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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1) 1878년 탄생
도산 안창호는 1878년(고종 15년) 11월 9일 대동강 하류 도롱섬에서 농업에 종사하는 가난한 선비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평안남도 강서군 초리면 칠리 봉상도 가 그의 출생지이다. 아버지는 순흥(順興) 안(安)씨의 시조 문성공(文成公) 안향(安珦)의 후예로 안흥국(安興國)이라고 했고, 어머니는 황씨였다. 문성공은 안유(安裕)라고도 불리우는 고려 말기의 대표적인 학자로 중국 남송(南宋)의 성리학을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수입했을 뿐 아니라, 우리나라 서원 설치의 효시가 되었으며, 안중근(安重根) 의사도 순흥 안씨이다.
안씨가 대대로 살던 곳은 평양 동촌(東村)으로 대동강 동편 기슭에 있으나 안흥국은 농토를 구하여 동촌에서 대동강 물결을 따라 하류에 있는 도롱섬으로 옮겨가 셋째아들 도산을 낳았다. 예로부터 풍치가 좋기로 소문났을 뿐 아니라 유서깊은 명승고적들이 자리잡고 있는 대동강 연변에서 자라난 도산은 유달리 대자연을 사랑하는 소년이었다고 한다.
(2) 1894년 구세학당 입학
남의 나라의 세력다툼이 우리땅에서 일어나 많은 이들이 고통받아야 했던 청·일 전쟁과 오랜 세월 썩어 빠진 관리와 양반들에게 고통받던 농민들이 전라도 고부에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겠다고 일어난 동학 농민운동을 겪으며 도산은 위기에 처한 나라의 답답한 상황들에 대해서 고민하게 되고, 결국 서울로 가서 공부해야 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집안의 반대가 있었으나 삼촌의 도움으로 어렵게 서울에 올라온 도산은 어느 날 정동 교회가 있는 골목을 지나치다가 '배우고 싶은 사람은 누구든 먹고 자고 마음대로 공부할 수 있으니 우리 학교로 오라' 고 권하는 미국인 선교사를 만난 것을 계기로 예수교 장로회에서 설립한 구세학당에 들어가 공부하게 된다. 구세학당에 입학하자 그는 송순명의 전도를 받아 예수교 장로회에 입교하여 신앙인이 되었다. 또한 산수. 지리. 세계사. 과학 등 새로운 학문을 배우며 새로운 세계관에 눈 뜰 수 있었다.
(3) 1897년 독립협회와 안창호
1896년 도산의 나이 19세 때, 서재필의 『독립신문』이 발간되고, 7월 2일에 독립협회가 결성되었다. 김옥균. 서광범. 홍영식 등이 주동이 된 개화파의 활약이 시작되었다. 이 해 11월 21일에는 서대문 밖 영천에 독립문이 세워졌다. 도산은 필대은과 함께 상의하며 민중의 각성을 촉구해야 겠다는 결론을 내리고 독립협회에 가담하였다. 이후 독립협회가 만민공동회로 발전함에 따라, 도산은 필대은 등과 평양에서 관서지부를 발기하고 쾌재정 연설을 통해서 민족 독립의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4) 1902년 미국 유학길
1902년 9월, 도산은 미국 유학을 앞서 약혼녀 이혜련과 세브란스 자리 제중원에서 밀러 목사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에는 25세의 신랑측 대표로는 김필순이, 19세의 신부측 대표로는 송석준이 참석하였고 기독교식으로 치뤄졌다. 서울 제중원에서 결혼식을 올린 도산부부는 이튿날 일본으로 출발, 며칠동안 동경(東京)에서 지내다가 미국으로 떠날 예정이다.
미국에 도착한 도산은 미국의 교육 시스템을 처음부터 경험해보자는 마음으로 10대의 미국 소년들과 함께 공립 소학교에서 공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18세 이상은 입학을 불허한다는 학교의 방침으로 곤란한 지경에 빠졌다. 문제의 발단은 도산이 입학하여 공부하고 있는 학교에 찾아온 그 지방 신문기자가 도산의 경력이며 취학 동기, 나이 등을 취재하여 신문에 '기특한 조선 노학생' 이라는 제목으로 도산에 관한 토픽 뉴스를 보도한 것이다. 이 기사로 인해 도산의 나이가 밝혀졌고 그 학교의 완고한 여교장으로부터 퇴교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이에 도산은 다른 학교에 가서 입학의 문을 두드렸으나 같은 이유로 입학을 거절했다고 한다. 그러나 다행히 세 번째 학교에서는 이해가 깊은 여교장의 '17세까지 입학을 허가한다는 규정은 미국 학생에게 국한된 문제이고 동양 사람에게 적용할 수 없다' 는 해명에 의해 무난히 입학 시험에 합격하게 되었다. 도산이 이렇게 고생스럽게도 미국의 초등 교육 과정인 그래머 스쿨에 다니기 위해 노력한 것은 초등 교육 과정부터 시작하여 미국의 중·고등학교와 대학교에 이르기까지 모든 교육 과정을 거쳐 그 좋은 점을 한국에도 적용할 의도였다고 한다.
(5) 1905년 공립협회
소학교를 다니며 학업에 힘쓰던 도산은 미국에 거주하는 동포들이 어려운 생활가운데 미국인들로부터 멸시를 받으며 살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을 보았다. 이에 도산은 학업을 그만두고 교민지도에 나선다. 이렇게 해서 결성된 것이 이강. 정재관. 김성무 등과 함께 한 '한인 친목회' 이다. 이후 일자리를 찾는 동포들과 함께 로스엔젤레스 근교 리버사이드로 이주하여 '한인 친목회' 에서 더 발전된 형태의 '공립협회' 를 창립하게 된다. 이 공립협회는 교포 노동자의 권익 옹호와 생활 향상을 목적으로 하였고 점차 발전하여 49명으로 시작한 회원이 600명에 달하도록 성장하였다.
(6) 1907년 신민회
1907년 2월 고국에 돌아온 도산은 구국 운동을 위한 비밀 결사인 신민회를 결성한다. 신민회의 목적은 1. 민족의식과 독립사상 고취, 2. 동지의 규합과 국민운동 역량 축적, 3. 청소년의 교육 진흥, 4. 상공업의 증진 등으로 자본주의적 산업발전과 근대적 시민양성을 통한 국권회복을 일차적 목표로 한 것이다. 청년 학우회와 대성학교는 이 조직을 통해 도산이 가장 심혈을 기울인 사업이었고 태극서관, 도자기 회사 등도 도산의 계획으로 창립되었다.
(7) 1908년 대성학교
대성학교는 도산이 민족의 실력양성을 위해 평양에 세운 중등교육기관 이다. 대성학교의 체조시간은 군사훈련을 방불케 한다고 알려져 눈길을 끌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세워진 각 사립학교에서도 체조시간을 강건한 신체와 정신을 단련하는 과목으로 중요시 하고 있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어서 많은 학생들과 교육자들, 심지어 일제에게도 주목을 받고 있다. 운동장에서 곤봉을 둘러메고 <행보가>를 부르며 행진하던 학생들은 '일본의 무력 앞에 힘없이 쓰러지는 망국의 비운을 눈앞에 둔 우리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강병이나 군대는 이미 해산되어 강병정책의 수행이 불가능하니 학교교육의 체조시간을 통해서나마 이러한 민족적인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며 우렁찬 기상을 내보였다. 또 이따금 야간에 비상소집령을 내려 험산준곡에서 담력을 기르게 하기도 하며 눈 덮인 광야나 폭염을 가리지 않고 전술강화훈련을 시키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군사훈련을 방불케 하는 사립학교의 병식교련은 일본인들에게 눈엣가시가 아닐 수 없어 곳곳에서 충돌사건이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8) 1910년 2차 망명
일제의 독립운동에 대한 탄압이 점점 심해지면서 도산 선생과 신민회 동지들은 국내와 국외로 세력을 나누어 힘을 기르며 조국 광복을 위해 힘쓰기로 결정하고 국내 책임으로는 서울에 전덕기, 평양에 안태국, 평북에 이승훈, 황해에 김구 등을 정했다. 구미 방면은 안창호·이갑이 맡고 연해주는 이동녕이 맡았다. 1910년 4월 8일 도산은 신민회 대변인격이었던 언론인이자 사학자 신채호·김지간과 일행이 되어 서울을 떠나 망명길에 올랐다. 이때 도산 선생은 망명의 길에 오르게 된 자신의 심정을 <거국가>를 지어 표현했다.
(9) 1913년 흥사단
1913년 5월 13일,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강영소의 집에서 한국 8도를 대표하는 흥사단 창립 위원들이 모여 흥사단 창립 총회가 개최되었다. '흥사단' 이라는 이름은 1908년에 본국에서 유길준이 조직했던 애국 단체의 이름이다. 사(士)를 일으킨다는 뜻으로 '진정한 애국자를 일으킨다' 는 뜻이었다. "흥사단의 목적은 무실역행으로 생명을 삼는 충의남녀를 단합하여 정의를 돈수하고, 덕·체·지 삼육을 동맹 수련하여 건전한 인격을 작성하고 신성한 단결을 조성하여 우리 민족 전도 대업의 기초를 준비함에 있다" 는 것이 흥사단의 약법에 명기된 목적 조항이다. 도산 선생은 이 흥사단의 조직을 통하여 민족의 독립에 앞장 설 차세대 지도자를 길러내는 데 힘썼다.
(10) 1919년 상해임시정부
1919년 3·1일 독립만세운동과 함께 각지에서 임시정부를 조직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일었다. 도산 선생도 3. 1 운동 소식을 듣고 미주거민 대표로서 독립자금을 모아 상해에 도착하여 상해 임시정부에 합류하여 활동하기 시작했다. 상해에 도착한 지 한 달이 지난 1919년 6월 28일에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내무 총장 겸 국무총리 서리에 취임했다. 도산은 대한인국민회로부터 지원받은 자금으로 프랑스 조계에 임시 정부 청사를 마련하고 청년 독립 운동가들과 함께 일을 시작했다. 또한 1920년 상해에 통합된 임시정부가 자리를 잡기까지 큰 공헌을 하였다.
(11) 1921년 국민대표회의
임시정부가 대통령 이승만과 국무총리 이동휘의 독립운동 방략의 차이로 곧 내분에 휩싸이자 대통령 이승만의 위임통치안을 두고 논란이 거듭되면서, 이승만 대통령 취임 반대 운동이 전개되었다. 여기에 박용만의 외교총장 취임거부, 북경에서의 반 임정운동 등으로 임시정부가 흔들리자 도산은 대통령직을 수행할 수 있도록 이승만 대통령을 중심으로 단결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정국을 수습할 수 없게 되자 1921년 5월에 노동국 총판직을 사임하고, 여운형과 함께 국민대표회의 개최를 주도하였다. 1923년 124명의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었으나 여기서도 창조파와 개조파의 의견차이가 좁혀지지 않아 결국5월 15일 63회 회의를 끝으로 국민대표회의는 결렬되고 말았다.
(12) 1932년 상해의거로 체포
윤봉길 의사의 상해 홍구 공원 폭탄 사건이 있은 후, 사전에 비밀 연락을 받지 못한 도산은 프랑스 조계에 있는 친구 이유필의 아들과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유필의 집을 방문했다가 일본 영사관 경찰과 합세한 프랑스 조계 경찰에 체포되었다. 도산은 국내로 압송되어 경찰 심문을 받는 과정에서 그는 꼿꼿한 자세로 "나는 밥을 먹어도, 잠을 자도 민족을 위해 먹고 잤으니, 앞으로도 민족을 위해 일하고자 함은 변함이 없다" 라는 자신의 행적과 생각을 주장하였다. 재판장에서도 도산의 의연하고 신념에 찬 모습으로 일관하였다. 도산은 결국 치안유지법 위반이라는 죄목으로 징역 4년을 선고 받게 되었다.
(13) 1935년 가출옥
1935년 2월 10일, 도산은 대전형무소에서 가출옥하게 되었다. 나오는 길에는 조만식·김동원·여운형·주요한 및 그 조카딸 등이 영접했다. 그들과 함께 서울로 올라온 도산은 그를 찾아오는 많은 사람들과 대화하고 평양으로 올라가 고향을 방문하였다. 이후 지방을 순회하였다. 그러나 가는 곳마다 경찰의 감시가 심하고 도산을 만나는 사람들은 경찰의 호출을 피할 수 없었다고 한다.
(14) 송태산장에 은거
영·호남과 평북 일대를 여행한 도산은 민간인들에게 괴로움을 주는 것을 피하여 송태산장에 은거하기로 했다. 송태산장은 평안남도 대동군 대보면 대보산 기슭에 도산이 손수 감독하여 지은 자그만한 집이다. 도산이 이곳에 은거함으로 인해서 송태산장은 점점 민족주의자들의 집결터가 되어 갔다. 도산은 총독부가 강제로 제재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민족성 혁신 사업을 계속하려고 한 것이다. 산장으로 찾아오는 많은 친구와 동지들과 더불어 토론하고 연설하면서 도산은 평남선 강선역에서 북쪽으로 바라다보이는 달마산 아래에 도산이 평생 꿈꾸어 왔던 이상촌을 건설할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으나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15) 1938년 서거
1937년 6월 28일, 도산은 '동우회사건'으로 다시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복역하게 된다. 이때 도산의 건강상태는 급속하게 나빠져 결국 12월 24일 병보석으로 재판소가 지정한 경성제국 대학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그의 생질 김순원과 청년 박정호 두 사람이 그의 입원 중 시중을 들었으며 나중에는 그의 절친한 동지인 이갑의 딸 이정희가 끝까지 지성껏 병 간호를 했다. 죽는 순간까지도 그는 나라를 걱정하며 민족의 실력을 기르고 독립을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결국 1938년 3월 10일 혼수 상태에서 일본 천황을 꾸짖은 도산은 끝내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그의 죽음이 알려지자 일제는 조문객의 방문을 철저히 금지시키고 망우리 묘소 장지에도 가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많은 젊은이들은 "선생님이 남긴 말씀처럼 꾸준히 실력을 쌓아 나라의 독립을 이끌어 내겠다" 며 다짐했다고 한다.
사상
(1)무실
실은 진실,성실의 '실'이요, 실질 , 실력의 '실'이다.'실'은 참이며 알맹이다.거짓이 없는 것이 '실' 이다. 무(務)는 힘쓴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무실'이란, '참되기를 힘쓰자.','진실을 실천하자 '는 뜻이다.
(2)역행
힘써 행하라는 것으로 나 자신부터 몸소 행하고 실천하는 것이다.그는 백가지의 논설 보다는 하나의 본보기가 더 힘있고 효과가 크다고 생각하였다.그는 자기 스스로 실천의 본보기를 보였다.행함으로써 배우고 배움으로써 행하자는 학생 일치 의 사상을 그는 강조 하였다.
(3)충의
사람은 어떤 일을 하든 다른 사람에 대해서 언제나 참되고 신용이 있고 충성심이 있어야 하며 옳은 일이면 어떤 것이든지 일단 작정을 하면 내게 이롭건 불리하건 끝까지 성실성을 다하고 신의를 지켜야 한다.
(4)용감
사람은 무슨 일에나 용기가 있어야 한다.참과 거짓, 의와 불의 를 준엄하게 가르고 참의 편에서 움직이고 살아가려면 언제나 용기가 필요하다.우리는 용기가 있는 인간 용감한 국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업적
(1)독립 협회와 공립 협회 활동
평범한 환경에서 태어났던 도산이 우리 나라 근대 민족 운동의 흐름 속에 처음으로 뛰어든 것은 독립협회 활동에 가담하면서부터 였다. 비록 1년여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는 독립협회의 평양지회 설립에 중요 인물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고,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에서의 뛰어난 연설로 상당한 대중적 명성도 얻었다. 그가 나름대로 하나의 독자적인 사회세력을 결집하여 주도하는 자리에 서게 된 것은 미주의 교민사회에서 공립협회를 만든 다음부터였다. 즉 1902년 유학을 위해 미국에 갔던 그는 그곳 동포들의 어려운 처지를 보고 생각을 바꾸어 공부를 포기하고 교민지도에 나섰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막 형성되고 있던 초창기 미국 교민사회에서 대중적 지도자로서 성장해 공립협회의 초대 회장이 되었다. 공립협회는 1905년 4월에 창립되어 그가 귀국하기까지 직접 이끌었던 2년 미만의 단기간에 600명의 회원을 모았다. 또 3층건물을 회관으로 가졌으며, 매월 두 차례 공립신보(共立新報)를 발간해 당시로서는 국내외를 통틀어 매우 힘있는 단체 가운데 하나로 자라났다.
(2)신민회 활동
도산이 미국에 있던 5년 동안 국내정세는 날로 위기가 깊어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동지들과 진지한 상의 끝에 본격적인 구국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귀국하기로 결심하였으며, 1907년 초 귀국 길에 올랐다. 이 때 그의 가슴 속에는 이미 국내에서 전개할 구국운동의 새로운 목표와 방법론과 조직형태가 그려져 있었다. 즉, 민주공화국가건설(民主共和國家建設)이라는 민족운동의 목표와 독립전쟁준비론(獨立戰爭準備論)이라는 국권회복의 방법론과 비밀결사인 신민회(新民會) 조직안이 그것이었다.귀국 즉시 그는 양기탁(梁起鐸)·전덕기(全德基)·이동휘(李東輝)·이 갑(李甲)등 국내 신지식인 계열 계몽운동의 핵심인물들을 찾았다. 그의 새로운 구상을 설명하면서 비밀결사를 조직하는 일에 착수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한말 애국지사들의 구국운동을 보이지 않는곳에서 총지휘했던 신민회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신민회의 총감독에는 비록 대한매일신보사(大韓每日新報社)의 총무였던 양기탁이 추대되었지만 그 조직과 활동을 실제로 이끌어간 중심인물은 물론 도산이었다. 이는 곧 그가 마침내 우리나라 근대 민족운동의 중심적인 위치에 서게 된 것을 뜻하였다. 1907년 11월 당시 우리나라를 실질적으로 통치하던 통감 이토가 애국지사들을 달래기 위한 공작의 일환으로 그를 초대해 오랜 시간 면담했던 것도 물론 이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1911년 이른바 105인 사건으로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해산당할 때까지, 약 3년간 그가 주도했던 신민회운동은 비록 나라를 지키는 데는 실패하였지만 일제하의 독립운동에 커다란 원동력이 되었다.
(3)대한인국민회와 흥사단 활동
1909년 10월에 안중근(安重根)이 만주의 하르빈역에서 이토를 총살한 사건이 일어나자 일제는 그 배후인물의 한 사람으로 도산을 지목해 검거하였다. 약 두 달 간 갇혀 있으면서, 그는 심한 고문을 받았지만 끝까지 관련사실이 없다고 버텨 풀려 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국내에서는 더 이상 활동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몇몇 동지들과 함께 국외로 망명할 것을 결정했다.그는 처음 만주와 러시아의 접경지대에 농장을 개척해 독립운동의 기지로 만들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망명한 동지들 간에 의견이 일치되지 않자 결국 그는 가족과 튼튼한 지지기반이 있는 미국으로 가게되었다.당시 미국에는 그의 도착 직전인 1910년 5월 통합교민단체로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가 만들어져 있었다. 이는 공립협회를 비롯한 미국 본토와 하와이의 각 한인단체가 합쳐진 조직이었다. 처음에는 북미 지방총회와 하와이 지방총회만이 있었으나, 계속하여 시베리아 지방총회와 만주 지방총회도 설립되었다. 그리하여 1912년 11월에는 도산의 주관으로 4개 지방총회 대표자가 모여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를 결성하고, 그를 중앙총회장으로 선출하였다. 이로써 해외의 전교민이 그를 대표자로 하여 하나의 조직 속에 결집한 셈이었다.국내가 일제의 완전한 지배하에 들어간 상황에서 도산은 전체 민족을 대신해 해외에 사는 교민들이야말로 현실적인 독립 운동의 기반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우선 해외한인의 총단결을 가장 우선적인 과제로 여겼는데, 이제 그 목표의 일단은 이룬 셈이었다. 중앙총회의 결성선포문에서 "...형질상 대한제국은 이미 망하였으나, 정신상 민주주의 국가는 바야흐로 발흥되며 그 희망이 가장 깊은 이때..."라고 말한 것은 이 같은 그의 뜻이 반영된 것이었다. 어쨌든 해외 한인의 대동단결이라는 과제를 일단 해결한 그는, 다음 해인 1913년 흥사단을 조직하였다. 흥사단은 국내에서 그가 세웠던 청년학우회의 취지를 계승한 것으로 민족운동의 간부를 양성하려는 목적에서 만든 청소년 훈련단체였다. 흥사단은 미국에 본부를 두었는데, 3·1운동 후에는 중국과 국내에도 회원을 확보해 지부를 설치했다.
(4)임시 정부와 국민 대표회 활동
1918년은 특히 약소 민족들에게 세계정세 변화에 대한 기대감이 높았던 해였다. 1차 대전이 끝나고 파리에서 강화회담이 열릴 예정이기 때문이었다. 우리 교민들 사이에서도 독립운동에 대한 열기가 고조되었는데, 이에 도산은 아직 그 시기가 아님을 말하고 좀더 실력배양에 노력할 때라고 말했다.그러나 이듬해 예상치 못한 3·1운동의 소식에 접하게 되자 그는 일제의 총칼을 무릅쓰고 맨손으로 총궐기한 국내 동포들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독립운동에 착수할 수 밖에 없다고 결심했다. 그리하여 그는 국민회의 대표 자격으로 중국에 건너갔다. 1919년 5월말 그가 상해에 도착했을 당시에는 그곳에도 이미 임시정부가 조직되어 있었으며, 그는 내무총장에 선임되어 있었다. 그는 당초 정부 형식이 아닌 정당 형식의 독립당 결성을 주장했다. 하지만 임시정부 수립은 이미 기정 사실로 되어 있었고, 청년들은 그의 취임을 강력히 재촉하였다.그는 첫 각료로 취임해 국무총리 대리를 겸하면서, 아직 명의상의 정부에 불과한 임정의 실체를 갖추는 데 전력을 쏟았다. 국민회에서 가져온 자금으로 정부청사를 얻고 각료로 추대된 각지의 인물들을 초치하였으며, 독립신문 발간과 독립 운동 방략 작성을 주도했다.무엇보다도 이 때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일단 수립된 임정을 권위 있는 전 민족의 최고 지도기관으로 만들어 장기적인 독립운동에 대비하는 것이었다. 상해 임정 외에도 이미 연해주에 대한국민의회 정부가 조직되어 있었고, 서울에서도 한성정부의 구성이 발표되어 있는 실정이어서 그 통합이 시급하였다. 그는 3개월에 걸친 헌신적인 노력 끝에 결국 9월에 들어 통합을 이루어냈다. 이후 통합 임정의 국무총리인 이동휘를 비롯하여 각부 총장들이 차례로 취임하고 대통령 이승만(李承晩)까지 합류함으로써, 일단 임정은 독립운동의 최고 지도 기관으로서 면모를 갖추는 데까지는 성공했다.그러나 임정의 중심인물이 되어야 할 이승만과 이동휘 간에는 갈등과 대립이 심각했다. 그의 적극적인 중재에도 불구하고, 먼저 이동휘가 임정을 떠났으며, 이승만도 미국으로 가버렸다.도산은 임정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전체 독립 운동자가 한번 크게 모여 다시 의견을 결집할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임정을 사퇴한 그는 국민대표회 개최를 위해 노력했다. 마침내 1923년 초부터 국민대표회가 열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마저 새정부창조론·임정개조론·현상고수론 등으로 갈려 끝내 유회되고 말았다. 이에 그는 5년 간의 활동을 되돌아 보며, 재충전의 기회를 갖기 위해 1924년 말 일단 미국으로 돌아갔다.
나는 안중근 의사 처럼 이렇게 나라를 위해 애쓰는 분들이 정말존경스럽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안중근 의사가 가장존경스럽다.
왜냐하면 안중근의사가 가장 존경스럽고 대단한일을 하셨기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안중근의사가 가장 존경스럽고 가장 대단한 인물이고 나의 우상이라고했각한다 .
첫댓글 인터넷에서 찾고 복사했네
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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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짜라고 민지야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