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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묘수인주의 위기 경성 임안에는 엄청나게 큰 연꽃 늪이 있었다. 해마다 여름이 되면 연꽃의 그윽한 향기가 사람들을 취하게 하고 연꽃밭 사이로 오고가는 원근의 고깃배들로 그 풍경이 기가 막혔다. 이따끔 어부들의 노랫소리도 은은히 들려 오는 평화롭고 고요한 고장이었다. 묘수인주 묘대야가 탄 쪽배가 연꽃 늪을 아무리 저어 가도 철장(鐵掌)을 크게 그린 큰 깃대를 이물에 꽂았다는 철장방의 배를 찾을 수가 없었다. "철장방이 오지 않은 모양인데? 무슨 다른 일이 생긴 건가? 동생, 우리 돌아가는 게 어떤가?" 묘대야의 말에 미립도 그러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때였다. 쪽배 하나가 난데없이 나타나더니 눈 깜짝하는 사이에 그들 코앞까지 달려왔다. 배엔 두 사람이 타고 있었는데 한 사람은 노를 젓고 한 사람은 이물에 서서 이쪽을 향해 읍을 하고는 말을 건넸다. "댁이 대내오주 중의 묘씨 나으리십니까?" "그렇소. 내가 묘대요." 묘대야가 큰소리로 대답했다. "저희 방주께서 묘씨 나으리를 늪 서편으로 모셔 들이라는 분부가 계셨습니다. 어서 가시지요." 두 개의 쪽배는 꼬리를 물고 쏜살같이 달려 어느새 늪 가에 당도했다. 미립이 닻줄을 매려고 하자 묘대야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살아 돌아가지 못할 텐데 닻줄을 감아 둘 필요가 뭐 있겠냐는 태도였다. 미립도 그 뜻을 알고 한번. 히죽 웃고는 닻줄을 배 안에 집어 던지고 묘대야의 뒤를 따랐다. 둘은 길잡이의 안내를 받으며 아늑한 수림 속 돌길을 따라 여러 굽이를 돌고 돌아서야 어느 큰 장원에 이르렀다. "누구냐!" 문지기가 소리쳤다. "철장은 무적이다." 길잡이가 암호로 대답하니, 장원 대문이 쫙 열리며 사나이 열 몇이 뛰쳐나왔다. 묘대야는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이 미립을 돌아보며 웃어 보였다. "아우, 보아하니 이곳이 철장방 소굴인 모양인데 나를 따라 들어갔다간 생사를 가량하기 어려우니 아우는 대문 안에 발을 들여놓지 않는 게 좋겠어. 여기서 기다리게. 한 시간쯤 기다리다 내가 나오지 않으면 아우는 더 기다리지 말고 혼자서 돌아가게나." 미립은 그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묘대야를 따라 장원 안으로 들어갔다. 대문을 들어서니 백여 명이 무예를 조련할 수 있을 만큼 넓은 마당이 있었는데 마당 정면에는 대청이 있었다. 대청에는 30명이 넘는 사나이들이 좌우로 늘어서 있고 중간에 있는 큰 의자 위엔 기껏해야 서른 살쯤 돼 보이는 사나이 하나가 위엄을 부리며 날카로운 시선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낭하에는 활활 타는 불 위에 큰 가마를 걸어 놓았는데 그 가마 안에서는 기름이 펄펄 끓고 있었다. 대청에 앉아 있는 장한은 철장방 방주 구천인이었다. "그래, 그대가 묘대야인가?" 구천인이 엄하게 물었다. "그렇소." 묘대야가 대답했다. 구천인은 나이는 많지 않았으나 기색이 하도 엄격하여 일견 무척 겉늙어 보였다. 구천인이 냉랭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내가 철장방 방주 자리를 이어받은 후로 천하의 영웅들이 우리 철장방을 갈수록 공경하고 있다네. 그나저나 자네는 일찍이 우리 사숙한테 죄 지은 바가 있었지? 그걸 청산해 보자고 자네를 불렀네만, 어째 대내오주들이 모두 오지를 않았는가?" "나 개인의 일인데 우리 형제들이 모두 올 필요가 뭐 있겠소? 나도 철장방과의 여태까지 일을 이번에 마무리 지으러 왔소." 묘대야의 말에 구천인이 큰소리로 웃었다. "좋네, 좋아. 과연 대내오주의 맏이답군. 내 오늘 그럴 기회를 주지." 구천인은 어깨를 으쓱하며 일어서더니 뒷짐을 지고 가슴을 내밀며 묘대야를 내려다보았다. 확실히 무학 종사다운 기개가 엿보였다. "묘대, 자네가 사나이라면 어디 우리 철장방과 무공을 겨루어 보세. 만일 내 장(掌) 세 번을 못 견딘다면 자네는 저 기름 가마에 던져져 기름에 튀겨질 걸세." 그는 여기까지 말하고는 목을 젖히고 크게 웃어댔다. 한참 웃어대던 구천인은 갑자기 미립을 향해 물었다. "너는 또 누구지?" 미립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묘대야가 말했다. "새로 사귄 내 아우요. 당신네와는 무관한 사람이니 신경 쓸 것 없소. 내가 싸우다가 죽으면 그 소식을 우리 대내오주 아우들에게 전하려고 날 따라온 것뿐이니까." "아, 그거 좋은 생각이군." 구천인이 말했다. 여러 사람들의 날카로운 눈길이 묘대야에게 던져졌다. 구천인이 묘대야 앞으로 걸어왔다. 묘대야는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코웃음을 쳤다. "죽음이 두렵지 않나?" 구천인이 물었다. "구 방주, 듣자니 구 방주는 서역에서 사숙, 사조와 방주 자리를 다투어 이겨서 그 자리에 앉게 되었다더군. 물론 이것은 영광스러운 일일 수도 있겠지만, 사숙과 사조들을 서역에서 몽땅 죽여 버리기까지 했다던데 그게 사실이오?" 묘대야가 비양거렸다. "모두들 제 입을 가졌은즉 무슨 소리인들 못하겠나? 이 구천인을 죽이지 못해 날뛰는 놈들이 하는 중상과 모략에 난 신경 끊은지 오래야. 난 우리 철장방을 흥하게 하고 철장방의 원수들을 보는 족족 죽여 버리는 것이 이미 고인이 된 그분들에 대한 추모라고 생각하여 내 도리를 다할 뿐이지." 그러더니 구천인은 두 눈을 부릅뜨며 꽥 소리쳤다. "묘대야! 잔말 말고 내 철장이나 받아라!" 묘대야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당당히 앞으로 나서려 했다. 미립이 얼른 막아 섰다. "형님, 저 구천인의 별명이 철장수상표라는 걸 아시는지요? 철장공이 대단히 센 사람이지요. 주먹질이나 병장기술을 겨루면 몰라도 절대 구천인의 철장은 건드리지 마십시오. 경공도 겨루지 말고." 묘대야도 이때는 성이 날대로 나 있어서 미립의 그런 권고 따위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는 미립에게 눈을 흘기고는 구천인에게로 다가갔다. 둘은 마주서서 자세들을 낮추면서 기를 모았다. 그러다가 구천인이 먼저 한쪽 손바닥을 천천히 내밀었다. "묘대, 내 장풍에 지옥 구경 갈라, 조심해!" 그는 손바닥 하나를 마저 내밀었다. 묘대야는 구천인의 검지도 그렇다고 희지도 않은 아주 괴이한 색깔의 손바닥을 보고 은근히 불안해졌다. '저 철장엔 필시 극독이 있다. 장력을 겨루다가 자칫하여 중독이 되면 큰일나겠어. 무공도 겨루기 전에 구천인의 손바닥에 맞아 중독이 되어 쓰러진다면 그처럼 억울한 일이 또 어딨겠나?' 구천인은 묘대야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이 독수를 펼쳐 들고 천천히 내리쳤다. 묘대야는 머뭇거릴 경황이 아니었다. 그는 눈을 딱 감으며 하는 수 없이 구천인의 손바닥을 향해 장력을 내보냈다. 구천인의 장은 소리도 없고 힘도 얼마 들이지 않은 것 같았으나 묘대야의 장과 마주치자 엄청난 힘이 밀려왔다. 그 힘이 어찌나 센지 묘대야로서는 감당해 낼 수가 없었다. 묘대야는 자세를 낮추며 운기하여 새로운 행동을 취하려고 해 보았으나 오히려 비틀비틀 뒷걸음질을 치다가 미립에게 부딪쳐 안긴 채 몇 걸음 더 물러나다가 겨우 멈춰 섰다. 묘대야는 가슴속으로부터 뭔가 더운 것이 치밀어 오르는가 싶더니 그대로 토해 내고 말았다. 얼핏 보기에 구천인의 이 장법은 별스럽지 않은 듯하나 사실 대단히 독한 것이었다. 이 장법은 역도(力道)가 단계적으로 늘어나는 장법인데 출장이 절반에 이르면 역도가 배로 커지고 상대방의 손과 마주치는 순간에는 역도가 여섯 배로 늘어나는 것이다. 이 정묘로운 장법을 가리켜 '일파삼질(一波三迭)'이라고 하는데 더러 이 '일파삼질'을 쓰는 사람들이 있지만 구천인처럼 제대로 쓰는 이는 한 사람도 없었다. "형님, 아이고 형님, 이걸 어쩌나?" 미립이 소리쳤다. 이를 사려물고 있는 묘대야의 입귀에선 뻘건 피가 흘러내렸다. "이봐 묘대, 자네는 오직 황제 밥이나 해 주면 제격이야. 나하고 겨뤄 보려다간 죽는 길밖에 없다는 걸 몰라? 차라리 네 무공을 없애 버리고 다리를 분질러 내 밥이나 하는 주방장으로 만들어 버리는 게 나한테나 자네한테 모두 좋을 성싶은데, 어떤가?" 구천인이 너털웃음을 웃었다. 묘대야가 다가서며 천천히 말했다. "아직 두 번 남았소. 이제 두 번 다 내가 지면 그때 가선 나와 철장방 간의 은원을 어떤 식으로든 마무리 지으시오." 묘대야는 죽음을 각오하고 구천인과의 마지막 대결을 결심했다. 구천인은 크게 웃으며 묘대야에게 다가섰다. "난 쉽게 끝낼 생각은 없어. 내가 세 번 출장해서도 네 목숨이 얼마간 남아 있어야 너를 저 기름 가마에 집어 넣어 튀기지. 그래야만 직성이 풀릴 테니까." "묘대 형님! 저 철장방의 철장을 이기지 못하겠으면 맞서지 말고 피하래두요!" 미립이 안타깝게 소리쳤다. 묘대야가 구천인을 이기지 못할 바엔 그 장에 맞지 않도록 피하는 게 현명하다는 것이 미립의 생각이었다. 구천인은 빙긋 웃더니 또 한 장 내밀었다. 이번은 좀 전과 아주 다른 장법으로 손을 내미는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묘대야는 구천인이 공격하는 방향을 미처 가늠할 수가 없었다. 묘대야는 구천인 같은 고수들의 고명한 장법을 일찍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나름대로 손을 써서 구천인의 철장을 막아 보려 했으나 어느새 구천인의 철장이 어깨를 탁 내리쳤다. 묘대야는 종잇장처럼 떠밀려 맥없이 나동그라졌다. "형님!" 미립이 소리치며 달려와 묘대야를 부축해 일으켰다. 묘대야는 어깨를 상했음은 물론이고 입으로 피까지 토했다. 그는 구천인을 보며 말했다. "구 방주, 방주의 철장은 과연 절세무공이오. 탄복하오." 구천인이 빙글거렸다. "이봐 묘대! 이제 마지막 철장만 받아 낸다면 내 자네를 살려 주겠네. 그렇지 못하면 죽어도 원망 말라구." 미립은 안타까워 싸움을 말리고 싶었으나 그저 두 사람이 마지막까지 싸우는 것을 지켜 보고 있을 수밖에 별도리가 없었다. 구천인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묘대야에게 마지막 철장을 내밀었다. 곁에서 구경하던 철장방 무리들이 갈채를 보냈다. 구천인의 철장이 가슴팍에 다가오는 순간 묘대야는 한숨을 지으며 출장(出掌)하여 구천인의 철장을 막았다. 그들 둘은 모두 오른손을 썼는데 두 손바닥이 마주치자 이번엔 웬일인지 떨어지질 않았다. "이번엔 꼼짝없이 죽는 줄 알아라!" 구천인이 소리쳤다. 묘대야는 젖 먹던 힘까지 모두 짜내며 필사적으로 버렸다. 자기의 힘으론 구천인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나 그렇다고 항복할 수도 없었다. "네가 내 사숙을 죽였은즉 그 핏값을 받아 내야겠다." 구천인은 잔인하게 웃으며 팔에 한껏 힘을 주었다. 우지끈 소리가 나면서 묘대야의 견골이 부러지고 이마에선 식은땀이 쫙 흘렀다. '끝내 구천인의 손에 죽고야 마는구나…….' 묘대야는 속으로 탄식했다. 구천인의 손바닥에서는 여전히 거센 힘이 용솟음쳐 나오며 묘대야를 내리눌렀다. 묘대야는 그 힘을 견디지 못하여 정신이 가물가물해졌다. 이제 구천인이 조금만 더 힘을 주면 그대로 피를 토하며 죽을 것만 같았다. 이때였다. 뜻밖에도 구천인이 손을 떼며 말했다. "어떤가, 묘대! 이제는 졌지? 항복하는 거지?" "죽이려거든 어서 죽이시오. 내가 죽으면 철장방과의 은원도 끝이 날테니." 묘대야가 창백한 낮으로 간신히 말했다. 구천인이 소리내어 웃었다. "대내오주들한테도 이런 용기가 있을 줄은 몰랐는걸? 자네 뜻이 그렇다면 좋다. 여봐라!" 구천인의 부름에 장한들 몇이 달려오더니 묘대야를 붙잡았다. "묘대의 소원이라니 소원 성취를 시켜 줘라. 어서 기름 가마에 처넣어라!" "예!" 장한들은 얼른 묘대야를 이끌고 기름 가마로 향한다. '황궁에서 매일 기름을 만지며 살더니 종내는 이렇게 기름에 튀겨져 죽게 되는구나. 물항아리는 우물 옆에서 깨지고 장수는 전쟁터에서 죽는다더니 내가 그 짝이로구나.' 묘대야는 자신의 신세가 너무도 처량한 생각이 들어 고개를 푹 떨구었다. 한쪽에서 이를 지켜 보고 있던 미립이 애가 타서 소리쳤다. "구천인! 우리 형님을 죽이지 마시오!" "묘대는 내 원수다. 죽이든 살리든 그건 내 맘이야. 너도 죽고 싶지 않거든 입 다물고 있어!" 구천인은 다시 한 번 불호령을 했다. "뭘 꾸물대느냐! 어서 그 놈을 기름솥에 처넣지 않구!" 장한들은 서둘러 묘대야를 기름 가마에 던져 넣기 위해 번쩍 들어올렸다. 미립은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여긴 도대체 어디지?' 문득 잠에서 깨어난 미립은 믿기지 않는 듯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는 어느 집 침대에 누워 있었는데 놀랍게도 묘대야가 웃는 낯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형님,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여기가 저승은 아니겠지요?" 미립이 간신히 물었다. "저승은 무슨 저승? 여긴 임안일세. 이승의 삶도 아직 채 못 살았는데 저승 소리는 왜 하는가?" "전 도무지 어떻게 된 영문인지……." 그는 묘대야가 기름솥에 처넣어지는 순간 그대로 의식을 잃어 다음 일은 도통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내 차근차근 얘기해 주지." 묘대야가 미소를 띄우며 입을 열었다. "나를 기름 가마에 처넣으려고 번쩍 드는 순간 아우가 큰소리로 비명을 질렀지. 그런데 그 소리가 얼마나 날카롭던지 철장방 사람들이 모두 놀라 눈이 휘둥그래졌어. 그러자 철장방 방주 구천인이 동생 입을 막기 위해 급히 혈도를 눌러 그대로 혼수상태에 빠져 버린 거야. 그리고 나는 놈들이 놀라 가마 너머로 내던진 바람에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거고……." 미립은 묘대야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좀처럼 믿기질 않았다. 그는 잠자코 있다가 다시 물었다. "형님, 여기가 어디라고요?" "여기는 객점이야. 내가 아우를 배에 태워 여기까지 데려왔지." 묘대야는 크게 웃고는 말을 이었다. "아우, 아우가 날 좋아하는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난 아우가 정말 사랑스럽네. 철장방에 잡혀갔을 때도 아우는 목숨을 내걸고 나를 구해 주려고 하였은즉 이런 고분을 생사지고라고 하지 않겠나?" "형님은 황궁 대내오주의 우두머리시고 무예도 비범하며 그 몇 형제들과 친형제처럼 지내시잖습니까. 형님과 그 사람들 간의 자별한 사이는 저도 알고 있지요. 그런데 저와 형님의 사이도 그같은 사이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미립을 처음 만났을 때 묘대야가 거짓말을 한 탓으로 미립은 묘대야가 황궁 안의 일품 관리인 줄만 알았었다. 철장방 소굴에 가서야 그는 묘대야가 사실은 황궁 안 대내오주의 우두머리임을 알았다. 그러나 미립은 그것을 별로 개의치 않고 오로지 묘대야와 형제처럼 지내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한편 미립의 입에서 대내오주라는 말이 나오자 묘대야는 내심 민망한 생각이 들었다.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우, 그건 모르는 소리네. 그 형제들도 평소엔 그만하면 친하게들 지내지만 생사관두에 이르러야 그 본심들을 알 수 있지 않겠나? 나와 아우는 비록 만난 지는 얼마 안 되지만 생사를 같이할 수 있는 진짜 형제일세. 아우는 나를 따라 생사를 가량키 어려운 철장방 소굴에까지 자청해서 갔으니 그 정을 내 어찌 잊을 수가 있겠는가?" 미립은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그런 미립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묘대야가 불쑥 물었다. "아우, 나하고 형제 결의를 맺지 않겠나?" 미립은 그 말에 얼굴 가득 웃음을 떠올렸다. "형제 결의요? 좋습니다." 둘은 당장 간단히 예를 올렸다. 하나는 침대 위에서, 하나는 방바닥에서 각기 하늘과 땅을 향해 서약을 한 뒤 각각 세 번씩 맞절을 하였다. "형님, 이 아우는 이제부터 일생을 형님만 믿고 따르겠습니다." 결의를 맺고 나자 둘은 한결 더 가까워진 것만 같아 서로를 마주보며 흐뭇한 미소를 나누었다. 밤은 조용히 깊어 갔다. "아우, 오늘은 한 침대에서 같이 자 볼까? 서로 이야기도 하면서, 심심치 않게." 묘대야는 침대로 올라가 미립의 곁에 누우려고 했다. "안 돼요, 이러지 마십시오. 난 불이 켜 있거나 곁에 사람이 있으면 잠을 자지 못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그러니 잠잘 때만큼은 각 방을 썼으면 좋겠습니다." 미립이 급히 소리쳤다. 묘대야는 웃으며 말했다. "아우, 난 동생이 귀여워 그래. 정말 사랑스럽다니깐. 난 종래로 여인은 멀리하는 사람이지만 남자들은 좋아하거든. 우린 이제 형제지간이 아닌가? 우리가 형제가 아니고 부부라면 내가 나이가 많으니 남편이고 아우는 아내라 할 수 있지." 묘대야의 엉뚱한 소리에 미립은 놀라서 두 눈을 둥그렇게 뜨고 한참이나 묘대야를 쳐다보았다. "형님, 무슨 농담을 그렇게 하십니까?" "농담이라니? 내가 할 일이 없어 그런 농담을 할까?" 묘대야의 말엔 어쩐지 날이 선 듯했다. 미립은 묘대야의 소행에 역겨움을 느꼈다. '홍안루에 앉아 조용히 술 먹는 나에게 접근하여 술을 권하고 또 철장방의 소굴에서 여기까지 배에 태워 온 목적이 원래는 그런 짓을 하자는 것이었구나.' 미립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묘대 형님, 그게 무슨 말입니까? 형님도 남자고 나도 남자인데 어떻게 한 침대에 누워 그런 짓거리를 할 수 있단 말입니까?" 묘대야는 여전히 뻔뻔스럽게 웃으며 사설을 늘어놓았다. "동생은 뭘 몰라도 한참 몰라. 남자들끼리라고 그런 일이 없는 줄 아나? 전쟁터에 가면 자고로 여자 구경이라곤 하기 어려운 법인데, 어떻게 여자 생각을 참아내는가? 그래 그런 곳에선 인물 고운 남자를 골라 남자끼리라도 욕정을 달래곤 하지. 기실 생각해 보면 이상할 것도 없어. 이것도 사람이 사는 방식의 하나이니깐. 하물며 자네와 나는 형제 결의를 맺은 사이 아닌가? 말하자면 생사도 같이할 수 있거늘 함께 쾌락을 누리는 일이야 왜 같이 못해 보겠나?" 묘대야의 말에 미립은 소름이 끼쳐 당장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했으나 어찌 된 영문인지 옴쭉달싹할 수가 없었다. 의식이 없는 사이에 묘대야가 무슨 약을 먹였든가 아니면 혈도를 눌러 놓은 게 틀림없었다. "동생, 사람이 살면서 바라는 게 무엇이겠나? 즐겁게 사는 거지. 마음껏 쾌락을 누려보는 것이 제일이지. 함께 쾌락을 누려 보자는데 뭐가 나쁘다는 건가?" 묘대야는 미립의 곁에 바싹 다가앉으며 말했다. 그는 자기 얼굴을 미립의 뺨에 갖다 대었다. "동생, 난 정말 30여 년을 헛살았단 생각이 드네. 정말 동생같이 아름다운 사내는 처음이야. 어쩌면 피부가 이렇게 곱고 태깔이 선녀 같은가?" 그는 손으로 미립의 볼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나는 동생에게 완전히 반했네. 남자인 내 마음이 이런데 여자들은 오죽할까?" 미립은 옴쭉달싹 못한 채 굴욕감을 느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불을 끌까? 그게 좋겠군. 우리 둘이 어두운 데서 실컷 즐겨 보자구." 묘대야는 히히 웃으며 불을 끄고는 침대로 다시 돌아왔다. 그는 미립의 옷을 하나하나 벗기기 시작했다. 미립은 울컥 욕지기가 올라왔다. 묘대야가 이런 인간인 줄 알았더라면 차라리 철장방의 손에 죽도록 내버려두는 건데 그러지 못한 게 후회막급이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동생, 지금부터 내가 하는 짓을 불쾌하게 받아들이지 말고 편안하게 생각하게. 그리 나쁘진 않을 거야." 묘대야가 뜨거운 입김을 토해내며 소곤거렸다. 묘대야는 미립의 머리를 풀어 여자처럼 길게 늘어뜨렸다. "이러니 영락없는 여자로군. 정말 아름다워." 그는 웃으며 미립의 속옷을 마저 벗기기 시작했다. "아니?" 갑자기 그가 불에 데기라도 한 듯 뒤로 물러앉았다. 미립의 가슴에는 원래 비단천 같은 것이 두텁게 감겨 있었는데 그것을 끊어 내니 뜻밖에도 뭉클한 젖가슴이 만져졌던 것이다. 놀란 묘대야는 급히 불을 켰다. 백설같이 희고 풍만한 젖무덤과 붉고 선명한 젖꼭지가 몹시 황홀하게 보였다. "아니, 넌…… 넌…… 사내가 아닌 계집이었구나!" 묘대야가 격분하여 소리쳤다. "묘대 형님이 남자만 구하는 줄을 내가 알았어야죠?" 미립이 비웃었다. 마치 자기가 남자가 아닌 것이 한스럽다는 듯한 태도였다. 묘대야는 한동안 말을 못하다가 중얼거렸다. "천하에 어찌 이렇게 예쁘장한 남자가 있나 했더니, 과연…… 과연 넌……." 묘대야는 화가 나서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미립은 두 손으로 탄력 있는 젖가슴을 감싸 쥐고 똑바로 묘대야를 쏘아보았다. 보통 남자들 같으면 그와 같은 미녀의 나신을 눈앞에 두고 얼마나 기뻐하며 황홀해 하겠는가. 그러나 묘대야는 달랐다. 그는 여자에 대해선 아무런 흥미도 느끼지 않는 괴물이었다. "나를 속이다니. 도대체 무슨 꿍꿍이속이냐?" 묘대야가 쌀쌀하게 물었다. 미립은 잠자코 대답이 없었다. 묘대야는 한 여인에게 자신의 치부를 들켰다는 사실에 극심한 수치심을 느꼈다. "내가 남색을 좋아하는 걸 네가 알았으니 가만 놔둘 수 없다. 안됐지만 널 죽여 버리는 수밖에 없겠어." 묘대야는 잔인하게 칼끝으로 미립의 젖꼭지를 건드렸다. 정욕같은 것은 엿볼 수 없는 차가운 태도였다. 묘대야를 쳐다보던 미립이 갑자기 싱긋 웃었다. "왜 이래요? 방금 전만 해도 나하고 결의 형제를 맺은 사이가 아니던가요? 벌써 그걸 잊으신 건 아닐텐데?" 그 말에 묘대야는 수치심에 큰소리를 지르며 미립을 덮쳤다. 이때였다. 느닷없이 낮선 음성이 들려 왔다. "이봐, 묘대. 좀 잘 생각해 보고 손을 써도 늦지는 않을텐데." 묘대야는 흠칫 놀라 주위를 살폈으나 사람의 그림자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누구냐, 너는?" 묘대야가 외쳤다. 상대방이 비양거리듯 말했다. "어쨌든 좀 잘 생각해 보라구. 사람들이 하는 일은 창천이 굽어보고 있다는 걸 모르는가? 금방 그 입으로 뭐라고 했는가? 저 여자와 한날 한시에 죽겠다고 창천에 맹세했었지? 그런데 자네가 저 여자를 죽이면 자네는 누가 죽여 주겠나? 내가 나서는 수밖에 없지 않겠나?" "네가 날 죽인다구?" 묘대야가 코웃음을 쳤다. 휘장 뒤에서 목소리의 주인공이 천천히 걸어 나와 묘대야 앞에 턱 버텨 섰다. "내가 자넬 못 죽일 것 같은가?" 묘대야는 놀라서 눈이 둥그래졌다. 상대방은 대내오주의 두통거리인 홍칠이었던 것이다. 홍칠이 미립을 향해 말했다. "넌 어린 계집애가 어찌 겁도 없이 혼자서 그러구 다니느냐? 척 봐도 이 묘대야가 얼마나 안 좋은 사람인지 알 수 있을 텐데, 이런 사람을 따라다니며 제 손으로 제 무덤을 파고 있어?" 미립은 홍칠의 말에 와락 울음을 터뜨리더니 소리쳤다. "저리 가요, 저리 가! 당신이 개방의 홍칠인 줄 누가 모르는 줄 알아요? 난 묘대 손에 죽을지언정 당신의 구원은 싫으니 저리 가요. 당신의 구원은 싫다구요!" 그녀의 말에 홍칠과 묘대야는 동시에 놀랐다. '계집들이란 그 속을 알다가도 모르겠단 말이야? 내가 목숨을 구해 주겠다는데도 죽으면 죽었지 내 구원은 안 받겠다?' 홍칠은 도무지 이해가 안 됐다. 그러나 그는 곧 그녀가 알몸을 들켜 부끄러워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그는 얼른 젓가락 두 개를 꺼내 미립을 향해 던졌다. 젓가락들은 곧바로 미립의 혈도를 맞춰 막혔던 혈도를 풀어 주었다. "난 싫어, 싫단 말야! 차라리 죽는 게 낫지, 당신 손에 구해지는 건 싫다구!" 미립은 징징 울며 악을 썼다. 홍칠은 서둘러 그녀의 옷을 겨우 입혀 놓고는 밖으로 뛰어나갔다. 마주서게 된 홍칠과 묘대야는 한동안 서로를 노려보기만 했다. "이봐 묘대, 어서 손을 써 보지, 왜? 그렇지 않으면 내 손에 죽을걸." 홍칠의 말에 묘대야가 실소를 머금었다. "내가 먼저 손을 쓸 이유는 없지? 좀 전에 나는 철장방 방주 구천인과 싸웠는데 난 구천인의 상대도 못 되었지. 자네는 구천인보다 더 센 축인데 내가 먼저 손을 썼다간 도리어 웃음거리밖에 더 되겠나?" 홍칠은 묘대야의 기색을 살피다가 불쑥 말했다. "그럼 좋다, 묘대! 사람이 그리 독한 축은 못 되는 것 같군. 그럼 날 따라와!" 홍칠은 묘대야를 데리고 어느 한 수림으로 갔다. 둘이 마주서자 홍칠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봐, 묘대. 점잖게 보이는 녀석이 어찌 그런 후안무치한 짓을 한단 말인가? 부끄럽지도 않은가?" 묘대야는 말없이 홍칠을 쏘아보며 쓴웃음만 지었다. "이거 끼니를 걸렀더니 출출한데 우선 뭘 좀 요기를 하고 나서 뭘 하든 해야겠군." 홍칠은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한 그루 나무기둥 속에서 뭔가 한참 후벼 대더니 거무스름한 것을 한 덩어리 파내었다. 그는 그것을 묘대야에게 내보이며 자랑스레 물었다. "이것 봐. 이게 뭔지 아는가?" "벌레구먼." 묘대야는 첫눈에 그게 뭔지 알았다. 원래 임안에는 이런 식법(食法)이 있었다. 좋은 살코기를 말려 그것을 나무구멍 안에 넣어 두면 고기 냄새를 맡은 지네들이 사처에서 몰려와 그 고깃덩이를 뜯어 먹다가는 그 고깃덩이에 있는 만성 독약에 중독되어 꼼짝도 못하고 고깃덩이에 붙은 채 죽어 버린다. 홍칠이 꺼낸 이 고깃덩이에도 커다란 지네들이 새까맣게 죽은 채로 붙어 있었다. "이봐 묘대야, 네가 대내오주의 우두머리라면서? 이제부터 이 홍칠이의 재간을 좀 보겠나?" 홍칠은 고깃덩이는 옆에 놔두고 불부터 피웠다. 잠시 후 불길이 활활 타오르자 홍칠은 그 고깃덩이를 작은 칼로 얇게 썰었다. 그는 그 고기로 지네들을 한 마리 한 마리씩 감싸 스무 개 남짓 만들어 놓더니 그것을 들여다보다가 히죽 웃었다. "이봐 묘대야, 이렇게 해먹는 것이 보기도 좋고 맛있을 것 같지 않나?" 그는 이제 그것을 하나하나 불에 집어 넣었다. 잠시 후 고기들이 까맣게 구워져 그을음이 앉았다. 구수한 고기 냄새가 풍겼다. 묘대야는 자기도 모르게 군침을 꿀꺽 삼켰다. "묘대야는 명 요리사라면서도 이렇게 묘한 식법을 모르고 있으니 그러고도 명 요리사라 할 수 있겠나? 그러고도 뭐 대내오주니 뭐니 해?" "흥, 뭘 안다고 그러나? 요리에 관한 한 자넨 아직 코흘리개야." 홍칠은 심기가 뒤틀려 묘대야를 쏘아보았다. 그는 고기 하나를 집어 묘대야에게 던져 주며 말했다. "묘대, 그런 흰소리 말고 그거나 먹어 보라구. 맛이 어떤가? 그걸 맛보고 나면 이젠 죽어도 한이 없다는 생각이 들 거야." 고기를 받아 든 묘대야는 먹지는 않고 홍칠이가 그 고기를 하나 하나 먹어치우는 것만 지켜 보았다. "왜 안 먹지? 먹어 봐. 한 마리 먹고 나면 또 먹고 싶어 못 견딜걸?" 홍칠이 연신 입 속에 고기를 집어 넣으며 말했다. '맛이 있으면 얼마나 있겠다구. 그저 구수한 냄새뿐이겠지.' 묘대야는 심드렁한 생각을 갖고 마지못해 한 입 먹어 보았다. 순간 묘대야는 깜짝 놀랐다. 맛이 얼마나 구수한지 이건 천하 별미였다. "홍칠이, 이거 너무하는구만." 묘대야가 홍칠을 향해 말했다. "너무하다구? 너무하긴 뭘 너무해?" 홍칠이 입을 우물거리며 물었다. "사람을 죽일 땐 죽이더라도 배는 불려서 죽이는 게 인심 아닐까?" 그의 말에 홍칠이 폭소를 터뜨렸다. "이름이 뜨르르한 대내오주가 이게 무슨 말이야? 이 홍칠이 잔재간으로 변변찮은 거 하나 만든 걸 가지고. 난 자네 같은 사람은 그런 건 거들떠보지도 않을 줄 알았더니만 그렇게 군침을 꿀떡꿀떡 삼키다니." "이봐, 어차피 죽은 목숨 배불리 실컷 먹고나 죽게 하게. 날 주린 귀신을 만들 작정인가?" "자네가 보기엔 이걸 장만하기가 그리 간단한 것 같은가? 이걸 장만하려면 먼저 큰 지네들이 많이 있는 곳을 찾아야 하네. 그런데 더욱 어려운 건 아주 상등의 고기를 구해 그걸 음랭한 곳에 놔두어 지네들이 먹고 취하여 죽게 만드는 거지. 여러 날 걸려야 취하여 죽는데 이렇게 하려면 자넨 상상도 할 수 없는 여러 가지 노력과 재간이 있어야 해. 이렇게 힘들여 만든 것을 배가 부르도록 실컷 먹게 해 달라구? 사람이 염치가 있어야지. 몇 조각 맛보게 해 준 것만도 고 마운 줄 알라구. 황궁 대내오주가 별미는 불가다용(不可多用)이란 말도 모르나?" "이봐 홍칠이, 그건 모르는 말이야. 우리 황궁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런 말엔 개의치 않아. 맛있는 거면 실컷 먹어. 먹기 싫을 때까지 실컷 먹어야 직성이 풀리거든." "거 참, 나 이 거렁뱅이는 그런 복이 없으니 아쉬운데." 지네를 다 먹고 나서 홍칠이 다시 입을 열었다. "묘대야, 이제 죽을 차례다. 또 무슨 할말이 있느냐?" "죽이려면 어서 죽이기나 하지, 시끄럽게 뭘 자꾸 묻나?" "그럼 좋아. 죽이겠어, 네가 요리사질이나 확실히 하려 했으면 이런 일이 없지. 사실 난 널 죽이지 않을 수도 있어. 날 따라 도처로 다니면서 맛있는 음식만 대접하여 즐겁게만 해 주겠다면 죽이지 않을 수도 있다 이거야." 묘대야는 차가운 웃음을 흘리며 말이 없었다. "이봐, 묘대야. 내 일생에 가장 중히 여기는 사람이 누군지 알아? 요리사들이지. 다른 일은 다 할 수 있어도 맛있는 음식 만드는 재주는 누구한테나 다 있는 건 아니거든. 어떤 명요리는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밖에 할 줄 모르는데 그 비결은 그 사람만이 알고 있지. 어쨌든 넌 네 잘못으로 죽는 것이니 이 홍칠일 원망할 건 없어." 홍칠은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묘대야의 목을 겨냥하여 손을 치켜 들었다. "잠깐!" 누군가가 느닷없이 소리쳤다. 홍칠은 주춤 놀라 고개를 들었다. 앞뒤에서 웬 사내들이 두 사람씩 짝을 지어 튀어나왔는데 다름아닌 대내오주 네 사람이었다. 그들은 홍칠을 에워싸고 무섭게 노려보았다. "홍칠이, 뭣 때문에 우리 맏형을 죽이려는 거지?" 우사야가 물었다. 홍칠은 신이 나서 대답했다. "너희들 참 잘 왔다. 맏형이 저승길을 가는데 배웅하러 왔나 부지?" "홍칠이, 자네의 인품을 우리 대내오주가 모르는 바 아닌데 우리 맏형은 왜 죽이려는 건가? 이래도 되는 건가?" 허삼야가 따져 물었다. "그래 너희들은 묘대야가 어떤 더러운 짓을 했는지 아직 모른단 말이지? 웬 처녀애를 욕보이고 있었어. 이런 짓거리를 하는 건 죽여 마땅하지." 대내오주 넷은 하나같이 놀랐다. "홍칠이, 그게 사실인가? 뭔가 잘못 보고 그러는 거 아냐? 다른 짓을 했다면 몰라도 계집을 건드렸다는 말은 정말 믿을 수가 없군. 혹시 거짓말로……." 허삼야가 느릿느릿 말하자 홍칠이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내가 이 두 눈으로 분명히 보았는데 무슨 소리야?" "이봐 홍칠이, 솔직히 말하지. 우리 맏형은 사실 계집애는 싫어하고 사내…… 사내를 좋아하는 성미야." 홍칠은 그의 말에 급기야 깨달은 바가 있었다. 그는 잠시 말이 없다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 "어쨌든 간에 묘대가 계집애를 능욕하려는 걸 내 눈으로 똑똑히 본 이상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너희들은 잔말 말고 비켜서서 구경이나 해!" 대내오주 넷은 주춤거렸다. 맏형 묘대야가 홍칠의 손에 있는 지금 그들이 덤벼들려 하면 홍칠은 선손을 써서 묘대야부터 죽일 것이었다. "묘대, 너의 형제들이 이렇게 모두 와서 네가 저승길 가는 것을 배웅해 주니 행복한 줄 알아라. 저승에도 어쩌면 너를 요리사로 청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저승 사람들도 밥이나 요리를 먹고 사는지 모르겠지만 말야." 대내오주 넷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잠자코 홍칠을 지켜 보았다. "이봐 홍칠이, 우리 형제들이 황제한테 대단한 신임을 받고 있다는 걸 알고 있겠지? 자네가 우리 맏형만 살려 주면 황제에게 품하여 자네로 하여금 한평생 고관후록을 누리게 해 주겠네. 언제든 황제의 심기가 좋을 때 우리가 슬쩍 한마디만 진언하면 자네는 당장 큰 벼슬을 할 수 있단 말이네." 과이야가 홍칠을 구슬렸다. 홍칠은 묘대야의 정수리를 노려보았다. 그 바람에 기겁을 한 묘대야가 소리쳤다. "홍칠이, 날 보지 말고 우리 동생들 말이나 들어!" "난 그간 벼슬 같은 건 추오도 관심 없어!" "벼슬이 싫다면 홍칠이, 우리 형제들이 돈을 주지. 자네가 평생동안 쓰고도 남을 많은 돈을 주겠어. 그래도 안 되겠는가?" 허삼야의 말에 홍칠이 껄껄 웃었다. "거랭뱅이에게 무슨 돈이 필요해? 돈을 가지면 이미 거렁뱅이라고 할 수가 없지." 이번엔 백수십권 우사야가 말했다. "그렇다면 먼저 우리 넷과 싸우는 게 어떤가? 우리 넷이 지면 우리는 맏형을 내놓고 물러가기로 하고, 자네가 지면 자네가 우리 맏형을 놓아주기로 하세." "아니, 내가 더운 밥 먹고 무슨 할 짓이 없어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하겠나? 너희들과 내가 왜 싸우지? 난 너희들 맏형만 죽이려는 거다. 너희들 맏형 묘대가 못된 짓을 하려다가 나한테 걸려들었기에 죽이려는 거야. 죽이지 않고 살려 두었다간 내가 염라대왕한테 혼날 것 같아서 말야." 대내오주 넷은 속이 탔다. 이런 상황에선 도대체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홍칠이, 자네는 도대체 뭘 바라는가? 바라는 게 있으면 솔직히 말해 보게." 일지칭 평오야가 답답한 듯 소리쳤다. "난 오직 묘대를 죽이고 싶을 뿐 다른 건 바라지 않아.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다구!" 이때였다. 일지칭 평오야가 갑자기 소리쳤다. "맞았어! 좋은 생각이 있다! 좋은 생각이 있어!" "좋은 생각이라니, 무슨 소리냐?" 홍칠이 의아해서 묻자 평오야가 큰소리로 대답했다. "우리 형제들이 자네 끼니를 챙겨 주면 어떻겠나? 우리가 자네를 따라다니면서 매끼 맛있는 음식을 30일 동안 골고루 해 바칠 테니, 그런 다음 우리 맏형을 놓아주는 것이 어떤가?" "그거 진심으로 하는 소린가?" 홍칠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천천히 물었다. 네 사람은 일제히 머리를 끄덕였다. 홍칠에게 덜미를 잡힌 채 묘대야도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홍칠이, 우리 형제들 다섯은 서로 자기 재주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제각기 자부하고 있지. 그런데 우리 형제들이 자네를 따라다니게 되면 자네는 우리 형제들 중 누구의 솜씨가 더 출중한지 가려 낼 수 있을 거네." 홍칠은 그 말에 마음이 동했다. "그럼 좋다, 좋아. 너희들의 소원이 정 그렇다면 내 한 번 소원 성취를 시켜 주지. 그러나 무슨 딴 수작을 부리려다간 큰 변이 날 줄 알아라. 조금이라도 그런 기미가 보이면 묘대야부터 단매에 때려죽일 테니까." 홍칠이 으름장을 놓자 다섯은 허리를 굽신거리며 다짐했다.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걸세." 다섯은 모여앉아 홍칠과 앞으로의 일을 의논했다. "홍칠이, 천하의 별미들을 만들려면 천하를 편렵해야 되는 법일세. 그러니 우리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각 지방마다 제일 이름난 요리를 만들어 대접해 볼 생각인데, 어떤가?" 홍칠이 대꾸했다. "좋아. 자네들 약속대로 꼬박 한 달 동안 내게 순종하며 나를 즐겁게만 해 주면 나도 반드시 너를 놓아주겠다. 그리고 그런 더러운 일을 다시 하지 않으면 다시는 너를 찾지 않겠다. 어떤가?" 그는 쥐고 있던 묘대야의 목덜미를 놓아주고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명심하도록 해. 묘대는 이제 나로 인해 중독된 상태니 만일 너희들이 허튼 수작을 했다간 묘대는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는 걸 잊지 말아라."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거래두 그러네." 허삼야와 과이야가 웃으며 대답했다. 대내오주 다섯은 한 사람이 한끼씩 번을 돌며 홍칠의 식사를 책임지기로 합의했다. 홍칠이 흐뭇한 표정으로 말했다. "대내 황궁의 명 요리사들은 모두들 세상에 없는 희귀한 재주들을 갖고 있다던데, 내 오늘부터 황제 노릇을 한번 해 보는 거야. 천하에 이름있는 대내오주의 요리를 먹게 되었으니 황제나 다름없지 뭔가?" "황제도 먹고 싶은 걸 다 먹지는 못하는 법이네." 우사야가 대꾸했다. 홍칠은 적이 놀라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황제가 먹고 싶다는데 자네들이 거역하는 경우도 있나?" "황제라고 별수 있나? 먹고 싶어도 우리가 해 주지 않으면 못 먹는 거지." 묘대야가 냉소적으로 말했다. 홍칠은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제가 먹고 싶어도 대내오주가 이런 구실 저런 구실을 가져다 붙여 만들어 주지 않으면 별수없는 일 아닌가. "그렇다면 내가 먹고 싶다고 해도 자네들이 이 구실 저 구실 핑계를 대며 안 해 줄 수도 있겠구만?" 홍칠의 말에 묘대야가 엄숙하게 말했다. "자네에게 우리 대내오주의 목숨이 달린 판국에 감히 우리 형제들이 그럴 수가 있겠나?" 첫 요리 담당은 천도만과 과이야였다. 그가 홍칠 앞에 다가서며 말했다. "홍칠이, 난 자네에게 다섯 가지 요리를 선 보일까 하는데, 두부요리, 버들잎요리, 말밥요리, 쑥요리, 나뭇가지요리 등일세." "좋아, 좋아. 자네 생각대로 어서 해 보게." 여섯은 임안 시내의 한 큰 주루에 이르렀다. '일호춘(一湖春)'이라고 하는 아주 호화로운 곳으로 누각으로 오르는 층계에까지 융단이 깔려 있었는데, 그 위를 걸으면 푹신푹신한 게 기분이 좋았다. 여섯이 누각에 오르니 심부름꾼이 달려 나오며 인사를 했다. "나으리들께선 무엇을 드시려는지요?" 방금까지만 해도 홍칠에게 잔뜩 기가 죽어 있던 묘대야는 마치 황제라도 된 듯 잔뜩 폼을 잡으며 소리쳤다. "당장 주인을 불러오거라." 주루 주인이 당장 달려 나왔다. "소인을 부르셨습니까?" "오냐, 이 주루에 무슨 좋은 요리들이 있는지 어디 아뢰어 봐라." "무슨 요리든 나으리께서 분부만 하십시오. 우리 주루의 요리사는 임안 바닥에서 워낙 이름난 사람으로 그 솜씨를 흉내낼 자가 이 근처엔 아무도 없을 정도지요." "그래?" 묘대야는 덤덤히 반문했다. 그러자 과이야가 입을 열었다. "난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요리를 원하니 자네가 직접 가 요리사에게 전하게. 알겠지?" 주루 주인은 오늘 참 별스러운 사람들을 다 본다고 생각하면서 공손히 대답했다. "예, 그러지요. 무엇이든 분부만 하십시오." "내가 시키는 요리는 실은 아주 평범한 것이야. 두부요리 하나, 버들잎요리 하나, 말밥요리 하나, 쑥요리 하나, 그리고 나뭇가지 요리 하나." 과이야의 말에 주점 주인은 속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들이 우리 주루에 무슨 트집을 걸어 싸우자고 온 건가? 나뭇가지로 요리하는 법이 세상 천지에 어디 있는가? 쑥요리 같은 건 몰라도 버들잎으로 어떻게 요리를 만드는가? 버들잎도 먹는 건가?' 주루 주인은 의아해 하면서 떠듬거렸다. "그런…… 그런 것으로 어떻게 요……요리를 만듭니까? 만들어도 먹……먹을 수가……." "왜 못 만들어? 그 따위 걱정 말고 어서 가 전하기나 해. 만약 그런 것도 못한다면 내가 이 누각에 불을 싸지를 줄 알아!" 과이야가 으름장을 놓았다. 주루 주인은 이 여섯을 잘못 건드렸다간 큰 변이 나겠다 싶어 냉큼 주방으로 달려갔다. 한참이 지나서야 요리사를 데리고 되돌아온 주루 주인은 여섯 사람을 보고 울상이 되어 말했다. "이거 손님들께 죄송해서 어쩌지요? 저희 요리사 말이 그런 요……요리는 정말 못……못하겠다는데요?" "그래? 정말 할 줄 모른단 말이지?" 과이야가 요리사를 향해 물었다. 가뜩이나 심기가 좋지 않은 상태로 나온 요리사는 자기를 업신여기는 것 같은 과이야의 태도에 그만 성이 나서 소리쳤다. "할 줄 모르긴 왜 할 줄 모르겠소! 기름에 지지고 볶으면 되겠지. 그렇지만 버들잎으로 요리한다는 말은 듣다 처음이오. 그리고 세상 천지에 나뭇가지를 먹는 사람이 어디 있소? 이건 순전히 우리 주루에 와 생트집을 잡자는 게 아니고 뭡니까? 도대체 그런 걸 요리로 만드는 사람이 어디 있냔 말이오?" "요리로 만들어 내면 어쩔 셈이냐?" 과이야가 요리사에게 얼굴을 들이대며 물었다. "먹을 수 있는 요리로 만들어만 내시오. 그럼 난 나뭇가지를 그냥 씹어먹겠소. 그런데 만일 손님이 그런 요리를 못 만들어 낼 경우엔 어쩔 거요?" 요리사는 화가 나서 부들부들 떨기까지 했다. "내가 그걸 요리로 못 만들면 자네가 어떻게든 해도 좋다." 과이야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좋소. 만일 만들어 내지 못하면 큰 곤욕을 치를 줄로 아시오." 요리사가 야멸차게 말했다. 두 사람이 옥신각신하는 동안 구경꾼들이 몰려들었다. "여기들 있으시오. 내 주방엘 갔다 오겠소." 과이야는 자신 있는 걸음걸이로 요리사를 따라 주방으로 향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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