽃들이 필 모양이야. 하얗게 무리지어 핀 그 꽃 말야. 차가 속력을 내. 꽃들이 빨아넌 호청들처럼 나풀거려.
엄만 시장에 있을까? 나를 기다리던 미선이가 집으로 전화를 했을지도 몰라. 미선이란 친군 걸 알면 엄마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 엄마는 아마도 내가 가출을 했다고 생각할 거야. 나쁜 친구와 어울리더니 나뿐 물이 옮은게 틀림었다고 할 테지. 엄마는 가게문까지 닫고 근처의 주유소 같을 델 뒤지기 시작했을 거야. 그런데 아버지 세수는 누가 시켜줄까.
차가 서서히 시자기 안으로 진입하기 시작해. 차 속도가 떨어지잖아. 이 도시는 내게 너무도 친숙한 곳이야. 난 이곳에서 나고 이곳에서 자랐거든. 멀리 학교 건물이 보이는 것 같아. 지금 운동장엔 아이들이 열을 지어 달리고 있을거야. 짧고 굵게. 짧고 굵게. 아이들이 외치는 구령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아.
이제야 혀 끝에 맴돌던 그 이름이 생각났어.
개망초꽃이야. 아버지 낚시 따라갔다가 본 강가에 무더기로 핀 그 꽃 말이야. 온몸에 솜털이 나고 아주 작은 꽃들이 뭉쳐서 피지. 그런데 개망초 꽃이 왜 벌써 피었을까? 지금은 초봄인데, 모든 게 뒤죽박죽이야. 여하튼 그 꽃은 개망초꽃이 분명해. 아릿하게 풀 비릿내가 나던 걸.
내가 그 들꽃 이름을 기억해낸 것처럼 누군가 내 이름을 기억해주었으면.
< 출처 : 잊혀진자의 고백/ 올린이 : 김태욱 김가영 김준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