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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OH ACUPUNTURA 동방활법 원문보기 글쓴이: 오세형(SP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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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력 7월7일은 하늘에서 견우와 직녀가 만난다는 날이다.
이것이 참으로 묘한것이 지구의 지축과 연관이 있다.
서양에서는 1월 21일은 염소자리로 나타 내고 7월 21일은 게 자리로 표현을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남회귀선은 서양에서는 염소자리 선이라고 불리우며
북회귀선은 게자리 선이라고 불리운다.
즉
우리가 알고 있는 침구 철학에서 수승화강이라는 말속에는 심장과 신장을 중심 축으로 보는데
우주의 눈으로 보면 양과 소의 동물의 성질로 나타 내고 있다.
즉
신장은 12월(쥐)이고 심장은 6월(말)로 배당한다.
비장은 염소/양으로 배당을 하는데 동양에서는 7월로 배당을 한다.
그러나 서양에서는 1월로 배당을 한다.
12지에서 자축인묘....에 축은 염소 즉 폐가 아니라
우주의 관점에서 볼때는 비장의 배당하는 것이 더 옳은 이야기 일런지도 모른다.
(까페에 여러 그림이 있으니 참고 바람)
스페인에도 견우직녀와 비슷한 축제가 있다.
매년 7월 6일에 시작하는 축제이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동양의 견우직녀의 의미가 담겨 있다.
스페인의 소의 축제를 소개 한다면?
매년 7월 6일 에 시작을 한다. 그 의미는?
한국도 견우직녀 축제를 하면 좋으련만.... 이것이... 쉽지가 않다???
Festival of San Fermin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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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색 상의를 입고 빨간색 스카프를 맨 참가자들 | |
행사 정보 | |
기간 | 매년 7월 6일 정오부터 7월 14일 자정까지 |
관람시간 | 축제 기간 중 24시간 |
장소 | 스페인의 팜플로나 |
참가규모 | 매년 약 100만 명 이상 관람객 방문 |
주최 | Pamplona City and Fiesta |
공식행사 | 소몰이, 투우, 행진 등 |
웹사이트 | http://www.sanfermin.com |
산 페르민 축제(영어: Festival of San Fermin, 스페인어: Fiesta de San Fermin)는 스페인의 북부 나바라 주의 수호성인이자 3세기 말 주교였던 산 페르민을 기리기 위해 매년 7월 6일에 나바라(Navarra) 주의 주도인 팜플로나[1] 17, 18세기에는 종교적 색채가 두드러졌으나 19세기에는 여자를 대포 속에 넣고 쏘는 오락성 경기와 가면을 쓰고 분장을 한 형태의 행렬이 추가되는 등 오락적 성격이 강한 축제로 변모하였다.[2] 현재 축제 기간 동안에는 소몰이, 투우
구전에 의하면, 3세기 경에 산 사투르니노(San Saturnino, 나바라 주에서는 San Cernin으로도 알려져 있다)가 기독교[3] 팜플로나의 원로원[3] 그의 아들인 페르민은 어렸을 적 오네스토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페르민이 17살이 되던 해부터 주변 지역에서 설교를 하기 시작했다.[3] 그는 24세에 오네스토에 의해 주교로 임명되었으며 31세의 나이에 기독교를 공부하고 복음[3] 처음에는 아키텐(Aquitaine, 프랑스 서남부의 지방), 오베르뉴(Aquitaine, 프랑스 중부의 지방)와 앙주(Anjou, 프랑스 서부의 옛 공국)에서 설교 활동을 하다가 후에 아르메니아(Armen)로 가서 많은 사람들이 개종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3] 그러나 이 지역의 권력자들과 마찰이 생기면서 결국 그는 303년 9월 25일 프랑스 북부 아미앵에서 참수당하여 순교[4] 이 지역을 "세르닌 성인의 작은 우물(영어: Small Well of Saint Cernin, 스페인어: Pocico de San Cernin)"이라고 부른다.[5] 몇몇 기독교인에게 비밀리에 묻힌 그의 시신은 몇 세기가 지난 615년 7월 13일에 주교 산 살비오(San Salvio)의 관할권에서 발견되었고 후에 근처의 다른 도시로 옮겨져 15세기 고딕 양식의 성당 제단 뒤에 보존되어 있다.[3] 산 페르민은 현재 산 프란시스 사비에르(St Francis Xavier)와 함께 나바라 주의 공동 수호성인이며 제화공, 와인 무역업자, 그리고 제빵사들의 수호성인이기도 하다.[5]
이 축제의 기원은 정확하지는 않으나 기록에 처음 등장한 것은 13~14세기이다.[6]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에서는 각 지역마다 수호성인이 있고 그 성인[7] 본래 산 페르민 성축일은 9월 24일이었으나 이 시기는 비가 자주 오는 우기[8] 1591년에는 7월 6일부터 다음날인 7일까지 열렸고 이 기간 동안 퍼레이드, 음악, 연극 등의 행사를 하였다.[9] 그 다음해인 1592년부터는 6일부터 10일까지 열렸으며 춤과 불꽃놀이 등의 행사가 추가되었다.[10] 현재는 7월 14일까지 9일간 열린다. 산 페르민 축제는 17, 18세기까지 종교적 성격이 강했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는 점차 사라지고 대신 퍼레이드와 같은 행사가 추가되며 유희적 색채가 짙어지면서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산 페르민 축제가 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데는 헤밍웨이 스페인 내전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53년, 그리고 1959년에 마지막으로 이곳에 총 아홉 차례 방문하여 이 축제에 참가하였다.[11] 헤밍웨이는 당시 그가 참여했던 산 페르민 축제에 큰 감명을 받고 그의 소설 《해는 다시 떠오른다》(1926) 《The Death in the Afternoon》(1932)에 산 페르민 축제의 열기, 특히 소몰이의 모습을 자세히 묘사했다. 팜플로나 시는 헤밍웨이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1968년 7월 6일 헤밍웨이 동상을 건립하고 그의 이름을 딴 거리 및 공원을 만들었다.[12] 또한 그가 자주 다녔던 카페와 레스토랑, 호텔의 대다수가 현재도 존재하여 많은 관광객이 찾아가는 대표적인 관광 명소가 되었다.[13] 실제로 미국인들의 산 페르민 축제에 관한 관심은 미국인의 산 페르민 관련 사이트 접속률이 스페인 현지인의 약 3배가량 되는 것으로 보아 상당하다고 할 수 있다.[14]
축제는 매년 스페인 나바라 지방의 자치[15] 산 페르민 축제의 준비 기간에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통해 축제의 공식 포스터를 공모[16] 또한 축제의 안전과 질서 유지를 위해 공무원, 경찰 등의 인력을 이용하기도 하지만 축제 분위기의 활성화를 돕고자 축제의 공식 도우미인 ‘뻬냐스(penas)’를 미리 선발한다. 뻬냐스는 축제의 준비부터 축제 기간과 그 후까지의 모든 행사에 있어 원활한 진행을 돕는다. 산 페르민 축제의 가장 큰 행사라고 할 수 있는 소몰이를 위해 일 년 간 몸을 만들어 축제 기간의 아침마다 진행되는 소몰이에 참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 중 일부는 경찰도 포함되어 있으며, 이들은 소몰이에 참석한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 직접 참여한다.[17] 인구 20만 명의 팜플로나 시는 축제 기간 중 50만명 이상의 관광객들로 붐비게 되어서 팜플로나의 모든 숙박 시설은 몇 달 전부터 예약이 되어 있을 정도로 축제 기간 동안 숙박시설이 매우 부족하다.[18] 팜플로나는 유럽에서 축제 기간 중 거리에서 자는 것이 허용된 유일한 도시이기 때문에 축제에 참여한 관광객들 중 방을 구하지 못한 사람들은 공원이나 광장에서 밤을 새운다.[19]
산 페르민 축제에는 다양한 문화, 예술, 오락 프로그램이 24시간 준비되어 있다. 팜플로나는 주변의 여러 위성 도시[20] 축제의 행사는 시장, 경찰, 종교인, 지역 명사 등이 참여하고 시에서 직접 주관하는 공식 행사뿐 아니라 음악과 무용 등의 작은 공연, 전시회 등과 같은 문화 예술 행사, 전통 민속놀이와 같은 오락 프로그램 등 다양한 연령층을 위한 행사들이 있다. 그 밖에도 전통 음악에서 록에 이르는 여러 종류의 음악 페스티벌이 있고 불꽃놀이, 성당에서의 종교적 의식 등 많은 행사가 이루어진다. [20] 실제로 고정된 프로그램은 많지 않으며 대부분의 프로그램은 지역민들, 단체 그리고 축제 참여자들이 그 때 그 때 자유롭게 만드는 것이 많다. 대표적인 프로그램에는 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추피나소(Chupinazo), 거인 행렬(Gigantes y Cabezudos), 리아우 리아우(Riau-Riau), 소몰이(Encierro)와 포브레 데 미(Pobre de mí́)가 있다.
추피나소(바스크어[21] 스페인의 전 공중파 방송국들이 생중계를 할 만큼 하나의 장관을 이루는 추피나소의 역사는 중세부터 이어져 온 산 페르민 축제의 전체 역사에 비해 매우 짧다. 1931년 팜플로나의 지역민이었던 에세파레(Etxepare)는 축제의 시작을 시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별다른 행사 없이 폭죽을 발사하였다.[22] 시간이 지남에 따라 폭죽 발사 자체가 큰 호응을 얻으면서 이것을 보기 위해 시민들이 시청 광장에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스페인 내전이 끝난 1939년에 시 의원 호아낀 윤다인(Joaquin Ilundain)과 호세 마리아 페레스 살라사르(Jose Maria Perez Salazar)는 에세파레에 의해 시작된 전통을 채택하여 이때부터 발사 전 장엄한 행사를 거행하기 시작하였다.[23] 1941년부터는 시 의원들이 돌아가면서 폭죽 발사를 맡기로 하여 오늘날과 같은 형태가 되었고 프랑코 독재가 끝난 후 민주화[24] 팜플로나의 의원들이 폭죽을 발사하는 것이 전통이나 예외적으로 의원이 아닌 사람이 발사했던 경우가 있었다. 2000년에는 1부 리그로 승격한 축구팀 오사수나(Osasuna)의 감독이, 2001년에는 유러피안 컵에서 우승한 핸드볼팀 포틀란드 산 안토니오(Portland San Antonio)의 감독이 폭죽을 발사하는 영예를 얻었다.[25] 2002년 시장은 또 한 번 변화를 주었는데 그것은 바로 야당[26] 이후 서로 다른 정당이 매년 번갈아 가며 이 영예를 누리게 되었다.
이 행렬은 150년 이상 행해져 온 축제 기간 매일 오전 10시에 펼쳐지는 거인행렬이다. 1860년 시의회에서 타데오 아모레나(Tadeo Amorena)라는 장인에게 거인 네 상자를 주문해 열리기 시작한 거인 행렬은 첫 해 시민들의 큰 호응을 얻자 다음 해부터는 시청이 직접 주관해 실시해 오고 있는 유서 깊은 행사다.[27] 이 행렬에는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유럽 대륙을 상징하는 각 남녀 한 쌍의 거인과 오세아니아[28][27] 4미터 높이에 몸무게가 60킬로그램이나 나가는 이 거인들은 행사 기간 중 도시 여러 곳을 돌아다니다가 14일 2시 30분 버스 터미널에서 작별을 한다.[29] 이러한 거인들의 출현은 16세기말부터 시작되었는데 초창기에는 축제가 끝나면 나무틀과 종이로 된 거인들을 태우는 행사가 있었으나 그 후로는 다음 행사를 위해 보존하였다.[29] 거인 행렬이 시민들과 방문객들에게 인기가 높은 이유는 이 행사가 관객들이 그저 지켜만 보는 단순한 행렬이 아니라 킬리키스 인형들이 행진 도중에 솜방망이를 들고 시민이나 관광객들을 아무나 때림으로써 커다란 웃음을 유발하며 이를 통해 누구든지 구경꾼이 아닌 축제의 참가자가 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리아우-리아우는 팜플로나 시 의원들이 축제를 맞이해 성당에서 종교적 의식을 거행하고자 시청에서 성 로렌소 성당까지 행진을 하고 시민들은 시청 악대가 연주하는 아스트라인 왈츠[30] 많은 사람들이 좁은 거리를 리듬에 따라 움직여야하기 때문에 행진의 노래인 아스트라인 왈츠의 리듬은 아주 느리다.[31] 노래와 춤이 계속 반복되고 시청의 브라스 밴드(brass band, 금관악기들로 구성된 악단)인 라 팜플로네사(La Pamplonesa)가 연주한다.[31] 매우 많은 사람들이 행진을 방해하기 때문에 의원들이 1미터 나아가는데 45분 정도가 소요되며 1972년과 1980년에는 성당에 도착하지 못한 채 행사가 취소되기도 하였다.[30][31] 행렬의 마지막 순서로 산 로렌조 교회 앞에서 전통악기인 치추(txistu)와 백파이프[32] 이 행진은 1941년 왕당파였던 이그나시오 발레스테나(Ignacio Baleztena)가 자신의 정치적 반대 세력이 장악하고 있었던 시 당국에 항의하고자 아스트라인 왈츠를 크게 부르며 시장과 시 당국자들의 행렬에 끼어들었던 사건으로 인해 시작되었다.[30] 이 행진의 정치적인 성격 때문에 1990년대 리아우-리아우의 진행에 여러 문제가 있었다. 1991년에 리아우-리아우는 시의원들의 행진을 막은 사건 이후로 공식적인 프로그램에서 제외되었고 1996년을 포함한 여러 해에 이 행사를 되살리려는 운동이 있었지만 성공하지는 못하였다.[31] 1997년에 뻬냐 물티사라(Peña Mutilzarra)의 몇몇 회원들이 처음으로 의회와 정당의 허가 없이 행사를 되살리려는 시도를 했고 이 노력이 대중의 힘을 얻어 2002년에 연금 수급자 협회(Pensioner's Association)가 이 행사의 기획을 맡게 되었다.[31] 2006년에 시청의 브라스 밴드와 거인 행렬의 배우들이 함께 행진을 하기 시작하였으며 2012년에 행사가 공식적으로 되살아났지만 시청 광장에서 일어난 사고로 인해 다시 한 번 리아우-리아우는 무기한으로 중단되었다.[31] 이후 2013년 7월 6일 저녁 6시에 물티사라 뻬냐 팀이 리아우-리아우를 시청 광장에서 허가 없이 비공식적으로 진행하였다.[31] 현재는 정치적 성격이 많이 사라지고 단순히 보는 퍼레이드가 아닌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시민 참여 행사의 좋은 사례가 되었다.
산 페르민 축제에서 가장 많은 관심을 받는 행사는 소몰이이다. 소몰이는 축제 기간 중 매일 아침 8시마다 시작된다. 소몰이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행사의 출발지인 산토 도밍고(Santo Domingo) 언덕의 보호막이 쳐진 거리 안으로 입장하여 행사 시작되기 5분 전, 3분 전, 그리고 1분 전에 각각 “페르민 성인에게 청하오니 우리의 수호성인이시기에 우리에게 은총[33] 이후 성당의 종소리가 소몰이 경주의 시작을 예고하며 정각 8시 첫 번째 총성이 울리면서 소몰이가 시작된다.[33] 투우 경기에 사용될 여섯 마리의 소들을 가둔 우리의 문이 열리고 두 번째 총성이 울리면 이 소들은 거리로 내몰린다.[33] 로차피아 람파르트라고 하는 옛 요새 유적에서 투우장까지 875미터가량의 거리를 평균 600kg이나 나가는 난폭한 소 6마리가 평균 시속 25킬로미터로 참가자들과 함께 질주를 벌인다.[34][35] 아무런 사고가 없으면 3분도 채 걸리지 않으며 이 행사는 용기의 시험이자 이성 앞에서 자신의 남성다움을 증명해 보이는 것이다.[36] 소와 인간 사이의 경주는 숨이 막힐 듯한 긴장감을 유발하면서 참가자들과 구경꾼들을 흥분시켜 이에 매료되게 한다. 때로는 스릴 넘치는 이 행사에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한다.
축제 마지막 밤 시민들은 촛불을 가지고 광장으로 모여 시장의 축제 폐막 선포와 함께 일주일 동안의 축제는 끝나고 사람들은 다음 해에 있을 산 페르민 축제의 카운트다운[29] 이때 다함께 “Pobre de mí́, Pobre de mí́, que se han acabado las fiestas, de San Fermin”이라는 노래를 부르는데 이는 “산 페르민 축제가 끝났으니 아 가엾은 나여, 가엾은 나여”라는 뜻으로 축제가 끝나는 아쉬움을 표현하는 말이다.[37] 하지만 곧이어 “다음 축제까지 얼마 남지 않았네(Ya falta menos)”라는 노래를 함께 부르며 다음 해에 열릴 산 페르민 축제를 기약한다.[37]
산 페르민 축제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행사 중 소몰이는 상당한 위험이 따르는 행사로 실제로 여러 차례에 걸쳐 사고가 일어났다. 1924년부터 1997년 사이의 축제 기간 중 사망한 사람이 14명이고 200명 이상의 부상자가 생기기도 하였다.[38] 2002년 축제 기간에도 40여명이 소몰이를 하던 도중 부상을 당했고 그중 12명이 소의 뿔에 받히는 사고를 당하여 2명의 중상자가 발생하기도 하였다.[39] 2014년에는 23세의 노팅햄(Nottingham)에서 온 청년이 소몰이를 하던 중 가슴과 갈비뼈에 심각한 외상을 입었다.[40] 2015년에는 2명의 미국인이 뿔에 받혀 부상을 당하는 등 최소 13명이 부상을 입었다.[41] 팜플로나 시는 소몰이가 위험한 행사인 만큼 관광객들의 안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우선 안전을 위해 소몰이가 행해지는 구시가지 거리에 이중 보호벽을 설치해 소들이 거리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한다.[27] 또한 홈페이지에 소몰이에 직접 참가하는 사람들을 위한 안전 수칙을 정해 놓았다. 안전 수칙에는 질주 도중 넘어질 경우 절대 일어나지 말고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엎드려 있어야 한다는 구체적인 내용까지 담고 있다.[27] 그리고 소의 습성을 잘 아는 베테랑 목동[27] 이 목동들은 녹색 완장을 차서 일반인 참가자들과 쉽게 구분이 된다.[27] 시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만큼 최대한의 공권력[27]
견우직녀(牽牛織女)는
중국, 한국, 일본에 전해지는 전설이다. 문헌상 중국에서 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중국에서는 사대 민간전설로 여기기도 한다.[1] 한국에서는 견우직녀(牽牛織女)의 전설로, 중국은 우랑직녀(牛郎織女)의 이야기로 내용은 각 나라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는데, 여름의 별자리인 견우, 직녀와 관련이 있다. 한국의 칠월칠석과 일본의 타나바타(七夕) 등의 풍습에도 영향을 주었다.
소를 끌어 농사를 짓는 견우와 베를 짜 옷을 짓는 직녀가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만나지 못하다가 칠석에만 까마귀와 까치가 놓아 준 오작교 위에서 만난다는 이야기이다.[2]〈선녀와 나무꾼〉과 유사한 부분이 지적된다.[3]
(7월 7일 인데 양의 배당이 아니라 소의 배당으로 놓았다)
기원전 5세기 경에 성립된 중국의 가장 오래된 시집인 《시경》(詩經) 〈소아편〉(小雅) 〈소민지십〉(小旻之什)에 ‘대동’(大東)이라는 시에서 베짜는 직녀와 수레 끄는 견우, 그리고 은하수
跂彼織女, 終日七襄. 雖則七襄, 不成報章. 睆彼牽牛 ...
동진(東晉)의 갈홍(葛洪, 283 ~ 343)이 쓴 서경잡기
문헌상 짜임새 있는 이야기의 형태로 정착된 것은 한나라(漢代) 무렵으로 한대의 괴담을 기록한 책인 〈재해기
이와 비슷한 내용의 경극으로 《텐허파이》(天河配)가 있다. 내용은 목부인 견우가 물놀이 중이던 선녀인 직녀의 옷을 훔쳐 부부가 되지만, 직녀는 천계로 달아나고 만다. 견우는 직녀를 쫓아 천계까지 가지만, 직녀의 어머니인 서왕모에 의해 은하수를 건너지 못하고 만다는 것으로, 날개옷 설화
일본에서는 가장 오래된 시가집인 만엽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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