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 여행1 - 시조에서 산조까지 가라스마 거리에서 옛날 건물들을 보다!
2024년 11월 19일 간사이지방 단풍여행을 위해 오사카 간사이공항에 내려 JR 에서 1만엔
이 충전된 이코카 카드 ICOCA CARD 를 현금으로 구입한 후에 3110 엔
하는 특급 하루카 기차에 타고는 1시간 20분 후인 18시 04분에 교토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하루카 특급에 앉아서 보자니 우리 7호차는 화장실이 없어 살펴보니 6호차에는 있으니 한시간쯤
지나 앞으로 가려고 하니 문이 열리지 않는지라 다음 정거장에서 살펴보니! 세상에나?
앞에는 6호차 차량이 아니라 운전사가 타는 기관차 차량이며 그 앞쪽에 다른 기관차와 맞물려
있는데.... 도중에 오래 정차한 역도 없었고 또 쿵! 하는 충격도 없었는데
언제 어디서 이렇게 연결이 됐나요? 원래 이런 상태인데 기차가 들어올 때 못 본 것일까요?
의문을 풀지는 못하고 예전대로 18시 04분에 하루카 기차는 정확하게 교토역에 도착
하는지라 배낭을 메고 나오는데 여기 역사 내부의 천장은 참으로 인상적인
구조라는 생각을 하면서 밖으로 나오니 조명이 아름다운 교토타워가 우릴 반깁니다.
한참 보다가 Bus Ticket Center 에서 원데이 패스(地下鉄パス 1日券 Subway & Bus 1 Day-Pass)
1,100엔 짜리를 석장을 구입하는데 24시간용이 아니니 패스를 사용하지 않고 230엔 균일
요금인 206번 버스를 타고 도요코인 호텔에 도착해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아 몸을 담그고 1박 합니다.
원데이패스는 지하철 + 빨강색 게이한 버스 + 녹색 시 버스(교외의 다카오, 오하라 산젠인,
구라마, 기부네도 가능) 를 탈수 있는데 한큐선 기차, 게이한선 기차 및
JR (파랑색 버스) 은 불가능하며..... 지하철역, 편의점, 버스 기사에게 구매할수 있습니다.
11월 20일 호텔에서 주는 간단한 뷔페식 음식을 먹고는 일찍 호텔을 나와서는 비와호수 남쪽에
자리한 이시야마데라로 가기 위해 먼저 버스를 타러 가는데 길에 저전거 도로 표시가
있는걸 보는데 자전거로 출퇴근을 하는 나라는 네델란드와 중국에 일본 세나라 인 것 같습니다.
우리 도요코인 고조 오미야 호텔은 니시혼간지 서북쪽 오미야 大宮(대궁) 거리에
있으니, 조금 내려가서 시마바라구치 島原口(도원구) 정류소에서
미리 작성한 여행계획서 대로 32번 버스를 타려고 하는데 그런 버스가 없습니다?
버스 노선도를 보고는 207번 버스를 타고는 시조오미야 四条大宮 정류소를 지나6정거장인 시조가라스마
四条烏丸 정류소에 하차하는데.... 다른 도의 버스는 거리 요금제이니 뒷문으로 타면서 정리권이라는
작은 종이를 뽑으면 번호가 적혀있으니 내릴 때 그 번호에 해당하는 만큼의 현금을 요금통에 넣으면 됩니다.
이때 거스름돈을 주지 않으니 운전수 옆에 보면 1천엔 지폐와 500엔 동전을 바꾸는 구멍이
있으니 넣어서 잔돈이 나오면 그만큼을 정확히 세어 넣아야 하지만 교토
버스는 전구역이 230엔 균일제 인지라 정리권 자체도 없고 저 금액을 통에 넣으면 됩니다.
오늘은 현금이 아니라 원데이 패스를 사용하기 때문에 내릴 때 패스를 앞쪽 운전수
옆의 철제 상자에 녹색 구멍에 넣으니 날짜가 찍혀 나오는데 다음
부터는 패스를 넣을 필요는 없고 기사에게 오늘 날자 부분을 보여 주고 내리면 됩니다.
시조가라스마 四条烏丸 정류소에서 내렸으니 바로 지하철 시조역으로 내려가도 되지만......
교토 거리를 익힐겸 가라스마거리(烏丸通 오환통) 를 북쪽으로 6블럭을 걷기로 합니다.
지금이 아침 출근 시간인지라 직장인들과 학생들이 총총걸음으로 걷는데.... 거리에는 왜정시대 그러니까
일본의 시대 구분으로는 메이지 시대와 다이쇼 시대에 지은 듯한 참으로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보입니다.
에도 도쿠가와 막부의 일본은 조선 처럼 기본적으로는 쇄국정책을 유지했지만..... 조선처럼
철저한 것은 아니라서 스페인과 포르투칼인들은 쫓아 냈지만 규슈
나가사키 데지마섬에 종교 전도에는 관심없고 통상만 원하는 네델란드인들을 상주시킵니다.
그들 네델란드인들로 하여금 유럽과 동남아 및 중국과의 무역을 전담시켰으니 네델란드인들로부터
유럽 사정은 물론이고 동남아와 중국 사정도 들어 알고 있었으며 네델란드 책인 인체
해부도를 보고는 실제 사형수 배를 갈라 비교해 정확하다는 것을 알고는 일본어로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중국 소식에 대해서는 1840~2년에 벌어딘 아편전쟁에서 하늘같은 청나라가 영국에 참패한 사실에 대해
조선은 매년 4회씩 정기적으로 중국에 간 사신이 청나라에서 발행한 관보를
입수하기는 했지만 청국의 입장에서 쓴 것이라 중국이 잔쟁에서 이겼는지 졌는지도 정확히 몰랐습니다.
그래도 저 관보의 행간을 읽어 졌다는 사실 정도는 짐작하고 불안해 하다가 중국 베이징에 다녀온 사신
이 “베이징 시내는 평소 처럼 평안합디다” 라는 보고에 임금 헌종과 대신들은 가슴을 쓸어
내리고는 저런 사실 자체를 잊어버렸으니... 외적의 침입에 대비한 국방의 대책이란건 전혀 없었습니다.
반면에 일본은 나가사키의 네델란드인들을 통해 싱가폴에서 발행된 영자지 신문을 입수한데다가
또 간접적으로 동남아와 중국 상인과 현지인들을 통해 전쟁의 실상을 정확하게 파악하였습니다.
이후 중국에서 2년이 지난 1844년에 중국인 웨이위안이 아편전쟁의 과정을 밝힌
“해국도지 (海國圖誌)” 를 출판하니 조선은 이교도인 천주교도들의
사악함과 그 정체를 밝힐수 있는 책이라며 천주교도 탄압에 이용하는데 그쳤습니다.
일본은 막부의 로쥬 부터 260여명의 번주와 하급 사무라이까지 다투어 읽고 대책을 논의 합니다. 도쿠가와
막부는 중국을 참패시킨 서양 대책으로 마츠시로 번주 사나다 유카쓰라등을 해상 방어에 임명합니다.
그리고 후쿠자와 유기치, 요시다 쇼인과 3대 사상가인 사쿠마 쇼잔 (佐久間象山) 은
고문에 임명된후 아편전쟁 보고서 해방팔책(海防八策) 을 작성하고
‘동양의 도덕, 서양의 기술’ 이란 모토로 대포 주조, 유리제작과 종두법을 도입합니다
그러니까 일본인들은 저 “해국도지(海國圖誌)” 를 서양의 침략으로 부터 일본을 방어할 비책으로
여긴데 비해.... 조선은 서양 세력의 침공에 대비할 국방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사교(邪敎)
인 천주교의 정체를 밝힐 수 있는 책이라 여겨서 반겼는데, 똑 같은 책을 보고도 이처럼 다릅니다.
그후 2차 아편전쟁에서도 영국은 청나라를 패배시켰으며 그후 영국은 또 프랑스와 손을
잡고 천진을 함락하고 베이징을 위협해 항복을 받으니..... 놀란 일본의 막부는
서양 선박에 대한 적대정책을 철회하고 총과 대포 및 증기선 수입등 개혁에 착수합니다.
훗날 청나라는 1876년 영국회사가 부설한 상해와 오송(吳淞)간 철도를 운행했지만 풍수에 안맞는다는 반대로
곧 철거했으나, 일본은 페리제독이 1854년에 선물한 모형 기차를 뜯어보고는 영국 런던대학교에
유학한 이노우에 가오루가 책임자가 되어 18년만인 1872년에 도쿄와 요코하마 간 철도를 자력으로 부설합니다.
영국은 1863년에 일본의 사쓰마번을 그리고 영국, 미국, 프랑스 네델란드 함대는 조슈번을 침공
했으며, 조선은 1866년 프랑스 병인양요와 1871년 미국 신미양요 침략을 당했는데,
전쟁을 치른 후에 대책이 1842년 아편전쟁 때 처럼..... 조선과 일본은 전혀 다르게 행동했습니다.
조선은 대원군 하에서 병인양요 프랑스 함대와 신미양요 미국 함대가 스스호 물러가자 승리했다면서
척화비를 세우고는 외국과 교섭을 엄금하고 쇄국정책을 더욱 단단하게 했으나 일본은 항구를
개항하고 유학생을 미국과 유럽에 보내서 서구문명을 받아들이니 이후 두나라 운명을 바꾸게 됩니다.
아시아 40개 국가 중에 37개국은 나라가 망해 터키, 포르투칼, 네델란드, 영국, 프랑스 그리고 미국의
식민지로 전락했고 반(半) 식민지는 중국과 태국 두나라 이며 완전한 독립을 유지한 나라는
일본 단 한나라 뿐이라는 생각을 하는데..... 여기 건물은 산기즈미 방식으로 쌓은 성 처럼 날렵합니다?
조선이 쇄국중일 때 일본은 서구문명을 받아들이면서 수많은 유학생들을 서양에 보내 그들이 귀국하니
군수공장과 조선소, 철도와 방직공장, 중학교와 대학교에 신문사와 병원 그리고 무역
회사와 보험사 등을 설립해 부국강병의 길에 들어서 철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해 조선을 취합니다.
이런 과정에서 서양식 벽돌 건물이 일본 전역에 걸쳐 엄청나게 세워졌으니.... 오늘 우리 부부가 여기
가라스마거리(烏丸通 오환통)에서 교토은행등을 보는데, 일본은 암스테르담역을 그대로 모방해서
도쿄역을 지었으며 이후 조선총독부는 도쿄역을 보방해서 경성역(서울역 구건물) 을 지었던 것이지요?
이런저런 옛날 생각을 하는 새에 어느듯 우리는 지하철 가라스마오이케역 (烏丸御池駅) 에
도착했기로...... 이제 교토의 동쪽이자 비와 호수의 남쪽 강변에 자리한
이시야마데라 (石山寺)로 가기 위해 지하로 내려가서는 도자이센(동서선) 지하철에 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