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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행운의 법칙 스크랩 현대사회문제와 기독교적 답변 / 존 스타트
김박사 추천 0 조회 148 08.05.05 09:1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현대사회문제와 기독교적 답변

저자 : 존 스타트

영국 런던의 All Souls Church 교구 목사 역임.

(현) 런던 현댜기독교 연구소 소장

저서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기독교의 기본 진리」 등 다수가 있다.

저자인 존 스타트는 탁월한 복음 전도자이며 학자인 동시에 뛰어난 저술가로서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강력하고 혁신적인 목회사역을 수행하였으며 영국을 비롯한 범세계적인 복음주의 지도자로서 로잔 언약(1974)의 입안자중 한 사람이었고, 로잔회의 및 복음주의적 개신교와 카토릭 간의 대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왔다.

저자인 존 스타트는 약 50년 동안(1920-70) 복음주의 운동들은 자유주의의 “사회 복음”(social gospel)에 반하는 일에 주력해 왔다. 이로 인해 반세기 동안의 사회 문제에 대한 우리의 무관심으로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사명과의 간격이 노무도 멀리 떨어졌다. 본서는 그 간격을 따라잡기 위한 저자 자신의 한 시도이다.

제 1 장 사회 참여 : 그것이 우리의 관심사인가?

1. 사회참여는 복음주의적 유산

18세기 복음주의 신앙 부흥 운동은 미국과 영국 두 사회 모두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복음주의 신앙 부흥 운동으로 인해 새로워진 사회의 양심은 박애정신을 널리 보급시켰으며 이것이 사회를 변화시켰다. 역사가들은 영국이 프랑스에서와 같은 유혈혁명의 공포를 겪지 않은 것은 웨슬리의 영향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웨슬리가 복음 전도자인 동시에 사회 정의를 외치는 선지자였기 때문이었다. 사회 참여는 복음주의적 종교의 자식이며 복음주의의 상동이었다.

2. 대반전의 원인들

금세기 초기 30년, 특히 제 1 차 세계대전 후 10년 동안에 “대 반전”(The Great Reversal)이라고 부르는 일이 복음주의적 그리스도인들에게 발생했다. 복음주의자들이 사회적 책임을 등한시하였던 그 이유는 1) 세기가 바뀌면서 유럽과 미국의 교회들을 휩쓸고 있던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반동과, 2) 복음주의자들의 당시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발전시키고 있던 소위 “사회 복음”에 대한 반발, 3)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 인간의 사악함이 드러나면서 널리 퍼지게 된 환멸과 염세주의 때문, 4) 전천년설의 (특히 다비의 가르침과 스코필드 성경에 의한 보급을 통한) 확장이며, 5) 기독교가 중산층에 전파되었다는 것인데 그들은 기독교를 자기들의 고유문화와 동일시함으로서 기독교를 약화시키는 경향이 있었다. 전세계의 복음주의 지지자들에게는 1974년 7월, 스위스 로잔에서 열린 세계복음화 국제회의가 그 전환점이었다.

3. 교회와 정치

교회의 「정교분리」는 항상 큰 찬반이 있다. 이 논쟁에는 몇 가지 문제가 포함되어 있는데, 1) “정치”(politics)라는 말의 정의다. 2) 정치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의 관계에 관한 것으로 왜 그것들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가 하는 것이다. 3) 우리는 일부 사람들이 교회가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반대하는 이유와 그들이 고수하려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4) 기독교의 정치적 책임은 누구에게 속하는가 하는 것을 물을 필요가 있다.

4. 사회참여에 대한 성경적 근거

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과 사회문제에 참여해야 하는가? 그에 대한 해결책으로 성경이 말하는 커다란 다섯 가지 교리는 보다 완전한 신론, 보다 완전한 인간론, 보다 완전한 기독론, 보다 완전한 구원론, 보다 완전한 교회론 등으로 그들 중 어느 하나만 가지고서도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을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1) 보다 완전한 신론 : 첫째로, 살아계신 하나님은 종교와 마찬가지로 자연의 하나님이며, 신성한 것과 마찬가지로 세속적인 것의 하나님이다. 둘째로 살아게신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며, 또한 창조의 하나님이시다. 셋째로, 살아계신 하나님은 칭의의 하나님일 뿐 아니라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2) 보다 완전한 인간론 : 하나님을 닮은 인간이라는 피조물은 단지 영혼뿐이거나, 육체뿐이거나, 사회적 존재뿐인 것은 아니다. 그들은 이 세가지를 모두 합친 존재이다. 인간은 성경적 관점에서 볼 때, “사회 속의 영혼과 육체”라고 정의되어야 한다.

3) 보다 완전한 기독론 : 하나님의 아들은 하늘의 안전한 곳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영광을 버리고 섬기기 위하여 낮아졌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복음을 선포했을 뿐 아니라, 병든자들을 고쳐 주고, 굶주린 자들을 먹이고, 죄 지은 자들을 용서해 줌으로써 그 나라가 임했음을 보여 주었다.

4) 보다 완전한 구원론 : 구원은 세가지 측면, 즉 지금 시작하고, 이 지상생활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어 그리스도가 재림할 때 완전해지는 근본적인 변화이다.

5) 보다 완전한 교회론 : 교회는 이중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 모습을 되찾아야 한다.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불리워져 하나님께 속하게 도;ㄴ 거룩한 백성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전파하고 봉사하기 위하여 세상으로 다시 보내진다는 의미에서 “세상”의 백성이다.

제 2 장 복잡성 : 우리는 올바로 생각할 수 있는가?

죤 멕케이(John MacKay)는 “행동 없는 사고는 모든 행동의 마비 상태이나 생각 없는 행동은 행동의 광적 상태이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인류가 오늘날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의 복합성-개인 윤리와 사회 윤리의 복잡성-을 과소평가 하지 말아야 한다. 20세기 말의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은 특히 과학 혁명으로 말미암아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그 수와 규모에 있어서 심각하다.

현대의 복잡한 문제점에 접근할 수 있는 기독교적 방법은 그리스도인의 마음을 개발하여 성경의 기본적인 전제들을 확실히 파악하고, 성경의 진리를 충분히 알고 있는 마음으로 만드는 길이다. 그러한 마음만이 현 세계의 문제점들에 대해 기독교적 성실성을 가지고 생각할 수 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마음은 “증거 본문 인용”(하나님은 우리에게 포괄적인 계시를 준데 반하여, 모든 교리나 윤리적인 문제들은 분리된 하나의 본문을 인용하여 형성할 수 있다는 개념)을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그 대신에 성경을 포괄적으로 생각하여야 한다. 성경은 인류 역사를 몇 개의 시대로 나누고 있는데, 그 시대는 네 가지 주요 사건-창조, 타락, 구속, 완성-으로 구분된다. 여기서 네 가지 실재-첫째로 창조(선함), 둘째로 타락(악함), 셋째로 구속(새로움), 넷째로 완성(완전함)에 상응하는 네 가지 사건이 있다. 이 네 가지 성경적 실재는 우리에게 가장 복잡한 문제에 대한 이해를 조정하는 방법, 올바로 사고할 수 있는 가능성 등, 모든 것에 적절한 체제를 제공한다. 특히 그것들 상호간의 관계를 파악하려 할 때엔, 그것은 우리가 가진 기독교적 사고에 방향을 제시해 주시는 하나님, 인간, 사회에 대한 중요한 진리를 가르쳐 준다.

제 3 장 다원론 : 우리의 견해를 강요할 수 있는가?

유럽과 미국, 그리고 서구 “기독교 문명”을 받아들인 연방국가에서는 틀림없이 새로운 다원론과 충돌한다. 다원론은 대체로 두 가지 요인에 기인한다. 첫째는 사람과 관습에 교회가 영향을 발휘하지 못함에 따르는 세속주의의 발전이다. 둘째는, 대전 후 몇 년 동안의 이민 정책을 들 수 있다. 세계의 다른 곳에서는 비록 그리스도인들이 영향력 있는 소수 집단이라 할지라도, 힌두교, 불교, 유대교, 이슬람교, 마르크스주의자, 세속주의자들이 문화를 지배한다. 우리는 참여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며 그 문제들을 그리스도이답게 생각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그 결과 우리는 몇 가지 강한 신념을 제시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은 비기독교 국가나 비기독교인에게 그들의 견해를 강요할 수 있는가?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한 대답은, 1) 법률을 제정함으로써 사람들에게 기독교적 방식을 억지로 받아들이게 하는 “강요”, 2) 사람들을 비기독교적 방식에 방치해 두고 어떤 방법으로도 그들을 간섭하거나 움직이려 하지 않는 폐쇄주의자들의 해결책인 “방임”, 3) 논쟁에 의한 “설득”이다. 이 중에 그리스도인이 채택해야 할 방법은 “설득”인데, 그것은 성경적 신론과 인간론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인간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은 다원화된 사회 속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행동의 방향을 정해 준다. 전자는 방임을 막고, 후자는 강요를 막는다. 하나님의 속성 때문에 그의 진리와 법이 우롱 당하는 것을 보고 무관심할 수 없으며, 인간의 속성 때문에 힘으로 그것을 강요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대중의 양심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것을 행하도록 그것을 교육시켜야 한다. 교회는 국가적 양심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복음 전파에서는 교리적 변증을(복음의 진리를 변증하는:사도들과 같이 하나님의 복음을 이성적인 논쟁으로 사람들에게 전할 때, 자연과 성경을 모두 사용하여 사람들을 설득), 사회 활동에서는 윤리적 변증을(도덕법의 선함을 변증하는) 필요로 한다. 오늘날 교회와 사회 양쪽에서의 변증가들이 절실히 요구된다. 절대주의는 “강요”의 정치적 표현이다. 절대주의는 인간에 대해 완전히 염세주의적인 견해에서 온 것이다. 무정부주의는 “방임”의 정치적 표현으로 생각할 수 있다. 무정부주의는 인간에 대한 순진한 낙관주의적 견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민주주의는 “논쟁에 의한 설득”의 정치적 표현이다.

제 4 장 소외 : 우리는 어떤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가?

현대인의 무력감을 “소외”라는 말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한 단어는 없으며, 소외는 경제적, 정치적으로 무력감을 느끼는 감정이다. 우리는 발전되어 나가는 상황에서 어떻게 손써 볼 길이 없는 방관자일 뿐이다. 이것이 소외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소외감에 빠지고 있다. 사회에서의 기독교 신앙의 퇴조는 우리를 매우 하찮은 존재로 만들어 놓았다. 게다가 인간은 이기적이며 사회는 부패하였다.세속적 소외와 기독교적 비관주의의 이러한 혼합에 대한 해독제는 역사와 성경이다. 기독교적 비관주의는 역사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그것은 신학적으로 보아도 부적절하다. 역사와 성경은 그리스도인이 사회에 막대한 영향을 미쳐 왔다고 말하고 있다.

1. 소금과 빛

예수님께서는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걸었던 기대를 소금과 빛의 비유를 사용한 산상수훈에서 매우 분명히 말했다. 첫째, 그리스도인들은 비그리스도인들과는 근본적으로 달라야 한다. 둘째,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비기독교적 사회에 침투해 들어가야 한다. 셋째, 그리스도인들은 비기독교적 사회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 넷째,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특수성을 유지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이 목적과 기대는 소외감을 극복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2. 기도와 복음전파

실제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며, 사회 변화를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첫째, 기도의 능력이 있다. 둘째, 복음의 능력이 있다. 복음 전파가 사회 활동의 기초이며, 없어서는 안될 서곡으로 생각되는 특별한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복음이 사람들을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복음이 신실하게 널리 전파될 때, 개인을 근본적으로 새롭게 할 뿐 아니라 신성모독, 이기주의, 탐욕, 불성실, 부도덕, 잔인함과 불의가 번성하기 힘든 환경을 낳는다.

3. 증거와 항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창조주와 같이 “진리를 증거하기 위하여” 부름을 받았다. 우리가 증거하고 있는 최고의 진리는 말할 것도 없이 예수 그리스도 자신인데, 그것은 그가 진리이기 때문이다(요 14:6). 그리고 모든 진리-과학적, 성경적, 신학적, 도덕적-가 그의 것이므로 우리는 그것들을 옹호하고 유지하고 주장하는데 대담하여야 한다. 승리에 대한 적극적인 증거와 함께 부정적인 면, 즉 어리석은 행위, 시기와 사악함에 대하여 저항하기도 해야 한다.

4. 실례와 그룹들

진리는 논증될 때도 강력하나 그것이 제시될 때는 훨씬 더 강력하다. 여섯째, 그리스도인 개인이나 가족의 예보다 더욱 영향을 미치는 것은 지역 교회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작은 그룹은 복음을 분명하게 구체화시킬 수 있다.

제 5 장 핵무기의 위협

오늘날 인류가 직면한 모든 문제 중에서 핵무기에 의한 파멸의 위험보다 심각한 것은 없다. 소위 “재래식” 무기의 경우에 있어서는 통제와 제한의 가능성이 있었으며, 전쟁은 양군 사이에 일정한 약속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나 핵 시대의 도래는 대부분의 군사적 전통을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렸다. 오늘날의 현실은 군비 경쟁, 군비 지출, 핵 무기의 증가 등으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일반적인 성경적 근거를 떠나서 그리스도인들이 간직하며 수호하고 있는 주요한 태도는 세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절대 평화론, 정당한 전쟁 이론, 상대(혹은 핵) 평화론 등이 그것이다.

평화론자들은 산상수훈에서부터 시작하는 경향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비폭력에 대한 그들의 주장을 발전시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 가르침으로부터 시작된다. 평화론자들의 주장은 16세기에 있어서 소위 “급진 개혁파들”(여러 개 침례교파들)에 의해서 받아들여졌으며, 오늘날에는 “평화교회들”(Peace Churches, Quakers, Mennonites, United Brethren 등)과 소수의 “역사적”개혁 교회들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있다.

전쟁이 정당하기 위해서는 그 원인이 옳아야 하며, 전쟁의 수단은 통제를 받아야만 한다. 그리고 그 결과를 예언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정당한 전쟁”은 오직 전통에 지나지 않는다. 로마서 12장의 마지막 부분과 13장의 처음 부분은 상호 보완적으로 보는 것이 좋다. 이 성경 구절이 강조하는 것은, 만일 악이 처벌받아야 한다면(그렇게 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 처벌은 이 율법을 직접 적용하려는 개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국가와 그 관원들에 의해서 행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법권의 행사는 그것이 범죄나 혹은 질서의 파괴나 혹은 국제적인 분쟁과 관계된 것이든지간에 반드시 구별되고, 통제되어야 한다.

핵전쟁에서는 더 많은 무죄한 피가 흘려질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양심은 무분별한 핵무기, 화학 및 생물학 무기의 사용을 부도덕한 것으로 선언해야 한다. 핵전쟁은 결코 정당한 전쟁이 될 수가 없다. 핵 평화론자들은 무차별한 무기의 사용을 가져오는 무기의 사용은 부도덕할 것이라는 원리를 확실히 받아들이고, 타협하기를 거부하는 이상주의자들이다. “사용하는 것은 부도덕하며 지키는 것은 지나치게 신중한”으로 내가 표현한 궁지로부터 빠져 나올 수 있는 방법은 첫째로, 나는 일방의 즉각적인 무장해제는 핵전쟁을 억제하기보다는 오히려 야기시킬 것이라는 주장을 인정한다. 둘째로, 핵무기를 사용하는 것은 부도덕하다는 방법의 억제책을 유지하는 것은 오직 일시적인 방편으로만 정당화될 수 있다. 셋째로, 상호 군축의 테두리 안에는 일방적 선창의 범위가 있다. 넷째로, 우리의 양심이 제한된 핵무기와 제한 없는 핵무기와의 차이를 받아들일 수 있든지 없든지간에 우리는 후자가 가능한 한 빨리 폐기되어서 제거되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할 수 있어야 한다. 다섯째로, 억제 효과는 신뢰성이 유지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실제적으로 취할 수 있는 화평을 위한 우선적인 노력은 (1)그리스도인으로서 화평케 하는 자(들)는 그들의 본질을 회복해야 하며, 기도해야 하며, 평화 공동체로서의 한 본보기를 설정해야 한다. 또한 신뢰성 회복에 공헌해야 하며, 공중 토론을 증진시켜야 한다.

제 6 장 인간의 환경

환경에 대한 연구는 비교적 최근에 이르러 발전하였다. 최근에 이르러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쉽게 찾을 수 있는데, 첫째 인구 증가, 둘째 자원 고갈, 셋째는 도피하는 기술이다. 이러한 세 가지 요소는 식량 공급, 자본 투자 및 공해의 문제, 그리고 상호간의 복잡한 관계와 더불어 1970년대 초의 논쟁적인 예언을 불러 일으켰다.

환경문제에 대한 성경적 접근은 지구는 누구에게 속해 있는가라는 기본적 질문을 제기함으로써 시작된다. “지구가 하나님의 것인 동시에 우리의 것이다”라는 이중적 진리는 창세기 1, 2 장에서 자세히 나타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땅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으며, 우리의 다스림은 협동적인 다스림이고, 우리의 다스림은 대리의 것이기 때문에 책임있는 다스림이다. 그러므로 만일 땅을 다스리는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위임된 것이라면 우리는 하나님과 협동해서 그 소산물을 이웃과 함께 나눈다는 관점에서 우리의 청지기직을 하나님 앞에서 책임질 수 있게 된다.

청지기직은 자연보호를 포함한다. 생태계의 위기의 근본적인 원인은 “환경의 손실에 의한 경제적 이득”으로 불리는 인간의 탐욕에 있다.

제 7 장 남북의 경제적 불균형

“남북 생존을 위한 보고서”는 세계적 규모의 혁신적인 행동이 필요하다는 것에 세계의 관심을 끌었고, 이성과 열정과의 비범한 조화로서 도전을 제시했다. 이 보고서는 “발전은 가난한 자로부터 부유한 자에게로의 이동, 전통적 농업 경제로부터 정교한 도시 경제로의 변화 이상의 것을 포함한다. 그것은 경제적 성장뿐만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 안전, 정의, 그리고 평등의 개념을 포함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정책의 테두리에 두 개의 기본적인 성경적 원리가 포함되어 있는데, 첫째는 통합의 원리인데 이것은 지구도 하나요, 인류도 하나임을 의미한다.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시 24:1).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국제주의자가 될 수 있다. 그것은 인류 통합에 대한 성경적 관점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균등의 원리이다. 그리스도께서 “가난한 자”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을 때에 그들은 우리와 같이 믿지 않는 죄인이었다. 그러므로 심각한 불균형은 제거되어야 한다는 원리는 전우주적인 진리이다. 바울(고후 8:8-15)이 우리에게 목표로 제시한 “균등은 절대적이라기 보다는 상대적이다.

제 8 장 인 권

금세기는 인권의 파괴와 침해로서 특정 지울 수 있다. 인권의 침해와 남용, 그리고 불법행위가 증가되는 중에도 인권에 대한 각성과 그 보호를 위한 관심이 계속해서 증가되고 있다. 인권을 세계의 최고 안건으로 올려놓은 것은 히틀러의 야만 행위와 일본의 잔혹 행위에 의해 저질러진 제 2 차 세계대전이다.

인권의 본질은 창조에 있다. 인간은 결코 권리를 “획득”한 것이 아니다. 인권은 인간의 권리로서 인권의 본질은 인간의 본질에 의존한다. 인간의 존엄성은 창세기 1:27,28의 계속되는 세 문장에서 확인될 수 있다. 우리는 인간의 존엄성을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할 수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관계(혹은 예배의 권리와 의무), 인간의 상호 관계(혹은 교제의 권리와 의무), 그리고 땅에 대한 우리의 관계(혹은 청지기직의 권리와 의무)인데, 이것은 교육, 수입, 그리고 건강의 기회와 더불어 인간의 독특한 잠재력을 개발시킨다. 우리는 동일한 창조주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동등한 권리를 지닌다.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은 성경의 인간 창조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이 원리는 신약의 사회에서 더욱 명확해져야 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동일한 구세주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다른 사람의 권리를 수호하는 것에 대해서는 많이 말하고 있지만, 자신의 권리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고 있다. 반면에 우리에 대해서 말할 때에는 우리의 권리보다는 의무에 대해서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해야만 한다. 이 기본적인 요구가 우리의 모든 의무를 통합한다.

제 9 장 노동과 실업

노동에 대한 기독교적 본 정신을 밝히고자 하는 사람들은 먼저 창조를 돌아보아야 한다. 타락은 일을 고역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나 노동 자체는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된 결과이다. 하나님 자신이 창세기 1장에서 일군으로 묘사되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과 영토를 공유한 일군인 인간과 더불어 하나님도 역시 일군이다. 그리고 예수님도 일군이었다.

하나님, 그리스도, 인간에 대한 계시된 진리의 조명 하에서 노동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는, 노동이란 다른 사람에 헌신하는데 에너지를 소비하는 것으로(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양쪽 모두이든), 노동자에겐 성취감을, 공동체에겐 이익을, 하나님께 영광을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의존한다. 그러나, 또한 하나님도 우리에게 의존하신다.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고 인간은 경작자이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직업이 비록 작고 간접적인 방법이지만,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의도의 진척을 위해 공헌하는 것을 볼 수 있을 때 laborare orare, 즉 “노동은 예배”(work is worship)가 된다(고전 10:31).

남성과 여성을 위한 하나님의 의도 중 노동이 얼마나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는가를 이해한 이상, 우리는 동시에 실업이 인간성에 대해 얼마나 심각한 공격인가를 알게 되었다. “잉여 인간”이라고 선언 받는 것은 충격적인 경험이다. 궁극적인 해결은 거시 경제학의 영역에 속한다. 장기적 치료에서 단기적 치료, 즉 해결책에서 완화책으로 전환하면 더욱 합의점이 많을 것 같다.

교회가 도울 수 있고 도와야만 할 적어도 세 가지 방법은 첫째, 우리들 중의 많은 사람은 실업자에 대한 우리의 자세를 바꾸고 대중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설득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실업자들을 경멸하거나 “무직”이라는 말을 “무가치”라는 말의 동의어로 생각해 온 것을 회개해야만 한다. 둘째로 교회는 각자의 창의력을 사용할 수 있다. 셋째로, 실업자들이 건설적 행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가운데, 교회는 또 “노동”과 “고용” 사이의 구별을 짓고 공표하고 행동해야만 한다. 일의 의미는 우리에게 자기 가치의식을 주는 데는 노임이나 봉급보다 더욱 중요하다. 창조적이고 자발적인 임금은 없지만 의미를 준다.

제 10 장 노 사 관 계

일에 대한 올바른 태도는 우리가 그것을 즐기는데 있어서 필수적인 것처럼, 직장에 대한 올바른 관계도 역시 중요하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본 바와 같이, 우리가 공동의 선을 위하여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협력하는 협동의 기업으로서 직장을 설정하셨기 때문이다.

성경적 상호 관계의 원리는 첫째로, 그것은 상호 섬김의 원리를 포함한다. 두 번째로, 그것은 상호 존경에 바탕을 둔 상호 섬김이다. 성경적 원리에서부터 현실로 돌아와 볼 때에, 상황은 완전히 반대이다. 그것은 존경과 신뢰로써 탄생된 상호 섬김의 상황이 아니라, 의심과 경쟁심으로써 탄생된 적대 상황이다. 일단 상호 존경과 상호 봉사에 대한 열망이 일어나면, 적어도 세 가지 결과가 생길 것이다.

첫째, 극한 대립을 영구화시키는 실제적이고 상징적인 차별이 폐지될 것이다. 급료 차이는 불안과 갈등의 주요 요인이 되어 왔다. 인간은 공정성에 대한 감각을 타고나기 때문에, 모든 노사 관계의 분쟁에 있어서도 “공정성”에 대한 요구와 “불공정한 정책”에 대한 불평이 일어난다. 차이는 있어야 한다. 그러나,공직이 아닌 특권에 근거한 봉급과 조건과 승진에 있어서의 인정되지 않는 차별은 폐지되어야 한다. 그것은 사회 정의나 상호 존경에 대한 기독교적 사상과 일치하지 않는다.

둘째, 노동자들의 기업 참여를 촉진시키기 위한 산업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는 공장을 특별한 경우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산업 내에서의 사회의 인간화에 대한 보편적인 요구의 표현이다. 두 가지 면에 있어서의 참여(의사 결정과 이익 분배)는 편의의 면에서 뿐만 아니라(산업적 평화와 생산성의 증가로 인하여), 정의의 면에 있어서도(노동자는 권한과 이익을 나눌 권리가 있다) 그리스도인의 마음과 합치한다.

우리가 노사에 대한 그 관계를 살펴보고 있는 상호 존경과 상호 봉사의 근본적인 개념은 차별의 폐지뿐만 아니라, 참여와 협동의 증가로까지 인도해야 한다. 협동은 그 자체로서는 일어날 수가 없고, 공동 목표에 의한 부산물이다. 모든 회사는 이윤을 추구해야 하지만, 그 주요 관심은 회사(경영인, 주주, 노동자 모두)의 봉사의 대상이 되는 대중이 되어야 한다. 모든 회사와 산업의 첫 번째 의무의 대상은 그들의 고객이다. 그 이유는 기업의 존립이 대중을 즐겁게 해주는 것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대중에 대한 봉사가 그 존재 이유가 되기 때문이다. 교회는 계급과 분화 의식이 극복되는 첫 번째 기구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인간 사회의 모든 면에서 존경심과 협동의 증진을 위하여 기대하는 마음으로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산업 분쟁 속에서 묵묵히 따라서도 안되고, 그 해결에 대하여 비관해서도 안된다.

제 11 장 다민족 사회의 꿈

로이 젠키스는 인종통합를 “나는 통합을 융화에 아부하는 과정이 아닌, 상호 인내의 분위기 속에 문화적 다양성이 동반하는 동등한 기회로 정의한다"로 정의했다.

범 민족사회에 대한 성경적 이상은 아테네 철학자들에 대한 설교에서 사도 바울에 의해 발전되었다(행 17:22-23). 바울은 첫째, 창조의 하나님 안에서의 인간의 통합을 주장하였다. 둘째로 바울은 다양한 종족 문화 즉, 역사의 하나님을 주장했다. 셋째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궁극성, 즉 재림의 하나님을 주장하였다. 넷째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교회의 영광 즉, 구속의 하나님을 선포하였다.

오직 진실된 신학-하나님의 성경적 계시-에 의해서만 우리는 인종적인 우월감과 편견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다. 그는 창조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인류의 통합을 주장한다. 그는 역사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종족 문화의 다양성을 주장한다. 그는 계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궁극성을 주장한다. 그리고 그는 구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영광을 주장한다. 인종 통합을 위한 정책이 어떻게 발전되더라도, 우리는 그것이 이러한 교리를 반영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인간은 하나이기 때문에, 우리는 소수 민족에게도 동일한 권리와 동일한 존엄성을 요구한다. 종족의 다양성 때문에 우리는 문화적인 제국주의를 거부하고, 그리스도의 주권과 조화를 이루는 종족 문화의 다양성을 보존하려고 한다. 그리스도의 궁극성으로 인하여 우리는 종교적 자유가 복음을 전파하는 권리를 포함한다고 확신한다. 교회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는 우리에게 있는 인종차별 주의를 제거하고, 교회를 범 민족의 꿈이 실현되는 종족간의 조화의 모형으로 만들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제 12 장 빈곤, 부, 그리고 소박성

부와 빈곤과의 중대한 불균형은 국가들간에서만 찾아질 것이 아니라, 또한 대부분의 국가들의 내부에서도 찾아지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 시대의 진상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현 세계에서의 빈곤이라는 가혹한 사실에 대해 접근해 가야 하는가? 먼저 우리는 이 문제를 이성적으로, 즉 냉철한 통계적 공정성을 가지고 접근해 갈 수 있다. 두 번째로, 우리는 감정적으로, 즉 인간의 필요를 직접 눈으로 보고, 들으며, 냄새 맡음으로써 격앙되는 피끓는 격분을 가지고 빈곤 상태에 접근할 수 있다. 세 번째 방법은, 빈곤의 문제를 성경적으로 접근하는 접근방법이다. 하나님의 생각과 방법들은 우리의 것들이 아니다. 그는 모든 것을 전도(顚倒)시키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세상의 표준들, 그리고 세상의 가치들을 역으로 변환시키신다.

성경을 연구한 사람들은 구약에 나타나 있는 빈곤에 관한 일군의 단어들에 초점을 맞춘다. 히브리어의 여섯 가지 주요 어근들에서 유래하는 그 단어들은 모두 200여회 이상이나 나타나고 있다. 첫째, 경제적으로 말해서, 생존에 있어서 필수적인 것들을 박탈당한 "핍궁한 자들"이 있다. 둘째, 사회학적으로 말해서 인간적 부정의(不正義)의 무력한 희생자들인 "억압된 빈곤자들"이 있다. 셋째, 영적으로 말해서 자신들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오직 하나님께만 구원을 바라는 "겸허한 빈곤자들"이 있다.

이 모든 성경적 가르침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는 궁핍한 자들을 구하시고, 무력한 빈곤자들을 옹호하시며 또한 겸허한 가난한 자들을 높이신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게 해준다. 그것이 궁핍의 진토가 되었든, 아니면 압제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상태이든간에 “여호와는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켜 주신다.”

지나친 단순화의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만일 우리가 이 세 가지의 범주들을 두 가지로, 즉 궁핍하고 무력한 물질적 빈곤과, 겸손하고 온유한 영적 빈곤으로 축소해 본다면(특히 우리가 빈곤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자세가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보다 도움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양쪽 모두에 관심을 두시고 계신다. 두 경우 모두 “여호와는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지만, 그러나 그가 그것을 행하시는 방식은 서로 다르다. 왜냐하면 첫 번째의 빈곤은 하나님께서 반대하시는 사회악인데 반하여, 후자의 것은 하나님께서 권장하시는 영적 덕목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마땅히 중심으로부터 “주변을 향하여” 즉, “대항적으로 죄짓게 된 자들”에게로, 다시 말해서 가난한 자들과 억압당하고 있는 자들에게로 움직여 나가기 위해 그 필요가 가장 큰 곳에 그 사역을 집중해야 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8:9)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이와 같이 자원하여 스스로 가난하게 되셨다는 성경적 바탕 위에서 바울은 유대 그리스도인들을 구제하는 일에 기여하기 위해 헬라 그리스도인들의 연보를 호소하고 있었다.

부의 첫 번째 위험은 자만심이다. “이 세대의 부한 자들을 명하여······마음을 높이지 말고······”(딤전 6:17-19). 그 이유는 부한 것이 사람들을 자만심을 강하게 만들고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게”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풍요로움이 우리들 자신을 덜 부유한 형제 자매들로부터 소외시켰는지의 여부를 판단하기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다. 부의 그 두 번째의 위험은 물질주의이다. “부한 자를 명하여······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두며······”(물질주의란 물질적 재화의 순수한 소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불건전하게 그것들에 사로잡혀 있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아낌없는 마음을 갖는 일과 자족하는 마음을 갖는 일의 제 3의 대안에 이르게 된다.

이와 같은 부정적인 경고들이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긍정적인 교훈들을 마련해 준다. 자족하는 마음을 갖는 일과 아낌없는 마음에 갖는 일이 필요하다. 그 이유는 만일 다른 사람에게 후히 주는 일이 우리가 남겨 놓는 것에 대한 불만 가운데서 이루어진 것이라면 그것은 결코 변칙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자족하는 마음은 경건, 즉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께 대한 지식을 수반하기 때문에 “경건이 큰 이익이 된다.”

제 13 장 여자, 남자, 그리고 하나님

여성에 대한 압제의 이력은 너무나도 장기적으로 그리고 광범위하게 지속돼 온 터이기 때문에 남성 지배 사회가 지불하지 않으면 안될 명백한 배상적 요구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몇 가지 질문들을 제기할 필요가 있다. 여성의 권리들은 무엇인가?하나님께서 여성에게 주신 성경적 지위는 무엇이고, 그들을 부르신 사역은 또 무엇인가?

성경의 첫 장부터 내내 근본적인 두 성들의 질이 확인된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남성과 여성 모두 속에 있는 본질적 인간은 그것이 무엇이 됐든지간에 우리가 동등하게 지니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하는 것이다. 인종, 모든 계층 그리고 양성의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는 동등하다. 그것은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된 모든 이들이, 어떠한 구분이나 차별 혹은 인종, 성, 또는 계급에 의한 편애 없이 동등한 하나님의 자녀로 평등하게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따라서 성적 역할들에 관해 후에 가서 무슨 말들이 나오게 된다 하더라도 한쪽 성이 우월하다거나 아니면 다른 쪽 성이 열등하다거나 하는 문제는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는 “남자도 여자도 없다.” 우리는 동등한 것이다.

동시에, 비록 남녀가 동등하다고는 하지만, 그들이 서로 똑같은 것은 아니다. 평등성과 정체성(正體性, identity)이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생리학상으로, 심리학상으로도 서로 다르며, 그 구분된 고유적 성적 질들에 있어서도 상호 보완적이다. 남녀는 평등하기 때문에, 양편 어느 쪽도 열등하다거나 하는 문제 같은 것은 있을 수조차 없다. 더 나아가서 이 2중 진리는 남녀간의 관계와 역할을 조명해 주기도 한다. 그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동등한 존엄성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남녀는 상호 존중하고, 사랑하며, 섬겨야지 멸시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들은 상호 보완적으로 피조되었기 때문에 서로는 그들간의 차이들을 인정하고, 그것들을 배제하거나 혹은 서로간의 특징들을 빼앗거나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모든 성경 연구가들이 창세기 1장은 성적 동등성을, 그리고 2장은 성적 보완성을 가르치는 것이라는 데 동의한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평등성과 보완성 외에 남자의 “수장성”을 추가시킨다. “책임성”이라는 용어가 바울이 의도했던 “수장권”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를 더욱 정확히 전달해 준다고 보고 싶다. 그 단어 자체에 보다는 오히려 바울이 에베소서 5장에서 지체들에 대한 머리의 자세를 보여주기 위해 사용한 두 가지 모델들을 기반으로 삼는다. 처음 유형은 그의 몸, 곧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자세이고, 두 번째의 것은 우리들 자신의 모인 안녕을 위한 개인적 관심이다. 따라서 남편의 아내에 대한 머리됨은 조종이라기 보다는 보살핌의, 권위라기 보다는 책임성의 머리됨인 것이다. 아내의 “머리”로서 남편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인 교회를 사랑하심과 마찬가지로 사랑 안에서 아내를 위해 자신을 버린다. 또한 그는 자신의 몸을 보살핌과 같이 아내를 보살핀다. 그의 관심은 아내를 눌러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녀를 자유케 하는 것이다.

여성들은 하나님에 의해 매우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들을 티내지 않고 보살피도록 부르심을 입고 있다. 왜냐하면 “직임”은 “섬김”이며, 남녀노소 없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섬김을 받으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신 이의 발자취들을 따르도록 부르심을 입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여자들에게 영적 은사들을 베푸시고, 그것들로 공통적 선을 위해 그들의 은사들을 행사하도록 부르시는 것이라면, 그때는 교회도 하나님의 은사들과 소명을 인정치 않으면 안되며 여성이 활동 가능한 봉사의 영역들을 적절히 제공해 주고, 적어도 팀의 상태 하에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직임을 행사할 수 있도록 그녀들을 "임명"하는 것이 마땅한 것이다.우리 그리스도인의 창조와 구속의 교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은사를 베푸신 사람들이 좌절을 겪지 않고 충만해지기를, 또한 그의 교회가 그들의 섬김에 의해서 부요하게 되기를 바라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들려주신다.

제 14 장 결혼과 이혼

고전적 신학은 하나님께서 결혼을 정명하신 세 가지의 주요 목적들을 확인해 주는 성경의 계시를 따라왔다. 고전 신학은 결혼의 목적들을 창세기 1장과 2장에서 들어왔다.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대로 지으신 남성과 여성에게 명하신 첫째 명령은 “생육하고 번성하라”(1:28)는 것이었다. 때문에 자녀들을 생산하는 일은 그 순서의 머리에 나온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고 말씀하셨다. 그처럼 결혼은 “번성할 때나 역경에 처할 때나 한편이 다른 편에게 가져야 할 상호 사귐과 도움과 위안을 위해”의도된 것이었다. 셋째로, 결혼은 자기 헌신적 사랑의 호혜적 위탁, 즉 그 자연적 발현이 성적 결합, 혹은 “한 몸”이 되는 일(창 2:24)에서 찾아지도록 의도된 것이다.

수반되는 고통에도 불구하고, 이혼자들의 수는 계속 증가일로에 있다. 이혼율이 높아지고 있는 사회학적 요구들은 많고도 다양하지만, 의심할 것도 없이 최대 단일의 이유라면 서구에서의 기독교 신앙의 몰락을 들 수 있다. 결혼을 평생에 걸친 서약 혹은 계약으로 보는 견해는 이제 서구에서는 소수 견해에 불과할 뿐이다. 또한 교회에서조차도 세상에 굴복하는 위험에 봉착해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 중에서조차 결혼은 이제 늘 그래 왔던 것처럼 영속적인 것은 아니고, 이혼이 거의 상식처럼 되어 가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기독교 지도자들 중 어떤 이들조차도, 기독교 지도자로서의 위치는 그대로 고수하면서도 그들의 배우자와 이혼도 하고 재혼도 하는 형편에까지 이른 것이다.

결혼의 정의에 가장 근접된 성경 기록은 창세기 2:24이다. 그것은 후에 이혼이 허용될 만한 근거들에 관해 질문을 받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도 인용하셨던 전거였다(마 19:4,5). 창세기 2:24은 결혼 연합은 배타적인 것이며, 공적으로 인정되는 것이고, 영구한 것인데다, 성적 관계에 의해 완성되는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혼은 계약의 위반, 곧 “반역적” 행위로서의 하나님께서 “미워하노라”고 말씀하신 그것이다(말 2:16).

예수님께서는 첫째로, 예수님께서 결혼의 영구성을 확실히 하셨다. 둘째로, 예수님께서는 이혼에 관한 모세의 대처가 인간의 죄에 대한 잠정적 양보였던 것으로 선언하셨다는 점이다. 셋째로, 예수님께서는 이혼 후의 재혼을 “간음”으로 부르셨다는 점이다. 넷째로, 예수님께서는 순전한 부도덕성의 바탕 위에서 이혼과 재혼을 허용하셨다는 점이다.

우리가 고찰해야 할 바울의 가르침은 고린도전서 7:10-16에 나오는데, 이른바 “바울의 특권”이라는 것과 특히 관계된다. 첫째로, 우리는 바울이 권위적, 사도적 교훈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둘째로, 그는 예수님께서 이혼을 금하신 사실을 되풀이해서 확인한다. 셋째로, 바울은 믿지 않는 당사자가 버릴 경우에는 이혼을 허용한다.

성경이 결혼을 하나의 언약으로-비록 두 인간들간의 것이긴 하지만-하나님에 의해 제정되었고 증거된 “하나님의 언약”(잠 2:17, 문자적으로)인 것으로 간주한다는 것은 진정하고도 분명하며. 우리는 결혼 언약에 대한 이해를 구체화시키기 위해 이같은 하나님의 언약적 관점을 수용치 않으면 안되리라고 본다. 결혼 언약은 만일 한쪽 당사자가 그것을 어기면, 다른 쪽에 의해서 폐기되어질 수 있는 보통의 인간 계약은 아닌 것이다. 결혼 언약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맺으신 것에 더 가깝다.

개인적 또는 목회적 실제들은 첫째로, 결혼과 화해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에 철저해야 할 것이 요구된다. 둘째로, 결혼을 위한 준비의 필요성이다. 셋째로, 화해적 봉사의 필요성이다. 넷째로, 이혼한 이들에게의 목회 사역의 필요이다.

제 15 장 낙태 딜레마

낙태에 관한 논쟁은 일반적으로 복잡한 문제이다. 그것은 의학적, 법적, 신학적, 윤리적, 사회적, 개인적인 양상들을 포함한다. 또한 그것은 인간의 성과 재생산 등에 이어지고 종종 무척 고통스런 딜레마들과 연루되어 있는 첨예화된 감정적인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첫째, 낙태 문제에 연루된 것은 하나님과 인간 양쪽의 기독교 교리, 또는 더욱 간명히 하면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생명에 대한 존엄성이 아닐 수 없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시고 유지하시며 거두시는 유일한 존재라는 사실을 믿는다.

둘째로, 낙태에 대한 문제는 하나님의 법칙일 뿐 아니라 인간의 법칙과도 연관되어 있다. 아무리 태아가 미성숙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살아 있는 인간이란 점에서 모든 사람이 동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거의 무차별하게 자행되는 낙태는 성경적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거부를 반영해 준다.

이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두 번째 이유는 대중적 태도에 있어서 최근에 일어난 커다란 혁명과도 관련되어 있다. 의사들이 고대 헬라의 히포크라테스 선서(Hipocratic Oath, B. C. 5세기)에 실제로 선서를 하든지 않든지간에 그들이 주요한 약속들을 당연히 받아들였다는 것은 보편적으로 추측되는 일이다. 히포크라테스 선서의 어떠한 구절들은 아주 고색 창연하게 되었으므로 제네바 선언은 “나는 임신의 그 시각부터 인간의 생명에 대한 지고의 존경을 간직할 것이다”라는 전제를 조심스럽게 포함하면서 그것을 새롭게 했던 것이다.

낙태에 대한 느슨한 정책을 견지하는 사람들과 엄격한 정책을 견지하는 사람들은 서로 반대적인 위치에서 그들의 논쟁을 시작한다. 낙태 찬성론자(pro-abortionist)들은 임신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며 특히 그녀의 선택할 권리를 강조하는 한편, 낙태 반대론자(anti-abortionist)들은 태어나지 않은 아이의 권리를 강조하고 특히 유아의 살 권리를 강조한다. 따라서 주요한 논쟁점은 신학적이고 도덕적인 것이다. 그것은 태아(foetus) - foetus는 “자손”(offspring)에 해당하는 용어이다-의 본성에 관련된다. 비록 태아가 어머니의 신체 내에서 자라고 있다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머니의 일부분이 아니라는 사실은 신학적이며 생리학적 사실이다.

성경상의 가장 확고한 바탕은 시편 139편에서 발견되는데, 여기에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무엇이나 알고 계시며 어디에나 존재하심에 감탄하고, 명상 도중에 태아기의 존재에 대해 중요한 진술을 한다. 시편 139편이 발생학의 교과서가 된다는 것은 분명히 아니다. 그것은 시적 심상과 고도의 수사적인 언어를 사용한다(예: 15절, “내가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편 기자는 적어도 세 가지 중대한 진리들을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그 첫 번째는, 그의 창조에 관련된다(13절, “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 시편 기자의 두 번째 강조는 연속성에 있다. 그는 이제 성인이나 태어나기 이전까지의 그의 삶을 회고해 본다. 시편 기자가 표현한 세 번째 진리는 영적 교제인데, 이는 그가 하나님과 그 사이의 인격적이고 특별한 영적 교제가 있음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생각해야 할 성경적인 근본적인 시각을 제공하는 것이 바로 이 세 가지 단어 창조, 연속성, 영적 교제, 그리고 언약들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심지어는 모두가 성경의 권위에 복종하는 그리스도인일지라도 이 문제에 대하여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는 주장을 하는 것은 그리 정직한 일은 못될 것이다. 창조와 사랑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적 발의는 은총에 대한 성경적인 이해이다. 인격을 태아에게 부여하는 가장 중요한 관계를 하나님에 대한 그의 관계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그에 대한 사람에 가득찬 의식적인 대우라 하면 어떻겠는가? 이러한 일방적인 관계는 그것이 반응할 수 있기 전 오랫 동안 그들의 아이들을 사랑하고 보살핌과 보호에 혼신을 기울이는 부모들에게서 보여진다.

인간 태아의 생명은 성숙한 인간이 될 장래성을 지니고 있는 인간의 생명이므로 우리는 어머니와 그 미출산 유아를 발달의 서로 다른 단계에 있는 두 인간 존재로서 생각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의 태아는 원칙적으로 침해될 수 없다는 데에 동의해야만 한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첫째는 회개할 필요가 있다. 둘째로, 만약 더 빈틈없는 낙태 정책이 확보될 수 있다면 그것의 영향에 대한 충분한 책임 의식 역시 확보해야 할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적극적인 교육과 사회적 운동을 지지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의 자격과 인간 생명의 가치, 그 고귀함에 대한 성경적 이해를 철저하고도 계속적인 방법으로 가르치는데 주저해서는 안된다. 나는 낙태에 호소하는 여인들이나 또는 그 성적인 방종이 대부분의 원치 않는 임신을 가져오는 남자들에게 개인적인 판단을 강요할 생각은 없다. 대신 그들에게 “사하심이 주게 있으니”(시 130:4)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죄를 대신해서 죽었고 우리에게는 새로운 시작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부활하셔서 살아 계시며, 그의 성령으로써 우리에게 새로운 내적인 자제력을 주실 수 있다. 그는 또한 사랑과 기쁨과 평화와 자유와 정의로 명령되는 새로운 공동체를 건설하고 계신다. 새로운 시작, 새로운 힘, 새로운 공동체,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복음인 것이다.

제 16 장 동성애적 교제

논의를 위한 맥락은 첫째, 우리는 모두 인간이다. 둘째, 우리는 모두 성적인 존재이다. 우리에게 성이란 성경에 의해서 보나 경험을 통해 보나 우리 인간성의 근본이다. 더욱이 우리는 모두 성적인 존재일 뿐 아니라 각자 독특한 성적 정향을 가지고 있다. 셋째, 우리는 모두 죄인들이다. 성적으로 죄인들이다. 전적으로 타락했다는 교리는 인간의 모든 부분이 죄로 인해 감염되어 있고, 또 뒤틀려 있으며, 이것에는 우리의 성도 포함한다고 단언한다. 넷째, 나는 인간이 성적이며 죄가 있는 창조물임에 덧붙여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인이라는 입장을 받아들인다.

네 가지 중요한 성경 구절이 동성연애 문제에 관해 부정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1) 소돔의 이야기(창 19:1-13), 그리고 매우 유사한 기브아 이야기(삿 19), 이것을 서로 연결시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2) “여자와 교합함같이 남자와 교합함”을 분명히 금하고 있는 레위기 사본(레 18:22, 20:13). (3) 바울 사도의 퇴폐적 이방 사회에 대한 묘사(롬 1:18-32). (4) 일종의 동성애 행위에 관한 언급을 포함하고 있는 바울의 두 가지 죄인 목록(고전 6:9-10, 딤전 1:8-11).

성과 결혼에 관한 성경의 총체적이고 긍정적인 가르침이 없이는 동성연애 문제에 관한 우리들의 시각은 견강부회(牽强附會)에 그치고 말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그가 우리에게 창조에 대한 두 가지 구별되는 설명을 하였다는 것을 보아 왔다. 첫째(창세기 1장)는, 일반적으로 성의 평등을 확언한다. 그것은 양성이 모드 하나님의 형상과 지상의 경영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창세기 2장)는, 특수한 것으로 상보성을 확언한다. 그것은 이성간의 결혼의 토대를 구축한다. 이 두 창조에 대한 설명에서 세 가지 기본적 진실이 드러난다.

첫째, 인간의 교제에 대한 욕구.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18절)는 사실이다. 둘째로, 창세기 2장은 이런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킬 신의 예비를 보여준다. 세 번째 창세기 2장의 중대한 사실은 결과로 일어나는 결혼 제도에 관한 것이다. 요약하면, 하나님이 의도하시고 성경이 고려하고 있는 유일한 "한 몸"의 경험은 남자와 그가 “살 중에 살”로 여기는 그의 아내 사이의 성적인 결합에 국한된다. 그러나, 동성연애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의 성과 이성간의 결혼 제도에 관한 이런 성경의 가르침에 만족하지 않는다.

전통적으로, 성경은 모든 동성연애 행위를 비난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첫째, 성경의 저자들은 그들 자신의 상황에 관련된 문제들을 제기하였는데, 이것들은 우리들의 문제와는 매우 격차가 있다. 두 번째, 이것을 보충하는 문화에 대한 문제는 성경 기자들이 우리들의 문제는 손을 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동성연애 행위가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이유를 1) 수많은 원시 사회에서 그것을 당당하게 받아들였으며, 2) 일부 선진 문명(예로, 고대 헬라)에서 그것은 이상화되기까지 했으며, 3)동물들에게도 비교적 널리 퍼져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런 논의들은 무엇이 “자연스럽고”, 무엇이 “자연스럽지 않은가”에 대해 너무 주관적인 견해만을 표현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창조에 의해 성과 결혼의 규범을 설치해 놓으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미 구약 시대부터 받아들여져 왔다.

성경적인 그리스도인은 이 사항이 의존하는 근본 전제를 받아들일 수 없다. 즉, 사랑이 유일한 절대적인 것이며, 그것을 제외한 모든 도덕적 율법은 철폐되었고, 사랑과 모순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 사실로 인해 다른 모든 고려 사항과는 관계없이 훌륭하다는 전제이다. 이것은 그럴 수가 없다. 왜냐하면, 사랑도 그것을 인도할 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물론” 일부 사람들은 “동성애 그리스도인을 받아들이는 것은 이성애적 그리스도인들의 의무이다. 바울은 우리에게 서로를 받아들이고 실로 환영하라고까지 말했다. 만약 하나님이 누군가를 환영한다면, 우리 중에 누가 그를 심판하겠는가?” (롬 14:1)라고 한다. 하나님의 “받아들임”은 그가 회개하고 믿는 자들을 모두 완전히 아낌없이 용서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우리가 죄 가운데 계속 있는 것을 용서한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서로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동료 순례자로서이지 우리 죄를 지속시키기로 결심한 동료 죄인으로서는 아니다. 하나님이든 교회이든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의지에 어긋나게 우리 마음을 강퍅하게 하면 아무도 받아들여 주지 않는다. 다만 심판이 있을 따름이다.

나는 바울의 믿음, 소망, 사랑의 세 요소를 택하고 싶다. 그래서 그것을 동성연애적 정향이 있는 사람에게 적용시키고 싶다. 믿음이란 신의 계시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다. 첫째, 믿음은 하나님의 기준을 받아들인다. 이성간의 결혼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성적 금욕뿐이다. 둘째로, 믿음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들인다. 금욕이란 훌륭한 것뿐만이 아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에게 독신을 요구하신다면, 그것은 가능하기도 할 것이다.

“피조물아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롬 8:22). 따라서 우리의 탄식은 새로운 시대의 출생의 고통을 표현한다. 우리는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는 것을 믿는다. 이런 확신이 우리를 지탱케 한다.

현재로서는 우리는 “시간 사이에” 살고 있다. 믿음에 의해 얻을 수 있는 은총과, 소망 속에 기대하는 영광 사이에 살고 있다. 그것 사이에 사랑이 있다. 그것은 동성연애자들의 다수가 그들의 사정에 책임이 없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동성연애 그리스도인들의 고민이 아무리 난처하고 고통스러울지라고, 예수 그리스도는 그 남자 혹은 여자에게 믿음, 소망, 사랑을 요구한다-믿음이란 그의 기준과 그들을 지키는 은총에 대한 믿음이며, 소망은 현재의 고통 너머 미래의 영광에 대한 소망이며, 사랑은 서로를 돌보고 조력하는 사랑이다. “그러나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13:13).

제 17 장 그리스도인의 리더쉽의 요청

오늘날의 세계는 지도자 부족의 현상이 심각하다. 많은 문제들이 우리 앞에 산적해 잇다. 많은 사람들은 이제 세계가 종말을 향해 치닫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누구 하나 그것을 어떻게 피해야 할지를 가르쳐 주는 사람은 매우 적다. 기술적인 지식은 세계에 가득하지만 현명한 지혜는 너무나 부족하다. 현대인들은 혼란에 빠지고 당혹해 하며 소외감을 느끼고 있다.

예수님의 온유를 발리자면 흡사 우리들은 “목자 없는 양떼”와 같아지는 것 같다. 그리고, 우리의 지도자들은 자주 “장님을 데리고 다니는 장님 길잡이”로 등장하기도 한다.

리더쉽에는 많은 종류와 수준이 있다. 리더쉽은 어떠한 사회든지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리더쉽에 필요한 5 가지 본질적인 요소들을 제안하면 첫째 요소는 비전이다. 그것은 통찰력과 선견을 가지고 상상력을 통해 사물들을 인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특히 내가 이 말을 사용하는 의미는 현재 있는 상태에 대한 깊은 불만과 그것의 가능한 형태의 뚜렷한 파악의 산물이다. 비전은 현재 있는 상태에 대한 분개에서 시작하여 다른 대안을 모색하는 것으로 발전한다. 이 두 가지 모두 예수님의 공적 사역 중에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두 번째 요소는 근면이다. 비전과 함께 근면은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지도자들의 상징이었다. 비전과 근면의 동일한 조화는 우리의 보다 일상적인 개인적인 삶에서 더욱 필요하다. 꿈과 현실, 열정과 실제성은 언제나 병존해야 한다. 비전 없는 행동은 방향감각과 반응을 상실하기 일쑤다. 또한 열정적인 노력과 실제적인 계획이 없는 꿈은 옅은 공기 속으로 사라지기 마련이다.

세 번째 요소는 인내로써, 인내는 확실히 리더쉽에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꿈을 가진다던가 비전을 갖는 것과, 그 꿈을 행동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별개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반발 세력에 부딪쳤을 때 그것을 가지고 인내할 줄 아는 것은 또다른 제3의 문제이다. 반발은 항상 일어나기 마련이다. 진정 우리가 명심할 것은 인내는 어리석은 고집과 다르다. 진정한 리더는 비판에 대해 오만하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그것에 귀를 기울이고 그 비판을 중요시한다. 그리고 그것에 따라 자신의 계획을 수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원하는 것에 대한 기본적인 신념에 관해서는 결코 요동하지 않는다. 그는 어떠한 반발이나 희생을 감수하면서도 인내하는 것이다.

넷째 요소는 봉사인데, 이 점에 있어서는 특별한 주의가 요구된다. “리더쉽”은 교회와 세계가 나누어 가진 개념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인들과 비그리스도인들이 가진 리더쉽에 대한 이해가 동일한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된다. 우리들의 사명은 주인이 아니라 섬기는 자이며, 남을 부리는 자가 아니라 충실한 종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것은 지배자적인 지도자의 권위가 아니라, 섬기는 자로서의 지도자의 겸손이었다. 봉사에 대한 이 모든 기독교의 강조를 위해 제자는 오로지 그의 스승을 따르고 반영하려고 노력한다. 그는 모든 것의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의 종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제자들 발 앞에 종의 앞치마를 두르고 무릎을 끓었다. 그리고 그는 이제 우리에게 그가 했던 대로 행동하라고 말한다. 겸손히 우리 자신을 낮추고 다른 사람을 섬기려 노력하라고 진정, 어떠한 리더쉽도 낮은 자로서 기쁘게 섬기지 않는 한, 그리스도와 결코 같아질 수는 없을 것이다.

다섯 번째 요소는 훈련이다. 비전은 모두 시들어져 가는 경향이 있고 꿈을 가진 사람들은 실망하기 쉽다. 의욕적으로 시작된 어려운 일도 단조롭고, 고된 일로 변모한다. 고난과 고독은 그들의 대가를 치르는 것이다. 리더는 자신이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고 느끼고 지쳐 버린다. 기독교의 이상인 겸손한 섬김도 이론으로나 존재할 뿐 실제로는 부적당한 것 같아 보인다. 그리스도인 리더가 소지해야 할 마지막 표지는 훈련이다. 그것은 단순히 평범한 자기 훈련(자신의 감정과 시간과 정력을 다스리는)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을 모시는 특별한 훈련도 포함한다. 리더는 자신이 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오직 자신이 약하다는 사실을 아는 리더들만이 그리스도의 능력 안에서 강해질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이제까지 그리스도인의 리더쉽의 개념을 분석하고자 노력해 왔다. 그것은 대략 다섯 가지 요소로 나누어진다. 즉, 선명한 비전, 고된 노력, 끈기 있는 인내, 겸손한 봉사, 투철한 훈련이 그것들이다.

결론적으로, 나는 우리가 특별히 경계해야 할 두 가지 죄를 회개할 필요가 있다고 느끼고 있다. 그 첫 번째는 염세주의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불명예스럽게 만들고 기독교의 신앙과 상반되는 것이다. 우리는 나이브한 낙천주의나 냉소적인 염세주의를 모두 거부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위치와 상황에 냉정하지만 확신 있는 성경의 현실주의를 수용해야 하는 것이다. 두 번째로, 우리가 회개해야 할 죄악은 평범함과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일이다.

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들 각자를 위해 각기 다른 종류와 수준의 리더쉽을 마련하고 계심을 의미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온 정성을 다하여 그 분의 뜻을 찾을 필요가 있으며, 그 분에게 우리의 삶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비전을 달라고 간구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또한(필연적으로 성공적이진 못해도) 우리가 천상적인 비전- 하나님께서 주시는 비전-에 온전히 따를 수 있도록 은총을 간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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