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겨운 옛 한국 사진 3
Seoul, Korea, 1966
photographer Kathryn McNeil
Namdaemun Market 남대문시장에서 지겟꾼
제주도 [Jeju Island, 濟州島] Korea, 1966
photographer Kathryn McNeil
Korea, 1966
photographer Kathryn McNeil
Korea, 1966
photographer Kathryn McNeil
Korea, 1966
photographer Kathryn McNeil
On a picnic 소풍
Korea, 1966
photographer Kathryn McNeil
Planting vegetables 밭에서 야채를 심고 있습니다.
Korea, 1966
photographer Kathryn McNeil
Woodcutter with jigae 산에 나무하러 갑니다.
Korea, 1966
photographer Kathryn McNeil
Korea, 1966
photographer Kathryn McNeil
Woman hanging laundry 빨래를 너는 아낙네
부산시 [Busan, 釜山市] , Korea, 1968
사진 최민식1928 - 2013
부산 용두산공원 입구
Seoul, Korea, 1969
길거리 과일장수
photographer Neil Mishalov
Seoul, Korea, 1969
photographer Neil Mishalov
명동 [Myeong-dong, 明洞] Seoul, Korea, 1969
이병철 어머님께서 명동에서 미용실하셨는데....
photographer Neil Mishalov
Korea, 1968
photographer Unidentified
지렛대식 인력분무기 이용 병충해 방제
Korea, 1960's
충북-영양개선 시범마을 순회 요리 연시교육
Korea, 1970
제천 마을의 탁아소...(제천이면 누가 살았더라? )
Korea, 1967
일선장병 위문차 전방 마을 도착한 영화인들
좌로부터 김진규, 고은아,신영균, 황정순,문희, 허장강, 박암, 신성일
추석귀성 [秋夕歸省] Korea, 1969
콩나물시루 같은 객차에 그나마 타지 못한 귀성객들은 기관차에 매달려서라도 고향에 가야겠다고 두아낙의 몸부림이 안타깝다. 1969년 9월 24일
대구 [Daegu, 大邱], Korea, 1967
1967년 4월 17일 제6대 대선 신민당 윤보선 후보 (가운데 손 흔드는 이)와 유진오 당수를 앞세운 유세반이 대구시가를 도보로 행진하고 있다.
안양 [Anyang, 安養] , Korea, 1968
Photographer Neil Mishalov 아이스크림 사먹으려고 모여든 아이들
오산 [Osan, 烏山] , 1968
photo Neil Mishalov
경주시 [Gyeongju-si, 慶州市] , Korea, 1968
Photographer Pal Meir
종로 3가 Seoul, Korea, 1968
옛날에 종3 유명했는데....ㅎㅎ
금호동 [Geumho-dong, 金湖洞] Seoul, Korea, 1969
Photographer Homer Willams
물길어오는 여인과 아이스케키통을 들고 가는 소년의 모습
서울특별시 성동구에 속한 동이다. 응봉산 서쪽 기슭에 있으며, 남쪽은 한강과 접해 있고, 북쪽은 하왕십리동·행당동, 서쪽은 신당동·옥수동과 마주하고 있다.
옛날 이 마을은 무수막, 무쇠막, 무시막 등으로 불렸고 한자로 수철리(水鐵里)라고 하였는데, '금' 자는 수철리의 '철'에서 나오고, '호' 자는 '수' 자에서 인용하여 이름 지어졌다. 이곳을 무수막이라고 부른 것은 조선시대에 선철을 녹여 무쇠솥, 농기구 등을 주조해서 국가에 바치거나 시장에 내다 파는 사람들과 대장간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전에는 왕십리 배추장수와 함께 물쇠골 솥장수라는 말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남부 두모방 수철리계(水鐵里契) 지역이었다. 1911년 경성부 두모면(豆毛面) 수철리로 불렸고, 1914년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漢芝面) 수철리로 되었다. 1936년 경성부에 편입되면서 금호정(金湖町)으로 되었고, 1943년 성동구에 속하였으며, 1946년 금호동으로 바뀌었다. 1964년 금호1, 2, 3, 4가의 4개 동으로 분할되었다. 법정동인 금호동은 행정동인 금호1가~4가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지역은 옛날에는 다른 지역보다 지형이 가파르고 기복이 심해 인구가 많지 않았다. 척박한 토지를 잘 활용하여 과수원을 일구어 많은 수익을 올리던 곳으로 복숭아가 많이 났다. 금호2가동은 대부분 지역이 구릉지대로서 금호초등학교 주변 일대는 금호3가동의 금남시장 자리와 함께 수철리 공동묘지였다.
금남시장 자리를 논골이라 불렀는데, 이는 대부분 산간지대로 밭만 있던 곳인데 이곳에만 논이 약간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금호4가동 한강변에는 조선시대에 무수막 나루터 또는 수철리 나루터가 있어서 강 건너 압구정 나루와 연결되었다. 용비교 밑은 여울목을 이루어서 용이 승천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군사 원호청 유가족자녀 중학교 입시광경 1961
1968년 중학교 입시제도 폐지
1968년 7월 15일 중학교 입시제도가 폐지되었다.
이 조치는 초등학교(국민학교) 교육 정상화를 위한 것으로 1969년 서울을 시작으로 1971년까지 단계적으로 입시제도가 페지되고 추첨제가 도입되었다.
양평동 [Yangpyeong-dong, 楊坪洞] Seoul, Korea, 1968
사진 홍순태
양평동에서 광명 철산리 가는 뱃길. 양평동 나루터 1968년
안양천을 건너 학교에 가고 직장에 다녔다. 저런 진창을 다녀야 했으니 영등포를 마누라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사는 진동포라고 했다.
서울특별시 영등포구의 북쪽에 위치한 동이다. 법정동이자 행정동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양천현(陽川縣)의 군명 중 하나로 양평이 수록되어 있다. 『조선지도』 「경기도금천지도」에 한강을 넘나드는 해로로 양화진이 표시되어 있다. 『대동여지도』에 선유봉(仙遊峰) 옆에 양화진이 표기되어 있다. 『
1872년지방지도』 「부평부지도」에서도 양화진을 볼 수 있다. 한양과 부천을 잇는 교통로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사료에서 볼 수 있듯이 양평동은 고려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설치되어 있어 서민들의 한강도상의 중요한 통로가 되었던 양화진(楊花津) 근처의 벌판에 이루어진 마을이란 뜻에서 온 것임을 엿볼 수 있다.
즉 양화진과 벌평에서 한 글자씩 따서 양평동(楊坪洞)이 된 것이다. 조선 시대에는 경기도 금천현 상북면 양평리였다. 그 사실을 『호구총수』에서 확인할 수 있다. 1895년에는 인천부 금천군 상북면에, 1896년에는 경기도 시흥군 상북면에 속하였다.
1914년 경기도 시흥군 북면 양평리가 되었고, 1936년에는 경성부에 편입되어 영등포출장소 관할의 양화정이 되었으며, 1943년 영등포구 관할이 되었다. 1946년에 양평동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사근동 [Sageun-dong, 沙斤洞] Seoul, Korea, 1969
사진 김기찬 金基贊, 1938-2005
동쪽의 용답동, 서쪽의 행당동, 북쪽의 마장동과 접해 있으며, 남쪽으로는 중랑천과 청계천이 합류하는 전관천(箭串川)이 한강으로 흐른다.
신라시대 이 지역에 세워진 사근사(沙斤寺)에서 동 이름이 유래하였다. 매우 낡았기 때문에 삭은절이라고도 하였다. 지금의 한양대학교 HIT연구센터 부근이다.
안양시 [Anyang-si, 安養市] Korea, 1968
Photographer Neil Mishalov 아낙네가 부억에서 밥상을 차리고 있습니다.
경주시 [Gyeongju-si, 慶州市], Korea, 1968
신라 문화재 - 왕릉 위 구경꾼들
경주시 [Gyeongju-si, 慶州市], Korea, 1968
사진 정범태 1928 ~
신라 문화재 - 왕릉 위 구경꾼들
Korea, 1960-1966
Photographer Robert Garfias 남녀 학생들이 미팅을 가지고 있습니다.
Korea, 1960-1966
Photographer Robert Garfias
가인전 목단 이라는 궁중정제(무용)의 무희와 화준
. 현제도 공연되고 있으며 국립국악원에서 kbs출신들의 모습
Korea, 1960-1966
Photographer Robert Garfias 놀이기구로 동네아이들을 태우고 있습니다.
Seoul, Korea, 1966
Photographer Stephen Dreher
대한 청소년 개척단 125쌍 합동결혼식, Korea, 1963
충남 서산군 모월리에 있는 대한 청소년 개척단 광장에서 125쌍의 합동 결혼식
불량 청년들과 윤락녀였던 사람들의 결혼식
Seoul, Korea, 1965
Photographer Stephen Dreher
의정부시 [Uijeongbu-si, 議政府市], Korea, 1966
Photographer Stephen Dreher
Seoul, Korea, 1966
Photographer Stephen Dreher
Artificial flower sellers. (Myong-dong or near it).
청주시 [Cheongju-si, 淸州市], Korea, 1966
1966년 무심천 제방공사 현장 모습
Korea, 1967
사진 김석배 1925 ~
부산 기장 "미역 좁는 여인들"
한남동漢南洞 나룻터 Seoul, Korea, 1969
cross a ferry in a boat Hannam-dong, 1969
강남사는 주민이 나룻배로 서울에 출근
멀리 보이는 산 관악산옆 삼성산
1969년 제 3한강교 개통으로 사라진 풍경
새말 나루터 - 강남구 신사동에 있던 나루터, 새말에서 한남동으로 건너가는 나루터였던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한자명으로 신사도선장이라고 하였다.
한강에는 일찍부터 광나루(廣津), 삼밭나루(三田渡), 서빙고나루(西氷庫津), 동작나루(銅雀津), 노들나루(露梁津), 삼개나루(麻浦津), 서강나루(西江津), 양화나루(楊花津) 등이 있었다.
특히 광나루·삼밭나루·동작나루·노들나루·양화나루는 한강의 5대 나루로 손꼽혀 일찍부터 각종 물품과 사람들의 집합장소로서 유명하였다.
한가지 주목할 만한 사실은 오늘날 많은 다리들이 가설되면서 나루가 사라졌지만 가설된 다리의 위치가 대부분 조선시대 나루가 있었던 곳이라는 점이다.
즉 광나루에는 광진교와 천호대교가, 삼밭나루에는 잠실대교가, 뚝섬나루에는 영동대교가, 두모포에는 동호대교가, 입석포에는 성수대교가, 한강나루에는 한남대교가, 서빙고나루에는 반포대교가, 동작나루에는 동작대교가, 흑석진에는 한강대교가, 노량진에는 한강철교가, 용산진에는 원효대교가, 마포나루에는 마포대교가, 서강나루에는 서강대교가, 양화나루에는 양화대교와 성산대교가, 공암나루에는 행주대교가 각각 가설되어 있는 것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이는 과거와 현재 모두가 한강의 지리적 잇점과 남북을 연결하는 교통로의 역할이 가장 많은 곳에 다리와 나루를 설치하였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
Korea, 1968-1969
사진 전몽각
고속도로 건설 현장, 영천공구, 1968-1969년
Korea, 1966
Photographer Dave Hazelton
Korea, 1966
Photographer Dave Hazelton
Korea, 1966
Photographer Dave Hazelton
Seoul , Korea, 1967
photographer Unidentified
Seoul , Korea, 1968
한강 건설 공사현장 시찰
Seoul , Korea, 1960's
서울 창경궁 앞, 홍화문 앞길. 썰매타기.
명동 [Myeong-dong, 明洞] Seoul , Korea, 1970
동부이촌동 [東部二村洞] Ichon-dong, Seoul, Korea 1966
1966년 7. 1
현재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용산구 동부 이촌동 한강 백사장 모습
이촌동 세 마을(서부,중부,동부이촌동) 중 동쪽에 있는 데서 유래됨.
이촌동은 한강대교 북쪽, 한강변 좌우에 위치해 있으며, 조선말까지도 모래벌판이었다. 그래서 여름에 큰 장마가 지면 강 가운에 섬을 이루고 살던 사람들이 홍수를 피해 강변으로 옮겼던 관계로 동명도 ‘이촌동’(移村洞)으로 불리다가 일제 때, 이촌동(二村洞)으로 개칭되었다.
조선시대 초에 한성부의 성저십리에 속했으나 1751년 영조 27년에 한성부 서부 용산방(성외) 사촌리계·신촌리계로 칭하다가 갑오개혁 때 서서 용산방(성외) 사촌리계의 사촌리, 신촌리계의 신촌동으로 되었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 후 1911년 1월 4일, 일제는 이촌동 지역 중에서 신초리를 경기도 경성부 한지면으로 편입하고 나머지는 용산면에 소속시켰다.
이어서 1913년 12월 11일에 경성부 서부에 편입하고, 1914년 4월 1일 경성부 이촌동으로 하였다. 1936년에 이촌동은 이촌정으로 개칭되었다가 1943년 6월 10일 용산구에 속했다가 1946년 10월 1일 일제식 동명칭 정리로 이촌동이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