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손주와 고양이들
아내는 아침부터 분주하게 외출을 서두르고 있었다. 지금 회사에 다니는 외손주에게 가기 위해서다. 별나게 식성이 까다롭고 입이 짧은 샘이를 위해 마트에서 몇 가지 찬거리를 준비한 모양이다. 날씨가 30도를 넘고 있어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일이 힘들어 보여 자가용으로 함께 가기로 맘먹었다.
나이 여든을 넘고 보니 친구들도 거의 타계하거나 멀어지고 외출할 일도 적어 방안에 혼자 있는 것이 어쩐지 마음 내키지 않았다. 오랜만에 차를 몰고 큰길에 들어서니 주변 풍경은 이전보다 너무 많이 변해 있었다. 큰 길로 뒤엉켜 있어서 더 단순해지고 비좁아진 내 마음의 길을 비교해 보니 조금은 위축되어 긴장된 마음으로 운전대를 잡고 달렸다.
이전에는 간간이 빈터이던 공단이 지금은 빼꼭히 공장건물이 들이차고 길 고유번호가 높이 세워져 있어서 길에 익숙하지 않은 운전자에게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되돌아보니 30 여 년 전 샘이가 어렸을 때 다대포 모래사장 입구에서 새끼 게를 잡아오고 이 공단 빈터에서 들꽃을 꺾어주며 놀고 갔던 기억이 새롭다.
먼 훗날 교회 여 집사 두 세 명과 어울려 당뇨에 특별한 효험이 있다는 비단풀을 도로변과 공장 주변을 샅샅이 뒤져 채취했던 일이 새롭게 생각난다. 비단풀은 여러 나라에서 성인병 치료에 좋은 약초로 소문이 나 있었다. 약이 되는 풀과 나무이야기를 책으로 펴내어 베스트셀러가 되게 했던 약초전문가가 비행기를 몇 번이나 바꿔 타고 외국 오지에서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비단풀을 구하여 잔뜩 가져 왔는데 자기 집 에 들어서자 온 마당에 그 비단풀이 지천으로 깔려 있었다고 했다. 비단풀을 캐서 말리면 눈에 잘 안 보이는 적은 알맹이의 씨가 쏟아져 나온다. 그 씨를 빈터에 뿌려두면 아무 곳에서나 잘 자란다.
샘이 집 문을 열고 들어서자 발을 들여놓지 못하고 엉거주춤 서 있어야 했다. 세 마리의 고양이와 새끼 두 마리를 위해서 고양이 먹거리. 장난감. 놀이기구 그리고 여기저기 엉겨 붙었거나 날아다니는 있는 고양이 털...
이왕 왔으니 하는 수 없이 고양이의 발톱에 의해서 찢기고 올이 빠진 소파에 앉아서 들고 간 시문학(詩文學) 자료들을 읽고 있는 동안 아내는 청소하고 빨래와 잡동사니의 정리 정돈에 땀을 닦을 겨를이 없어 보였다.
이제 30대 중반에 직장생활을 하는 손주를 위하여 수시로 와서 지금 같이 돌보고 가는 일이 내 마음에는 늘 걸린다. 이런 도움이 스스로 가정을 꾸려가야 할 앞날에 방해가 될 것 같아서다.
샘이가 또래아이들의 꾐에 빠져 가출한 후에 겪어야 했던 파란만장한 지난 일을 돌아보면 이제 한 직장에 다니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다행이냐고 아내는 반문했다.
이제 그 모든 지난 일을 정리하고 살아가지만 그 동안 겪었던 사람들에 대한 배신과 실망으로 많이 외로움을 타는 모양이어서 고양이를 구해다가 온 정성으로 기르고 있었다. 잠깐 구석을 들여다보니 새끼 고양이 두 마리가 세상에서 가장 편하게 잠들어 있다가 어미가 찾아들어 온 몸을 핥아주자 잠이 깬 새끼들이 비실비실 온 방을 기어 다니는 모습이 참 앙증스러웠다.
야성(野性)을 물려받고 태어난 새끼들은 미끄러운 장판 거실이 많이 불편해서 어려운 걸음으로 뒤뚱거리고 있었다. 그런 일도 힘이 드는지 둥지에 돌아오니까 기다렸다는 듯이 어미는 새끼의 머리끝에서 발 끝 까지 온 몸을 핥아주고 두 발로 껴안고 다독이고 있었다. 그걸 보는 순가 여태까지의 미운마음이 살며시 사라지고 울컥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네 마리를 낳았다가 두 마리가 죽자 더욱 측은한 맘이 들어 그러는 것 같다고 아내는 해명하고 나섰다. 신음소리같이 소곤대며 은어를 나누는 광경을 보고 있을 수컷은 한 번도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힘든 모정에 전혀 도움을 줄 수 없는 아비는 부끄럽고 측은한 마음으로 웅크리고 있을 것이다.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인간의 생활공간 안으로 활동이 제한되어 있지만 그 삶에 동화되지 않은 절대적 본능이 그 똥그란 눈과 매서운 발톱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난 소름끼치도록 그 눈과 발톱이 무서웠다. 언제라도 풀려나면 그 본연의 야성을 회복할 것이다.
택배가 있다는 문자와 또 다른 급한 일의 전화가 있어서 서둘러 일어서야 하는 아내는 어쩐지 미안한 마음에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땀이 밴 얼굴을 수건으로 대충 훔친 뒤에 귀가 길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